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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정 |
상세일정 |
비고 | |
10.10 |
09:00 ~ 09:30 |
접수, 참가확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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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30 ~ 10:30 |
월봉서원으로 이동 |
차량 | |
10:30 ~ 11:10 |
월봉서원 |
설명 및 기념촬영 | |
11:10 ~ 11:30 |
용진정사입구이동 |
차량 | |
11:30 ~ 12:00 |
용진정사로 이동 |
도보이동 | |
12:00 ~ 12:50 |
용진정사 |
점심 및 관련설명 | |
12:50 ~ 13:20 |
용진정사입구로이동 |
도보이동 | |
13:20 ~ 13:50 |
만취정으로 이동 |
차량 | |
13:50 ~ 14:20 |
만취정, 동호사 |
설명, 기념촬영 | |
14:20 ~ 15:20 |
이동, 학교도착 |
차량 |
○ 학술과 정치가 일체가 되는 나라를 위하여, 기대승의 월봉서원
김인후가 세상을 떠나자, 기대승은 ‘우리 도가 불행하여 선생께서 갑자기 세상을 버리시니 무릇 후학으로 어느 누가 마음 상하고 슬프지 아니하오리까?’라고 하면서 통곡하였다. 퇴계 이황에게 보낸 편지에 적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명종 13(1558) 가을 기대승이 문과에 막 급제하고 이황은 마침 서울에 올라와 있을 때였다. 이때 이황의 나이 58세 기대승 30세였다. 그런데 바로 전에 기대승은 고양의 선영에 갔을 때 그곳에 살던 정지운(鄭之運)을 만났을 때, 그가 지은 「천명도」에서 ‘측은 수오 사양의 마음인 사단(四端)은 리가 발한 것이고 희노애락구오욕(喜怒哀樂懼惡慾)이라고 하는 칠정(七情)은 기의 발현이다 즉 四端理之發 七情氣之發’이라는 구절을 보았다.
기대승의 생각은 달랐다. 「사단칠정설」에서 ‘천명이 부여한 본성이 온전한 선으로 발현한 정(情)이 사단이며 경우에 따라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 있는 정이 칠정이다’라고 정의하였다. 그리고 이황에게 편지를 올렸다. 그리하여 우리나라 학술사에서 불후의 논쟁이라고 할 수 있는 사단칠정논변이 시작되었다. 이후 수년 계속되었다.
이에 따라 이황은 기대승의 논리에 수긍하여 ‘사단은 리가 발하여 기가 그것에 따르는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하여 리가 그것에 타는 것이다[四端理發而氣隨之 七情氣發而理乘之]’라고 수정하였다. 이른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정립하고 기대승도 ‘정의 발현이란 혹 리가 움직이고 기가 갖추어 지는 것이거나 혹은 기가 감응하니 리가 타고 오르는 것이다[情之發也 或理動而氣俱 或氣感而理乘]’라고 하였다. ‘이기호발설’에 다가선 ‘이기공발설(共發說)’이었다.
두 사람의 편지는 두 사람만의 것이 아니었다. 많은 학자들이 오고가는 편지를 전달하며 베껴보고 돌려보았다. ‘두 사람의 견해는 무엇이 같으며 무엇이 다른가, 그리고 왜 다른가’를 토론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우주와 자연 그리고 인간을 바라보는 인식의 틀이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두 사람의 편지왕복은 학술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었다. 왜 천리와 인욕, 리와 기, 사단과 칠정을 말하는가? 왜 인간은 어질고 바르며 가지런하며 밝은 본래의 본성을 잃게 되는가? 이런 문답을 주고받으면서 ‘세상의 어둠을 벗어나기 위한 인간의 품성과 의지가 어떠하여야 하는가’를 드러냈고, 현실을 넘어선 이상의 삶, 정치를 넘어선 학문의 길을 넌지시 보여준 것이다. 어느덧 많은 사림은 세상을 바르게 하는 기본이 어디에 있으며 우리의 공부는 어떠하여야 하는가를 함께 고민하면서 새로운 시대는 온다는 희망을 서로 나누었던 것이다. 이렇듯 이황과 기대승의 편지는 시세를 비관하며 권신의 전횡에 숨이 막혔던 사림에게 ‘학술과 공론의 장’을 제공하고 있었다. 그래서 감히 말할 수 있다. 두 사람의 편지는 ‘학문의 힘이 새 정치에 투영되는 바른 시대가 온다는 희망의 공동 선언이었다!’
이렇듯 기대승이 당대 학자와 거침없는 논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황(李滉)의 넓고 깊은 물이라는 뜻의 황이라는 이름에 걸 맞는 이황의 인품도 큰 몫을 하지만, 기대승이 학문수준에서 당대 최고 수준이었다는 사실이다.
기대승은 이미 이황의 주자의 편지글을 묶은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이룩한 1556년 바로 다음 해인 1557년 약관 31세에 주자의 우주론․ 심성론 등만이 아니라 교화와 구휼을 중심으로 한 경세론(經世論)까지 아우르는 가히 ‘요약본(要約本)『주자대전』’이라고 할 수 있는 『주자문록』을 편찬하였던 것이다.
기대승은 결코 학술을 학술 영역에 한정하지 않았다. 현실정치에 적용하고자 하였으며, 이를 방해하는 권신 혹은 원로들과도 서슴없이 대결하였다.
