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
언더우드 선생의 비서로 있으면서 최초로 조영자전을 편찬하게 되었다. 언더우드 박사의 제안에 따라 ‘영한자전’을 만드는 기나긴 여정이 시작되었다.
“이제는 인쇄를 해야 해. 하지만, 식민지하의 우리의 인쇄 기술은 형편없으니.”
요코하마의 복음 인쇄소 사장을 만나서 얇은 종이에 인쇄된 사전을 보며 깜짝 놀랐다. 일본의 인쇄 기술이 이렇게 발전할 줄이야. 일찍부터 발달된 우리나라의 인쇄술을 계승해오지 못해 안타까웠다. 그는 우리나라가 따라잡아야 할 거리. 그 거리는 얼마이고, 우리는 언제 이 장벽을 넘어 세계사에 우뚝 설 것인지 마음이 답답했다.
1923년 그는 조영자전을 인쇄하러 일본에 가 있었다. 9월 1일, 오성근이 44살이 되어서야 처음 경험한 지진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아침부터 비가 오기 시작하더니, 점점 캄캄해지고, 바람은 심하게 불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데리고 간 의주 학생은 출근도 안 했다. 중식 후 다시 일을 하고 있는데, 딴 사원들이 책상 위도 챙기지 않고 바쁘게 밖으로 나가 버렸다. 순간 2층 건물이 세게 흔들린다.
옷과 가방을 챙겨 허둥지둥 2층에서 내려가는데, 한 계단을 남겨 놓고 지붕 위에서 기왓장이 구부린 허리를 내리쳐서 다친다.
“아앗!”
“선생님, 빨리 바닷가로 나가야 해요. 빨리요.”
“허리를 다쳐서 못 걷겠어. 으윽!”
몸도 잘 펴지 못하는 그를 보자, 그 때 나타난 의주 학생이 부축하며, 수보 앞을 지나간다.
“선생님 제 어깨에 기대세요. 앗! 허리에서 피가 많이 나요.”
굉음을 내며 인쇄소 건물이 무너진다. 둘은 쇼난 해변을 향해 뛴다. 사방에서 지진의 파편들이 떨어진다. 옷가지 가방을 벌서는 것처럼 쳐들고 사람들이 간 방향으로 쫓아갔다. 해변 쪽으로 가니 모두들 공포에 질려 띄엄띄엄 서 있었다. 얼마 후 학생이 뛰어 왔다.
“선생님! 큰일 났습니다. 이 참혹한 지진이 일어난 동안, 불을 놓고, 우물에 독을 탄 게, 조선 사람이라고 헛소문이 나면서, 청년들이 죽창을 갖고 다니며, 조선인을 마구 죽인답니다.”
“아니, 지진으로 죽은 사람만도 얼만데 또 죽여? 화재야 점심들 하다 갑자기 뛰어나갔으니까 당연히 불이 났을 테고. 우물에 독을 탔다는 것은 무슨 말이고?”
“말도 안 되는 소문이지만 지금 그걸 따질 겨를이 없습니다. 여기도 곧 그놈들이 들이닥칠 거예요.”
“그래, 그럼 어디로 간단 말인가?”
“선생님, 일단 보따리를 챙겨 해변으로 나가요.”
“조선인만 해친다면, 우린 중국인이 많은 데로 갈까? 동병상련이라고 일본에 핍박받는 조선인을 이해해 주지 않을까?”
“해변에 중국인이 모여 있어요. 부상자들이 모포를 둘러쓰고 신음하고 있는데요.”
“우린 조선인으로 사전을 만들려고 왔소. 유언비어에 휘말려 곤경에 처해 있는데 좀 도와주시오.”
학생이 의주 태생이라 중국어로 말했다. 무정부 상황이라 자신들조차 위태롭지만, 환자 옆에 눕게 하고 모포로 덮어 숨겨 주었다. 1시간 즈음 지났을까 몇 명이 칼과 죽창을 들고 들이닥쳤다.
“여긴 조선 사람 없소?”
“없습니다. 우린 모두 중국인이오.”
“어디 조사해 봅시다.”
모포를 들추며 다가오는 그들은 툭툭 치며 비명소리를 확인했다. 그들은 피가 흐르고 있는 오성근의 몸을 툭 쳤는데, 상을 찌푸리며 비명을 삼켰다. 옆을 지키던 중국인이 말했다.
“피를 많이 흘려 제정신이 아닙니다. 우리 가족들이예요,”
자경단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돌아간다. 생사를 넘나드는 순간이었다. 목숨을 건져준 그들에게 더 이상 부담을 줄 수 없다고 생각한 오성근과 학생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골난망입니다.”
요꼬하마 항구로 나왔지만 거기도 안전한 장소는 아니었다. 핏발이 선 우익 과격파들이 동양인을 몰아놓고 세수를 하라고 윽박지르고 있었다.
“잔인한 놈들! 조선인을 찾아내는 방법도 가지가지군.”
“저래 가지고 어떻게 조선인을 찾아요?”
“응, 한국인은 세수하면 꼭 목을 씻고, 중국인은 얼굴만 씻거든. 목으로 손이 가는 순간 죽창이 날아오겠지. 저쪽 서양 기선이 있군. 저놈들을 피해 달려.”
오성근과 의주 학생은 무명 손수건을 꺼내 흔든다.
“SOS”
“SOS”
“무슨 일로 구조를 요청합니까?”
“조선인인데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미국 선교사 언더우드와 영한자전을 만드는데 사전 인쇄를 하러 왔다 위험에 처했습니다. 살려 주시오.”
“신분을 확인할 증거가 있습니까?”
