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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하게 하소서
2008년 12월 3일 / 삼일예배 / 합 3:1-3
합 3:2 / (개정개역)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현대어) 오 주님, 제가 방금 주님의 답변을 들었습니다. 주께서 계획하신 그 무서운 일들이 두려워 저는 떨립니다. 그 일을 너무 먼 미래에 하지 마시고 속히 이루어 주소서! 주께서 간섭하시는 모습을 저도 직접 체험하게 하여 주소서! 주님의 진노가 폭발할 때에도 우리에게는 긍휼을 베풀어 주소서!
언젠가부터 교회에서 부흥을 노래하기 시작했습니다. 젊은이들 입에서 먼저 부른 노래가 어린이와 노인에 이르기까지 간절한 염원이 되어 불렸습니다.
♬ 이 땅의 황무함을 보소서 하늘의 하나님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 우리의 죄악 용서 하소서 이땅 고쳐주소서 / 이제 우리 모두 하나되어 이땅의 무너진 기초를 다시 쌓을 때 / 우리의 우상들을 태우실 성령의 불 임하소서 / 부흥의 불길 타오르게 하소서 진리의 말씀 이땅 새롭게 하소서 / 은혜의 강물 흐르게 하소서 성령의 바람 이제 불어와 / 오- 주의 영광 가득한 새날 주소서 / 오- 주님 나라 이땅에 임하소서
그것도 모자라 부흥 제 2탄이 한국 교회와 젊은 이들을 강타하였습니다.
♬ 오소서 진리의 성령님 이 땅 흔들며 임하소서 / 거짓과 탐욕 죄악에 무너진 우리 가슴 정케 하소서 / 오소서 은혜의 성령님 하늘 가르고 임하소서 / 거룩한 불꽃 하늘로서 임하사 타오르게 하소서 주 영광 위해 / 부흥의 불길 타오르게 하소서 진리의 말씀 이 땅 새롭게 하소서 / 은혜의 강물 흐르게 하소서 성령의 바람 이 땅 가득 불어와 / 흰 옷 입은 주의 순결한 백성 주의 영광 위해 이제 일어나 / 열방을 치유하며 행진하는 영광의 그 날을 주소서
1. 이 땅의 황무함을 보소서
공원길 산보를 하다가 가끔 부딪히는 신체 건장한 중년 신사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보라는 듯 가슴과 팔뚝을 드러내고 산보를 즐기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그의 건장한 몸을 부러워했습니다. 그러던 그가 기침이 오래 가기에 병원에 가보니 폐암말기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 여기 건장한 신사는 바로 한국교회라는 신사입니다.
한국교회는 20여 년 전까지 세계교회가 부러워하고 놀랄만큼 부흥되던 교회, 건강한 교회였습니다. 세계교회가 침체의 늪에서 허덕이고 있을 때 한국교회만은 급성장을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교회가 내적으로는 갈등을 겪고 사회적으로는 비난과 지탄을 받기 시작하더니 침체와 몰락을 겪고 있었습니다. 마치 깨어지는 타이타닉이나 적의 침공을 받는 진주만을 연상하게도 했습니다. 신체 건장하고 건강하기만 하던 사람이 중병을 앓고 있는 바로 그 모습이었습니다.
60년대 중반부터 80년대 중반까지 경이로운 부흥을 경험하던 한국교회는 88 서울 올림픽을 전후하여 침체를 시작하더니 무려 20년이 넘었건만 일어서질 못하고 있습니다.
십여 년 전부터 부흥찬송을 하며 모두가 이 땅에 과거에 임했던 성령의 불길이 다시 임하기를 그렇게 갈망했지만, 1907년 평양대부흥회 100년이 되는 해가 작년에 지나가고 2008년도 지나가고 있습니다. 작년에 많은 행사를 갖으며 그렇게도 한국 기독교인들이 염원했던 성령의 불길은 이 땅에 오지 않을 것입니까? 그렇다면 지금까지 기도해 온 것이 헛된 것일까요? 이제는 그 기도소리마저 들리지 않고 있습니다.
