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천축국의 아육왕이 황철 5만 7천근과 황금 3만 푼을 실은 큰 배가 산서성(山西城) 하곡현(河曲縣)의 사포(絲浦)에 들어왔다. 황금이 도착한 이 하곡현(河曲縣)은 민족의 반역자 이병도가 조작한 한반도 속의 경남 울산 지방일까요? 중국 산서성의 하곡현 일까요? [1]. 황룡사장육(皇龍寺丈六),삼국유사] 신라 제 24대 진흥왕이 즉위한 553년 2월에 장차 紫宮殿(자궁전)을 용궁 남쪽에 지으려고 하자 황룡이 그곳에 나타나므로 궁궐을 바꾸어 佛寺(불사)를 설치하고 이름을 “황룡사”라 하고 569년에 이르러 둘레에 담장을 쌓아 17년 만에 완성하였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海南(해남)에 큰 배 한 척이 河曲縣(하곡현) 絲浦(사포)에 들어왔다.
이 배를 검사해 보았더니 公文(공문)이 있었는데 그 공문에서 이르기를 西竺(서축:서천축국)의 阿育王(아육왕:아소카 왕)이 黃鐵(황철) 5만 7천근과 황금 3만 푼을 모아 장차 釋迦世尊像(석가세존상)과 두 보살상을 鑄造(주조)하려고 하였으나 주물로 불상을 만드는 기술이 부족하여 불상을 만들지 못하자 배에 실어 바다에 띄우면서 축원하기를 부디 인연이 있는 국토에 도착하여 丈六尊像(장육존상)을 완성하여 주기를 기원합니다. 아울러 석가세존 불상(佛像)과 두 菩薩像(보살상)의 모형도가 함께 실려 있었다. [산서성 삭제됨] 河曲縣(하곡현)의 관리가 문서를 갖추어 상부에 보고하자 진흥왕이 듣고 사자를 파견하여 河曲縣(하곡현)의 城(성) 동쪽 爽塏(상개) 지역에 東竺寺(동축사)를 창건하여 三尊像(삼존상)을 안치해 두고 금과 鐵(철)은 京師(경사:경도)에 수송하여 大建(대건) 6년 갑오(574년)에 장육존상의 鑄造(주조)는 쇠 물을 부어 한번에 만들었는데 그 중량이 3만 5천근과 황금이 1만 136푼이 들어갔다. 두 菩薩象(보살상)은 철이 1만 2천근과 황금 1만 136푼이 들어갔다. 이 장육존상을 황룡사에 안치하여 두었더니 그 이듬해에 佛像(불상)에서 눈물이 발꿈치까지 흘러내려 땅이 한자나 젖어있었다. 이것은 대왕이 升遐(승하)하실 조짐이었다. 혹 佛像(불상)이 완성된 것은 진평왕 재임 시대라고 하지만 잘못이다. 別本(별본)에서 이르기를 아육왕은 西天竺(서천축) 大香華國(대향화국)에서 부처님이 세상을 떠나신 후 100년 만에 출생했기 때문이다. 아육왕은 부처님에게 공양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생각하다 금과 쇠를 몇 근씩을 모아 세 번이나 佛像(불상)을 鑄造(주조)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이때 아육왕의 태자가 홀로 그 일에 참여하지 않으므로 왕은 사람을 시켜 그 까닭을 물으니 태자가 아뢰기를 그 일은 혼자의 힘으로는 성공하지 못할 것을 저는 벌서 알고 있었습니다. 왕은 그의 말을 옳게 여겨 황철을 배에 실어 바다에 띄웠더니 그 배는 남염부제 16개의 大國(대국)과 500개의 中國(중국)과 十千(10천)의 小國(소국)과 8만 부락을 두루 돌아다녔으나 모두다 쇠를 부어 불상을 만드는 鑄造術(주조술)이 부족하여 불상을 만들 수 없었으나 최후로 신라국에 도착하였던 것이다. ◆. 황룡사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강연하였다. 신라는 鑄造(주조) 기술력이 뛰어나 진흥왕이 文仍林(문잉림)에서 鑄造(주조)하여 佛像(불상)을 성공적으로 만들어 완성시키니 아주 좋은 모양이 모두 다 갖추어졌다. 이로서 아육왕은 근심이 없어졌다. 하여 無憂王(무우왕)이라 불렀다. 그 후 대덕 慈藏(자장)이 西學(서학)을 배우기 위해 중국(중천축국)의 오대산(五臺山)에 도착하였는데 문수보살이 현신하여 비결을 주면서 그에게 부탁하기를 너희 나라에 있는 황룡사는 “석가모니 부처님과 가섭불”이 강연하신 곳이니라, 그 지역에 아직 까지 가섭불의 宴坐石(연좌석)이 있느니라. 고대 西天竺國(서천축국) 無憂王(무우왕:아육왕;아소카왕)이 황철 몇 근을 모아서 바다에 띄웠던 것인데 1,300년이 지난 뒤에 너희 나라에 도착하여 불상을 주조로 완성하여 황룡사에 모셔두었던 것이다. 이러한 것은 대개 부처님의 위신력과 석가모니 부처님과 인연이 있는 나라이기 때문일 것이다. (別記(별기)에 기록된 것은 符道(부도)와 같다) 황룡사에 佛像(불상)을 성공한 후에 東竺寺(동천사)의 三尊佛(삼존불)도 역시 황룡사로 옮겨 안치하였다. 寺記(사기)에서 이르기를 진평왕 5(6)년 갑진(584년)에 대웅전을 만들었고 선덕왕때 이 절의 초대 주지는 眞骨(진골) 歡喜師(환희사)이고 제 2대 주지는 慈藏國統(자장국통)이고 그 다음은 國統惠訓(국통혜훈)이고 그 다음은 廂律師(상률사)가 주지가 되었다. 지금은 고려 고종때 몽고병이 침략하여 불에 탄 이래로 大佛像(대불상)과 두 보살상은 모두 다 녹아 없어지고 작은 석가여래상만 아직까지 남아있을 뿐이다. [2]. [황룡사 9층탑 :삼국유사] 신라 제 27대 선덕왕 제위 5년(636년)에 慈藏法師(자장법사)가 西學(서학:서역국 학문)을 배우기 위하여 중국(중천축국)으로 유학하여 五臺山(오대산)에서 文殊菩薩(문수보살)이 감응하여 佛法(불법)을 전수 받았다. 또한 문수보살이 이르기를 너희 신라국왕이 바로 천축국(天竺國)의 刹利種王(찰리종왕)이며, 부처님의 수기(受記)를 받았느니라. 그렇기 때문에 유인록(有因錄:유인씨의 기록문)에 東夷(동이)는 共工族(공공족)과는 같지 않느니라. 그러나 산천이 험준한 탓에 사람들의 성질이 거칠고 사나워서 邪惡(사악)한 종교를 많이 믿고 있다. 그래서 때때로 혹 天神(천신)이 재앙을 내리고 있으나 多聞比丘(다문비구)가 신라국 안에 있기 때문에 君臣(군신)이 편안하고 만 백성들이 화평한 것이다. 라고 말을 마치자 이내 몸을 감추고 보이지 않았다. (중략) 신라에서 황룡사 9층탑을 완성하면 이웃 나라가 항복하고 1,日本(일본), 2, 中華(중화), 3, 吳越(오월), 4, 托羅(탁라), 5, 鷹遊(응유), 6 靺鞨(말갈), 7, 丹國(단국:거란), 8, 女狄(여적:여진), 9, 穢貊(예맥)의 9한(九韓)이 와서 조공하며, 신라 왕조는 길이 태평할 것이요, 탑을 세운 뒤에 죄인을 사면하고, 팔관회를 베풀면 외적이 침범하지 못하고 곧 진압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서기 643년 16일 자장법사는 본국으로 돌아와 탑의 건립에 대한 사항을 임금에게 아뢰자 선덕왕이 듣고 群臣(군신) 회의를 열었다. 군신들이 말하기를 백제의 工匠(공장)이를 초청하여 건립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이에 보물과 비단을 가지고 백제에 가서 초청하였다. 이리하여 백제의 工匠(공장) 이름이 阿非知(아비지)라는 사람이 왕명을 받고 신라에 와서 木石(목석)에 대한 전적인 책임을 맡고 신라는 伊干(이간) 龍春(용춘 일명 龍樹(용수)가 맡아 이 역사를 주관하였는데 이때 거느리고 같이 일한 小匠(소장)은 200명이나 되었다. 처음 절의 기둥을 세우던 날 백제의 工匠(공장) 阿非知(아비지)의 꿈에 백제 본국이 멸망하는 모양을 보고 아비지는 마음속에서 의심이 일어나 공사일을 중지하였더니 갑자기 대지가 진동치며 밤중과 같은 어둠 속에서 늙은 老僧(노승) 한사람과 젊은 장사 한사람이 金殿門(금전문)에서 나와 그 기둥을 세우고는 老僧(노승)과 壯士(장사)는 모두 없어지고 나타나지 않았다. 백제의 아비지는 공사를 멈춘 것을 후회하고 마음을 고쳐 9층탑을 완성시켰다. [3]. [삼국유사 탑상4, 황룡사9층탑]
황룡사 9층 목탑은 신라 삼보(三寶)의 하나로, 643년 선덕여왕이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자장(慈藏)의 요청으로 서기 645년 신라의 수도, 경주(서라벌) 남쪽에 높이 225척(80.16m)의 거대한 목조 탑이 창건했다. 이 탑은 건립된 후 50년이 지난 698년에 벼락을 맞아 불탄 이래 여러 차례 다시 지어졌으나 1238년 몽골군의 침략으로 불탄 이래 중수되지 못했다. (중략)
또한 삼국사기 및 寺中古記(사중고기)를 살펴보면 진흥왕 14년 계유(553년) 황룡사를 처음 창건한 후에 선덕왕 시대인 貞觀(정관) 19년 을사(645년)에 처음 탑을 이루고 제 32대 孝昭王(효소왕)이 즉위한 7년 聖曆(성역) 무술(698년) 6월에 절에 벼락이 떨어졌다. (寺中古記(사중고기)에서 이르기는 聖德王(성덕왕) 시대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 성덕왕 시대는 戊戌(무술)년이 없기 때문이다) 제 33대 성덕왕 경신(720년)에 다시 이 절을 세웠으나 제 48대 경문왕 무자(868년) 6월에 두 번째 벼락을 맞았으며 같은 임금 시대에 세 번째로 절을 다시 세웠다. 고려 光宗(광종) 즉위 5년 계축(953년) 10월에 세 번째 벼락을 맞았고 顯宗(현종) 13년 신유(1021년)에 네 번째로 절을 重修(중수)하였다. 또 고려 靖宗(정종) 2년 을해(1035년)에 네 번째 벼락을 맞았고 또한 文宗(문종) 갑진(1064년)에 다섯 번째 重修(중수)하고 또한 憲(獻)宗(헌종) 말년 을해(1095년)에 다섯 번째 벼락을 맞고 肅宗(숙종) 원년 병자(1096년)에 여섯 번째로 중수하고 또 高宗(고종) 16년 무술(1238년) 겨울에 몽고 병이 침입하여 西山(서산 : 선도산)에 병사 들이 불을 질러 황룡사 탑과 殿閣(전각)과 丈六尊像(장육존상)과 절집이 모두다 재앙을 입었다. ➤ 경주의 황룡사는 가짜이다 刹註記(찰주기)에서 이르기를 황룡사 9층탑의 높이는 225척(80.16m)이고 鐵盤(철반)위의 높이가 42尺(척)이고 철반 밑은 183尺(척)이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문화관광부와 문화재청이 경주시와 함께 경주를 역사문화도시로 확정하여 ‘경주 황룡사지’를 복원키로 하고 2005년부터 2009년까지 약 400억 원을 들여 황룡사지내에 회랑과 금당을 복원하고 특수영상을 이용하여 황룡사 9층 목탑을 재현하겠다. 고 발표하였다. ➤ 하곡현은 중국의 산서성인가? 경남 울산군인가? 고조선 5천축국 중의 1국이었던 서천국의 아육왕이 황철 5만 7천근과 황금 3만 푼을 실은 큰 배가 산서성(山西城) 河曲縣(하곡현)의 絲浦(사포)에 들어왔다. 황금이 도착한 이 하곡현은 이병도가 조작한 한반도 속의 경남 울산 지방일까요? 중국 산서성의 하곡현일까요? [삼국유사 탑상 제 4] 溟州(古河西府也)五臺山寶叱徒太子傳記(명주(고하서부야)오대산보질도태자전기) 즉 명주는 (고대 하서부이다) 또한 溟州(명주)는 중국의 5대산에 있다. 五臺山是白頭山大根脈 : 5대산은 백두산의 뿌리가 되는 큰 산맥이다. [삼국사기 잡지 제 3 지리 1의 良州(양주)] ➤ 臨關郡(임관군)은 본시 毛火郡(모화군:蚊化(문화)라고도 씀)이다. 聖德王(성덕왕)이 城(성)을 쌓아 일본 적들의 통로를 차단하던 곳이다. 경덕왕이 개명하여 지금은 慶州(경주)에 합속하였다. 이 임관군에 縣(현)이 둘이 있다. 1 東津縣(동진현)은 본시 栗浦縣(율포현)이였으나 경덕왕이 개명하여 지금은 蔚州(울주)에 합속시켰다. 2.[河曲(一作河西)縣 婆娑王時 取屈阿火村 置縣 景德王改名 今蔚州] 해설= 河曲縣(하곡현)은 河西縣(하서현)이라고도 한다) 婆娑王(파사왕)때에 屈阿火村(굴아화촌)을 쟁취하여 縣(현)을 설치하고 경덕왕이 개명하여 지금은 蔚州(울주)라 한다. 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의 주(註) 河曲縣(하곡현)의 絲浦(사포:지금 蔚州(울주->울산군(蔚山郡) 谷浦(곡포)에 왔다. 조국을 배신하고 일왕에게 충성했던 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는 梁州(양주)를 경남 양산군에 속하고 臨關郡(임관군)을 현재 경북 월성군 외동면 일대를 울산군이라 하고 河曲縣(하곡현)은 현재 경남 울산 지방이라고 임의대로 조작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중국 또한 산서성(山西城) 하곡현(河曲縣)의 사포(絲浦)를 포진도(浦津渡)로 지명을 바꾸어버렸다. [울산광역시[蔚山廣域市]의 연혁] 울산(蔚山)은 일제식민지시대의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울산군의 21개면이 14개면으로 통합되고, 언양군은 폐지되어 언양군의 6개면이 5개면으로 폐합, 울산군에 편입되었다. 이때 울산군의 상부면·내현면이 통합된 부내면이, 1916년에 울산면으로 개칭되었다가 1931년에 울산읍으로 승격되었다. 1962년에 울산읍·방어진읍·대현면·하상면 전역과 청량면·범서면·농소면의 일부지역을 병합해 울산시로 승격하고, 이 지역에 울산공업단지를 건설함에 따라 한국의 대표적인 공업도시로 성장했다. [울산광역시 연혁참조]
➤ 울산시 동구 동부동의 가짜 동축사 울산시 동구 동부동의 가짜로 만든 동축사는 울산지방에서는 가장 오래된 석탑으로 인정되어 지방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지금의 동축사는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동축사가 아닙니다. 동축사는 일제식민지시대의 1931년 창건(중수)하였다. 일제식민치하에서 가짜 동축사로 지정한 인후, 1975년 현대그룹 정주영회장 등이 시주하여 주지 도암(道庵)스님이 중창하였다. 이때 600근의 범종을 주조하여 새로 지은 범종각에 두었다.
동축사 석탑은 본래 대웅전 앞에 있었으나 1977년 중창할 때 경내에서 약 40m 서남쪽으로 옮겼다. 기단의 한변 길이가 1.8m, 높이 3.25m이다. [동축사 연혁참조] ➤ 중국의 산서성 하곡현(河曲縣)에 동축사가 있다. | ▲ 중국의 산서성 하곡현(河曲縣) ©플러스코리아 |
중국 山西省(산서성) 河曲縣(하곡현)을 河西縣(하서현)이라고도 하며, 지금도 山西省(산서성)에 河曲縣(하곡현)이 있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 514쪽에 의하면, 산서성 동남쪽 70리에 하곡현(河曲縣)이있다. 라고 하였다. 따라서 황룡사는 산서성 하곡현 東南쪽 70리에 있음을 뚜렷이 기록돼 있습니다.
중국의 山西省(산서성), 河曲縣(하곡현) 爽塏(상개) 지역에 지금도 東竺寺(동축사)와 大和寺(대화사)가 남아 있습니다. 정부당국자는 철저히 검증하라. 현재 중국 산서성의 황룡사 9층탑은 고려 高宗(고종) 16년 몽고 병이 침입하여 불을 질러 1238년 전소되었다. 그러나 중국은 1056년 요 나라 때 응현5층탑(應縣五層塔)을 건립하였다. 고 조작 변조했다. 중국 산서성 하곡현의 5층탑은 황룡사 9층탑보다 13m가 낮은 67m이다. 현존하는 목탑 중에서 세계에서 가장 높은 탑으로 알려져 있다.
정부당국자는 철저히 검증하라...!
[경주의 황룡사지]는 1976년부터 7년에 걸쳐 발굴조사가 실시되어 담장내 면적이 동서 288m, 남북 281m, 총면적 2만여 평으로 동양에서 최대의 사찰이며, 당초 늪지를 매립하여 대지를 마련하였음이 밝혀졌다. 고 발굴조사단이 보고하였다. 경주의 황룡사는 진짜인가 가짜인가? 한(韓),중(中),일(日) 3국의 정부당국자는 철저히 검증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고려 高宗(고종) 16년 무술(1238년)에 몽고 병이 침입하여 불을 질러 황룡사 탑과 殿閣(전각)과 丈六尊像(장육존상)이 소실될 때까지 황룡사는 건재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중국 山西省(산서성)은 신라의 영토이며, 또한 고려의 영토이었습니다. 꼭 믿으세요 ➤ 신라를 동천축국(東天竺國)이라 칭했다.
중국 山西省(산서성), 河曲縣(하곡현) 爽塏(상개)지역의 사찰(절) 명칭을 東竺寺(동축사)라고 이름 한 것은 중국(중천축국)에서 동서남북 방위에 따라 5천축국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동천축, 서천축, 남천축, 북천축, 중천축국의 5천축국이 있었다. 마가다국의 아육왕(阿育王) 서천축국이고, 신라는 동천축에 해당하므로 동천축이라 칭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한국의 대다수 사람들은 천축국(天竺國)을 인도(印度)로 인식하고 있으나 산해경(山海經)에 의하면 [고조선을 천축국]이라 불렀다. 라고 명확히 기록돼 있습니다. 우리나라를 강탈한 일제는 중국과 공모(共謀)하여 중국 대륙에서 건국된 우리나라의 고조선국 중천축국의 천축을 삭제하고 중국으로 조작한 사실이 명백히 밝혀졌습니다. 천축국(天竺國)은 하느님과 축건태자(竺乾太子) 석가세존이 탄강하신 나라입니다. 석가세존은 인류를 구제하신 인류의 스승입니다. 그리고 한 종교를 신앙하는 현세의 모든 사람들은 납득할 수 없겠으나, 고조선의 진한과 신라는 천부도(天符圖:천리,불도(佛道)를 지키며, 하느님에게 제사를 주제하는 장손국으로서 하느님을 숭배하며 불교(佛敎)를 신앙했습니다. 또한 우리나라는 국왕이 친히 매년 동짓날 하느님(옥황상제)에게 제사하는 제천의례(祭天儀禮)가 일제식민지시대에 끊어졌습니다. 아...동방의 등불 대한민국이여...! 어서 깊은 잠에서 깨어나 하느님에게 제사를 주제하는 장손국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다음은 [신라의 영토는 실로 광대하였다.] 가 연재됩니다.
"수로왕의 가야는 경남 김해가 아니다!" | | "식민사학자 이병도는 식민지역사를 특히 강조 했습니다" | | | |
[역사 바로잡기 제9편] 가야국의 시조 김수로왕의 왕도 김해경(金海京)은 자연 경관이 빼어나게 수려하고 奇異(기이)한 암석이 즐비하여 16나한(羅漢)들이 거닐던 천하 절경의 황산(黃山)이 있었다. 현행 국사교과서에 명기된 가야의 김해경은 우리나라를 겁탈한 일제와 대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가 한반도 속으로 얽어 맞춘 엉터리 가짜 왕도로 명확히 입증했습니다.
장차 한(韓),중(中) 간도영유권 문제와 일본의 독도 영유권 분쟁 등 난제(難題)가 한.중.일 3국간에 심각한 갈등으로 비화되어 한반도 하늘에 전운(戰雲)이 감돌게 될 것이다. 따라서 [수로왕의 가야는 경남 김해가 아니다] 의 입증은 우리국사를 왜곡한 이병도 범행의 결정적 증서(證書)로서 일본 임나본부설을 파괴하여, 3국간 전쟁을 예방하는 평화탄이 될 것이다.
◆ 한국인은 정녕 이병도의 범행을 깨닫지 못하겠는가?
다시 한번 언급하지만 현행 국사는 근현대사를 제외하고, 우리국민의 손으로 만든 국사가 아니고, 나라를 빼앗겼던 일제식민지시대 “조선사편수회의 식민사학자”들이 만든 망국적 국사입니다. 조선사편수회의 핵심 식민사학자 이병도”는 우리나라가 일찍 멸망(滅亡)해야 명예를 얻고 자손만대로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기 때문에 일본 학자들 보다 도 더욱더 악질적인 반민족적 범행을 자행하여 대한민족의 자긍심과 독립의지를 철저히 말살했습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소위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은 고대사료(古代史料)에 증거 한 주장이 아니고, “현행 한국의 국사에 준거”하여“ 중국과 일본의 국사교과서가 편찬 ”돼 있기 때문에 침략자의 손으로 만든 망국적 치욕의 현행 국사를 개편하지 않고는 한,중,일 3군 간의 갈등을 해소할 수 없으며,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을 결코 무력화 시킬 수 없습니다. 특히 일본왕의 충견(忠犬)이었던 이병도는 본래 중국 대륙에서 건국되었던 신라, 백제, 가야의 3국을 한반도 속으로 축소한 반민족적 범행으로 말미암아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을 뿐입니다.
삼국사기의 올바른 이해
1. 김부식은 사대주의자가 아닙니다.
현행 국사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두 권을 근간으로 “현행 국사교과서”가 편찬된 사실은 그 누구도 부정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를 저술한 김부식은 신라, 백제, 가야국의 3국이 본래 중국대륙에서 건국된 역사적 사실을 분명히 기록했습니다.
조국을 배신하고 일본왕의 충견(忠犬), 이병도는 마치 삼국사기의 지명이 원래 한반도 속의 지명인 것처럼 얽어 맞추고, 김부식 보다도 이병도 자신이 임의대로 지정한 지명에 대한 역주(譯註)가 더 정확한 것 같이 김부식을 사대주의자로 혹평 매도, 비방하며, 이병도 자신이 한반도 속으로 축소한 음모(陰謀)를 오히려 김부식에게 덮어씌웠던 것입니다.
이병도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2권을 증서로 삼아 "고구려, 백제, 신라 "의 3국 시대부터 우리나라의 역사가 시작된 것처럼 왜곡, 변조, 조작하고 중국대륙에서 건국된 세계적 대국의 고조선 삼한과 아세아적 대국의 삼국 영토를 한반도 속으로 쪼그라들게 축소, 조작하여 [조선사:현행 국사]를 편찬하여 반민족적 범행을 자행했던 것입니다.
