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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암 바위
경남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산 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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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지도서(輿地圖書) 慶尙道 聞慶縣 山川 〔新增〕
夜遊巖。 在鳳巖寺洞。 平巖皎潔, 景致明朗, 夜亦可遊, 故名。 俗傳崔致遠所遊處, 有石刻“取適臺”三字。 ○白雲臺在寺西數里, 有白石瀑布之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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取适 [qǔ shì]
汉语词语
取适是汉语词汇,拼音是qǔ shì,解释为寻求适意。
南朝 宋 谢灵运 《山居赋》:“夏凉寒燠,随时取适。”
唐 岑参 《渔父》诗:
“竿头钓丝长丈馀,
鼓栧乘流无定居。
世人那得识深意,
此翁取适非取鱼。”
唐 杜甫 《苦雨奉寄陇西公兼呈王徵士》诗:“式瞻北邻居,取适南巷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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岑参(718年?-769年?),荆州江陵(今湖北江陵县)人或南阳棘阳(今河南南阳市)人,唐代诗人,与高适并称“高岑”。
岑参出生在一个官僚家庭,因聪颖早慧而五岁读书、九岁属文。天宝三载(744年),岑参进士及第,守选三年后获授右内率府兵曹参军,后两次从军边塞,先任安西节度使高仙芝幕府掌书记,后在天宝末年任安西北庭节度使封常清幕府判官。唐代宗时,岑参曾任嘉州(今四川乐山市)刺史,故世称“岑嘉州”。约大历四年(769年)秋冬之际,岑参卒于成都,享年约五十二岁(51周岁)。
文学创作方面,岑参工诗,长于七言歌行,对边塞风光,军旅生活,以及异域的文化风俗有亲切的感受,边塞诗尤多佳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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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계집(雨溪集) 김명석(金命錫)생년1675년(숙종 1)몰년1762년(영조 38)자여수(汝修)호우계(雨溪)본관의성(義城)특기사항이현일(李玄逸), 이재(李栽)의 문인. 김성탁(金聖鐸), 이만(李), 권구(權榘), 권덕수(權德秀) 등과 교유
雨溪文集卷之一 / 詩○七言絶句 / 過岳陽
영조 | 52 | 1776 | 병신 | 乾隆 | 41 | 48 | 봄, 晦屛 申體仁을 방문한 뒤 둘째 형 趙運道 등과 남쪽으로 頭流山(智異山)까지 유람하고, 〈南遊錄〉을 짓다. ○ 月麓書堂을 창건하다. |
吹篴臺前初繫舟。岳陽原上更登樓。湘君哀怨無人弔。斑竹臨江自帶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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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촌집(老村集) 임상덕(林象德)생년1683년(숙종 9)몰년1719년(숙종 45)자윤보(潤甫), 이호(彝好)호노촌(老村)본관나주(羅州)특기사항윤증(尹拯)의 문인. 양득중(梁得中), 최규서(崔奎瑞) 등과 교유
