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두지파(12) - 베냐민 지파 / 창 49:27
오늘로 드디어 열두지파 강해를 마치는 날입니다. 르우벤 지파를 시작으로 베냐민 지파까지, 태어난 순서대로 설교를 했는데, 석 달이라는 짧지 않은 여정이었습니다. 두 번째인 시므온 지파부터 고비가 왔지만, 같은 내용을 여러번 반복하면서, 잘 넘기고 나니, 끝까지 달려올 수 있었습니다. 신앙도 인생도 고비가 있고, 그 고비를 넘기고 나면 한동안 달려갈 수 있습니다. 처음 고비가 왔을 때, 처음 작은 고비가 왔을 때, 잘 버티고 이겨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스텝이 꼬이게 됩니다. 저는 본문 말씀을 준비하면서, 발견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야곱과 모세가 기원하는 축복이, 각각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어떤 자에게는 별 이유 없이 넘치도록 축복하고, 또 어떤 자에게는 너무 인색하게 축복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의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 어떤 사람은 큰 이유도 없이 엄청난 부를 누리고 사는 사람이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이유를 모르게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불공정하게 보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불공정하시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불공정하셔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불공정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축복이 불공정하게 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가치기준과, 사람의 가치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시각의 차이이기도 합니다. 열두지파는 야곱에게서 기원합니다. 야곱이 네 여자를 통해서 낳은, 열두 아들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야곱의 정식 아내는 둘입니다. 레아와 라헬입니다. 그런데 열두 아들의 엄마는 네 명입니다. 레아가 낳은 아들 여섯과 라헬이 낳은 아들 둘과 라헬의 여종 빌하가 낳은 아들 둘과 레아의 여종 실바가 낳은 아들 둘, 합쳐서 12명입니다. 그렇다면 ‘출생에 얽힌 여러 복잡한 사연이 있겠구나’ 하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1. 베냐민 지파의 기원
하나님이 라헬의 태를 잠시 닫아두셨던 게 분명합니다. 창 29:31절 ‘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 받지 못함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자녀가 없었더라.’ 레아의 태를 여셨다고 하고, 라헬은 자녀가 없었다는 표현은, 라헬의 태는 닫아두셨다는 말입니다. 라헬은 처음엔 하나님이 자기 태를 닫아두셨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야곱에게 말도 안 되는 투정을 부렸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생각해낸 방법을 따라, 양자를 얻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만족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아무래도 이게 아닌가벼’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라헬이 어떻게 했습니까? 창 30:22절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의 소원을 들으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므로’ 하나님께 소원을 올렸습니다. 자기의 태를 열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한 것입니다. 라헬의 달라진 모습입니다. 라헬의 신앙이 조금 자란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인생의 해결자이심을 깨달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인생의 공급자이심을 깨달아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는 말씀이, 하나님이 깜박하셨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라헬의 자기 태를 열어달라는 소원의 기도가, 하나님의 때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라헬이 첫아들을 낳았습니다. 라헬은 첫 아들을 안고는, ‘여호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는 소원을 담아 요셉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야곱은 라헬을 통해 요셉을 얻고는,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했으나, 라반에게 붙들려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대신 근로 계약을 다시 쓰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하여 많은 가축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창 30:43절 ‘이에 그 사람이 매우 번창하여, 양 떼와 노비와 낙타와 나귀가 많았더라.’ 하지만 이걸 라반의 아들들이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창 31:1절 ‘야곱이 라반의 아들들이 하는 말을 들은즉, 야곱이 우리 아버지의 소유를 다 빼앗고, 우리 아버지의 소유로 말미암아 이 모든 재물을 모았다 하는지라.’ 야곱은 그들의 말을 듣고는, ‘아, 이제는 진짜로 떠나야 할 때가 됐구나’ 생각했습니다. 마침 하나님께서 야곱의 등을 떠미시기도 했습니다. 3절 ‘여호와께서 야곱에게 이르시되,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하신지라.’ 이제 아내들만 동의해주면 됩니다. 야곱이 떠나야 하는 이유를 설명을 잘해서인지, 하나님이 아내들의 마음을 감동시켜주셔서인지, 아내들이 야곱의 결정에 따르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꿈에 그리던 고향을 향해 떠났고, 라반의 고비와 에서의 고비를 잘 넘기고, 세겜에 정착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밖에 없는 딸이, 추장에게 성폭행을 당하는 일이 발생하고, 그에 대해 야곱의 아들들이 피의 보복을 함으로, 세겜을 떠나 벧엘로 가야 했습니다. 전에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벧엘로 가서,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전제물을 붓고, 또 그 위에 기름을 붓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벧엘에 정착하지 않고 에브랏으로 떠났습니다.
