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장미 원장이 연결 곡으로 세팅해둔 다음곡이 시작되었다. 새로운 음악이 시작되자 스타트부터 다시 했다. 두 번째 라운드는 최고 하이라이트를 장식할 작품명 황제(더킹)였다. 음악은 [이슈타르(Ishtar)의 유칼립투스의 추억(Horchat Hai Caliptus)]이 흐르기 시작했다. 눈사람이란 드라마의 삽입곡이었는데 백장미는 이 곡을 무척 좋아했다. 장승백이 살아생전에 두 사람이 왈츠 시범을 보일 때 사용하는 주제곡이기도 해서 더욱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음악을 타고 첫 스타트를 하기 바쁘게 제왕다운 권위와 위엄을 내뿜었다. 황제의 막강한 권력과 세계를 제패하려는 야욕이 묻어났다. 스타트하자마자 이어지는 일명 스핀스핀이라는 피겨명 컨티뉴어스 스핀턴은 일국의 제왕다운 막강한 힘과 권력을 뽐내는 듯 했다. 백만 대군이 온 천지를 휩쓸어 버렸다. 그 앞에는 누구도 막을 수 없고 방해할 수 없는 막강한 파괴력이 묻어났다. 멈출 수 없도록 탄력이 붙은 수레바퀴가 굴러가는 듯 했다. 텔레마크와 텔레스핀으로 물살 소용돌이에 빨려들고 하늘로 치솟는 토네이도 회오리에 감기는 듯 몰아쳤다. 그렇게 숨 가쁘게 한바탕 휘몰아 친 후 바로 평온함과 고요함이 찾아 들었다. 드로우어웨이 오버스웨이로 결합된 세임풋런지와 레이디 양쪽 발차기. 남녀가 조화롭게 피워낼 수 있는 최고의 절정을 이루는 아름다운 꽃이었다. 바로 전에 황야에서 일어난 회오리 광풍이 지나가고 나타나는 맑은 호수 위에서 홍학들과 백학들이 평화롭게 노닐었다. 두 마리의 학은 날개를 활짝 펴고서 서로 엉켜서 뒹굴며 사랑의 춤을 추었다. 그 길고도 쭉 곧은 다리를 번쩍 들어올리기도 했다. 그렇게 잠시 여유를 찾다가 다시 먼 곳으로 정벌을 향한다.
바운스 폴어웨이와 싱코페시티드 텀블턴으로 대륙을 가로 지른다. 곧바로 온 세상을 휩쓸어 버리는 또 다른 회오리가 몰아쳤다. 레프트 휘스크와 스탠딩 스핀으로 정신없이 광풍처럼 한 번 더 몰아붙였다. 멈추지 못하고 팽이처럼 회전하여 빅탑으로 또다시 공중으로 치솟아 올랐다. 두 번째 라운드 황제는 이처럼 숨 한 번 몰아 쉴 틈도 없이 격렬하고 힘찬 파워로 막강한 제왕의 권위와 풍모를 표현했다. 황제를 한 바퀴 돌아서는 새로이 스타트를 하지 않고 바로 다음으로 여왕(퀸)을 이었다.
홀 안에는 음악이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이슈타르의 뛰어난 호소력과 독특한 가창력이 더해서 애절함과 숨이 넘어 갈 듯한 파워풀한 열정을 뿜어내고 있었다. 왈츠를 추고 있는 두 사람의 영혼 깊은 곳까지 파고드는 신비감 속으로 빠져 들게 했다. 작품명 여왕은 그 명칭답게 아름다운 여왕의 카리스마가 담겨 있었다. 아름답고 인자해 보이지만 어느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권위와 위엄을 풍겼다. 힌지라인의 결합과 백윙 렉훅 오프셋라인 같은 것들은 왈츠 고수들도 잘 구사하지 못 하는 아름답지만 고난이도의 피겨들이었다. 더군다나 한 술 더 떠서 힐풀과 룸바크로스의 조합까지 더해져서 어지간히 춤 좀 춘다는 초고수들조차 범접키 어려웠다.
하지만 이런 것들을 박달재는 전혀 무리 없이 백장미 원장과 구현해내고 있었다. 그것은 장승백의 영혼이 그의 몸속에서 그를 조종했던 정보가 그대로 보존 된 탓이었다. 장승백의 영혼이 빙의되어서 박달재를 훈련시킨 결과물이었다. 자전거 타기나 수영처럼 한 번 몸에 배면 자연스럽게 우리 몸이 기억하는 것처럼. 마지막까지 루틴을 다 돌았는데도 아직도 이슈타르의 음악은 끝나지 않았다. 음악은 그들의 영혼까지 침투해서 가슴을 후벼 팠다. 그들은 처음 돌았던 프린세스를 조금 더 이어갔다. 그제야 음악이 마무리 되고 있었다.
