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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 朝 徵 詔 第 八
(8. 당조에서 초청하다)
이 대목에서는 당나라 황제가
六조대사의 높은 법덕(法德)을 존경하고 감명하여
칙명으로 입궐해 주시도록 초청했으나
六조대사께서 칭병을 핑계로 온 사신을 통해
제도하신 법문이다
神龍二年上元日에 則天과 中宗이 詔云朕이 請安秀二師하여 宮中에서
供養하고 萬機之暇에 每究一乘인데 二師가 推讓云하되
南方에 有能禪師하여 密受忍大師衣法하여 傳佛心印하니
可請彼問하라하여 今遣內侍 簡하여 馳詔迎請하오니
願師慈念으로 速赴上京하소서했다.
신룡 二년
상원일에 측천(무후)과 중종(황제)이 조서로 이르기를
"짐이
혜안국사(숭악)와
신수 두 대사를 청하여
궁중에서 공양하고 만 가지 일을 보살피는
겨를에 매양 일불승을 궁구(깊이 규명)해 왔는데
두 대사가 사양하며
(六조를)추천하여 이르기를
'남방에 혜능선사가 있어 五조 홍인대사의
의발과 법을 은밀히 받아 부처님의 심인(心印)이
전해졌으니 그를 청하여 물으시라'
하여 이제 내시 설간을 보내어 조서를
급히 보내서 맞이하고자 청하오니,
원컨대 대사께서는
자비로운 생각으로 속히 서울에 올라와 주소서" 하였다.
강설:
당나라 측천 무후는
황비로써 황좌에 올라 국정을 쇄신한 여걸로서
불심이 돈독하였다.
황제 중종과 더불어 대덕 스님들을 궁으로 초청하여
법문을 청해 듣고 불법 적적대의를 깨달아
일불승(소승 3승, 대승 등은 방편이고
오직 부처님의 지위에 오름)을 항상 깊이
사유하던 중에 숭악 혜안국사와 신수대사께서
남방에 계시는 六조께서 五조로부터 법을 이었으며
이것은 곧 전법등인 부처님의 심인이 전해진
覺人이므로 그 분을 청해서 법문을 듣도록
천거하였음으로 내시 설간을 시켜
六조를 초청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살펴 볼 대목은
남돈, 북점이니
하여 범부 소인들은 차별을 지어 가리고들 있으나
깨달음을 성취한 대인의 경계로서는
그러한 분별심이나 아상을 여의었기에
기꺼이 황실에 六조대사를 천거할 수 있는
동체 대비의 아량이 발로됨을 보아야 한다.
요즘 세태에서는
자기 주석하는 사찰 신도하나 딴 절에 뺏길가
전전긍긍하며, 삿된 방편을
아예 인과의 죄업조차 모르는 듯
거리낌 없이 쓰며 신도 확보에 여념이 없음이
왕왕 있음을 보면서 이런 대인들의 경계를
귀감으로 성찰(省察)해야 할 것임을 지적하는 바이다.
師께서 上表辭疾하시어 願終林麓하셨다
簡曰하되 京城禪德이 皆云하되
欲得會道이면 必須坐禪習定이니
若不因禪定코는 而得解脫者가 未之有也라하니
未審師所說法은 如何이니까 師曰하시되
道由心悟인데 豈在坐也리오 經云하시되 若言如來-若坐若臥라하면
是行邪道-何故하면 無所從來며 亦無所去라시니 無生無滅이
是如來淸淨禪이요 諸法空寂이 是如來淸淨坐라
究竟無證이거늘 豈況坐耶인가.
조사께서는
병을 핑계하는 말씀의 글을 올려
산기슭 숲 속에서 여생을 마치기를 원하시었다.