그때 라헬이 해산을 하게 되었는데 난산이었습니다. 창 35:16-20절 ‘그들이 벧엘에서 길을 떠나, 에브랏에 이르기까지 얼마간 거리를 둔 곳에서, 라헬이 해산하게 되어 심히 고생하여, 그가 난산할 즈음에, 산파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지금 네가 또 득남하느니라 하매, 그가 죽게 되어, 그의 혼이 떠나려 할 때에,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의 아버지는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라헬이 죽으매,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되었고, 야곱이 라헬의 묘에 비를 세웠더니, 지금까지 라헬의 묘비라 일컫더라.’ 산파는 득남했다는 소식을 전했지만, 라헬은 희미해져가는 의식으로, 눈물을 글썽이며, ‘베노니’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고단했던 인생의 경주를 끝마쳤습니다. 야곱은 그렇지 않아도 태어나자말자 엄마를 잃은 아들이, 평생 ‘슬픔의 아들’이란 뜻의 “베노니”로 살 게 할 수 없어, ‘오른손의 아들’이란 뜻의 “베냐민”으로 고쳐 불렀습니다. 라헬의 죽음으로, 레아와 라헬의 기나긴 경쟁이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장면은 우리에게 다시 한번 말의 중요성을 깨닫게 합니다. 만약 ‘슬픈 자식’이란 뜻의 베노니라고 계속 부르면, 그 자식이 앞으로 어떻게 기쁜 자식이 되겠습니까? 말이 중요합니다. ‘나는 불행하다!’라고 말하면, 어느새 불행한 삶이 나를 휘감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행복하다!’고 말하면, 어느새 행복한 삶이 나를 휘감게 될 것입니다. 누에는 자기 입에서 나오는 실로 고치를 짓습니다. 그처럼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이 우리 인생의 집을, 그 말한 대로 짓게 될 것입니다.
어떤 축구팀이 중요한 축구시합을 하러 가는데, 그 선수단 차량을 장의사 차량이 막고 있었습니다. 한 선수가 말했습니다. ‘더럽게 재수 없네!’ 그 말을 듣고 다른 선수들도 재수 없다고 생각했고, 선수들의 사기가 떨어졌습니다. 그때 코치가 말했습니다. ‘아니야! 내가 선수 시절에 장의사 차량을 보면 꼭 이겼어!’ 그 말 한 마디가 선수들의 사기를 올려주었습니다. 그 코치는 어떤 예언자보다 위대한 예언자입니다. 우리는 이런 예언자가 되어야 합니다. 파스칼은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했습니다. 연약하지만 생각 하나만 잘 하면, 세계를 다스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생각’이란 ‘살 생(生)’자와 ‘깨달을 각(覺)’자의 합성어입니다. 곧 ‘생명이 있는 자의 깨달음’이 바로 생각입니다.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며 사느냐?’ 하는 것이, 우리의 삶의 내용과 질을 결정합니다.
2. 베냐민에 대한 야곱의 축복
야곱은 죽기 전 열두 아들을 축복했습니다. 창 49:27절 ‘베냐민은 물어뜯는 이리라. 아침에는 빼앗은 것을 먹고, 저녁에는 움킨 것을 나누리로다.’ 베냐민을 물어뜯는 이리에 비유했습니다. 우리 문화권에서는, 이리라는 동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좋은 의미보다는 안 좋은 의미로 사용하곤 합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이리를 맹렬한 기상, 목표를 쟁취하기 위해서 앞을 향하여 나아가는 공격적인 성격을 상징하는 동물로 봤습니다. 이리는 사자처럼 체구가 크지 않는 동물입니다. 체구는 작지만, 아주 강인하고 목표를 성취하는데 탁월합니다. 물어뜯는 이리라는 표현은, 베냐민 지파의 호전적인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베냐민은 태어나자말자 엄마를 잃었습니다. 베냐민은 생존을 위해서라도, 호전적인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실제로 베냐민은 막내였지만, 누구에게도 지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베냐민 지파에서, 큰 인물들이 배출되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사사 중 에훗이 있습니다. 삿 3:15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우셨으니, 그는 곧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왼손잡이 에훗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그를 통하여, 모압 왕 에글론에게 공물을 바칠 때에’ 그는 이스라엘 자손을 모압의 지배로부터 구원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단검을 차고, 혈혈단신으로 뛰어들어, 모압 왕 에글론을 살해하고 이스라엘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그는 물어뜯는 이리 같은 용사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이 있습니다. 삼상 9:21절 ‘사울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이 아니니이까? 또 나의 가족은 베냐민 지파 모든 가족 중에 가장 미약하지 아니하니이까?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말씀하시나이까 하니’ 그는 다윗과의 관계에서 꼬여 실패한 왕이란 역사의 꼬리표를 달았지만, 그는 누구보다 뛰어난 무사였고, 용맹한 왕이었습니다. 그후 다윗을 시기하여 대하는 모습은, 여지없이 물어뜯는 이리 같았습니다.