한국의 대다수 사람들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중국 지명을 이병도가 한반도 속으로 얽어 맞춘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심지어 재야사학자들도 김부식을 사대주의자로 혹평 매도하고 있는 안타까운 실정입니다. 한국의 고대사는 비록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두 권 밖에 없으나 이 두 권을 올바로 이해하고, 삼국사기의 地理志(지리지)에 기록된 지명을 사실 그대로 탐색한다면 신라. 고구려, 백제, 가락국의 4국은 결코 한반도 속에서 개국한 나라가 아니라 중국 대륙에서 개국한 사실을 명확히 확인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삼국사기에 기록된 어느 한 지명만 검증된다면 일제의 만행(蠻行)과 이병도의 범행(犯行)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 수로왕은 김유신의 12대조이다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은 [삼국사기 권 제 41(열전 제1 김유신 상]에서 가락국(가야)의 首露王(수로왕)은 김유신의 12대조이고 9세손 구해(仇亥)왕은 김유신의 증조가 된다. 신라의 國子博士(국자박사) 薛因宣(설인선)이 지은 김유신의 碑銘(비명)과 朴居勿(박거물)이 짓고 姚克一(요극일)의 글로된 三郞寺(삼랑사) 碑文(비문)에도 신라 사람들은 小昊金天氏(소호금천씨)의 후손이고 황제 軒轅(헌원)의 후예이다. 고구려 또한 高辛氏(고신씨)의 후손이다. 라고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우리민족의 기원 역사가 분명히 밝혀져 있습니다.
➤ 대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는 부정했습니다.
조국을 배신한 대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는 譯註(역주)에서 이르기를 이는 마치 金庾信傳(김유신전) 및 百濟紀末(백제기말) 史論(사론)에 신라인이 자칭 소호금천씨의 후예라 하였다. 고로 성을 金氏(김씨)라 하였다. 함과 사기 흉노전에서 흉노의 그 선조는 夏后氏(하후씨)의 후예라 함과 같은 따위의 유례로 고구려인이 어떠한 정책상으로 그런 標榜(표방)을 하였는지도 모를 것이다. 라고 김부식을 매도하고 빈정거리는 기사로 되어있습니다.
지금 독자여러분은 대한민족의 정사(正史) 삼국사기에서 황제헌원이 우리나라 조상이란 사실을 두 눈으로 확인 했을 것입니다.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은 신라, 고구려, 백제, 가야의 4국은 중국 대륙에서 건국한 사실을 분명히 기록돼 있습니다. 조선사편수회의 핵심위원이었던 이병도는 삼국사기의 지명을 한반도 속으로 얽어 맞춰 대국을 소국으로 축소하고,
우리민족은 세계에서 문명이 제일 뒤떨어진 미개한 민족으로 비하(卑下)하고,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동명성제), 가야국의 김수로왕 등 일체지혜에 형통한 성인(聖人:천자)을 부족장으로 취급하여 대한민족의 자긍심을 철저히 말살 했습니다.
진실을 밝히는 플러스 코리아의 본 연재 중에 어느 1편만 탐독해도 일제와 이병도가 공모(共謀)하여 우리국사를 어떻게 말살, 왜곡, 변조한 사실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여 제 정신이 있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단 한번만 읽어 봐도 천인공노할 일제의 만행을 즉시 깨닫게 될 것이며, 근본적으로 뒤틀린 현행 국사를 곧 바로 확인 할 수 있습니다.
[고등 국사 51쪽] 가락국(금관가야)은 3세기경 경남 김해의 금관가야가 중심이 되어 연맹왕국으로 발전하였다. 이를 전기 가야 연맹이라고 부른다. 연맹의 맹주인 금관가야는 김수로에 의하여 건국되었다(42). 그 세력 범위는 낙동강 유역일대에 걸쳐 있었다. (중략) 현행 국사에서 경남 김해는 가야국의 도읍지로 명기돼 있고, 중, 고, 대학의 국사에서 가르치고 있으므로 오늘날 모든 한국인의 일반적 국사 상식입니다.
<신라의 3주와 엉터리 김해소경의 현재지명>
국명
| 구분
| 舊州名(구주명)
| 9주(州)
| 5小京(소경)
| 군수
| 현수
| 현 지명
| 비 고
| 신 라
| 1
| 沙伐州(사벌주)
| 尙州(상주)
| ⇒
| 10
| 30
| 尙州(상주)
| 경북
| 2
| 歃良州(삽량주:양산)
| 良州(양주)
| 金海(김해)
| 12
| 34
| 金海(김해)
| 경남
| 3
| 菁州(청주)
| 康州(강주)
| ⇒
| 11
| 27
| 晉州(진주)
| 경남
|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고 9주(九州) 5소경(五小京) 제도를 실시했다. 신라 9주 중 尙,良,康(상,양,강)의 3주에서 良,康(양,강) 2주는 가야(伽倻) 영토로 되어 있습니다. 즉 김해소경과 12郡(군)을 良州(양주)라 하였습니다. 상기의 도표상 가야국의 시조 김수로왕의 도읍지, 김해경(金海京)은 양주(良州)에 속해 있습니다. 그렇다면 가야의 김해경(金海京)은 경남 김해가 아니라 경남 양산군에 위치해야 합당합니다.
그러나 대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가 한반도 속으로 얽어 맞춘 김해경은 경남 진주(晋州)에 있으며, 康州(강주)에 속해 있습니다. 즉 상기의 도표와 아래의 지도상 김해경(金海京)은 강주(康州)에 속해 있습니다. 이병도가 만든 현행 국사에 명기된 지명은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엉터리 지도입니까? 일제의 손으로 만든 현행국사는 정통인가? 엉터리인가요?
➤ 양주(良州,梁州,양산군)에 김해소경과 12군이 있었다
[삼국사기 잡지 제3 지리1] 양주는 文武王(문무왕) 5년(665년) 上州(상주)와 下州(하주)의 지역을 분할하여 歃良州(삽양주)를 설치하고 神文王(신문왕) 7년 성을 쌓았는데 주위의 둘레가 1,260보 였으며 景德王(경덕왕)이 良州(양주) 지명 이름을 고치니 지금의 梁州(양주:경남 양산군일대)이다. 령현(領縣)이 하나이다. 헌양현(巘陽縣)은 본시 거지화현(居知火縣)인데 경덕왕이 헌양현(경남 양산군 양산면 일대)으로 개명하여 지금도 그대로이다
김해소경(金海小京)은 옛 금관국(金官國-가야국(伽倻國), 혹은 가야(伽倻))인데 시조 수로왕(首露王)부터 10대 구해(九亥(充)왕에 이르러 신라 법흥왕 19년(532년)에 백성을 거느리고 항복해와 그 땅을 신라의 금관군(金官郡)으로 삼았다. 문무왕 20년 소경으로 삼았으나, 경덕왕이 김해경(金海京)으로 개명하여 지금의 금주(金州:경남 김해군 일대)이다.
양주는 義安郡(의안군), 密城郡(밀성군), 火王郡(화왕군), 壽昌郡(수창군:大邱), 獐山郡(장산군), 臨皐郡(임고군), 東萊郡(동래군), 東安郡(동안군), 臨關郡(임관군), 義昌郡(의창군) 大城郡(대성군)과 商城郡(상성군)이 있고, 김해소경과 12郡(군)을 良州(양주)라 하였다.
| 엉터리 가야국 良州(양주)의 군현(郡縣)
|
| 군(郡)
| 현(縣) 참조:( )는 현재지명
| 1
| 義安郡(의안군)함안군
| 1.칠제현(함안군) 2.합포현(마산시) 3. 웅신현(창원군 웅천면)
| 2
| 密城郡(밀성군)
| 1.상약현(창령군영산면)2.밀진현(?) 3.오구산현(청도군) 4.소산현(청도)
| 3
| 火王郡(화왕군)창령군
| 1.현효현(경북 달성군 현풍현) [양주에 경북 달성군이 있다]
| 4
| 壽昌郡(수창군:大邱)
| 1.대구현(대구시).2.팔거현(칠곡군) 3.하빈현(하빈면) 4.화원현(화원)
| 5
| 獐山郡(장산군:경북경산)
| 1.해안현(해안현) 2.여랑현(경산군 자인) 3.자인현(경산 자인면)
| 6
| 臨皐郡(임고군):영천시
| 1.장진현(달성군 해안면) 2.임천현(경북 영천) 3.도동현(영천) 4.신령현(영천군 신령면) 5.민백현(영천군 신령면)
| 7
| 東萊郡(동래군): 부산
| 1.동평현(동래읍 남쪽) 2.기장현(동래군 기장면)
| 8
| 東安郡(동안군): 경주
| 1.우풍현(虞風縣(蔚州:울산시)
| 9
| 臨關郡(임관군): 경주
| 1.동진현(울주:울산) 2. 하곡현(河谷縣:울주:울산시) [산서성]
| 10
| 義昌郡(의창군)
| 1.안강현(월성군 안강리) 2. 기립현(영일군 장기면) 3.신광현(영일군 신광) 4.임정현(영일현) 5.기계현(영일군 기계면)
| 11
| 大城郡(대성군):청도군
| 1.약장현(경주) 2. 동기정(월성군 경주)
| 12
| 商城郡(상성군): 경주
| 1.남기정(경주) 2. 중기정(경주) 3.서기정(경주) 4.북기정(경주) 5.막야정(경주시)
|
註 : [삼국사기 지리]에 의하면 신라 제2의 왕도 월성(月城)은 양주(良州)에 있었으며 곧 가야국(금관국)의 김해소경(金海小京)입니다. ➤ 본래 중국 대륙의 양주(良州)를 조국을 배신하고 죽을 때까지 일본왕의 충견(忠犬)이었던 이병도가 한반도 속으로 얽어 맞춘 경상남도 양주에 대구시, 경산, 영천군이 속하여 그야 말로 뒤죽 박죽입니다.
필자가 지적한 것과 같이 삼국사기의 지리(地理)에 분명히 중국 대륙에서 건국된 가야국을 한반도 속으로 얽어 맞추면 어찌 허실(虛實:가짜와 진짜)이 드러나지 않겠는가? 일제가 인류 부모국의 우리나라 고대 사료를 전부다 불태워 없앴다 하더라도 그 연기는 하늘이 알고 그 재는 땅이 알게 되어 비밀은 영원히 감출 수 없고 진실이 밝혀지는 것은 천리입니다.
(3). 康州(강주) ➔ 경남 진주(晋州)
신라는 경상남도에 晋州(진주), 良州(양주) 2주와 金海(김해) 소경이 있습니다.
더구나 [경남 강주에 경상북도의 고령군(대가야국),칠곡군, 성주군이 속해있습니다]
경상남도 지도
| 삼국사기의 康州(강주)
|
| [삼국사기 잡지 제3 지리 1] 강주는 神文王(신문왕) 5년 居陀州(거타주)를 나누어 菁州(청주)를 설치하였는데 지금 경상남도의 晋州(진주)이다. 령현(領縣)이 둘이 있다. 1.가수현(嘉壽縣)은 가주화(加主火)현인데 경덕왕이 가수(嘉壽.협천군 삼가면)현으로 개명하여 지금도 그대로 있다. 2. 굴촌(屈村)현은 지금 미상이다. 강주는 南海郡(남해군),河東郡(하동군),固城郡(고성군),咸安郡(함안군),巨濟郡(거제군),闕城郡(궐성군),天嶺郡(천령군),居昌郡(거창군),高靈郡(고령군:대가야국:경상북도),江陽郡(강양군),星山郡(성상군),이상 11군이다.
|
진실을 밝히는 플러스 코리아(http://pluskorea.net/) 의 입증(立證)은 우리역사를 왜곡한 일제 만행의 폭로이며, [일본의 임나가야 설]을 파괴하는 핵탄입니다
➤ 일본의 임나가야(任那加耶,경남 김해) 본부설
왜는 4세기 중엽부터 6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약 200년간 일본이 경남 김해에 임나일본부라는 통치기관을 설치하고 한반도 남부를 식민지로 경영했다는 학설을 지금 일본 국사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즉 3세기 중엽에 이미 왜인은 변진구야국(弁辰狗邪國), 곧 임나가야(任那加耶)지역을 점유하고 삼한(三韓)지역을 통제했다.
또한 일본(왜)은 370년경 임나가야에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여 백제와 신라에 편입되지 않은 대부분의 삼한 소국을 정복하여 직접 지배했으며, 임나의 지배체제를 이때에 성립시켰다. 왜는 임나의 지배범위를 계속 확대하여 북서쪽 금강 유역, 북동쪽은 낙동강 상류유역까지 이르렀다. 임나는 400년 무렵에 고구려의 광개토왕이 파견한 군사 5만 명의 침입을 받은 이래 쇠퇴를 거듭하다가 562년 신라의 대가야 정벌 때에 임나관가(任那官家)가 토멸됨으로써 결국 멸망했다. 그 뒤 왜는 임나 고지(故地)에 대한 연고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646년까지 임나에게 공납을 요구했다고 한다.는 주장입니다.
◆ 한,중,일 정부당국자의 답변서를 요구 한다
가야국의 시조 김수로왕의 왕도 김해경(金海京)은 자연 경관이 빼어나게 수려하고 奇異(기이)하여 16나한(羅漢)들이 유람(遊覽)했던 천하 절경의 황산(黃山:안휘성)이 있었다. 중국 남부 안휘성(安徽省)의 동쪽, 양자강 이남에 위치한 황산은 수로왕이 말한 것과 같이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72개의 기이(奇異)한 군봉들은 신선(神仙)들이 즐겨 찾던 곳이었다. 황산은 중국 10대 명승지중의 하나이며 1990년 UN에 세계 자연과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가야국(가락국=임나가야)의 시조 수로왕이 처음 즉위한 임인(42년)부터 제 10대 仇衡王(구형왕) 말년 임자(532년) 까지 가야의 역년은 무려 490년이다. 가락국이 멸망한 이후 신라 제 31대 신문왕이 즉위한 신사(681년)에 金官京(금관경)이라 이름하고 太守(태수)를 두었다. 그리고 259년 후에 고려 태조 왕건이 신라를 통합한 이후는 臨海縣(임해현:절강성)이라 하고 排岸使(배안사)를 두고 48년 간 그대로 이름하였다, 다음에 臨海郡(임해군) 혹은 金海府(김해부)라 하고 都護府(도호부)를 두고 27년 동안 그대로 불렀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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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중,일 정부당국자의 답변서를 요구 합니다.
◆ 한반도 속의 경남 김해경(金海京)의 위치는
1. [삼국사기 지리]에 기록된 가야국의 왕도 김해경이 맞는가?
2. 일제와 이병도가 한반도 속으로 얽어 맞춘 가짜 김해경인가?
3. 중국 동남쪽의 절강성 임해군의 김해경(金海京)이 가야의 수도인가?
다음은 [김해의 김수로 왕능은 가짜로 밝혀졌다] 가 연재됩니다.
수로왕의 가야는 경남 김해가 아니다 | | | | 박병역 위원 | | [9]. 수로왕의 가야는 경남 김해가 아니다
가야국의 시조 김수로왕의 왕도 김해경(金海京)은 자연 경관이 빼어나게 수려하고 奇異(기이)한 암석이 즐비하여 16나한(羅漢)들이 거닐던 천하 절경의 황산(黃山)이 있었다. 현행 국사교과서에 명기된 가야의 김해경은 우리나라를 겁탈한 일제와 대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가 한반도 속으로 얽어 맞춘 엉터리 가짜 왕도로 명확히 입증했습니다.
장차 한(韓),중(中) 간도영유권 문제와 일본의 독도 영유권 분쟁 등 난제(難題)가 한.중.일 3국간에 심각한 갈등으로 비화되어 한반도 하늘에 전운(戰雲)이 감돌게 될 것이다. 따라서 [수로왕의 가야는 경남 김해가 아니다] 의 입증은 우리국사를 왜곡한 이병도 범행의 결정적 증서(證書)로서 일본 임나본부설을 파괴하여, 3국간 전쟁을 예방하는 평화탄이 될 것이다.
◆ 한국인은 정녕 이병도의 범행을 깨닫지 못하겠는가?
다시 한번 언급하지만 현행 국사는 근현대사를 제외하고, 우리국민의 손으로 만든 국사가 아니고, 나라를 빼앗겼던 일제식민지시대 “조선사편수회의 식민사학자”들이 만든 망국적 국사입니다. 조선사편수회의 핵심 식민사학자 이병도”는 우리나라가 일찍 멸망(滅亡)해야 명예를 얻고 자손만대로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기 때문에 일본 학자들 보다 도 더욱더 악질적인 반민족적 범행을 자행하여 대한민족의 자긍심과 독립의지를 철저히 말살했습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소위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은 고대사료(古代史料)에 증거 한 주장이 아니고, “현행 한국의 국사에 준거”하여“ 중국과 일본의 국사교과서가 편찬 ”돼 있기 때문에 침략자의 손으로 만든 망국적 치욕의 현행 국사를 개편하지 않고는 한,중,일 3군 간의 갈등을 해소할 수 없으며,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을 결코 무력화 시킬 수 없습니다. 특히 일본왕의 충견(忠犬)이었던 이병도는 본래 중국 대륙에서 건국되었던 신라, 백제, 가야의 3국을 한반도 속으로 축소한 반민족적 범행으로 말미암아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을 뿐입니다.
삼국사기의 올바른 이해
1. 김부식은 사대주의자가 아닙니다.
현행 국사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두 권을 근간으로 “현행 국사교과서”가 편찬된 사실은 그 누구도 부정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를 저술한 김부식은 신라, 백제, 가야국의 3국이 본래 중국대륙에서 건국된 역사적 사실을 분명히 기록했습니다.
조국을 배신하고 일본왕의 충견(忠犬), 이병도는 마치 삼국사기의 지명이 원래 한반도 속의 지명인 것처럼 얽어 맞추고, 김부식 보다도 이병도 자신이 임의대로 지정한 지명에 대한 역주(譯註)가 더 정확한 것 같이 김부식을 사대주의자로 혹평 매도, 비방하며, 이병도 자신이 한반도 속으로 축소한 음모(陰謀)를 오히려 김부식에게 덮어씌웠던 것입니다.
이병도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2권을 증서로 삼아 "고구려, 백제, 신라 "의 3국 시대부터 우리나라의 역사가 시작된 것처럼 왜곡, 변조, 조작하고 중국대륙에서 건국된 세계적 대국의 고조선 삼한과 아세아적 대국의 삼국 영토를 한반도 속으로 쪼그라들게 축소, 조작하여 [조선사:현행 국사]를 편찬하여 반민족적 범행을 자행했던 것입니다.
한국의 대다수 사람들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중국 지명을 이병도가 한반도 속으로 얽어 맞춘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심지어 재야사학자들도 김부식을 사대주의자로 혹평 매도하고 있는 안타까운 실정입니다. 한국의 고대사는 비록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두 권 밖에 없으나 이 두 권을 올바로 이해하고, 삼국사기의 地理志(지리지)에 기록된 지명을 사실 그대로 탐색한다면 신라. 고구려, 백제, 가락국의 4국은 결코 한반도 속에서 개국한 나라가 아니라 중국 대륙에서 개국한 사실을 명확히 확인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삼국사기에 기록된 어느 한 지명만 검증된다면 일제의 만행(蠻行)과 이병도의 범행(犯行)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 수로왕은 김유신의 12대조이다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은 [삼국사기 권 제 41(열전 제1 김유신 상]에서 가락국(가야)의 首露王(수로왕)은 김유신의 12대조이고 9세손 구해(仇亥)왕은 김유신의 증조가 된다. 신라의 國子博士(국자박사) 薛因宣(설인선)이 지은 김유신의 碑銘(비명)과 朴居勿(박거물)이 짓고 姚克一(요극일)의 글로된 三郞寺(삼랑사) 碑文(비문)에도 신라 사람들은 小昊金天氏(소호금천씨)의 후손이고 황제 軒轅(헌원)의 후예이다. 고구려 또한 高辛氏(고신씨)의 후손이다. 라고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우리민족의 기원 역사가 분명히 밝혀져 있습니다.
➤ 대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는 부정했습니다.
조국을 배신한 대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는 譯註(역주)에서 이르기를 이는 마치 金庾信傳(김유신전) 및 百濟紀末(백제기말) 史論(사론)에 신라인이 자칭 소호금천씨의 후예라 하였다. 고로 성을 金氏(김씨)라 하였다. 함과 사기 흉노전에서 흉노의 그 선조는 夏后氏(하후씨)의 후예라 함과 같은 따위의 유례로 고구려인이 어떠한 정책상으로 그런 標榜(표방)을 하였는지도 모를 것이다. 라고 김부식을 매도하고 빈정거리는 기사로 되어있습니다.
지금 독자여러분은 대한민족의 정사(正史) 삼국사기에서 황제헌원이 우리나라 조상이란 사실을 두 눈으로 확인 했을 것입니다.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은 신라, 고구려, 백제, 가야의 4국은 중국 대륙에서 건국한 사실을 분명히 기록돼 있습니다. 조선사편수회의 핵심위원이었던 이병도는 삼국사기의 지명을 한반도 속으로 얽어 맞춰 대국을 소국으로 축소하고,
우리민족은 세계에서 문명이 제일 뒤떨어진 미개한 민족으로 비하(卑下)하고,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동명성제), 가야국의 김수로왕 등 일체지혜에 형통한 성인(聖人:천자)을 부족장으로 취급하여 대한민족의 자긍심을 철저히 말살 했습니다.
진실을 밝히는 플러스 코리아의 본 연재 중에 어느 1편만 탐독해도 일제와 이병도가 공모(共謀)하여 우리국사를 어떻게 말살, 왜곡, 변조한 사실을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제 정신이 있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단 한번만 읽어 봐도 천인공노할 일제의 만행을 즉시 깨닫게 될 것이며, 근본적으로 뒤틀린 현행 국사를 곧 바로 확인 할 수 있습니다.
[고등 국사 51쪽] 가락국(금관가야)은 3세기경 경남 김해의 금관가야가 중심이 되어 연맹왕국으로 발전하였다. 이를 전기 가야 연맹이라고 부른다. 연맹의 맹주인 금관가야는 김수로에 의하여 건국되었다(42). 그 세력 범위는 낙동강 유역일대에 걸쳐 있었다. (중략) 현행 국사에서 경남 김해는 가야국의 도읍지로 명기돼 있고, 중, 고, 대학의 국사에서 가르치고 있으므로 오늘날 모든 한국인의 일반적 국사 상식입니다.
<신라의 3주와 엉터리 김해소경의 현재지명>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고 9주(九州) 5소경(五小京) 제도를 실시했다. 신라 9주 중 尙,良,康(상,양,강)의 3주에서 良,康(양,강) 2주는 가야(伽倻) 영토로 되어 있습니다. 즉 김해소경과 12郡(군)을 良州(양주)라 하였습니다. 상기의 도표상 가야국의 시조 김수로왕의 도읍지, 김해경(金海京)은 양주(良州)에 속해 있습니다. 그렇다면 가야의 김해경(金海京)은 경남 김해가 아니라 경남 양산군에 위치해야 합당합니다.
