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복자, 정찬문 안토니오 묘
주소: 경남 진주시 사봉면 동부로1751번길 46-6(무촌리) 교구 마산교구
경상남도 진주시 사봉면 무촌리의 중촌 마을에는 머리가 없는 유해가 묻혀 있다 해서 ‘무두묘’(無頭墓)라 불리던 순교 복자 정찬문(鄭燦文, 1822-1867년) 안토니오의 묘가 있다.
정찬문의 묘에서 내려다보면 중촌 마을 전체가 한눈에 들어와 그 옛날 순교로 신앙을 증거한 그가 지금도 마을 사람들을 향해 굳은 믿음을 당부하고 있는 듯하다. 그의 묘가 서 있는 허유 고개는 신자들이 수시로 넘나들었던 고개로 사봉 주유소를 끼고 약 600미터 남짓 올라가면 묘가 나온다.
정찬문은 1822년 10월 13일(음) 진양 정(鄭)씨 양반 가문의 부친 정서곤(鄭瑞坤)과 모친 울산 김씨 사이의 외아들로 진주 동면 허유 고개 중촌에서 태어났다. 진양 정씨 가문은 일찍이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한다는 지조로 낙향한 고려 말 대사헌 정온(鄭溫)의 후예로 정찬문 역시 선대의 이러한 가풍을 이어받아 강한 절개와 지조 있는 인품을 지녔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대산 가등 공소의 천주교 신자 집안의 여자인 칠원 윤씨와 1841년 이전에 혼인하여 아들 중순을 두었다. 그는 부인의 권면으로 1863년, 그의 나이 41세에 입교하여 단란한 성가정을 이루며 전교 활동에 충실한 생활을 했다. 특히 이들 부부가 전교 활동을 했던 시기는 철종(哲宗, 1849-1963년) 재위 기간 14년과 고종(高宗, 1863-1907년 재위) 즉위 직후,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지 않았던 과도기적 시기였기에 비교적 박해의 위협을 받지 않고 활발한 전교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순교 후 머리 없는 시신을 수습해 고향 인근에 매장된 후 1948년 유해를 발굴하여 입관한 후 이장하였다. 그 후 1975년 현 사봉 공소의 순교자 묘역으로 이장했다.하지만 1866년 가장 혹독한 박해 중 하나로 꼽히는 병인박해가 일어나 사방에서 신자들이 체포되기 시작했고, 정찬문도 그 해 가을 진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이때 일가친척과 평소에 알던 그 지방의 하급 관리가 와서 배교한다는 말만 하면 풀어주겠다고 유혹했지만 그의 신앙은 흔들리지 않았다.
진주로 끌려간 정찬문은 25일 동안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종종 관장 앞에 끌려 나가 온갖 혹독한 고문과 형벌을 받았지만 결코 배교를 입에 담지 않고 굳건히 신앙을 고백했다. 그 동안 그의 가산은 적몰되고 가족들은 생활이 어렵게 되었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아기를 등에 업고 밥을 빌어 옥으로 나르던 부인 윤씨의 격려에 힘입어 그는 끝까지 굴하지 않고 순교의 월계관을 쓸 수 있었다.
차마 말로 할 수 없는 가혹한 고문과 무수한 매를 맞으면서도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았던 그는 모진 매를 맞고 감옥으로 끌려들어간 그날 밤 숨을 거두었다. 이때가 1867년 1월 25일(음력 1866년 12월 20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5세였다. 정찬문이 장사(杖死)로 순교한 진주 감옥은 진주 공설시장 인근 중앙시장과 옥봉동 성당 사이에 있었으며, 거제의 사도 복자 윤봉문 요셉 역시 이곳에서 순교하였다.
2005년 새로 신축해 축복식을 가진 문산 성당 사봉 공소. 순례자를 위한 다용도실과 전례공간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다.그가 순교한 뒤 그 시신은 3일 동안 옥에 버려져 있었다. 이후 그의 사촌들이 시신을 찾으러 갔지만 고복(考覆)에 연관된 시신이었기 때문에 머리는 가져올 수 없었다. 결국 머리 없이 몸체만 수습해 와 고향 인근에 매장하면서 무촌리의 무두묘로 불리게 되었다. 이때 순교자의 조카들이 그의 시신을 염했는데, 몸이 굳지 않고 마치 산 사람 같았다고 한다. 그 후 순교자의 묘는 오랜 세월 동안 방치된 끝에 잊혀갔다.