에스더서에 나오는 모르드개가 있습니다. 에 2:5절 ‘도성 수산에 한 유다인이 있으니 ,이름은 모르드개라. 그는 베냐민 자손이니 기스의 증손이요, 시므이의 손자요 야일의 아들이라.’ 그는 에스더의 사촌 오빠이자, 에스더를 키운 양육자입니다. 그는 하만의 위세 앞에서도 무릎 꿇지 않았고, 유대인들이 학살 당할 위기에서 에스더가 주저할 때 강력하게 말했습니다. 에 4:13-14절 “모르드개가 그를 시켜 에스더에게 화답하되,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목숨을 건지리라 생각하지 말라.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하니” 그 말에 도전을 받은 에스더가 금식 기도 후, 왕에게 나아가 유대인들이 구원받았습니다. 모르드개 안에는, 물어 뜯는 이리같은 근성이 있었습니다.
3. 베냐민 지파에 대한 모세의 축복
모세도 죽기 전 열두 지파를 축복했습니다. 신 33:12절 ‘베냐민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는 그 곁에 안전히 살리로다. 여호와께서 그를 날이 마치도록 보호하시고, 그를 자기 어깨 사이에 있게 하시리로다.’ 베냐민 지파가 받은 축복은, 한 마디로 “그 곁에 안전히 살리로다”입니다. 곧 안전한 보호입니다. 야곱은 베냐민이 태어나자 말자 엄마가 죽었기에, 생존을 위해 강인한 본성을 지닐 거라고 축복했는데, 모세는 막내지파로서 여호와의 사랑을 받게 될 거라고, 하나님의 보호를 받게 될 거라고 축복했습니다. 베냐민 지파는 “그 곁에 안전히 살리로다”는 말씀대로,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예루살렘 성전 곁에 땅을 분배 받아 살게 됩니다. 남북으로 왕국이 분열될 때도, 베냐민 지파는 예상을 깨고, 유다 지파 편에 서서, 다윗 가문과 함께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보호를 받았습니다. 또 “그를 자기 어깨 사이에 있게 하시리로다”라는 말씀은, 아버지가 자기 자식을 등에 업은 모습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사실 이보다 안전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온 삶의 행적을 뒤돌아보면, 네 발자국이 있습니다. 나 혼자가 아닌 주님과 함께 걸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장 힘들었던 순간에는, 두 발자국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건 우리가 걷기조차 힘들어할 때, 주님이 우리를 등에 업고 걸으셨기 때문입니다.
4. 베냐민 지파의 지리적 위치
수 18:11-20절 ‘베냐민 자손 지파를 위하여, 그들의 가족대로 제비를 뽑았으니, 그 제비 뽑은 땅의 경계는, 유다 자손과 요셉 자손의 중간이라. 그들의 북방 경계는 요단에서부터, 여리고 북쪽으로 올라가서 서쪽 산지를 넘어서, 또 올라가서 벧아웬 황무지에 이르며, 또 그 경계가 거기서부터, 루스로 나아가서 루스 남쪽에 이르나니, 루스는 곧 벧엘이며, 또 그 경계가 아다롯 앗달로 내려가서, 아래 벧호론 남쪽 산 곁으로 지나고, 벧호론 앞 남쪽 산에서부터 서쪽으로 돌아, 남쪽으로 향하여 유다 자손의 성읍 기럇 바알 곧 기럇 여아림에 이르러 끝이 되나니 이는 서쪽 경계며, 남쪽 경계는 기럇 여아림 끝에서부터 서쪽으로 나아가, 넵도아 물 근원에 이르고, 르바임 골짜기 북쪽 힌놈의 아들 골짜기 앞에 있는 산 끝으로 내려가고, 또 힌놈의 골짜기로 내려가서, 여부스 남쪽에 이르러 엔 로겔로 내려가고, 또 북쪽으로 접어들어 엔 세메스로 나아가서, 아둠밈 비탈 맞은편 글릴롯으로 나아가서, 르우벤 자손 보한의 돌까지 내려가고, 북으로 아라바 맞은편을 지나 아라바로 내려가고, 또 북으로 벧 호글라 곁을 지나서, 요단 남쪽 끝에 있는 염해의 북쪽 해만이 그 경계의 끝이 되나니, 이는 남쪽 경계며, 동쪽 경계는 요단이니, 이는 베냐민 자손이 그들의 가족대로 받은 기업의 사방 경계였더라.’
