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감으면
이 정 심
눈을 감고 있는 시간이 잦아졌다. 그 순간에는 아무것도 쳐다보지 않는다. 눈을 감으면 앞의 사물은 보이지 않으나, 파노라마처럼 추억이 펼쳐지고, 잊힌 사람이 내 앞에 있고, 나를 쳐다보는 내가 망막 안에 있다. 어느 스님의 말씀처럼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다고 하지만 나에겐 감은 눈 속에서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다.
내 눈은 언제까지나 변함없이 밝게 보일 거란 생각을 은연중에 해왔던 것 같다. 누워서 책을 읽는 습관은 이십 대 때부터 길들여졌다. 이젠 누워서 스마트폰까지 본다. 그런 나를 두고 눈 나빠진다고 늘 잔소리하는 남편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서일까? 요즘 자꾸 눈앞이 침침해진다. 책을 읽다 보면 십여 분이 지난 후부터 게슴츠레 눈을 떠야 글자가 보인다. 그마저도 눈이 피로해져 잠깐 책을 덮고 눈을 감아본다.
초등학교 시절 엄마는 반짇고리를 앞에 두고 늘 나를 찾았다. 바늘에 실을 꿰어 달라는 부탁이다. 엄마는 바늘 든 손을 저만큼 멀리 두었다. 이맛살을 찌푸린 채로 실에 침을 묻혀 바늘귀에 꿰려고 애썼으나 늘 헛손질이었다.
“엄마 이게 안 꿰져? 이게 이게?”
엄마에게 약을 올린 후 두 눈동자가 가운데 모일 정도로 눈앞 바싹 바늘을 두고 한방에 실을 꿰었다. 그땐 왜 실을 제대로 꿰지 못하는지 엄마가 이해되지 않았다.
며칠 전 저녁이었다. 아무리 바늘귀에 실을 꿰려 해도 바늘과 실은 자석의 같은 극처럼 서로 밀어냈다. 문득 엄마의 바늘귀가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나도 그때의 엄마 나이구나 싶은 게 서글퍼졌다.
손수건에 수를 놓는 프랑스자수를 해보려고 ‘원데이 클래스’에 갔다. 다들 젊은 애기 엄마들 곁에서 아무리 애써도 실이 바늘에 꿰어지지 않았다. 차마 그래도 초면인데 실에 침을 바를 수는 없어서 헛손질만 계속해댔다. 침 발라 가지런해진 실을 바늘귀에 꿰면 그나마 나은 것을…. 보다 못한 옆 사람이 실을 꿰어 주었지만 그녀들은 벌써 내 나이를 짐작했으리라.
‘명함시력’이라는 단어가 있다고 한다. 요즘의 우스갯소리이다. 다들 젊어 보여서 나이를 가늠할 수 없을 땐 명함을 내민다고 한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 만났을 때 서로가 주고받고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를 대충 알게 해주는 것이 명함이다. 그 명함을 받고서 바로 눈앞에 들이대고 보면 아직 사십대가 안 된 것이고 멀리 손을 뻗어서 읽으면 사십 후반임을 알아차린다는 것이 명함시력이다. 나 역시 멀리 봐야 하는 명함나이가 되었다.
누군들 세월을 비켜가겠는가, 세월 역시 나만 못 본채 눈감아 주지 않는다.
몸이 천 냥이면 눈이 구백 냥이라고 한다. 그 귀한 눈을 함부로 다룬 죄를 받아 마땅하건데, 아직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차일피일 미루며 안과를 가지 않고 전해오는 민간요법을 실행하고 있다. 소의 간이 비타민A가 많아서 눈에 좋다는 말을 듣고 소간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결명자 가루를 한 스푼 씩 백일동안 먹으면 안경을 벗을 정도로 좋아진다는 말에 열심히 일삼아 결명자 가루를 먹었다. 블루베리가 좋다고 하여 즙을 내어 매일 마셨다. 이렇다 할 차도는 없다. 책을 읽다 눈이 피로해지면 눈을 감고 쉬는 수밖에 없다. 그러다가 잠이 드는 경우도 종종 생긴다. 여러 번 시도해본 결과, 눈을 감고 있는 것이 제일 효과가 좋았다.
눈을 감으면 피로가 풀리는 것만이 아니다. 스쳐 지나갔던 추억들과 사람들이 저 멀리서 서서히 다가온다. 이십 대 초반, 비둘기호 기차를 타고 입석으로 가면서 흔들리지 않게 두 팔로 나를 보호해 주었던 그 사람이 보인다. 여자 친구보다 더 편했던 남자친구도 떠오른다. 어느 볕 좋은 일요일 봄날, 그 친구를 불러 이불빨래를 해달라 시켜놓고 나는 다른 곳으로 놀러가도 군말 없이 빨래를 해 놓았던 친구다. 나의 자취방에 발 냄새가 나면 안 된다며 들어오기 전에 발 먼저 씻고 오던 친구, 그때는 이불을 빨아줘도 고마운 줄 모르고 발 씻고 이불 빨았냐고 다그치던 철없던 시절이었다. 김밥을 싸달라고 부탁하고 책만 보고 있어도 즐거운 표정으로 그 좁은 부엌에서 김밥을 만들어 주던 또 다른 친구. 친구들….
눈을 감으면 더욱 선명해지는 고맙고 그리운 사람들이다. 이루지 못한 사랑도 눈을 감으니 더욱 가깝게 다가오고, 그 사랑에 가슴 아파하던 나도 보인다. 조금 눈이 편안해졌다고 생각될 때 눈을 뜨면 그 친구들과 추억은 어느새 사라지고 만다. 보이는 것은 건조하고 메마른 사각 시멘트벽을 마주하고, 정물화 같이 전등 밑 의자에 앉아 있는 나뿐이다. 아, 다시 눈을 감고 싶어진다.
시간을 내어 가까운 안과를 찾았다. 나의 불편을 들어 본 의사는 간단한 검사를 했다.
“노안입니다.”
“시력이 좋다면서 어떻게 노안이에요?” 라고 따지듯 반문하는 내게 의사는 다시 명쾌하게 대답했다.
“시력과 노안은 다릅니다.” 성의 없이 한마디를 뱉어 낸다. 그 말이 내 귀에 꽂히며 헛웃음이 나왔다. 의사는 기어코 돋보기 처방전을 써주었다. 수긍할 수 없는 그 의사의 처방전은 병원을 나오며 쓰레기통에 버렸다. 아무래도 다른 안과를 찾아가 봐야 할 것 같다.
눈이 피로하면 그냥 눈을 감고 있는 것이 어쩌면 더 좋을 수도 있다. 볼 것 많고 들을 것 많고 할 말 많은 현대인들에게 아무것도 보지 않고, 아무것도 듣지 않고 말하지 않음으로써 얻는 것만 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불교에서도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 했다. 잠시 또 눈을 감아본다.
(선수필 2017년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