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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3장 9절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로마서 3장 23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신학교에 입학하고서 같이 입학한 친구가 영성계발투어라는 아이디어를 내어 여행을 한 적이 있었다 그는 매사에 신령하고 거룩함을 추구하는 진지한 친구여서 진심으로 존경하는 마음으로 대했다. 당시 나도 신령하지는 않았지만 나름 신앙적이고 순수하다고 주위에서 알아 주었다 . 하지만 여행을 한 지 이튿날 부터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 식사 때는 계란을 먹는 나에게 눈치를 주고 잠자기 전에는 삼십분만 성경을 읽고 잠자리에 든 나를 아랑곳히지 않고 방 한켠에서 두시간 더 성경을 읽고 기도를 했다. 아침에 일어나서는 10여분 동안 같이 지남을 읽고 기도 후에 산책을 다녀왔더니 아직도 한시간을 더 찬송을 하고 기도했다. 오전에 꼼꼼히 신문을 오랫동안 읽고 혼자 말로 논평을 했더니 세상일에 너무 관심을 두지 말라며 조언을 한다 여전히 그의 손에는 예언의 신이 펼쳐 있다.오후에는 마침 만난 지인과 바둑을 두는데 신학생이 오락에 빠져 있다고 혀를 찬다. 그는 어떤 경우라도 말이 늘 진지하여 농담이 들어갈 틈을 주지 않았다 . 이 일에 다소 익숙한 나도 시간이 지날수록 불편하여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급기야 그의 판단 기준에 성이 차지 않던 나를 "장차 목회의 꿈이 있는 너는 신학과 생이 그게 뭐냐" 고 핀잔을 주기까지 한다. 결국에는 강원도 철암에서 그와 헤어지고 집으로 와야 했고 학창시절 내내 나는 그의 영적기준에 주눅이 들어 지나야 했다.
아 중생하지 못한 영혼이여!
범죄한 이후에는 신성한 것을 즐기지 않게 되고 하나님의 원칙의 둘레 안에 사는 것을 싫어한다. 마음은 하나님과 융화하지 못하고 하나님과 더불어 교통하는 가운데서 얻는 기쁨을 부담스러워 한다. 그래서 비록 천국에 들어간다고 해도 거기서 아무 기쁨을 얻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의 심금에는 아무런 공명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본성에는 영적인 교만이 있기도 하다. 범죄자가 있다면 그들을형무소에 가둬놓고 형기를 채워서 징계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들보다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낫다고 여겼다.
최소한 나는 감옥에 들어갈 만큼 못된 짓은 안했다고 상각했다.
그런데 말씀을 보니 그들이나 나나 오십보 백보다.
로마서3장10절 이하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선을 행하는 자도 없고. . 입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ᆢ"
그러면 어찌해야 하는가 나는 "정죄받는 것이 옳"다.(롬3:8)
정로의 계단에서는 “ 그리스도인이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첫 번째 요소가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는 것이다" 라고 했다.
심지어 “어린이들이 첫 번 째 물려받는 것은 죄의 유전이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하나님과 분리시켰다. 예수님은 깨어진 고리들을 하나님께 결합시키도록 그분의 생명을 내 놓으셨다. 첫 아담과 관련된 우리는 그로부터 죄책(guilt)과 사망선고 외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새자녀 지도법 475
“우리는 악으로 기우는 후천적인 경향들을 가지고 있을 뿐아니라 유전된 경향들을 가지고 있다 .... 이런 경향들 때문에 아이에게 죄를 짓도록 가르칠 필요가 없다 ” 시대의 소망 671
그래서 무지한 사람도 죄를 짓는 방법을 항상 알고 있다(엡2:3)(막 7:21) 그래서 갓 태어난 작은 아이도 엄마의 바람처럼 작은 천사가 아니라 작은 죄인이다.
가려뽑은 기별 1권 334에서 지적했듯 이것을 “ 부패한 인간성의 통로(corrupt channel of humanity)라고 설명했다.
