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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08 사순1주간 화 – 133위 082° 서태순 베드로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마태 6,7-8).
133위 082° ‘하느님의 종’ 서태순 베드로
이름 : 서태순 베드로[0.1]
출생 : 1823년, 청풍
순교 : 1867년 1월 23~24일, 교수, 상주
서태순(徐泰淳) 베드로는 태중 교우로, 충청도 청풍에서 서치보(徐致輔)의 3남으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부모의 가르침을 받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본관은 달성(達成)이고, 1866년에 체포되어 서울 포도청에서 순교한 서익순(徐翼淳, 요한)은 그의 형이다.[1]
서태순 베드로의 가족들은 일찍부터 박해를 피해 이곳저곳으로 피신해 다니면서 생활해야만 했지만, 어려운 상황에서도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다.
장성한 뒤 서태순 베드로는 김 데레사와 혼인하여 충주 장호원(현 충북 음성군 감곡면)에서 살다가 경상도 대구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1859∼1860년 경신박해로 체포되어 대구 진영으로 압송되었다.[2]
이때 서태순 베드로는 관장 앞에서 혹독한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교회 서적을 바치지도 않았고, 아무도 밀고하지 않았다. 그러나 형벌이 계속되면서 팔다리가 끊어질 지경에 이르고, 여섯 달 동안 고통스러운 옥살이를 하게 되자 마음이 약해져 배교하고 석방되었다.[2.1]
이후 서태순 베드로는 여러 해 동안 냉담 상태로 지내면서 교회를 멀리하였다. 그러다가 이전의 잘못을 크게 뉘우치고 회두하여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다. 그는 이때부터 ‘다시 체포된다면 끝까지 신앙을 지키고 순교하겠다.’는 원의를 다지곤 하였다.
다시 교회의 품으로 돌아온 서태순 베드로는 가족을 데리고 대구를 떠나 문경 한실(현 경북 문경시 마성면 상내리) 교우촌으로 이주하여 신자들과 함께 생활하였다. 그러나 평온은 오래 가지 않았다.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나면서 천주교 신자들을 찾아다니던 문경포교들이 한실까지 들이닥친 것이다.
1867년 1월 18일(음력 1866년 12월 13일) 포교들에게 체포된 서태순 베드로는 문경 관아로 압송되었다가 상주 진영으로 이송되었다. 이곳에서 그의 아내 김 데레사는 임신했다는 이유로, 그의 아들은 어리다는 이유로 석방되었다. 반면에 서태순 베드로는 세 차례에 걸쳐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했으나, 여기에 굴하지 않고 “나는 천주교 신자이므로 결코 신앙을 버릴 수 없소.”라고 굳게 신앙을 증언하였다. 그런 다음 함께 투옥되어 있던 김 아우구스티노, 서유형 바오로, 박 루치아 등과 함께 다시 한 차례 매를 맞고 교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가 1867년 1월 23∼24일(음력 1866년 12월 18∼19일)로, 당시 그의 나이 44세였다.[3]
[註]__________
[0.1] 서태순 베드로 가계도
[1] 마백락, 『경상도 교회와 순교자들』, 대건출판사, 1989, 88-89.272-273면; 『병인치명사적』, 3권, 37-39면; 4권, 12-14면; 『박순집 증언록』, 3권, 18-19면. 『병인치명사적』의 내용과 『박순집 증언록』의 내용은 동일한데, 이는 대구에 살던 서태순 베드로의 아내 김 데레사와 조카 서상돈(徐相燉) 아우구스티노[1.1]가 증언한 것이다.
[1.1] 서상돈 아우구스티노(1850~1913) ‘나무위키’
서상돈은 1850년 11월 10일 경상도 김산군 군내면 마좌산리(馬佐山里) 마잠(현 경북 김천시 지좌동 385 일원 마잠마을)에서 옹기굴 막노동꾼으로 일하던 아버지 서철순(徐哲淳) 바오로와 어머니 김해 김씨 김(金) 아가다 사이의 3남 5녀 중 두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서상돈의 9대조는 선조(宣祖)와 인빈 김씨(仁嬪金氏) 사이에서 태어난 서장녀인 정신옹주(貞愼翁主, 1583~1653)와 혼인하여 달성위(達城尉)에 봉해진 서경주(徐景霌)이다. 8대조는 진사시에 급제하여 종3품 풍덕도호부사를 역임한 서정리(徐貞履)였고, 6대조는 진사시와 문과에 급제하여 종2품 강원도 관찰사에 올랐던 서종헌(徐宗憲)이며, 5대조는 음서 벼슬로 종6품 용안 현감을 지낸 서명함(徐命涵)으로 직계 선조들이 대대로 관직을 지낸 문벌 가문 출신이었다.
