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년 11월 22일(수) 시편 80:1-19 찬송 25장
(아삽의 시, 인도자를 따라 소산님에둣에 맞춘 노래)
1. 요셉을 양 떼 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여 귀를 기울이소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이여 빛을 비추소서
2.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낫세 앞에서 주의 능력을 나타내사 우리를 구원하러 오소서
3.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빛을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
4.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백성의 기도에 대하여 어느 때까지 노하시리이까
5. 주께서 그들에게 눈물의 양식을 먹이시며 많은 눈물을 마시게 하셨나이다
6. 우리를 우리 이웃에게 다툼거리가 되게 하시니 우리 원수들이 서로 비웃나이다
7. 만군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회복하여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
8.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나이다
9. 주께서 그 앞서 가꾸셨으므로 그 뿌리가 깊이 박혀서 땅에 가득하며
10. 그 그늘이 산들을 가리고 그 가지는 하나님의 백향목 같으며
11. 그 가지가 바다까지 뻗고 넝쿨이 강까지 미쳤거늘
12. 주께서 어찌하여 그 담을 허시사 길을 지나가는 모든 이들이 그것을 따게 하셨나이까
13. 숲 속의 멧돼지들이 상해하며 들짐승들이 먹나이다
14. 만군의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돌아오소서 하늘에서 굽어보시고 이 포도나무를 돌보소서
15. 주의 오른손으로 심으신 줄기요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가지니이다
16. 그것이 불타고 베임을 당하며 주의 면책으로 말미암아 멸망하오니
17. 주의 오른쪽에 있는 자 곧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인자에게 주의 손을 얹으소서
18.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에게서 물러가지 아니하오리니 우리를 소생하게 하소서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19.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돌이켜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우리에게 비추소서
우리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개역 개정)
- 주의 돌아볼 포도나무 -
본시는 시79편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민족적 비극을 인하여
아삽의 자손 가운데 한 사람이 하나님께 민족의 구원을 호소한 ‘민족 애가’이다.
그런데 본시가 북왕국 이스라엘의 멸망(주전722년) 사건을
역사적 배경으로 삼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남북 왕국이 모두 멸망한 때에
이스라엘 온 민족의 회복을 간구한 시인지는 학자들간에 다소 논란이 있다.
그러나 대개의 주석가들은 요셉, 에브라임, 므낫세 같은 지파명(1,2절)에 근거해
앗수르의 침략에 의한 북왕국 이스라엘의 멸망 사건을 본시의 저작 배경으로 본다.
이는 구약 성경 역본 중 하나인 70인역에 본시의 표제어가
‘앗수르에 관하여’라고 명기되어 있는 점에 의해서도 지지를 받고 있다.
이러한 본시는 반복되는 후렴구(3,7,19절)를 중심으로 하여
자연스럽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즉 민족적 구원을 호소하는 전반부(1-3절)와
이스라엘 민족이 처해 있는 비참상을 토로하는 중반부(4-7절)
그리고 ‘포도나무의 비유’를 통해 북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해
간구하는 후반부(8-19절)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본시에는 민족적 수난으로 인한
비극적이며 애절한 분위기가 짙게 깔려 있는 바
시인은 당시 북이스라엘의 비참한 처지를 ‘눈물’, ‘비웃음’, ‘상해’, ‘베임’이란
단어들을 사용하여 시각적으로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실로 시인은 그 땅 어디에서도 소망의 빛을 찾아볼 수 없었음에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낙담하지 아니하고 민족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할 수 있었으니 그것은 그가 하나님이 그의 택한 백성은
결코 버리지 아니하실 것을 확신한 까닭이다.
한편 시인의 피끓는 간구와 확신에도 불구하고
역사상 북왕국 이스라엘의 회복은 실현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이에 대해 하나님이 시인의 간구를
들어주지 아니하신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의 영적 이스라엘 백성을 다 구원하고 계시니
오히려 시인의 간구는 보다 확실하고 완전하게 이루어진 셈이다.
이는 당신의 백성이 드리는 간절한 기도를 결코 외면치 아니하시고
다 들어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의 차고 넘치는 은혜를 분명하게 증거해 준다.
4절)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백성의 기도에 대하여
어느 때까지 노하시리이까」
이는 백성들의 기도에 언제까지 응답하지 않으시겠느냐는 질문이다.
여기에는 기도 응답에 대한 촉구의 의미와 더불어
자신들의 기도에 응답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향한 원망의 마음이 함께 내포되어 있다.
여기서 ‘노하다’로 번역된 원어는 본래 ‘연기를 내다’라는 의미인데
시인은 이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이스라엘을 향한
식지 않은 하나님의 분노를 시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이 단어는 하나님을 향한 성도의 기도를 나타낼 때 사용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초대 교부 알렉산더는 4절과 관련하여
시인이 이 단어를 통해 구원을 간구하는 이스라엘의 기도와
계속되는 하나님의 진노 사이에 생겨난 일종의 긴장 상황을
의도적으로 드러내려 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어쨌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향한 진노를 거두지 않으셨다.
곧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어떤 구원의 희망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러기에 시인은 애절한 마음과 다른 한편으로 원망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도를 외면하시고
그 진노를 거두지 않으신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즉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가 아직 만족되지 않았거나,
또는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실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마치 하나님의 진노를 거둘 만큼
충분한 회개와 기도를 드렸음에도 하나님께서 진노를 거두시지 않는 것처럼
원망 어린 하소연을 쏟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진노를 거두시는 때는
징계를 받는 자가 결정하고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정말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겸허히 그 대가를 치르고자 하는 자라면
당연히 징계자의 어떤 처벌이라도 달게 받겠다는 마음의 자세가 있어야 한다.
역대하 12장을 보면 하나님의 은혜로 나라가 견고해져 가고 세력이 강성하여진
르호보암이 교만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버린 결과
하나님의 징계의 도구로 사용된 애굽 왕 시삭의 공격을 받아
국가적으로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위기에 빠지게 된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스마야를 르호보암에게 보내셔서
왜 그들이 그런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는지 분명히 말씀해 주셨다.
그러자 르호보암과 유다 방백들은 스스로 겸비하여 말하기를
‘여호와는 의로우시다’(대하12:6)라고 고백하였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징계가 너무 가혹하다고 말하지 않았고
무조건 용서하시고 자신들을 구원해 달라는 섣부른 회개로 기도하지 않았다.
오직 이 모든 일을 이루신 하나님은 의로우시다고 고백하였다.
이보다 더 정직한 회개가 어디 있는가?
이런 겸비한 그들의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새로운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다.
하나님의 징계 앞에서 진정한 회개의 모습은
하나님의 징계가 무엇이든 그대로 달게 받으려고 하는 모습이다.
다윗은 그러한 회개의 진수를 보여준 사람이다.
우리는 종종 죄로 인해 징계 받는 자로서
스스로 우리 죄의 경중(輕重)을 판단하고
징계의 시기와 처벌의 강도를 짐작하고 판단할 때가 있다.
그리고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그 징계가 지속되고 강도가 높아져 가면
하나님께 서운함을 드러내고 원망할 때가 있다.
그러나 올바른 회개는 스스로 자신의 죄를 절감하고
어떤 죄의 대가도 기꺼이 감당하며,
하나님은 의롭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올바른 회개의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을 의롭다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를 경외할지니라」 (신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