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고: 생도시절 축구부 선수의 애환과 보람-김윤석
이 회고는 대열임관50주년 기념책자 (가칭: 대열 반세기 여정) 1부에 편성할 동기생 현역시절의 시대별 국가적 국방이슈와 관련 어떤 역할과 공헌을 했었던 지에 대한 회고와 함께 견줄, 3부에 편성되는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수록하기 위해 이루어진 것이다.
이 글은 김윤석 동기가 생도시절 뜻하지도 않던 축구부에 끌려가(?) 선수생활을 하면서 겪은 끔찍한 고초와, 일반 동기생에 비해 익숙하지 못했던 군사훈련 및 내무생활의 지식 및 요령 때문에 동기생들이 도움을 받아야만 했던 곤혹 등, 이른바 고난의 행군에 대한 추억이 눈물 나면서도 웃게 만들 정도의 일화로 전해지는데, 김윤석 동기의 평소 유머 수준만큼이나 재마난 이야기로 구성된다. 임관 이후는 그 극한 선수생활이 부대지휘에 오히려 도움이 돼 보람을 느꼈다는 해피엔딩의 결말도 보는 이를 흐뭇하게 한다. 노년에 청년시절을 돌아보아 즐거워지는 회고다운 회고담이라 할 것이다. -편집위원 김명수 주(註)-
축구부 이야기
김윤석
ㅇ 축구도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뽑혀서, 대표선수가 되어, 매일 얻어맞고, 시합에 나가 매번 지면서, 4년을 버텨냈다. 4년간 인내와 용기로 끝까지 버틴 용감한 용호회 회원은 (고)이진수, 김장수, 김부명, 김윤석, 이광희, (고)한광문이다.
ㅇ 축구부에 끌려 왔다가 “이것은 군인의 길이 아니다.”라고 생각하여 큰 결심을 하고 얻어맞고라도 나가겠다고 나간 동기생들도 있었다. 권기현, 김종윤, 노행환, 양태호, 유선준, 이택호, 이삼용, 차성근 등
ㅇ 당시 23기 선배님들이 3사 체육대회에서 럭비, 축구가 동시에 우승하면서 상대적으로 해사, 공사에서는 초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우리가 입교한 67년도에 국가 청소년 대표급 선수들을 대거 10여명 정도 스카우트하였다. 우리는 4년 동안 그들의 선진기술 노예가 되어, 얻어맞으면서 축구를 할 수밖에 없었다.
ㅇ 1학년 때는 축구화, 축구공 당번을 맡아야 했다. 축구부 30여명분의 축구화를 짧은 시간(20여분)에 손질하여 연병장에 가지고 가야만 한다. 신속하게 달려와 체육관에서 학과를 마치고 축구화 뽕(스타스)을 교체하고 깨끗하게 손질해야 한다. 손질을 잘못하면 발바닥에 못이 나오고 뽕이 빠지게 된다. 상급생들 축구화가 이상이 없어야 하는데... 매일 얻어 맞는 것이 정상이었다.
ㅇ 축구공 당번은 공을 닦고 튜브에 바람을 넣고 공의 탄력을 유지하는 것이다. 공 50여개를 관리하는데 한 10여개 정도는 매일 바람이 빠진다. 바람이 빠지는 것은 공 당번생도로서는 자기 허파에 바람이 빠지는 것과도 같았다. 이래저래 1학년 생도는 매일 얻어맞는 것이 일과이며 얻어맞지 않는 날은 이상하리만큼 잠이 안 온다.
ㅇ 1학년 생도는 4학년 생도(주전생도)들을 1:1로 담당하여 안마도 해주고 운동복 세탁 등을 도맡아서 해주었다. 주전생도들이 시합에 전념하고 힘을 저축하기 위해서일 것 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가히 인권침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ㅇ 축구부에 잘 왔다라고 생각한 것도 있었다. 멋있는 츄리닝과 유니폼을 지급 받았다. 식당에서 특식은 다른 생도들에게 죄송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3사 체전을 앞둔 합숙훈련(3개월) 기간에는 전방에서 선배 지휘관들이 황소를 보내오기도 하였다. 소 잡는 날은 생피와 생간을 의무적으로 먹이기도 했다. 피를 봐야 독기(파이팅)가 나온다는 것이다.
