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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 미륵산 용화사 효봉문중발상지/ 미륵신앙 / 아소카왕 석주 / 중국 4대 미인
* 신라 선덕여왕 때 은점 스님이 미륵산 중턱에 절을 짓고 정수사라 하였다. 고려시대인 1260년(원종1년) 에 산사태로 허물어진 것을 3년 뒤 자윤스님, 성화 스님 두 화상이 미륵산 제3봉 아래로 자리를 옮겨 짓고 천택사라 하였다. * 1628년(인조 6년)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1752년(영조 28년)에 벽담스님이 다시 짓고 용화사라 하였다.
* 경내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기와집인 보광전(경남유형문화재 249호)을 비롯하여, 좌측 1칸에 효봉영각을 차려 놓은 명부전, 미륵 불좌상을 봉안한 용화전, 강당인 탐진당, 선실인 적묵당, 문루인 해월루 등 목조건물과 육모정 형태의 종루가 있다. * 그 위쪽에 진신사리 7과를 봉안하고있는 불사리4사자법륜탑과 효봉대종사 5층 사리탑이 있다. 1983년 7월 20일 경남문화재자료 제10호로 지정되었다.
* 용화사의 산내 암자로는 943년(고려 태조 26년) 도솔선사가 창건한 도솔암과 1732년 (조선 영조 때 8년) 창건된 관음암이 있다.
* 미륵산 정상에서 바라본 용화사 전경 * 미륵산과 미륵도 ; 섬의 북쪽에 세 봉우리가 마치 <미륵불의 삼회설법>을 상징하는 듯하다고 미륵산이라고 불려왔다. 미륵산이 있으니, 자연히 섬 이름이 미륵도이다.
<미륵하생경>에 의하면, 미륵보살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교화시대가 끝난 다음 시대에 우리가 사는 사바세계에 출현하여 미륵불이 되셔서 용하수 아래에서 삼회의 설법을 베풀어 중생을 크게 교화한다하였다. * 아하~ 석가모니 부처님도 교화가 끝나는 시대가 오는 구나. 그 바톤을 이어 받는 분이 미륵불이시다. 그러면 그 때가 언제일까?
* 미륵불은 그러면 지금은 어디에 계시는가? 석가모니불 재세시대 미륵보살로 제자였고, 석가보다 미리 열반하여 도솔천 天主로 계신다.
* 효봉스님상. 1923년 출가, 1966년 밀양표충사에서 입적. 대한불교조계종 초대 종정 . <대한불교 조계종 종정 효봉스님 사리탑비>도 이 절에 있다.
* 그런데, 왜 여기 있는가? 미륵산과 용화사는 효봉스님이 6.25 전후에 계시고 수도했던 곳이다. 토굴터가 있고, 도솔암에는 계시던 흔적이 남아 있다. 효봉의 스승인 석두대선사가 금강산으로부터 여기까지 피난와서 계시다가 입적하였다. 석두-효봉-구산 스님 3대가 다 여기 계시고, 수도하여 효봉의 문중 발상지가 되었다.
* 미륵불은 도솔천에서 천수를 4천 세 누리고 난 후에 사바세계로 다시 내려 오신다. 도솔천의 4천세란 얼마만한 세월인가? 도솔천 1일은 인간세상의 4백년에 해당한다. 1년 360일로 계산하면 5억 7천 6백만년 뒤의 일이다. * 그런데 보통 미륵불의 출현 시기를 56억 7천만 뒤의 일로 기록한다. 이것은 7과 6을 전도시키고, 단위를 한자리 첨가시킨 전도와 착오를 무심히 답습한 결과인듯 하다. * 5억7천 6백만년이나, 56억 7천만년이든지간에 무궁한 세월 후이지만, 대각을 이룬 후에 용화정토를 구현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불교로 득도하면, 먼먼 훗날이지만 미륵불에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미륵신앙은 난세에 더욱 성했다.
* 6.25 전란으로 해인사 가야총림 대중들이 용화사에 피난 오고, 도솔암에 거처했다. 1954년 구산선사가 박대원해 보살 등의 후원과 적산을 불하받아, 미륵산 남쪽에 영운리 일대에 미래사를 창건했다. 도솔암이 비좁아 새 거처를 마련한 것이다. * 효봉, 석두 대선사도 미래사로 주석처를 옮겼다. 법정, 일초 등도 출가하여 효봉스님의 제자가 됐다. 통영의 불교가 기복에서 수행불교로 전환되었고, 효봉문중이 성립하였다.