老村集卷之一 錦城林象德彛好著 / 詩○五言律詩 / 取適臺
千秋韓錄事。先我此來尋。有悟濠魚樂。無機沙鳥心。避人方丈遠。卜地洞庭深。日落長洲暮。空爲梁甫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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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촌유고(樗村遺稿) 심육(沈錥)생년1685년(숙종 11)몰년1753년(영조 29)자화보(和甫), 언화(彥和)호저촌(樗村), 저헌(樗軒)본관청송(靑松)특기사항정제두(鄭齊斗)의 문인. 이진병(李震炳), 윤순(尹淳), 윤선(尹璿) 등과 교유
樗村先生遺稿卷之十 / 詩 / 過岳陽。卸坐吹笛臺。
倚醉微吟取適臺。每逢佳處爲徘徊。臨憑却懷無良策。料理扁舟上水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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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천집 제2권 / 시(詩)○을미고(乙未稿) / 고운의 취적대에 느낌이 있어 읊다〔孤雲吹笛臺有感〕
국운 말기라 재상 재목을 용납지 못했으니 / 國末難容黼黻才
계림 황엽이 족히 비애를 일으킬 만하구나 / 鷄林黃葉足興哀
선인이 국가의 흥망과 무슨 상관이 있길래 / 仙家何管興亡事
애써 새 조정을 향해 예언을 바쳤단 말인가 / 勤向新朝獻讖來
[주-C001] 을미고(乙未稿) : 1895년(고종32), 매천의 나이 41세 때 지은 시고이다.[주-D001] 고운(孤雲)의 취적대(吹笛臺) : 고운은 신라 말기의 학자이며 문장가인 최치원(崔致遠)의 자인데, 취적대는 최치원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어느 곳에 있었는지를 전혀 상고할 길이 없다.[주-D002] 계림(鷄林) 황엽(黃葉) : 계림은 신라의 고도(古都)인 경주(慶州)의 고호이고, 황엽은 누렇게 단풍 든 나뭇잎을 가리킨 것으로, 전하여 여기서는 신라가 곧 망할 것을 예측한 말이다. 최치원이 일찍이 고려의 왕건(王建)에게 보낸 서한(書翰)에 “계림은 시들어 가는 누런 잎이요, 개경의 송악산은 푸른 소나무다.〔鷄林黃葉 鵠嶺靑松〕”라고 한 데서 온 말인데, 이는 곧 신라가 망하고 고려가 새로 창건될 것을 미리 예언한 것이었다. 《三國史記 卷46 崔致遠列傳》[주-D003] 선인(仙人)이 …… 있길래 : 여기서 선인은 곧 최치원을 가리킨다. 그가 일찍이 난세(亂世)를 피하여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에 들어가 은거했던 까닭에 후인(後人)들이 그를 유선(儒仙)이라 일컬었던 데서 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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孤雲吹笛臺有感
國末難容黼黻才。鷄林黃葉足興哀。仙家何管興亡事。勤向新朝獻讖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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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림집(鶴林集) 권방(權訪)생년1740년(영조 16)몰년1808년(순조 8)자계주(季周)호학림(鶴林)본관안동(安東)특기사항이상정(李象靖)의 문인. 김굉(金㙆), 이완(李埦), 김희직(金熙稷), 김한동(金翰東) 등과 교유
