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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신앙에 혼합된 미신 요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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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신 요소의 위험성
30여 년 전 낙동강 페놀 오염사건은 온 나라를 충격과 공포에 빠트렸다. ‘위키 백과’사전은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구미 국가산업 단지 안의 모 전자회사가 1991년 3월 14일, 4월 22일 두 차례에 걸쳐 강한 독극물인 페놀(phenol) 약31.3톤을 낙동강으로 몰래 흘려보내 강을 오염시켰다. 이 페놀은 대구지역의 상수원으로 사용되는 취수장으로 유입되어 염소(Cl)를 이용한 정수처리 과정에서 클로로 페놀(chlorophenol)로 변하면서 악취를 유발하였다. 페놀은 낙동강을 타고 밀양과 함양, 부산까지 흘러 내려가면서 낙동강 수계에 있는 약 1천만 명의 영남지역 주민들이 페놀 오염 수돗물로 극심한 고통을 겪어야 했다.” 낙동강의 많은 강물이 지극히 적은 양의 독극물에 오염되어 물고기들은 떼죽음을 당했고, 시민들은 악취로 인해 수돗물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이로 인해 시민들이 겪은 고통은 엄청났다.
기독교 신앙 안에도 페놀 같은 불순물에 많이 오염되어 있는데, ‘미신(迷信)’이라고 하는 오염물이다. 이 미신에 일단 오염이 되면 고유의 기독교 신앙이 전혀 다른 종교로 변질될 수 있다. 안타깝게도 한국 교회 안에는 미신 요소가 가미된 혼합 형태의 이질적 신앙이 존재하고 있다. 국어사전은 ‘미신(迷信)’을 “종교적으로 보편성을 지니지 못하며 일반인들 사이에서 헛되고 바르지 못하다고 인정되는 믿음이나 신앙”이라고 정의한다. 올바르지 않은 신앙(종교사상)인 미신에 몰입하게 되면 그 사람은 파멸로 떨어지거나 신앙의 주체인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이질적 신앙으로 이탈하게 된다. 열왕기하 17장 18절에 “이와 같이 그들이 여호와도 경외하고 또한 어디서부터 옮겨왔든지 그 민족의 풍속대로 자기의 신들도 섬겼더라”고 했듯이 북 왕국 이스라엘은 앗수르의 이주 정책에 의하여 종교까지 혼합되어 변질되었다. 이처럼 기독교의 순수 신앙이 오염된다면 상상을 초월하는 무서운 결과를 피할 수 없게 된다.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 중 서머나와 빌라델비아를 제외한 다섯 교회(계 2:1∼3:22)와 수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던 고린도 교회가 그랬듯이 기독교 신앙의 순수성을 살피는 문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한시도 소홀해서는 안 될 과제다.
2. 기독교 신앙 안에 혼재되어 있는 미신 요소들
귀신(鬼神) 신앙, 조상숭배(祖上崇拜), 복술(卜術) 신앙, 주술(呪術) 신앙, 기복(祈福) 신앙, 물신(物神) 숭배, 백일기도(百日祈禱), 요행(僥倖) 신앙, 합리주의와 다수결(대세) 등 기독교 신앙 안에 침투하여 혼합된 미신 요소는 생각 밖으로 다양하다. 안타깝게도 현대의 기독교 신앙에는 많은 부분에 오염이 되어 있다. 이럴 때는 “은에서 찌꺼기를 제하라 그리하면 장색의 쓸 만한 그릇이 나올 것이요”(잠 25:4) 라는 성서의 가르침처럼 가능하면 빨리 찌꺼기를 제거해야 한다.