그러나 고조부 서광수(徐光修)가 1784년 조선인 최초로 영세한 이승훈(李承薰) 베드로의 선교로 천주교에 입교하였고, 1785년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 때 연루되어 문중으로부터 제명되자 조정 및 주변으로부터 냉대와 박해를 받는 처지가 되었다. 이에 서광수와 슬하의 6남 2녀는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는데, 이때 서광수의 4남이자 서상돈의 증조부인 서유오(徐有五)는 충청도 충주목에 있던 문중 땅으로 숨어들었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조부 서치보(徐致輔)가 그의 아들 5형제, 서인순(徐隣淳), 서명순(徐名淳), 서철순(徐哲淳), 서익순(徐翼淳, 요한), 서태순(徐泰淳, 베드로)을 이끌고 경상도 문경 여우목(현 문경시·읍 중평리) 교우촌에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훗날 서상돈의 아버지가 되는 서철순은 다시 가족을 이끌고 경상도 김산군 군내면 마좌산리 마잠에 정착하였다. 그곳에서 살다가 서상돈과 그의 동생 서상정(徐相定)을 낳았다. 이후 그의 가족들은 경상도 상주목 청동면 석단리(현 상주시 청리면 삼괴리) 교우촌으로 다시금 이주하였는데 1857년 10월 6일 부친이 이곳에서 별세하자 서상돈은 1859년경 어머니·동생과 함께 대구도호부 성서면 새방골 죽전(현 대구시 달서구 죽전동)으로 이주하여 인근에 살던 외조부에게 의탁하였다.
그는 13세 때 집 근처 어느 상인의 심부름꾼으로 들어가 점차 장사를 배우기 시작했으며 18세 되던 해 대구에서 천주교 원로회장 서용서(徐用瑞,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 외조부)의 후원과 보부상의 거두인 최철학, 외사촌 형 김종학 등 천주교인들의 도움으로 보부상을 시작했다. 그의 사업은 점점 번창하여 고령현 개포를 본거지로 삼고 부산에서 안동까지 800리에 달하는 사업 영역을 가진 보부상 800명을 거느리는 대구에서 손꼽는 거상이 되었다. 이 자금을 바탕으로 그는 경상도 안동, 군위, 김천, 칠곡, 달성 등의 토지를 매입하여 대지주로 변신하게 된다. 등짐을 지고 재래시장을 전전하던 소년은 35세가 지날 무렵 대구 지역의 유력한 경제인 중의 1명이 되어 있었다.
[2] 경신박해(1859년 말~1860년 8월) 때의 경상도 지역 천주교 신자 체포와 석방 내용에 대해서는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1860년 9월 3일 자 서한」을 참조할 것(천주교 배티성지·양업교회사연구소 편, 『하느님의 종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서한집』, 천주교 청주교구, 2009, 191-193면). 위의 서한에 나오는 “대구로 압송되었다가 석방된 한 명의 신자”가 바로 서태순 베드로였을 것이다.
[2.1] 서태순 베드로는 대구에서 1860년 전후로 일어난 경신박해(1859년 말~1860년 8월)로 옥에 갇혔다. 이때 부인 김 데레사도 함께 갇혔는데, 해산달이 가까워 풀려났다. 부인은 친정이 있는 풍기로 가는 길에 딸 마리아를 낳았다. 경신박해가 가라앉으면서 서태순도 풀려났다. 서태순 가정은 1866년 병인년 다시 박해가 시작되자 문경 한실로 피난 갔다가 문경 포졸들에게 잡혔다. 그는 상주 진영으로 이송되어 옥에 갇혔고, 그해 12월경에 순교했다. 서태순이 순교하자 부인은 일곱 살 된 서 마리아를 데리고 서상돈이 사는 대구로 왔다. 이 어린이는 자라서 동정녀로 살았다.[3.1]
[3] 『치명일기』, 정리 번호 798.799번. 베드로의 순교일을 1866년 12월 8~9일(음력)로 기록한 경우도 있으나(『병인치명사적』, 3권, 38면; 『박순집 증언록』, 3권, 18면), 그가 체포된 날짜가 12월 13일(음력)이므로 순교일은 12월 18~19일이어야 맞는다. 순교 이후 베드로의 시신은 아내 데레사와 조카 서상돈 아우구스티노 등에 의해 거두어져 칠곡 한티(현 경북 칠곡군 동명면 득명리)에 안장되었다.