그러나 대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가 한반도 속으로 얽어 맞춘 김해경은 경남 진주(晋州)에 있으며, 康州(강주)에 속해 있습니다. 즉 상기의 도표와 아래의 지도상 김해경(金海京)은 강주(康州)에 속해 있습니다. 이병도가 만든 현행 국사에 명기된 지명은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엉터리 지도입니까? 일제의 손으로 만든 현행국사는 정통인가? 엉터리인가요?
➤ 양주(良州,梁州,양산군)에 김해소경과 12군이 있었다
[삼국사기 잡지 제3 지리1] 양주는 文武王(문무왕) 5년(665년) 上州(상주)와 下州(하주)의 지역을 분할하여 歃良州(삽양주)를 설치하고 神文王(신문왕) 7년 성을 쌓았는데 주위의 둘레가 1,260보 였으며 景德王(경덕왕)이 良州(양주) 지명 이름을 고치니 지금의 梁州(양주:경남 양산군일대)이다. 령현(領縣)이 하나이다. 헌양현(巘陽縣)은 본시 거지화현(居知火縣)인데 경덕왕이 헌양현(경남 양산군 양산면 일대)으로 개명하여 지금도 그대로이다
김해소경(金海小京)은 옛 금관국(金官國-가야국(伽倻國), 혹은 가야(伽倻))인데 시조 수로왕(首露王)부터 10대 구해(九亥(充)왕에 이르러 신라 법흥왕 19년(532년)에 백성을 거느리고 항복해와 그 땅을 신라의 금관군(金官郡)으로 삼았다. 문무왕 20년 소경으로 삼았으나, 경덕왕이 김해경(金海京)으로 개명하여 지금의 금주(金州:경남 김해군 일대)이다.
양주는 義安郡(의안군), 密城郡(밀성군), 火王郡(화왕군), 壽昌郡(수창군:大邱), 獐山郡(장산군), 臨皐郡(임고군), 東萊郡(동래군), 東安郡(동안군), 臨關郡(임관군), 義昌郡(의창군) 大城郡(대성군)과 商城郡(상성군)이 있고, 김해소경과 12郡(군)을 良州(양주)라 하였다.
註 : [삼국사기 지리]에 의하면 신라 제2의 왕도 월성(月城)은 양주(良州)에 있었으며 곧 가야국(금관국)의 김해소경(金海小京)입니다. ➤ 본래 중국 대륙의 양주(良州)를 조국을 배신하고 죽을 때까지 일본왕의 충견(忠犬)이었던 이병도가 한반도 속으로 얽어 맞춘 경상남도 양주에 대구시, 경산, 영천군이 속하여 그야 말로 뒤죽 박죽입니다.
필자가 지적한 것과 같이 삼국사기의 지리(地理)에 분명히 중국 대륙에서 건국된 가야국을 한반도 속으로 얽어 맞추면 어찌 허실(虛實:가짜와 진짜)이 드러나지 않겠는가? 일제가 인류 부모국의 우리나라 고대 사료를 전부다 불태워 없앴다 하더라도 그 연기는 하늘이 알고 그 재는 땅이 알게 되어 비밀은 영원히 감출 수 없고 진실이 밝혀지는 것은 천리입니다.
(3). 康州(강주) ➔ 경남 진주(晋州)
신라는 경상남도에 晋州(진주), 良州(양주) 2주와 金海(김해) 소경이 있습니다.
더구나 [경남 강주에 경상북도의 고령군(대가야국),칠곡군, 성주군이 속해있습니다]
진실을 밝히는 플러스 코리아 http://pluskorea.net/ 의 입증(立證)은
우리역사를 왜곡한 일제 만행의 폭로이며, [일본의 임나가야 설]을 파괴하는 핵탄입니다
➤ 일본의 임나가야(任那加耶,경남 김해) 본부설
왜는 4세기 중엽부터 6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약 200년간 일본이 경남 김해에 임나일본부라는 통치기관을 설치하고 한반도 남부를 식민지로 경영했다는 학설을 지금 일본 국사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즉 3세기 중엽에 이미 왜인은 변진구야국(弁辰狗邪國), 곧 임나가야(任那加耶)지역을 점유하고 삼한(三韓)지역을 통제했다.
또한 일본(왜)은 370년경 임나가야에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여 백제와 신라에 편입되지 않은 대부분의 삼한 소국을 정복하여 직접 지배했으며, 임나의 지배체제를 이때에 성립시켰다. 왜는 임나의 지배범위를 계속 확대하여 북서쪽 금강 유역, 북동쪽은 낙동강 상류유역까지 이르렀다. 임나는 400년 무렵에 고구려의 광개토왕이 파견한 군사 5만 명의 침입을 받은 이래 쇠퇴를 거듭하다가 562년 신라의 대가야 정벌 때에 임나관가(任那官家)가 토멸됨으로써 결국 멸망했다. 그 뒤 왜는 임나 고지(故地)에 대한 연고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646년까지 임나에게 공납을 요구했다고 한다.는 주장입니다.
◆ 한,중,일 정부당국자의 답변서를 요구 한다
가야국의 시조 김수로왕의 왕도 김해경(金海京)은 자연 경관이 빼어나게 수려하고 奇異(기이)하여 16나한(羅漢)들이 유람(遊覽)했던 천하 절경의 황산(黃山:안휘성)이 있었다. 중국 남부 안휘성(安徽省)의 동쪽, 양자강 이남에 위치한 황산은 수로왕이 말한 것과 같이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72개의 기이(奇異)한 군봉들은 신선(神仙)들이 즐겨 찾던 곳이었다. 황산은 중국 10대 명승지중의 하나이며 1990년 UN에 세계 자연과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가야국(가락국=임나가야)의 시조 수로왕이 처음 즉위한 임인(42년)부터 제 10대 仇衡王(구형왕) 말년 임자(532년) 까지 가야의 역년은 무려 490년이다. 가락국이 멸망한 이후 신라 제 31대 신문왕이 즉위한 신사(681년)에 金官京(금관경)이라 이름하고 太守(태수)를 두었다. 그리고 259년 후에 고려 태조 왕건이 신라를 통합한 이후는 臨海縣(임해현:절강성)이라 하고 排岸使(배안사)를 두고 48년 간 그대로 이름하였다, 다음에 臨海郡(임해군) 혹은 金海府(김해부)라 하고 都護府(도호부)를 두고 27년 동안 그대로 불렀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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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중,일 정부당국자의 답변서를 요구 합니다.
◆ 한반도 속의 경남 김해경(金海京)의 위치는
1. [삼국사기 지리]에 기록된 가야국의 왕도 김해경이 맞는가?
2. 일제와 이병도가 한반도 속으로 얽어 맞춘 가짜 김해경인가?
3. 중국 동남쪽의 절강성 임해군의 김해경(金海京)이 가야의 수도인가?
다음은 [김해의 김수로 왕능은 가짜로 밝혀졌다] 가 연재됩니다.
[단독 보도 제10편] 대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가 한반도 속으로 얽어 맞춘 가야의 김해경(金海京)은 양주(良州)에 속하고 진주(晋州)는 강주(康州)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良州(양주)와 강주(康州), 금주(金州)는 같은 지역에 위치한 진주(晋州)로 입증했습니다. 진주(晋州)는 대한민국 영토보다 더 큰 땅이며, 가야국 수로왕의 왕도 경남 김해는 가짜도읍지로 밝혀졌습니다.
1, 가야국은 경남 金海(김해)가 아니다.
현행 국사의 가락국 역사는 [삼국사기의 지리]와 [삼국유사 -기이제2-가락국기]에 준하여 만들어졌다. 駕洛國記(가락국기)는 [고려 文宗(문종:1047-1082년) 재위 大康(대강)년 간에 金官知州事文人(금관지주사문인)이 편찬한 것이다. 지금 그 내용을 대략 싣는다.]
천지가 개벽된 이후 지구상에 나라는 있었으나 국호는 아직 없었다. 또한 임금과 臣下(신하)라는 君臣(군신)의 칭호도 없었다. 이러한 시대에 我刀干(아도간), 汝刀干(여도간), 彼刀干(피도간), 五刀干(오도간) 留水干(유수간) 留天干(유천간), 神天干(신천간), 五天干(오천간) 神鬼干(신귀간)등 9干(간)이 있었다. 이들의 酋長(추장)이 영토를 갖고 백성들을 다스렸는데 무릇 총 1백호에 7만5천명이 도읍을 이루어 山野(산야)에 살며 우물을 파서 물을 마시고 밭을 만들어 곡식을 심어 먹었다.
당시 後漢(후한) 世祖(세조) 光武帝(광무제) 建武(건무) 18년 임인(서기 42) 3월 3일(계욕일:3월 삼짇날) 그들이 살고 있는 북쪽 산봉우리가 마치 열 마리의 거북이가 엎드린 형상을 하고 있기 때문에 옛날에 龜旨(귀지)라 불렀다. 이곳은 항상 아주 특이한 기운이 감돌고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서민 대중 2, 3백 명이 모여서 회의를 하고 있었는데 사람의 음성 같기도 하였으나 그 모습은 숨기고 음성 소리만 들려왔다.
九干(9간)등이 여기에 사람이 있습니다, 라고 하니 나도 있습니다. 또 말하기를 내가 있는 곳은 어디인가? 대답하기를 龜旨(귀지)입니다. 또 말하기를 황천상제(皇天上帝:하느님)께서 나에게 명하기를 이곳에 새로운 나라를 세워 임금으로 명하시어 이곳에 내려 왔으니 너희들은 산봉우리 흙을 퍼내면서 노래 부르기를 거북아 ~ 거북아 ~ 뭐하니, 거북아 ~ 거북아 ~ 뭐하니, 그 머리를 내밀어 보아라 만약에 나오지 않으면 구워서 먹을 테야 하면서 춤을 추어라 그러면 곧 대왕은 기뻐하며 너희들을 맞이하여 함께 뛰며 놀게 될 것이니라.
九干(9간)등은 그의 말과 같이 감흥에 젖어 노래하며 춤을 추다가 얼마 안 되어 우러러 처다 보니 오로지 자주 빛 줄이 하늘에 드리워져 땅에 닿아있었다. 그 노끈의 줄을 살펴보니 붉은 보자기에 금으로 만든 상자를 열어 보니 둥근 해와 같은 황금알이 들어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다 놀라워 기뻐하며 백성들은 모두 엎드려 절하고 얼마 있다가 포대기에 싸안고 我刀干(아도간)의 집으로 돌아와 긴 걸상 위에 올려놓고 여러 사람들은 각기 흩어졌다.
12시간이 경과하고 다음날 아침에 사람들이 다시 모여 그 금 상자를 열어보니 6개의 알이 화하여 어린 아이가 되어 있었는데 그 용모가 매우 거룩하였다. 이에 평상에 앉히고 여러 사람들이 절하며 賀禮(하례)하고 극진히 공경하였다. 이들은 나날이 자라나 10여 일이 지나자 다 성장하여 깨우치고 신장이 九尺(9척)이나 되었다. 즉 신장은 殷(은)나라의 天乙(천을)과 같고 용안(龍顔:임금 얼굴)은 漢高祖(한고조)와 같이 눈섭이 팔자이고, 빛나는 눈의 체색은 唐(당고조)와 같고 겹으로 된 눈동자는 虞舜(우순)과 같았다. 그는 그 달 보름에 왕위에 즉위하였다. 인간 세상에서 제일 처음 首長(수장)이 되었기에 이름을 首路(수로)라 하였다, 국호를 大駕洛(대가락)이라 칭하고 또는 伽耶國(가야국)이라 칭하였다, 즉 6가야 중에 한 나라가 [대가락국]이다.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각각 5가야의 군주가 되었기 때문에 5가야가 아니라 6가야 인 것이다.
♦ 대가락국의 위치는 동쪽에 黃山江(황산강:중국 안휘성)이 있고, 서남쪽에 滄海(창해)가 있고, 서북쪽에 地理山(지리산)이 있고, 동북쪽에 伽耶山(가야산)이 있고, 남쪽에 [ ]尾(미:마미(馬尾)가 있다. 수로왕은 임시로 궁전을 세우고 대궐에 들어가 임금이 되셔도 성품이 검소하여 지붕을 이은 이엉도 자르지 않고 흙으로 쌓은 계단도 겨우 3척이었다.
즉위 2년 계묘(43년) 봄 정월에 수로왕이 말하기를 짐은 京都(경도)를 설치하고자 한다. 하고는 이내 임금은 御駕(어가)를 타고 임시 궁전을 나와 남쪽의 新畓坪(신답평)으로 나아가 사방 山嶽(산악)을 바라보시더니 좌우 사람을 돌아보며 말하시었다.
김해 지역은 협소하지만 戮(륙)나무 잎과 같고 자연 경관이 빼어나게 수려하고 奇異(기이)하여 가위 16羅漢(나한)들이 살만한 지리이구나. 더구나 1에서 3을 이루고 3에서 7을 이루어 7聖(성)이 살 만한 가장 합당한 지형이다. 이 땅에 의탁하여 국토를 개척하면 강역은 始終(시종) 더욱 융성할 것이니라. 이곳에 왕도를 설치하여 둘레에 1,500步(보)로 城(성)을 쌓아 羅城(나성)이라 하고 궁궐을 지어 宮禁殿(궁금전)이라 하고 모든 有司(유사)들이 살수 있는 家屋(가옥)을 지어 屋宇(옥우)라 하고 곡식 창고를 지어 虎庫倉(호고창)이라 하고, 공사의 품명을 글로 적어 명령을 내리시고 궁전으로 돌아 오셨다.
국내의 젊은 丁壯(장정)들과 전문직 工匠(공장) 인부들을 두루 징발하여 그 달 20일부터 공사를 시작하고 자금은 金陽(금양)에서 조달하여 3월 10일 勞役(노역)을 마쳤다, 그 궁궐과 屋舍(옥사)를 짓는 일도 농사일이 바쁘지 않는 틈을 이용하여 만들다 보니 얼마 경과 후 10월부터 시작하여 갑진(서기 44년) 2월에 완성되었다.
좋은 날자를 잡아 辰(진)일 수로왕은 새로 지은 新畓坪(신답평)으로 궁궐을 옮겼다. 임금은 도리에 밝으시어 만 백성을 염려하시며 기회가 있을 때 마다 은근히 근검절약에 대해 모범을 보이시며 업무를 보셨다. 이때 갑자기 琓夏國(완하국:아유타국) 含達王(함달왕)의 부인이 임신을 하여 달이 차서 알을 낳으니, 그 알이 화하여 사람이 되어 이름을 脫解(탈해:신라 제 4대왕)라 하였다. 이 탈해가 바다를 건너 駕洛國(가락국)에 왔던 것이다. 그는 키가 3척이고 머리 둘레가 1척이며 늘 기쁨에 차있었다.
탈해가 대궐로 들어가 수로왕에게 말하기를, “나는 수로왕의 왕위를 빼앗고자 이 땅에 왔소" 수로왕이 대답하기를 나는 天命(천명)에 의하여 왕위에 올라 將令安中國而綏下民:장령안중국이수하민> 장차 “中國(중국:중천천국 신라)”을 안정시켜 신하와 백성들이 편안히 살수 있도록 하려고 하는데 감히 天命(천명)을 위배하며 너에게 왕위를 넘겨 줄 수 없을 뿐 아니라 또한 우리나라 국민들도 너에게 맡기지 않을 것이니라. 너는 나에게 부속되지 않겠는가?. 탈해가 말하기를 말로서 언쟁하는 것 보다 그대와 道術(도술)로서 겨루어 봅시다. 라고 하였다. 왕이 좋소이다. 잠깐 사이에 탈해는 화술로 매가 되니 왕도 화술로 독수리로 변하고 또 탈해가 참새로 변화하니 왕은 새매로 변화되었다. 이들의 변화술은 시간이 조금도 걸리지 않았다. 탈해는 본래의 몸으로 돌아오자 왕 역시 다시 본래의 모습이 되었다.
탈해는 엎드려 항복하며 말하기를 매가 독수리에게 참새는 새매에게 잡히기를 면한 것은 대개 聖人(성인)은 殺生(살생)을 금하고 惡(악)을 멀리하며 어지신 마음을 가지신 仁德(인덕)이며 내가 왕과 도술로 경쟁하여 왕위를 얻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탈해는 하직 인사를 올리고 밖으로 나와 이웃 나라 郊外(교외)의 渡頭(도두)에 도착하여 장차 “중조선(중 천축국)”에서 타고 온 船泊(선박:배)를 타고 水道(수도)로 돌아갔다.
왕은 그가 머물러 있는 동안 음모를 꾸며 반란을 일으킬까 두려워 급히 水軍(수군) 500척을 출발시켜 추적하니 탈해는 鷄林(계림:신라)의 국경으로 급히 달아나기에 수군 통수자는 돌아 왔다. [여기에 기제한 기사는 신라의 기사와는 많이 다르다] 建武(건무) 24년 무신(48년) 7월 27일 九干(9간)등은 조정회의 때 왕을 배알하고 말하기를 대왕님께서 하늘에서 강림하신 이래로 좋은 배필을 아직 구하지 못하셨으니 청컨데 신들 집의 처녀 중에서 가장 예쁜 사람을 선택하여 궁궐로 들여보내어 대왕의 짝이 되게 하겠습니다.
왕이 말하기를 朕(짐)은 천명을 받아 여기에 내려온 것이니라. 짐이 배우자를 만들어 왕후로 삼는 것도 역시 天命(천명)이 있을 것이니라, 卿(경)들은 아무 염려 말라, 드디어 수로왕은 留天干(유천간)에게 명하여 輕舟(경주:가벼운 배)와 좋은 말을 타고 望山島(망산도)에 도착하여 서서 기다리게 하고 神鬼干(신귀간)에게 명하여 就乘岾(취승첩:배에서 내리는 곳)으로 가게 하였더니 갑자기 서남쪽 바다에서 붉은 빛의 돛단배가 붉은 깃발을 휘날리며 북쪽으로 오고 있었다. 留天(유천)등은 먼저 望山島(망산도:경남 사천시 선구동)에서 횃불을 올리니 즉시 바다를 건너 육지에 도착하자 사람들이 뛰어내려 달려오므로 神鬼干(신귀간)은 바라보다가 대궐로 달려가 왕에게 이 사실을 아뢰자 왕은 이 말을 듣고 무척 기뻐하셨다.
곧 九干(9간)등을 파견하여 목련꽃으로 만든 노와 계수나무로 만든 노를 저으며 달려가 그들을 맞이하여 대궐로 모시려 하자 왕후가 말하기를 나는 너희들을 평생에 보지도 못하여 모르는 사람들인데 어찌 감히 경솔하게 따라 갈 수 있겠소 留天(유천)등이 돌아와 왕후의 말씀을 왕에게 전달하니 왕은 옳은 말이라 여겨 有司(유사)를 데리고 대궐 아래에 서남쪽 60보쯤 되는 산기슭에 설치한 幔殿(만전)에서 기다렸다.
왕후는 望山島(망산도) 밖 浦津(포진:아진포구) 나루터에 뱃머리가 닿자 육지에 올라 쉬고는 高嶠山(고교산)에서 별도로 입었던 비단 바지를 벗어 우산(于山) 신령에게 바쳤다.
그때 다른 지역에서 따라온 侍從(시종)은 媵(잉)이고 신하 두 사람의 이름은 申輔(신보)․趙匡(조광)이고 그들의 부인 두 사람 이름은 慕貞(모정), 慕良(모량)이라 하였다, 혹 모두 20여 가구가 함께 따라 왔다 하였다. 그때 가지고 온 금수능라(비단)의 衣裳疋段(의상필단)과 金銀珠玉(금은주옥)과 瓊玖(경구), 의복, 장난감, 그릇은 이루 기록 할 수 없이 많았다.
왕후는 걸어서 왕이 계신 곳과 점점 가까이 오자 왕은 왕후를 영접하고 같이 임시 궁에 들어와 媵臣(잉신)이하 衆人(중인)들은 계단 아래에서 뵙고 즉시 물러갔다, 왕은 有司(유사)에게 명하여 인솔한 잉신 내외는 사람마다 각각 방 하나씩 주어 편안히 모시고 그 이하는 방 하나에 5,6명씩 두어 편안히 모시도록 말씀하셨다. 말을 마치고 난초로 만든 마실 것과 蕙草(혜초)로 만든 술을 주고 무늬로 채색된 자리에서 잠자게하고 비단 옷과 寶貨(보화) 까지 여러 종류로 많이 주고 군인들을 소집하여 보호하게 하였다. 이에 왕은 왕후와 함께 잠자리에 드니 왕후는 조용한 목소리로 왕에게 말하기를 저는 阿踰陁國(아유타국) 공주입니다. 姓(성)은 許(허)이고 이름은 黃玉(황옥)이라 하며 나이는 16세입니다.
본국에 있을 때 금년 5월 중에 父王(부왕)과 皇后(황후)님께서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어젯밤에 하나 같이 꼭 같은 꿈을 꾸었는데 황천상제(皇天上帝=하느님)을 뵈었느니라.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가락국의 元君(원군) 수로왕은 하느님이 내려 보내시어 大駕洛國(대가락국)의 보위에 올라 임금이 되게 하셨느니라, 그는 신령스러운 신선이며 성스러운 聖人(성인)이니라, 또한 나라를 새로 건국하였으나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하였으니 卿(경)들의 공주를 보내어 그와 배필을 삼도록 하라. 하시고 말씀을 마치자 홀연히 하늘로 올라가셨다.
꿈을 깬 뒤에도 황천상제(여호와 하느님)의 말씀이 아직도 귓가에 쟁쟁히 남아 있느니라. 너는 이 자리에서 곧 부모와 작별하고 그곳을 찾아가거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배를 타고 오면서 하늘의 신선들이 즐겨 먹는 과일의 蟠桃(반도: 3년에 한번씩 열리는 복숭아:선도산)을 찾아서 이제 모양을 가다듬고 감히 龍顔(용안)을 가까이 뵙게 되었습니다.
왕이 대답하기를 나는 출생하면서부터 성스러워 공주가 멀리서 올 것을 미리 알고 신하들이 나에게 왕비를 맞아들이라고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소. 지금 현숙한 공주가 스스로 오셨으니 이 몸은 매우 행복한 일이요. 왕은 드디어 혼인을 하고 두 밤을 지내고 또 하루 대낮을 지냈다. 이 일을 수행하고 배를 타고 돌아가는 뱃사공 15명 모두에게 양식으로 쌀 10섬과 베 30필씩 주어 본국(아유타국)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8월 1일 왕은 왕후와 함께 수레를 타고, 잉신 부부도 수레를 타고 임금과 나란이 漢(한) 나라의 여러 물품을 수레에 싣고 서서히 대궐에 들어오니 시간이 正午(정오)가 되었다. 왕후는 中宮(중궁)에 거처하고 잉신 부부와 그에 따른 사람은 비어 있는 두 집에 나누어 살도록하고 나머지 따라온 사람들도 20여 칸이나 되는 賓館(빈관) 한 채를 주어 사람 인원수에 맞추어 區別(구별)하여 편안히 살게 마련해주고 날마다 물품을 풍족히 주어 그들이 싣고 온 진귀한 물품은 內庫(내고)에 보관해 두고 왕후가 四時(4시) 비용으로 사용하게 하였다.