코로나 백신을 맞은 후유증으로 6개월 동안 너무나 가려워서 일상이 지장을 받을 정도로 고생한 적이 있다. 그럼에도 기어이 코로나가 걸려 또 고생을 했다. 그러나 코로나의 증상으로 가렵거나 열이 나거나 밥맛이 없다고 해서 그 것이 코로나의 원인이 되는가? 아니다 가렵기 때문에, 열 때문에, 밥맛이 없는 것을 보니 코로나에 걸린 것이 아니라, 바이러스 때문에 걸린 것이다.중상은 코로나의 결과일 뿐이다. 죄의 결과로 감옥에 가고 죄값을 치뤄서 죄의 원인이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죄 때문이다.
우리는 철저한 죄인이다. 그럼에도 이 죄의 문제에 대하여 잘못 아는 것 중 하나는, 믿은지 엄청 오래 되었거나 이미 믿었던 사람들에게 죄는 그들의 영혼을심각하게 만든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고. 반면에 하나님을 전혀 믿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이 죄가 무엇인지전혀 몰라 방탕과 무관심에 빠진다.
그런데 로마서 3장 9절에 이렇게 말한다.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원문 = 죄의 권세) 아래 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의 권세 아래 있다. 우리가 가장 두려워할 것은, 하는 짓 마다 죄된 짓만 하고 있고, 생각하는 것마다 음란하고 이기적이며 음흉하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심각한 점은 나는 그렇게 심한 죄인이 아니야라고 여기는데 있다.
이런 사람이 있다 . 우리 주위에 이런 사람이 있다면 한번 찾아보자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것은 기본이다 . 헌금생활과 교회생활에 열심이다. 그리고 한 번도 주위 사람을 욕하는 것을 본 적도 없고 지인이나 교인이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심지어 믿지 않는 이웃에게도 따뜻한 배려와 경제적이 도움도 준다. 늘 그를 칭찬하고 , 주위에서 그를 욕하는 사람을 한 명도 본 적이 없다. 그는 그저 좋은 사람을 넘어 사람들 가운데 제일 좋은 사람이다. 도덕적인 것 뿐 아니라 하나님을 찾는데 있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실천하고 말씀을 수호하는일에 혼신을 다하여 온 힘을 기울인다. 그는 또한 메시야의 강림을 기다리는 사람이다(Adventist).
이와같은 부류의 사람 중 한 사람이 20세기 유명한 랍비 Simeon Ben Jakai였다. 그는 다음과 같은 희대의 유명한 말을 남겨서 민중에 회자된 사람이었다 . "세상에 의로운 사람이 둘 밖에 없다고 한다면 바로 나와 내 아들이고, 오로지 한 사람만 찾는다면 그 하나가 바로 나이다" 이들을 가리켜 성경은 바리세인이라 하고 교회에서는 이중인격자라고 한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나를 비롯한 다수의 교인들은 죄의 본질이나 죄의 깊이 그 어느 하나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믿음과 일상생활을 분리하고. 변질된 성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바리세주의자의 가장 치명적인 문제점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지 못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둘러싼 죄의 권세가 얼마나 치명적인가를 인식하지 못한데서 기인했다.
예수님 당시 예수님이 가장 개심시키기 어려웠던 사람들은 바리세인이었는데 이들은 회심의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바리세인의 잘못된 핵심은 하나님의 뜻보다는 나의 의지를 내 생애의 궁극적인 법칙(율법)으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생각해 왔던 명상제목 중 하나는 나는 왜 그 무리에 속한 줄 알면서도 한치 앞도 벗어나지 못하느냐는 질문이었다.
