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서원을 지나 사백여 미터 올라가면 조동골이 나오고 다시 조금 더 가면 급히 굽어진 산모퉁이가 뾰족하게 나와 있었다. 의인으로 건너가는 청소깝 외나무다리가 놓여 있는 강섶 옆 신작로 왼편에 길게 자리한 헬기장으로 접어들기 삼백여 미터 전에 툭 튀어나온 산굽이었는데 그 길 아래는 검푸른색이 짙게 드리운 표풍(회오리바람)이 빙빙 도는 깊은 '소(沼)'가 있었고 길 위에는 깎아지른 듯한 바위들이 절벽을 이룬 가운데 돌 산 사이에는 크고 작은 참나무들이 여기저기 우거져 있었다. 옛사람들은 이곳을 "참남배로"라고 불렀고 우리들도 자연히 그렇게 따라 불렀다. 참남배로를 돌아서 조금만 올라가면 오른 쪽에는 의인으로 건너가는 청소깝 외나무다리가 있었고 왼쪽에는 길을 따라 길게 만들어진 모래로 된 헬리콥터 비행장이 있었다. 1969년 박정희 대통령이 도산서원 성역화 사업을 지시할 때와 1970년 완공식 때 두 번 오셨는데 그때 만들어진 것이다. 신작로 오른쪽에는 아카시아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고 그 밑에는 낙동강이 구불구불하게 흘러갔다.
강변에 아카시아나무들이 밀림처럼 길다랗게 신작로를 따라 우거져서 강과 도로 사이에 무성한 숲을 이루었다. 초여름에 아카시아 꽃이 필 때면 강바람에 밤꽃 향기 같은 냄새를 내뿜으며 흰색 꽃잎들이 하얗게 나부껴 마치 한겨울에 소담스럽게 흩날리는 함박눈을 연상케 했다.
참남배로는 외지고 인적이 드물고 깊은 소가 있어서 무서운 곳이었지만 참남배로를 돌아서 완만히 우회전 해서 나가면 여기서부터는 오른쪽 강 위로 의인으로 건너가는 섶다리가 나타나고 아카시아꽃들이 만발하고 키 작은 코스모스도 신작로 길을 따라 줄지어 피어 있는 운치있는 직선 도로가 의인 앤떼이 가설극장까지 쭉 뻗어져 있었다. 가설극장 앞 여울 건너에는 의인 번남고택이 99칸(한국전쟁 때 일부 소실로 현재 50여 칸 정도가 남음)의 위용을 자랑하며 강변 마을에 번듯하게 떡 위치해 있었고 그 윗쪽 산 아래에는 퇴계구곡 가운데 일곡이 시작되는 사련진이 깊은 강물을 형성하며 넓다랗게 고여 있었다.
의인 앤떼이 앞을 지나서 완만하게 좌회전해서 약간의 경사진 도로를 올라가면 토계 술도가가 나타나고 왼쪽 길 옆에는 계남고택이 보이고 저 멀리로는 토계 번화가와 함께 자하봉 아래에 고즈넉이 자리잡은 도산국민학교 건물과 운동장을 가득히 채운 산 만큼이나 큰 플라타너스 나무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 이렇듯 참남배로를 돌아나가서 비행장으로 접어들어서야만 비로서 토계 번화가의 뒷산인 건지산 줄기와 도산학교 뒷산인 자하봉 산자락이 희미하게나마 시야에 잡혔다.
우리들과 애환을 함께 한 참남배로의 지명은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참남배로는 지형적인 형상을 그대로 이름 붙인 지명이다. 신작로가 산모퉁이를 급히 돌아나가는데 아래에는 깊은 소가 있고 위에는 절벽에 참나무들이 빼곡히 숲을 이루고 있었다. 겨울날 우리는 등하굣길에 도로 위 벼랑 아래 움푹지고도 의자처럼 형성된 돌계단에 앉아서 햇볕을 쬐이기도 했다. 그 곳에는 강바람도 미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추운 봄과 겨울에도 따뜻한 햇볕이 드는 보금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참남배로는 참나무가 있는 벼루 혹은 벼랑 내지 베랑을 뜻한다. 벼랑은 낭떠러지의 험하고 가파른 언덕을 말한다. 그리고 강가나 바닷가에 있는 벼랑을 벼루라고도 한다. 또 베랑은 벼랑의 경상도 방언으로 가파르다는 의미이다. 벼루와 관련된 사자성어는 안변현애(岸边悬崖: 언덕 안. 가 변. 매달린 현. 벼랑 애)와 안변초벽(岸边峭壁: 언덕 안. 가 변. 가파를 초. 벽 벽)이 있다. 두 성어 모두 "벽과 같이 깎아지른 듯한 물가의 절벽"을 뜻한다.
