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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랑을 하는 것 같아서 잠시 망설였지만 어차피 이 코너가 ‘인생이야기’이므로 이야기를 이어가고자 한다.
'특별한 사람들'로 인하여 애로 사항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보람 있는 일들도 엄청 많았다.
그 과정에서 어쩌다가 보니 TV에도 출연을 하게 되었는데 그 사연을 이어가고자 한다.
☞ [공모교장]이란?
공개적으로 모집을 한다는 뜻이다.
이전에는 비슷한 형태의 학교장 발령으로 [초빙교장]이라고 불렀다.
이는 특정학교에 필요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그 분야에 적절한 학교장을 초빙해서 모신다는 의미였다.
'초빙교장'이 특정한 한사람을 초빙한다면 '공모교장'이란 두 명 이상을 대상으로 공개적으로 모집한다는 제도이니 초빙교장 제도를 발전시킨 제도라고 하겠다.
아무튼 부임이후 평소 해보고 싶었던 나름대로의 교육철학을 실천하기 위하여 공을 들였는데 그 과정 중 일부를 소개한다면,
♣ [학교 담장 벽화그리기]
부임 후 3월 초 어느 날의 저녁 무렵이었다.
관사에서 창밖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체육관 옆 한편 구석진 곳에서 담배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남·여 고등학생 몇 명이 들락거리고 있었다.
인근 학교의 학생들이었다.
관내 기관장 회의에서 그 얘기를 전해들은 고등학교장 왈,
“인근 울산이나 경주에서 전입을 한 학생들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가 엄청 많은 신경을 써가며 지도를 하는데 마땅한 대책이 없습니다.”
라고 한다.
그들도 일말의 양심은 있는지라 자기 학교를 피해서 인근 학교인 우리 학교로 원정을 와서 그런 행동을 하니 어떻게 해야 하나?
‘효과적인 방법이 없을까?’
하고 고민을 해 보았다.
‘그래 환경을 한번 바꾸어 보자!’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인간의 심성은 원래가 착하다는 ‘성선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의 이론을 따르기로 한 것이다.
그리하여 처음 시도한 것이 교실 뒤 지저분하고 어두운 땅에 말끔하게 '칼라벽돌'을 까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지저분한 곳에는 담배꽁초를 버리기가 쉽다.
그러나 깨끗하게 정리 정돈이 된 환경에서는 사람의 심성도 밝아지리라는 기대에서 시도한 사업이었다.
비만 오면 진흙탕이 되는 환경이 깔끔하게 정리 정돈이 되었다.
다음으로는 '건물도색'에 눈길이 갔다.
이제까지의 학교들은 아래 부분은 회색에 윗부분은 흰색이나 옅은 노란색 계통이었다.
참으로 이상했다.
전국 어느 곳이나 초, 중, 고 건물의 도색은 하나같이 비슷한 모습이었다.
물론 벽돌로 고급스럽게 건축된 곳은 그렇지가 않지만…….
이유를 알아보았다.
일제의 잔재였다.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시멘트로 지은 학교 건물은 그러한 톤을 유지하고 있었다.
비판 없이 무의미하게 오랜 관행을 답습한 결과였다.
과감하게 '칼라도색'을 시도하였다.
초등학생은 초등학생답게 아기자기한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었다.
퇴임을 한 요즘 나들이 길에 살펴 본 많은 학교들이 칼라로 된 학교 도색을 많이 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파격적인 시도였다.
업자들을 불러서 상담을 하니 반응이 별로다.
그들 입장에서는 기존에 칠해진 것처럼 2가지 톤으로 도색을 하면 작업이 훨씬 수월한데 굳이 칼라로 이곳저곳을 도색하려면 엄청 많은 노력이 들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완성을 하고 나니 이전과는 느낌이 완전 다르다.
다음 타깃은 지저분한 '학교 담장'이다.
4면이 모두 담장으로 되어 있어서 길이가 엄청 길었다.
시멘트 담장에 말끔하게 미장을 한 후에 [벽화그리기] 사업을 진행하였다.
요즘 웬만한 곳에서는 유행처럼 벽화그리기의 흔적들을 많이 볼 수가 있었지만, 당시로선 생소한 사업이었다.
작은 예산으로 사업을 진행하는 방법을 찾아보았다.