하루는 왕이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九干(9간)등은 庶務(서무)를 담당하는 관료장(長)인데 그 직위와 명칭이 모두다 宵人(소인)이나 농부들의 칭호이니 직분을 담당하는 직위와 맞지 않으니 직위가 아니다, 만약에 외부의 부족들이 듣는 다면 반드시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드디어 이름을 개편하여 我刀(아도)를 我躬(아궁)이라 하고 汝刀(여도)는 汝諧(여해)로 彼刀(피도)는 彼藏(피장)으로 五刀(오도)는 五常(오상)으로 留水(유수)는 留天(유천)으로 이름을 개명하였다. 윗 글자는 그대로 두고 아래 글자만 고쳐서 留功(유공), 留德(유덕), 神天(신천)은 神道(신도)로 개명하고, 五天(오천)은 五能(오능)으로, 神鬼(신귀)는 음은 바꾸지 않고 訓(훈)만 고쳐 臣貴(신귀)로 고쳤다.
鷄林(계림:신라)의 직책의식을 취하여 角干(각간), 阿叱干(아질간)의 직급에 干(간)을 두고 그 이하의 官僚(관료)는 周(주)나라 제도로 하고 儀禮(의례)는 漢(한)나라의 것으로 나누어 정하였다. 이렇게 옛것을 혁신하여 관직을 나누고 道理(도리)로 다스렸다. 이에 국가는 理致(이치)로 다스리고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하셨다. 그는 엄숙하거나 위엄하게 교화하지 아니하였으며 그의 정치는 위엄이 아니라 道理(도리)로 다스렸던 것이다.
더구나 왕은 왕후와 함께 살고 있는 모습은 하늘에게 땅이 있고 해에게 달이 있고 陽(양)에게 陰(음)이 있는 것과 같았으며 그의 功德(공덕)은 塗山(도산)이 夏(하)를 날개처럼 돕고 唐(당)의 媛(원)이 嬌氏(교씨)를 부흥시킨 것과 같았다. 註: 塗山(도산) 씨의 딸이 夏(하) 나라의 禹王(우왕)에게 시집가 우왕을 도왔다. 唐媛(당원)은 堯(요)의 딸 娥皇(아황)과 女英(여영)을 말함 이는 舜(순)에게 시집가서 舜(순)의 후예인 嬌氏(교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 해에 왕후는 곰을 얻는 꿈을 꾸고 태자 居登公(거등공)을 낳았다. 靈帝(영제) 중평 6년 기사년 3월 1일 날 왕후가 돌아가시니 나이는 157세 이였다. 왕후가 돌아가시자 온 나라 사람들은 땅이 꺼진 듯이 슬퍼하며 탄식하였다.
왕후는 龜旨峰(귀지봉) 동북 언덕에 장례하였다. 왕후는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온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하여 그의 은혜를 잊지 않으려고 처음 공주가 바다를 건너 뱃머리가 닿은 渡頭村(도두촌)을 主浦村(주포촌)이라 하고, 능라 비단 바지를 벗은 高嶠山(고교산 : 高岡山(고강산)을 綾峴(능현)이라 하였다. 또 붉은 깃발을 달고 바다로 들어오셨다가 깃발을 들고 바다로 나갔다 하여 旗出邊(기출변)이라 하였다.
잉신과 泉府卿(천부경), 申輔(신보)와, 宗正監(종정감) 趙匡(조광)등은 금관국에 도착한 후 30년 만에 각각 두 딸을 낳았는데 그들 부부는 12년을 지나 모두 죽었다. 그 외 함께 들어온 사람들도 7,8년 동안 자식을 낳지 못하였다. 그들은 오직 고향을 그리워하며 슬픔을 품고 살다 모두 다 죽고 舍賓館(사빈관)은 텅비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왕후가 돌아가시자 元君(원군:수로왕)은 매일 베개를 의지하며 悲嘆(비탄)에 젖어 슬픈 노래를 많이 부르다 25년을 더 살고 서기 199년 己卯(기묘) 3월 23일에 돌아가시니 나이는 158세 이시었다.
온 나라 사람들은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진 듯 자기의 부모가 돌아가신 것보다 더 슬피 통곡하여 왕후가 돌아가실 때 보다 더욱 더 슬피 울었다. 대궐에서 艮方(간방) 平地(평지)에 殯宮(빈궁)을 세웠는데 높이가 한길이고 주위의 둘레가 300보이었다. 이곳에 장례를 지내고 이름을 首陵王廟(수능왕묘)라 하였다.
그의 아들 居登王(거등왕)으로부터 九代孫(9대손) 仇衡(구충)왕 까지 이 宗廟(종묘)에서 配享(배향)하고 매년 정월 3일과 7일 여름은 5월 5일 가을은 5일과 15일에 깨끗한 제물로 풍족히 마련하여 제사를 올려 대대로 제사는 끊어지지 않았다.
신라 제 30대 법민왕(문무왕)은 서기 661년 3월에 제정한 조서에서 말하기를 짐은 가야국 수로왕의 九代孫(9대손) 仇衝(衡)王(구충왕)이 신라에 항복해 올 때 데리고 오신 아들 世宗(세종)의 아들이 率友公(솔우공)의 아들 庶云匣干(서운갑간)의 딸 文明皇后(문명황후)께서 나를 낳으셨던 것이다. 고로 수로왕은 나에게는 15대 할아버지가 된다.
임금님께서 가락국을 개국하신 나라는 패망했으나 葬地(장지)와 사당은 아직도 남아 있으니 신라의 종묘에 합하여 제사 지내는 일만은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이에 멀리 떨어진 곳에 使者(사자)를 파견하여 유적지를 살피게 한 후 사당에서 가까운 上田(상전) 30경(頃)을 供營(공영)의 자원으로 하여 王位田(왕위전)이라 칭하고 신라 宗廟上(종묘상)에 기록하였다. 수로왕의 17대손 世級干(갱세급간)은 조정의 교지를 받들어 그 밭을 주관하여 매년 때를 맞춰 술과 떡, 밥, 차 과실 등 여러 가지를 마련하여 해마다 끊어지지 않고 제사를 받들어 모셨다. 居登王(거등왕)이 정한 년내 5일 동안은 향과 촛불을 켜고 제사를 올렸다. 이 조서에 따라서 제사는 우리 가락국에 맡겨졌다.
居登王(거등왕)이 즉위한 기묘(199년)에 便房(편방)을 설치하고 仇衝(구형왕)이 항복한 말년에 이르기까지 330년 동안은 사당에 제사하는 禮典(예전)은 변함없이 계속되었으나 구형왕이 가락국의 왕위를 잃고 돌아가시고 龍朔(용삭) 원년 신유(661년)의 60년 간은 이 사당에 지내는 제사를 간혹 빠뜨리기도 하였다,
아름답도다...! 文武王(문무왕: 법민왕)이시여...!
선조님을 존경하고 받드는 것은 효중에 孝(효)요 끊어졌던 제사를 다시 계승시킨 것은 오직 정성이며 지극한 효행인 것이다. 신라 말년에 忠至匝干(충지잡간)이란 자가 있었다, 신라를 공격하여 金官高城(금관고성)을 쟁취하고 城主將軍(성주장군)이 되었다. 이리하여 英規(영규:후백제 견훤의 사위) 阿干(아간)이 장군을 위압하여 廟享(묘향)을 빼앗아 음탕한 마음으로 祭祀(제사)를 맡게 되었다.
단오(端午)날을 맞아 사당에서 제사를 지내려하자 느닷없이 대들보가 부러져 깔려죽었다. 이에 장군은 스스로 자신을 달래며 다행으로 생각하고 욕심에 聖王(성왕) 임금님의 제사를 모시기 위해서는 내가 眞影(진영)을 그림으로 그려서 촛불을 켜고 향을 피워 공양하면 자기에게 보은의 혜택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드디어 비단 三尺(삼척:세자)를 구입하여 眞影(진영)을 그려서 벽 위에 모시고 아침저녁으로 촛불을 켜고 정성을 다하여 기원하자 3일째 되는 날 眞影(진영)의 두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려 땅위에 괴어 거의 한말이나 되었다.
장군은 몹시 두려워하며 그린 眞影(진영)을 봉지에 싸 가지고 사당에서 나와 불태우고 즉시 수로왕의 眞孫(진손) 圭林(규림)을 불러 말하기를 어제 상서롭지 못한 불길한 일이 있었는데 한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겹쳐서 불길한 일이 일어나고 있으니 이는 필시 사당의 威靈(위령)이 震怒(진노)하신 것 같습니다. 나는 음탕한 마음을 품고 주야로 공양을 올렸고 대왕님의 자손도 아닌 英規(영규)도 이미 죽었으니 나는 몹시 괴이하고 두려워서 眞影(진영)을 불살라 버렸으니 반드시 신의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卿(경)은 왕의 眞孫(진손)이시니 옛날의 제례식에 의거하여 제사를 받드는 것이 합당할 것입니다.
圭林(규림)이 대를 계승하여 제사를 받들다 88세에 죽었다. 그의 아들 間元(간원) 卿(경)이 계속 제사를 받들었는데 端午日(단오일) 날 종묘에서 제상을 차려놓고 제사를 올리는 중에 英規(영규)의 아들 俊必(준필)이 또 發狂(발광)하여 종묘에 찾아와 間元(간원)이 제상을 차려놓고 제사가 이미 다 끝나는 마지막 三獻(삼헌)에 질병이 발병하여 포악한 행동을 하고 집에 돌아가 죽었다. 古人(고인)의 말씀에 음탕한 마음을 품고 받드는 제사는 복이 없고, 반대로 재앙을 받는다. 라고 하였다. 앞글은 英規(영규)이고 뒷 글은 俊必(준필)이다.
고인의 말씀이 이들 父子(부자)를 두고 한말인가? 또 도적 무리들이 종묘 안에 금옥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고 도적들이 찾아와 도둑질하려고 하였다, 도둑이 처음 찾아 왔을때 몸에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고 화살을 장착한 한 猛士(맹사)가 물품을 훔쳐 종묘안에서 밖으로 나오는 도적을 향하여 벽 4면에서 화살이 비오듯이 쏟아져 그 도적들 중에 7,8명이 화살에 맞아 죽고 살아남은 도적들은 황급히 달아났다.
며칠 후 재차 도적들이 찾아오자 이번에는 길이가 30여 척이나 되고 눈빛이 번개 같은 큰 구렁이가 종묘 옆에서 나와 8,9명을 물어 죽이니 살아남은 자들은 겨우 몸만 빠져나와 죽음을 면하고 자빠지면서 도망쳐 달아났다. 이러한 사유로 사람들은 陵園(능원) 안에는 반드시 神物(신물)이 보호하고 있다고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서기 199년 처음 종묘를 만들 때부터 지금 가락국 임금께서 즉위하신지 31년 째인 大康(대강) 2년 병진(1076년) 까지 무릇 878년 동안 아름답게 쌓아 올린 층계는 허물어지거나 무너지지 않았고 아름답게 심어 놓은 나무도 시들거나 죽지 않았다. 더구나 벌여 놓은 수만은 옥 조각들도 부서진 것이 없었다. 이와 같은 현지를 살펴본 辛替否(신체부)가 말하기를 옛날부터 지금까지 어찌하여 나라는 망하였으나 이대로 있을까? 封墳(봉분)도 파괴되지 않았으니 오직 이 가락국의 昔曾(석회)만 망하였구나
즉 辛替否(신체부)의 말은 미심적인 것이 있다. 수로왕의 종묘가 훼손되지 않은 것 보다 곧 신체부의 말은 아직도 남아 있다는 믿음일 것이다. 이 중에 수로왕을 思慕(사모)하며 즐기는 놀이가 있었다. 매년 7월 29일 날 이 향토의 사람들은 관원과 군졸들은 乘岾(승첩)에 올라가서 장막을 설치하고 술과 음식을 먹으면서 즐겁게 세월을 보내는 것을 東西送目(동서송목)이라 하였다.
건장한 人夫(인부)들을 좌우로 나누어 望山島(망산도)에서 말을 타고 말발굽 소리를 내면서 육지에서 競走(경주)도하고 배를 띄워 뱃머리를 물위에 띄워 물에서 서로 북쪽의 指古浦(지고포) 까지 달리는 경쟁 놀이다. 이 놀이는 대개 옛 留天干(유천간)과, 神鬼干(신귀간)등이 왕후가 오는 것을 바라보고 급히 수로왕에게 알리는 것으로 옛 발자취인 것이다.
가락국이 멸망한 이후 대대로 그 칭호가 하나같지 않다, 신라 제 31대 政明王(정명왕:신문왕)이 즉위한 원년 신사(681년)에 金官京(금관경)이라 이름하고 太守(태수)를 두고 259년 후에 고려 태조 왕건이 신라를 통합한 이후는 대대로 臨海縣(임해현:절강성)이라 하고 排岸使(배안사)를 두고 48년 간 그대로 이름하다, 다음에 臨海郡(임해군 : 절강성) 혹은 金海府(김해부)라 하고 都護府(도호부)를 두고 27년 동안 그대로 불렀다. 또 고려에서 防禦使(방어사)를 두어 64년 동안 그대로 이름 하였다,
서기 991년 金海府(김해부) 量田使(양전사) 中大夫(중대부) 趙文善(조문선)이 省(성)의 명칭에 대한 신청서를 올릴적에 "首露王(수로왕) 陵廟(능묘)에 소속된 밭의 면적이 너무 많으니 마땅히 15結(결)만 갖게하여 옛 관례대로 제사를 받들게 하고 그 나머지는 金海府(김해부)에 노역한 장정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라고 신청서에서 말하였다.
趙文善(조문선)이 올린 省(성)의 명칭에 대한 申省狀(신성장)을 전달 받고 朝廷(조정)에서 수로왕 陵廟(능묘)에 대한 敎旨(교지)에서 말하기를 수로왕은 하늘에서 내려온 알이 화하여 聖君(성군)이 되시었고 가야국 왕위에 올라 나이 158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24년 기유(1069)에 양전척과 결의 산정법을 제정했다. 즉 6寸(촌)을 1分(분), 10分(분)을 1尺(척), 6尺(척)을 1步(보)로 하여, 結負(결부)의 적은 方(방) 33步(보)를 1結(결)로 정하였다. 우리나라는 자고로 三皇(삼황: 1,복희, 여호와, 신농, 2 복희 신농, 황제)님이 [朝鮮(조선)에 내려와 천하의 만백성을 다스린] 이후로 이분과 견줄만한 임금이 없었습니다. 수로왕이 돌아가신 후 선대부터 능묘에 소속된 전답을 지금에 와서 줄인다는 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 하고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量田使中大夫(양전사중대부) 趙文善(조문선)이 申省狀(신성장)을 또 올리자 朝廷(조정)에서 받아들이고 陵廟(능묘)의 不動産(부동산) 중에서 반은 鄕里(향리)에서 노역한 장정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양전사중대부 조문선은 조정의 교지를 받고 이내 그 반은 陵園(능원)에 소속시키고 반은 金海府(김해부)에서 노역한 장정들에게 지급하여 주었다. 이 일을 끝마치자 몸이 몹시 피로하였다. 어느 날 밤 꿈에 홀연히 7,8명의 귀신이 나타나 밧줄과 칼을 가지고 와서 말하기를 너는 큰 죄를 지었으니 너의 목을 베어 죽여야겠다. 라고 하였다.
양전사 조문선은 귀신에게 형벌을 받는 꿈을 꾸고 몹시 놀라 깨어났으나 이내 병이 들었다. 남에게 알리지도 못하는 병이라 물어 보지도 못하고 밤에 도망쳐 달아나다 關門(관문)에서 죽었다. 이러한 사유로 量田都帳(양전도장)에 그의 印(인:도장)이 찍히지 않았다. 그 후에 사신이 와서 量田都帳(양전도장)을 검사해 보니 겨우 11결(結) 12부(負) 9속(束) 뿐이고 3결(結) 78부(負) 1속(束)이 부족하였다. 이에 각처에 사람을 鞠問(국문)하여 찾아내 內外官(내외관)에 보고하고 임금의 명령으로 그 부족한 것을 지급해 주었다, 이러한 일들은 고금을 통하여 자주 일어나고 있으니 탄식할 뿐이다.
수로왕의 8대손 金銍王(김질왕)은 지극히 부지런히 정사를 돌보았다. 또한 일체법의 진리를 숭상하고 世祖(세조)와 始祖母(시조모) 허황후를 받들고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자원을 마련하여 임진년 서기 452년에 수로왕과 허황후가 合婚(합혼)한 지역에 寺(절)을 창건하여 이름을 王后寺(왕후사)라 하고 使審量(사심량)을 파견하여 절 근처에 있는 平田(평전) 10결(結)을 三寶(삼보)의 공양 비용으로 사용하게 하였다. 이 왕후사를 창건하고부터 500년 후에 長遊寺(장유사)를 세웠는데 이 절에 헌납한 밭이 모두 합하여 300결이나 되었다. 이 長遊寺(장유사) 우측에 三剛(삼강)이 있고 王后寺(왕후사) 좌측 지역 동남쪽 내에 있다 하여 寺刹(사찰)을 없애고 莊舍(장사)를 지어 가을에 추수한 곡식을 저장하는 장소로 만들고 말을 기르고 소를 치는 마구간으로 만들었으니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본문 중략>
◆ [中朝累世, 東國分京. 鷄林先定, 駕洛後營.] 東國(동국:신라국)의 王京(왕경)은 여러 세대로 나누어져 있었다. [신라]는 鷄林(계림)에 먼저 도읍을 정하고 후에 수로왕의 가락국을 신라의 왕도가 된 후 여러 세대로 5京(5경) 제도를 실시했다.
가락국의 역대왕은 제1대 수로왕이고, 제 2대 居登王(거등왕)의 아버지는 수로왕이고, 어머니는 許王后(허왕후)이다. [중략] 제 10대 仇衡王(구형왕)은 김씨이며 서기 521년에 즉위하고 치세는 42년이다. 임오년 서기 562년 9월에 신라 제 24대 眞興王(진흥왕)이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오자 구형왕은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대적했으나 저쪽 군사는 많고 우리 군사는 적어서 대적하여 전투를 할 수가 없었다. 이에 同氣脫知爾叱今(동기 탈지이질금)을 파견하여 본국에 머물게 하고 왕자와 上孫(상손:장손) 卒支公(졸지공)등은 항복하여 신라에 들어갔다. 왕비는 分叱水爾叱(분질수이질금)의 딸 桂花(계화)이고 아들 셋을 낳았다.
첫째 世宗角干(세종각간)이고 둘째 茂刀角干(무도각간)이고, 셋째 茂得角干(무득각간)이다. 開皇錄(개황록)에서 이르기를 서기 532년 신라에 항복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논설 삼국사기를 살펴보면 구형왕은 임자년 서기 532년에 국토를 바쳐 신라에 항복하였다.
즉 시조 수로왕이 처음 즉위한 임인년 서기 42년부터 구형왕 말년 임자(532년) 까지를 계산하면 490년이 된다. 만약 또 다른 사기록을 상고한다면 국토를 바친 것은 元魏(원위) 保定(보정:북조 주 무제 연호) 2년은 임오(562년)에 해당된다, 곧 30년을 더하게 되면 총 520년이 된다. 삼국사기에서 두 가지 설이 전하고 있기에 모두 기록해 둔다. 본문 끝.
2, 가락국은 절강성 臨海郡(임해군)에 있었다.
(삼국유사2권 -2기이-가락국기의 고찰) [1], 大駕洛國(대가락국)의 위치는 동쪽에 黃山江(황산강:중국 안휘성)이 있고, 서남쪽에 滄海(창해)가 있고, 서북쪽에 地理山(지리산)이 있고, 동북쪽에 伽耶山(가야산)이 있고, 남쪽에 國尾(국미:가야국 남쪽에 馬尾(마미)가 있다.
[2], 왕후는 望山島(망산도) 밖 浦津(포진) 나루터에 뱃머리가 닿자 육지에 올라 잠시 쉬게하고 高嶠山(고교산)에서 별도로 입고 있던 비단 바지를 벗어 우산(于山) 신령에게 바쳤다.
福建省(복건성) 복주시에서 15㎞ 떨어진 馬尾山(마미산)에 나성탑(羅星塔)이 있고, 우산(于山)의 별칭은 신선들이 거닐어 9선산(仙山)이라고 한다. 이 산은 옛날에 하씨(何氏) 형제 9명이 불로장생약을 만들어 선인이 되기 위해 수도 한 곳이라고 한다. 일제와 중국은 마미(馬尾)의 마(馬)자를 삭제했다. 조선과 프랑스의 마강 해전이 바로 이곳이다.
♦. 가야의 황산(黃山)은 안휘성 동쪽에 있었다.
중국 남부 안휘성(安徽省)의 동쪽, 양자강 이남에 위치한 황산은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이며 수로왕이 말한 것과 같이 가이 신선(神仙)이 거닐던 곳이다.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72개 군봉의 절경은 경이로워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황산은 중국 10대 명승지중의 하나이며 1990년 UN에 세계 자연과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 임해전(臨海殿)은 절강성 임해현에 있습니다.
[1]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臨海縣(임해현) 기록에 대하여 살펴보자.
신라 제 21대 炤智麻立干(소지마립간) 15년(493년) 7월에 臨海(임해)와 長嶺(장령)에 두 鎭(진)을 설치하여 倭賊(왜적)을 방비하였다. 2, 신라 제 39대 昭聖王(소성왕) 2년 4월에 강풍이 몰아쳐 臨海殿(임해전)과 仁化殿(인화전)의 두 궁전의 門(문)이 무너졌다.
신라 제 39대 文聖王(문성왕) 9년(847년) 2월에 平議殿(평의전)과 臨海殿(임해전)의 두 궁전이 낡아서 수리를 하였다. 4, 신라 제 47대 憲安王(헌안왕) 4년(878년) 9월 臨海殿(임해전)에서 군신들과 주연회를 베풀었다. 5. [신라 제 56대 경순왕편] : 5년 봄 2월 태조는 50여 騎馬(기마)를 통솔하고 京畿(경기)에 도착하여 신라왕을 배알하고 百官(백관)들과 郊外(교외)에서 환영식을 거행하고 궁전으로 들어와 서로 상대국의 대신들과 극진한 예로서 정담을 나누었다. 미리 마련한 臨海殿(임해전)에서 酒宴會(주연회)를 베풀었다.
술기운이 오르자 신라왕이 말하기를 나는 하늘의 도움을 얻지 못하여 반란과 온갖 재앙이 일어 날 뿐 아니라 견훤은 오만 방자한 不義(불의)를 자행하여 우리나라는 초상집과 같으니 이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라고 훌쩍 훌쩍 울며 눈물을 흘리자 좌우의 모든 재상들도 모두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태조 역시 눈물을 흘리며 위로하였다. 이로 인하여 고려 태조는 수십일 동안 머물러 있다가 임금 수레를 타고 돌아가려고 하자 신라왕은 穴城(혈성:?) 까지 따라 나와서 전송하였다. 당시 고려 태조의 아우 裕廉(유렴)을 인질로 삼기 위해 御駕(어가)에 태워 따르게 하였다. (후략)
[6]. 고려 태조 왕건이 신라를 통합한 이후는 대대로 臨海縣(임해현)이라 하고 排岸使(배안사)를 두고 48년 간 그대로 이름하다, 다음에 臨海郡(임해군)을 혹은 金海府(김해부)라 하고 都護府(도호부)를 두고 27년 동안 그대로 불렀다. 또 고려에서 防禦使(방어사)를 두어 64년 동안 그대로 이름하였다,
[2]. 가야의 김해경에 羅城(나성)이 있었다.
