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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윤 I 시인, 반년刊<시인> 편집인
생명과 그림
키가 커서 휘청거리는 늦가을 오후다.
작은 그림자들은 그보다 더 큰 그림자에 이미 지워졌다.
인사동에서 강남으로 우리는 그렇게 넘어섰다. 이를테면 강북에서 강남으로 한강을 건넜는데 벌써 어스름이 깔렸다는 이야기다.
우리를 끌고 가는 사내는 화가 여운이다. 그는 개선장군처럼 택시기사에게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 도중에 도저히 못가겠다고 엄살을 피우는 선생이 계셨는데 조금만 참으시라는 나의 말은 이미 선생의 귀에도 닿지 못하고 있었다. 신경림 시인, 인사동에서 마신 맥주가 그의 아랫도리를 붙들고 있었다.
그러나 솔직히 여러분들이 알다시피 서울의 어느 공간이 우리의 아랫도리를 헐렁하게 받아줄 곳이 있겠는가. 목적지가 얼마남지 않았는데 우리는 신경림 선생의 성화를 견디지 못하고 택시에서 내렸으나 소변을 볼 곳이 없어 난감해졌다. 나는 무작정 일식집 여종업원에게 꾸벅 인사하고 화장실을 물었다. 다행히 우리는 시원한 순간을 맞이한 것이다.
이런, 왜 소변이야기 때문에 다시 옆길로 이야기가 새고 있는가. 그래도 한번 시작한 신경림 시인의 소변이야기인데 내친김에 하고 가야하지 않겠는가. 몇 년도인지 기억이 나지 않은데 어느해 여름 경기도 과천에서 문학의 밤 행사를 크게 벌인 일이 있었다.
나는 그날도 마포의 허름한 생맥주집에서 신경림 선생과 이재무 시인을 만나 한잔하고 있었는데 이재무 시인이 갑자기 과천의 행사장에 내가 꼭 가야한다는 것이었다. 그날은 고은 시인이 그 행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으신 모양이었다. 이재무 시인은 용서를 빌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니 나에게 꼭 같이가서 오늘은 정중하게 일전의 실수는 정말 잘못했노라고 말하라는 것이었다.
그 얼마전 민족문학작가회의 주최 백일장이 열린 서대문 공원에서 내가 대낮에 취해 고은 선생님에게 ‘야, 고은!’ 이렇게 불러 주위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고은 선생이 무척 당황스러워 했는데 아마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았을 것이니 이 기회에 백배사죄하라는 말이었다. 신경림 선생도 그러는게 좋겠다고 너도 같이 가자고 해서 저녁 6시쯤 마포 술집을 나와 택시를 타게 되었다.
그러나 서울의 퇴근시간을 상상해 보시라. 우리가 동작대교 위에 간신히 올라섰을 때 거의 움직이지 않는 택시 안에서 신경림 선생의 아랫도리에 또다시 변고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찌할 것인가.
한강위의 다리인 동작대교 위에서 소변이 마렵다는 선생님을 진정시키기엔 차들이 움직일 생각을 않고 있으니, 참다못한 선생이 “기사양반 우리 내려서 볼일 좀 봐야겠소.” 하시더니 다짜고짜 택시문을 열었다. 같이 내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신경림 선생을 중심으로 이재무 시인과 내가 좌우로 서서 동작대교 난간에 붙어섰다. 바지를 내리고 소변을 보는데 한강바람이 어찌 가만히 있겠는가. 소변이 나오는 즉시 우리의 바짓가랭이가 그대로 축축해졌다. 퇴근길 동작대교 중간에서 택시를 세워놓고 석양빛에 한강을 향해 오줌을 누는 세명의 시인을 상상해 보라.
다시 강남의 화장실로 돌아가자.
우리는 꾸벅, 아직 저녁개시도 않은 식당의 화장실을 그렇게 나와 다시 화가 여운 선생을 따라나섰다. 아참, 중요한 대 선배가 동행하고 계셨는데 전라도 광주에서 올라오신 화가 ‘강연균’ 선생님이었다.
네명이서 다시 택시를 타고 도달한 곳은 청담동 이목화랑, 삼인각색전(三人各色展)이 열리고 있었다. 이를테면 여운 화가의 3인전 전시장에 우리가 도착한 것이다. 조각가 김주호 선생의 세상 들여다보기, 화가 주재환 선생의 그리운 도깨비, 화가 여운 선생의 다산 정약용의 유배지 풍경이었다.
오늘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인공이 바로 화가 여운이다. 이제 주인공에게로 다시 돌아가자.
화가 여운을 ‘우리시대의 낭만주의자’로 부른다.
‘낭만’이 무엇인가! 공상이 가득 찬 방랑자일진데 우리는 그를 낭만으로 바라보지만 당사자인 그는 한줌 가슴을 외롭게 움켜쥔 떠돌이로 자신을 인식한다. 그 한줌의 비애, 이 주머니에 담긴 눈물을 관통해 간 것은 역사의식이다. 광주의 조선대부고를 거쳐 홍대 미대를 나온 그가 사회의 첫발을 내디딘 곳은 전북 이리였다. 70년대 초, 유신독재의 칼날아래 든 붓마저 상상력을 제약받을 때 그가 시작한 미술교사 생활은 그를 술로만 잡아끌었다. 그가 사회생활을 시작한 첫 하숙집은 공교롭게도 ‘이광웅’ 시인의 집이었다.