베냐민 지파는 작은 영토를 소유했습니다. 막내 지파여서 그런지, 땅도 작게 분배 받았습니다. 그 땅 마저도 대부분 산지로 이루어졌고, 밭이라고는 거의 없고, 양들이 먹을 수 있는 약간의 풀들이 자라는 곳입니다. 토지의 축복을 받지 못했던 베냐민 지파는, 식량 결핍에 허덕였고, 목축업에 목숨을 걸어야 했습니다. 유다 지파에 붙어 있었기에, 예루살렘 가까이 있다는 것은, 그들에게 큰 위로가 됐을 것입니다.
베냐민 지파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여리고입니다. 여리고는 세계에서 가장 낮은 도시로 해저 258미터입니다. 동시에 여리고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이고 성곽 도시입니다. 학자들에 따르면, 여리고에 주전 8,500년부터 사람이 살았다고 합니다. 여리고는 수자원이 풍부한 종려나무의 도시입니다. 여리고 성은 약 12,000명 정도의 규모로서 옛날 도시치고는 꽤나 컸습니다. 여호수아 시대의 여리고는, 두 개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너비 160미터에, 길이 290미터의 타원형 도시였고, 두 개의 벽이 여리고를 감싸며 세워져 있었습니다. 여리고는 두 가지의 뜻이 있습니다. 아람어로는 ‘향기’라는 뜻이고, 히브리어로는 ‘달의 도시’라는 뜻입니다. 사막의 향취가 풍겨나는 여리고에서, 달신 숭배가 성행했다는 것을 암시해줍니다.
다음은 사울 왕의 고향인 기브아가 있습니다. 특히 기브아는 사사기 19장에 보면, 레위인 첩에게 몹쓸 짓을 하여, 결국 이스라엘 연합지파와 베냐민 지파 간에 전쟁이 일어나고, 그때 베냐민 지파는 회복이 힘들 정도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사울은 비극적 역사를 잉태했던 기브아에서 태어났고, 그곳에서 소년 시절과 청년 시기를 보냈습니다. 그의 불안한 정치 행각은, 어쩌면 어린 시절 기브아에서 겪었던 상처와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윗이 칭송을 받을 때, 질투심이 들어 참지 못한 것은, 그 안에 상처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기브아의 영광은, 길보아 산에서 최후를 맞이한 사울에 의해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그 외에도 유명한 곳으로, 솔로몬이 1천 번제를 드렸던 기브온이 있고, 예레미야 선지자의 고향인 아나돗도 있습니다.
5. 베냐민 지파를 상징하는 보석
출 28:15-21절 ‘너는 판결 흉패를 에봇 짜는 방법으로, 금 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 실로 정교하게 짜서 만들되, 길이와 너비가 한 뼘씩 두 겹으로 네모 반듯하게 하고, 그것에 네 줄로 보석을 물리되 첫 줄은 홍보석 황옥 녹주옥이요, 둘째 줄은 석류석 남보석 홍마노요, 셋째 줄은 호박 백마노 자수정이요, 넷째 줄은 녹보석 호마노 벽옥으로 다 금 테에 물릴지니, 이 보석들은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대로 열둘이라. 보석마다 열두 지파의 한 이름씩 도장을 새기는 법으로 새기고’
베냐민 지파를 상징하는 보석은, 셋째 줄 세 번째에 위치한 자수정입니다. 자수정은 영어 성경에 아메티스트(amethyst)로 나옵니다. 자수정은 보랏빛 색상을 띱니다. 예전엔 보라색이 하늘을 상징하는 푸른색과, 사람의 피를 상징하는 붉은색이 합쳐져 나온 색이기 때문에, 보라색을 하늘과 인간을 이어주는 신성한 색으로 여기기도 했습니다. 자수정은 오늘날 우리는 흔히 볼 수 있지만, 당시 고대 중동 지방에서는 구하기도 힘들고 만들기도 힘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잘 다듬으면 가장 귀한 보석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이는 베냐민 지파와 성향이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베냐민 지파 사람들 중에, 유독 무사가 많았습니다. 그들 중에 호전적이 전투적이며 침략적이고 용맹하며 승부욕이 강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만약 그들이 다듬어지지 않는다면, 폭력배나 산적이 되어 파괴를 일삼을 것이고, 그들이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다듬어지면, 신약의 바울처럼 쓰임받게 될 것입니다.