▶ 이에 대한 답은 이 땅에 부흥의 불길이 오기 전에 임하였던 하나님의 징계가 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세계적인 불황으로 한국도 불안과 초조 속에서 앞으로 되어질 일들에 대하여 촉각을 세우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세상만이 아니라 이미 영적으로 교회에 하나님의 심판과 더불어 징계가 임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 땅을 버리지 않고 새롭게 하기 위하여 회개를 이끌어 내기 위하여 준비하신다는 말입니다. 부흥은 하나님의 백성이 혹독한 징계와 심판을 경험한 후에 또는 임박한 심판에 대한 경고를 받은 후에 찾아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징계는 이미 찾아온 상태였습니다. 사람들은 어려움과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께 울부짖으며 도움을 구했습니다. 때때로 심각한 죄에 대한 자각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응답했습니다. 니느웨의 경우, 요나는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을 한 문장의 메시지로 전했습니다. 그러자 왕과 모든 백성 심지어 가축들까지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쓰고 회개했던 것입니다.
▶ 하박국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는 유다왕 여호야김 시대였습니다. 여호야김은 대단히 악한 왕이었습니다. 예레미야 36:20-26에 보면 하나님의 사람이 왕에게 성경을 읽어주면 두루마리 성경을 칼로 잘라 불에 던져 버리며 하나님을 모욕하고 말씀을 무시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을 통해 유다를 심판합니다. 느부갓네살은 주전 605년 유다를 침공, 여호야김 왕을 쇠사슬로 결박해서 잡아갑니다. 그때 다니엘과 그의 3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같은 젊은 인재들이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 하박국은 기울어가는 민족의 운명을 끌어안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합니다. 그 기도의 내용이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백성을 버리지 말고 수 년 내에 부흥하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회복과 치유 그리고 부흥을 구하고 있습니다.
이 본문을 설명하기에는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전후좌우의 여러 가지 상황을 설명을 해야 이 부흥을 위한 기도의 내용을 이해하실 수 있겠습니다. 하박국이라는 선지자가 하나님 앞에 기도를 시작합니다. 철학적인 질문이 섞인 기도를 시작하다가 결국 하나님 앞에 여러 가지 불만을 쏟아 놓습니다. “하나님 언제까지, 어느 때까지 우리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십니까? 어찌하여 나로 이런 꼴을 보게 하십니까? 주님은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는데 왜 이렇게 악한 것이 그냥 있으며 어찌 주님이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되 잠잠하십니까?” ‘왜, 어찌하여라’는 단어를 써서 계속해서 성토합니다. 하나님이 어찌하여 언제까지 이렇게 놓아두시겠습니까?
우리의 신앙도 가끔 질문이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론도 있을 수 있고, 불평도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이 낮기 때문에 하나님의 높은 생각을 이해할 수 없고, 우리의 생각이 좁기 때문에 하나님의 넓으신 뜻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 눈의 시야가 가깝게 밖에 볼 수 없기 때문에 그날그날 되어지는 상황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하루 앞의 일을 가지고 ‘팥 나라! 콩 나라!’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도 ‘하나님 왜 그렇게 하십니까?’라는 수많은 질문이 우리 마음속에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그런 질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심령의 진정한 부흥은 이러한 자세에서 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하박국은 하나님 앞에 대단한 불평과 함께 하나님께 시비에 가깝고, 호소에 가까울 정도의 하나님에게 원망 섞인 불평과, 의문과 질문을 쏟아 놓습니다.
이렇게 하박국은 질문을 쏟아놓고 퍼부었습니다.
합 2:1 / 나는 내 경계 초소에 서 있을 작정입니다. 나는 초소 위에 올라서서 주님이 내게 무슨 말씀을 하실지, 나의 탄식에 대하여 주님이 무슨 답변을 하실지 기다리기 위하여 먼 곳을 바라보고 있겠습니다.