설간이 이르기를
"경성에 있는 선덕들이 모두 다 이르시기를
도를 앎을 얻고자하면 반드시 좌선하여
정을 익힐 것이니,
만약 선정을 인하지 않고는
해탈을 얻은 자가 있지 않다고 하니
알지 못하겠사오니 대사께서 설하시는 바
법은 어떠한 것이오니까?"
조사께서 이르시기를
"도는 마음으로 말미암아 깨닫는 것인데
어찌 앉아 있는데 있으리오?
경에 이르시기를
'만일 여래가 이렇게 앉고 이렇게 눕는다고
말하면 이것은 사도를 행하는 것이니
무슨 까닭인가? 하면
어디로부터 온 바가 없으며
또한 갈 바도 없는 것이다'
하셨으니,
남도 없고 멸함도 없는 것이 바른 여래의 청정선이요,
모든 법이 비어 고요함이 바른 여래의 청정좌라
깨달음(구경각)은 증할 만한 것도 없거늘
어찌 하물며 앉음에 있겠는가?"
강설:
황제의 사신으로 찾아온 내시 설간이
六조대사께서 병을 핑계로 황궁 초청을 거절하시자
그냥 귀경할 수 없으므로 직접 법을 묻게 된 것이다.
"경성에 있는 선덕들이 한결같이 도를 증득하고자 하면
좌선해서 定을 익힐 것이요,
만약 선정을 익히지 않고는 해탈할 수 없다 하는데
이에 대하여 六조대사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설해 달라"고 청했다.
이에 조사께서는
"도는 마음으로써 깨닫는 것인데
어찌 앉아 있는데 있겠는가?
경에도 '만일 여래가 앉고 눕는다고 말하면
이것은 삿된 도(相見)를 행하는 것이니,
깨달아야 할 마음(본성: 여래)은 상이 없어
비어 공하며 온 우주에 머묾없이 상주하는 것이라,
온 바도 없으며 또한 갈 바도 없으니
무엇으로 부터 나는(生)것도 멸해 없어지는 것도
아님을 깨닫는 것이 바른 여래청정 禪이요,
모든 것(法)이 비어 고요함을 깨닫는 것이
바른 여래청정 坐이니
깨달음(覺: 불성)은
본래부터 원만 구족되어 있으며 공적한 것이라
다시 증해 얻을 것도 없는데
어찌 깨달음은 마음에 있거늘
몸을 구속하여 앉음에만 국집하며,
定을 앉아서 얻어 해탈을 얻는다는 사견을 짓는가?"
하는 말씀으로 실상 좌선의 義旨를 드러 보이셨음은
앉아서 정을 익혀 해탈을 구한다는 견해는
실과 망을 갈라 세운 相見임을 설파하신 것이다.
이것은
定과 해탈을 세워 집착하고
오히려 妄想, 번뇌를 세워서
벗어 나고자 함임을
파하여(깨뜨려), 정을 얻는다고
앉음에만 국집하는 소견을 파하시고
좌란
곧 청정하여 진공(定)임을 깨달음이며,
선은
곧 항상하여 부동의 진공묘유(慧)라,
법계에 상즉한 것임을 깨닫는 마음(思惟)이
곧 禪이므로 달리 좌선을 구하지 말 것이니
참된 좌선은
마음(思惟)으로 증오(깨달음)하여
생멸거래가 본래 없는 묘용의 반야지혜로
얻을 것이 없어 해탈을 달리 구할 것이
없음을 밝게 깨닫게(覺) 되는 것이
참으로 선정임을 설하신 것이다.
簡曰하되 弟子가 回京하면 主上必問오니 願師慈悲로 指示心要하시어
傳奏兩宮 及 京城道學者하여 譬如一燈-燃百千燈하여서
冥者皆明하여 明明無盡케하소서 師云하시되
道無明暗이니 明暗은 是代謝之義라 明明無盡도 亦是有盡이니
相待立名故이니 淨名經云하시되 法無有比이니 無相待故라시니라.