명종의 외삼촌 윤원형에 맞선 명종의 중전 인순왕후의 외삼촌으로 외척의 한 축이었던 이량(李樑)이 기대승을 ‘신진의 영수’로 몰아 탄핵한 데에는 기대승이 사림사회의 소통과 결속을 선도하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황과 조식까지 표적으로 삼아 사림계를 분쇄하겠다는 음모가 깔려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이량의 몰락이었다. 1563년이었다.
기대승은 선조 즉위 후 사림탄압의 어두운 과거 청산을 주장하면서 원로중신과 정면에서 대결하였다. 이른바 구세력과의 투쟁을 전면에서 이끌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사림이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녕 자신은 교육진흥과 인재양성에 일의적 가치를 내세우는 원칙론 근본론을 지나치게 주장하면서 서정쇄신과 제도개혁을 추진하는 변통론(變通論)․경장론(更張論)을 신진사람과 갈등을 빚고 말았다. 기대승은 아는 것을 숨기지 못하고 모르는 것을 감추지 못하는 어쩔 수 없는 천생 학자였던 것이다. 그러나 학자의 꿈도 이루지 못하였다. 너무 세상을 빨리 떠났던 것이다. 1572년 11월 46살의 나이였다.
기대승은 황룡강을 따라 호남선 철길을 타고 내려오다 임곡역이 나오기 전 너부실, 광곡(廣谷)마을 월봉서원에 모셔져 있다. 그리고 월봉서원 뒷산에 묘소가 있다. 아스라하게 넓어 시원하지만 뒤가 막힌 듯해서 어쩐지 아쉽다.
○ 後石 吳駿善의 사상과 만년 강학공간, 용진정사
안동교 (조선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1. 생애
후석 오준선(1851-1931)은 조선조 철종․고종․순종과 일제강점기 시대를 살다간 호남의 저명한 도학자이다. 철종이 바야흐로 친정을 시작한 1851년 12월 6일, 전남 광산군 도림리에서 나주오씨 오하규(吳夏圭)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몸가짐이 무거웠던 그는 이미 8세에 할아버지의 양례(襄禮: 장례)를 당하여 애도사를 읽을 만큼 재주가 출중하였다고 한다. 그는 처음에는 임리재(臨履齋) 오태규(吳泰圭)에게서 사서(四書)․심경(心經)․근사록(近思錄) 등을 수업 받았으나, 18세 되던 해에 당시 장성 땅에 은거하고 있던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을 배알하고 스승으로 모셨다. 스승으로부터 기대를 한 몸에 받은 후석은 이때부터 더욱 분발하여 경전과 예법의 뜻을 탐구하여 나갔다.
후석은 학문적 활동범위를 넓히기 위해 24세에는 당시 기호학파의 거유였던 전재(全齋) 임헌회(任憲晦)와 입재(立齋) 송근수(宋近洙)를 찾아가 배알하였는데, 전재는 “노력하여 마음의 밝은 덕을 숭상하라, 이것이 늙은이의 희망이네[努力崇明德 皓首以爲期]”라는 글을 써 주며 격려했다. 그는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과 협의하여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으로서 호남인의 기개를 드높였던 건재(健齋) 김천일(金千鎰)의 문집을 간행하여 절의정신을 흠모하는 입장을 드러내기도 했다.
동문(同門) 고광선(高光善)이 지은 후석의 「행장(行狀)」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 한 토막이 실려 있다. “후석의 나이 44세에 동학도들이 창궐하여 여러 고을을 함락하고 관리를 죽이는 변란을 일으켰다. 호남 전 지역이 거기에 휩쓸렸으나, 후석은 향약(鄕約)을 설치하여 순응과 거역, 사특함과 올바름은 무엇인가라는 가치판단을 마을 사람에 일깨움으로서 ‘표류하는 배에 북극성 같은 역할[惑舟斗極]’을 담당했다. 또 그는 주목(州牧) 민종렬(閔種烈)이 성을 사수할 때, 엽전 50꾸러미를 군비에 보태 쓰게 하는 등 다방면으로 도우면서도 난이 평정된 후에는 ‘주동자는 근절시키기 위해 섬멸해야 하나 어리석은 백성은 귀화시킴이 마땅하다’고 진언하였다.” 이는 전통적인 왕조질서를 부정하려는 주동세력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대처하면서도, 시류에 편승하여 변란에 가담한 우민(愚民)들은 잘 귀화시켜 생활에 전념케 하려 한 것이었다.
이듬해에는 을미사변이 발생하여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고종은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하였으며 이어 단발령이 내려졌다. 이 때 대부분의 유학자가 상소를 올려 단발령의 폐기를 주장하거나 화를 피해 은둔한 것과는 달리, 후석은 또 다시 향약을 설치하여 남전여씨(藍田呂氏)의 향약과 율곡(栗谷)의 규약에 따라 풍속을 진작시키고[振風俗], 선비의 기풍을 바르게[正士習] 함으로써 유교적 도덕을 선양하고 향리를 교화 선도하는 데 힘을 쏟았다. 50세(1900)되던 해에는 연재 송병선과 면암 최익현을 방문해 학문과 의리를 강론하여 인정을 받았다.
스승에 대한 후석의 심복은 대단히 깊었던 것 같다. 18세의 젊은 나이로 71세의 노스승을 찾아 학문을 연마하여 ‘긴 잠에서 깨어난 듯한[大寐得醒]’ 느낌을 받았던 후석은 스승의 제사 날에 참석함은 물론, 제전(祭田)과 묘비를 세우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스승의 성리학설이 율곡과 다르다고 비판을 당할 때에도 “후현(後賢)이 전현(前賢)의 학설에 대해 의심이 생기면 변증하여 밝힐 수 있다”는 점을 내세워 적극 옹호하였다.