가야의 김해경에 둘레가 1,500步(보)의 羅城(나성)이 있었다. 고려 태조는 처음 즉위하여 京都(경도) 羅城(라성)을 장정들과 인부 30만 4천 4백 명이 勞役(노역)하여 20년(937년)만에 공사를 마쳤다, 羅城(라성)은 둘레가 2만9천7백보이고 누각이 1만3천개, 大門(대문)이 4개, 中門(중문)은 8개이고 小門(소문)이 13개이었다.
♦ 진주(晉州)는 대한민국 영토 보다 더 큰 땅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 30권 경상도/진주목(晉州牧)] 진주(晋州)는 동쪽으로 함안군(咸安郡) 경계까지 67리이고, 진해현(鎭海縣) 경계까지는 79리이다. 진주의 남쪽 [사천성(四川省)] 사천현(泗川縣) 경계까지 28리이고, 고성현(固城縣) 경계까지 66리이다. 진주는 서쪽으로 단성현(丹城縣) 경계까지 38리이고, 곤양군(昆陽郡) 경계까지 27리이고, 하동현(河東縣) 경계까지 67리이고, 전라도 광양현(光陽縣) 경계까지 94리이다. 진주는 북쪽으로 삼가현(三嘉縣) 경계까지 45리이고, 의령현 경계까지는 40리이고, 단성현 경계까지 47리이고, 서울과의 거리가 8백 66리이다.
♦.진주(晉州=금주(金州)의 교통
『고려사』에 따르면 전국 22도(道)로 나누고 교통은 525역(驛)이 있었는데, 금주도(金州道)에만 31역이 있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진주(晉州) 남쪽 52리에 영창역(永昌驛)이 있고, 진주 남쪽 60리에 문화역(文和驛)이 있다. 진주에서 서쪽으로 10리에 평거역(平居驛)이 있고, 진주에서 서쪽 54리에 정수역(正守驛)이 있고, 진주 서쪽 1백 19리에 평사역(平沙驛)이 있다. 소남역(召南驛)과 소남진은 진주 서쪽에 있다. 진주(晉州) 북쪽 42리에 안간역(安間驛)이 있다. 진주 동쪽 59리에 부다역(富多驛)이 있다. 진주 남쪽 28리에 십수교(十水橋) 교량(다리)이 사천(泗川)성 경계에 있었다.
♦.【진주(晉州)지명의 변천사, 진주 연혁】
진주(晉州)는 본래 백제의 거열성(居列城:거타주)인데 신라 문무왕(文武王)이 빼앗아서 주(州)를 설치하였다. 신문왕(神文王)은 거타주를 분할하여서 진주총관(晉州摠管)을 설치하였다. 신라의 경덕왕은 강주(康州)로 고쳤다. 혜공왕(惠恭王)이 다시 정주(菁州)로 고쳤다.
고려 태조는 또 강주(康州)로 고쳤다. 성종(成宗) 2년에 진주목(晉州牧)을 설치하였다가 14년 진주(晉州)로 고쳐서 절도사를 두고, 정해군(定海軍)이라 칭하며 산남도(山南道)에 예속시켰다. 현종(顯宗)은 8목(牧)의 하나로 정하고 안무사(安撫使)를 두었다. 본조 태조 현비(顯妃)의 고향이기 때문에 진양대도호부(晉陽大都護府)라 칭하였는데, 태종(太宗) 때에 지금 진주목으로 고쳤다. 세조조(世祖朝)에는 진주에 진(鎭)을 설치하였다.
광종 22년(971)에 김해부(金海府)를 설치되었다가 성종14년(995) 영동도(경상도)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했습니다. 목종 3년(1000)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를 현종 3년(1012)에 금주(金州)로 고쳐 방어사(防禦使)를 두었습니다. 충선왕1년(1309)에 금주목(金州牧)이라 칭하다가, 충선왕 3년(1311)에 김해부로 고칩니다. [진주시청 진주연혁 참조 정리]
대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가 한반도 속으로 얽어 맞춘 김해경(金海京)은 양주(良州:양산)에 속하고 진주(晋州)는 강주(康州)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良州(양주:양산)와 강주(康州:진주)는 같은 지역에 위치한 진주(晋州)로 밝혀졌습니다. 진주(晋州)의 교통은 31역(驛)이 속해 있었으며 현재 대한민국 영토보다도 더 넓고 큰 진주(晋州) 영역(領域)이었습니다.
서기 42년 가야시대부터 김해경(金海京)은 신라시대는 김해소경(金海小京), 정주(菁州)이고, 고려시대는 臨海郡(임해군) 혹은 金海府(김해부), 진주(晉州=금주(金州), 진양대도호부(晉陽大都護府),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라 칭하고 금주목(金州牧)이라 칭하였다. 고려는 진주(晉州)를 산남도(山南道)에 예속시켰다. 조선시대는 김해도호부(金海都護府)라 칭하고, 일제식민지시대의 1918년 7월 13개면으로 통합되면서 김해면(金海面)이 되었습니다.
진실을 밝히는 플러스 코리아 http://pluskorea.net/
[제10편 김해는 가야의 가짜 왕도로 밝혀졌다]의 연재는 왜독(倭毒:거짓 가짜 국사지식)에서 벗어나는 해독제로서 반신반의(半信半疑)하던 독자님들도 고증(考證)에 의한 입증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근본적으로 뒤틀린 현행 국사를 확인했을 것입니다. 죽을때까지 일본왕에게 충성한 민족의 반역자 이병도를 민족사학을 정립한 선구자로 추종하며, 거짓 가짜 국사를 적극 고수(固守)하던 충견(忠犬:제자 강단사학자)들도 본 고증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며, 얼빠진 정부당국자(대통령, 교육부, 국사편찬위원회)도 망국적 치욕의 국사를 철폐하지 않고는 국민적 저항을 피할 수 없는 증서로서 더 이상 국민을 기만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오직 개인의 명예와 자손 만대로 부귀영달을 위해 조국을 배신하고 일본왕에게 충성한 이병도의 반민족적 범행을 확인하고, 이병도 한 개인에게 7천만 국민이 무려 62년간 깜쪽같이 속았다.는 사실에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어찌 울분을 참을 수 있겠는가?
다음은 [제11편 수로왕능과 허왕후능은 가짜 묘이다.] 가 연재됩니다.
단독보도 제11편 수로왕능과 허왕후능은 가짜 묘이다.]
가야의 수로왕은 황천상제(皇天上帝)의 명을 받아 서기 42년 3월 3일(3월 삼짇날) 열 마리의 거북이가 엎드려 있는 형상의 龜旨峰(구지봉:경남 김해시 서상동)에 금 상자를 타고 내려왔다. 또한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은 부왕의 명에 따라 서기 48년 7월 27일 붉은 빛의 돛단배에 붉은 깃발을 휘날리며 처음 望山島(망산도:경남 사천시 선구동)에 도착했다.
➤ 望山島(망산도)는 경남 사천시 선구동 인가? 중국 사천성 안악현 인가? 확인합시다.
[1]. 수로왕의 황후 허황옥은 신라의 석탈해왕의 여동생이다.
가야의 수로왕은 서기 42년 3월 15일(보름)에 왕위에 즉위하여 이름을 首路(수로)라 하고 국호를 大駕洛(대가락) 또는 伽耶國(가야국)이라 칭하였다, 자금은 金陽(금양:금주,양주)에서 조달하여 국내의 丁壯(장정)들과 전문직 工匠(공장)이 인부들을 두루 징발하여 3월 20일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서기 44년 2월에 궁궐 공사를 완성되었다.
수로왕은 좋은 날자를 잡아 辰(진)일 새로 지은 新畓坪(신답평)으로 궁궐을 옮겼다. 이때 갑자기 琓夏國(완하국 : 아유타국) 탈해(신라 제 4대왕)가 바다를 건너 가락국에 왔던 것이다. 탈해는 키가 9척이고 머리 둘레가 3척이었다. 탈해가 대궐로 들어가 수로왕에게 말하기를, “나는 수로왕의 왕위를 빼앗고자 이 땅에 왔소" 수로왕이 대답하기를 나는 옥황상제의 天命(천명)에 의하여 왕위에 올라 장차 백성들이 편안히 살수 있게 하고자 하는데 감히 천명을 위배하며 너에게 왕위를 넘겨 줄 수 없느니라, 또한 우리나라 국민들도 너에게 맡기지 않을 것이니라. 탈해가 말하기를 道術(도술)로 겨루어 승패를 가렸으나 탈해는 수로왕에게 이길 수 없자 항복하고 이웃나라 신라의 鷄林(계림)으로 급히 달아났다.
[삼국사기 본기 제1 탈해이사금] 탈해는 본래 多婆那國(다파나국, 琓夏國(완하국:아유타국) 含達婆(함달파) 왕과 積女國(적녀국:黃龍國(황룡국) 왕의 딸 사이에서 7년 만에 임신하여 큰 알을 낳았다. 함달파왕이 말하기를 사람이 알을 낳는 것은 상서스럽지 못하니 의당 버려라 하자 그녀는 차마 버리지 못하고 비단으로 알을 싸고 보물과 함께 상자 속에 넣어 바다에 띄워 마음대로 떠나가도록 하였다.
처음 이른 곳이 신라국 해변의 阿珍浦口(아진포구)에 도착하였다. 이때는 신라의 시조 혁거세왕 재위 39년(서기전 19년)이였다. 때마침 아진포구 해변에 살고 있던 老母(노모)가 줄로 끌어당기어 海岸(해안)에 매어놓고 궤짝을 열어보니 한 작은 아이를 발견하고 할머니는 집에 데려와 길렀다. 장년이 되자 身長(신장)이 九尺(9척)이고, 남들보다 지혜가 뛰어난 신성(神聖)이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이 아이의 姓氏(성씨)는 알 수 없고 처음 이곳에 올때 까치 한 마리가 울면서 따라 다니며 날아 다녔다고 하여 까치 鵲字(작자)의 한편을 생략하여 昔氏(석씨)가 되었다. 또한 얽어맨 상자 안에서 풀려 나왔다 하여 이름을 탈해라 하였다.
탈해는 [아진포구]에서 처음 고기잡이를 업으로 삼아 열심히 일하며 조금도 꺼리는 기색도 없이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어머니가 말하기를 너는 보통 사람이 아니고 골상이 특수하고 남들과 다르니 의당 학문에 종사하여 功名(공명)을 세워야 하느니라. 이에 학문에 전념하며 겸하여 地理(지리)도 알게 되었다. [탈해가] 楊山(양산) 밑에 살고 있는 瓠公宅(호공댁)을 바라보니 좋은 吉地(길지) 땅이므로 계략으로 그 집을 빼앗아 살았다. 그 지역이 뒤에 신라의 月城(월성)이 되었다.
신라 제2대 南解王(남해왕) 5년(서기 8년)에 이르러 탈해가 賢人(현인)이라는 소문을 듣고 남해왕은 딸 阿孝(아효)를 그의 아내로 삼게 하였다. 7년(서기 9년)에 탈해를 登庸(등용)하여 大輔(대보)로 삼고 政事(정사)를 위임하였다. 신라 제3대 儒理王(유리왕)이 돌아가실 때 말씀하시기를 先王(선왕)께서 나에게 유언하시기를 내가 죽은 뒤에는 아들과 사위를 막론하고 나이가 많고 적음을 논하지 말고 의당 賢人(현인)을 선택하여 왕위를 계승시켜야 하느니라. 라고 말씀하셨다. 이에 寡人(과인)이 먼저 즉위하게 되었으나 지금은 의당 왕위를 탈해에게 전해 주어야 한다. 라고 말씀하셨다. 탈해(일명 吐解(토해)는 62세에 왕위에 올랐다.
2년 봄 정월에 瓠公(호공)을 大輔(대보)로 삼았다. 2월에 탈해왕은 친히 시조를 모신 宗廟(종묘)에서 제사를 받들었다. 3년 봄 3월에 왕이 吐含山(토함산)에 오르니 검은 구름이 마치 뚜껑과 같이 왕의 머리 위를 오래도록 떠돌다 흩어졌다. 여름 5월에 倭國(왜국)과 우호친선 조약을 맺고 서로 빙문하며 교류하였다. 6월에 彗星(혜성)에 天船(천선)이 있었다.
5년(서기 61년) 가을 8월 馬韓(마한)의 장군 孟召(맹소)가 覆嚴城(복암성)을 바치며 항복하였다. 7년 겨울 10월에 백제왕이 땅을 개척하고 娘子谷城(낭자곡성)에 도착하여 사신을 파견하여 만나기를 청하였으나 왕은 가지 않았다. 8년 가을 8월에 백제가 군사를 파견하여 蛙山城(와산성)을 공격하였다. 겨울 10월에 또 狗壤城(구양성)을 공격하자 왕은 騎馬(기마)병 2천명을 파견하여 격퇴시키니 도주하였다.
탈해왕 9년(65년) 봄 3월 왕이 밤에 金城(금성) 서쪽 始林(시림)숲에서 닭 울음소리를 듣고 새벽녘에 瓠公(호공)을 보내었더니 금색의 작은 궤짝이 나무 가지에 걸린 체 흰 닭이 나무 밑에서 울고 있었다. 瓠公(호공)이 돌아와 보고하자 왕은 사람을 시켜 그 궤짝을 가져와 열어보니 어린 남자아이가 궤짝 속에 있었는데 용모가 아주 기이하였다. 왕은 매우 기뻐하며 좌우신하에게 말하기를 이는 하느님이 나에게 주신 아들이 아니겠는가? 하고는 거두어 길렀다. 장성하자 총명하고 지략이 많아 이름을 閼智(알지)라 하였다. 그의 출생이 금 상자에서 나왔기에 姓(성)을 金氏(김씨)라 하고 始林(시림)을 계림으로 바꾸고 국호도 鷄林(계림)으로 정하였다.
21년 가을 8월 阿湌(아찬) 吉門(길문)이 加耶(가야) 군사들과 黃山(황산:중국 안휘성(이병도 충청도 논산) 津口(진구)에서 전투하여 1000여명을 포로로 잡았다. 길문은 그 공노로 波珍湌(파진찬)이 되었다. 23년 봄 2월에 彗星(혜성)이 동방에 나타나고 또한 북방에도 나타났다가 20일 만에 사라졌다. 24년 여름 4월에 京都(경도)에 큰 바람이 불어 금성의 東門(동문)이 저절로 무너졌다. 가을 8월에 왕이 돌아가시니 금성 북쪽 壤井(양정) 언덕에 장례하였다. [본문 끝]
2. 아유타국의 허황옥 공주
[삼국유사 3권-4탑상] : 金官城(금관성)의 虎溪寺(호계사) 婆娑石塔(파사석탑)은 서기 48년(갑신년) 남천축의 阿踰陀國(아유타국) 許黃玉(허황옥) 공주가 배에 싣고 온 석탑이다. 처음 허황옥 공주가 두 부모님의 명을 받들어 바다를 건너 東(동천축국 가야국)을 향하여 오는데 水神(수신)의 노여움을 받아 파도가 일어나 가지 못하고 되돌아가 父王(부왕)에게 아뢰자 부왕은 이 파사석탑을 배에 싣고 가라고 명하였다.
남천축의 阿踰陁國(아유타국) 含達王(함달왕:함달파왕)의 공주 허황옥은 부왕의 명에 따라 서기 48년 7월 27일 붉은 빛의 돛단배에 婆娑石塔(파사석탑)을 싣고 붉은 깃발을 휘날리며 처음 望山島(망산도)에 도착했다. 처음 뱃머리가 닿은 渡頭村(도두촌, 主浦村(주포촌)에서 별도로 입고 온 능라 비단 바지를 벗은 곳을 綾峴(능현)이라 했다. 아유타국 허황옥 공주가 처음 도착한 望山島(망산도) 밖 浦津(포진;아진포구)에 뱃머리가 닿자 잠시 쉬고는 별도로 입고 있던 비단 바지를 벗어 高嶠山(고교산:우산(于山) 신령에게 바쳤다.
[삼국유사 가락국기] 留天(유천)등은 먼저 望山島(망산도:경남 사천시 선구동)에서 횃불을 올리자 불빛을 보고 바다를 건너 망산도에 도착하자 사람들이 뛰어내려 달려오므로 神鬼干(신귀간)은 대궐로 달려가 왕에게 이 사실을 아뢰자 왕은 이 말을 듣고 무척 기뻐하셨다.
九干(9간)등은 허황후와 함께 온 잉신과 泉府卿(천부경), 申輔(신보)와, 그의 처 모정(慕貞)과 宗正監(종정감) 趙匡(조광)과 그의 처 모량(慕良)등은 금관국에 도착한 후 30년 만에 각각 두 딸을 낳았는데 그들 부부는 12년을 지나 모두 죽었다. 그 외 함께 들어온 사람들도 7,8년 동안 자식을 낳지 못하였다. 그들은 오직 고향을 그리워하며 슬픔을 품고 살다 모두 다 죽고 舍賓館(사빈관)은 텅비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서기 189년 3월 1일 왕후가 돌아가시니 나이는 157세 이였다. 왕후가 돌아가시자 온 나라 사람들은 땅이 꺼진 듯이 슬퍼하며 탄식하였다. 왕후는 龜旨峰(귀지봉) 동북 언덕에 장례하였다. 왕후가 돌아가시자 수로왕은 매일 베개를 의지하며 悲嘆(비탄)에 젖어 슬픈 노래를 많이 부르다 25년을 더 살고 서기 199년 3월 23일 돌아가시니 나이는 158세 이었다. 온 나라 사람들은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진 듯 자기의 부모가 돌아가신 것보다 더 슬피 통곡하여 왕후가 돌아가실 때 보다 더욱 더 슬피 울었다. 대궐에서 艮方(간방) 平地(평지)에 세운 殯宮(빈궁)은 높이가 한길이고 주위의 둘레가 300보이었다. 이곳에 장례를 지내고 이름을 首陵王廟(수능왕묘)라 하였다. (후략)
수로왕이 황후를 맞이하여 150여 년을 함께 살 때에도 海東(해동)은 아직 절을 창건하여 佛法(불법)을 信奉(신봉)하는 일은 없었다. 대개 佛像(불상)과 佛敎(불교)가 아직 이 나라에 들어오지 않아 사람들이 불교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가락국 본기에서 절을 세웠다는 글이 실려 있지 않다. 신라 제 8대 질지왕 2년 임진(452년)에 佛寺(불사:절)을 세우고 그 지역에 또한 王后寺(왕후사)를 창건하여 지금 까지도 부처를 신봉하며 복을 빌며 겸하여 남쪽의 倭國(왜국)을 진압시켜 줄 것을 빌었다. [이것은 阿道(아도)와 訥祗王(눌지왕) 시대이고 法興王(법흥왕) 이전에 해당된다.] 자세한 것은 가락국 본기를 보라,
석탑의 모양은 4면과 5층으로 되어 있고, 그 조각은 매우 기이하다. 石面(석면)에는 미세한 붉은 무늬가 있고 그 石質(석질)이 아주 좋은데 그러한 돌은 우리나라에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本草(본초)에서 이르기를 이곳에 닭 벼슬의 피를 시험하였다는 것이 이것일 것이다. 금관국의 또한 국명은 駕洛國(가락국)이다, 가락국 본기에 자세히 실려 있다. <후략>
석탈해는 다파나국(琓夏國(완하국:아유타국) 含達婆(함달파) 왕과 積女國(적녀국:황룡국)사이에서 알로 태어나고, 수로왕의 왕비 허황옥은 아유타국 공주이었다. 고로 허황옥은 탈해왕의 여 동생이 된다. 즉 탈해와 수로왕이 도술로 겨룬 탈해는 누이동생 허황옥이 수로왕과 혼인하기 전에 미리 수로왕이 진짜 천자(天子)인가? 를 먼저 시험했던 것이다.
3, 수로왕능과 허왕후릉은 가짜 묘이다.
현재 경남 김해시 서상동 허왕후능 앞에 [望山島維舟巖維舟碑閣:망산도유주암유주비각]이 있고 비각안의 維舟碑(유주비)는 비신 높이 1.75m, 너비 0.765m,두께 0.35m의 석비로, 大駕洛國太祖王妃普州太后許氏維舟之(대가락국 태조왕비 보주태후허씨유주지)라고 기록돼 있다.이 維舟碑閣(유주비각)은 일제식민지 시대의 1908년(융희 2)에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목조와가로 건축되었다. 이후 1988년 12월 23일 경상남도기념물 제89호로 지정되었다. <네이버 백과사전 인용>
普州太后許氏陵(보주태후허씨능)
[가락국수로왕비보주태후허씨릉(駕洛國首露王妃普州太后許氏陵)] 이라고 씌여진 비석이 서 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서 허왕후능은 서기 189년 왕후가 돌아가자 구지봉 동북쪽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라고 돼 있다. 현재 본존 상태로 보아 허왕후가 돌아가신 2세기경의 가야고분이 아니다. 구산동 고분군의 발굴조사팀은 6세기 중엽 경에 축조된 고분으로 확인하고 이 비석은 조선조 인조 25년(1641)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졌다. 일제는 어찌 역사만 변조하고 유적물을 조작하지 않았겠는가? 현재 경남 김해의 수로왕 능과 허황후 능은 일제 식민지시대에 유적을 조작, 변조한 증거물이며, 대표적 산물이다.
'普州太后(보주태후)의 보주(普州)에 대해 한양대 박물관장 김병모 교수는 중국 사천성 안악현이라 했다. 서천축의 阿踰陁國(아유타국) 含達王(함달왕)의 공주 허황옥은 서기 48년 7월 27일 붉은 빛의 돛단배에 여러 보물과 婆娑石塔(파사석탑)을 싣고 붉은 깃발을 휘날리며 처음 望山島(망산도)에 도착했다. 즉 중국 사천성 안악현에 정착했던 것이다.
대가락국의 수로왕비(王妃)는 본래 普州(보주:중국 사천성 안악현)에 있었으나 일제와 조국을 배신한 민족의 반역자 이병도는 본래 중국 대륙의 사천성, 귀주성, 광서성, 광동성, 복건성, 강서성등 중국 동남부 일대에서 건국되었던 가야국을 한반도 속의 경남 김해로 얽어 맞추어 대한민족의 기상을 철저히 말살 했던 것입니다.
1. 阿耶伽倻(아나가야)
아나가야의 咸安郡(함안군)은 법흥왕이 대군을 일으켜 阿尸良國(아시량국:阿那伽耶(아나가야)라고 함)을 멸하고 그 땅을 군으로 삼았는데 경덕왕이 함안으로 개명하여 지금도 그대로 이다. 이 領縣(영현)이 둘이다. 1,玄武縣(현무현)은 본시 召 縣(소삼현)이였으나 경덕왕이 개명하였다. 지금은 召彡部曲(소삼부곡)이다. 2,宜寧縣(의녕현)은 본시 獐含縣(장함현)인데 경덕왕이 개명하였다. 지금도 그대로 되어 있다. 현재 宜寧郡(의녕군) 宜寧面(의녕면)이다.