설간이 이르기를
"제자가 경성에 올라가면 주상께서
반드시 물으실 것이오니,
원컨대
대사께서는 자비로 불법의 요긴함(心要)을
가리켜 보여 주시어 두 궁전(측천, 중종)과
경성에서 도를 배우는 이들에게 전하고 아뢰어서,
비유하면
한 등이 백천 등에 불을 켜는 것과 같이
하여서 어두움이 모두 밝아져 밝고 밝음이
다함이 없게 하소서"
조사께서 이르시기를
"도는 밝고 어두움이 없으니
밝음과 어두움은
바로 번갈아 바뀐다는 뜻이라,
밝고 밝음이 다함 없음도
또한 다함이 있는 것이니
상대로 이름을 세운 연고니,
정명(維摩)경에 이르시기를
'법은 비교할 것이 있음이없으니
상대가 없는 연고니라' 하시었느니라"
강설:
설간이 다시 청법하기를
"마치 하나의 등불이 백천 등에 불을 붙여
그 빛이 모든 어두움(無明)을 밝혀서
그 밝음이 끝남이 없게 하여 주시도록
법문을 일러 달라" 하였다.
六조께서
이 말이 끝나자
이 질문이 속제의 차별문임을 다잡아 설파하시되
"도는 본래 밝고 어두움이 없으니
밝음과 어두움은 곧 바뀐다(變化)는 뜻이니
이 밝음과 어두움을 세움은
방편으로 이름한 가설이나
이 말에 국집하면 분별심으로
갈라지게 되는 것이라 相見이 되며,
밝음이 다함 없음도 또한 다함 있음이라는 것
역시 본래 그러한 것이 없는데
밝음이 다함이 없게라는 생각이
밝음은
어두움을 전제로 세워 있음이 되는 때문에
相見에 떨어지는 잘못된 소견임을 깨뜨려 주시고자
지시(指示)하신 것이다.
따라서
법이란 일체상이 없이있는
진공묘유임을 밝혀서
스스로 相見을 짓는 것을 깨뜨려(破) 주신 것이다.
簡曰하되 明喩智慧하고 暗喩煩惱이니 修道之人이
不以智慧-照破煩惱한다면 無始生死를 憑何出離나이까
師曰하시되 煩惱가 卽是菩提라 無二無別이니
若以智慧로 照破煩惱者하면 此是二乘의 見解라
羊鹿等機이며 上智大根은 悉不如是니라.
설간이 이르기를
"밝음은 지혜에 비유하고
어두움은 번뇌에 비유한 것이니
도를 닦는 사람이 만일 지혜로써
번뇌를 비추어 깨뜨리지 않는다면
비롯함(始作) 없는 생사를
무엇을 의거하여 벗어나겠나이까?"
조사께서 이르시기를
"번뇌가 곧 이 보리라
둘이 없고 다름이 없으니,
만약 지혜로써 번뇌를 비추어 깨뜨린다고 하면
이것은 二승의 견해라 양과 사슴의 (작은)근기이며
높은 지혜의 대근기는
모두 이와 같지 않느니라"
강설:
다시 설간이
밝음(지혜)으로써 어두움(번뇌)을 비춰서
그 어두움(無明, 煩惱)을 깨뜨리지 않는다면
시작 없는 무명, 번뇌를 어떻게 하고
생사를 뛰어 넘을 수 있는가
그것을 의지할 방편을 청법했다.
六조대사께서 번뇌가 곧 보리이니
둘이 없고 다름이 없는데
지혜로써 번뇌를 비춰 깨뜨린다는 소견은
二승의 견해라
성문, 연각의 작은 소견이며
최상승근기는 이와같은 소견을 짓지 않는다 하셨다.
