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영천 여행중 내게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은 횡계구곡에 있는 옥간정과 모고헌이라는 정자였다.
용계리 매화 마을에서 출발할때만 해도 그저 옛날 정자를 하나 찾아가는구나 생각했는데
막상 현지에 도착해보니 마치 숨겨져 있던 보석을 다시 찾아낸 기분이었다.
옛선비들의 원림으로 유명한 담양의 소쇄원과 식영정이 연상되는 곳이다.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조금은 쇠락해 보였지만 갈고 다듬으면 참으로 멋진 풍광이 될것이다.
먼저 옥간정과 모고헌이 있는 횡계구곡에 대해 알아보고 이정자 두개를 짓고 이곳에서
후학을 가르쳤던 정만양, 준양 형제에 대해 알아보자.
대구매일신문에서 인용했다.
횡계구곡은 영남 사림으로 조선후기 성리학자인 훈수 정만양(1664∼1730)과 지수 정규양(1667∼1732) 형제가
경영한 구곡원림으로 도로와 횡계저수지에 의해 일부 훼손됐지만 비교적 잘 보존돼 있다. 훈수와 지수는 횡계에
태고와, 옥간정 등 정자를 지은 뒤 구곡을 설정하고 이곳으로 거처를 옮겨 주자의 도학적 삶을 실천했다.
벼슬을 하지 않은 훈수, 지수 형제는 횡계구곡에서 학문과 후진 양성에 전념해 수많은 인재를 길러냈다.
횡계구곡은 영천시 화북면 옥계리에서 보현산천문대 가는 신작로 오른쪽에 위치해 차를 타고 달리다 보면
지나치기 쉽다.
횡계구곡 제1곡 쌍계는 옥계리에서 횡계리로 가는 들머리의 횡계교 아래로 노귀재 쪽에서 내려오는 옥계와
보현산에서 흘러오는 횡계가 만나는 지점이다. 쌍계에서 600m 정도 올라가면 제2곡 공암이 나온다.
공암은 도로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잘려나가 본래의 경치를 찾아보기 어렵다.
횡계구곡 3곡인 태고와는 지수 정규양이 35세 되던 1701년에 건립됐으며 1730년 제자들이 개축해 모고헌이라
불렀다. 가운데 온돌방을 두고 사방에 모두 마루를 두른 독특한 평면구조를 이루고 있다.
태고와 위쪽에 있는 4곡 옥간정은 훈수와 지수가 학문 연구 및 후학 양성을 위해 1716년에 지은 정자로 앞쪽
계곡의 언덕과 바위에 ‘격진병’ ‘광풍대’ ‘지어대’ ‘제월대’ 등의 이름을 붙였다.
바위 사이를 막아 작은 연못을 만든 뒤 뗏목을 타고 거문고를 켜기도 했다.
횡계리 주민 윤영주(76) 씨는 “새마을운동으로 마을의 교량 3개가 놓이기 전 옥간정 앞에 나무다리가 있었고
태고와 앞에는 돌다리가 있었다”며 “현재 제방위의 길은 경지정리 당시 시멘트로 포장됐다”고 말했다.
윤 씨는 “마을 사람들이 화북면 자천장에 갈 때 이용한 산기슭 쪽의 옛길은 작년에 완전하게 포장됐다”고 말했다.
옥간정 위로 제5곡 와룡암, 제6곡 벽만, 제7곡 신제, 제8곡 채약동, 제9곡 고암 등이 위치하고 있다. 신제는 일제
강점기에 만든 현재 횡계저수지의 제방이 있었던 자리로 당시에도 새로 둑을 쌓은 것으로 보인다.
채약동은 횡계저수지 오른쪽 끝지점의 소나무 군락지의 마을로 수몰됐다. 고암은 채약동에서 자하봉 산길로 500여m
올라간 지점이며 고산사가 있었던 곳이다. 훈수, 지수가 고산사에서도 후진을 양성해 서당골로도 불린다.
먼저 모고헌이다
조선 숙종 때 성리학자인 정규양(1667∼1732) 선생이 숙종 27년(1701)에 지은 집으로 처음에는 태고와라 하였으나, 영조 6년(1730)에
문인들이 수리해서 모고헌이라 하였다.
선생은 형인 정만양 선생과 이곳에서 제자를 양성하기 위해 세운 옥간정을 왕래하였으며, 형제간의 우애를 상징하는 뜻으로 훈과 지를 호로 삼았다.
건물의 규모는 앞면 2칸·옆면 2칸으로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며, 4면에 툇간을 둔 독특한 건물이다.
수령300여녀 정도된 향나무,
정각사에 살던 스님이 어린 향나무(자단치경) 두 그루를 줌으로 태고와와 대전에 심어 오늘에 이른다고 한다.
독특한 구조의 정자
동생 지수 정규양이 지은 모고헌에서 올려다보면 형인 정만양이 살면서 후학을 가르쳤던 옥간정이 가까이에 보인다.
횡계구곡중 3곡 태고와, 현재는 모고헌으로 불린다. 계곡에서 올려다 보이는 누각이 날아갈듯 하다.
분꽃나무
명자꽃
복사꽃
정만양(1664~1730), 정규양(1667~1732) 형제
정만양의 자는 개춘, 호는 훈수. 정규양의 자는 숙향, 호는 지수.
관향은 영일이며 호수 정세아의 5세손으로 훈수선생은 안동 임하 천전리 외가에서 지수선생은 영천읍 대전동에서 태어났다.
형제간의 우애를 표상하는 많은 저술도 ‘훈지록’이라 했고 자손의 이름도 ‘훈지’ 두글자의변과 머리를 따서 짓도록 하여 유명하여 지금도 시행하고 있다.
1716년에 옥간정이 지어졌고, 1720년 2월부터 옥간정에서 삭강을 시작100여명에 이르는 제자를 가르치기 시작하여 매산 정중기(참의)
풍원 부원군 조현명(영의정) 명고 정간(승지)등 당대의 명현을 길러 냈었다. 오로지 학문 연구에만 전력하여 훈지록을 비롯하여 100여권의 저서를 남기고 있다.
이어서 옥간정이다.
모고헌보다 규모도 크고 경치도 좋은것 같다. 여기가 4곡이다.
몇년전까지 종부가 이곳에 사시면서 예약하는 손님들께 맛깔진 음식을 차려냈다고 하는데 지금은 연세가 많으셔서 안한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모고헌보다 조금더 상태가 나은것 같다.
옛선비들도 꽃을 심어놓고 보는걸 즐기셨다.
광대수염
어사화, 영춘화라고도 한다.
목련
탱자나무
홍매
벚꽃
광대나물
봄맞이꽃
꽃마리
두릎. 먹을때가 됐는데도 나무에 그대로 달려있다.
농촌일손이 많이 부족한 모양이다.
무슨 나무인지?
5곡 와룡암이다.
산비둘기 한쌍이 다정하다.
길을 닦고 새마을 운동을 할때 유적들을 그대로 보존하면 개발을 했으면 훨씬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아 있을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