[3.1] 서 마리아(1860~1917) - 대구의 동정녀들/글. 김정숙 소화 데레사(영남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 교수)
한국사회에서 독신이라고 하면 종교가 있느냐고 묻는다. 그리고 가톨릭 신자라고 하면 수긍하는 편이다. 가톨릭 신자 사이에는 독신생활이 그리 낯설지 않다는 이야기일지 모른다. 한국은 전통적으로 결혼해야만 한다고 생각해 왔다. 조선왕조시대에는 가뭄이 들면 혼기를 놓친 사람들을 찾아서 결혼시켜 주기도 했다. 그리고 일정한 나이를 넘긴 사람은 관에서 주도하여 결혼시켰다. 심지어는 오늘날까지도 영혼결혼식이 남아 있다.
이러한 사회에 천주교가 전래되었다. 천주교는 들어오면서 바로 동정생활을 실천했고, 동정녀들의 활동이 시작되었다.[3.2] 당시 결혼하지 않는 일이 극도로 억압되었던 사회풍습 때문에 신자들은 스스로 기혼자처럼 머리를 얹고 동정생활을 했다. 그들은 초기 교회에서 순교자의 후손이었고, 교회 일을 돌봤으며, 순교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신앙의 자유가 주어지고 수녀원이 세워지자 그들 중 일부는 수녀원에 들어갔다. 동정녀들 집안에서는 수도자나 성직자가 배출되었다.
우리 대구 지역에도 일찍부터 동정을 동경한 사람들이 있었다. 1816년에 순교한 이시임 안나(1782~1816, 예산군 고덕면 몽곡리 출신)는 동정녀들이 사는 곳을 찾아가다 변을 당했다. 그래도 그는 교우촌으로 가서 신자들과 살다가 결국 관덕당 형장에서 순교했다. 대구에 본당이 자리 잡게 될 무렵에는 이미 동정녀들의 모임이 있었다. 그 모임의 중심인물은 서 마리아였다. 서 마리아는 서상돈의 작은 아버지인 서태순 베드로와 김 데레사의 딸이다. 서태순은 대구에서 1860년 전후로 일어난 경신박해(1859년 말~1860년 8월)로 옥에 갇혔다. 이때 부인 김 데레사도 함께 갇혔는데, 해산달이 가까워 풀려났다. 부인은 친정이 있는 풍기로 가는 길에 딸 마리아를 낳았다. 경신박해가 가라앉으면서 서태순도 풀려났다. 서태순 가정은 1866년 병인년 다시 박해가 시작되자 문경 한실로 피난 갔다가 문경 포졸들에게 잡혔다. 그는 상주 진영으로 이송되어 옥에 갇혔고, 그해 12월경에 순교했다. 서태순이 순교하자 부인은 일곱 살 된 마리아를 데리고 서상돈이 사는 대구로 왔다.
이 어린이는 자라서 동정녀로 살았다. 그는 1886년 영남지방의 첫 본당이며 대구본당의 전신인 신나무골에 로베르(Robert, Achille Paul, 1863~1922) 신부가 부임했을 때부터 교회 일에 봉사했다. ①서 마리아는 권아기(權兒女), 서희, 김선이 등을 데리고 있었으며 신앙 때문에 집에서 쫓겨난 박금성 도로테아를 받아들였다.
동정녀들은 드망즈(Demange, Florian, 安世華, 1875∼1938) 주교가 펴낸 『대구대목구 사목지침서』(1912년)에도 그 존재가 보인다. 그러나 이들의 실체를 찾을 수 있는 기록은 계산성당의 성모회 조직에서 볼 수 있다. 동정녀들은 성모회 조직의 기반이 되었다.
계산성당 성모회는 1921년 300명의 회원으로 창립되었는데 자선부, 전교부 두 개의 활동부서가 있었다. 전교부는 일반 부인, 자선부는 동정녀 그룹이었다. 이 두 부서를 아우르는 회장단이 있었으나 두 조직은 독자적으로 운영된 것 같다.