이 말씀은
"본성이 진공임에
일체가 있음이 없이 있는 가운데
번뇌니 보리니 하는 것도
거짓 이름을 세워
방편의 차별문으로 설하는 것일 뿐
空中無色이라 실상이 공한 가운데는
상대적인 둘이 없어
번뇌와 보리가 다름이 없는데
깨뜨릴 것과 깨뜨림이 있음은 二승의 견해이니
즉 무엇을 근거(相對를 세워서)하여
그것의 실상을 깨달아 들어 가는 것으로
성문은 四성제를 관하여
해탈을 얻어 머물고자 하고,
연각은 十二연기법을 관하여
해탈을 얻어 머물고자 하는
소승의 견해이나,
최상승근기라면
일체가 평등하여 같은 바탕(同體)인
곧 진공의 淸淨不動,
不增不減을
직시(直視)해 들되
그런 상대적인 소견을 짓지 않는다"
라고 설파하신 것이다.
簡曰하되 如何是-大乘見解이니까
師曰하시되 明與無明을 凡夫見二이나 智者는 了達其性-無二하나니
無二之性이 卽是實性이라 實性者는 處凡愚而不減하고 在賢聖而不增하며
住煩惱而不亂하며 居禪定而不寂이니 不斷不常하고 不來不去하며
不在中間-及其內外하여 不生不滅하여서
性相如如하여 常住不遷을 名之曰道라니라.
설간이 이르기를
"어떤 것이 대승의 견해이나이까?"
조사께서 이르시기를
"밝은 것과 더불어 밝지 못함(無明)을
범부는 둘로 보나,
지혜로운 이는
그 성품이 둘이 없음을 밝게 통달(了達)하나니,
둘 없는 자성이 곧 실다운 성품이라
이 실다운 자성은
범부의 어리석음에 있어도 없어지지 않고
현인과 성인에 있어도 늘지 않으며,
번뇌에 머물러도 어지럽지 않으며
선정에 있어도 고요하지 않는 것이니,
끊어지지도 않고 항상하지도 않고
오는 것도 아니고 가는 것도 아니며
중간과 그 안팎에도 있지 않아서,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아서
자성의 모습이 여여하여
항상 머물러 옮기지 않음을 이름하여
도라 이름하느니라"
강설:
다시 설간이
"어떤 것이 대승의 견해인가?" 물으니
六조대사께서
"밝은 것과 더불어 어두운 것을
범부는 둘로 보나
지혜로운 이는 그 성품이 공함을 알아
둘이 없음을 밝게 꿰뚫어 통달하는 것이니,
둘 없는 자성이 곧 실상의 자성성품이라
실다운 성품인 본성은 둘이 아니라서
(不二: 空) 성인 범부가 다르지 않아
더불어 하나며,
우주법계의 성품(법성)도
또한 일체평등한 진공묘유이기 때문에
이 비어 없이있는 불성은
어지럽거나 고요하다는 것도 없으며
끊어짐도 항상함이라는 것도 없으며,
가없는 온 우주에 상즉하여
머무니, 가는 것도 오는 것도 아니며
갈 곳도 올 곳도 달리 처소가 없어
중간도 안팎도 있지 않아서
남(生)도 멸함도 없는 어떠한 相도 이름도 없이
如如(공하고 공하다는 것도 공함)하여
항상 때와 처소를 가림 없이 두루 머물러
움직이지 않는 이것을 이름하여
道
(실상의 진리)라 하는 것이라 하셨으니,
비유하면
유리 없는 크고 큰 유리병 속에
빈틈없이 꽉 채워진 맑아 깨끗한 물이
둘이 없으며 흔들어도 어지럽지도 않고
움직임도 없는 것과 같아 없이 있는
(묘유)것이 곧 나와 우주법계 일체의 진여 자성
(스스로의 성품)인 것이다.
簡曰하되 師說不生不滅이 何異外道이니까 師曰하시되 外道所說하는
不生不滅者는 將滅止生하고 以生顯滅이라
滅猶不滅이요 生說不生이거니와 我說不生不滅者는
本自無生이라 今亦無滅인 所以로 不同外道니라
汝若欲知心要이면 但一切善惡을 都莫思量하면
自然得入-淸淨心體하여서 湛然常寂하여 妙用恒沙리라.
