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Καὶ ἐδόθη μοι κάλαμος ὅμοιος ῥάβδῳ, λέγων· ἔγειρε καὶ μέτρησον τὸν ναὸν τοῦ θεοῦ καὶ τὸ θυσιαστήριον καὶ τοὺς προσκυνοῦντας ἐν αὐτῷ.καὶ τὴν αὐλὴν τὴν ἔξωθεν τοῦ ναοῦ ἔκβαλε ἔξωθεν καὶ μὴ αὐτὴν μετρήσῃς, ὅτι ἐδόθη τοῖς ἔθνεσιν, καὶ τὴν πόλιν τὴν ἁγίαν πατήσουσιν μῆνας τεσσεράκοντα [καὶ] δύο.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되 성전 바깥 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은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개역개정)
『또 내가 막대기 같은 갈대를 받으매 그 천사가 서서 말하기를, 일어나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되 성전 밖에 있는 마당은 내버려 두고 측량하지 말라 그것을 이방인들에게 주셨은즉 그들이 그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발로 짓밟으리라.』(헬라어 번역성경)
성전을 측량하되(메트레데스 μετρήσῃς), 바깥은 측량하지 말라는 것이다. 성전과 재단을 측량하라는 말씀은 구약의 에스겔 40-48장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성전을 측량하는 행위를 통해, 하나님은 측량되는 성전이 하나님의 소유이며,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호하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여기 성전은 하나님 나라이며, 성도를 의미한다.
성전은 하늘과 땅(우주)을 상징하기도 하고, 돌 성전인 예루살렘 성전을 나타내기도 하고, 성도의 심령 속의 성전을 나타내기도 한다.『하나님의 성전(투 나우)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되』투 나우(기본형은 나오스)는 성전의 성소 부분에 해당된다.
측량할 때는 소유권의 확인을 위할 때 하는 것이다. 측량도구는 지팡이(라피죠) 같은 갈대이다. 지팡이는 양을 칠 때 사용한다. 출애굽기 4장 17절에서『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지니라』모세가 지팡이를 땅에 던지므로 뱀이 되었다. 술사들도 막대기를 던지므로 뱀이 되었는데, 모세의 뱀이 술사의 뱀을 잡아 먹어버린 것이다. 모든 인간들은 이와 같이 술사들이 던진 뱀과 같은 자이다. 술사의 뱀과 같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뱀에 먹혀야만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가짜들은 죽어야만 한다. 불뱀(사탄)과 놋뱀(그리스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불뱀에 물려 죽지만, 놋뱀을 바라 볼 때 살아난다. 모든 인간은 불뱀에 물려 죽은 자인 것이다. 시편 23편 4절에서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지팡이는 갈대는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측량하라는 것이다. 아모스 7장 7-9절에서『또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다림줄을 가지고 쌓은 담 곁에 주께서 손에 다림줄을 잡고 서셨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다림줄이니이다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림줄을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두고 다시는 용서하지 아니하리니 이삭의 산당들이 황폐되며 이스라엘의 성소들이 파괴될 것이라 내가 일어나 칼로 여로보암의 집을 치리라 하시니라』다림줄(아나크)은 건축할 때 수직으로 재는 기구이다. 수직이 되지 못하면 성전이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5장 22절에서『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아들과 다림줄이 연관된다. 요한복음 12장 47-48절에서『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내가 한 그 말(레마)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말(레마)을 받지 않는다고 했다.
요한복음 6장 63절에서『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을 통해서 말은 성령(그리스도의 영)을 의미한다. 말씀이신 로고스 자체가 심판한다는 말이다. 로고스를 받을 때 그것이 그리스도의 영이 되는가 아니면 말로 끝나는가에 따라서 갈려지는 것이다. 심판은 분리를 의미한다. 로고스를 통해서 영을 받는 것이다. 성령을 받지 못하면 하나님과 분리되므로 심판인 것이다. 말씀이신 그리스도(호 로고스)가 다림줄인 셈인 것이다. 예수의 이름을 믿는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생명이 들어올 때 구원받는 것이다. 내가 믿는 믿음이 아니라 예수의 생명이 들어올 때,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인하여 구원받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전(지성소)과 제단(성소)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되』성전 바깥 마당(이방인의 뜰)은 측량하지 말라는 것이다. 누가복음 21장 24절에서『그들이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이 말은 표면적으로는 예루살렘 성전의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에게 짓밟히는 모습이다. 그러나 이면적으로는 교회에 대해서 말을 한다.
3. Καὶ δώσω τοῖς δυσὶν μάρτυσίν μου καὶ προφητεύσουσιν ἡμέρας χιλίας διακοσίας ἑξήκοντα περιβεβλημένοι σάκκους.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개역개정)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능을 주리니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 일 동안 예언하리라.』(헬라어 번역성경)
예루살렘 성이 짓밟히는 기간이 마흔 두달이라고 했다. 실제로 로마가 예루살렘 성을 마흔 두달 동안 포위했다고 한다. 마흔 두달은 삼년 반이다. 칠년의 절반이다. 즉 완전하지 못한 수이다. 야고보서 5장 17절에서『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비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한다. 비가 오지 않은 것은 말씀의 기갈이다. 거짓 선지자들이 난무한 기간이다. 다니엘은 한때 두때 반때로 표현한다. 7장 25절에서『그가 장차 지극히 높으신 이를 말로 대적하며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때와 법을 고치고자 할 것이며 성도들은 그의 손에 붙인 바 되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지내리라.』요한계시록 12장 14절에서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으매』그런데, 계시록 12장 6절에서는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천이백육십 일 동안 그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광야에서 양육받는 기간이다.
마흔 두달은 짓밣히는 기간이다. 거짓선지자들의 활동기간이다. 1260일은 양육받는 기간이다. 두 증인이 활동한다. 두 증인은 회개의 복음을 전하는 선지자들이다. 참 선지자를 의미한다. 마른 두달은 달을 상징하고, 1260일은 해(헤메라)를 상징한다. 큰 광명체(해:복음)와 작은 광명체(달:율법)가 등장하는데, 큰 광명체는 영적으로 성숙한 자, 작은 광명체는 미성숙한 자(초등학문)를 의미한다. 골로새서 2장 8절에서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굵은 베옷은 거친(염소털이나 낙타 털로 만든 것) 베옷이다. 세례요한과 엘리야가 연상된다. 요나 3장 6절에서 『그 일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 위에 앉으니라』회개를 의미한다. 마태복음 11장 21절에서『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예루살렘이 망하게 되었으므로, 세례요한이 회개를 선포했던 것이다.
두 증인은 교회를 회복하는 일과 관계가 깊다. 타락한 교회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회개가 필수적인 것이다. 예언은 회개에 대한 선포와 같은 의미다. 두 증인에서 둘이라는 의미는 다수의 복수의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