서 마리아는 1917년 58세로 선종했기 때문에 ②박금성은 동정녀 그룹이 성모회 자선부로 옮겨가는데 다리 역할을 하게 됐다.
박금성은 성모회 창립 이래 30여 년 동안 자선부의 책임자로서 활동했다. 그는 완고한 유교 가정의 딸로 혼자 은밀히 천주교를 신봉하다가, 어느 날 부친에게 발각되었다. 부친은 집안을 망칠 계집애를 죽여 버리라면서 하인들에게 우물에 넣으라고 명했다. 하인들은 지엄한 상전의 명에 복종하지 않을 수 없어 아가씨를 샘에 빠뜨렸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남편이 잠든 틈을 타 딸을 건져 도망치게 했다. 그리하여 그는 서 마리아와 살게 되었다. 박금성은 신체도 남성처럼 장대하고 성격도 억센 면이 있어 여장부라는 별명을 가졌다. 박금성은 1952년 75세로 선종했다.
한편 동정녀의 활동은 자선부의 사업을 통해 알 수가 있는데, 자선부원은 그 결속과 질서가 엄격했다. 자선부의 입회금은 10원 이상으로, 당시로는 고액의 이 입회비는 일종의 복지보험료와 같은 역할을 했다. 자선부원들은 동료들끼리 공동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비록 가세가 넉넉하고 부모형제가 잘 산다고 해도 독립해서 살아야 했다. 따라서 그들 상호 간의 상부상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들 중 누가 세상을 떠나면 공동체로서 연도와 위령미사를 봉헌했고 상복을 입어 자매로서의 정의를 표했다. 입회비는 여기에 드는 비용으로 적립되고 있었다. 본래 동정녀들은 교회로부터 허락받았고, 주문모 신부는 동정을 원하는 이순이 누갈다와 유중철 요한을 그 시대 상황을 감안하여 부부처럼 위장해서 살아가도록 배려해 주었다. 최양업 신부 때에는 주교가 조선사회에서는 동정으로 살기가 위험하다며 발바라라는 여성에게 동정생활을 허락하지 않았던 예도 있었다.[3.3]
또한 동정녀들은 서약을 하고 머리를 올리는 예식도 있었는데, 머리는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이 얹어 주었다 한다. 이를 보면 공동체 안에 리더가 있었던 듯하다. 동정녀들은 흰 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입고 쪽을 졌는데 해방 이후에는 비녀 없이 틀은 ‘양머리’를 하기도 했다. 그들은 계산성당 부근에 집을 얻어 몇 개의 그룹으로 나뉘어 산 것 같다. 동산 언덕 올라가는 계단, 일명 선교사의 길 왼쪽, 또 최근 현대백화점 주차장으로 편입된 곳 등에 동정녀들의 집이 있었다. 이 집들은 그들의 주거인 동시에 여러 행사의 집합 장소가 되기도 했다. 동정녀들의 모임인 성모회 자선부는 자선사업과 전교활동을 했는데, 특히 전교활동으로 예비신자 지도와 병자위문, 임종자 대세 수여 등의 활동을 했다. 동정녀 제(諸) 데레사는 300여 명에게 대세를 주는 전교 실적을 올렸는데, 제 데레사는 김현옥 바오로(1821~1896) 회장의 수양딸이었다.
해방 이후 동정녀들은 성물이나 옷감 등을 들고 지방에 나가 그것을 팔아 생활하면서 교리를 가르치고, 전례를 도와주었다고 한다. 또 동정녀들은 미사 때 기도를 맡기도 했다. 당시 전례, 독서, 기도 등은 특별히 허락된 사람에게만 부여되었던 사도직의 일부였다. 그들은 교회 내 갑자기 닥친 크고 작은 일들도 도왔다. 지방에서 대첨례를 지내러 올라 온 사람들이 행사가 끝나고 통행금지에 걸리거나 차편이 끊겼을 때 이들을 재워 주기도 했다.
교구에서는 6·25전쟁 때 신자들이 대구 계산동 성모당에 모여 ‘평화신공’을 바치던 자발적 기도 모임이 있었다. 이때 홍정옥 마리아(1892~1979) 등 동정녀들이 크게 기여했고, 교회 구성원들도 그들을 존경하며 따르고 돌보았다. 태진당 한의원 등에서는 동정녀들에게 무료로 진료해 주었다고 한다.