鶴林先生文集卷之九 / 記 / 河東山水可遊者記
영조 | 43 | 1767 | 정해 | 乾隆 | 32 | 28 | 봄, 釋菜祭의 獻官이 되었으나 무고로 河東에 유배되다. ○ 지리산 일대를 유람하다. |
河東古稱爲海上山水鄕。於山有方丈。於水有蟾津。固已傳名天下。擅勝東南。其他如橫川之淸流。小琅之臺巖。奇偉秀絶。窈閴幽敻。而乃在乎下州小邑僻陋之邦。此幽潛之士。竆愁放逐之臣之所樂也。然其能恣意遊玩。以竆山水之樂而極深妙之趣者。有幾人哉。余以丁亥秋。屛居于府之橫浦邨。常苦積病纏繞。閉門岑寂。無意遊覽者。殆數月矣。一日。河友君正自晉陽來。津津說蟾津山海之勝。且要與一遊。余辭以前所云者。正强之曰。水可以瀉幽鬱。山可以望家鄕。奚必以屛縮爲活計耶。余應之曰唯。時紙所宋丈學海在座。亦期會誓海樓。至月二十四日甲寅。與君正及其弟君善。聯武而出。靑鞋布襪。葢從橫川始也川。出方丈山。迤邐八九十里。過康州北界。爲河南之月厓。月厓之下。得所謂蘆谷者。山停水轉。遂成一邨。前有巖壁。可望而可遊。過一曲爲翥鳳潭。白石盤陀。釣臺天成。石竇幽泉。琅然如鳴玉。此乃橫川之上遊。邨前西屛下有江亭。潭水可尋丈而紺淸泂澈。游魚可數。又數折而至南山。有一水自三花谷來。合流而爲新溪。其上蒼壁戌削。捫壁而入。石門高聳。劣容一人。中有隙地。幽閴閒暢。宜栖息也。尋舊路而下。過山阪。數三茅簷。隱見於脩篁叢竹間。絶似畫圖中。葢其蕭灑之致。竹之功爲多也。行數里。林麓陡絶。體勢回抱。中有巨竹千挺儼然相持。溪山如此。主管無人。殊可惜也。策馬而前。見長谷十里。平沙斥鹵。人言朔朢海潮且至。而時當下弦。失此勝賞。潮是天地至信之物。安能得之於時過後耶。遂投蘭洞。宿金丈應明家。君善有詩。遂和之。翌日乙卯。金丈騎馬前導。登德峙。騁望南浦。水雲浩渺。眼界爽塏。亦足以忘卻羇旅之懷也。踰渴鹿峙。放蟾江而下。萬竿黃茅。夾岸叢蒨。千章海松。傍路陰翳。碧波連天。搖蕩兩厓。泛影鵾鴻。戛然相鳴。蒲帆靑旗。首尾相接。而越商海賈。齊唱山花。此則北客所未嘗睹也。金丈顧而歎曰。有客有酒。柰此無肴何。有頃。一葉漁船。使風而至。遂買秀魚。至誓海樓。宋丈先待。同行繼至。切膾行酒。間以吟哦。亦浮生一日歡也。此地北通全羅。東接丹晉。實南蠻充斥之一都會也。昔在龍蛇。倭謂我人曰。汝國不守蟾江與鳥道。可謂無人矣。其後廟堂懲毖。陞郡爲府。藏舟積粟以備不虞。誠制勝之良具。禦侮之長筭。然兵在擇帥。地賴人和。則終古成敗。豈徒在於險與守也。酒數行。移筵入戰船中。船凡三層。周以柁樓。內有板屋。可藏戰士三五百。上覆茅茨。用避風雨。亦壯觀也。得四韻絶句詩凡五首。黃昏。入宿小琅山霽月菴。夜半。山月聳壑。竹影搖牕。不覺淸氣逼人。攬衣推枕而起。牕前脩竹。環列一壑。大者如椽。高者數十丈。所謂渭川千畝者。未知與此何如爾。有詩二首。朝後攜酒上臺。巖僧升觀從之。頂上有二巖。皆可坐三十餘人。是時鮮日三竿。早潮千頃。烟霧初收。風浪不起。余乃周遙盤礴。極目縱觀。白海茫茫。不見涯涘。其欲斷還續。蔓延于海口者。葛島也。如飛如集。停峙于蟾西者。鶩島也。屹然嶷然。砥柱中流者。大人島也。似鉤似梳。隱見江岸者。新月島也。曰雲島。曰遯島。曰櫓島之屬。不可殫記。蟾津一江。發源馬耳山。東注數百里。至求禮花開界。南折而入于海。奔流汪濊。灣回拱抱。若襟帶于嶺南然也。大人之傍。有羅鉢項。遯島之側。有露梁項。卽李統制鏖戰處也。東有昆陽之金鰲。南有南海之錦山。西有光陽之白雲。北有頭流山。千峯兢秀。萬壑爭奇。盤據于二道十州之間。眞韓公所謂中州淸淑之氣於是焉竆者。獨恨夫天王一峯。障蔽天半。花山眞面。莫得其彷彿。想望徘徊。自不禁陟屺望雲之思也。題一律。命升觀酌酒三行。正曰。吾輩江海之遊。三日無風。搖扇竆冬。揮汗絶頂。殆天意不偶然。歸路。與金宋二丈次第作別。與正善歸橫浦。暮後。朴子潤諸友皆會。遂與共約方丈之遊。爲旬月間且讀且遊之計。正善皆辭以故。朴聖源,聖淵兄弟。有同我之願。庚申。取路三花谷。登鬼峙。石路崎嶇。馬蹄凌兢。去親愈遠。懷思悽然。吟詩以撥悶。顧謂源,淵曰。中國南方。有鬼門關。逐臣遷客所經由也。今鬼峙如是之險。上有門巖。合而名鬼門關可乎。暮投岳陽。宿朴丈世