1) ‘귀신 신앙’과 ‘조상숭배’
‘귀신 신앙’은 죽은 사람의 넋과 혼을 섬기는 것이고, ‘조상숭배’는 돌아가신 조상에게 제사를 드리면서 복을 구하는 원시적인 신앙이며 이러한 신앙 형태는 범세계적이다. 많은 사람들이 귀신의 존재를 ‘죽은 사람의 혼’이 현세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믿고 있다. 성서에는 귀신의 존재를 죽은 사람의 혼이라고 가르치지 않지만, 이 글에서 말하려는 귀신 신앙은 죽은 사람의 혼을 섬기는 행위를 말한다. 이 두 유형의 차이점은 귀신 신앙은 죽은 사람의 혼이나 넋을 잘 모시면 복을 가져다 준다고 믿는 것이며, 조상숭배는 특정 집안의 혈족 가운데 죽은 조상이 그 가문에만 복을 준다는 신앙이다. 또한 이 두 유형의 공통점에는 사람이 살아서는 유한한 존재지만 죽어서는 그 혼이 무한한 능력의 신이 되어 길흉을 준다는 잘못된 믿음이 깔려 있다.
귀신 신앙의 대표적인 사례는 중국의 삼국지에 등장하는 ‘관왕(關王, 운장 관우) 신앙’이다. 중국 전체에 퍼져 있는 이 신앙 형태는 조선에까지 전래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전쟁에 투입된 명나라 군사들이 언제 죽을지 모르는 두려움을 관왕 신앙으로 극복하려 하자, 중국 장수 ‘진린’이 남해안 고금도에 관왕묘를 건립하였다.(1598) 전쟁이 끝난 후 명나라 황제 신종의 명에 의해 세워진 사당이 바로 서울의 종로 숭인동에 있는 동관왕묘(東關王廟, 1601)인데 동묘(東廟)다. 그로부터 300여 년 후에 남관왕묘(1884), 북관왕묘(1885), 서관왕묘(1902) 등이 건립되어 관왕묘는 조선의 수도 한양 사방에 자리하게 되었는데 이것들이 세워진 시기는 모두 나라가 위태로울 때였다.
조상숭배는 돌아가신 조상이 후손들에게 복을 내려 준다는 신앙으로 고인(故人)의 사망일에 맞추어 제사를 드린 후 ‘음복한다.’ 음복(飮福)은 제사음식을 나누어 먹으면서 ‘복을 먹는다.’ 고 믿음으로써 조상숭배의 종교적 응답을 확인하는 것이다. 이러한 신앙 유형들은 전혀 성서적이지 않다. 성서의 가르침에 의하면 사람이 죽으면 그들은 생전의 삶과 신앙에 근거하여 낙원 또는 음부로 나뉘어가서 최후의 심판 때까지는 이 세상에 올 수조차 없으며 초능력을 행하지도 못한다.(눅 16:19∼31) 종종 교회 안에서도 귀신 신앙이나 조상숭배 사상이 불쑥불쑥 튀어나올 때가 있다. “하늘에서 내려다 보시는 ○○님! 우리를 살펴 주소서.”라든지 “돌아가신 너의 부모님이 너희들을 돌보아 주실 거야.”라고 위로하는 말을 들을 때가 있다. 과연 그럴까? 결론을 말하자면 절대로 그렇지 않다. 하나님 외에 우리에게 복과 화를 주관하는 존재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창 1:28, 신 32:39, 삼상 2:2∼10)
2) ‘복술 신앙’과 ‘주술신앙’
‘복술 신앙’은 미래의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계시가 아닌 방법으로 길흉(吉凶)을 점쳐 보려는 것을 말하고, ‘주술신앙’은 액을 막아 주거나 복을 가져다준다고 믿으면서 특정한 주문(呪文)을 외우거나 부적(符籍)을 소유하는 신앙 행위이다. 이러한 유형은 존재하지도 않는 잡신들을 의지하는 미신에 불과하다. 현대 한국 사회에서 복술 신앙은 대단히 심각한 수준이다. 주요 일간지는 너나없이 ‘오늘의 운세’라는 코너를 개설하여 ‘점(卜)’을 게재하고, 휴대전화의 유명 SNS 매체에도 ‘#소소한 운세’라는 프로그램이 원하지도 않는데 자동으로 추출되어 나온다.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대도시의 길거리 주변에는 천막으로 만들어진 점집이 줄지어 있다. 개중에는 기독교인 청년들도 심심풀이라는 명분으로 점집에 들러 궁합과 운세를 점쳐 보면서 즐긴다. 주로 이 경우에는 상대가 비(非)기독교인일 때 파트너를 따라가는 경우다.