군산 제일고교 교사였던 이광웅 시인은 1982년 이른바 ‘오송회’ 사건으로 구속된다.
전두환 정권시절 교사들이 학교뒷산에서 4.19를 기념해 우리시대를 추모했던 그들 모임은 5명이 소나무숲에 모였다해서 오송회로 둔갑한 것이다. 1심 판결은 대부분 석방이었으나 2심에서 관련자 아홉명 모두에게 최고 7년의 실형이 떨어졌다.
독서와 연구중심의 소모임운동을 용공으로 조작해 국가보안법의 재갈을 물린 공안당국은 이광웅 시인에게 17년 동안 해직교사라는 딱지를 붙여 주었다. 그는 결국 국가보안법의 한을 안고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용공조작의 대표적 사례인데 오장환의 「병든 서울」과 이용악의 「전라도 가시내」등의 불온하기 짝이 없는 시를 읽었고 소위 불온서적을 갖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간첩이되던 시절의 이야기다.
화가 여운이 내딛은 사회생활의 첫걸음은 이렇듯 우리시대 모순의 집결체인 이광웅 시인이었던 것이다. 그는 전주에 계셨던 신석정 시인을 비롯해 그 무렵 민중문학의 기수격인 소설가 황석영과 어울려 토론과 고민의 술로 밤을 벗하게 된다. 촉망받던 화가 여운의 미술에 대한 구체성이 확립된 시기가 바로 이때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면서 그의 문화절반을 문인들과 함께 한 이 시기에 그 또한 절반은 시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2년의 교직생활 끝에 그는 다시 상경한다.
홍대 대학원에 적을 두고 훌쩍 이리로 떠났던 그가 다시 복학해 고민하기 시작한 것은 자신의 미술세계에 대한 정체성이었다. 미술이 무엇이고 자신이 왜 그림을 그려야 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우리의 역사와 맞물리게 되고 우리의 현실과 곧바로 직결되는 문제였다.
민중미술의 싹은 이미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박정희를 거쳐 그의 서자격인 전두환의 집권은 오히려 문화예술전반의 민중적 조직체계를 확고히 갖추게 하는 기틀이 되었다.
문학은 이미 1974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가 조직되어 활동을 시작했고 미술은 그 싹이 자라서 80년대에 들어서 ‘민미협’(민족미술인협의회)이 역사적 발언을 시작한 것이다. 미술은 광주학살을 계기로 그 색깔을 선명하게 드러내며 역사의 얼굴을 정면으로 그리게 된다. 인사동의 그림마당 ‘민’을 전시공간으로 삼은 민중미술이 미술의 전열을 정비한 것이다.
여기에 모인 가난한 화가들의 현실에 대한 분노는 미술운동의 성격을 띄며 공동체 작업과 민중 속으로 가까이 다가가는 판화로도 활발해졌다. 서구 모더니즘 문화로는 한국민중의 현실을 수용하지 못하는 폐쇄성에서 벗어나 사회, 정치, 종교와 민중을 연대하는 민중미술은 운동적 개념으로 확산되었고, 우리 삶의 문제점을 미술로 형상화했다.
박정희 정권이 끝나갈 무렵 4월혁명 2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회를 갖기위해 모인 이들은 ‘현실과 발언’이라는 미술동인을 결성한다.
1980년 10월17일 이들이 결성한 ‘현실과 발언’ 창립전은 개막당일 무산되었다. 공안당국이 개입하고 전시관측에서 그림이 불온하다며 전시장 전원을 내려버렸다. 전시장을 찾은 사람들은 촛불을 하나씩 들고 그림을 들여다보는 미술전시회 사상 초유의 ‘촛불전시회’가 된 것이다. 강연균, 강요배, 김용태, 김정헌, 김호득, 김호석, 민정기, 박불똥, 손장섭, 신학철, 여운, 오윤, 오경환, 이종구, 이철수, 임옥상, 전수천, 최민화, 홍선웅, 홍성담 등 수 많은 민중미술의 1세대 화가들은 세상의 그림을 들고 우리 삶의 고통스런 현실로 돌아왔다.
이렇게 조직화된 문화전사들은 80년대 독재정권에 맞서 문화적 연대를 감행하고, 민주사회를 향한 전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21세기에 들어선 지금 모두들 민중미술의 시대가 갔다고 한다. 민중미술을 구세대의 유물처럼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필자처럼 미술에 대한 문외한이 미술을 바라보는 눈은 어느 시대건 ‘민중미술’이다.