설간이 이르기를
"조사님께서 말씀하신 不生不滅이
외도와 어떻게 다르옵니까?"
조사께서 이르시기를
"외도가 말하는 불생불멸은
멸하는 것을 가져 나는 것을 그치고
나는 것으로써 멸함을 드러 내는지라
멸도 멸하지 않음과 같고
나는 것도 나지 않는 것이라 말하거니와,
내가 말하는 불생불멸은
본래부터 스스로 남이 없는 것이라
이제 또한 멸할 것이 없는
(진공묘유) 까닭으로 외도와 같지 않느니라.
네가 만약 그 가운데의 요긴함(心要)을 알고자 하면
다만 일체의 선과 악을 모두 사량
(분별하는 생각)하지 않으면
자연히 청정한 마음 바탕에 들게 되어서
맑아 깨끗하며 항상 고요하여 묘한 쓰임
(반야작용)이 항하사(한량없음)이리라"
강설:
설간이 다시 여쭙되
"조사님께서 설하신 不生不滅이란 뜻은
외도(삿된 소견)와 어떻게 다른가?"
한데 대하여
六조께서 설하시기를
"외도가 말하는 불생불멸은
멸하는 것으로 나는 것을 그치고(단멸공)
나는 것으로 멸함을 드러내는
(생멸을 상대적으로 설정해 놓고
끝내 아예 없음)지라
멸도 멸하지 않음과 같고
나는 것도 나지 않는 것
(끊어져 없어지는 단멸)이라" 하셨으니
곧 멸하는 것으로 나는 것을 그친다는 뜻은
멸하므로써 斷滅하게 되는 것이라,
나는 것으로써 멸함을 드러 낸다는 뜻이
난 것은 곧 멸하여 아예 없어진다는 소견이니
이것은 단멸공에 떨어지는 소견을 짓게 되는 것이요,
또한 멸도 멸하지 않음과 같고
나는 것도 나지 않는 것이라는 소견을
말한다는 것은
멸이란 생함이 있을 때 멸이요
나는 것이 없으면 멸할 것도 없으니
나는것도 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은 불생(나지도 않고)
불멸(멸하지도 않는다)이라는
법성의 실상을 뜻한 것을
글자 그대로
일체가 다시 남도 없고 멸도 없다는
단멸空으로 귀착된 소견인 것이다.
부처님이 깨달은 바의 가르침인
불생불멸은
법성인 본성 그 자체의 성품이
如如하여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인
것을 교설하신 것이니,
지금 외도의 불생불멸은 법계 자체의 나툼과
작용을 부정하는 소견이라
크게 그르친 것이다.
六조대사께서는
본래부터 스스로 법성은 남이 없는 것이라
다시 멸할 것이 없는 까닭으로
외도와 같지않다 하셨으며
그 실상을 알고자 하면
일체의 선과 악등
모든 사량하는 분별심을
일으키지 않으면 淸淨한 마음바탕
(근본體)에 들게되어 맑아 깨끗하며
항상 고요하여 묘한 쓰임(般若作用)이
한량없으리라 하셨으니,
다시 뜻을 말하면
生滅의 상대적인 분별심등
일체의 사량을 하지 않고
맑아 깨끗한 온 우주 법계의 바탕인
근원(法性)이요
자기 마음인 본성(自性)에 계합 합일하여
일체의 본성을 깨달아 들어 보면
참으로 비어 空하여
생멸할 것이 본래부터 없음을 알 것이요,
본성이 공하여 그러하나
그 성품 가운데 (相이)없이있는 것이
소소영령하게 있어(般若: 묘유)
아예 없는 공이 아니라
그 반야가 한량없이 나투고 작용(쓰임)함을
명철하게 깨달을 것이라,
외도의 불생불멸이라는 소견과
불조가 설하는
본성의 불생불멸의 지견이
다름을 들어 밝히셨으니
평등문(진제: 理)으로써 불생불멸과
속제(事: 用)의 무궁한 반야작용을 쌍으로
드러 보여 외도의 삿된 불생불멸의
소견을 파하신 것이다.