“예. 이것이 언더우드 씨가 일본 복음 인쇄소에 부탁하는 소개장과 서류입니다. 미국인이 보낸 편지도 있습니다.”
“중요한 임무를 갖고 왔는데 큰일 날 뻔했군요. 이 배는 네덜란드 배인데, 빨리 배에 오르시오.”
“감사합니다. 여기만 벗어날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고오베로 가는 중인데 거기에 내려드리면 되겠소?”
“감사합니다.”
네덜란드 배에 오르니 오후 4시였다. 상처 치료 후, 배를 타고 가며. 선장이 지진이 일어난 후의 상황에 관해 물었다.
“그동안 생지옥에서 살아난 것 모두가 천우신조였어. 내가 영어를 하고, 네가 중국어를 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일제 강점기라는 와중에서 보호 수단은 오직 실력뿐. 그래, 힘 있는 민족이 되기 위해서는 실력이 있어야 해. 피 끓는 마음이 있어도 그것을 전달할 수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어.”
“저도 보았어요. 아무 잘못도 없이 일본 땅에서 조선인이란 이유만으로 죽어간 약소민족의 서러움을.”
“기어코 영한자전을 완성하여, 민족에게 세계로 나갈 눈을 뜨게 하자. 이 핍박을 세계에 알리고 나라를 되찾아야 해.”
“선생님 저도 더 열심히 공부해서 꼭 광복을 찾고 말겠어요. 하루 빨리 식민지에서 벗어나야 해요.”
귀국 후에 지진으로 쫓기는 와중에 분실된 사전을 초고서부터 다시 정리하여, 인쇄함으로써 우리나라 최초의 ‘조영자전’ 감수자로 되었다. 한국말을 잘 못하던 언더우드가 저자로 있지만 실제적으로 사전 만드는 일은 오성근이 도맡아 하였다. 이런 우여곡절 속에서 한국 최초 한영사전이 편찬되었고, ‘조영자전’은 현재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언더우드 한영사전이면 5억을 호가하는 우리나라의 소중한 문화재가 되었다.
헐버트 선생과는 창고회사를 설립한 후 여러 가지 일을 보아드렸는데, 중국 등과의 무역이 원활하지는 못했고, 학자였던 그의 장사 수완은 별로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 가운데 조선의 운명은 풍전등화와도 같이 위태로웠다. 기울어진 나라의 운명은 쉽게 정복자의 마수에서 헤어나기가 힘들었다.
나라가 근대화하는 과도기에 영어 회화가 능숙한 사람이 많지 않아 서구와 왕래하는 일에 앞장을 서는 일이 많았던 그는, 전신전화국의 개통에도 관여하여 국내부 주사로 활동했다. 교과서에 실린 구한말에 전화 거는 모습이 오성근이다.
그 후 구한말 소용돌이 속에서 쓰러져가는 나라를 바로 세우려고 동분서주했지만, 일본이 강점하자 정치에 뜻을 잃고, 조용히 송도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며 인재양성에만 전력했다. 그 인연은 그의 생명을 구하게 되었으니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유명 인사를 마구 잡아가두는 가운데 피랍되었다.
“송도중 제자입니다. 저희에게 늘 조국을 위해 살라 당부하신, 훌륭한 선생님을 진심으로 존경했습니다.”
제자 덕분에 사지에서 풀려나 무사할 수 있었다.
노년에는 원효로 한강 가로 이사했다. 슬하의 10남매를 교육시켜 할 일 많은 이 나라의 발전을 위해 한국에서, 일본에서, 중국에서 활동을 하게 했는데, 첫째와 둘째 아들은 북경대학을 나와 사회의 지도자로 성장했고, 셋째부터 다섯째 아들은 일본에서 공부했다. 특히 넷째 아들은 일본에서도 유명한 권투 선수였는데 징용에 끌려가 전사했다. 다섯째 아들은 수풍댐 건설을 했다.
오빠의 한을 달래기 위해 태평양 유족회의 간부로 활동하던 막내딸 오임순은, 일본으로부터 우리나라가 정당한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앞장섰다. 일본 재판정에 서류를 내자니, 일본어와 과거의 기록을 읽을 한문 실력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으므로, 고령에도 몇 년간 이 서류를 작성하고, 6번을 재판 때문에 일본에 다녀왔다.
그녀는 경기고녀에서 철저한 일본어 교육을 받아, 일본의 와까(고전 시)도 줄줄 외워, 일본인들을 놀라게 한 재동이어서 일본 법정에서 그녀는 일본말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일본 재판정에서 증언하는 모습 및 인터뷰가 아사히신문에 대서특필되었다.
그때 권투하던 오빠의 팬이었다며, 동생을 위로하러 일본인들이 찾아오기도 했었다. 그러나 일본은 1965년 한일회담으로 모든 보상은 끝났다고 하여, 일본을 상대로 한 재판은 1999년 패소했다.
오임순 할머니는, 국내에서도 여러 번 방송과 신문에서 취재했고, 태평양 유족회를 통해 지학순 정신대 할머니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는 데 양창순과 많은 기여를 했다. 이 땅에 힘없는 피해자를 대변하던 모습이, 아버지의 뜻을 이어가는 거룩한 모습으로 비쳐졌다.
2006년 8월 4일 헐버트 선생 추모회에서는 오성근의 업적을 기려 공로패를 수여하였고, 텔레비전으로 방영되었다. 오성근 선생은 떠나갔지만, 그의 언행이 일치된 삶은, 우리 민족에게 숭고한 국가관을 계승하여 영광된 오늘이 있게 하였다. 앞으로도 독립기념관에 보관된 5권의 일기는 생생한 증언으로 후세에 전하면서, 민족의 화신으로 영원히 빛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