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 權道
권도는 각각의 상황에 적절하게 대처하는 臨機應變적 대응을 가리키는 말로 經이나 常, 正에 대응한다. 정도나 상도가 어떤 경우에도 바뀔 수 없는 시대를 초월한 불변의 도리인 반면에 권도는 상황 또는 시대에 따라서 변화하는 도리이다. 본래 權에는 물건의 輕重을 재는 저울추의 의미[權稱錘也]가 있으므로 ‘권도’라 하면 그러한 可變體의 의미가 있다. 이치에는 변하지 않는 것이 있고 변할 수 있는 것이 있는데 그 중 可變者를 ‘권’이라 한다. 모든 일이나 형세는 변하는 것이기 때문에 常道에만 근본을 두고 고집하면 자유로운 활용이 마비되어 도덕 실행에 있어서 모순이 발생한다. 이런 경우에 시의적절한 通權達變의 운용이 중요하게 되며 그것이 권도이다. 따라서 권도는 상황에 따른 판단과 운용의 묘미를 중시한다.
履卦는 덕을 기초가 된다. ‧‧‧ 巽卦는 號令을 거듭하여 法制(덕)를 행하는 괘이다. ‧‧‧ 손괘는 호령을 稱揚하면서도 자신을 내세우지 아니하는 것이다. ‧‧‧ 손으로써 권을 행한다.*
喪에는 4가지 제도가 있는데 변화에 부응하면서도 마땅함을 따라서 四時를 취하여야 한다. 恩惠, 理致, 節度, 權道의 넷은 人情을 취한 것으로, 은혜는 어짊이며, 이치는 의로움이고, 절도는 예법이며, 권도는 판단력이다. 仁義禮智는 人道가 갖춘 바이다.**
또 ‘권’은 곧 ‘道’를 행하는 것으로 대상과 상황에 따라 근본 도리를 지켜가며 이치에 합당하면서도 유연하게 대응함을 일컫는다.
하백이 말하기를 “그러면 어찌하여 도를 귀하게 여기나요?” 북해약이 대답하기를 “도를 아는 자는 반드시 사물의 이치에 통달하게 되며, 사물의 이치에 통달한 자는 반드시 권에 밝고, 권에 밝은 자는 외물에 의해 스스로를 해치지 않지요.”***
권은 經으로 돌아간 다음에도 선한 바가 있는 것이다. 권이 행하는 경우는 죽음을 도외시하면서 베풀지 않는다. 권을 행함에도 도가 있으니, 스스로 해가 됨으로써 권을 행하고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음으로써 권을 행한다. 다른 사람을 죽이면서 자신이 살고, 다른 사람을 죽게 하면서 자신은 살아있는 것은 군자가 하지 않는 바이다.****
‘권’은 상황과 시의를 저울질하여 판단하는 중의 운용[中之用]으로 그 근본 의의를 벗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한다. 그래서 ‘권’은 성인의 종사며 대용[權者 聖人之終事大用]으로 공자는 그 행함[行權]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배움을 같이 한다고 하여 道理를 더불어 같이 깨닫기는 어려운 것이며, 설사 같이 도리를 깨달았다 하더라도 더불어 같이 立身하기란 더욱 어렵다. 혹시 더불어 입신하였다 하더라도 권도를 행하기란 더더욱 어려운 것이다.*****
맹자도 기본적으로 ‘중’과 ‘예’를 지향하되 상황에 합당하게 융통성을 발휘하는 ‘권’을 역설하고 있다.
