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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남미 원주민 이야기
아메리카대륙에는 현재 약 6천만 명의 원주민, 곧 인디언(스페인어로는 인디오)이 살고 있다. 멕시코에 가장 많은 약 25백만 명이 거주하고, 볼리비아(6.8백만), 과테말라(6백만), 페루(6백만), 에콰도르(3.4백만)의 순서로 인디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 멕시코와 과테말라의 원주민들은 주로 옛 마야 문명과 아스텍 제국을 건설한 주인공들의 후예이며, 볼리비아, 페루, 에콰도르에 살고 있는 인디오들은 잉카 문명을 포함한 옛 안데스 문명을 꽃피웠던 조상들의 후손들이다.
콜럼버스의 침략 이전의 중남미 역사는 이미 살펴본 북아메리카의 역사와 크게 다를 게 없다. 1820년 무렵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나 독립국이 된 중남미의 수많은 국가들은 북아메리카의 미국이나 캐나다와는 달리 극히 최근까지도 하나같이 심각한 정치적/사회적 혼란을 겪어 왔다. 식민지배 동안 노예로 끌려가거나 최하층 계급인 농노의 신분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던 원주민들은 이와 같은 정치/사회적 불안정으로 인하여 더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1800년대 후반 미국의 서부개척시대에 벌어졌던 대평원전쟁과 유사한 성격의 인디어의 땅 뺏기 전쟁은 칠레의 중남부와 아르헨티나 남부 파타고니아 땅에서도 발생하였다. 특히 1960년대 이후 과테말라에서는 경제적 소외계층이 일으킨 공산주의 혁명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반란군과는 무관한 일반인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여 마야계 인디언 수십만 명이 희생되었다.
중남미 곳곳에서는 원주민들이 과거 빼앗긴 권익을 되찾기 위하여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상당한 성과도 거두고 있다. 페루에서는 2001년과 2011년에 원주민 출신 대통령이 선출되었으며 볼리비아에서는 2005년에 압도적인 지지율로 당선된 원주민 출신 대통령이 이후 두 차례의 재선에도 성공하여 2019년까지 임기가 보장돼 있다. 인디언의 인구가 절반 이상이 되거나 원주민이 최다 인종인 볼리비아, 페루에서는 케추아어와 아이마라어 등의 원주민 언어를 공용어로 인정하고 있다. 나라별로 차이가 있으나, 대체로 인디오들은 주류사회와 동떨어져 수도, 전기, 의료, 교육 등 문명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있으며 문맹의 비율도 매우 높은 실정이다.
안데스 지역의 고대문명
세계 6대 고대문명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는 안데스문명(Andean civilizations)은 페루의 중부 태평양 연안에서 가까운 카랄(Caral)지역에서 시작되었다. Norte Chico 문명으로 이름 붙여진 이 문명은 BC3200년 무렵 시작되어 BC1800년 무렵 쇠퇴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노르테 치코 문명은 세계 최초의 고대문명으로 인정되고 있는 수메르 문명보다는 약 1000년 뒤에 출현하였는데 이 시기는 이집트 피라미드 문명과 비슷한 때이며 메소아메리카의 올멕문명보다는 2000년이나 앞선다고 한다.
(나스카 시대에 그려진 거대한 원숭이 그림)
노르테 치코 문명을 이어 BC1500년 무렵에는 안데스 고산지대에서 차빈(Chavin) 문명이 일어나 BC200년경까지 존속하였으며 페루의 북부 해안지대에서는 쿠피스니퀘(Cupisnique) 문명이 BC1000년부터 BC200년까지 번성하였다. 뒤이어 Paracas, Nazca, Wari, Chimu, Moche 등의 고대문명이 해안 지역에서 발생하였다. 페루와 볼리비아의 국경을 이루고 있는 티티카카호수 주변에서는 BC300년 무렵부터 기원후 300년경까지 Tiwanaku 문명이 번성하였다. 우리에게 비교적 잘 알려져 있는 잉카문명은 1438년 잉카제국의 건국과 함께 시작되어 스페인에게 정복당한 1533년까지 지속되었다. 잉카 문명 역시 다른 문명과 마찬가지로 이전에 꽃피웠던 다양한 안데스 문명들의 바탕위에서 더욱 발전된 형태로 탄생한 문명이다.