동정녀 그룹은 50년대 후반으로 가면서 흩어진 듯하다. 이 과정을 1949년부터 성모회 3대 회장을 맡았던 ③홍정옥 동정녀의 생을 통해 볼 수 있다. 홍정옥은 젊은 시절 서울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에 입회했다가 위장병을 얻어 치료차 대구로 귀가하였다. 병이 낫지 않아 수녀원으로 돌아가지는 못했으나 그는 처음 발한 허원대로 동정녀로 살았다. 그런데 홍정옥은 1954년부터 동생네 가족이 흩어지게 되자 조카 홍명연 데레사(현 92세)와 함께 살기 시작했다. 이때쯤에는 차 루시아, 서 말다 동정녀 등도 부근에 집을 얻어 살았다고 하니, 이 무렵부터 공동생활이 해체된 것 같다. 그럼에도 홍정옥은 평생 남의 장례를 돕는 등 궂은일을 했고, 호열자(콜레라)가 돌 때 대세를 주러 다니다가 순경에게 제지당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꾸준히 흰 광목으로 한복을 만들어서 시장에 팔았다. 그리하여 그는 재물도 모아 덕산파출소(현 중앙파출소, 대구 중구 수동 56-2)뒤와 대구 남산 2동 문우관(대구 중구 남산동 570-1)근처 등에 작은 집을 마련할 수 있었다.
홍정옥은 1979년 감기로 약 2주일 누웠다가 87세를 일기로 선종했다. 대녀가 130여 명인 홍정옥의 장례에는 대녀들이 상복을 입고 오는 등, 엄청난 사람이 몰렸다. 그의 상여가 현재의 범물동 묘지로 가는데 묘지까지 가는 조문객들이 너무 많아 버스 6대로도 모자랐다고 한다. 그를 모시던 홍명연의 아들이 신부가 되고, 홍명연의 동생은 수녀가 된 일도 우연은 아닐지 모른다.
위에 말한 서 마리아, 박금성, 홍정옥 외에도 서 도로테아 동정녀(서정덕 주교의 고모할머니) 등 10여 명의 동정녀 이름이 문헌에 나타나며, 또 다른 동정녀 10여 명이 구전으로 남아 있다. 대구에서 성모회가 동정녀 회원들로 자선부를 편성할 무렵, 대구 지방은 30여 명의 동정녀가 있었으며, 동정녀가 많기로 전국에서 첫째라고 한다. 그러나 동정녀들은 1960년대 이후 평신도 사도직 단체가 많이 생겨나고 수녀들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더 이상 활기를 띠지 못하게 된 것 같다.
동정과 모성을 함께 지닌 여성이 가장 완벽하다고 한다. 이는 성모 마리아만이 지닌 속성이다. 그러나 여성은 언제나 동정과 모성을 함께 지닌 성모 마리아를 닮고 싶어 했다. 또한 이들은 함께 모여 그 힘든 과정을 헤쳐 나가고 싶어 했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둘만 모여도 나는 함께 할 것이다.”라고 하셨다. 둘이라면 개인적인 이기(利己)를 고집할 수가 없다. 즉 예수님은 공동의 선, 공동의 목표를 원하신 것이다. 동정녀는 이러한 말씀을 지니고 있었다. 오늘날 독신이 늘어나는데, 독신생활을 사회는 물론 자신도 임시적 상태처럼 생각하고 평생을 보내지는 않는지? 신앙을 가진 독신자가 굳센 목표를 가지고 살 수 있도록 교회와 사회는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동정녀들의 삶을 찾아내 그 의미를 음미하는 일은 또 다른 가치가 있다. 우리 교회사의 한 축인 그들의 믿음과 삶을 밝혀주는 증언이나 자료가 기다려진다.