‘주술신앙’도 마찬가지다. 어떤 부적은 수억 원을 웃도는 고가에 팔리기도 하고, 젊은이들이 파트너에게 주는 선물의 목록 중에는 부적도 있다. 정치인들도 점쟁이를 찾아가서 선거의 당락을 묻기도 하고 요행히 당선을 맞추면 ‘용하다.’고 믿고 따르며 단골이 된다.
기독교 안에도 이러한 신앙 유형이 존재한다. 필자는 인터넷 모 사이트에서 자신은 매일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아 예언한다면서 계시를 매일 올리는 곳을 본 적이 있다. 그 사이트에는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아멘!’하며 뭉쳐 있다. 인터넷이라는 가상의 세상뿐만이 아니다. 교회 목회자들 중에도 ‘예언’은 자신이 받은 성령의 은사라며 교인이나 특정인을 만나서 그들의 앞길을 말해 주고 교인들은 그 말이 사실이라고 믿고 맹신한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22장 18절에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라고 기록되었듯이 계시는 요한계시록을 마지막으로 끝이 났다. 하나님은 더 이상 계시하지 않으신다. 기존의 성서 66권의 말씀만으로도 우리의 신앙생활은 풍성할 수 있다. 성서의 가르침에 충실하면 미래를 궁금해하거나 불안할 필요가 없다. 미래는 과거와 현재에 우리가 심은 대로 결과가 나오기 때문이다. 부적도 마찬가지다. 교회에서는 구체적으로 부적을 만들지 않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주술 신앙이 예상 외로 상당하다. 예컨대 십자가 장식을 목에 걸면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수 있을 거라든지, 자동차 안에 십자가 형상이나 성경책을 올려 두고 운전하면 운전이 안전하리라고 믿는 사람도 있다. 십자가는 그리스도께서 고난받으신 형벌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나 십자가 자체에 능력이 있는 건 아니다. 성경책은 진리의 말씀을 담은 귀한 책이지만 책 자체는 아무런 효험도 능력도 없는 사물일 뿐이다. 십자가 형상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섬김의 의미를 되새기면 되고, 성경책은 그 속에 기록된 말씀을 가슴에 새겨 넣고 순종해야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 갈라디아서 6장 8∼9절에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했듯이 말씀의 바탕에서 좋은 것을 많이 심어두면 굳이 미래가 궁금할 필요도 없다.
3) ‘기복 신앙’과 ‘물신 숭배’ 그리고 ‘요행 신앙’
‘기복 신앙’은 아무런 노력 없이 공정하지 못한 방법으로 나만 잘되면 된다는 나 중심의 신앙 자세이고, ‘물신 숭배’는 세상에서 돈을 가장 사랑하는 물질 만능의 신앙을 말한다. 교회는 헌금을 부동산 자산 불리기에 투자하고, 교인들은 헌금을 많이 내면 더 많은 금액의 복을 받는다는 산술적 목적으로 헌금을 한다. 이런 행위가 물신 중심의 신앙이다. ‘요행 신앙’은 아무런 노력이나 대가 없이 신(神)이나 사술(邪術)을 통해 목표를 이루려는 신앙 행위를 말한다.
이런 유형의 신앙 행위는 무당이 주관하는 재수굿이나 불교의 사찰에서 볼 수 있는 ‘백일기도’ 같은 것이 있다. 재수굿은 무당이 굿을 하다가 일정 시점에서 신이 강림했다고 주장하면서 둘둘 말아 뭉쳐 놓은 오방신장기(대나무에 청백적녹황 등 다섯 가지 색의 기를 매달은 깃대)를 뽑게 하여 우환 또는 복을 점치는 행위이다. 사찰이나 신당에서는 대학이나 취업 등의 합격을 위해 백일기도를 드린다. 행복을 얻고 싶다는 간절함은 이해가 되지만 추구하는 신앙방식은 올바르지 않다. 기독교 신앙 안에도 이러한 신앙 행위가 꽤 확산되어 있다. 매해 8월 이후부터 11월까지 석 달 열흘 동안 ‘수능 대박’을 기원하는 백일기도를 공식 프로그램으로 시행하는 교회가 많다. 기도 자체는 좋은 신앙 방법이지만 갈고닦은 실력과 땀 흘림 없이 신의 힘만을 이용하여 좋은 점수를 얻으려는 요행심의 기복신앙은 성서의 정신에 부합하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연말이면 많은 교회에서 송구영신 행사를 하는데 그 중 성경 구절 뽑기로 한 해의 행복을 기원하는 프로그램을 시행하는 곳이 많다. 여기에 편승하여 기독교 용품점에서는 그 프로그램에 필요한 물품들을 판매한다. 성경 말씀 자체는 좋은 선물이지만 꾸준하고 성실하게 탐독해서 얻은 교훈이 아니라 특정 구절만을 뽑기처럼 뽑아 그것이 일 년 동안의 운세를 좌우하는 형태라면 부적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한 형태의 신앙 방법으로는 절대로 건강하고 순수한 신앙을 얻을 수 없다.