61세에 은사금(恩賜金)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삼거리 헌병소에 10여일, 장성분대에 20여일 남짓 구금되었으나,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의연하게 받을 수 없는 의리를 설명하는 후석의 기개에 헌병도 감복하여 석방하였다. 이 후 후석은 입산하기로 결심하여 용진산(聳珍山) 속에 정사(精舍)를 짓고 ‘도를 부여안고 산으로 들어가 후생을 가르치면서 스스로 깨끗이 지조를 지킨다[抱道自靖]’는 의리를 몸소 실천하면서 강학에 힘쓰다가 1931년 6월 21일, “나의 명정에다 조선유민(朝鮮遺民)이라고 쓰라”는 유언을 남긴 채 숨을 거두었다.
2. 성리학설
후석의 성리학설에서 독창적인 이론을 찾아보기란 그리 쉽지 않은 일이다. 그만큼 후석은 성리학설의 번쇄한 분석보다 일상적 도리의 실천을 중시했던 학자로 파악해야 한다. 25권에 이르는 후석유고(後石遺稿) 가운데에서 성리학설을 언급한 부분이 편지․경의문해(經義問解)․증설(贈說) 등 몇 편의 저술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이를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이를 통해 후석의 성리학설을 구성하려는 시도는 결국 단편적인 서술로 끝날 수밖에 없다.
조선조 말의 성리학 흐름은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 같은 개념분석의 정밀화를 추구하기보다는 구체적 행동원리를 근거지울 수 있는 ‘마음[心]’의 속성과 등위에 뚜렷한 관심을 보여 준다. 마음은 리(理)의 속성을 갖는가, 기(氣)의 속성을 갖는가? 마음은 높은 등위를 갖는가, 낮은 등위를 갖는가? 본성․감정과의 관계구조는 어떠한가? 라는 문제가 철학적 논쟁점이었다. 마음의 속성문제는 당시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간재(艮齋) 전우(田愚)학파 등에서 보편적으로 논의되었고, 마음의 등위문제는 화서학파의 ‘마음은 군주요 본성은 백성’이라는 심군성성조민설(心君聖性兆民說)과 간재학파의 ‘본성은 스승이요 마음은 제자’라는 성사심제설(性師心弟說)이 첨예한 대립을 보였다.(참고로 이기론과 인물성동이론에 대해서는 노사학파와 간재학파 간에 격렬한 논쟁이 있었다.)
이러한 철학적 조류에서 탈피할 수 없었던 후석은 이광술(李光述)에게 보낸 답장에서 마음․본성․감정의 문제를 간략히 진술하고 있다. 그는 ‘마음은 본성과 감정을 묘합한다[心妙性情]’는 대전제를 설정한 뒤, “정적(靜寂)의 상태에서 다섯 가지의 본성 -인․의․예․지․신- 을 포함하고, 감응의 상태에서 사단(四端)을 운용하는 것은 모두 마음의 기능이며, 많은 이치를 갖추어 모든 일에 대응하는 것도 마음”이라고 설명하여 마음의 속성을 기(氣)로만 인식하지 않고, 이기(理氣)의 양면적 속성을 지닌 것으로 보았다. 후석은 이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를 율곡과 맹자의 학설에서 찾아내고 있다. 즉 율곡의 학설 중 “본성은 마음의 이치이다”와 “마음이 드러나지 않은 상태가 본성이다”라는 것은 마음을 기로만 말한 것이 아니라 리의 속성이 내재되어 있음을 시사하고, 맹자의 학설 중 “마음에서 얻지 못하거든 기에서 구하지 않는 것이 옳다”와 “넘어지거나 내달리는 것은 기이지만 도리어 그 마음을 움직인다”는 것은 마음을 기로 설명했다는 것이다. 후석은 이를 종합하여 마음․본성․감정은 다만 하나의 길이면서 각각 고유한 경계를 지니는 것[心性情只是一路而各有境界]으로 규정하였다.
또 전우(田愚)의 성사심제설에 대해 「성사심제변(性師心弟辨)」과 「성사심제재변」을 지어 비판을 제기했던 조장섭(趙章燮)이 전우의 ‘본성은 스승이요 마음은 제자[性師心弟]’라는 설과 ‘기를 밝혀야 한다[明氣]’는 설에 관해 후석의 견해를 물어왔다. 그는 마음․본성․감정의 경계가 매우 분명함을 전제하고 나서, “본성은 높고 마음은 낮다[性尊心卑]고 말하여 뚜렷이 두 사물로 나누어 보면, 마음이 발현하지 않았는가 이미 발현하였는가에 따라 본성과 감정이 구분된다는 설과 마음은 본성과 감정을 통합한다[心統性情]는 설을 어떻게 구별하겠는가?”라고 대답함으로써, 마음과 본성을 사제(師弟)․존비(尊卑) 같은 개념으로 등위를 매길 수 없다는 입장을 명백히 했다. 그리고 전우의 이 새로운 학설은 정도(正道)를 해치는 사특한 것이라고 혹평을 서슴지 않았다.