그 결과 동국대학교 미술과 학생들의 봉사활동을 활용하는 방안을 찾아서 우리학교 전교생들과 전 직원의 참여를 유도하는 방안으로 진행을 하였다.
많은 예산과 공을 들여서 완공한 벽화에
‘철부지 개구쟁이들이 만약에 낙서라도 한다면?’
고민을 하면 정답도 있게 마련이다.
일정한 면을 학년별로 할당을 하고 참여한 지도교사와 학생들의 이름을 표기하였다.
자기 이름이 표기가 되면 완성된 벽화에 더욱 애착을 느끼고 낙서를 하는 등 관리 면에서 좋을 것 같아서였다.
또한 성년이 되어 모교를 찾았을 때 자기 이름이 그대로 남아있는 벽화의 흔적을 보면서 학창시절을 회상한다면 이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여서였다.
이렇게 완성된 벽화는 소문을 타고 신문,방송 등 여러 매체에서 보도가 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mbc에서 촬영을 하러 왔다.
오전 내내 학교 구석구석을 촬영하고 인터뷰를 하였다.
그런데 방영된 것은 고작 1분 40초…….
방송이란 원래가 그렇다네…….
그런데 이후의 변화다.
변해진 환경 탓인지 모르지만 인근 고교생들이 담배를 피우러 오는 일이 거짓말같이 없어졌다.
일탈행동이 없어진 것으로 봐서 그들도 일말의 양심은 있는 것 같다.
‘성선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의 이론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 [전원학교 사업]
아름다운 환경에서 생활한다면 학생들의 심성도 좋아질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전원학교]사업에 더욱 매진하였다.
연말에 교육부에서 실시한 [전원학교 평가]에서 '전국 최우수학교'에 선정되는 영예를 누렸음을 물론이다.
♣ [분교장 교육]은?
우리학교에는 경주에서 유일한 [다벽지]분교장이 있다.
승진을 위한 선생님들에게는 벽지점수가 필수 부가 점이므로 벽지학교 교육이 활성화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학교에서도 여러 가지 사업을 시행하고 지원을 해야 한다.
그 방법으로 '승마 교육과 바이올린 교육'을 실시하였다.
물론 비용은 전액 학교에서 부담하였다.
승마는 인근 [아화승마장]에서 실시하였으며 바이올린은 포항에서 우수 강사를 초빙하여 실시하였다.
여담이지만 하모니카를 진작부터 했었다면, 그때 우리학교 아이들에게 방과 후 교육으로
‘하모니카 교육을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본교에서는 미술교육과 오카리나 등 다양한 방과 후 교육을 시행하였다.
이렇게 공을 들인 분교장의 교육시책은 입소문을 통해서 매스컴을 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성과로 부산에서 지인을 통해서 소문을 듣고는 전학을 오는 일도 있었다.
우리학교에서 다양한 체험을 시키겠다며…….
♣ [스키 체험연수]
도시에서는 보이스카웃이나 청소년연맹 등 각종 준거단체 활동을 하면서 개인이 경비를 부담하여 스키 체험 연수를 실시한다.
그러나 시골에서는 경비도 부담이 되지만 여러 가지 여건상 스키 체험을 하는 것이 어렵다.
그래서 학교에서 전체 예산을 부담하여 강원도로 2박 3일간 전교생이 참여하는 체험을 실시하였다.
매년 실시되는 스키체험으로 인하여 학생들의 실력은 부쩍 향상되었다.
그 결과 학부모와 학생들로부터 매년 기대하는 엄청 인기 있는 프로그램이 되었다.
이 전통 역시도 좋은 반응을 보이는 관계로 아직도 계속되는 프로그램이다.
♣ [전통 민속놀이]
요즘 우리 아이들은 컴퓨터나 휴대폰을 이용한 게임 등으로 정서가 매말라 간다.
‘예전부터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민속놀이를 동심에 접목시키면 어떨까?’
하고 고민을 해봤다.
그리하여 굴렁쇠 굴리기, 제기차기, 투호놀이, 연날리기 등의 종목을 선정하였다.
모든 기구와 재료는 학교에서 준비를 하고 월 1회씩 우수학생 시상을 하였다.