1946년 문산 성당의 서정도 베르나르도(1899-1964년) 신부는 굼실(隅谷, 사봉면 사곡리) 공소 회장에게서 무두묘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고, 1948년 3월 30일 무촌리에 살고 있던 ‘텃골 마누라’라는 광산 김씨 할머니(당시 94세)의 제보를 받아 허유 고개 길섶에 초라한 모습으로 있던 순교자의 묘를 찾았다.
그 해 5월 31일 교우들과 순교자의 외인 친척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유해를 발굴해 새로 입관한 후 약간 위쪽으로 이장하고 그 앞에 본당에서 준비한 기념비를 세웠다. 그 후 1975년 10월 중순 그 인근에 새로 조성된 사봉 공소의 순교자 묘역(사봉면 무촌리 중촌 마을)으로 이장했고, 1978년 1월 28일 묘소를 새로 단장하면서 그 옆에 순교비를 건립하였다.
순교복자 묘역 옆동산, 십자가의 길 11처 옆에 건립된 대형십자가. 그 뒤로 하늘로 오르는 듯한 성모상이 보인다.아쉬운 것은 남편이 옥에 갇혀 있는 동안 형리들에게 온갖 고초를 겪어 가면서도 아기를 등에 업고 옥바라지를 하던 부인 윤씨가 허유 고개를 떠나 소식이 완전히 끊겼다는 것이다. 남편의 순교를 자랑스럽게까지 생각했던 부인은 이웃과 친지들의 미움을 사게 되었고, 결국 이런 구박과 핍박을 받으며 눈물로 나날을 보내던 부인은 견디다 못해 남편의 고향인 이곳 허유 고개를 떠나고 말았던 것이다.
정찬문 순교자의 묘소를 보존해 온 문산 성당은 본당 설립 100주년을 기념해 2005년 4월 3일 순교자 묘소가 조성되어 있는 사봉 공소에 새 공소 건물을 신축해 축복식을 가졌다. 건평 60여 평에 철골 1층 구조로 건립된 사봉 공소는 순례자들을 위한 다용도실과 전례공간을 별도로 마련하였다. 한편 정찬문 안토니오는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어 복자품에 올랐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6년 1월 21일)]
복자, 정찬문 안토니오(5.29) 기본정보
경상도 진주 허유고개 중촌(현, 경남 진주시 사봉면 무촌리)의 양반 집안에서 1822년에 태어난 정찬문(鄭燦文) 안토니우스(Antonius, 또는 안토니오)는, 먼저 세례를 받고 입교한 아내로부터 뒤늦게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게 되었다. 그런 다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으니, 그의 나이 41세 때인 1863년이었다.
이후 정 안토니오는 3년 이상을 열심히 계명을 지키며 살았다. 그러던 가운데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 사방에서 신자들에 체포되기 시작하였고, 그해 가을에 그도 진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이때 일가친척과 평소에 알던 그 지방의 하급 관리가 와서 “배교한다는 말만 하면 끌려가지 않도록 하겠다.” 하며 유혹하였지만 그의 신앙은 흔들리지 않았다.
진주로 끌려간 정 안토니오는, 25일 동안 옥에 갇혀 있으면서 자주 관장 앞으로 끌려 나가 혹독한 형벌을 받았다. 그 동안 그의 가산은 적몰되고 가족은 생활이 어렵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그의 아내는 밥을 빌어다 옥으로 가져가 그에게 넣어 주곤 하였다.
어느 날 정 안토니오는 다시 옥에서 끌려 나와 무수히 매를 맞았다. 그래도 그는 결코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 다시 옥으로 끌려 들어간 뒤, 그날 밤에 숨을 거두고 말았으니, 이때가 1867년 1월 25일(음력 1866년 12월 20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5세였다.
정찬문 안토니오가 순교한 뒤 그의 시신은 3일 동안 옥에 버려져 있었다. 그의 조카들이 그의 시신을 거두어 고향 인근에 장사를 지냈는데, 그때까지도 그의 몸이 굳지 않았고, 얼굴에 화색이 있어 산 사람 같았다고 한다.
정찬문 안토니오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