차별심을 일으키지 않음이
곧 定이요 坐이며,
밝게 비쳐 봄(慧)이 禪이니
이 맑아 깨끗한 본래의 성품대로
일체를
밝게 살펴 진공묘유로써
묘용함을 직시하는 것이
자성의 성품이요
선정이며
일상 일행삼매인 것이다.
簡이 蒙指敎하고 豁然大悟하고 禮辭歸闕하여 表奏師語하다
其年九月三日에 有詔하여 奬諭師曰하시며 師辭老疾하시나
爲朕修道하시니 國之福田이며 師若淨名께서 托疾毘耶하면서
闡揚大乘하여 傳諸佛心하시고 談不二法이나이다 簡이
傳師指授-如來知見하여 朕이 積善餘慶과 宿種善根으로
値師出世하여 頓悟上乘이니 感荷師恩함을 頂戴無已나이다하고
幷奉-磨衲袈裟 及水晶鉢하고 勅韶州刺使하여 修飾寺宇하고
賜師舊居-爲國恩寺했다.
설간이 가리키신 가르침을 받고
막힘없이 밝음을 크게 깨닫고서
예를 드려
하직하고 대궐로 돌아가서
조사의 말씀을 적어 올렸다.
그해 9월3일에 조서가 있어
"대사께서 이끌어 깨우치도록 일러주시며,
대사께서 노쇠하심을 말씀하시나
짐을 위해 도를 닦으시니
나라의 복밭이시며,
대사께서는 마치 유마힐거사께서
병을 칭하여 비야리성에 계시면서
대승을 드러내 밝혀 널리 퍼지게(闡揚)하여
모든 부처님의 마음을 전하시고
둘 아닌 법을 말씀하신 것이나이다.
설간이
대사께서 가리켜서 가르쳐 주신
여래지견을 전해 주어
짐이 선을 쌓은 경사와 숙세에 심은 선근으로
대사의 이 세상에 나오심을 만나게 되어
상승을 몰록 깨달았으니
대사의 은혜에 감사함을 머리에 받들어
그침이 없나이다"하고
아울러 마납가사와 수정발우를 드리고
소주자사에게 조서를 내려
사찰을 증축 수리케 하고
조사께서 오래 계시던 곳을
'국은사'라 寺號를 내려주었다.
강설:
설간이 六조대사의 드러 보이신
법문에 막힘없이(설간이야 말로 상근기)
깨달아서 궁궐로 돌아가 그대로 적어 올리니
황제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조서를 내리기를
"六조대사께서 칭병으로 궁에 오시지 않고
황제를 위해 화도함은 나라의 복전이며
마치 유마힐거사가 병을 빙자해서
모든 大士(菩薩 摩訶薩)들을 비야리성 방장에
문병을 오게하여 대승을 드러내 밝혀
널리 퍼지게(敎化)하여 불심을 전하시고
둘 아닌 법을 설하신 것과 같으며,
설간이 적어 올린 조사의 법문에 의지해서
선정을 베푸는 경사와 전생선근으로
이생에 출현하신 六조대사와의 인연으로 인하여
최상승법을 몰록 깨달았으므로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 한량 없으므로
극구 칭송찬양하고, 아울러 마납
(고려 최고급 제품의 비단 -
당시에는 고려 비단을 최상품으로 쳤음)
가사와 수정발우를 드리고
그 지방 소주자사에게 명하여
사찰을 증축 수리하게 하고
국은사
라고 황명으로 사찰명을 내려
황제의 깊은 감사와 환희심의 감회를 표현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