家。朴丈贈以瀟湘斑竹杖。而有淚痕三節。葢一歲染一節。儘可異也。作斑竹杖歌以謝之。辛酉。周覽鳳凰臺,黃鶴樓及岳陽樓遺址。次子美韻。望姑蘇城,寒山寺。大較岳縣諸名勝。皆倣中華。實平生所想慕而不得見者。過落鴈平沙。臨君山。其畔有洞庭湖。沮洳不及沒馬。周回纔聞鳴牛。問諸故老。昔者湖水深廣。商船海舶。靡不沿洄。今爲農夫野人所規占。名存實亡。無異永州之鐵爐步。噫。邱夷淵實。滄變爲桑。乃氣數之所使也。澤國魚鼈之鄕。化爲秔稌之場。趣味雖或不足。而財用賴以有餘。則其利害得失。誠判然矣。但河東之民。不富於古而反有貧竆之患。何哉。吟一絶。戛瀟湘岸。又吟一絶。入薪巖飮邨酤。
上取適臺。臺乃高麗韓公惟漢所築也。居人尙傳麗王召以錄事。公題詩巖上曰。一片絲綸來入洞。始知名字落人間。遂不知所終云。余嘗考麗史。公之隱智異山。在煕宗卽位之冬。時賊臣崔忠獻。爲太師門下侍郞。政歸私門。廢置在手。民心已壞。大亂將作。
此正賢士高蹈遠引之秋。而滿朝卿士。惟公獨能之。其高風峻節。輝映千古。至今使人起敬。足以廉頑而立懦矣。自臺㴑江二十里。得一蠧翁遺墟於德隱邨。頹垣破礎。無復存者。獨居氓若干戶。絡岸而家。又行數里。
有花開洞。一蠧翁詩。四月花開麥已秋者也。雖大江孤舟。未辦選勝之具。而頭流千萬疊。亦將次第登覽。則二樂之妙。不敢妄擬古人。而自卑之工。安知不爲登高之階耶。此地居人。或以木板覆屋。奇巖鬭水。古木連雲。山竹交陰。樵歌互發。令人有仇池桃源之想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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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이와집(龍耳窩集) 권뢰(權𡋃)생년1800년(정조 24)몰년1873년(고종 10)자경중(景中)호용이와(龍耳窩), 죽담(竹潭)본관안동(安東)특기사항허전(許傳)의 문인. 이원우(李源祐), 강윤제(姜允齊), 허임(許恁) 등과 교유
龍耳窩集卷之三 / 雜著 / 遊德裕山錄
上雙磎寺。其洞門大石。左刻雙磎。右刻石門。入寺祗審孤雲影幀。踈眉如畵八字。甚廣而中細末大。耳大且長。耳下有黑小髥。鼻大且肥。鼻下有黑密髥。而中分人中。口下有若干髥。頤下有髥。不多不長而兩頰圓滿。面色甚白。下入法堂。有一大碑立塲中。有唐新羅國知異山雙磎寺。敎謚眞鑑禪師碑銘幷序。前西國都統巡官承務郞侍御史內供奉賜紫金魚袋臣崔致遠奉敎撰。舊法堂門樓號靑鶴。鍾閣號八咏。與韓友歸宿其家。初二日。卽向國師庵。問佛日前路。過喚鶴㙜。卽上高峰至佛日。自洞口至此庵。堇八九里。左有靑鶴峰。右有白鶴峰。門前有東西松壇。其下絶壁。不知幾千尺。靑鶴峰內有三層瀑布。以樹木幽蔚。未能詳見。從東松壇脫冠解衣。艱辛下去。如鳥之攀木。蛾之附壁者百餘步。豈不危凜哉。坐下層瀑布盤石。仰之但見上二層。層各百餘尺。下層則左右石壁。中寬前合。其內之廣。可爲一升田地。而其上有天。如坐井之觀。手掬冽香。嗽口洗眼。因飮數三盃。胷襟淸爽。頓無塵慮。有頃。上來如下去狀。復坐松壇。拭汗舒嘯。其東數步。有翫瀑㙜。乃問龍湫所在。則居僧言此間有則有矣。而從白鶴峯壁間。或有觀者云。然僧徒元不見之。如此危地。愼勿強意觀之。卽下雙磎寺。而以昨日所觀。因爲戛去。到橋遵大路二十里。至花開市基。一帶長江。從西峽間出來。與方丈山之水合。向東馳走。其南則湖之求禮,光陽地也。
午後挾江而下。過取適臺。至岳陽。土人指點鳳凰臺,姑蘓城,寒山寺。而瀟湘班竹亦有之矣。岳陽之基址廣濶。左右峰巒羅張。長江橫前。白雲峰爲案。眞名勝之地。
自此逶迤屢日。至固城鶴洞金友家。卽從弟親査也。因訪某某。而崔兄同庚友。以天桃淵詩示之求和。忘拙次之。翌日過固之城府。偶逢詩朋。痛飮幾大白。及暮還家。行憊未振之餘。朴友書至。乃㫌閭記文事也。勤囑之下。難爲孤負。遂强意搆之。