(잉카제국의 영토)
잉카제국의 후예 케추아족
잉카제국을 세운 주인공은 케추아(Quechua) 인디오들이다. 케추아족의 총인구수는 약 11백만 명으로서 페루(3.5 백만), 볼리비아(2.9백만), 에콰도르(2.6백만)에 주로 거주하고 나머지는 아르헨티나와 스페인 등지에 살고 있다. 페루와 볼리비아에서는 케추아어 등 원주민의 언어가 공용어로 인정받고 있다. 케추아족도 다른 인디언 부족과 마찬가지로 과거 부당하게 빼앗긴 토지 등을 되찾기 위한 투쟁을 계속해 오고 있다.
(마추픽추를 방문한 톨레도 대통령)
페루에서는 케추아족 출신 대통령을 두 명 배출하였다. 2001년부터 2006년까지 톨레도(Alejandro Toledo)가 대통령 직에 올랐으며 우말라(Ollanta Humala)도 2011년부터 2016년까지 대통령직을 수행하였다. 두 대통령은 모두 원주민의 권익과 지위 향상을 위하여 크게 노력하였으나 기대했던 것만큼은 성과를 올리지는 못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톨레도 대통령은 남미 각국의 대통령들을 초청하여 잉카제국의 대표적인 유적인 마추픽추에서 특별한 취임행사를 갖기도 하였다. 스탠포드 대학교에서 경제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기도 한 톨레도는 신자유주의를 신봉하는 보수 우파 정치인으로서 원주민들도 주류사회로 통합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반면에 우말라 대통령은 중도좌파의 정치성향을 가졌으며 군복무 시절 주한 페루대사관의 무관으로 근무한 적도 있다. 불행히도 톨레도 대통령은 재임 시절 브라질의 한 건설회사로부터 큰 금액의 뇌물을 받은 혐의가 들어나 체포 영장이 발부된 상태인데, 부인의 모국인 이스라엘에 피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볼리비아의 아이마라 원주민 출신 대통령
볼리비아의 인구 약 11백만 명 중 백인은 5%에 불과하며 원주민과 메스티조를 합치면 90%의 비중에 근접하고 있다. 원주민 중에는 케추아족이 가장 많고 아이마라족(Aymara)이 그 다음으로 많다. 이 밖에 과라니족 등 수십 종류의 원주민 부족들이 거주하고 있다. 볼리비아는 국호(Plurinational State of Bolivia; 볼리비아 다인종국가)에서도 나타내고 있듯이 수많은 민족들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고 있는 대표적인 다인종 국가이다. 이 나라에는 스페인어 외에 케추아어와 아이마라어를 포함한 36개의 원주민 언어를 공식언어로 인정하고 있다. 2001년 통계에 의하면 전국민의 20% 이상이 케추아어를 그리고 15% 정도가 아이마라어를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케추아어로 방송하는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채널도 갖추고 있다. 볼리비아는 원주민들이 제대로 주인 행세를 하며 살아가고 있는 유일한 국가로 보인다. 원주민의 권익이 보호받을 수 있게 된 데에는 2006년부터 10년 넘게 대통령직을 수행하고 있는 원주민 출신 모랄레스(Evo Morales) 대통령의 공이 크다.
(모랄레스 볼리비아 대통령)
53.7%의 지지를 얻어 2006년 대통령에 취임한 모랄레스는 크게 두 축으로 개혁을 추진했다. 먼저 경제정책은 더 이상 시장만능주의에 근거한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정책으로는 원주민 등 소외계층의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사회주의 경제정책을 도입하였다. 다른 한 축으로는 원주민이 원할 경우 원주민의 자치권을 과감하게 인정하였다. 이러한 개혁정책의 성과로 원주민의 빈곤률은 크게 개선되고 문맹률 역시 많이 감소하는 등 전통적으로 사회/경제적 약자에 머물러 있었던 인디언과 메스티조의 삶의 질은 크게 높아졌다. 이러한 공적에 힘입어 2009년 4월에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는 64.2%라는 기록적인 지지율로 재선에 성공하였다. 모랄레스는 2014년 선거에서도 당선되어 세 번째 임기를 시작하였다.