물론 그의 기도 속에는 나라는 어지럽고, 기도의 응답은 더디고, 죄는 관영하고, 전쟁의 구름은 짙어만 가고, 나라의 운명은 풍전등화같이 위태한 곳에 놓여있고, 정권을 잡은 사람들은 시기와, 분쟁과, 그리고 부정에 정신이 없고, 하나님은 잠잠하시니 답답한 중에 마음을 호소하는 호소요, 간절한 하나님 앞에 외침이라고 보아야 될 것이지만 그의 질문에 대답을 하시기로 결심하셨습니다.
합 2:2-4 / 여호와께서 내게 이같이 대답하셨다. “내가 이제 네게 보여주는 것을 여러 서판에 명백히 써서 공개하여 그것을 누구나 대번에 읽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하여라! 3) 왜냐하면, 내가 지금 네게 보여주는 계획들이 아직도 정해진 시각을 향하여 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 계획들은 느리지만 꾸준하고 확실하게 이루어질 그 시각을 향하여 달리고 있으니 절대로 실망을 시키지 않을 것이다. 그 성취가 느리고 지체되더라도 꾸준히 기다려라. 그 시각은 틀림없이 올 것이다. 단 하루도 넘기지 않을 것이다. 4) 이 사실을 깨달아라. 악한 사람들은 제멋대로 허풍을 떨다가 멸망하지만, 의로운 사람은 진실하게 나를 의지하기 때문에 살 수가 있다. 그의 마음은(교만으로 가득 차서) 부풀어 있고 그 속에 성실함이 없다. 그러나 의인은 자신의 진실함으로써 살 수가 있다!”
여호와 하나님의 대답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여호와의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고 하나님의 음성이 조용히 들려왔습니다. 그렇게 말씀을 주시면서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농부들은 콩을 수확하려면 콩을 심고, 팥을 원하면 팥을 심고 이렇게 심은 종자보다 수확은 많이 하지만 종자가 바뀌는 법은 없다.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이 추수의 원칙이듯이 영적, 도덕적 세계에서도 그렇게 응용되는 것인데 신령한 세계는 두 가지 씨를 뿌리는데 하나는 육체를 좇아 뿌리는 씨요, 하나는 성령을 좇아 뿌리는 씨다. 육체를 쫓아 뿌리는 씨는 썩어질 것을 거두지만, 성령을 쫓아 뿌리는 씨는 영생을 거둘 것이다. 하나님은 우매하시거나 무지하신 분이 아니시라, 심은 대로 거두시는 분이십니다.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되리라" 진실과, 거짓이 갈라져서 반드시 심은 대로 거두게 됩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인내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 부흥은 먼저 하나님 앞에 원망과 불평을 버리고, 이론을 버리고 어린아이와 같이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되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 진실하신 분이기 때문에 심은 대로 거둔다는 것을 믿고 믿음으로 인내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대하 7:13-14 / 그러니 만일 내가 하늘 문을 닫아 비가 내리지 않게 하거나 메뚜기 떼를 보내 온 땅을 남김없이 갉아먹게 하거나 이 백성에게 전염병을 내려보내거든 14) 여호와의 백성이라고 불리는 내 백성은 스스로 깊이 반성하고 기도하며 악한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다시 나를 찾아라. 그러면 내가 하늘에서 그 기도를 듣고 모든 허물과 죄를 용서해 주고 그 땅의 손해도 갚아 주겠다.