[주-D001] 㝢居 : 寓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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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고집(月皐集) 조성가(趙性家)생년1824년(순조 24)몰년1904년(고종 41)자직교(直敎)호월고(月皐)본관함안(咸安)특기사항기정진(奇正鎭)의 문인. 정태원(鄭泰元), 이최선(李最善), 김녹휴(金祿休), 최익현(崔益鉉), 기우만(奇宇萬) 등과 교유
月皐先生文集卷之二 / 詩 / 雙七紀行 己巳四月。與鄭灆翁,河東寮,崔溪南同遊。 *동료(東寮) 하재문(河載文)
고종 | 5 | 1868 | 무진 | 同治 | 7 | 45 | 8월, 河啓賢, 河載文, 河在九, 崔琡民 등과 함께 智異山 大源菴을 유람하고 기행시를 짓다. |
고종 | 6 | 1869 | 기사 | 同治 | 8 | 46 | 4월, 하재문, 하재구, 최숙민 등과 함께 雙溪寺, 七佛寺를 유람하고 기행시를 짓다. |
靑巖途中
南風獵獵碧蘿衫。滿目溪山境不凡。夾路無非啼鳥樹。懸崖摠是出雲巖。襟懷滌盡三杯足。幽景搜來一句咸。縱愧吾儕輸李郭。蟾湖擬掛月中帆。
宿橫川齋
山光水色藹遐瞻。置一書樓景一添。襟懷輒到名區闊。詩格因逢好友纖。小塘魚浪仍回檻。芳樹禽聲只隔簾。料得主人薖軸意。塵愁肎許攢眉尖。
踰三蘤嶺
山勢拕東水抱南。天敎淑氣此間含。煙霞古窟神仙跡。桑柘深村野老談。蜀峽何年丁費五。岳陽今日客來三。深深萬古仇池穴。擬入花開洞裏探。
宿岳陽平沙亭
芒鞋穿盡到雲林。洞府依如小有尋。千古臺城吳楚色。一區山水竹絲音。虛汀鷺夢明沙迥。隔岸人煙古木深。疎拙敢希仁智樂。誅茅此地負初心。
自取適臺至花開市
花開十里落花洲。天遣吾曹作勝遊。台峀何人尋福地。武陵此日有漁舟。洞天杳杳歸靑鶴。㵎樾陰陰囀栗留。物外休言知己少。晴波泛泛一雙鷗。
宿雙溪寺
孤雲倏千古。林壑爲誰靑。日月壺中影。溪山鏡裏形。梵音穿樹細。茶夢聽鍾醒。桑宿猶餘戀。沉吟筆不停。
出石門
洞口跫音續。能敎仄逕平。㵎花殿春在。林鳥近人鳴。老石佛軀化。白雲客意明。吾於此山水。面目不曾生。
洗耳巖
洞府深深一逕長。天敎別界此間藏。溪山曾遇孤雲幸。花石皆緣一蠧香。澗蘚侵凌遊士屐。林霞隱映列仙裳。捫蘿攀壁知何趣。自謂非狂世謂狂。
七佛菴
三韓日月此禪家。啞字房深繞紫霞。萬壑常陰盤古樹。千年無恙佛頭花。諸天縹緲晴嵐滴。下界蒼茫宿霧斜。朗誦仙人推枕句。孤雲知是語非誇。
滯雨 二首
玉高臺上雨聲多。永日沉吟得句何。龍抱樓光蟠窟睡。鳥挐山色入林歌。道緣寶鏡新除垢。藻思鳴泉活動波。濈濈頭陀僧氣積。問誰能拾海珠磨。
野鶴寧爲飮啄勞。飄然遠擧碧霄高。松壇雲暖圓茶夢。石竇泉鳴送筆濤。樵父猶淸塵界迥。濁醪如聖勝區遭。君看司馬山川史。不在靑燈對案挑。
出山
雨過林梢鳥語交。翛然筇屐下平郊。藥苗多紫靈芝雜。松樹同靑老鶴巢。小逕沿流多曲折。高談乘醉自譽嘲。煌煌金袋知何物。始信孤雲到此拋。
別灆翁
飄然君自渭西橋。路入雙溪左轉遙。樵客猶傳靑鶴洞。仙翁已邈白雲謠。披林對酌幽花落。坐石聯詩永日消。聞說山陰山水好。莫敎餘興更寥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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月皐先生文集卷之一 / 詩 / 十月十六日。與鄭灆翁舜弼 煥敦 過介坪。
冬溫恰似早春時。鷲嶺斜陽馬背移。雲過林梢隨倦步。泉鳴石竇答新詩。
㵢翁往蹟憑誰問。蠧老遺村擧世知。此土誅茅齎宿志。嗟跎忽見鬢星垂。
[주-D001] 嗟跎 : 蹉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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梅泉集 卷二 / 詩○乙未稿 / 一蠧遺墟 【二首】
誰道斯文薄命騷?小詩猶復見人豪。
世間不乏千鸚鵡,有否風蒲一絶高?