이와 같은 후석의 입장은 두 가지 측면에서 분석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전우의 창견(創見)인 성사심제설의 본뜻이 ‘마음의 운용을 통해 드러난 본성의 선한 측면을 모범으로 삼아(性師) 본받아 배우는 것이 마음의 기능(心弟)’이라는 가치, 실천적인 측면을 겨냥한 발언인데도, 후석은 이미 ‘마음이 본성과 감정을 묘합한다’는 대전제를 설정했던 만큼, 마음을 전체적인 통일성으로 보려고 했던 점이다. 곧 전우의 논리는 자신의 철학적 대전제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둘째는 세상 풍속이 날로 오염되어 거리낌 없이 얼굴을 변형시키고 머리털을 훼손하는 마당에 성사심제설이나 명기설은 세교(世敎)를 혼탁하게 만들 뿐이라는 독자적인 판단에 따른 점이다.
3. 절의정신
후석은 성리학설의 번쇄한 분석보다는 혼탁한 시대를 맞아 마음의 전체성을 잘 보존하여 성리학의 본래정신으로서 의리에 근거한 현실적 실천성의 회복을 추구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그는 이재춘(李載春)에게 준 「보만설(保晩說)」에서, 바람과 서리가 흩날리면 백초는 모두 시들지만 소나무와 잣나무는 홀로 빼어나 늦게까지 무성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인간도 무사할 때는 군자와 소인이 크게 다른 점이 없으나 혼잡하고 어지러울 때는 이익을 추구하는 자와 진실된 공직자가 구별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광산설(狂山說)」에서는 “세상은 명예와 이익에 미치지만 나는 책에 미치고, 세상은 음악과 여자에 미치지만 나는 산수(山水)에 미치겠다”고 하여, 전통적인 유교도덕이념이 붕괴되고 서양의 물질문명이 유입되는 시점에서 후석은 세속적인 탐욕에 물들기를 거부하고 특립독행(特立獨行)하는 행동유형을 제시하였다.
나아가 후석은 본성을 실현하고 드러낼 수 있는 마음의 작용을 ‘옥돌’과 ‘농사’를 비유로 들어 설명한다. 곽기영에게 준 글[贈郭基永]에서 그는 “옥돌을 다듬는 사람은 쪼고 나서 다시 갈고, 농사를 짓는 사람은 갈고 나서 다시 심는다. 옥을 쪼지 않으면 그릇을 만들 수 없고, 농토를 갈지 않으면 수확할 수 없다. 사람이 배우는 것이 이와 다를까. 바탕은 아름다운데 배우지 않는 것은 아직 쪼개지 않은 양질의 옥이다. 학문에 뜻을 두면서도 힘쓰지 않음은 갈지 않고 추수를 바라는 것이니, 옳겠는가?”라고 하여, 옥돌을 다듬어 양질의 그릇을 만들어내는 과정과 농토를 갈아 파종하고 김을 매어 풍성히 수확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마음의 작용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표현하였다. 여기에서 마음의 작용은 이루어내려는 의지이며 부단한 노력이다. 따라서 그가 「농은설(農隱說)」에서 주장한 “마음 밭(心田)을 가는 사람은 (義)를 쟁기로, (仁)을 보습으로 삼아 마음으로 노력하고 날마다 매진해야 한다”는 말은 주목할 만하다.
사실 인간은 자신의 행동을 자신의 마음에 의하여 충분히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으므로 선한 행동이나 악한 행동에 대해서 스스로 책임을 지는 주체적이고 자율적인 존재이다. 그러나 마음이 육신을 통제한다고 하더라도 통제력은 자신의 결단에 의하여 발휘하는 만큼, 인간은 부단히 마음의 통제력을 바르게 발휘하지 못하거나 육신의 욕구에 이끌려 악을 저지르는 위험에 놓여 있다. 현실적으로 인간에게서 과오나 죄악을 찾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요, 오히려 선을 발견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다. 이를 간파한 후석은 역시 「곽기영에게 준 글」에서 “힘쓰고 힘써 게으름 없이 자기의 사악함을 제거하여 마치 ‘후원이 없는 외로운 군인이 많은 적을 만나는 듯[孤軍遇賊]’이 하고, 공부함에 이지러짐이 없이 시종 게으르지 않아 마치 ‘삼태기로 흙을 날라 산을 이루듯이’ 꾸준히 노력하면 가슴 속이 툭 트여 영롱한 해가 있을 것”이라 말하였다. 여기에서 영롱한 해는 인간이 지닌 선한 본성을 말한다. 해가 원래 둥글고 밝은 것처럼 인간의 본성도 본래 순선한 상태이다. 가린 구름이 벗겨지면 영롱한 햇살이 비치듯이 본성을 끌어당기는 온갖 사악한 것들을 억제하면 온전한 본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다. 이것이 곧 학문에 나아가 스스로 수양한 실제적 효과이며, 마치 옥을 쪼아 바탕을 이루고 밭을 갈아 추수를 하는 것과 같다.