모랄레스 대통령의 축구 사랑은 유별나서, 현직 대통령의 신분으로 축구 선수가 되기도 했다. 2008년에는 볼리비아의 2부 리그에 소속된 볼리비아 경찰 산하의 축구 클럽과 계약을 맺고, 축구 선수로서 정식 데뷔하였다. 이는 한 나라의 현직 국가 원수가 현역 운동 선수로서 데뷔하여 경기에 출전하는 최초이자, 유일한 사례였기 때문에 언론의 주목을 끌었다. 그리고, 2010년에 있었던 볼리비아의 라파스에서 열린 친선 축구 경기에서는, 경기 도중에 자신의 정강이를 걷어찼다는 이유로 상대 선수의 급소를 걷어차 물의를 빚자, 해당 선수에게 사과하는 해프닝도 발생했다.
아르헨티나 의사출신 체 게바라가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 공산혁명을 성공시킨 후 다음 혁명대상으로 볼리비아를 선택한 데에는 볼리비아 원주민 등 소외계층을 빈곤의 굴레로부터 구출해내는 일이 절실하다는 신념을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어떻게 보면 게바라의 꿈을 모랄레스가 합리적이고도 민주적 절차를 통해서 이룩한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모랄레스는 볼리비아에서 가장 유명하고 존경받는 사람으로 온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다.
영화 ‘미션’ 속의 과라니족
1986년에 개봉된 영화 ‘미션’(The Mission)은 과라니(Guarani)족의 슬픈 역사를 다루고 있다. 극화하는 과정에서 의도적으로 사실과 다소 다르게 연출한 부분도 적지 않으나 1750년 무렵의 과라니 인디언의 사정을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된다. 과라니족의 총인구수는 약 27만 명으로서 파라과이를 중심으로 볼리비아,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의 국가에 흩어져 살고 있다. 파라과이 인구의 약 95%는 메스티조 인종인데 이 중 대부분은 과라니계 혼혈인이다. 2015년 자료에 의하면 파라과이에서는 전 국민의 87%가 스페인어를 사용할 수 있는 반면에 과라니어를 구사할 수 있는 인구는 그보다 많은 90%에 달한다고 한다. 두 언어 모두 공용어로 지정돼 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가장 최후까지 살아남을 아메리카 원주민 언어로 과라니어를 꼽고 있다.
(과라니족을 위한 30 개의 미션)
포르투갈인들은 과라니족을 대상으로 한 노예사냥으로 악명이 높았다. 과라니족은 노예사냥의 희생양이 되지 않기 위하여 스페인의 예수회 신부들이 설립한 성당 공동체(mission)로 몰려들어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농장 등에서 노동을 제공함으로써 생계를 보장받을 수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1732년 현재 산미구엘(San Miguel) 미션을 포함하여 총 30 개의 미션에서 141,252 명의 과라니가 예수교를 믿으며 생활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1750년 체결된 마드리드조약(Treaty of Madrid)에 의거 옛 스페인 땅 중 일부가 포르투갈의 영토로 넘어가면서 그 곳에 있던 미션을 폐쇄하고 과라니족들을 옛 고향으로 돌려보내야 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러한 조치에 과라니족과 예수회 신부들은 강력히 항의하였다. 극중에서는 성직자들도 과라니와 함께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연합군에게 맞서 싸우는 장면이 나오나, 실제로는 예수회 신부들은 상부의 명령에 순응하여 미션을 떠나고, 과라니족만이 격렬하게 저항하였다고 한다. 사가들은 이 분쟁을 과라니전쟁(Guarani War) 또는 ‘7 인디오보호시설 전쟁’(War of the Seven Reductions)이라 부른다. 1756년 2월에 벌어진 이 전쟁에서 과라니족은 1511 명이 사망한 반면 백인측은 단 4 명만 사망하였다. 분쟁의 무대가 되었던 산미구엘 미션(São Miguel das Missões)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산 미구엘 미션;São Miguel das Missões)
칠레의 마푸체 인디언
현재 남미에는 약 1.7백만 명의 마푸체(Mapuche) 인디언이 살고 있다. 이 중 1.5백만 명은 칠레에 거주하고 나머지 20만 명은 아르헨티나에서 생활하고 있다. 잉카제국을 점령한 스페인군은 남진을 계속하여 1841년에 오늘날 칠레의 수도인 산티아고를 건설하고 1550년 무렵부터는 더욱 남하하여 마푸체족의 영역을 침범하기 시작하였다. 마푸체족은 수많은 백인 정착촌을 파괴하는 등 끈질기게 스페인의 진출을 저지하였다. 한편, 마푸체족은 안데스산맥을 넘어 아르헨티나로 그들의 활동 무대를 더욱 확장해 나갔다. 이와 같이 강력한 저항에 부딪친 스페인 식민세력은 마푸체족의 영토 점령을 포기하였다. 따라서 스페인은 아라우카니아(Araucania), 곧 마푸체족의 땅을 건너뛰어서 마젤란 해협에 이르는 칠레의 남부지방을 개척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스페인 식민시대에는 마푸체 족이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던 셈이다.