[3.2] 오직 하느님의 배필, 동정녀들/가톨릭신문 2009.3.29 [제2641호, 11면] 참조
“오직 주님만 섬기기 위함입니다”
이영희…혼담 피해 호랑이에 물려간 것처럼 꾸며
이영덕…혼인 강요받자 어머니·동생과 함께 가출
김효임·효주…덕행·극기로 혹독한 형벌 견뎌
김 루치아…심문 중 논리적 대답으로 형관 감동을 줘
①자수하기 전까지 실을 타 생계를 유지했던 이영희. · ②부친이 강제로 혼인시키려 하자 혈서를 써 동정의 뜻을 발한 이영덕 성인 · ③불 달군 쇠꼬챙이로 13군데나 지짐을 받는 성 김효임·김효주 동정 자매 (탁희성 작)
‘동정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교리에 대한 특별한 이해가 필요하다. 당시 ‘동정’을 지켰던 순교자들을 보면 얼마나 많은 교리 지식을 통해 그러한 신념을 가질 수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신념을 지키기 위한 ‘동정’의 극기가 당시로서 얼마나 어려운지 알기에 우리는 순교자 중에서도 동종순교자를 따로 분류하기도 한다. 순명한 그리스도를 본받아 동정 생활을 지키고자 했던 여인들, 그들은 오직 ‘하느님의 배필’이다. 유교가 깊게 뿌리 내렸던 조선 사회에서 처녀가 혼인하지 않고 신념을 지키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 할 일이었다. 혼기가 차오면 부모는 다른 가문의 자손과 혼담을 나누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그것 또한 거절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 천주교 103위 성인 중 동정녀들은 어떻게 자신의 신념을 지킬 수 있었을까.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한 시점 또한 그들이 10살도 채 되지 않은 때였다. 동정을 지키기 위한 그들의 사연은 지금도 눈물겹기만 하다.
◆조선 박해시대 동정 순교자들
○성녀 이영희 막달레나(1809~1839) : 동정 순교자 이영희는 성장하면서 동정을 지킬 것을 결심한다. 혼기에 이르자 이영희 집안 역시 혼담이 오갔는데, 혼담을 피해 그는 호랑이에게 물려간 것처럼 꾸미고 상경한다. 과부가 돼 친정에 돌아온 고모 이매임과 함께 살며 신앙생활을 이어갔다. 1839년 김성임, 김 루치아, 어머니, 언니와 함께 자수한 뒤 포청과 형조에서 일곱 번 형문을 받고 7월 20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31세의 나이로 순교한다.
○성녀 이영덕 막달레나(1812~1839) : 자신의 강한 신념을 부모에게 당당히 밝힌 사례도 있다. 동정 순교자 이영덕은 외교인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 혼기에 이르자 아버지에게 외교인과 혼인할 것을 강요받게 된다.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한 그는 꾀병을 앓기도 하고 여러 가지 수를 써 혼담을 피했는데 후에는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써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완고한 아버지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범 라우렌시오 주교에게 가출할 수 있도록 청원한다. 그러나 주교가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어머니, 동생과 함께 집을 나와 교우들의 집에서 숨어 살았다. 당시 조선 풍습으로 가출한 부녀자는 집으로 절대 돌아갈 수 없었으므로 주교는 세 모녀가 살 수 있도록 집 한 채를 마련해 주었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체포돼 12월 29일 6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28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받아 순교했다.
○성녀 박희순 루치아(1801~1839) : 어린 순조의 유혹을 용기와 덕으로 물리쳐 그 명성이 세간에 널리 퍼졌던 동정 궁녀도 있다. 어려서부터 뛰어난 미모와 재주 때문에 궁녀로 뽑혀 궁궐에 들어간 동정 순교자 박희순은 이후에도 동정을 지키다 병을 핑계로 궁궐을 나왔다. 당시 궁녀의 신분으로는 신앙생활을 유지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후 조카의 집에 살다 기해박해 때 체포됐다. 다리가 부러지고 골수가 흐르는 만신창이의 몸으로 교우들에게 권면의 편지를 써 보냈던 그는 5월 24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39세의 나이로 순교한다.
○성녀 김효임 골룸바(1814~1839)와 김효주 아녜스(1816~1839) 자매 : 동정 자매로 잘 알려진 김효임·김효주 순교자는 동정녀이기에 갖은 수모를 당해야만 했다. 어려서부터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하고는 덕행과 극기로써 모범적 신앙생활을 했던 그들은 기해박해 때 체포돼 매우 혹독한 형벌을 받았다. 자매는 포청에서 이른바 학춤이라는 혹형과 달군 쇠붙이로 열세 군데나 지져대는 혹형을 받았고, 옷 벗긴 채 남자 죄수 방에 넣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갑자기 자매의 몸에 신비스러운 힘이 생겼고 남자 죄수들은 자매를 감히 범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후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는다.