이 종목들은 가을운동회에서 자연스럽게 학부모들에게 선을 보이니 결과는 대단한 반응이었다.
전폭적인 성원을 받았다.
이 전통은 10여년이 지난 아직도 본교의 전통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는 소식에 참으로 보람을 느낀다.
♣ [쌍용사거리에서 버스킹]
퇴임 전에 주변에서는 퇴임 후의 계획을 많이 궁금해 하였다.
사실이지만 퇴임 후는 아무런 생각 없이 그냥 무조건 푹 쉬고 싶었다.
그리하여 2016년 2월 마지막 겨울 방학이 지나고 3월이 되었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은 참으로 묘하다.
언제까지나 오랫동안 쉬고 싶었던 생각은 어느 순간에 바뀌기 시작했다.
재직 중의 방학기간은 개학이 되면 출근을 한다는 전제로 쉬는 것이므로 별다른 느낌이 없었는데, 정년퇴임 후 처음으로 맞이하는 3월의 느낌은 그렇지가 않았다.
‘이젠 갈 곳이 없다.’
‘퇴임이 이런 느낌이었나?’
‘앞으로 남은 기나긴 세월 무엇을 하며 소일을 하지?’
등등 온갖 상념이 꼬리를 물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인터넷을 뒤지다가 [양학동주민센터]에서 ‘하모니카 교육’을 한다는 사실을 접했다.
양학동 주민이 아니어서 걱정이 되었지만 일단 원서를 넣었다.
기다림 끝에 처음 등원하는 날이었다.
당시는 둘째 손주가 출생한 관계로 아내가 대구 아들집에서 살림을 하면서 큰 손주를 돌보던 때였다.
퇴직을 한 나도 물론 예외는 아니었다.
첫 등원 날 대구에서 포항까지 하모니카를 하러간다고 나서는 나를 보며 아내는
“무리하지 말라! 이 먼 거리를 어떻게 다니느냐?”
며 말렸다.
“그래도 첫 날이니 어떻게 진행하는지 한번만 가보고 결정을 할께!”
라며 아내의 만류를 뿌리치고 고속도로로 쌩~~~
이렇게 시작한 하모니카는 기초과정 내내 대구에서 출근을 하며 진행이 되었다.
하면 할수록 하모니카의 매력에 빠져드는 나의 모습이 보였다.
퇴임 시만 하더라도 퇴임 후 계획이 아무것도 없었는데, 어느 틈에 하모니카로 취미 활동을 하는 나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하여 열심히 연습을 하다가 보니 하모니카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활동하는 동아리가 있다며 선생님께서 소개를 해 주셨다.
그렇게 시작한 동아리에서 공연을 하게 되었는데 나는 영광스럽게도 독주기회까지 갖게 되었다.
이 사실을 접한 mbc에서 촬영하여 방송이 된 내용을 첨부합니다.
♣ KBS [가요무대]
2019년 결혼 40주년이 되었다.
‘이석증’으로 인한 심한 어지럼증으로 비행기를 타지 못하는 아내가 측은하였다.
가끔씩 다툼이 있을 때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몰아 부칠 때는 야속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퇴임 후 마음껏 구경도 다니며 인생의 황혼기를 재미있게 보내려고 했었는데 그러지 못하는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도 있고 해서 40주년의 방법을 고민해 보았다.
결론은 평소 가요프로그램을 좋아하는 아내에게 깜짝 선물을 하기로 하였다.
좀 더 상세한 얘기는 [결혼 40주년에는…….]에서 준비가 되어 있다.
첫댓글 대단합니다🎵
몸으로 실천하고 성과를 올리고 아무나 못하는데
송이골님 홧팅입니다
과찬이십니다.
너무 자랑이 심한것 같아서 망설이다가 .「인생이야기」밑천이 달막거려서 우짤수 없이 이것도 소환했습니다.
찬찬하신 성격이 대단한 일을 하셨네요.
멋진 인생 홧팅 입니다.
감사합니다.
퇴임후도 제가 시도한 교육이 전승되고 있음에 보람을 느낍니다.
탑재된 동영상이 [저작권 보호를 위하여 재생을 할 수 없다.]로 나오네요.
내가 출연하는 것만 편집을 했는데도 저작권 보호를 해야 한다니,
오히려 '초상권 보호를 해야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