ㅇ 럭비/축구 선수들은 하계 군사훈련을 받지 못하고 합숙훈련을 했다. 4학년 때까지 M-1 소총 분해 결합을 제대로 못했다. 내무사열 때는 동기생이 대신 손질해주었다. 매달 실시하는 비상 훈련 때는 모포도 말 줄도 모르고 군화 끈도 제대로 매지 못했던 것 같다. 등화관제하고 청소하는 것이 나의 역할이었던 것 같다. 동기생들 도움 덕분에 생도생활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며 항상 고맙고 감사하게 생각한다.
ㅇ 4학년 삼사체전을 앞두고 체육관에서 합숙훈련을 할 때이다. 전날 한양공고 축구부와 시합을 했는데 3:0으로 졌다. 수비는 그런대로 태클도 하고 잘했는데 공격이 잘못했다는 것이다. (당시 고문 장교님 말씀) 다음날 잠을 자는데 새벽 두 시 쯤 모기장을 열고 머리를 두드리는 사람이 있어, 쳐다보니 고문장교 였다. (당시 축구가 약하기 때문에 축구고문장교는 전군에서 제일 독한 사람을 뽑겠다고 하여 동북 유격대에서 3대 악당으로 꼽힌 분을 뽑아왔다) 화랑연병장 사열대 앞으로 10분 내로 도착하라는 명령이었다. 추리닝 바람으로 뛰어 도착해 보니 이광희(10번) 생도도 와 있었다. 두 명이 최선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졌다고 기합을 준다는 것이다.
ㅇ 화랑연병장과 C연병장에서 선착순 시키고, 몽둥이로 패면서 3시간 정도를 녹초가 되도록 만들었다. 한번은 내가 좀 늦게 들어왔다고 나를 발로 차는데 낭심(급소)를 맞았다. 그때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퇴교할 각오로 고문장교에게 달려들었다. 광희가 울먹이면서 윤석아 참자! 참어! 하고 붙잡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마 다른 길로 들어섰을 것이다.
ㅇ 화랑연병장에서 생도대를 돌아오는 선착순을 하는데, 나는 생도대 면회소, 화랑천 방향으로 돌고, 광희는 반대 방향으로 뛰는 것이었다. 생도대로 들어서는 순간 1중대 입구에서 1학년생도(30기)가 수하를 하면서 정지를 시키고, 암구호를 물었다.
ㅇ 4학년생도도 몰라보느냐? 라고 고함치면서 “총 집고 엎드려 뻗쳐”를 시켜놓고 나는 화랑연병장으로 달려갔다. 그 후 C연병장으로 장소가 바뀌어 생도대에 갈 수가 없게 되었다.
ㅇ 엎드려 뻗쳐있는 1학년 생도를 지금까지도 일으켜 세워주지 못해 항상 죄송스럽고 미안하게 생각한다. 그 생도가 끝까지 엎드려 있었다면 장군이 안 되었을 것이고, 자기가 판단하여 스스로 일어났다면, 아마도 장군이 되었으리라 확신한다.
ㅇ 축구한 것이 졸업 후에는 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초급장교시절에는 운동선수였다는 이유로 대대(연대) 단위 체육대회에서 항상 선수 및 감독으로서 역할을 해왔고, 개인 체력관리 면에서도 지구력, 근력향상에 많은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ㅇ 제대별 지휘관을 하면서 운동을 통해 부대를 단결시키고 활성화 시켰다고 생각한다. 국군체육부대장으로 발탁된 것도 축구를 한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운동하면서 기압 받고 얻어맞았던 모든 것을 좋은 추억으로 끝까지 간직할 것이다.
2021.7.19. 김윤석
첫댓글 운동선수였던 동기생들이 생도시절 얼마나 어려운 과정을 지났는지 이제 알았어요.
참으로 수고 많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