* 정면 보광전. 동향이다. '부처님 밝은 진리를 세상에 널리 비춘다' 는 의미. 이 절의 대웅전 격이었는데, 이 절이 규모가 그렇게 크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보광전이라면 이론상으로 비로자나불이 모셔져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다. 석가모니불이다. 그렇다면 대웅전이라 해야 한다. 이론과 격식을 갖춘 명칭은 아니다. 대웅전이라 하기는 규모가 부족하다고 고심한 흔적으로 보인다.
* 용화사는 역대 수군통제사들의 지원을 받았다. 미륵도의 주둔 수군 일부의 거처가 되기도 했으며, 바다에서 목숨을 바친 임진왜란시 수군장병들의 영혼을 위로할 필요성도 있었기 때문이다.
* 불사리4사자 법륜탑' ; 부처님의 진신사리 4과를 봉안하고 있다는 형식을 취하여 이 거탑을 세웠다. 형식은 아소카왕(팔리어 발음, 산스크리트어발음은 아쇼카) 양식 원주석탑을 모방하였다. * 아소카왕은 BC 3세기경 최초로 인도를 통일한 마우리아왕조 최성기, 존경받는 왕이었다. 평화정책을 쓰며 종교적 도덕적 가치를 존중하여 불교를 장려하였다. 불교의 발전은 이 왕의 장려에 크게 힘입었다. * 아소카왕의 석주 ; 인도 북부 불교성지에 높이 10~13m 원형기둥으로 세운 기념비, 두부에 사자의 머리 조각(페르시아 미술 영향받음). 현재 6개가 발견됨.
용화사 관음암
관음암~도솔암 암자 경내 길가에 말씀비가 서있다.
이런 말씀도 있다.
독사가 물을 마시면 독을 이루고, 소가 물을 마시면 젖을 이룬다. 지헤롭게 배우면 보리를 이루고 어리석게 배우면 생사를 이룬다.
관음암, 산사의 미소
튜립인데, 관음암 산사의 담벼락에서 보니 독특함 아르다움이 있다. 이 아름다운 꽃도 중국의 어느 미인보다 더 아름답지 못해서 부끄러워한다. 미인을 <수화폐월羞花蔽月>이라고 하는 내력을 알아본다.
[중국 4대 미인에 대하여]
1) 전국시대 월나라 <서시>-침어沈魚(고기가 넋을 잃어 가라 앉았다) 처음 오왕 부차가 와신臥薪하고, 월나라 구천이 오왕 부차에게 미인계로 이 여인을 바쳐 위기에서 벗어나고, 상담嘗膽하여 복수하고 승리했다.
2) 한나라 <왕소군> - 낙안落雁(기러기가 넋을 잃고 날아가다 떨어졌다) 원제의 궁녀로, 궁중화가가 뇌물주는 여인은 아름답게 그려주는데, 왕소군은 뇌물을 안주어 박색으로 그렸다. 그 결과 뽑혀서 정략적으로 남흉노왕 호한야에게 시집갔다. 당나라 시인 동방규가 <소군원 ; 왕소군의 한> 이란 시에 <春來不似春> 구절이 나옴.
3) 한나라 말 < 초선>-폐월蔽月(달도 부끄러워 구름에 살짝 숨었다.) 왕윤의 수양딸, 왕윤이 미인계를 써서 여포의 질투를 유발하여 동탁을 죽이게 하였다.
4) 당나라 <양귀비> - 수화 羞花(꽃도 부끄러워 하다) 처음 며느리로 들어왔으나, 현종이 빼앗아 후궁으로 삼았다. 그 결과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 나라가 쇠약해졌고 양귀비는 자살을 강요당했다.
도솔암, 연두색 신록. 해무가 해면을 덮고 있다.
도솔암 입구
* 도솔암(兜率庵) / 까만 열매가 많이 달렸다. 무슨 열매인지 모르겠는데, 꽃이 아름다웠겠다. * 도兜는 '투구 두' 자이고 불교에서 도솔천, 도솔암 할 때 '도' 로 읽는다. ' 도솔천도'라고 봐야 한다. 도솔은 고대 인도어 Tuṣita의 음역이다. 도솔천은 미륵보살님이 계시는 곳이다. 욕계 6천중 제4천, 욕계의 정토. 지상에서 12만 유순의 거리.(1유순은 황소가 하루 수레를 끄는 거리, 11~15km)
* 미륵보살은 원래 석가모니의 제자였고, 석가의 수계를 받고 먼저 열반하여, 도솔천에서 천신들을 상대로 설법하고 있다. 56억 7천만 년 후에 미륵불이 되어 사바세계에 다시 오셔서 용화수라는 나무 아래에서 세 번의 법회를 열고, 석가모니가 다 구제하지 못한 중생을 구제한다는 미래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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