결국 하박국은 마음에 기도가 바뀌었습니다. 마침내 마음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으로 마음에 감사와 기쁨이 넘치게 되니까 새로운 힘이 생겼습니다. 능히 환란을 믿음으로 극복할 것이며, 더욱 새롭게 변화되어 온 백성이 하나님을 찬양케 될 것을 믿었습니다. 진정한 부흥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합 3:16-19 / 주께서 이 모든 일을 내게 들려주셨을 때 내 뱃속의 창자가 모두 뒤틀렸고 내가 주님의 우렁찬 음성을 들었을 때 두 입술이 떨리기 시작하였습니다. 내 모든 뼈가 물러지고 내 두 무릎은 후들거렸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날을 기다리겠습니다. 우리를 공격한 그 백성에게 망국의 재앙을 내리는 그날을 나는 여전히 기다리겠습니다. 17) 무화과나무는 싹도 내지 않고 포도 덩굴에는 열매가 없습니다. 올리브나무의 소출은 실망뿐이고 논밭의 곡식들은 먹을 것이 없습니다. 목장의 양 떼들은 모두 다 사라졌고 외양간에는 소 한 마리 남아 있지 않습니다. 18) 그렇더라도 나는 여호와 때문에 기뻐 뛰겠습니다. 나를 도와주겠다고 약속하셨으니 나는 즐거워하겠습니다. 19)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 나의 힘이십니다. 그분이 나의 두 발을 암사슴의 다리와 같게 하시고 모든 산들의 위에서 안전하게 달리도록 힘을 주십니다.
2. 부흥이란?
부흥이 무엇입니까? 교회에서 흔히 부흥이라고 말할 때 단지 교회의 수적인 성장을 부흥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부흥의 열매로 복음이 전해지고 전도의 열정이 되살아나 수적성장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수적성장이 곧 부흥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한국교회에서 부흥은 곧바로 부흥회와 연결이 되어집니다. 식어졌던 신앙의 열심도 살아나고 뜨거운 체험도 한번씩 하고 소리내 기도도 한번 해 보고 그러다가 다시 열심이 식어지기도 하는 연례행사 같은 것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그것 또한 부흥의 본질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부흥이란 말을 사전에서는 “쇠하였던 것이 다시 일어남, 또는 다시 일어나게 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부흥이란 “다시 일어난다”는 뜻으로 침체되었던 것들이 새롭게 살아나고 회복되는 것을 말합니다. 영어의 revival이란 말도 ‘다시’라는 말과 ‘산다’는 말이 합쳐져서 ‘다시 살아나다, 소생한다, 활기를 되찾는다’는 뜻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을 배신하고 말씀을 버리고 타락했다가 몰락하고 멸망해 가는 조국의 현실을 바라보며 하나님께 매달리고 있습니다. “하나님, 이 민족이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어 매를 맞고 심판 받는 사실에 아무런 의의가 없습니다. 사랑받을 가치도 없고, 잘한 것도 없고, 내세울만한 공로도 없습니다. 하오나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믿고 간구합니다. 내 민족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재건의 기회를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당당히 살아가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그날 그 기회를 주시옵소서. 이방의 조롱거리에서 벗어나 영광의 백성이 되는 그날을 주시옵소서.”
바로 이런 의미로 ‘부흥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수 년 내에 부흥하게 해 달라고 요구합니다. ‘수 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두 번 반복하고 있습니다. 영어 성경에서 이 말을 "work in the midst of the years" “한 두 해가 가기 전에 역사하소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주 가까운 장래에, 깜짝 놀랄만큼 짤막한 시간 내에 부흥을 보게 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 사회의 암울한 현실을 바라보며 희망의 빛을 상실한 채 날로 어두워져만 가는 역사를 바라보며 하박국의 기도가 우리의 심장에서 터져 나와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구석구석 병든 채 신음하는 민족을 바라보며, 침체와 분열과 갈등으로 허덕이는 한국교회를 바라보며, 세속적 가치로 병들어 있는 교우들을 보며, 생명을 잃고 죽어 가는 영혼을 보며 하박국의 기도를 쏟아내야 할 때라고 느끼지 않습니까?