1810년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한 칠레는 처음 50년 동안에는 북부와 산티아고를 중심으로 한 중부 지방 개발에만 주력하였다. 이 지역에서의 개발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칠레 정부는 이제 남부지역에 눈을 돌리기 시작하였다. 그 때까지도 허리가 잘려 있는 국토를 완전히 연결시킬 필요성도 있었고, 더 많은 이민자들에게 제공할 농지나 목초지를 조성하기 위해서는 아라우카니아 개척이 불가피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이러한 칠레의 국토확장 정책 추진은 19세기 후반에 펼쳐진 미국의 서부개척에서 자극을 받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칠레의 인디언 땅 수탈은 미국에서 했던 것처럼 인디언들을 일정구역(reduction이라 불리는 인디언보호구역) 에 수용하고 나머지 광대한 땅을 백인 정착민에게 나누어 주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멀쩡한 자신의 활동 무대를 남이 빼앗아 가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을 민족이 어디에 있을까? 마푸체족은 장기간에 걸쳐 칠레 정부군과 전투를 벌였다. 전투력 면에서 도무지 상대가 될 수 없었던 마푸체 족의 패배는 불을 보듯 뻔 한 일이었다. 칠레가 불리비아를 상대로 태평양전쟁(War of the Pacific;1879-1883)을 벌이고 있는 동안 이 지역에서의 칠레군의 전력이 다소 약해진 틈을 이용하여 마푸체가 다시 한 번 반격을 시도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 1883년 7월에 칠레 정부는 아라우카니를 완전히 정복하였다고 선언하였다.
아라우카니아 지역이 완전히 정복된 뒤에도 이 지역에서는 토지 소유권을 둘러싸고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때때로 폭력사태로 확대되기도 한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정부의 관련 위원회(Commission for Historical Truth and New Treatments)에서는 2003년에 특별보고서를 발표하였다. 동 보고서는 원주민의 토지소유권과 전통문화 보전을 인정해 줄 것을 주장하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사막 정벌(Conquest of the Desert)
기후 등 자연환경이 사람이 살기에 적합한 곳에 힘없는 문명수준이 낮은 원주민이 살고 있다면 어김없이 백인들은 총과 균과 쇠의 힘으로 원주민을 몰아내고 백인의 나라를 세워왔다.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남아공 등등이 그러한 범주에 속한다. 남아메리카에서는 이와 비슷한 케이스를 아르헨티나와 칠레와 브라질에서 찾을 수 있다. 특히 아르헨티나와 칠레 두 나라는 기후조건이 유럽과 비슷하고 토양 역시 비옥한 지역이라 자연스레 유럽인들의 이민 선호지역으로 꼽혔다. 이런 사실은 두 나라의 인종별 인구 구조를 보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아르헨티나의 경우 백인의 인구비중이 80%에 근접하고 있으며 칠레도 백인의 비중이 절반이 넘는다.
남아메리카 남부에 위치한 파타고니아 지방은 스페인의 식민지배가 끝난 뒤에도 상당기간 백인들이 진출하지 않고 아르헨티나와 칠레 간에 영토의 경계가 모호한 상태에 있었다. 1860년대에 들어 칠레가 아라우카니아 지방 개척을 본격화하자 아르헨티나는 혹시라도 파타고니아 지방의 영유권이 위태로워지지나 않을까 걱정하게 되었다. 더 많은 유럽 이민자들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이미 개척된 북부의 팜파스지방에 더하여 남부의 파타고니아 지방의 개척도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 미국이 대평원 인디언전쟁을 겪으면서 서부개척에 열을 올리고 있던 점도 자극제가 되었을 것이다.