2. 古寧伽耶(고녕가야)
고녕가야는 [지금의 咸寧(함령)이다], 古寧郡(고녕군)은 본래 古寧伽耶國(고녕가야국)인데 신라가 빼앗아 古冬攬郡(고동람군:古陵縣(고능현)이고도 함)으로 삼았다. 경덕왕이 개명하고 지금의 咸寧郡(함령군)이다. 이 영현이 셋이다. 1, 嘉善縣(가선현)은 본래 加害縣(가해현)인데 경덕왕이 개명하였다 . 지금은 加恩縣(가은현:지금 문경군 가은면)이다. 2, 冠山縣(관산현)은 본래 冠縣(관현:冠文縣(관문현)이라고도 함)인데 경덕왕이 개명하였다. 지금은 聞慶縣(문경현:지금의 문경군 문경면)이다. 3, 虎溪縣(호계현)은 본래 虎側縣(호측현)인데 경덕왕이 개명했다. 지금도 그대로이다. 현재 문경군 호계면이다.
3. 大伽耶(대가야)
대가야는 [지금의 高靈(고령)이다] 高靈郡(고령군)은 본래 大伽倻國(대가야국)이다. 始祖(시조) 伊珍阿鼓王(이진아고왕:內珍朱智(내진주지)라고도 함)에서 道設智王(도설지왕)에서 16대 520년까지 이르렀는데 진흥대왕이 침범하여 멸망시키고 그 지역을 大伽倻郡(대가야군)으로 삼았다. 경덕왕이 개명한 이름으로 지금까지 그대로이다. 이 영토는 縣(현)이 둘이다. 1, 冶爐縣(야로현)은 본래 赤火縣(적화현)인데 경덕왕이 야로로 개명하여 지금도 그대로이다. 현재 합천군 야로면이다. 2, 新復縣(신복현)은 본래 加尸兮縣(가시혜현)이였으나 경덕왕이 개명하여 지금은 未詳(미상)이라: 어디인지 알 수 없다.
4. 星山伽耶(성산가야)
성산가야는 [지금의 京山(경산)이다. 혹 碧珍(벽진)이라 하였다] 星山郡(성산군)은 본래 一利郡(일리군:里山郡(이산군)이라고도 함)인데 경덕왕이 개명하고 지금의 加利顯(가리현)이다. 이 영토는 현이 4개이다. 1, 壽同縣(수동현)은 본래 斯同火縣(사동화현)인데 경덕왕이 개명하였다. 지금은 未詳(미상)이다. 2, 溪子縣(계자현)은 본래 大木縣(대목현)인데 경덕왕이 개명하였다. 지금은 若木縣(약목현: 현재 칠곡군 약목면)이다. 3, 新安縣(신안현)은 본래 本彼縣(본피현)이다. 경덕왕이 개명하여 지금은 京山府(경산부:현재 성주군 성주면)이다. 4, 都山縣(도산현)은 본래 狄山縣(적산현)인데 경덕왕이 개명하여 지금은 자세하지 않다.
5. 小伽耶(소가야)
소가야는 [지금의 固城(고성)이다] 固城郡(고성군)은 본래 古自郡(고자군)인데 경덕왕이 개명하여 지금도 그대로 이다. 이 영현이 셋이다. 1, 蚊火良縣(문화량현)은 지금 어디인지 알 수 없다. 2, 泗水縣(사수현)은 본래 史勿縣(사물현)이라 하였으나 경덕왕이 개명했다. 지금의 泗州(사주:泗川郡(사천군) 泗川面(사천면)이다. 3, 尙善縣(상선현)은 본래 一善縣(일선현)인데 경덕왕이 개명하였다. 지금의 永善縣(영선현: 현재 진주 동쪽)이다.
6. 가락국(가야)
삼국사기 지리 제 1에서 金海小京(김해소경)은 옛 금관국이며 일명 伽落國(가락국)을 일명 伽倻(가야)라 한다. 시조 수로왕에서 10대 구해왕(구충왕}에 이르러 신라 법흥왕 19년에 백성들을 거느리고 신라에 항복해 왔다. 이 지역을 金官郡(금관군)으로 삼았다. 文武王(문무왕) 20년 永隆元年(영융원년)에 小京(소경)이였었으나 경덕왕이 개명하여 金海京(金海小京:김해경,김해소경)이라 하였다. 지금은 金州(금주)라 한다. 현재 경남 김해이다. 상기의 현재지명은 일제와 이병도가 전부 다 조작, 변조한 지명이다.
♦ 중국의 계림(桂林)과 신라의 계림(鷄林)
중국 강소성 남경(南京)의 계림(桂林) 동쪽에 7개의 봉우리가 마치 북두칠성이 늘어선 모양과 같다고 하여 칠성공원이라 이름하였다. 길이 125m의 돌다리로 만든 화교(花橋)를 건너서 공원 안에는 월아산(月牙山), 칠성암(七星岩), 낙타산(駱駝山) 등의 바위산들과 여러 동굴이 있다. 용은동(龍隱洞) 부근의 비석들을 계해비림(桂海碑林)이라고 부릅니다. [즉 가야국 수로왕을 만나기 위해 아유타의 허황옥 공주가 바다를 건너 계림(鷄林)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은 계림(鷄林)을 계림(桂林)으로 지명 글자를 변조했던 것이다.
중국 강소성[江蘇省]의 성도(省都) 남경(南京)은 양자강[揚子江] 연안 항구이자 산업·교통의 중심지이다. 일제식민지시대의 1912년 중화민국 임시정부가 이곳에 세워졌고, 1927년 중화민국의 수도가 되었다. 중일전쟁 중에는 일본에 의해 점령되어, 일본의 괴뢰정권인 왕자오밍[汪兆明] 정권이 이곳에서 수립되었다. 남경은 4구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북부는 중산로(中山路)가 관통하고 일명 북극각[北極閣]이라 칭하는 계명산[鷄鳴山]과 계명사(鷄鳴寺), 영곡사(靈谷寺) 등의 명승고적과 경치가 아름다운 자금산(紫金山)이 있다.
[삼국유사 신라 시조 혁거세왕편]에 혁거세왕은 계정(鷄井)에서 태어났고 왕비 알영은 계룡(鷄龍)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국호를 계림국(鷄林國)이라 칭했다. 또한 탈해왕은 9년(65년) 봄 3월 밤에 金城(금성) 서쪽 始林(시림)숲에서 닭 울음소리를 듣고 새벽녘에 瓠公(호공)을 보내었더니 금색의 작은 궤짝이 나무 가지에 걸린 체 흰 닭이 밑에서 울고 있었다. 그 궤짝 속에 어린 남자아이가 있었는데 탈해왕은 매우 기뻐하며 총명하고 지혜가 많아 이름을 閼智(알지)라 하였다. 금상자에서 나온 아이의 姓(성)을 金氏(김씨)라 하고 始林(시림)을 계림으로 바꾸고 국호도 鷄林(계림)이라 하였다.
중국 강소성(江蘇省) 남경(南京)에 소재한 계명산(鷄鳴山), 계명사(鷄鳴寺), 영곡사(靈谷寺), 월아산(月牙山), 용은동(龍隱洞) 등은 신라 시조 혁거세왕과 왕비 알영의 출생과 거의 똑 같다. 일본왕의 충견(忠犬)이었던 이병도는 중국에서 건국된 신라와 6가야국을 한반도 속으로 얽어 맞추어 민족적 자긍심을 철저히 말살했습니다.
즉 대가락국(가야)의 수로왕은 처음 중국 江蘇省(강소성) 淮陰縣(회음현) 龜州城(귀주성) 龜山(구산)에 탄강(誕降)하셨습니다. 그러나 조국을 배신했던 대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는 경남 김해시 서상동 龜旨峰(구지봉)으로 조작하여 한반도 속으로 얽어 맞추고 6가야국은 각각 독립적 국가이었으나 大駕洛(대가락)을 소위 연맹체로 조작했던 것입니다. 대가락국의 수로왕이 5가야국을 연맹체로 다스렸다는 문헌 기록은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끝.
다음은 [가야국은 천축국(天竺國)이다.] 가 연재됩니다.
[단독보도] "가야는 천축국이다!" | | "조선의 천축국은 아세아 각국을 불국정토를 이루었다 " | | 박병역 위원 | | [제 12편] 중국의 황하 문명은 BC 3500년경부터 황제가 등장하여 황금으로 장식된 거대한 궁궐을 짓고 찬란한 황금문화를 꽃피웠습니다. 현행 국사는 중국과 이웃한 고조선의 단군은 석기시대의 부족장이며, 우리나라의 역사가 매우 오래 되었음을 말해 준다.고 기술돼 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의 국조 단군왕검이 개국한 BC 2333년부터 BC 108년까지 무려 2천여년의 역사는 공백 상태이며, 기원전 194년 위만이 준(準)을 몰아내고 고조선의 왕이 되고부터 비로소 철기문화가 확산되었다. 라고 어처구니없는 국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한국의 모든 사람들은 일왕의 충견(忠犬:똥개) 이병도가 거짓 가짜로 만든 국사교육에 무려 62년 동안 세뇌되어 분별력을 상실하여 “고증에 의한 역사적 진실”도 두 눈으로 확인하고도 쉽게 수용하지 못하는 얼빠진 한국인이 어찌 [가야는 천축국이다]를 믿을 수 있겠는가? 본 주제를 이해하고 납득하기 위해서는 먼저 고조선 삼한의 역사부터 약술합니다.
[1], 단군왕검의 고조선 건국
[중학교 국사] 고조선은 만주 요령지방과 한반도 서북지방에는 족장(군장)이 다스리는 많은 부족들이 나타났다. 단군은 이러한 부족들을 통합하여 고조선을 건국하였다. 그리하여 기원전 4세기경에는 요령지방을 중심으로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잇는 넓은 지역을 통치하는 국가로 발전하였다. 기원전 2세기경, 서쪽 지방에서 세력을 키운 위만이 준왕을 몰아내고 고조선의 왕이 되었다(기원전 194년). [고조선]은 이때 비로소 철기 문화가 확산되면서 위만조선은 이를 바탕으로 주위의 여러 부족을 통합하여 세력을 크게 확장하였다.
또, 한반도 남부 지방에 위치한 진(辰진한,마한,변한)의 여러 나라와 중국의 한 사이에서 중계 무역을 하면서 경제적인 이익을 얻어 부강해졌다. 고조선이 강성해지면서 한에 대항하는 세력으로 커 가자, 한은 대군을 보내어 수도인 왕검성(평양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위만의 손자인 우거왕은 막강한 한의 대군을 맞아 1년 동안 버티면서 잘 싸웠으나, 결국 한무제(漢武帝)의 막강한 군사들에게 왕검성(평양성)이 함락되고 고조선은 멸망하였다(기원전 108). [한무제는 북한 지역에] 한4군(낙랑, 진번,임둔, 현도)을 설치하고 조선을 속국으로 삼아 식민지로 다스렸다.) (중학교 국사 18쪽)
[2]. 우리나라의 국조는 단군인가? 위만인가?
[고등국사 36쪽 도움글] (연(燕)나라 사람 도적 괴수) 위만은 1000여명의 무리를 이끌고 고조선으로 들어올 때 상투를 틀고 조선인의 옷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왕이 된 뒤에도 나라 이름을 그대로 조선이라 하였고, 그의 정권에는 토착민 출신으로 높은 지위에 오른 자가 많았다. 따라서 위만의 고조선은 단군의 고조선을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후략)
고조선은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이 있다. 라고 기술하고, 기자조선(箕子朝鮮)은 국사에서 삭제하고, 연나라에서 도망쳐 조선으로 망명해 온 후 왕검성에 쳐들어와 고조선의 준왕을 몰아내고 194년 위만이 고조선의 왕이 된 후부터 고조선이 강성해 졌기 때문에 배은망덕한 도적 위만을 우리나라의 국조로 받들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현행 국사는 지금 북한지역은 한4군을 설치했기 때문에 기원전 2세기경은 한반도 남부 지방에 위치한 진(辰진한,마한,변한)만이 우리나라의 영토이기 때문에 소위 중국의 동북공정은 허구가 아닙니다. 특히 고조선은 나라가 아니고 부족이며, 제사장(祭司長)의 단군(壇君)은 부족장입니다. 도대체 교육인적자원부, 국사편찬위원회는 어느 나라 사람인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하여 처음 배우는 국사교과서에서 첫 장부터 고조선은 멸망하고, 중국에 조공을 바치는 식민지가 되어 고조선 백성들은 노예가 되었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의 중학생들은 중국의 역사를 배우고 있는가? 한국의 국사를 배우고 있는가? 어찌 패배의식의 망국적 치욕의 역사가 아니라 할 수 있겠는가? 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는 “삼한이 멸망한 역사부터 기술”하여 우리민족을 철저한 “패배의식과 사대주의적 식민지의 역사를 특별히 강조”하여 대일본 제국의 식민지배를 정당화 시켰던 것입니다.
[3]. 세계적 대국의 고조선 삼한(진한,마한,변한)
(1). 제 1세 진한왕 단군왕검
단군왕검은 BC 2357년부터 BC 2333년까지 24년간 황제헌원의 유웅국을 섭정하고 9이의 추대로 BC 2333년 제위에 올라 조선을 삼한으로 나누었다. 진한은 단군이 직접 다스리고, 웅백다를 마한왕으로 봉하고 치우천왕의 후손 치두남을 변한왕으로 동시에 봉했기 때문에 9이국(九夷國)의 영토가 곧 조선이며 또한 삼한입니다. 따라서 고조선과 삼한은 다른 시대가 아니라 단군왕검이 삼한(三韓)으로 나누었기 때문에 고조선은 세계적 대국이었다.
진한왕 단군(壇君)은 삼신(옥황상제)에게 제사를 주제하는 제사장이며, 삼한의 영토를 관리하고 삼한의 왕위를 임명하는 왕권을 갖고 있었다. 단군은 진한왕으로 93년을 제위하고 BC 2239년 3월 15일 130세로 봉정(蓬亭)에서 돌아가셨다. 고조선 삼한의 진한은 제1세 단군왕검부터 제 47대 고열가(BC 295~BC 238)임금까지 2096년의 역년이 있습니다.
(2). 제1세 마한왕 웅백다
단군왕검은 熊伯多(웅백다)를 마한(馬韓)왕으로 봉하고, 옛 환웅천왕의 신시(紳市:천산)지방을 다스리게 하고 도읍을 월지국(月支國=목지국(目支國)에 정했다, 일명 백아강(白牙岡)이라 한다. 마한은 제 1대 웅백다부터 35대 맹남까지 1385년의 역사가 있습니다.
(3). 제 1세 변한왕 치두남
단군왕검 원년 무진(BC 2333년)에 치우천왕의 후손 치두남을 번한 왕으로 임명하고 虞(우)의 정치 감독을 겸하게 하였다. 치두남은 경자(BC 2301년)에 요중(遼中:요녕성)에 험독(險瀆), 영지(令支),탕지(湯池), 통도(桶道), 거용, 한성(汗城), 개평(蓋平), 대방(帶方), 백제(百濟),장령(長嶺),갈산(碣山),여성(黎城)의 열두 개의 성을 쌓았다.
변한은 제1대 치두남부터 제30대 기자(箕子) 성군(聖君)을 지나 제74대 기준(箕準)왕까지 2138년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리고 輿地勝覽(여지승람)에서 이르기를 변한의 제 74세 애왕 휘(諱) 준(準=武康王(무강왕:애왕)은 秦始皇(진시황) 27년 신사(B.C 220년)에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정미(B.C 194년) 燕(연)나라 사람 衛滿(위만)이 침략해 오자 佐右宮人(좌우궁인)을 거느리고 海城(해성:요녕성)에 들어가 후 마한을 건국하고 그해에 돌아가셨다.
1. 북부여 제 1세 시조 해모수[45년 (BC 239-195년)재위.]
진한의 47세 단군 고열가 재위 57년 임술(BC 239년) 4월 8일 북부여 해모수가 백악산 아사달(녹산)에서 일어나 진한의 법통을 계승하고, 해모수가 왕권을 갖게 된다. 원년 임술(BC 239년)에 천제 해모수解慕漱(BC 239-195년)의 자태는 영웅적 기질로서 용맹한 神人(신인)이며 사람이 바라보면 몸에서 빛이 발사되어 사람들은 天王郞(천왕낭)이라 불렀다. 그의 나이 23세에 하느님의 명에 따라 세상에 내려오시니 이때 진한의 단군 고열가 재위 57년 임술(BC 239년) 4월 8일 이었다.
웅심산에 의지하여 蘭邊(난변:길림성 서란)에 궁전을 건축하였다. 항상 까마귀 깃털을 의관에 꽂고 허리에 용을 새긴 빛나는 칼을 차고 오룡이 이끄는 수레를 타고 다녔다. 따르는 500명의 시종들과 아침에 政事(정사)를 듣고 저녁에 하늘로 올라갔다. 2년 계해(BC 238년) 3월 16일에 하늘에 제사하고 烟戶法(연호법:선조의 묘를 지키는 법)을 제정하여 5가의 병사를 나누어 주둔하고 밭을 만들어 자급하게 하고 뜻밖의 일에 대비하도록 하셨다.
8년 기사(B.C.232년)에 해모수 단제께서는 무리를 이끌고 진한의 옛 도읍으로 가시어 5가들을 회유하시니 마침내 진한의 5가(五加)들은 공화정치(共和政治)를 철폐하였다. 이에 만백성들이 해모수를 추대하여 제사장의 단군(壇君)이 되었다. 겨울 10월 사람의 교육은 반드시 어머니 태교부터 가르치도록 명하시고 양태모법(養胎母法)을 공포하였다.
11년 임신(B.C.229)년 北漠(북막)의 추장 山只喀隆(산지객융)이 寧州(영주)를 습격하여 巡察使(순찰사) 穆遠登(목원등)을 죽이고 큰 약탈을 하고 달아났다. 19년 경진(B.C.221년)에 箕丕(기비)가 죽으니 아들 箕準(기준)이 父王(부왕)의 후계를 세습하게 하고 조선의 변한왕으로 봉하고 관리를 보내 병사를 감독하고 연 나라의 침공에 대비하는 일에 더욱 힘쓰도록 하였다. 연 나라는 장수 진개(秦開)를 파견하여 우리나라의 西鄙(서비)를 침략하고 滿番汗(만번한)까지 국경으로 삼았다. 20년 신사(B.C 220년) 백악산 아사달에서 하느님에게 제사를 지내고 7월에 336간의 궁궐을 지어 이름을 천안궁(天安宮)이라 하였다.
해모수 재위 B.C.219년 한(韓)나라 張良(장량)은 한이 진시왕에게 망하자 그 원수를 갚는 다고 가재를 털어 자객을 구하고 역사를 구하였다. 이때 자객으로 선발된 창해(滄海)역사 黎洪星(여홍성)은 120근의 철퇴를 만들어 하남성 동남쪽의 박랑사를 유람 중인 진시왕정을 습격했으나 빗나가 부차만 박살냈다. 장량은 거사가 미수에 그치자 그 뒤 수배자 몸이 되어 숨어오다가 한나라 시조 유방과 함께 진시왕정을 타도하고 한나라 창업공신이 된다.
해모수 재위 31년 임진(B.C.209년), 진승(陳勝:진나라 말기의 농민반란 지도자)이 군대를 일으키니 秦(진)나라 사람들의 생활이 크게 어려워졌다. 이에 연, 제, 조나라의 백성들이 도망해서 조선의 변한 땅으로 수만명이 귀순해 왔다. 이들을 雲障(운장) 지방에 상하로 나누어 살도록 하고 장군을 파견시켜 감독케 하였다.
38년 기해(B.C.202년), 연 나라 노관이 다시금 요동의 옛 성터를 수리하고 동쪽 浿水(패수 지금의 난하:이병도 대동강)를 경계로 삼았다. 45년 병오(B.C.195년), 연 나라 노관이 漢(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망명하자 그의 무리인 위만(衛滿)은 [북부여 해모수 천제]에게 망명을 요구했으나 이를 거부했다. 그러나 B.C.194년 조선 삼한 중 변한의 기준왕이 크게 실수하여 위만을 박사로 모시고 상하 雲障(운장) 땅을 떼어 위만에게 봉해 주었다.
연(燕)나라의 도적 괴수 위만(衛滿)은 준왕의 은혜를 배반하고 1000여명의 무리를 이끌고 왕검성(王儉城)에 쳐들어 와 준왕을 몰아내고 조선의 변한왕이라 자칭하였던 것이다. 현행 국사는 위만에게 패한 준왕이 해남(海南)으로 들어가 강물에 빠져 죽은 것으로 기술하고 있으나 9세왕이 무려 202년을 존속한 후마한 세계(後馬韓 世系)가 뚜렷이 전하고 있습니다.
2. 기준(箕準) 후마한(後馬韓) 건국
후마한 세계(後馬韓 世系)
1世 武康王(一云 哀王) 諱準 丁未(B.C 194年)
移都馬韓其年薨哀王己入於都平壤 四十一世 則馬韓王位八世.
2世 康王 諱卓 惠帝二年 戊申(B.C 193年)立 在位 四年 --☞-公孫卓(공손탁)
3世 安王 諱龕 惠帝六年 壬子(B.C 190年)立 在位 三十二年
4世 惠王 諱寔 文帝後元七年 甲申(B.C 157年)立 在位 十三年
5世 明王 諱武 景帝十三年 丁酉(B.C 144年)立 在位 三十一年
6世 孝王 諱亨 武帝二十八年 戊辰(B.C 113年)立 在位 四十年
7세 襄王 諱燮 宣帝本始元年 戊申(B.C 73年)立 在位 十五年
8세 元王 諱勳 宣帝神爵四年 癸亥(B.C 58年)立 在位 二十六年
9世 稽王 諱貞 成帝建始元年 己丑(B.C 32年)立 在位
후 마한세계(後馬韓世系)
후마한 1세 武康王(무강왕, 哀王(애왕)의 諱(휘)는 準(준)이다. 정미(B.C 194년) 마한의 땅이었던 해성(海城:요녕성)으로 도읍을 옮기고 그해 돌아가셨다. 즉 위만에게 패한 조선 의 변한왕 準(준)은 도읍을 해성으로 옮긴 후 마한을 재 건국하였던 것이다. 후마한의 제 8세 元王(원왕)의 諱(휘)는 勳(훈)이고 계해(B.C 58년)에 왕위에 올라 재위는 26년이다.
신라왕 박혁거세는 조선 삼한 유민(遊民)들의 추대로 甲子(BC 57년:후마한 원왕 22년)에 나라를 세우고, 고구려의 동명성왕(고주몽)은 갑신(B.C 37년)년에 졸본천에서 건국하여 진한과 마한지역에 두 나라가 나란히 다시 일어셨다.
후마한의 8세 원왕(元王)과 9세 계왕(稽王)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후손들 세 사람 중에 한 사람의 鮮于氏(선우씨)는 黃龍國(황룡국)에서 들어왔고 한 사람은 韓氏(한씨)라 칭하고 한 사람은 奇氏(기씨)라 칭했다. 수유족(須臾族)은 원래 우두머리라는 뜻으로 선우여(單于黎)라고 불렀다. 마한왕의 후손 중 일부는 수유족(須臾族:변한왕 기자족)의 우두머리를 선우여(單于黎)라고 불렀다 하여 성을 선우씨(鮮于氏)로 하였다.