“하나님이여, 우리는 가진 것 없는 백성이었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 가운데 많은 복을 누렸습니다. 교회도 잘 성장했고 경제와 사회도 잘 성장해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교만했고 방만했고 하나님께 감사할 줄 몰랐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받기에 합당한 존재들입니다. 많은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도 압니다. 매 맞아 마땅하다는 것도 압니다. 하나님이여, 하오나 이 백성을 불쌍히 여겨주소서. 우리에겐 부흥을 간구할 아무런 공로도 의로움도 없습니다. 우리의 가정들은 복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하오나, 이 백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긍휼을 믿습니다. 수 년 내에 부흥하게 하소서. 곧 부흥하게 하소서.” 할렐루야!
100년 전, 1907년 일어났던 그 날의 부흥이 오늘 이 땅에서 일어나게 하소서.
3. 1907년의 부흥
1907년 대부흥이 있었던 그 시대만큼 우리민족사에서 고통스러웠던 때가 또 언제 있었겠습니까? 국권은 일본의 손에 통째로 넘어가고 황제는 폐위당했습니다. 나라를 살려보려던 애국지사들의 몸부림, 자결, 원수들 암살... 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모든 국민들은 허탈과 절망에 빠져있었습니다. 세계가 한국을 버리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바로 이때 하나님이 이 땅을 찾아오셨습니다. 성령님이 임재하셨습니다.
그것은 장차 한국민족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시려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였습니다. 우리의 조상들은 집회시간마다 목이 터져라 심장이 터져라 ‘성령이 오셨네 성령이 오셨네’를 불렀습니다. 성령님의 임재와 함께 너도 나도 앞을 다투어 죄를 고백했고, 관계가 깨진 사람을 찾아가 먼저 용서를 구했습니다. 회개와 성령의 임재, 대부흥과 불신자를 구원하려는 열정이 예배시간, 기도시간, 찬송시간 그리고 성경공부시간마다 폭발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남자와 여자, 노인과 아이를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날의 대부흥 운동은 불이 번지듯 교회에서 교회로, 도시에서 도시로, 학교에서 학교로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가고 있습니다. 선교사님들과 길선주 장로, 신학생들과 제직들이 가는 곳곳마다 성령의 불이 옮겨 붙고 있었습니다. 평양에서 시작된 불이 서울로 대구로 광주로 의주로 공주로, 선천, 해주, 영변과 재령으로 개성, 강화, 재물포로 원산, 춘천, 북청으로 뿐만 아니라 이 불은 만주와 중국으로까지 번져가고 있었습니다.
4. 부흥하게 하소서(참된 부흥)
1907년에 있었던 그날의 부흥이 오늘 이 땅에서 새롭게 일어나기를 기대할 때 그것은 도대체 어떤 모습의 부흥일까요? 성경이 말하는 참된 부흥은 어떤 부흥일까요? 참된 부흥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분명한 몇 가지 공통된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 참된 부흥이 오면 강력한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이 나타납니다.
어느 시대나 교회와 성도들이 침체되어 지면 하나님의 이름이 조롱을 받고 조소의 대상이 됩니다. 그러나 부흥이 오면 하나님이 친히 백성과 역사 가운데 오셔서 당신의 이름과 영광을 회복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부흥은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와 함께 하나님의 영광이 모든 사람의 마음과 교회와 민족 가운데 들어나는 것입니다.
2. 참된 부흥이 오면 온 교회 안에서 통회하고 자복하는 회개운동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함께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을 친히 뵙기엔 너무나 부족하고 부적합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깊이 애통하게 됩니다. 아주사 부흥의 선구자 프랭크 바틀맨은 “부흥의 높이는 회개의 깊이로 결정된다”고 했습니다. 회개를 하고 나면 정죄감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강하게 확신하고 하나님의 복된 소식을 전해야지 하는 구령의 열정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부흥은 1907년 그날에 있었던 회개의 몸부림이 한국교회에서 일어나 교회들이 거룩해 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교회들마다 단순히 수적인 증가가 아니라 불신자를 전도하고자하는 하나님의 가슴앓이가 회복되기를 갈망하는 것입니다. 불신자 전도로 부흥되는 교회들을 보고 싶은 것입니다.