4) ‘합리주의’와 ‘다수결(대세) 신앙’
당연한 말을 한 번 더 하지만 기독교 신앙을 결정하는 방법은 오직 성서의 가르침에 의해서만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많은 교회들은 성서의 가르침보다는 사람들의 다수결로 신앙지침을 만들어 간다. 교황청을 중심한 로마 가톨릭교회(천주교)의 ‘세계 공의회’나 교파를 형성한 교회들의 ‘총회’에서 다수결에 의해 안건을 결정하면 그것은 성서의 가르침에 위배 되어도 거리낌 없이 실행한다. 이러한 신앙방식은 하나님의 결정보다 사람의 결정을 우선하는 불신앙이다.
환원운동가들은 그 시대의 기독교 신앙을 오염시키는 다양한 찌꺼기들을 과감하게 제거하였는데 오늘의 교회는 버린 찌꺼기들을 오히려 교회 안으로 도로 들여오고 있다. 하나님은 이에 대하여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벧후 2:22)고 책망하신다.
이러한 일들은 왜 일어나는 것일까? 바로 ‘합리주의 신앙’ 때문이다. “교회를 성장시키려면 이러한 것들은 시행해야 된다. 이것이 시대의 대세다”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잘못된 시도를 지적하면 도리어 “새 시대의 새 일꾼이 아니고 구시대의 고리타분한 인물”이라고 낙인찍는다. 정말 그럴까? 성서는 이에 대하여 어떻게 가르치는가?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며 송사에 다수를 따라 부당한 증언을 하지 말며”(출 23:2),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고전 10:5). 우리의 삶에서 다수결이나 대세(大勢), 합리주의의 장점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그것이 반드시 진리는 아니다. 진리는 다수결이 아닐 수도 있고, 대세가 아닌 경우도 많다.
3. 미신에 대한 성서의 지침
이러한 미신 요소에 대하여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며, 성서는 어떻게 가르치고 있을까? 성서에는 무서울 정도의 확고한 금지와 강력한 제재를 요구한다. 무당에 대해서는 “너는 무당을 살려두지 말라”(출 22:18)고 했듯이 초강력 제재를 선언한다. 점을 치는 복술에 대해서는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삼상 15:23)라고 했듯이 복술은 하나님 보시기에 악행이고 사람을 미혹하는 사술이다. 사울 왕은 무당(신접한 여인)으로부터 죽은 사무엘의 혼을 불러들이는 초혼(招魂)점을 친 이후, 결국 자신은 물론 가문까지 멸망 당했다.(삼상 28:3∼25)
건강한 신앙의 기독교인은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와 건강으로 땀 흘려 일해야 하고 그렇게 얻은 소득에 감사해야 한다. 그러면서 헌신하면 상은 하나님께서 덤으로 주신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8)고 했다. 요한 사도는 사랑하는 가이오 형제에 보낸 편지에서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언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도다”(요삼: 2∼4) 라고 말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복 주고 싶어지시는 사람은 ‘진리 안에서 행하는 사람’이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벧전 4:7)고 했듯이 멸망으로 빠뜨리는 미신에 현혹되지 않도록 정신을 차려야 한다. 그리고 “근신하고 깨어 있어야 한다. 지금도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기 때문이다”(벧전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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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학균
등대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사역하며,
강서대학교에서 실천신학 과목을 가르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