선을 행하고 악에 저항해야한다는 후석의 신념은 일제강점기를 맞아 은사금(恩賜金)의 수령거부로 표출된다. 일제는 1910년 강제로 합방을 선포한 후, 조선의 명망 높은 유학자에게 일본천황이 주는 은사금을 하사함으로서 회유하는 한편 선비의 지조를 짓밟으려 했다. 이에 대해 후석은 은사금을 받을 수 없는 세 가지 의리를 군수에게 적어 보내 거부하였다(「抵本郡守」). 그 내용을 보면, 첫째 가난하게 살면서 홀로 선을 행하는 선비는 그 의리(義理)와 도(道)가 아니면 하나라도 타인에게 취하지 않으며 받지도 않는 것이니 망령되이 원수국의 돈을 받을 수 없고, 둘째 원수를 잊고 부끄러움을 참고서 무안해 하며 돈을 받는다면 스스로 지조를 잃고 몸을 망치는 지경에 이를 것이며, 셋째 망국의 유민(遺民)으로 한 몸을 버려 국난을 구하지 못했으니 통분을 참고 원통함을 삭이며 스스로 깨끗한 정절을 지켜 충성을 바치려 한다는 것이었다.
조선사회는 유교적 도덕규범과 의리정신이 정신적 기반을 형성하였던 만큼 일제의 강점을 당하여 정통 유학자들은 의병운동을 하거나, 항의자결하거나, 은둔수구(隱遁守舊)하는 등 몇 가지 의리관에 입각하여 행동하였다. 후석의 이러한 사고와 행동은 은둔수구적 의리관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유회근(柳晦根)에게 써 준 「양회설(養晦說)」에서 당시의 현실을 비바람이 몰아치는 그믐밤으로 규정하고, 이때에는 자벌레도 몸을 굽히고 용도 칩거한다고 설명하였다. 그리고 “옥은 함 속에 깊이 넣어두지만 가치는 연성벽(連城璧)보다 월등하고, 표범은 안개에 가려져도 문채는 밝게 빛난다. 사물은 본래 그러하지만 사람은 더욱 그러하다. 선비가 처세함에 산마루나 물가에 자취를 감추고 이름을 숨기더라도 잠재된 덕성이 마음에 축적되어 광채가 자연히 외부에 드러난다”고 말하여 침략자들을 피하여 자신의 신념과 지조, 인간성과 문화를 지키는 방법으로 산 속 깊이 숨는 방법과 외딴 물가로 감추는 방법을 제시하였다. 결국 후석은 입산을 결심한 뒤, 1917년 동지․문하생들과 협의하여 용진산(聳珍山) 속에 정사를 짓고 ‘도를 부여안고 산으로 들어가 후생을 가르치면서 스스로 깨끗이 지조를 지킨다[抱道自靖]’는 의리를 몸소 실천하면서 강학에 힘썼다.
후석의 절의는 현실의 외압이나 유혹을 거부하고 자신의 신념을 지켜나가는 내면의 투쟁이요, 굽힐 줄 모르는 지기(志氣)라 할 수 있다. 그는 공자의 “날씨가 추워진 다음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잎이 지는 것을 알게 된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 는 말 속에 담긴 절의정신을 실현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절의는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인이라는 보습과 의라는 쟁기로 마음 밭(心田)을 부단히 갈아야만 흔들리지 않는 참된 판단과 행위를 제공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후석은 학문과 절의를 하나의 선상에서 파악해야 함을 일깨워주고 있다.
4. 용진정사(聳珍精舍)
용진정사는 노령(蘆嶺)에서 수련산(秀蓮山)으로, 수련산에서 동귀산(東龜山)으로, 동귀산에서 남쪽으로 20리 쯤 달려와서 우뚝 솟은 용진산(聳珍山)의 남쪽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한말의 도학자 후석(後石) 오준선(吳駿善)이 망국의 한을 달래면서 강당을 짓고 후진 양성에 힘쓴 곳이다.
후석은 은사금을 거절한 일로 일경에게 고초를 겪은 뒤, 백립(白笠)을 쓰고 조상의 자취가 서린 석문(石門)의 분암(墳菴: 재각, 재실)으로 들어가 후진을 양성했다. “원수를 갚기 전에는 상복을 벗을 수 없다”하여 죽을 때까지 백립을 쓰고 지낸 것이다. 여기에서 몇 년을 거처했는데, 하루는 문인들이 “우리 스승이 일찍이 뜻을 두었으나 이루지 못했던 용진산에 정사를 건축하여 학업을 묻는 장소로 만들자”고 논의하였다. 문인들과 사림들이 앞 다퉈 의연금을 내어 1916년에 공사를 시작해 이듬해인 1917년(정사년)에 완공하고, 그해 9월에 문인들이 후석을 석문에서 모셔와 처음에는 석남정사(石南精舍)라 했다가 나중에 ‘용진정사’라 개명했다.
용진정사의 터는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이 터는 원래 용진사(湧珍寺: 上元寺)의 법당이 있던 곳이었고, 절이 허물어진 뒤에는 청안이씨(靑安李氏)의 집안에서 조상의 묘소를 수호하던 곳이었다. 후석의 아들, 조카, 문인들이 이 터를 사기 위해 후손 이창석(李暢錫)을 만나 상의하자, 이창석은 자기 어머니에게 그 사정을 아뢰었다. 그 어머니는 “내가 듣기로 후석 어른은 유림의 종장이다. 그 분을 따르며 배우는 선비들이 재물을 모아 강학하는 공간으로 만들고자 하니 어찌 팔아서야 되겠느냐? 그리고 훗날 발생할지도 모를 분쟁을 생각하여 경계를 확정하고 문권(文券)을 만들어 드리도록 해라”하고, 그곳 3층의 대(臺) 중에서 상대(上臺)와 중대(中臺)를 흔쾌히 희사했다.