예를 들자. 20대 때는 세상을 바꾸겠다고 한때 호기롭게 생각을 했었고. 신학교에 들어가서는 교회를 한 번 바꿔 보겠다는 야망를 가졌고, 결혼해서는 아내의 어이없는 버릇과 신앙을 바꿔보겠다고 협박도 하고 달래기도 했다. 그리고는 딸을 얻고서는 세상에서 가장 예쁘고 신앙적인 아이로 바꿔보겠다고 독재도 하고 특이한 교육을 해 보았다. 그걸 실패하고서는 다시 9년 만에 나를 꼭 닮은 아들을 본 나는 딸과 아내의 실패를 교훈삼아 나와 다른 성공적인 아들을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매일 큰 소리로 집안을 시끄럽게 하였다.
나의 치명적이고 안타까운 점은 바리세인과 같이 나자신의 의가 다른 사람의 의보다 조금이나마 낫다고 여기는 생각에서 살았고 실천했고 그럼에도 지금까지 한치 앞도 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런데 조금은 다행인 점은 , 아무리 애를 써도 아무 것도 내 의지대로 바꾼 것이 없이, 60이 훌쩍 넘어선 지금, 비로소 알게 된 작은 깨달음이 있었다.바로 그것은 남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나만 바꾸면 모든 것이 변한다는 평범한 진리였다. 왜 진작 몰랐는지 한심할 따름이다.
왜 이제야 그것을 알았는가?
한 때는 교회 조직과 문화가 잘못되어 썩어서, 재림교회가 이 지경에 이르렀다고 생각했다. 저의 필명이 재림논객이다. 한때 나름 재림교회에서 유명한 위치에 있었다. 하도 글이 매서워 재림마을 담당자인 연합회 엄덕현 목사님이 제발 글좀 어떻게 해 보라고 사정을 하였었다.동중한의 합회장님도 전화를 여러번 주셨다. 그때는 내가 옳고 교회가 틀렸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다는 지극히 자아 중심적이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사과나무가 열린 것을 보고 사과나무임을 알아차리는 것이 아니라 사과나무이기 때문에 사과나무가 열리는 것처럼,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뼈속까지 죄인이기 때문에 죄의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음을 알았다.사람이 있는 곳에는 어느 곳이든 어느때든 죄는 있다는것은 만고의 진리다. 라인홀트 니이버(Reinhod Nebuhr)는 " 역사가 있는 곳에는 죄가 있다"고 했다.
14년 전에 아내가 뇌출혈로 사경을 헤메다가 겨우 추수려 여기까지 왔다. 처가는 혈압 당뇨의 가족력이 있어서 처형이 일찍이 불행을 당했고 장인과 장모님 역시 같은 이유로 사망하셨다. 둘째 처남도 비슷한 이유로 고생을 한다. 하여 아내에게 온갖 잔소리도하고 혐박하고 달래고 설득하여 여기까지 왔다. 하지만 또다른 불행이 닥치니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주체할 수가 없다. 모든 것이 아내 탓이다. 그렇다 내탓이 아니고 아내가 잘못해서 그렇다. 이로 인해 잠못 이루고 모든 일상이 뒤죽박죽 되었다. 70살에 가기로 준비한 세계일주 재림교회 탐방계획도 모두 물거품 되었다. 참 처복도 지지리 없다.
죄의 특징은 나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바라보고 느끼고 또 결론내리는 것이다.
그러면 죄의 반대는 무엇인가? 죄의 반대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시다. 죄의 본질은 자기 중심적이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는 타인이 중심이 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란 "그 아들을 타락한 인류에게 아주 무상으로 주신" (정로의 계단 122) 것을 의미한다. 이 말은 "그리스도께서 인류에게 이익이되는 것은 어느 것이든지 또 필요한 것이라는 무엇이든지 당신의 것으로 갚는"(정로의 계단 122 )것으로 여기시는(看做하시는= Pass Over)행위이기 때문이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요1 3;1) 그리고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셨"(히2;1)다.