참남배로에 대해 한글과 한문 그리고 방언과 지형ㆍ 지세 등을 참고 내지 유추하여 나름대로 지명을 고찰한 것을 요약해보면 참나무를 줄여서 "참남"이라고 했고 벼루와 벼랑과 베랑이 앞에 말인 참남과 붙어서 발음하기 쉬운 언어의 역사성과 변천길을 걸어서 가장 말하기 편하고도 무난한 참남배로로 변형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림 출처 및 종합 설명(caption) : "이호신 화백의 도산서원(2008), 여행스케치"이다. <그림 >은 분강촌에서 도산국민학교로 가는 등굣길 십 리 여정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조망이자, 전경이다. 강 건너 중간 지점 골짜기에 도산서원이 널다랗게 자리잡고 있는 광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왼편 윗쪽에 산과 강이 접해서 왼쪽으로 길게 이어진 지역이 부내(분강촌) 동네이다. 그림 저 멀리로 보이는 강물 끝자락 부분 왼편에 있는 산모퉁이가 참남배로 지점이다. 이곳을 돌아서 완만하게 좌회전 해서 조금 가다가 다시 우회전 하면 직선 신작로가 길게 나오고 그 신작로 중간 부근 왼편에 길을 따라 길게 만들어 놓은 모래사장 헬기 뱅기장이 나오고 계속해서 또 한참 가다가 직선 신작로가 끝나는 지점에 의인 앤떼이 옆에 있는 가설극장 공터가 나오고 이를 지나 완만하게 좌회전 해서 올라가면 술도가, 계남고택, 버스 정류소가 줄줄이 나온다.
♤사진 출처 및 종합 설명(caption) : 첫번째 사진 오른편 강건너 보이는 작은 골짜기가 조동골이다. 골 바로 우측에 바위로 된 비스듬히 경사진 낭떠러지 산이 보인다. 이 바위산 아래 모롱이가 진 지역과 신작로가 만나는 지대를 참남배로라고 불렀다. 두번째 사진은 참남배로 지역만 확대해 놓은 것이다. 세번째 사진의 작은 붉은색 부분이 참남배로 지역이다(윗사진 출처 : 1970년대 의인에 살았던 도산국민학교 58회 동창 이영순 친구. 사진을 촬영한 시기 또한 수몰 전인 1970년대 초반으로 추정된다). 첫번째 사진 왼쪽 상단 산중턱에 하얀 띠 모양으로 이어지는 도산서원 진입로 길을 만들고 있는 모습이 선명히 눈에 들어온다. 1976년 안동댐 준공을 눈 앞고 두고 분강촌 동네 앞을 통해 도산서원으로 들어가는 신작로가 부내 마을과 함께 강물 속으로 침수되는 것이 기정사실화 되자 이에 대한 대안으로 이 새로운 길을 만들었다. 필자의 기억으로는 1974년부터 공사를 시작했는데 당시 다이너마이트를 통해 바위산을 폭파(발포)하면 큰 돌덩이가 산 아래 마을까지 휙휙 날아왔었다. 마을 청년들이 공사를 돕는 일을 하며 돈을 벌기도 했다. 현재 온혜로 넘어가기 직전 우측 도산서원 진입로에서부터 도산서원까지 뚫려 있는 길이 바로 첫번째 사진 상단 가장 왼쪽에서부터 도산서원까지 띠 모양으로 이어져 있는 그 당시 공사 현장의 바로 그 모습이자 그 길이다. 지금 도산서원으로 들어가는 진입로에서 농암가비를 막 지나서 위험하게 나 있는 산중턱 길 아래로 강물이 가득히 적수되어 있는 지역이 옛날 수몰 전 분강촌이었다. 분강촌 동네 앞으로 직선으로 나 있는 신작로를 따라서 500여 미터 올라가면 도산서원 정문이 나왔다. 신작로 옆으로는 낙동강이 길을 따라 오른쪽으로 구불구불하게 흘러 갔고 왕버들과 소나무가 도산서원까지 가로수로 형성되어 있는 운치가 넘치는 아름다운 길이었다. 신작로 길 아래에는 농암선생의 농암바위가 있었고 낙동강 위에 있는 영지산에는 농암의 애일당과 강각 이어서 병암골과 삼밭골 석간대 전골 등이 지금의 도산서원 선착장까지 병풍처럼 둘러싸며 수려한 산천을 비경으로 수놓았었다. 첫번째 사진 제일 왼쪽 강 끝에서 1km 정도 더 내려가야 소풍의 종착지인 분강촌 물레방간 잔디밭 강변이 나오고 또한 사진 제일 오른편에서 강길을 따라 다시 1km 정도 더 올라가야 토계와 도산국민학교가 나온다. 하지만 아름다운 낙동강 언덕을 따라 십리길을 걸어가는 봄소풍 나들이는 그저 행복하기만 했다.
첫댓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