이렇게 해서 지어진 용진정사는 4칸 1옥(屋)으로 되었는데, 서쪽에는 판서 윤용구가 쓴 장서실(藏書室)이라는 편액을 걸었고, 아래쪽에는 직사(直舍) 3칸을 만들었으며, 동쪽에는 용진영당(聳珍影堂) 3칸과 산앙문(山仰門)을 만들었다. 뒤쪽에는 호준암(虎蹲巖), 귀복암(龜伏巖)이 있고, 서쪽 창 밖에는 수백 년된 노백(老栢) 두 그루가 있다.
후석은 이 용진정사에 원운시(原韻詩)를 달았고, 동문 기재(奇宰)와 고광선(高光善)은 기문을 붙였으며, 진사 기동준(奇東準)은 상량문을 지었다. 후석은 약 14년 동안 이곳에서 강학하면서 3월 10일과 9월 10일에는 수백 명이 모이는 회강(會講)을 개최했고, 상읍례(相揖禮)와 향음주례(鄕飮酒禮)를 시행하면서 600여명에 달하는 문인을 배출했다. 후석은 1919년에 고종이 승하하자 문하생들과 용진정사 앞의 바위에서 통곡하였는데, 그 뒤 이 바위를 읍궁암(泣弓岩)이라 불렀다. 죽은 뒤 문인들이 1939년에 정사 동쪽에 3칸의 용진영당(湧珍影堂)을 세우고 채용신이 1924년에 그린 초상화를 모셨다.[화상찬(畵像贊)은 기우만의 제자 양회갑(梁會甲)이 썼다.) 영당의 좌우벽에는 오준선의 큰아들 오헌수와 조카 오동수의 영정이 함께 걸려 있다. 1934년에 그의 학문체계를 정리한 문집 25권 12책이 간행되었고, 용진정사는 1985년 2월 25일 광주광역시문화재자료 제7호로 지정되었다.
○ 심원표의 만취정(晩翠亭)
권수용 (조선대학교 사학과)
1. 심원표(沈遠杓; 1853~1939)
자는 중진(仲振)이고, 호는 만취(晩翠)이며, 본관은 청송이다. 아버지는 노운(魯運)으로 의금부도사였으며, 어머니는 나주임씨 기상(基相)의 딸이다.
그의 집안이 이곳에 입향한 것은 선조 묵헌(默軒) 때이다. 묵헌은 조광조의 문인으로,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스승을 구원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유배되었는데, 이때 나주에 세거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그의 아들 광헌(光憲)이 있는데,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이순신 막하에 합류하였다. 만취정 곁에 있는 동호사에는 이 부자와 함께 선조 5위가 모셔져 있다.
심원표는 젊어서는 노사 기정진의 문하에서 공부했고, 이후에는 연재 송병선의 문하에 나아가 공부했다. 그는 송사 기우만, 백하 양상형, 난와 오계수, 후석 오준선, 금우 임상희 등과 도의로써 사귀었다.
의병이 일어났을 때는 이들을 도왔으며, 이 사실이 일제에게 드러나 곤욕을 당하기도 하였다. 경술치욕 이후에는 은사금을 받길 강요당했으나 끝까지 거부하여 헌병대에 잡혀가기도 했다. 이로 인하여 세상일에 관심을 끊고, 거처하는 마을 한쪽에 만취정을 짓고 소요했다. 정자명은 눈보라의 추운 겨울에도 그 본색을 변치 않는 소나무의 높은 절개를 이르는 말이다.
2. 만취정
이 정자는 현재 광산구 동호동 남동마을에 위치하고 있다. 1913년에 지어졌으며, 정면 3칸, 측면 3칸(1칸+전후퇴)으로, 가운데 온돌방을 배치한 전형적인 호남지역 정자 양식을 가지고 있다. 1975년에 개와를 하였으며, 1978년도에 중수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당에는 온갖 화초와 나무들이 잘 가꾸어져 있으며, 연못도 갖추고 있다.
이 정자에는 심원표 뿐만 아니라 그 아들인 남석 심종대(沈鍾大)와 손자인 계봉 심한구(沈翰求)의 자취가 남아있다. 심종대는 송병선과 송병순의 문인으로 학행이 뛰어나 사복계(思服契)라는 제자들의 모임이 있는 당시의 학자였다고 한다. 그리고 계봉 심한구도 오준선, 송증헌, 윤용구 등의 문인으로 그의 문예가 비범할 뿐만 아니라, 특히 글씨를 잘 써서 이 지방의 명필로 이름났다고 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계봉 심한구는 윤용구와 김규진에게 가서 글씨를 배웠는데, 윤용구가 후암 송증헌에게 심한구를 추천하여 송자대전의 주를 다는 일을 맡아하게 했다고 한다. 이 집안에는 우암후손들과 만취 후손들이 주고받은 편지가 많이 남아있다고 하는데, 현재 종손이 서울에 살고 있어서 그 실체를 볼 수가 없다.
이곳에는 몇 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먼저 ‘만취정’이라는 정자명을 쓴 현판이 안팎으로 두 개가 걸려있다. 밖에 걸려있는 것은 초서체로 쓰여 있는데, 해강 김규진의 글씨이고, 안에 걸린 것은 해서로 쓰여 있으며, 석촌 윤용구의 글씨이다. 측면에 또 하나의 편액이 걸려 있는데, 이것은 ‘독지헌(篤志軒)’이라고 쓰여 있으며, 이 제액은 송병순이 심종대에게 써준 것이다. 이밖에도 ‘계봉정사(桂峰精舍)’라는 호칭도 있다고 하는데, 이것은 손자 심한구가 사용한 이름이라고 한다.