"죄로 인해 하나님의 계획이 실패하고 죄의 원흉인 사탄이 지배하에 놓인 이후에 세상에 재화와 질고와 사고가 끊기지 않은 것은 사단의 흉계로 세상이 돌아가기 때문이다. 사단은 이 모든 재앙이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실패한 창조 사업의 결과라고 개개인에게 인식 시키는 것이다." 정로의 계단 124
모든 것을 아내의 탓으로 돌리던 필자에게 어느날 다윗의 길에서 다른 해답을 보여주심에 눈물나게 감사한다.
다윗의 예를 보자.
시편 51편에 이렇게 설명한다. 잘 알다시피 다윗이 밧세바에 대한 기록이다.
시 51:1-4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필자가 의심하던 죄의 문제를 여기서 명징하게 풀어주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는 털끝만치의 소망도 없는 존재다. 나의 나 된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라고 성경은 가르친다. 성경은 인간의 유일한 소망이 복음과 하나님의 은혜에 있다고 분명히 말한다.
시편기자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을 죄인으로 인식하게 하려고 기록된 것이다. 성경은 죄에 대하여 무관심한 인간에게는 죄의 문제가 그에게는 전혀 심각한 문제도 큰 이슈도 아니라고 설파한다. 오직 내가 끔찍한 죄인임을 뼈속까지 느끼는 자에게만 죄의 문제가 자신에게 심각하게 진지하고 다가온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죄에 대한 성경의 입장은, 죄는 끔찍한 악의 세력이며 너무도 끔찍하고 너무도 강력해서 인간이란 인간은 죄다 거꾸러뜨린다. 그리하여 이 세상 사람 모두 죄 앞에 무릎 꿇게 만든다는 견해이다.
죄와 전혀 상관 없다고 느끼며 평온한 일상을 살던 다윗에게. 어느날 선지자 나단이 그의 죄를 지적하자 드디어 죄가 자신과 심각한 관계가 있다고 여긴다.
그리고 드디어 죄를 고백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주께만 범죄(犯罪 Iniquity)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4절
이상하다. 기록의 오류인가? 우리의 상식으로 보면 고백의 대상이 바뀌지 않았나? 다윗은 "내가 밧세바에게만 악을 행하였다"고 혹은 그로 인해 억울한 죽임을 당한 "우리아에게 범죄 하였사오니" 라고 사과하고 죄를 고백하는 것이 맞지 않는가? 인간의 기준으로는 그렇다. 그렇지만 다윗은 그 죄가 단순히 사람들에게 행한 행위 그 자체로서만 끝나는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죄인이라고 느끼는 자들의 특징이 다윗을 통해 발현된다. 그는 자신의 소행이 다른 사람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아울러 그들과 연루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하나님에게만 지은 죄로 인함을 알아차린다. 여기서 양심의 가책(Remorse)과 회개(Repentance)는 본질적 차이가 드러난다. 전자는 자신의 잘못됨을 깨닫지만, 그 잘못이 하나님에 대한 범죄임을 알지 못한다면 회개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을 흠 없는 존재로 지으셨으며 그에 걸맞은 생활을 하도록 지으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죄를 짓는다면 그분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범한 모든 죄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 범한 죄인 것이다.
“ 내가 주께만 범죄(犯罪 Iniquity)하여”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거신 큰 기대를 저버렸다. 창조질서를 어지럽히고 왜곡했다. 다윗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죄를 지을 때마다 하나님의 거룩한 법을 깨뜨리는 것이다,
다윗은 자신의 소행이 여러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들을 연루시키기도하고 그의 죄 때문에, 가까운 사람에게 저주가 임함을 알았다. 그리고 죄의 본질이 주님께 대한 범죄임을 인식한다.
범죄(犯罪 Iniquity)란 일그러지거나 어긋난 행위 왜곡된 행위를 뜻한다. 우리가 다윗과 같이 살인죄는 저지르지 않아 마음을 놓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다윗이 저지른 살인죄 간음죄와는 차원이 다르고 어떤 때는 전혀 무관하다고
까지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자신에게 질문해 보자 “우리는 살인과 간음은 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우리가 현재 행하는 온갖 일들이 나로 인하여 일그러지고 더 왜곡되고 그 결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행사(行使)되지는 않은가?” 특히 나와 가까운 사람에게라면 더하지 않겠는가?"