○성녀 이인덕 마리아(1818~1840) : 언니 이영덕 막달레나와 함께 동정녀인 동시에 순교자인 이인덕 마리아는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그해 6월 어머니, 언니 이영덕 막달레나와 이 가타리나, 조 막달레나, 이영덕 막달레나 등과 함께 체포되어 이듬해 1월 31일 '당고개'에서 5명(聖 박종원·홍병주, 聖女 손소벽·이경이·권진이)의 교우와 함께 22세의 꽃다운 나이로 참수되어 순교했다.
○성녀 김임이 데레사(1811~1846) : 동정녀이며 순교자인 김임이 데레사는 서울의 교우 가정에서 태어나 일곱 살 때 이미 수정할 결심을 하고 그 후로 신앙생활에만 전념했다. 20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오빠 베드로와 함께 친척들의 집을 전전했고, 1839년 기해박해 후에는 이문우 요한의 양어머니 오 바르바라의 집에서 5년 동안 살았으며, 1845년부터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집에 식복사로 들어갔다. 1846년 5월 김대건 신부가 체포되자 당시 회장이던 현석문 가롤로는 김 신부의 집에 남아 있던 여교우들을 새집으로 피신시켰는데, 7월 11일 포졸들이 새집에 들이닥쳤다. 이렇게 해서 현석문, 정철염, 이간난 등과 함께 체포된 김임이는 9월 20일 매를 맞아 거의 반죽음이 된 상태로 포청에서 6명의 교우와 함께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니 나이는 36세였다.
○성녀 김 루치아(1769~1839) : 동정녀인 동시에 순교자인 김 루치아는 강원도 강촌(江村)에서 태어나 9세 때 어머니로부터 천주교를 배워 입교하였다. 14세 때 수정(守貞)을 결심했고, 부모를 여읜 후로는 자신을 받아주는 교우들의 집에서 잔심부름하며 살았다. 1839년 기해박해 때에는 서울의 이매임의 집에서 이매임, 이정희와 영희 자매, 김성임 등과 함께 살고 있었는데 이때 남명혁과 이광헌의 어린 자녀들이 고문과 혹형을 이겨내고 신앙을 지켰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함께 사는 여인들과 함께 순교를 결심하고 4월 11일 남명혁의 집을 파수하던 포졸들에게 묵주를 내보이며 성녀 김성임·이매임·이영희·이정희·허계임과 함께 자헌했다. 포청과 형조에서 김 루치아는 천진한 태도와 한결같은 신앙으로 모든 형벌과 고문과 유혹을 참아냈고, 교리에 대한 심문 중에도 기막힌 비유와 논리 정연한 대답으로 형관을 감동시켰다. 드디어 7월 20일 7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22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조 막달레나(1807~1839) : 어려서 어머니 이 가타리나에게 천주교를 배워 입교한 조 막달레나는 외교인 친척들의 반대로 7, 8세경부터 교우 집안인 외가에 가서 살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18세 때 혼담이 오가자 수정(修貞)을 결심하고는 혼담을 피해 서울로 와 5, 6년을 지냈나. 그 후 다시 고향으로 내려와 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외교인 아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죽어 가는 아이들에게 대세를 주는 등 열심히 교회 일을 도왔다. 그러던 중 1838년 말 고향에서 사사로운 박해가 일어나자 어머니, 두 동생과 함께 가산을 버리고 서울의 조 바르바라의 집으로 피신했다. 1839년 6월 주인집 세 모녀(조 바르바라·이영덕·이인덕)와 어머니 이 가타리나와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한 차례의 신문과 주뢰질을 당한 후 옥으로 끌려간 조 막달레나는 3개월 동안 비좁고 불결한 옥살이 끝에 33세의 동정녀로 염병을 얻어 옥사순교했다.
○성녀 원귀임 마리아(1818~1839) : 동정녀이며 순교자인 원귀임은 경기도 고양군 용머리(龍頭里)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여기저기를 떠돌며 살다가 9세 때 서울의 친척 집에 들어가 삯바느질로 생계를 꾸려나갔다. 이때 수정(守貞)을 결심하고는 항상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하였다. 1839년 3월 29일 원귀임이 있던 친척 집이 포졸들의 습격을 받게 되자 원귀임은 재빨리 피신했으나 길거리에서 원귀임을 아는 사람에게 들켜 체포되었다. 체포될 때 정신을 잃을 정도로 당황했던 원귀임은 정신을 가다듬고 포청으로 끌려갔다. 포청에서 배교를 강요하며 고문하는 형리에게 "내 영혼을 이미 하느님께 맡긴 지 오래니 더 이상 묻지 마십시오. 오직 죽을 뿐입니다"하고 배교를 거부하니 형조로 이송되었다. 형조에서도 가혹한 형벌과 고문을 받았으나 원귀임은 굴하지 않았고 드디어 7월 20일 7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그때 나이 22세였다.