현재 이곳에는 정자명의 현판 외에도 몇 개의 현판이 더 걸려있다. 심원표의 서와 시, 기우만의 기, 오준선의 기, 오계수의 기, 송철헌의 시, 오준선의 시, 족질 상호의 시, 족손 길구의 시, 족제 계택의 시가 걸려 있다. 그러나 예전에는 위 사람들 것 외에도 오권수와 고광선의 기와 박노술, 심만구, 심춘구, 심종관 등의 시가 더 걸려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는 주인 심원표가 쓴 현판 하나만을 살피기로 한다. 주인이 정자를 세운 의미를 알 수 있다.
<晩翠亭小序 並元韻>
옛날 정자의 이름을 만대(晩對)라 하고, 또 헌(軒)의 이름을 남취(攬翠)라고 한 것은 제각기 이에 상응하는 깊은 뜻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경우는 이와 달리 만대의 만자와 남취의 취자를 모아 그 이름을 만취(晩翠)라고 하였다. 이는 다름 아닌 나의 처지로서는 마땅이 그러해야할 깊은 사유가 있어서이다.
나의 씨족 심씨의 본관은 청송(靑松)으로 되어 있고, 솔이라는 이 나무는 언제나 울창하여 세한의 추위에도 그의 푸름을 잃지 않는 높은 절개를 갖고 있다. 우리 청송이라는 씨족이 최초 허강(虛江, 沈德符)에 뿌리를 두고, 망세정(忘世亭, 沈璿)이라는 굵은 가지가 생기면서 정정한 절의의 그늘이 온 누리에 가득하였다. 그러나 중엽 무렵에 이르러 기묘사화를 징비하기 위한 한 가지가 강호의 한적한 곳으로 유락하게 되었고, 또 임진년의 극한 국난을 만나 이곳저곳으로 흩어지는 상태를 면하지 못한지가 지금까지 30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오늘의 현실을 살펴볼 때 헤아릴 수 없는 상전벽해의 변이 연이어 있었고, 또 모든 나무가 말라 떨어지는 막된 세상이 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냇가 언덕위에 우뚝 서있는 푸fms 소나무는 조금도 이러한 풍조에 아랑곳없이 눈서리의 추운 겨울을 이겨내며 홀로 청청한 빛을 지키는 뛰어난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
이 정자를 남동의 남쪽에 지어 그 이름을 ‘만취’라고 한 것은 소나무의 이러한 절개를 본받아 나의 만년을 보내는 서식의 장소로 활용하기 위해서이다.
이어서 시를 지어 이른다.
금성의 북쪽에 숨어살며 한 정자를 새로 지으니,
푸른 솔의 높은 절개 그의 광채 드높구나.
운림 속을 오고 가며 나의 취미 이루었고,
산중에서 술을 빚어 손님 술상 차렸도다.
땅을 덮은 맑은 그늘 삼경 길이 깊어 있고,
하늘 높이 솟은 기상 사시장철 푸르구나.
만취라는 두 글자로 이 정자를 이름하니,
무엇하러 여러 꽃들과 이른 봄볕 즐길건가.
3. 남동사와 동호사
정자의 좌측에는 심원표와 아들 심종대, 그리고 손자 심한구 3위를 배향한 남동사라는 사우가 있다. 여기에는 이들의 영정도 모셔져 있다고 한다. 또 그 옆에는 심원표의 선대 5위를 배향한 동호사가 자리하고 있다.
동호사는 1946년 이고장 유림들의 발의로 고려말 공신인 장안공 심덕부, 사부 심징, 망세정 심선, 묵헌 심례, 망세정 심선, 심암 심광헌 등 5분의 위폐를 모시고 있다.
․ 장안공 심덕부
1328(충숙왕 15)∼1401(태종 1). 고려말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득지(得之), 호는 노당(蘆堂)·허당(虛堂). 아버지는 전리정랑(典理正郞) 용(龍)이다.
고려 충숙왕 복위년 말에 음직(蔭職)으로 사온직장동정(司溫直長同正)에 출사한 이후 좌우위녹사(左右衛錄事)를 거쳐 1364년(공민왕 13) 수원부(水原府)의 수령이 되었다. 공민왕 말년에 판위위시사(判衛尉寺事), 우왕 즉위 후 우상시(右常寺)를 거쳐 우왕 원년에 예의판서(禮儀判書)에 승직되었고, 이어 밀직부사 상의회의도감사(商議會議都監事)와 강계도만호(江界都萬戶)·의주부원수(義州副元帥)·서해도원수(西海道元帥) 등의 요직을 거쳤다.
1378년(우왕 4) 밀직사로 재임하면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로서 서해도원수를 겸하여 여러 차례 왜구토벌에 공을 세웠는데, 특히 1380년 도원수 나세(羅世)와 함께 최무선(崔茂宣)이 제조한 화포를 처음 실전에 사용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1385년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로서 동북면상원수(東北面上元帥)를 겸하여 북청(北靑)에 침략한 왜구를 토벌하는 등 이성계(李成桂)와 함께 동북면에 침구한 왜구를 토벌하는 데 공을 세웠다. 같은해 겨울에는 하정사(賀正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왔고, 귀국 후에 청성부원군(靑城府院君)에 봉해졌다.