나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온갖 행위가 하나님의 원칙에 극명하게 어긋나 있음으로 주위가 몽땅 어그러져감을 눈치채어야 한다.
우리의 자아는 너무 끔찍할 정도로 어그러져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저주가 임하기를 빌며 또 어떤 사람이 잘 되는 것을 배 아파한다. 그런 생각 모두는 그릇되고 어긋났으며 사악한 일이다. 죄악에서 자신의 잘못이 하나님께 대한 범죄임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는 회개한 것이 아니다.
인간이 죄를 지으면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 된다.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이다. 그분의 창조질서를 어지럽히고 왜곡하는 것이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법을 깨뜨려 가장 사랑하는 자에게 그 죄의 결과가 미치는 것이다.
이제야 알았다 . 아내가 아픈 것이 아내 탓이 아니라 내 깊숙히 자리 잡은 죄의 무서운 속성으로 인해 그리고 죄의 행위로 인해 가장 가까운 아내에게 나타난 결과인 것을 왜 이제야 알았던고?
지금까지 잘못 알아왔던 오류 가운데 하나는, 죄는 영적인 분야이고 질병은 육적인 분야이기 때문에 별개로 본 것이다. 죄는 죄이고 질병은 질병이다라고 생각했다.
안기훈 집사님께 닥친 불행이 그분이 잘못 된 생활에서 기인하는 것 이상으로 교회 공동체 구성원 하나 하나가 지은. 아직도 간직하고 용서 받지 못한 죄의 흔적들이 쌓이고 녹아져서 전이된 공동체의 죄의 결과라고 여기는 것이 휠씬 더 성서적이다. 죄는 이와같이 치명적입니다.
죄가 영혼을 휘어 감고 그로 인해서 발생하는 질병으로 신음하는 병자들을 예수님께서는 어디서나 치유하신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그 질병은 마귀의 일이었고 그 일을 멸하시러 이 땅에 오셨기 때문이다.(요일 3:8)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누가복음 1:77)
죄의 문제에 관한 두번째 치명적 오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로중하지 않은 죄를 지은 나는 어느정도 안전할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래도 난 감옥 갈 죄를 짓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야! 세상에 누구나 알 만한 아무게 목사가 자기 교회 돈을 떼먹어 그만뒀데! 야 그 신장로 있잖아 감방 갔데. 어머나 세상에... 김집사님이 이혼했다네..
주위에 얼마나 많은 소문과 사건이 있는가? 나는 그래도 그들과는 조금 다르지 않은가 나는 그런 큰 죄는 범하지 않아 다행이야
혹시 우리는 죄가 경중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런 자에게 다음과같은 경고의 말씀이 있다.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로마서7장 7,8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원래 죄인으로 태어나서 , 죄에게 내가 기회를 주고 그 죄로 말미암아 온갖 죄를 이룬 것 뿐이다라고 배웠다.
믿지 않는 사람과 달리 믿는 그리스도인에게 저지를 수 있는 죄의 대부분은 작위와 부작위의 죄이다.
죄의 행위는 작위(作爲=저지름= comission)나 부작위(不作爲 = 태만= omission)에 의해서 대부분 발생한다.
불행히도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죄를 단순히 악한 행위를 저지르는 것과 관련해서만 생각하며 더 광범위하다는 사실를 잊는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죄는 악한 행위보다는 작위(저지름)과 부작위(태만)에서 오는 죄가 대부분이다. 작위죄란 "사람이 의식적으로 한 행위나 적극적인 저지름에서 오는 죄"이며 부작위죄란 "마땅히 해야 할 것으로 기대되는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죄지을 상황만 되면 언제든지 죄를 실행하고 죄에게 문을 열어 줄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모든 죄가 다 동일한 심각성을 가지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다. 즉 죄의 등급이 있다고 믿는것이다.