또한 조선의 변한왕 기준(箕準)이 마한(韓) 지역으로 이동하여 후 마한을 재건하고 한왕(韓王)이라 칭하여 성을 한씨(韓氏)라고 불렀다. 기자족(箕子族)은 원래 수유족(須臾族)이라 하며 箕子(기자)의 성은 기씨(奇氏)이며 箕(기)와 奇(기)는 같이 쓰인다. 9세 稽王(계왕)의 휘는 貞(정)이다. 기축 B.C 32년에 왕위에 오르고 갑진(B.C 17년)에 백제의 온조가 왕위에 올랐다. 계왕 16년(B.C 17년), 只保圓山(지보원산:요동), 錦峴城(금현성:요동성) 新莽(신분) 두 성이 백제의 온조왕에게 항복하므로서 후마한은 결국 멸망하였다. 제 1세 武康王(강왕)부터 8세 稽王(계왕)까지 202년을 계승하였다.
후 마한의 1세 무강왕(애왕) 휘 준은 정미(BC 194년) 마한 땅에 도읍을 옮기고 그 해 죽었다. 마한세계는 처음 조선왕 준은 위만(衛滿)에게 패하여 무리 수천 명을 거느리고 海南(해남:해성:평양성:요녕성)으로 들어가 마한을 공격하여 깨뜨리고 스스로 마한왕이 되었다. 준의 후 대가 끊어지고 마한 사람들이 다시 진왕을 세웠다. [후한서 한전.] 라고 돼있다.
[후조선 1세 箕子(기자)부터 [제 37세 가색(可索)왕(BC 375~341년)까지는 조선 삼한은 태평했으나 [제 38세 해인(解仁)]왕은 일명 산한(山韓)이며, BC 341년에 즉위하여 1년 간 재위 중에 자객에게 시해 당했다. 아들 수한(水韓)이 BC 340년 [제 39세 왕위에 즉위하여 17년 간 재위했다. BC 339년 연(燕)나라 사람 배도가 쳐들어 와서 안촌홀(安寸忽)을 공격했다. 또 험독(險瀆)에서도 노략질하니 수유(須臾)의 사람 기후가 자제들과 병사 5000명을 거느리고 전투하자 군세가 떨치기 시작하였다. 곧 계성의 남쪽을 공격하자 연나라가 두려워하며 대신을 사신으로 보내 자제를 인질로 삼았다. 무술년에 수한이 죽었는데 후사가 없어 이에 기후가 명을 받아 군령을 대행하였다. 읍차(邑借) 기후(箕詡)가 군사를 이끌고 변한의 궁에 들어가서 스스로 조선의 변한왕이라 칭하고 사람을 보내어 윤허(允許)를 청하자 진한의 보을 임금이 이를 허락하고 연나라 침략에 굳게 대비하라 하였다.
[제 40세 기후(箕詡)]왕은 무술(BC 323)년에 즉위하였다. 연나라는 사신을 보내 기후왕 즉위를 축하했다. 기후가 죽자 아들 기욱이 즉위했다. [제 41세 기욱(箕煜)왕]이 죽고 신미년에 아들 기석이 즉위했다. [제 42세 기석(箕釋)왕]은 신미(BC 290)년에 즉위하고 39년 간 재위하였다. 각 주군에 명하여 어질고 지혜 있는 자를 추천하게 하였더니 일시에 선택된 자가 270명이었다. 재위 10년(BC 281) 연(燕)나라 장수 진개(秦介)가 공격해 들어오니, 막아 싸웠으나 패하여 서비(西鄙:돌궐)까지 천리의 땅을 잃었다.
연은 상곡군(上谷郡), 어양군(漁陽郡), 우북평군(右北平郡), 요서군(遼西郡), 요동군(遼東郡)의 5군을 설치하여 연과 번한은 만번한(滿番汗:하북성)이 국계가 되었다.
3. 5가들은 월지(月支)에 중 마한 건국
[진한의 47세 고열가 단제 재위 58년(BC 238) 3월 오가(五加)와 더불어 의논하기를 옛날 우리나라는 개국하고부터 여러 聖人(성인) 선조님이 대통을 계승하고 임금은 솔선수범하며 백성을 잘 다스려 그 덕이 멀리까지 미치었으나 지금 세상은 법과 王道(왕도)는 다 없어지고 여러 제후들은 힘으로 다투는 전투장이 되었도다. 짐은 덕이 없어 제후들을 능히 다스리지 못하니 민심이 떠나 백성들이 흩어지니 나라를 편안히 통치할 방책이 없도다. 너희 5가(五加)들은 어진 임금을 천거하라 하고 옥문을 활짝 열고 사형수이하 모든 포로들을 다 석방하고 이튿날 드디어 왕위를 버리고 산으로 들어가서 수도(修道)하여 신선이 되었다. 이에 조선 3한의 오가들이 함께 6년 동안 공화정치로 국사를 다스렸다.
북부여 해모수 천제가 BC 194년 돌아가자 이윽고 북부여의 5가들은 대장군 탁(卓)과 함께 산을 넘어 탁이 태어난 고향의 월지(月支)에 이르러 나라를 건국하여 중마한(中馬韓)이라 칭했다. 이때 5가들은 각자가 받았던 땅 백리를 받아 수도로 정하고 변한, 진한의 두 한도 재 건국 되었는데 모두 마한의 다스림을 따르고 세세토록 배반하는 일은 없었다. 즉 본래 진한왕에게 왕권이 있었으나 이때부터 마한왕이 왕권을 갖고 제사장이 되었던 것이다. 북부여의 5가들은 마한의 제1세왕 웅백다의 도읍이었던 월지국(月支國=달지국(達支國=일명 백아강(白牙岡)으로 들어가 중마한을 건국하였던 것이다. 한전(漢傳)의 마한 54국과 진한과 변한의 각각 12 제후국의 78국은 이때의 국명이라 사료된다. 상기의 본문 고증(考證)은 마치 어제의 일처럼 오늘날 우리 앞에 선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나 정부 당국자는 이미 눈이 멀고 귀가 먹어 듣지도 보지도 못하니 어찌 고질병자가 아니고 무엇인가?
삼한은 세계적 대국입니다.
1. 삼한은 무려 78국이 있었다.(통한의 한국역사 97쪽)
삼국지 漢傳(한전)에 기록된 마한 54국은 원양국(爰襄國), 변수국(弁水國:牟襄水國), 상외국(桑外國:桑水國), 소석색국(小石索國), 대석색국(大石索國),우휴모탁국(優休牟涿國), 신분활국(臣濆活國:臣濆沾國),백제국(伯濟國),속로불사국(速盧不斯國), 일화국(日華國),고탄자국(高誕者國), 고리국(高離國),노남국(怒藍國), 월지국(月支國:目支國)이 있었다. 중국 서부지역을 옛날에 月支國(월지국)이라 칭하였다. 조선의 후 삼한(천축국) 중의 마한은 54개의 제후를 거느리고, 진한과 변한은 각각 12개의 제후국이 있었다.
◆ 월지국(月支國)의 역사적 진실
1.마한 54개 제후중의 월지국을 월씨국이라 한다.
月支國(월지국)은 西域(서역) 말로 또는 月氏國(월씨국:)이라고도 하며, 서역의 큰 왕국이다. 이 종족은 원래 중국의 감숙성 돈황과 祁連(기련) 사이에 살다가 BC 174년에 흉노에게 쫓겨 伊犁川(이리천)과 悉陀犁耶川(실타리야천)의 상류인 熱河(열하)의 남방으로 옮겼으나 BC 158년경 다시 烏孫(오손)의 침략을 받아 지금의 samarkand(사마르칸트) 지방에 근거를 정하고 塞種(새종:현 인도)을 征伐(정벌)하고 위水(위수) 연안의 大夏國(대하국)을 정복하여 대왕국을 건설하였다. 오손(烏孫)은 신강성(新疆省) 천산 산맥 일대에 있다.
제3세 迦泥色迦王(가니색가왕) 때에 세력이 크게 떨쳐 서쪽으로는 페르샤(이란)의 동부에서부터 중앙아세아 인도에 걸친 乾陀羅(건타라) 왕국이 되자 불교의 外護者(외호자)가 되고 500명의 阿羅漢(아라한)을 모으고 大毘婆沙(대비파사)를 편찬함. 그 후 불교가 大成(대성)하여 支婁迦懺(지루가참)등 많은 스님들이 중국에 불경을 전하고 支亮(지양), 支謙(지겸), 法護(법호), 支法度(지법도), 支道根(지도근),支施崙(지시륜) 또는 支姓(지성)의 著者(저자) 모두 月支國(월지국) 사람들이다. 이 나라가 멸망한 것은 미상이나 5C경으로 보고 있다. <불교 사전 참조>
2. 중 마한의 5가들은 5天竺國(천축국)으로 발전했다
중마한의 5가들은 BC 158년 오손(烏孫)의 침략을 받고 다시 남하하여 5천축국으로 번성했다. 인도, 베트남, 이란,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일대에서 세력을 형성하였다. 후한(後漢서기 25~220년)때는 청해성, 감숙성, 서장성, 운남성까지 확장하여 국토는 약 3만리가 되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5천축국은 진한의 5가들이 세운 나라이며, 5천축국은 각각 수십 개의 제후를 거느린 소천축국(小天竺國)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가), 천축국은 인도가 아니고 고조선이다.
[산해경(山海經)의 海內經(해내경)], [東海之內, 北海之隅, 有國名曰朝鮮, 天毒 其人水居, 偎人愛之,] 1, 동해(東海) 안쪽과 北海(북해:청해, 바이칼호)의 모퉁이에 나라 이름이 朝鮮(조선)이 있는데 天毒(천독)이라 했다. 그 사람들은 물가에 살며 남을 아끼고 사랑한다. 안사고(顔師古)는 연독(捐毒)은 곧 신독(身毒)이며, 신독(身毒)은 천축(天竺)이라 칭했다.
(나). 신라, 가야(伽倻)를 동천축이라 불렀다
감숙성은 蒙新(몽신) 靑藏(청장)과 황토고원의 접속지대로서 해발 1,000m이상이다. 烏 嶺(오초령), 北山(북산) 산맥과 祁連(기련)산맥 사이에 길이 1200km 되는 河西走廊(하서주랑)이 있는데 옛 비단길이 이곳을 지났다. 감숙성 蘭州(난주)를 金城(금성)이라고 불렀다. 이곳이 바로 이른바 실크로드 지역이며, 신라 혁거세왕의 초기 건국지이다.
통전(通典)에 의하면 동서남북 위치에 따라 5천축국(五天竺國)이라 칭했다. 천축국 사람들은 만신(萬神)을 거느렸으며, 天理(천리)를 거역하는 자는 항복을 받아 正道(정도)로 교화하여 바른 사람으로 돌아오게 했다. 왕은 단정한 차림으로 아침 해를 맞아 절하고 엄숙하였으나 인자(仁慈)하였으며, 성현(聖賢)의 업적을 이어받기 위해 힘쓴다. 라고 했다.
천축국은 전한(前漢 B.C.206∼AD.220년) 때는 신독국(身毒國)이라 칭했으며, 신독국이 곧 천축국이라 칭했다. 후한(後漢 A.D.25∼220년) 때부터 조선을 천축국이라 칭했다. 당(唐)의 요사겸(姚思廉)이 지은 양서(梁書)의 중천축국(中天竺國)편을 살펴보면 대월지국(大月支國)의 동남쪽으로 수천리 떨어져 있으며, 남부의 서장성(西藏省), 사천성(四川省), 운남성(雲南省) 동남까지 광범위한 지역까지 확산돼 있었으며, 그 지역은 3만리라 했습니다. 그렇다면 7천만 대한국인아! 위치상 가야와 신라는 확실히 천축국이 틀림없지 않는가?
조선의 천축국은 아세아 각국을 불국정토를 이루었다
고조선 삼한 중의 진한왕은 제천단(祭天壇)에서 옥황상제(삼신, 하느님)에게 제사를 주제하는 제사장(祭司長)을 단군(壇君)이라 칭했다. 제사장의 진한왕은 반드시 천리(天理:진리의 정법, 無爲法(무위법:4상8괘법)에 통달한 부처(佛, 聖人)만이 단군(檀君)이 될 수 있었다. 하느님을 숭배하고 성불(成佛)한 부처의 나라 고조선을 천축(天竺)이라 불렀습니다.
당시 춘추전국시대(BC 475~221)에 한(韓),위(魏),조(趙),제(齊)의 신흥국과 진(秦),초(楚),연(燕)의 7국을 '전국7웅'이라 한다. 이 7국들 간의 전쟁 끝에 BC 223년 마침내 진이 초와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2년 후에 한족(漢族)은 최초의 통일왕국을 수립했다.
즉 제천단에서 제사를 주제하는 제사장이 되기 위한 봉국쟁탈(封國爭奪)의 전국시대를 맞아 고조선 삼한은 거의 멸망에 이르자 하느님은 제사장의 나라 고조선에 성인(聖人, 佛(부처)을 탄강(誕降)시켜 본래의 영토를 다시 회복하고 불법(佛法) 교화시대가 이루어졌다. 당시 아세아 각국은 불교를 숭상한 부처의 나라 천축국(후 삼한)의 제후이었다. 즉 조선의 천축국은 중국 본토의 전국시대(戰國時代)를 통일하고 아세아 전체를 조선의 불국정토(佛國淨土)를 이루었던 것이다. 중국의 각처와 인도, 태국, 베트남 등의 불교 유적물이 대변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조선의 5가들이 아니고 어느 나라 누구가 불법을 전수했겠는가?
우리나라는 성인(聖人)이 왕위를 계승했습니다
2천여년 전 우리나라의 후 삼한시대는 북부여 해모수 천제의 아들 신라의 박혁거세(BC 57년)와 고구려의 동명성제(고주몽:BC 37년)를 비릇하여, 가야의 김수로왕(서기 42~198년)과 신라의 제4대 석탈해왕은 모두 다 일체지혜(一切智慧)에 형통한 성인(聖人)이시다. 세계 각국에서 성인(聖人)이 왕위를 계승한 나라는 오직 우리나라 밖에 없었다. 국왕이 친히 제천단(祭天壇)에서 하느님에게 제사를 주제한 제사장(祭司長)이기 때문에 당연하였다.
우리나라는 지혜에 형통한 성인(聖人), 혹은 인자(仁慈)하고 덕성(德性)을 겸한 어질은 임금이 왕위를 계승하고, 도리(道理:음양5행:천리)와 6예(六藝)로 백성을 교화(敎化)하여 동이(東夷)를 군자(君子)국 혹은 동방예의지국이라 불렀다. 그러나 중국을 비릇하여 다른 나라는 투쟁에 의한 무력으로 왕위를 계승하고 백성들에게 도리(道理) 교육이 없었다.
중국의 요(堯) 임금은 도당(陶唐)씨의 추장이었다. 중국의 역사를 살펴보면 대다수의 군주(君主)들은 소부족을 이루어 남의 나라를 침략하여 약탈(掠奪)을 일삼던 도적 추장이나 혹은 무력(武力)에 의한 투쟁으로 왕위를 계승했기 때문에 보통 1~2년을 재위하고 망하거나 길어야 5~10년을 넘지 못하고 망한 나라가 수없이 많았다.
중국은 오랑케를 올량합(兀良哈)이라고 쓴다.
오랑케는 1명의 추장 밑에 수십 호의 소부락을 이루어 깊은 산골에 살면서 지나가는 유랑객의 보물과 금전을 빼앗거나 혹은 남의 부락을 몰래 들어가 재물을 약탈한 산적(山賊)을 오랑케족이라 불렀다. 중국의 군주들은 날마다 전투를 일삼았기에 오죽했으면 공자(孔子)는 동이(東夷)에서 살고 싶어 했을까? 중국이 올량합(兀良哈)인가? 동이(東夷)가 오랑케인가?
우리나라를 강탈한 일제침략자 들이 거짓 가짜로 만든 국사지식의 왜독에 넋을 잃은 한국인아! 우리나라는 진실로 성군(聖君)이 왕위를 계승했기 때문에 보통 700~1천년을 존속한 반면 중국은 서기 9년 왕망이 신(新)나라를 건국하고 서기 220년까지 역대왕은 1~5년 재위하고 다 망하였다. 중국의 역대왕은 성군(聖君)이 아니고, 중국은 결코 대국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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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보도]"수로왕능은 방장산 밑에 있었다"-"중국의 방장산이 한반도 속의 지리산으로 둔갑했다" | | | | | | [제13편] 현재 경남 김해시 서상동에 위치한 구지산(龜旨山)에 가야의 시조 수로왕능이 있습니다. 또한 경남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왕산(王山) 아래에 가야국 제 9대 구형왕묘가 있습니다. 그리고 고려 효종 원년(서기 1650)에 탄영(坦瑛) 스님(僧)이 저술한 왕산사기(王山寺記)에서 가야국 수로왕능과 제 9대 구형왕묘는 방장산(方丈山:지리산) 밑에 있다. 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그렇다면 가야국의 시조 수로왕능과 제 9대 구형왕 묘는 경남 김해시 서상동의 구지산(龜旨山)이 진짜인가? 경남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지리산(智異山)이 진짜인가?
한반도 속으로 얽어 맞춘 지리산(경남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산100의 지리산 천왕봉)
[1]. 王山寺記(왕산사기) 山陽縣之西隅, 方丈山東麓有山 曰王山, 有寺曰王寺, 上有王臺[3], 下有王陵, 故曰王山, 知守護陵墓故王寺, 寺本王水晶宮也, 陵乃駕洛國第十葉仇衡王所예之玄宮也 蕭梁大通四年, 新羅眞興王, 來攻于駕洛, 駕洛仇衡王, 不忍以土地傷民, 遜國于新羅, 降爲金官郡都督, 後井與其食邑而舍之, 來居于此, 因卒而葬之, 累石爲邱, 輿地王山誌曰 山中累石爲丘, 四面有層級, 俗稱王陵云者, 是也.
왕사(王寺)는 산양현(山陽縣) 서쪽 모퉁이의 방장산(方丈山) 동쪽에 있는 록산(麓山)을 왕산(王山)이라 하고, 절을 왕사(王寺)라 한다. 방장산(方丈山) 위에 왕대(王臺)가 있고, 산 밑에 [수로] 왕능(王陵)이 있기 때문에 왕산(王山)이라 한다. [고려의 금관주 지사(知事) [탄영(坦瑛)]은 왕능을 수호하는 승려(僧侶)이기 때문에] 왕사(王寺)라 했다. 왕사(王寺)는 본래 수로왕이 사용하시던 수정궁(水晶宮)이다. 왕능은 가락국(駕洛國)말엽 제10대 구형왕은 [수정궁(水晶宮)]을 현궁(玄宮)이라 했다.
소양(蕭梁) 중대통(中大通) 4년(532) 신라 법흥왕이 가락을 침공해 오자 가락의 구형왕은 국토로 말미암아 백성을 상하게 함은 참을 수 없다 하시고, 나라를 신라에 손양(遜讓)하여, 금관군 도독(金官郡都督)으로 강등되었다. 뒤에 그 식읍(食邑)을 모두 주어버리고, 여기에 와서 거처하시다가 세상을 여의시므로 인하여, 장례하고 누석(累石)이 쌓여서 구릉(邱陵)이 되었다. 동국여지승람 왕산지(王山誌)에 말하기를 『산중의 누석이 구릉이 되고, 4면(四面)에 층계가 있는데 세속에서 왕능이라 일컫는다』고 한 것은 이것이다.
其後 王太子(王孫) 大角干舒玄, 捨宮爲寺, 王孫 大將軍興武王庾信, 追封首露王廟於王臺, 爰立仇衡王祠於玆寺, 所以薦祖父冥路, 奉香火之願刹[10]也. 因侍陵七載, 築臺習射, 故今寺右, 有金將軍射臺云,新羅三十法敏, 有制曰 朕乃仇衡王之外孫, 遣中使, 率匠石, 儼潔其祠祀之儀, 重新자寺, 特封近處三十頃田, 以奉香火之資,其後, 王陵久荒, 禪宮亦廢物不恒悴. 得時以榮, 道不終否, 得人以興故 高麗神宗四年, 下旨州郡, 重修王陵, 兼葺王寺, 及我 宣廟黑龍之歲. 靑衣之亂, 玆山寺墓, 沒入夷蕩, 金田巳灰, 垠악猶存, 但聞嶺猿哀嘯. 谷鳥悲鳴而己,
그 후 왕손 대각간(角干) 서현(舒玄)은 [김유신]의 아버지이다. 왕손 [김유신]은 수정궁을 버리고, 왕산사로 삼았다. 왕손 대장군 김유신을 흥무왕에 추봉하고 수로왕묘(首露王廟)에 왕대(王臺)를 쌓았다. 마침내 자사(玆寺)에 구형왕의 사당을 세워 조부의 명로(冥路)를 빌고 향불을 피워 기원하던 사찰(寺刹)이다. 7년 동안 능을 모시면서 축대를 쌓아 활쏘기 연습을 하였기 때문에 지금 왕사 오른편에 김유신 장군 사대(金將軍射臺)가 있다고 한다.
신라 30대 법민왕(文武王)은 조서를 내려 『짐은 구형왕의 외손이다』하고, 사자를 보내어 석공(石工)을 거느리고, 사당의 제의(祭儀)를 정결하게 하고, 절을 중수하고, 근처 밭 30경(頃)을 바쳐서, 향화(香火)의 비용으로 삼게 하였다. 그 후 능은 오랜 세월로 황폐화되고, 신궁(禪宮)건물 역시 항상하지 못하고 폐허가 되었다. 때를 얻으면 번영하고, 도(道)는 끝내 비색(丕塞)하지 않으므로 사람은 때를 만나면 흥왕하기 때문이다.
고려 신종 4년(1202) 주군(州郡)에 교지(敎旨)를 내려서, 왕능을 중수하고 겸하여 왕사(王寺)도 고쳤다. 우리 고려 선조(宣祖)는 임진(1592) 왜란 때 자산(玆山) 능묘의 왕사(王寺)에 오랑케(왜놈)들이 들어왔으나 소탕하여 몰살되었다. 세월이 흘러 절터는 아직 남아서 다만 산 짐승들만 애타게 울고, 새 짐승이 슬피 울 뿐이다.
順治七年[15], 僧徒又爲重建玆寺, 移埋廟主於他處, 換置佛軀於王廟, 旣訖, 沙門法永, 袖其寺墓舊蹟, 淸記于余, 不敢辭詞薄, 謹按本記, 山寺之以王名者, 乃首露王建廟之地, 仇衡王遜居之址, 興武王所창之寺, 新羅文武王所封之山, 高麗神宗大王重建之處, 上有王臺, 下有王陵, 中有王之畵像. 遺衣及所用弓劍之故也.
순치 7년(1650) 승도들이 또 다른 자사(玆寺)를 중건하여, 위패를 이곳에 옮겨 묻고, 왕묘(王廟)에는 부처(佛)로 바꾸어 두었다. 공사를 이미 마치고, 중 법영(法泳)이 그 절과 능의 옛 문적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기사(記詞)를 청하여,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다. 삼가 본기(本紀)를 살펴보면 왕산사(王山寺)로 이름한 것은, 수로왕묘(首露王廟)를 건립한 지역이며, 구형왕이 은거하신 터이요, 흥무왕이 창건한 절이요, 신라문무왕이 추봉된 산이며, 고려 신종 대왕이 증건한 곳이다. 방장산(지리산) 정상에 왕대가 있고, 산 밑에는 왕능이 있고 중간에 왕을 그린 화상이 있고, 사용하시던 유의(遺衣) 및 활과 칼이 있는 연고지이었다.