寒、蠧微言百不傳,紛紛廡議感當年。
廢朝萬事勤吹索,大胆人無及五賢。
매천집 제2권 / 시(詩)○을미고(乙未稿) / 일두의 유허에서 2수 〔一蠧遺墟 二首〕
누가 불우한 유학자의 시라 말할 수 있으랴 / 誰道斯文薄命騷
절구 한 수에서도 호걸의 면모를 보겠는걸 / 小詩猶復見人豪
세간에 앵무처럼 잘 읊조린 자는 하 많건만 / 世間不乏千鸚鵡
풍포 한 절구만큼 고상한 시가 과연 있던가 / 有否風蒲一絶高
한두의 오묘한 말들이 전혀 안 전해지니 / 寒蠹微言百不傳
당시 분분했던 문묘 종사 의논이 느꺼워라 / 紛紛廡議感當年
폐조에선 만사를 흠집 찾기에 급급했지만 / 廢朝萬事勤吹索
대담하기가 오현에 미칠 사람 없고말고 / 大胆人無及五賢
[주-C001] 을미고(乙未稿) : 1895년(고종32), 매천의 나이 41세 때 지은 시고이다.[주-D001] 일두(一蠹) : 조선 전기의 유학자인 정여창(鄭汝昌)의 호이다. 자는 백욱(伯勗),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門人)으로 일찍이 지리산에 들어가 학문을 닦았고, 성종(成宗) 연간에 진사시(進士試) 및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檢閱)을 거쳐 시강원 설서(侍講院說書), 안음 현감(安陰縣監) 등을 역임하였다. 뒤에 1498년(연산군4),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김종직의 일파로 몰려 종성(鍾城)에 유배되었고, 죽은 뒤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다. 중종(中宗) 때 우의정에 추증되고, 광해군(光海君) 때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되었다.[주-D002] 풍포(風蒲) 한 절구(絶句) : 일두 정여창의 저술로 유일하게 전해 오는 절구 한 수를 가리킨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냇버들 바람에 나부껴 가벼이 한들거려라, 사월 달 화개동에 벌써 보리 가을이 되었네. 두류산 천만 봉을 두루 다 유람하고, 외론 배 띄우러 또 큰 강가로 내려가노라.〔風蒲獵獵弄輕柔 四月花開麥已秋 看盡頭流千萬疊 孤舟又下大江洲〕”[주-D003] 한두(寒蠹) :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과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을 합칭한 말이다. 김굉필의 자는 사옹(蓑翁),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소학(小學)》을 읽고 스스로 소학동자(小學童子)라 일컬었다. 성종(成宗) 연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뒤에 행의(行誼)로 천거되어 남부 참봉(南部參奉), 전생서 참봉(典牲署參奉), 군자감 주부(軍資監主簿), 감찰(監察) 등을 역임하고, 연산군 초기에 형조 좌랑에 이르렀다. 1498년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김종직의 일파로 몰려 희천(煕川)에 유배되었다가 뒤에 순천(順天)으로 이배(移配)되었으며, 1504년 갑자사화 때 사사(賜死)되었다. 정여창의 자는 백욱(伯勗),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김종직의 문인(門人)으로 일찍이 지리산에 들어가 학문을 닦았고, 성종 연간에 진사시(進士試) 및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檢閱)을 거쳐 시강원 설서(侍講院說書), 안음 현감(安陰縣監) 등을 역임하였다. 뒤에 1498년(연산군4),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일파로 몰려 종성(鍾城)에 유배되었고, 죽은 뒤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다. 두 사람 모두 중종(中宗) 때 우의정에 추증되고, 광해군(光海君) 때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되었다.[주-D004] 폐조(廢朝) : 여기서는 광해군 시대를 가리킨다.[주-D005] 오현(五賢) : 동방(東方)의 오현으로 불리는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을 가리키는데, 1610년(광해군2)에 위의 다섯 사람을 문묘에 종사(從祀)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임정기 (역) |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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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천집 제2권 / 시(詩)○을미고(乙未稿) / 아침 일찍 악양을 지나다〔早過岳陽〕