자막은 그 중간을 잡으니 중간을 잡음이 도에 가깝기는 하지만, 중간을 잡되 권이 없으면 하나를 고집하는 것과 같아, 하나를 고집하는 것을 미워하는 것은 그것이 도를 해치기 때문인데, 이는 하나를 들어 백 가지를 폐하는 것이니라.******
남녀가 직접 손을 잡지 않는 것이 예이지만 형수가 물에 빠졌을 때 손을 잡아 구해주는 것은 권도이다.*******
바로 위에 인용한 문장은 상도와 권도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남녀유별은 불변의 상도이다. 그러나 형수가 물에 빠져 죽게 될 지경에서 손을 잡고 구함은 권도이다. 이처럼 행위 자체는 윤리에 부합하지 않지만, 행위 목적은 도리에 부합한다는 유사한 예를 『회남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대저 임금과 신하의 만남에는 무릎을 꿇고 절을 하여 서로 존중하는 것이 예이지만, 환란이 임박하면 발을 들어 임금을 차도 천하가 감히 그르다고 시비할 수 없으며, 효자가 어버이를 섬김에 온화한 얼굴로 몸을 굽히며 허리띠와 신발을 받들어 다님이 예이지만, 어버이가 물에 빠지면 머리채를 잡아 끌어내도 감히 어버이를 교만하게 모독했다고 할 수 없다. 이는 형세가 어쩔 수 없어서 그런 것이며, 이것이 바로 권이 베풀어지는 바이다.********
이 경우 권도는 常道인 ‘예’와 대립하지만 하나의 道理로 본 것이다. 이는 ‘경’으로 돌아가서 ‘도’에 부합하게 한다는[反經合道] ‘권’의 본의로 설명하고 있다.*********
‘권’과 ‘경’에 대해서는 두 가지 상반된 견해가 있었다. 漢代의 학자들은 ‘경’에 상반되면서 ‘도’에 합당한 것[反經合道]이 ‘권’이라 했으며, 송대의 정이천은 ‘권’은 단지 ‘경’일 뿐이다[權只是經也]라 하였다. 이 두 가지 설에 대해 주자는 양쪽 다 모순점이 있음을 지적하면서 ‘도’의 恒常으로 ‘경’을, 도의 ‘變’으로 ‘권’을 말하여 ‘도’로서 말할 때는 ‘경’이든 ‘권’이든 하나가 된다고 주장함으로써 양설을 다 자신의 의견 속에 포함시켰다. ‘경’은 정당한 도리로 정미하고 세세한 곳까지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에 ‘권’이 그 뜻을 곡진히 하여 ‘경’이 미치지 못하는 부분을 대행한다는 것이니 ‘중’을 말하는 데 ‘권’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같이 ‘경’과 ‘권’은 서로 뗄 수 없으며 그렇다고 하나라고 할 수도 없는 不卽不離의 관계로 해석하였다. 그래서 ‘권도’는 ‘경’과 함께 윤리학적 관점에서 중요한 문제이며, 성인에 있어서 실천의 궁극적 이상으로 받아들여졌다.**********
*『周易』 「繫辭傳」 “履德之本也 ‧‧‧ 巽德之制也 ‧‧‧ 巽稱而隱 ‧‧‧ 巽以行權”.
**『禮記』, 「喪服四制」 “喪有四制 變而從宜 取之四時也 有恩 有理 有節 有權 取之人情也 恩者仁也 理者義也 節者禮也 權者知也 仁義禮智 人道具矣”.
***『莊子』, 「秋水」 “河伯曰 然則何貴於道邪 北海若曰 知道者 必達於理 達於理者 必明於權 明於權者 不以物害己”.
****『春秋左氏傳』, 「桓公十一年九月」 “權者 反於經然後有善者也 權之所設 舍死亡無所設 行權有道 自貶損以行權 不害人以行權 殺人以自生 亡人以自存 君子不爲也”.
*****『論語』, 「子罕」 “子曰 可與共學 未可與適道 可與適道 未可與立 可與立 未可與權”.
******『孟子』 「盡心上」 “子莫執中 執中爲近之 執中無權 猶執一也 所惡執一者 爲其賊道也 擧一而廢百也”.
*******『孟子』, 「離婁章上」 “男女授受不親禮也 嫂溺援之以手者權也”.
********『淮南子』, 「氾論訓」 “夫君臣之接 屈膝卑拜以相尊 禮也 至其迫於患也 則擧足以蹴其體 天下莫能非也 ‧‧‧ 孝子之事親 和顔卑體 奉帶運履 至其溺也 則捽其髮而拯 非敢驕侮 以救其死也 ‧‧‧ 勢不得不然也 此權之所設也”.
*********정병설, 「正道와 權道, 고전소설의 윤리 논쟁적 성격과 서사적 의미」, 『冠嶽語文硏究 第20輯』, 1995, 362쪽 참조.
**********儒敎事典編纂委員會, 『儒敎大事典』, 1990, “권도(權度)”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