박달재는 백장미 원장을 홀의 가운데로 리드해갔다. 그리고 엔딩부를 드로우어웨이 오버스웨이와 콘트라첵으로 느리게 장식했다. 그의 사부격인 장승백이 살아생전에 언제나 백장미 원장에게 했던 것처럼 그대로였다. 음악이 끝나고도 박달재는 엔딩 드로우어웨이 오버스웨이를 풀지 못했다. 그녀 또한 눈을 감은 채 그와의 홀드를 풀지 못하고 마지막까지 여운을 음미하고 있었다. 홀 안에는 정적만 흐르고 고요했다.
그런 시간이 잠시 더 흘렀다. 정적이 흐르던 학원 안이 갑자기 박수 소리가 터지기 시작했다. 언제 왔는지 학원생들이자 댄스러브 동호회 회원들이 그들을 향해 힘찬 박수를 아낌없이 쳐주고 있었다. 오늘이 동호회 댄스러브의 정기 모임겸 강습이 있는 날이었다. 그제야 엔딩 자세로 있던 그들이 홀드를 풀었다. 박달재는 예의 하던 대로 백장미 원장의 손을 이끌어서 회원들 앞으로 에스코트 해갔다. 몇 명 안 되는 회원들 앞에서 그들은 정중한 인사를 올리는 에티켓을 보여 주었다. 회원들은 환호성을 지르면서 또 한 번 박수를 쳤다.
"박달재님 너무 멋져요!" 키가 자그만하고 귀엽게 생긴 팬지가 엄지를 치켜세우며 큰 소리로 말했다. "와! 최고예요." 치과의사인 스마일도 활짝 미소 지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예전에는 박달재가 왈츠를 못해서 다른 사람들한테 민폐만 끼치니까 나오지 말라고 했던 그녀였다. 그녀가 이렇게 돌변했다. 하긴 그때의 박달재가 아니었다. 박달재의 왈츠 실력이 변하니까 세상이 변한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변했고 모든 게 달라졌다.
백장미 원장은 박달재와 마주 보며 아름다운 미소로 얼굴이 활짝 펴졌다. 그리고 박달재를 향해 엄지를 들어 보였다. "정말 잘 했어요. 최고예요." 그녀가 활짝 웃으며 그를 추켜세웠다. 그녀의 칭찬은 진심이었다. 이제 박달재가 예전의 장승백 못지않은 기량과 실력을 갖추었다고 평가했다. 그녀 자신과 춤을 추는데도 전혀 불편함이 없었다. 오히려 더 편하고 마음의 위안이 되었다. 이제 어지간한 실력자들은 그를 따라 오지 못하고 능가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야말로 장승백이 살아생전에 늘 추구하던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경지에 도달하고 있었다. 한 사람만 빼고는. 지금 하늘나라에 가있는 그의 사부 장승백외에는... 결국 천상천하에 각 한명씩 왈츠의 대가가 존재하게 되었다. 결국 그들은 서로 같은 분신이었다. 어쩌면 서로 동일인이기도 했다.
음악이 왈츠를 추고 싶은 욕구를 일으키는 비트로 바뀌었다. 동호회 댄스러브 회원들은 스스로 일어나서 서로 짝을 맞추어 왈츠를 추기 시작했다. 학원 안은 즉석 세미 댄스 파티장이 되었다. 회원들끼리 어울려서 음악에 맞추어 댄스라인(LOD : Line of Dance)을 돌았다. 팬지가 언니 데이지 손을 이끌고 박달재 앞으로 왔다. "우리 언니 부탁해~요!" 그녀는 인기 연예인 남자 엠씨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데이지의 손을 박달재한테 넘겨주었다. 데이지는 미소로 박달재를 쳐다보았다. 박달재도 환하게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고 플로어로 안내했다.
"오빠 다음은 나야. 예약이야!" 그들의 뒤에서 치과의사 스마일이 입에다 손나팔을 만들어서 소리쳤다. 박달재는 고개를 돌려 데이지 손을 잡지 않은 다른 쪽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 이제 여성 회원들은 너도 나도 서로 박달재와 왈츠를 추고 싶어서 안달이었다. 백장미 원장도 어느 새 동호회 회장인 종치기님과 홀드를 하고서 왈츠를 추고 있었다. 학원 홀 안에는 패티페이지의 체인징 파트너가 음질 좋은 스피커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