이런 표현이 있다 바리새인 같은 "완전 채식주의적"인 죄들이 창녀들의 음란한 죄들보다 더 위험하고 고치기가 어려운 이유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작위혹은 부작위 죄이기 때
이다 보이지 않기에 하찮게 여긴다.
사법적으로 처단할 수 있는 "보이게 드러나는" 죄를 지은 사람들은 대부분 감옥에 있다.
그런데 감옥에 있는 사람은 죄지을 상황에 처해 운없이 발각되어 재판받고 영어의 몸이 되었지만, 나는 죄지을 상황에 운 좋게 걸리지 않았거나 도덕적 윤리적으로 잠시 참아서 죄지을 상황이 만들어지지 않아서 지금 여기 예배당에 있는 것 뿐 별로 차이가 없다. 감옥에 있 사람과 여기 앉아 있는 우리의 차이는, 운이 좋고 상황이 좋아 죄지을 기회를 만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면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히브리서 7:25 "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를 온전히 구원하시니니"
십자가의 무게를 골똘이 생각하는 자만이 죄의 무게를 골똘히 생각하게 된다. 죄의 질병을 치료하는데는 그분의 죽음과 부활이 필요되듯이 구원의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두가지 측면은 용서하시는 은혜와 지키시는 은혜이다.
요한1서 2장 5-6절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성어거스틴은 죄란 예수님의 눈에서 멀어지는 것이다라고 정의했다. 이걸 반대로 생각하면 하나님께로 돌아서면 놀라운 기적이 딱 하 나 생기는 일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죄를 이기는 능력이다." 감히 우리가 죄를 이기다니 이게 가능한가? 우리는 능력과 재능을 좀 구분해야 한다.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인물의 공통점은 재능이 탁월한 자가 아니라 획득된 능력을 발휘하는 자였다. 아브라함의 재능이 무엇인가? 아내를 누이라고 고묘하게 거짓말 하는 재능일까? 다윗의 재능이 무엇이었을까? 몰래 남의 남편를 완벽하게 속이고 그의 아내를 취하는 재능일까? 제가 가장 좋아했던 엘리야의 재능은 무엇이었을까? 하루 400km이상 도망가는 재능만 탁월했을 뿐이다. 사도바울의 재능이 정말로 탁월했을까? 맞다 유일하게 재능이 전자들 보다 많았던 점은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의 공통점은 타고난 재능보다 획득된 능력으 죄를 물리침이 탁월해졌다 는 점이다. 언재 능력이 나타났을까? 바로 예수님을 그들의 눈 안에 고정 하여 사는 삶에 인생의 거의 대부분을 바쳤을 때이다.
이 바로 작은 차이가 그들과 우리를 구별하는 유일한 점이다. 죄를 이기는 재능은 없었지만 죄를 이기는 능력은 많았다.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찌니라"(요일 2:6) 하나님의 능력은 어떤 죄보다는 심히 크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는 힘으로 죄를 압도하여 이기는 힘이 생긴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 6절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분을 본받으라고 하셨지만 우리 스스로는 예수와 동일하게 타인에게 본받을 자가 될수는 없다 “ 마르틴 루터
“하나님은 완전의 표준에 도달하라고 우리에게 요청하신다. 그리고는 우리 앞에 품성의 모본을 나타내셨던 그리스도라는 모본을 내 놓으셨다. 구주께서는 죄업에 대한 계속적인 저항의 생애로 말미암아 온전케된 육신을 쓰시고 신성과의 협동을 통하여 인간이 이 생에서 품성의 완전에 도달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이것이 우리도 역시 완전한 승리를 얻을 수 있다는 하나님의 보증이다” 사도행적 531(영문)
SOLI DEO GLOR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