어느 시대를 사는 사람이 진보되어 있는 사회라면, 진보된 사람을 향한 미술일 것이다. 그만큼 미술도 진보되어 있을 것이다. 그것이 그 시대 사람을 향한 ‘민중미술’인 것이다. 표현의 기법이나 변용에 관한 표현이 다를 뿐 사람과 동떨어진 그림이 어디에 따로 있겠는가. 80년대가 피투성이 세상이었다면, 그 고통이 너무 큰 세상이었다면 미술 또한 그 피투성이를 그 모순을 극복하고자하는 몸부림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기법에 대한 반성은 소위 ‘쟁이’에 대한 반성이다.
그것은 집단에 대한 반성이 되어서는 안되고 개인에 대한 치열한 반성이어야 한다. 모든 재료, 모든 도구 심지어 생활의 폐품까지도 미술이 되는 세상이 되었다는 말은 그만큼 우리가 살고있는 삶이 다양화되고 세상의 가치가 의미부여에 따라 넓어졌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말해 다원화되고 복잡하게 인간의 감성이 진화되고 있음을 말한다. 이것이 보편적 가치라면 이것을 담아내는 것이 오늘의 미술이고 이것이 또한 우리시대의 민중미술인 것이다.
화가 여운은 개인전을 4회밖에 하지 않았다. 게을러서가 아니라 고민을 떠안고 방황을 거듭했다는 증거다 단체전은 사회적 주제를 놓고 화가들이 모여들기 때문에 역사적 격동기와 야만의 시대에는 자연스럽게 단체전 기획이 많을 수 밖에 없다. 또한 자유실천문인협의회가 민족문학작가회의로 거듭나면서 그 자립적 재정문제로 문학이 화가들의 도움을 많이 받게 된다.
다시말해 작가회의 문인들의 기금마련 전시회에 민미협의 화가들이 많이 참여한 것이다. 여기에 화가 여운이 늘 있었고 이런 일에 그는 늘 앞장섰다. 미술의 사회적 역할 못지않게 그 마음에 가득 차있는 것은 따스함이다. 사람에 대한 애정은 세상에 대한 애정이다. 그는 그렇게 우리의 우울한 시대를 관통해 왔다.
그가 분노와 저항의 시간을 거쳐 도달한 곳은 어디인가. 이제 그는 역사적 유물처럼 화석화된 정적인 것에서 정신의 움직임을 찾는 듯 했다. 이목화랑의 흰 벽에서 우리를 내려다보는 것은 정약용의 ‘정석’이란 글자였다.
정석을 주제로 한 그림만을 그는 걸어두고 있었다.
‘丁石’
대흥사 일지암에 계시던 초의(艸衣)선사가 다산초당을 방문하셨을 때 차를 마시며 같이 거닐었을 초당 뒤 석벽에는 ‘丁石’(정석)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 ‘丁石’이란 글씨는 다산이 돌에 직접 새긴 유일한 글씨다.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한 18년 중에서 후반기 10년을 생활한 곳이 바로 ‘다산초당’이다. 다산의 대표적 저서인 『목민심서』등이 이곳에서 씌어졌다.
이를테면 ‘다산학의 생가’인 셈이다. 정조의 지지아래 사회 경제적 개혁의 이론틀을 형성해 가던 다산이 유배지에서도 변함없이 꿈꾸던 세상이 이 돌에 새겨져 있을까? 우리시대 다산연구의 권위자인 박석무(현 5.18기념재단 이사장) 선생은 ‘정석’의 의미를 이렇게 풀이한다. ‘외형적인 표시로는 丁씨의 도리라는 의미지만 다산 자신이 그곳에 머물러 지냈음을 뜻한다.’
우리는 화랑을 나와 전라도 냄새가 물씬 나는 강남의 한식집으로 들어섰다.
산낙지에 꼬막을 술안주로 시켜놓고 신경림, 강연균, 여운 선생님과 나는 서서히 취해가기 시작했다. 음식점을 나설 때 신경림 선생님이 고개를 갸웃갸웃 하셨다. 신발을 못찾는 듯 싶었으나 이 신 저 신에 발을 넣어보신 선생님이 어느 신에 안착했다. 그러나 신경림 선생은 밖에 나오셔서도 자신이 신고 있는 신을 못믿는 듯했다.
십여 미터를 걸었을까. 갑자기 정겹고도 투박한 전라도 사투리가 튀어 나왔다. 강연균 선생이었다. “혹시 내 신하고 바꿔져 버린 거 아닐께라우” 강연균 선생도 자신이 신고 있는 신이 아무래도 자기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시고 음식점의 문을 그냥 나선 것이었다. 서로 한 발은 벗어 바꿔 신었다. 키가 작은 두분의 발도 남자 발로서는 매우 작았으며 그 작은 발에 맞는 신 두 켤레의 모양이 똑같았던 것이다.
“이제야 맞네 그랴, 우리는 키가 작은 동족이야, 으하하하” 우리는 술냄새를 풍기며 호방하게 웃었다. 그리고 서로 어깨를 걸치고 근처 ‘기러기’로 2차를 하러갔다. 술집에서도 밤늦도록 우리는 계속 즐거웠다. 우리는 키가 작은 ‘동족’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