1388년의 요동출병 때에는 서경도원수(西京都元帥)로서 조민수(曺敏修)와 함께 좌군에 속하여 이성계의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을 도와주었다.
또한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세우는 폐가입진(廢假立眞)에는 이성계·정도전(鄭道傳)·정몽주(鄭夢周)와 더불어 주도적인 구실을 하여 이른바 9공신 중의 한 사람이 되었고, 공양왕 즉위 직후에 문하좌시중 경기좌우도 평양도통사(門下左侍中京畿左右道平壤都統使)에 올랐으며, 이듬해에 청성군충의백(靑城君忠義伯)에 봉해졌다.
그러나 같은해 말에 비어(飛語)에 따른 무고로 인하여 일시 황해도 토산(兎山)에 유배되었다. 그뒤 1391년(공양왕 3) 다시 문하좌시중에 복직되고, 하정사인 왕세자 석(奭)의 종사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이성계·정몽주와 함께 안사공신(安社功臣)이 되었다.
1392년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로 조선의 개국을 맞아, 1393년(태조 2) 회군공신(回軍功臣) 1등에 추록되며, 청성백(靑城伯)에 봉하여졌다.
1397년 판문하부사, 이듬해에 영삼사사(領三司事)를 거쳐, 72세 때인 1399년(정종 1)에 좌정승이 되었다가 이듬해에 치사하였다. 고려말 정치제도의 개혁과 왜구토벌에 업적을 남겼으니, 공양왕 때에 관찰사제를 폐지하고 안렴사제(按廉使制)를 부활하였으며, 제사(諸司)의 서무를 도당(都堂)에 직접 보고하게 한 것 등이 그것이다. 조선왕조 개국 후에는 신왕조 건설의 일익을 담당하였는데, 1394년에는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의 판사가 되어 한양의 궁실과 종묘를 영건(營建)하는 일을 총괄하여 신도건설에 큰 구실을 하였다. 그에게는 일곱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다섯째 아들인 온(溫)은 세종의 국구(國舅)가 되었으며, 여섯째 아들인 종(淙)은 태조의 부마가 되어, 왕실과의 혼인을 통하여 거족(巨族)으로 성장하는 기틀이 그에게서 이루어졌다. 처음 시호는 공정(恭靖)이며 나중에 정안(定安)으로 고쳤다.
․ 망세정 심선
?∼1467(세조 13).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윤부(潤夫). 덕부(德符)의 증손이다.
척리(戚里)로서 발탁되어 여러 고을의 수령을 역임하고, 이어서 세조 즉위에 큰 공을 세운 홍윤성(洪允成) 집안과 혼인관계를 맺어 예조참의를 비롯한 육조의 요직을 맡았다.
1464년(세조 10) 경기도관찰사에 부임하였는데, 권력을 농단하고 공무를 소홀히 하여 대간들의 탄핵을 받고 좌천되기도 하였다.
그 뒤 중추원부사로서 하정사(賀正使)에 임명되어 명나라에 다녀왔고, 이어서 황해도관찰사를 지냈으나, 질병으로 사임, 오위의 부호군이라는 한직에 있다가 죽었다. 일찍이 풍양에 정자를 지어놓고 산수와 음률을 즐겨 망세정(忘世亭)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당시 이맹전(李孟專)·원호(元昊) 등과 겨룰 만큼 고매한 기품을 지녀 처사를 자처하였다. 뒤에 장릉(莊陵) 조사단(朝士壇)과 옥과에 있는 구암사(龜巖祠)에 배향되었다.
○ 범세동(范世東)
생몰년 미상. 고려말의 학자. 본관은 금성(錦城). 자는 여명(汝明), 호는 복애(伏崖). 통찬(通贊) 후춘(後春)의 아들이며 정몽주(鄭夢周)의 제자이다.
그의 증조인 범승조는 남송의 예부시랑을 지냈는데 원에 의해 남송이 멸망하자 고려에 망명하였고, 할아버지 유수는 여진 정벌에 공이 있어 금성군에 책봉되어 금성을 본관으로 삼았다. 범세동은 정몽주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1369년(공민왕18)에 과거에 합격하였다. 덕령부윤(德寧府尹)에 이어 낭사의 책임자인 간의대부를 역임하였다. 조선왕조가 개창되자 세상을 등지고 70여인과 함께 두문동에 은거 하였다가 태조가 두문동에 불을 지르자 난을 피해 고향인 나주로 돌아 왔다. 후에 태조와 태종이 불렀으나 응하지 않고 고향에서 절의를 지키면서 살았다. 범세동선생은 의리 정신을 강조하여 성리학 발전에도 기여하였는데 '화해사전'과 화동인물총기를 저술 하였다. 화해사전은 정몽주의 스승인 신현의 행적과 고려말의 굴절된 역사를 나름대로 바르게 서술한 책이다. 화동인물총기는 도학과 충절을 지킨 신라, 고려의 인물을 소개하고 고려말의 숨겨진 역사를 자세하게 서술하였다. 죽은 뒤 후덕군(厚德君)에 봉해지고 문충(文忠)의 시호를 받았으며 개성의 표절사(表節祠), 두문동서원(杜門洞書院), 광주(光州)의 복룡사(伏龍祠)에 제향되었다.
묘역에는 대리석으로 만든 묘비, 문인석, 상석, 양석, 동자석, 망주 등의 석물이 있는데, 묘비와 문인석을 제외하고는 최근에 보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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