1872년 한 무리의 인디언들이 백인 정착촌을 습격하여 300명을 죽이고 20만 마리의 가축을 약탈해서 칠레로 내다팔았다. 1875년도에는 전보다 더 심하게 400명의 정착민을 살해하고 300명을 납치하고 30만 마리의 가축을 훔쳐갔다. 이러한 사건들은 파타고니아 원주민 토벌의 빌미를 제공하였다. 당시 전쟁부장관이던 알시나(Adolfo Alsina)는 인디언들의 습격을 막기 위하여 폭 3m 깊이 2m의 도랑(흔히 “Alsina Trench”라 부름)을 총 374km에 걸쳐 건설하였다.
알시나의 후임으로 전쟁부장관이 된 로카(Julio Argentino Roca)는 알시나와는 달리 적극적으로 인디언들을 박멸하기로 마음먹고 1878년부터 1879년까지 수차레 인디언 토벌전쟁을 벌여 수천 명의 인디언을 살해하고 수 만 명을 강제로 이주시켰다. 이후로도 무력사용이 몇 차례 더 있었으며 마지막 정복전쟁은 1884년 10월에 발생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인디언과의 전쟁을 ‘사막의 정복’(Conquest of the Desert)로 사가들은 이름을 붙쳤다.
이 전쟁의 성격에 관하여는 아직까지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이를 비난하는 측은 이 사건이야말로 명백한 인간청소(genocide)에 해당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옹호하는 측에서는 인디언들에게 문명의 기회를 제공한 것이라고 우기고 있다. 이런 논쟁에도 불구하고 로카 장관의 활약상을 그린 그림은 100 페소 지폐 뒷면 도안으로 이용되고 있다. 이 때 정복된 파타고니아 지방은 밀밭으로 개간되어 아르헨티나는 19세기 후반 세계적인 농업대국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과테말라 원주민 학살
과테말라의 현재 인구는 약 17백만 명이다. 이 중 약 40%가 마야계 인디언이다. 과테말라는 1960년부터 1996년까지 36년간이나 긴 내전을 겪었다. 극심한 빈곤으로부터의 해방을 외치며 마야 인디언을 포함한 소외계층이 공산혁명을 위한 무장 반란을 일으켰다. 내전은 주로 밀림 안에서의 게릴라전으로 전개되었다. 미국으로부터의 절대적인 지원을 등에 업은 정부군과 쿠바와 니카라과로부터 도움을 받는 반군 간에 장기간의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에 수많은 무고한 민간인 마야 인디언들이 학살당하거나 행방불명되고 셀 수도 없이 많은 원주민 마을이 파괴되었다. 이 내전으로 인한 사망자 수는 20만 명 이상에 달하였으며 10만 명 이상의 여성이 성폭행을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내전이 한창이던 1982년에 원주민 여성 멘추(Rigoberta Menchú)는 내전의 참상을 고발하는 ‘My Name is Rigoberta Menchú and this is how my Conscience was Born’이라는 다소 긴 제목의 구술 서적을 발행하였다. 멘추는 이 공로를 인정받아 1992년도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Rigoberta Menchú)
긴 내전은 1996년 12월 과테말라 정부와 반군(Guatemalan National Revolutionary Unity) 간에 평화협정이 체결됨으로써 종식되었다. 반군지도자와 과테말라 대통령은 공로를 인정받아 유네스코가 수여하는 평화상을 공동으로 수상하였다. 평화협정 체결 이후 반군 조직이었던 과테말라혁명당은 제도권 정치에 참여하여 대통령 선거에도 후보를 내고 있으며 몇 명의 국회의원도 배출하고 있다.
브라질의 미접촉 부족
브라질의 아마존 밀림 오지에는 다른 종족과는 전혀 교류가 없이 외부세계와 단절되어 살아가고 있는, 이른바 미접촉 부족(uncontacted tribes)이 다수 존재한다. 2007년도 관계기관의 자료에 의하면 67 개의 미접촉 부족의 존재를 확인하였다고 한다. 미접촉 부족들은 전염병에 대한 면역력이 없어서 가벼운 감기만 걸리더라도 죽음에 이르기 쉬운 만큼, 외부 세계는 가능한 한 이들과의 접촉을 피하고 있다. 미접촉 부족이었던 파나라(Panara) 부족이 1970년대에 외부세계에 알려진 뒤 2년 안에 70% 이상이 전염병으로 사망하였다고 한다. 브라질에 가장 많은 수의 미접촉 부족이 살고 있으며 다음으로 많은 미접촉 부족이 뉴기니아에 거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