○ 정정혜 엘리사벳(1797~1839) : 동정녀이며 순교자인 정정혜는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의 딸로, 4세 때 주문모 신부에게 성세성사를 받았다. 다섯 살 되던 해인 1801년의 신유박해로 전 가족과 함께 체포되었다. 아버지와 이복 오빠 정철상(가롤로)은 순교하였으나 정정혜는 어머니 유 체칠리아, 오빠 정하상(바오로)과 함께 석방되었다. 그 후 마재의 삼촌 정약용(요한)의 집에서 살면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길쌈과 바느질로 가족들의 생계를 꾸려나갔다. 한편 친척들의 구박과 냉대를 아름다운 덕행과 인내로 극복하고 박대하던 몇몇 친척들까지 입교시켰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났을 때 정정혜는 서울에서 7월 11일 어머니, 오빠 정하상, 김대건 신부 당고모 김 데레사와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7회의 신문을 받으면서 320도의 곤장을 맞았고, 형조에서도 6회의 신문과 함께 혹독한 고문을 받았으나 정정혜는 끝까지 신앙을 지킨 끝에 12월 29일 6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때 나이 43세였다.
○ 이 아가타((1823~1840) : 17세의 꽃다운 나이로 순교한 동정녀 이 아가타는 이광헌(아우구스티노)과 권희(바르바라)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부모의 거룩한 모범을 따라 독실한 신앙생활을 했고, 또 일찍부터 동정을 지킬 결심으로 수계 범절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다. 기해박해 초인 1839년 4월 7일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어 포청에서 혹형과 고문을 당한 후 형조로 이송되었으나, 형조에서는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포청으로 환송하였다. 포청에서는 다시 혹형과 고문을 했고 또 부모가 배교한 것처럼 속여 배교를 강요했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옥에서 만난 김 데레사와 함께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신앙을 지켜나갔다. 9개월 동안 옥에 갇혀 있으면서 곤장 300도, 대곤 90도를 맞고 드디어 1840년 1월 9일 김 데레사와 함께 포청에서 교수형을 받고 17살에 순교했다.
○이 바르바라(1825~1839) : 이 바르바라는 독실한 구교우 가정에서 태어나 서울의 청파동에서 자랐다. 어려서 부모를 여읜 후로는 서울의 이영희, 이정희 두 이모에게 의탁하고 살았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그해 4월, 15세의 어린 나이로 체포되어 포청에서 신문을 받은 후 형조고 이송되었다 형조에서 ‘어린것이 요물’이라 하여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당했으나 끝까지 배교하지 않자 다시 포청으로 송환되었다. 포청에서 이 바르바라는 전보다 훨씬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당해야 했으나 꿋꿋이 참고 인내하며 함께 갇혀 있는 어린이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다가 5월 27일 기갈과 염병 그리고 고문의 여독으로 옥사함으로써 15세의 어린 나이로 순교했다. 성 박후재(朴厚載) 요한의 조카이다.
◆ 동정성이란, 영육으로 신성하기 위한 것
구약에서 하느님은 어떤 특수한 목적으로 한 인간을 선택할 때 스스로가 짝이 되겠다고 선언한다. 또한 요한계 문헌은 ‘모든 선택된 자들이 천상 예루살렘에서 동정자라고 불린다’라고 밝히고 있다. 신약에서 동정의 참 의미를 보여준 사람은 세례자 요한과 성모 마리아,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다. 코린토 전서 7장은 동정 생활의 의미에 관해 언급하는 유일한 장이다. ‘오직 주님만을 섬기기’ 위해서 동정 생활을 권하는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교회는 전통적으로 이야기되던 ‘정결’을 ‘동정’으로 표현하게 한다. ‘정결’이야말로 미혼자나 기혼자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에게 요구되는 덕이기 때문이다. 육체적 동정보다 마음의 순결, 깨끗한 사랑을 마음에 간직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결혼 생활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닌, 동정의 목적은 ‘영육으로 신성하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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