3. 참된 부흥이 오면 교회들마다 능력이 나타나고 역사를 변화시키는 영향력이 커지게 됩니다.
교회에 오는 사람들이 변화되고 그 영향력은 교회라는 울타리를 넘어 교회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쳐 그들이 기쁨으로 교회에 찾아오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부흥은 한국교회에 사도행전적 능력과 영향력이 회복되는 바로 그것입니다.
4. 참된 부흥은 그 시대 모든 사람들의 영혼 깊은 곳에서 그분을 구하는 갈망이 커지는 것입니다. 부흥이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입니다. 타는 목마름으로 하나님을 구할 때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납니다. “당신의 은혜나 능력이나 선물 이전에 하나님 당신 자신을 구합니다.” 이것이 부흥입니다.
목마름과 굶주림이 없는 곳에 그분은 성령을 부으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갈급한 자, 갈급해 하는 공동체를 찾아오십니다. 참된 부흥을 우리가 원한다면 하나님은 그분이 가지고 계신 선물에 흥분하기 보다는 그분 자신에게 흥분하기를 원하십니다.
먼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아빠에게 “아빠, 뭐 사왔어? 선물은?”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린아이지요. 사랑받는 아들은 아빠 한 분으로 만족하고 무릎에 기어올라 아빠와 사랑을 나눕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혜택만을 구하는 자들에게는 오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얼굴을 구하는 자들에게 오십니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그분의 손길만 구해왔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우리에게 해주실 수 있는 일을 원합니다. 그분의 축복을 원하고 짜릿한 흥분을 원합니다. 그러나 깊은 헌신으로 그분의 얼굴을 구하는 일에는 꾀를 부립니다. 그분의 얼굴을 구하면 그분의 마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는 부흥을 구하는 것 보다 더 긴급한 것이 있습니다. 부흥을 주시는 그분 하나님을 구하는 것입니다.
5. 부흥의 땔감이 필요하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흥이 무엇이며 참된 부흥이 어떤 것인가를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은 한국교회가, 우리가 함께 진정한 부흥을 경험하고 부흥의 역사를 일으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 하박국 3장 1절을 읽어보면 퍽 재미있는 한 단어를 발견합니다.
“시기오놋에 맞춘 선지자 하박국의 기도라” “시기오놋” - 그 뜻이 뭘까요? 악기 이름이거나 어떤 음악 부호일 것이라고 성경학자들은 말합니다. 절정의 환희, 용솟음치는 기쁨을 표현하는 부호라고 합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민족의 아픔을 가슴에 끌어안고 성전에 들어가 엎드려 기도하던 선지자는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얼굴을 경험합니다. 자신이 경험한 그 놀라운 부흥이 지금 하나님의 진노 앞에, 심판의 불길 앞에 쓰러져가는 이 민족, 이 백성 안에서 멀지 않은 시간에 다시 일어나고 다시 살아날 것을 꿈꾸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이 놀라운 주의 일을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기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국교회, 한국민족의 부흥을 준비하고 계시는 성령님께서 지금 부흥의 불쏘시개, 부흥의 땔감을 찾고 계십니다. 불은 빈 제단에 내리지 않습니다. 불이 내리려면 제물이 있어야 합니다. 엘리야는 제단에 땔감과 재물을 쌓은 후에 하나님의 불을 구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부흥의 불길을 원한다면 제물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부흥의 제단에 저를 올려놓습니다. 우리 가정, 우리 교회를 올려놓습니다. 주님, 주님의 불로 저를 불사르소서.”
웨슬리는 이에 대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불에 올라가면 사람들은 내가 타는 것을 보려고 모인다.”
이 마지막 때 있으나 마나한 교인 한 사람으로 사시겠습니까? 우리 교회가 또 하나의 교회로 이 땅에 남아야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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