바울 사도도 베냐민 지파입니다. 그가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 회심하기 전에,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교회를 박해하고, 성도를 박해하는 일에, 누구보다 열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대제사장의 공문을 들고, 다메섹에 있는 성도들을 잡으러 갔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나 회심 후에는, 예수님과 그 복음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골 1:24절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행 20:24절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그는 실제로 AD 64년경 로마에서 순교를 당할 때까지, 그렇게 살았습니다. 쓸모없는 인생은 없다고 봅니다. 누구나 다듬어지기만 하면,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자기의 모난 부분을, 스스로 잘 다듬는 게 좋습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했는데, 하나님의 정은 살짝만 맞아도 아픕니다. 우리 모두 최고의 세공자인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자수정처럼 빛나는 보석 같은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야곱이 ‘베노니’를 개명하여 ‘베냐민’이라 함은, ‘내 오른손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성서 속에서 오른편, 오른손은 ‘힘, 행복, 총애’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베냐민이란 ‘행복의 아들, 기쁨의 아들, 힘의 아들, 사랑의 아들’로 소망과 위로의 이름이요 긍정적이며 희망찬 이름입니다. 신앙인들이 괴로움, 슬픔, 절망 속에서 얻고, 받고, 소유한 것은, 오히려 기쁨이요 위로이며 소망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인 우리는 탄식할 수밖에 없는 세상에서, 소망과 위로의 주님만을 바라봄으로, 장차 있을 기쁨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베노니를 베냐민이라고 고칠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한 것이요, 미래를 앞당겨 살 수 있는 신앙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고전 10:13절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어떤 목사님이 설교 중에 ‘믿습니까?’라고 물으면, 모든 성도들이 ‘아멘! 아멘!’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목사님의 마음에, 성도들이 정말 믿음이 있어, 아멘을 하는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설교를 시작하기 전 무조건 ‘믿습니까?’라고 물었지요. 역시 모두 ‘아멘!’이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이 ‘확신하십니까?’라고 되물으니 아무도 아멘을 하지 않았습니다. 목사님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믿습니까와 확신합니까가 무엇이 다릅니까? 그리고 또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했는데, 아멘이라고들 하셨습니까? 나는 아직 설교도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내 속에 믿음이 없으면서, 아멘 함은 부도 수표 발행이요, 이를 습관적으로 함은 부도 수표 남발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살고 있는 성도들에게는, 전적인 베노니의 상황은 없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베냐민의 생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베노니의 상황 속에서 베냐민의 생활을 하지 못함은, 그리스도와 동행 동거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시지 않은 까닭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가장 귀한 선물들은, 슬픔과 관계된 것들이 많습니다. 땅에서 절망적일 때, 하늘의 소망을 바라보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하나님 없이 생각하는 자들은 언제나 베노니요, 하나님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항상 베냐민입니다. ‘모든 사람의 열쇠는, 그 사람의 생각이다.’ 시인 에머슨의 말입니다. 인생은 생각에 의해 기쁨도 될 수 있고, 슬픔도 될 수 있습니다. 내 생각 여하에 따라 하나님께서 나를 책임져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생각은, 그리스도를 닮아야만 됩니다. 지금까지의 베노니 생각, 베노니 눈, 베노니 말, 베노니 귀, 베노니 발걸음을, 베냐민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긍정이요 기대이며 소망입니다. 이제부터 베노니를 베냐민이라 고칠 수 있는 믿음과, 미래를 앞당겨 살 수 있는 신앙을 가진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신앙인은 상황에 정복당하는 자들이 아니라 상황을 신앙으로 정복하는 사람들임을 믿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 그렇지만 아니다의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또한 슬픔을 통하여 용기를 얻을 수 있게 하시고, 신비한 기쁨을 맛볼 수 있게 하옵소서. 우리에게는 베노니를 베냐민이라 고칠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하며, 미래를 앞당겨 살 수 있는 신앙을 소유하게 하옵소서. 내 속에 믿음이 없으면서 아멘함은 부도 수표 발행이요, 이를 습관적으로 함은 부도 수표 남발임을 알고 믿음으로 행하게 하옵소서. 신앙은 세습되는 것도 전수되는 것도 아니니, 믿음의 면허증을 내가 직접 하나님께로부터 받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