古者, 駕洛諸王遺蹟, 羅麗所賜之物甚多, 若王陵本蹟曰, 婆娑墓中. 舍衛之白玉猶有, 祗桓寺裡. 須達之黃金尙存, 斯一句己知矣, 今則皆失於兵火, 只有二幅畵像. 一件天翼, 두弓殘劍客一, 是亦子孫散四, 不能守護, 故命藏於木函中, 以待百世之後也.
옛날 가락국 여러 왕의 유적과 신라, 고려에서 보내준 보물이 매우 많았다. 왕능본적(王陵本蹟)에 대략 말한 것처럼 [신라 제5대]『파사익왕묘(婆娑匿王墓) 중에 백옥(白玉)보다 오히려 지환정사(祗桓精舍:지원정사(祗園精舍)의 일화가 더 유명하다.
즉 억만장자(億萬長者) 수달(須達)이 [신라 제5대 파사익왕]의 지타(祗陀) 태자의 동산을 황금으로 깔았다는 전설이 아직도 전하고 있다. 이 한 구절로 [한국인은 석가세존이 가락국(신라)에서 설법하신 진실]을 이미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난리에 다 잃어버렸고, 다만 두 폭의 화상과 한 벌의 왕의(王衣)와 좀먹은 활과 부서진 칼이 각각 하나씩 있었다. 이것도 또한 자손이 사방으로 흩어져 수호할 수 없으므로, 나무궤에 간직하여 백세의 후일을 기다리게 할 뿐이다.
[洪儀泳博士 王山尋陵記] [홍의영 박사가 지은 왕산 심능기] 往年戊午, 嶺南大旱 自春. 至夏季, 竟無點滴, 邑儒閔景元, 南士之望也, 與朋주潔齋전羞, 爲文求雨于陵之下, 未崇朝而大雨驟至, 閔滯雨不能歸, 館於王山寺, 與寺僧, 說其靈異, 詢其古蹟, 僧曰古蹟誠多, 秘不敢發, 强以後, 出古木函, 경휼甚嚴, 遂排而啓之, 有沙門坦瑛山寺記一卷, 瑛乃百年前名釋(中略)
작년 무오(1798)년에 영남지방의 큰 가뭄으로, 봄부터 늦여름까지 끝내 한 방울의 비도 내리지 않았다. 산청읍(山淸邑) 유생(儒生) 민경원(閔景元)은 영남의 명망 있는 선비였다. (6월4일) 친구들과 더불어 정결히 재계하고 제물을 차례 놓고 글을 지어 수로왕능 앞에서 비를 빌었는데 새벽에 큰비가 쏟아지므로, 민경원은 비에 막혀 돌아가지 못하고 왕산사에서 체류하게 되었다. 승려들과 함께 신비함을 말하면서 『고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승려들은 말하기를 『고적은 실로 많으나, 비밀이라서 발설할 수 없습니다.』고 하였다. 강력히 요구한 후에 나무궤를 내 놓기에 자물쇠와 장식품으로 매우 엄밀히 만들어 마침내 이를 비틀어 열었다. 중 탄영(坦瑛)이 지은 왕산사기(王山寺記)가 있었는데, 탄영은 곧 백년전의 명승(名僧)이었다.(중략)
當時奇偉之蹟, 受後昆無窮之饗也, 鳴呼異哉, 諸金遂以實狀告之, 道伯及本졸, 莫不欽聳稱奇, 禁其芻牧, 新其塋域, 去來文簿, 鄭重讚揚, 皆不可記焉. 十世仇衡王… 正廟戊午, 因祈雨, 始顯靈, 自營邑. 轉移京司, 當저癸亥, 八路子孫, 改築荒園, 創建陵寢. 講堂. 廊舍. 門樓·
당시 기이하고 거룩한 고적은 후손들의 무궁한 흠향을 받게 되었다. 아! 신비로운 일이다. 여러 김씨들이 마침내 실상을 보고하니, 관찰사 및 산청현감은 귀를 높이면서 신기하다고 일컬었다. 나무하기와 소를 금하고, 영역(塋域)을 새롭게 단장 하도록 하였다. 去來文簿[거래문부=가락3왕사적고 권六 왕세계(駕洛三王事蹟考 券六 王系 : 정조22년(1798)조에 수록되어 있다)에서 정중한 찬양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가락국 10대 구형왕… 정조 무오(1798)년의 기우제로 말미암아 비로소 신령스러운 자취가 나타남으로, 본읍과 관찰부에서 서울에 보고하였다. 조선 순조(純祖) 계해년(1803)에 팔도(八道)의 자손들이, 황폐한 능원을 고쳐 쌓고, 능침과 재실과 문루(門樓)를 창건하였다. 왕산사기(王山寺記 終) 僧 坦瑛著書(승 탄영 저서)
[註]=> 중 탄영(僧 坦瑛)은 효종원년(서기 1650)에 왕산사기(王山寺記)를 지은 승려이다. 숙종 13년(청나라 강희26년:1687) 방호산인 형곡당 복한(方壺山人 荊谷堂 復還)이 수정암기(水晶菴記:왕산사의 개칭)을 지었을 때는 그의 문인(門人)으로써 글씨를 쓰기도 하였다. 가야국 제 9대 구형왕묘가 소재한 왕산(王山)은 지금 경상남도 산청군 서쪽 20리, 곧 금서면 화계리에 왕산이 있다. [출처 :김해김씨족보 글쓴이 : kimheakim 참조정리]
[2]. 3신산(三神山)은 한반도 속에 없었다. 중국 전설에 의하면 동해(東海)의 발해만[渤海灣)에 있는 방장산(方丈山),봉래산(蓬萊山),영주산(瀛洲山)을 3신산(三神山)이라 한다. 즉 중국 동해의 발해만(渤海灣)에 있는 3신산을 조국을 배신했던 이병도는 방장산(方丈山)은 지리산(智異山)이고, 봉래산은 금강산이고 영주산은 한라산이다. 라고 3신산(三神山)을 한반도 속으로 얽어 맞추어 임의대로 추정하여 주석했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엉터리 지명인가? 본래 중국 대륙에서 건국된 신라, 가야, 백제의 3국을 한반도 속으로 얽어 맞춘 진실을 밝히는 결정적 입증서(立證書)입니다.
[3]. 일제에 의해 가짜로 만들어진 방장산 대원사 호남의 신령스러운 세산이 있는데 그 삼신산은 지리산, 무등산 그리고 방장산이다. 또 호남 서해안 지방에서 부르는 삼신산이 있는데 영주산, 변산, 그리고 방장산이 여기에 속한다.
방장산(方丈山)은 삼신산(三神山)중의 하나인 지리산을 달리 부르는 이름이다. 전남 고창과 장성. 정읍 경계선인 방장산은 전남 구례군과 전북 남원시, 경남 산청군, 하동군, 함양군(咸陽郡)에 걸쳐 폭넓게 걸쳐 있다. 지리산(智異山)을 방장산(方丈山), 두류산(頭流山)이라하며, 삼신산(三神山) 중에 한 산으로 우리 민족의 영산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4]. 삼신산은 중국 동해의 발해만(渤海灣)에 있었다 삼신산은 중국 전설에 나오는 봉래산·영주산·방장산의 세 산을 이르는데 그 유래는『사기(史記) 열자(列子)』에서 비롯된다. 『열자(列子)』에 의하면 동해(東海)의 발해만(渤海灣)에 삼신산(三神山)이 있었다. 동쪽 수억만리에 오신산(五神山)이 있는데 그 높이는 각각 3만리이며 금과 옥으로 지은 누각이 늘어서 있고, 주옥으로 된 나무가 우거져 있으며 그 나무 열매를 먹으면 불로불사(不老不死)한다. 그 곳에 사는 사람은 모두 선인(仙人)들로서 하늘을 자유자재로 날아다닌다고 한다. 오신산은 본래 마치 큰 거북등에 업혀 있는 형상이었으나 뒤에 세월이 흘러 두 산 중에 5신상은 허물어 없어지고 삼신산만 남았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삼신산은 발해(渤海) 중에 있으며 인간세계에서 그리 멀지 않지만 사람이 다가서면 갑자기 비바람이 몰아쳐 접근할 수가 없다고 하는데 일찍이 다녀온 사람들에 의하면 그 산에는 많은 선인(仙人)들이 있고 불사약도 있다고 전래되고 있다.
『사기(史記)』에 의하면 BC 3세기 전국시대 말, 진시황(秦始皇)은 신선설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방사(方士) 서불을 시켜 소년 소녀 수천명을 이끌고 불사약을 구하러 동해로 보냈으나 서불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전하여 온다. 이때 진노(震怒)한 진시왕은 신선도(神仙道)를 신앙했던 신도(信徒)들과 유생(儒生)을 포함한 460여명을 수도인 함양에 흙구덩이를 파고 파묻어 죽인 분서갱유(焚書坑儒)사건은 유명합니다.
기원 전 218년, 진시왕(秦始王)의 진(秦)국의 수도가 바로 함양(咸陽)이다. 하남성(河南省) 양무현(陽武縣) 남쪽. 대하(大河)의 물줄기가 화북성의 기름진 황토지대를 흐르다가 물길을 바꾸어 사라지면서 남긴 넓은 퇴적층이 모랫벌이 되었다. 세월의 비바람에 깎인 크고 작은 모래 언덕들이 마치 물결 같은 모양을 이루고 있다하여 사람들은 그곳을 박랑사(博浪沙)라 불렀다. 박랑사에서 함곡관(函谷關)을 빠져나와 함양에 이른다.
북부여 해모수 재위 B.C.219년 한(韓)나라 張良(장량)의 자객으로 선발된 창해(滄海)역사 黎洪星(여홍성)은 120근의 철퇴를 만들어 하남성 동남쪽을 유람 중인 진시왕정을 박랑사에서 습격했으나 빗나가 부차만 박살냈다. 해모수 재위 31년 임진(B.C.209년), 진나라의 농민반란 지도자 진승(陳勝)이 군대를 일으켜 장초(張楚) 왕이라 칭했다.
이때 진시왕의 압정에 고통 받던 농민들이 농민반란 지도자 진승(陳勝)에게 호응하여 지방관을 살해하고 함곡관(函谷關)을 돌파하고 함양(咸陽)으로 육박하였다. 이때 진승의 봉기에 호응했던 반란군 중에서 유력한 세력은 강소성 패군(沛郡)의 풍현(豊縣)에서 농사를 짖고 있던 농민의 아들 유방(劉邦)과 강소성 부근의 오중(吳中)에서 일어난 항우(項羽)이었다. 병력에서 우수한 항우가 진나라 수도 함양(咸陽)을 먼저 장악하여 진시왕궁의 보물과 미녀를 약탈하고 궁전을 불태워버렸는데 그 불길이 3개월이나 계속되었다. 한다.
B.C.202년 유방의 군대가 해하(垓下:안휘성 영백현)에서 항우를 포위하자 탈출하던 항우는 오강(烏江:안휘성 화현) 나룻터에 이르러 결국 자살하고 말았다. 유방은 B.C.202년 2월 황제의 재위에 오르니 이로서 한(漢)나라가 성립하였다. 유방이 죽은 후에 고조(高祖)라 불렀다. 유방이 천하를 통일했다 하였으나 이때 한(漢)나라는 겨우 15군(郡)에 불과하였다.
중국의 방장산이 한반도 속의 지리산으로 둔갑했다.
한(漢)나라를 창업한 고조(高祖:유방)는 성군(聖君)인가? 천하(天下)를 통일한 대국인가? 또한 함양(咸陽)의 방장산(方丈山=지리산(智異山)은 경남 산청군, 하동군, 함양군(咸陽郡)에 소재하고 있는가? 진(秦)국의 수도 함양(咸陽)인가? 일본왕의 충견 이병도는 방장산(方丈山)을 다른 이름으로 지리산(智異山)이라 한다. 라고 주석(註釋)하므로서 중국의 방장산이 한반도 속의 지리산(방장산)으로 둔갑했던 것입니다. 이병도의 만행을 깨닫지 못한 후세의 사가(史家)들은 예로부터 바다 건너 동쪽에 신선(神仙)이 살았다는 전설이 있었는데 지리산과 금강산, 한라산을 삼신산(三神山)이라고 부른다. 라고 하여 중국의 방장산이 더욱더 한반도 속으로 굳어 졌던 것이다.
대가락국(가야)의 수로왕은 처음 중국 江蘇省(강소성) 淮陰縣(회음현) 龜州城(귀주성) 龜山(구산)에서 탄강(誕降)하셨습니다. 그러나 조국을 배신했던 대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는 경남 김해시 서상동 龜旨峰(구지봉)으로 조작하고 중국 동남부 지역에서 건국되었던 6가야국을 한반도 속으로 얽어 맞추었던 것이다. 중국은 강주(康州)를 강주(江州)로 고치었다. 그리고 강소성 회계군(會稽郡) 산음현(山陰縣)에 7부처를 낳은 불모산(佛母山)이 있다.
[5]. 수로왕의 7왕자는 부처(佛)가 되었다 (1).『은하사 취운루 중수기(銀河寺翠雲樓重修記)』 장유화상(長遊和尙) 보옥선인(寶玉仙人)은 여동생 허왕후와 함께 가야국에 왔는데, 본국에 돌아가지 않고, 부귀는 뜬구름과 같다며 7왕자를 데리고 방장산에 들어가 7왕자를 성불하게 했다. 수로왕의 왕후는 모두 10명의 왕자를 두었는데. 그 중 큰아들 거등은 왕위를 계승하고, 둘째, 셋째는 어머니의 성을 따라 허씨의 시조가 됐다. 나머지 일곱 왕자는 장유화상을 따라 방장산에 들어가 3년간 불법을 수도하여 부처가 되었다.
왕후가 아들들이 보고 싶어 자주 가야산을 찾자 장유화상은 공부에 방해가 된다며 왕자들을 데리고 방장산(지리산)으로 들어갔다. 왕후는 다시 지리산으로 아들을 찾아갔으나 여전히 장유화상에 의해 제지당하였다. 그 후 다시 지리산을 찾은 왕후를 장유화상은 반가이 맞으며 아들들이 성불했으니 만나보라고 하였다. 그때 어머니께서, 연못을 보면 저희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라는 소리가 들려 연못(影池)을 바라보니 황금빛 가사를 걸친 금왕광불(金王光佛), 왕상불(王相佛), 왕행불(王行佛), 왕향불(王香佛), 왕성불(王性佛), 왕공불(王空佛)의 일곱 생불(生佛)이 공중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 후 김수로왕은 크게 기뻐하며 아들들이 공부하며 수행하던 곳에 칠불사(七佛寺)를 세웠다.
(2). 가락국기외(駕洛國記外)의 허황후 전설(許王后 傳說) (1). 세종 6년(1424) 경상감사(慶尙監司) 하연(河演) 찬(撰)의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誌)와 (2)세종14년(1432)에 간행된 신찬지리지(新撰地理誌)에 이르기를 남천축국(南天竺國) 공주(公主)의 성(姓)은 허(許)씨이고 이름은 황옥(黃玉)이다. (3)예종 원년(1469)에 경상감사(慶尙監司) 김겸광찬(金謙光撰)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와 (4)성종 17년(1486)에 간행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수로왕비(首露王妃)는 남천축국(南天竺國) 공주(公主)이며 허황옥(許黃玉)의 시호(諡號)가 보주태후(普州太后)라 했다.
(5)중종 25년(1530)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김해군도호부허왕후능편(金海都護府許王后陵編)에 …수로왕능은 구지산(龜旨山) 동쪽이라 했다. (6) 가락국수로왕능비음기(駕洛國首露王陵碑陰記(1647年 許積撰)에는 수로왕은 10왕자를 두었는데 왕후(王后)의 말에 감응하여 왕후(王后)의 성(姓)을 하사(下賜) 받은 자가 둘이며, 동국(東國:동천축국)의 허성(許姓)은 이에서 근원하였다.… 10인 중 3人은 허씨성(許氏姓)으로 왕위를 계승하고 7人은 불도에 정진하여 7선(七仙)이 되었다.
(3).장유화상(長遊和尙)과 7왕자기록(七王子紀錄) (1)숙종32(1706) 승(僧) 징원(澄元) 찬(撰) 명월사사적비문(明月寺事蹟碑文) 명월사(明月寺)는 수로왕명에 의해서 창건되었는데 임진(1592)왜란 때 소실되어 萬曆 5년(1618)에 재건하였다. 그 후 퇴락하여 숙종 32년(1706)에 다시 중수(重修)하면서 담장밑에 명문(銘文)이 있는 기와 한 장을 주었는데 그 기와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었다.
…「建康元年甲申三月 長遊和尙 自西域 奉佛法而來 王之重道 崇佛亦可驗矣」
“建康元年(144) 3月에 장유화상(長遊和尙)이 서역(西域)에서 부처님을 신봉하고 올적에 불법(佛法)을 가지고와 수로왕은 불도를 중히 여겨 불법을 숭상하자 역시 영험하였다”
(2)순조 12년(1812)撰 「은하사취운루중수기(銀河寺翠雲樓重修記」 세상에 전해오는 가락국 왕비 허후는 천축국에서 올적에 장유화상(長遊和尙) 오라비도 따라왔다. 천축국(天竺國)은 본래 불교를 신앙하는 월씨국이다. 수로왕명에 의해 은하사(銀河寺) 및 명월사(明月寺)가 창건되었다.
(3)「駕洛三王事蹟考」正祖 辛亥 重刊本 …之上二十里許 有庵曰七佛…始駕洛國首露王 有子十人 一爲儲君 二人賜許氏 七人志絶塵寰徒寶玉仙人 自伽倻山 入雲上院 學道成仙…
(4). [가락국3왕사적고] 정조 신해(1851) 중간본에서... 쌍계사(雙溪寺)에서 위로 20리를 올라가면 암자가 하나 있는데 7불암이라 한다.… 가락국 수로왕은 10왕자를 두었는데 한분은 왕세자(王世子)가 되고 두 분은 허(許)씨 성(姓)을 하사받고 나머지 7왕자는 속세를 떠나 보옥선인(寶玉仙人)을 따라 가야산(伽倻山) 운상원(雲上院)으로 들어가 불도를 닦아 신선(神仙)이 되었다.
(5). 인조 10년(1632)刊 「진양지晉陽誌」7불암(七佛庵)편 …古稱 雲上院 昔有 玉浮仙人 隱于 此吹玉笛 得聞於 新羅王耳 王尋其聲乃率其七子 與仙人同遊 七子卽成佛 七佛王之子也 故改雲上院以爲 七佛庵…
칠불암은 옛날에 운상원이라 칭하였다. 옛적 보옥선인(寶玉仙人)이 은거하면서 玉笛(옥피리)을 불렀는데 신라 임금의 귀에까지 들려 임금은 7왕자를 거느리고 와서 仙人과 같이 놀면서 7왕자는 즉시 성불(成佛)하였다. 그런 연고로 운상원을 7불암(七佛庵)이라 하였다.
[6]. 장유화상비는 1915년 일제식민지 때 세웠다. (1)長遊寺의 長遊和尙紀跡碑 (駕洛紀元1874年(1915)立)
和尙姓許氏 名寶玉 阿隃陀國君之子也 普州太后弟也… 和尙富貴如浮雲 遂超塵相入佛母山 長遊不返 世稱長遊和尙…晩年駕洛王子七人 方丈山中 化爲佛 今河東郡 七佛庵其址也.…銍知王創長遊庵 藏和尙眞影于七星閣
♦ 장유사(長遊寺)의 장유화상비(長遊和尙紀跡碑)는 1915년에 세웠다. 장유화상(長遊和尙)의 성(姓)은 허씨(許氏)이며, 이름은 보옥(寶玉)이며, 아유타국(阿隃陀國) 임금의 아들이며 보주태후(普州太后)는 여동생이다. 장유화상은 부귀(富貴)는 뜬 구름과 같다며, 드디어 불모산(佛母山)에 들어가 돌아오지 않으니 세상 사람들이 장유화상이라 불렀다. 만년(晩年)에 가락국의 7왕자와 같이 방장산(方丈山)에 들어가 부처가 되었다. 지금 하동군(河東郡)의 7불암(七佛庵)이 그 유지다. 질지왕(銍知王)에 이르러 장유암(長遊庵)을 창건하고 장유화상의 진영(眞影)을 7성각(七星閣)에 간수하였다.
(2) 7불암 현판기(七佛庵 懸板記)는 1910년에 세웠다. …서역(西域) 월씨국(月氏國)의 보옥선사(寶玉禪師)는 여동생 허황후(許王后)를 데리고 바다를 건너왔다. 보옥선사는 7왕자를 데리고 방장산(方丈山)에 들어가 운상원(雲上院)을 짓고 좌선성도(坐禪成道)하였다. 가락기원(駕洛紀元62年 癸卯(103년)에 7불암(七佛庵)을 창건(創建)하다. (註) 현판기(懸板紀) 말미(末尾)에 庚戌(1910)년에 쌍계사에서 제의(齋議)하여 선회(禪會)를 열었다.」라는 글이 있으므로 1910년의 기록임을 알 수 있다.
김해의 장유사(長遊寺)와 은하사(銀河寺)란 두 절이 있다. 은하사(銀河寺) 취운루(翠雲樓) 중수기(重修記)는 서기 1812년에 세웠고, 7불암 현판기(七佛庵 懸板記)는 1910년에 세웠고, 장유사(長遊寺) 기적비(記蹟碑)는 서기1915년에 세워졌다.
(3). 삼국사기 및 고려사의 산양(山陽)의 유래(由來) 산양(山陽)은 본래 신라의 근품현(近品縣:近 縣), 또는 지품천현(知品川縣)인데, 757년(경덕왕 16)에 궐성군(闕城郡)에 예속시켰다 가유현(嘉猷縣)으로 고쳐 예천군의 영현(領縣)을 삼았다. 고려 태조 23(940년)에 산양현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고려 현종 9년(1018년)에 합주(陜州)에 이속시켰으며 상주의 속현으로 병합되었다. 후에 감무를 설치하기도 했으나, 1180년(명종 10)에 다시 합속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상주의 산양·산남·산북·산동성·산서성 등 5개면으로 편제되어 있었다. 일제식민지시대의 1906년 월경지 정리에 의해 문경군으로 이관되었다. 라고 변조 조작했던 것입니다.
중국은 강주(康州)를 강주(江州)로 지명을 바꾸고 회계군(會稽郡) 산음현(山陰縣)을 산양(山陽)으로 고치고, 일제와 대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는 중국의 방장산을 한반도 속의 지리산으로 변조하고 경상남도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에 왕산이 있다. 라고 변조, 조작했던 것입니다.
[환단고기 고구려편] 중국 동평군 수장현(東平郡壽張縣)에 치우천자능이 있고, 산양군거야현(山陽郡鉅野縣 蚩尤肩)에 치우 천자의 부인 견비능(蚩尤肩)은 산동성에 있으며 거리는 약 80Km이내에 있다. 중국 강남(江南)에 월주(越州)가 있었다. 월주에 산음(山陰), 산월 좌월의 속현이 있었다. 문자열제의 명치 11년 11월에 이르러 월주를 공격하여 취하고, 서군현을 고쳐 송강, 회계, 오월, 좌월, 산월을 천주라 했다 12년(503년) 신라의 백성을 천주로 옮기었다. 한때 고구려 영토이었다. 연개소문의 묘는 운산 구봉산에 있다.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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