큰 강 한가운데 갑자기 웅덩이가 생겨 / 大江中忽陷
돌아 흐른 물결이 파란 언덕을 이루네 / 洄浪綠成岸
산봉우리 틈새로 아침 햇살 비추고 / 峰缺暾斜映
수증기는 노을 졌다 막 흩어지누나 / 水蒸霞初散
강길 따라 아침 나무꾼 붐비어라 / 沿流早樵競
배는 무겁고 돛대는 반쯤 가려졌네 / 舟重檣亞半
바람 소리 우수수 갈대밭 대숲 사이엔 / 淅淅蘆篁間
오리 거위가 시끄러이 울고 쪼고 하네 / 呷唼鳧鵝亂
길 가는 나는 아침 풍경을 좋아해 / 行人愛朝景
때때로 지팡이 짚고 바라보노라 / 時復支筇看
평생에 묘호를 상상만 하다 보니 / 平生想湖泖
정신은 가 있고 글은 책상에 있는데 / 神往書在案
이 경계가 응당 그곳과 같으련만 / 此境應與同
모자란 건 삼고와 짝할 만한 이로세 / 所欠三高伴
삽암의 그림자 우뚝하기도 해라 / 峨峨鍤巖影
동정호 가에 푸른빛이 떨어졌네 / 靑落洞庭畔
강가에서 이슬 젖은 국화를 따서 / 臨江掇露菊
삼가 한유한에게 받들어 올리노라 / 敬薦韓惟漢
[주-C001] 을미고(乙未稿) : 1895년(고종32), 매천의 나이 41세 때 지은 시고이다.[주-D001] 악양(岳陽) : 경남 진주(晉州)의 서쪽에 위치한 현명(縣名)인데,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 현을 하동군(河東郡)에 예속시켰다.[주-D002] 묘호(泖湖) : 춘추 시대 오(吳)의 송강현(松江縣) 서쪽에 위치한 호수 이름인데, 상, 중, 하의 삼묘(三泖)로 일컬어지는바, 물이 많고 경치가 좋기로 유명하다. 송(宋)나라 하원(何薳)의 《춘저기문(春渚紀聞)》에 의하면 “이른바 삼묘라는 곳을 지금 보니, 모두 넓고 큰 호수로, 봄, 여름에는 연과 부들이 널리 퍼져 있어 물 위에 서늘한 바람이 일어나고, 가을, 겨울에는 갈대숲이 무성하고 고기를 낚을 만한 섬들이 줄 이어 있어 강호의 썰렁한 풍경은 아예 없으니, 이른바 겨울에는 다습고 여름에는 서늘하다는 것이 정히 그 아름다움의 극치라 하겠다.〔今觀所謂三泖 皆漫水巨浸 春夏則荷蒲演迤 水風生涼 秋冬則葭葦藂蘙 魚嶼相望 初無江湖凄凜之色 所謂冬暖夏涼者 正盡其美〕”라고 하였다.[주-D003] 삼고(三高) : 춘추 시대 월(越)의 범려(范蠡), 진(晉)나라 때 장한(張翰), 당(唐)나라 때 육귀몽(陸龜蒙)이 모두 오(吳) 지방 사람이므로, 송(宋)나라 때에 오강(吳江) 사람들이 이 세 사람을 고사(高士)라 하여 삼고사(三高祠)를 세우고 그들을 제사했던 데서 온 말이다. 《齊東野語 卷7》[주-D004] 삽암(鍤巖) : 하동군 섬진강 변에 있는 바위 이름으로, 고려 시대의 은사(隱士) 한유한(韓惟漢)의 전설이 얽혀 있다. 조식(曹植)의 〈유두류록(遊頭流錄)〉에 의하면 “별안간에 악양현(岳陽縣)을 지나는데, 강가에 삽암이란 것이 있었으니, 바로 녹사(錄事) 한유한이 살던 곳이다. 한유한은 고려가 곧 망할 것을 알고는 처자를 데리고 이곳에 와서 살다가 조정에서 대비원 녹사(大悲院錄事)로 부르자, 어느 날 밤에 집을 떠나 도망갔는데, 어디로 갔는지 종적을 모른다고 한다.”라고 하였다. 《南冥集 卷2》[주-D005] 한유한(韓惟漢) : 고려 인종(仁宗) 때 사람으로, 처음에 벼슬을 하다가 이자겸(李資謙)의 횡포가 날로 심해지는 것을 보고는 장차 화란이 일어날 것을 예측하고, 가족을 데리고 악양현(岳陽縣)에 숨어 살았는데, 그 후 조정에서 그의 재주를 아껴 사방으로 수소문하여 찾았으나 그는 끝내 숨어 버리고 세상에 나가지 않았다. 세인(世人)들은 그가 신선이 되어 갔다고도 하는데, 후일 지리산(智異山)의 화엄사(華嚴寺), 연곡사(燕谷寺), 쌍계사(雙磎寺) 등지에서 그의 자취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또 그가 일찍이 최치원(崔致遠)의 도를 이어받아 삼신산(三神山)으로 알려진 금강산(金剛山), 지리산, 한라산(漢挐山)을 두루 다니면서 신선을 따라 노닐었다고도 한다.
