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조건
최영효
내 살아 신문 한 켠 이름 석 자 올라 봤으면 북천에 가서라도 자랑이 만발할 텐데
가쁘게 달려왔지만 족적 한 줄기 가뭇없다
죽음의 본바탕은 사망으로 시작해서 별세 영면 서거 승하… 귀천은 어림없고
선종은 언감생심이니 죽도 밥도 안 되겠구나
뛰고 절며 엎어지다 한숨 돌려 다다른 곳 장례식장 어느 귀퉁이 한 사흘 세를 들어
출입구 벽면에 붙어 북망에도 없을 별자리
곡비
최영효
가뭄에 가신 것도 늙은이 뜻일 거라며 청개구리 일족들 문상을 갔었는데 영정만 혼자 웃으며 어서오라 눈짓한다
어물쩍 넙죽 절하고 빈소를 나오려니 자식 손자 후생들 접견실에 가득 모여 그 영감 팔순 때보다 만화방창 잔칫날이다
사는 게 끈이라는데 아프게 맺은 끈이라는데 길이 뭔지 몰라도 가서 못 올 길이라는데 국밥도 목젖에 걸려 북망길을 못 넘는데
맹꽁이 두꺼비도 다 불러서 춤을 추자 하늘에 비를 청해 목청껏 울어드리자 다시는 오지 말라고 비손도 바쳐 올리자
신이 되고 싶은 시인이
최영효
'25시' 게오르규는 사제나 소설가보다 하늘 아래 으뜸인 신이 되고 싶었다
신이란 하늘에 살고 시인을 줄여 신이므로
그런데 왜 남의 것 따다 먹고 훔쳐 먹는 이 물신 저 귀신들 신중의 신 잡신이 있나
초습에 입맛 들이면 걸신이 된다는데
신소리 하다 보면 흰소리 되고 마는 아무리 신을 지펴도 신들리지 못해서
신바람 찾아 나서다 발목 삐끗 뺨만 맞았다
내 진정 시인이라면 텃밭 하나 일궈서 희망의 씨를 뿌려 절망이나 품고 싶지만
그것 참 쓰고 매워서 접신조차 어림없으니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최영효
쇠뜨기 쑥부쟁이 밟히며 사는 것들이
빈털뱅이 깡통 같은 채이며 우는 것들이
하찮고 보잘것없어
꽃 지고 꽃 핀다 한들
개미나 지렁이가 기어가고 기어온들 날구멍 들구멍에 쥐새끼 날고뛰든지 쭉정이 들뜬 마음쯤 있어도 없고 없어도 있는 바람과 맞바람 골바람 칼바람아 뿌리도 가지도 없는 이재민 문바람아 숨탄것 목숨을 끊는 피죽바람 서릿바람아
오금저린 땅 위에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의 쓸모없는 쓸모가 되어
막다른 골목 뒤곁에
사람들이 살고 있다
ㅡ시조집『아무것도 아닌 것들의』(시와실천,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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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효 : 1999년 《현대시조》 등단. 2000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당선. 김만중 문학상, 천강문학상, 형평문학(지역)상, 중앙시조대상 수상. 시조집 『무시로 저문 날에는 슬픔에도 기대어서라』『노다지라예』『죽고못사는』『컵밥3000 오디세이아』『아무것도 아닌 것들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