ⓒ 한국고전번역원 | 임정기 (역) |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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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사집(浮査集) 성여신(成汝信)생년1546년(명종 1)몰년1632년(인조 10)자공실(公實)호부사(浮査)본관창녕(昌寧)특기사항남명(南冥) 조식(曺植), 구암(龜巖) 이정(李楨)의 문인
浮査集 卷五 / 雜著、疑 / 方丈山仙遊日記
광해군 | 8 | 1616 | 병진 | 萬曆 | 44 | 71 | 봄, 琴山洞約이 이루어지다. ○ 養蒙齋와 志學齋를 세워 학동을 교육하다. ○ 가을, 鄭大淳, 朴敏, 文弘運, 李重勳 등과 함께 頭流山을 유람하다. |
광해군 | 9 | 1617 | 정사 | 萬曆 | 45 | 72 | 4월, 다시 頭流山을 유람하다. |
萬曆丙辰秋,浮査野翁,將遊頭流,約與同之者,玉峯鄭熙叔、凌虛朴行遠、梅村文汝幹,而從之者,鑮也、錞也,聞風而興起者,鳳鶴臺姜士順、洞庭湖李謹之,其人也。
九月二十四日,辛卯。翁由浮査亭,啓行
三十日,丁酉。隣翁李蕙、金淑男等,佩酒來見。李善着棋,汝幹再戰再北。朝飯後,發到君山前,望見鍤巖頭,張幕而坐者,謂必是李謫仙謹之也。及到鍤巖,則非謹之也,乃李祥也。祥武人,中癸未別擧,與姜長鬐同年者也。聞吾等至,爲設酒肴來待之。酒兩鐏、肴六笥,水陸山海之味,無不有飮未盡。日已晩,促觴而行。詠鍤巖舊跡。【韓錄事諱惟漢,麗季人,見麗室將亂,來隱此山中,卜居鍤巖上。後以大悲院錄事徵之,書一句於壁曰:“一片絲綸來入洞,始知名字落人間。” 遂踰墻而走,不知所之。】 “訪古騷人雪滿頭,來登先哲舊林丘。天連上下猶湘浦,地坼東南似岳州。遯世淸標靑嶂立,踰墻高躅白雲浮。一聲長笛江山老,籚荻花飛入晩秋。”
時觴放未半,有一人出舊花開,過岳陽縣,經平沙驛,掠君山而來者。望之不知誰何,迨傾蓋,則乃李謹之也。謹之名重訓,故李相國俊民之猶子。家在京城,不向朱門,求來入碧山,棲其中。可知曾於桂洞,已結同遊之約,故佩酒而來。與之飮,飮旣,發向陶灘。【鄭先生諱汝昌,燕山朝,卜居陶灘上。其後以佔畢齋門人,罹戊午禍。南冥先生所謂“此去鍤巖十里地。明哲之幸不幸,豈非命耶?” 魚灌圃詩曰:“竹林半掩鄭公廬,想得當時卜永居。正坐中年猿鶴怨,老來不食此江魚。”】 過陶灘時,有吟曰:“鄭先生是儒林匠,晩卜幽貞溪水西。落日停驂傷往事,雲容水色共悽悽。” 遂發行,到柯亭,日已沒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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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곡집(晩谷集) 조술도(趙述道)생년1729년(영조 5)몰년1803년(순조 3)자성소(聖紹)호만곡(晩谷)본관한양(漢陽)특기사항이상정(李象靖), 김낙행(金樂行)의 문인. 김종덕(金宗德), 유장원(柳長源), 이종수(李宗洙), 정종로(鄭宗魯) 등과 교유
晩谷先生文集卷之一 / 詩 / 出尋眞洞。又向山陰。
吹笛臺前雙瀑布。風流巖上一孤松。洞天領略煙霞盡。醉下山陰暮雨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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晩谷先生文集卷之九 / 雜著 / 南遊錄
其中有采虎巖吹笛臺風流巖者。最曰奇勝。而十里懸流。倒射於銀缸石泓之中。何處非風流吹笛之地也。其曰采虎巖者。有石臼。寺僧傳云昔有一道僧。縛虎塡其穴。因以名云。遂出安義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