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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지리산 산행은 이미 하나의 패턴이 생겨났습니다.
지금 등산 코스와 방식의 원형이 만들어졌습니다.
아래는그 예로 1936년 이학돈의 지리산 등척기 몇 장면을 사진과 함께 해설을 달아 볼까 합니다.
그시절 등산 문화 또는 지리산에 대해 좀 더 살갑게 다가오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이런 형태는 아마도 국내에서는^^ 첫 시도가 아닐까 싶네요. 오류도 많을 거라 우려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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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경성약학전문학교 졸업을 앞둔 이학돈(李 鶴墩)은 벽송사를 기점으로 지리산을 오르내린 후,
조선일보에 1936년 8월 11일~ 14일까지 4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산행기의 전문은 지리산 포털인 지리99 에서 확인하시면 되고요.
여기서는 등산문화 관련 몇몇 장면만 캡쳐해서 해설 또는 각주를 시도해 볼까 합니다.
먼저 지금 이 모습이 1930년대 일본 청춘들의 하이킹 패션이라는 거,
당시도 지금처럼 흑백시대가 아니라 칼라풀한 시대였다는 것을 알고서 고고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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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형! 이번 휴가가 우리들에게는 아마 학창생활의 마지막 하기휴가일게요. 꼭 가야만 된다는 병원 실습을 그만두고 학기시험이 끝나자 나는 곧 남선(南鮮) 알프스 지리산 등척(登陟)의 길을 떠났소.
1) 꼭 가야만 한다는 병원 실습을 그만두고 --
이런 자신감은 어디에서 나올까?
다른 학과와 달리 당시 약전은 졸업하면 곧바로 취업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참고)
2) 남선(南鮮) 알프스 지리산 등척(登陟)
남선은 남조선의 준말이 아니다. 일제 때는 함경도쪽을 북선(北鮮), 황해도와 평안도를 서선(西鮮),
대체로 경상도와 전라도를 남선이라 불렀다. 만선(滿鮮)은 만주와 조선을 함께 부르는 명칭이고...
알프스라는 명칭도 주목해 보자.
'조선의 알프스'라는 표현이 있었으니 백두산 근방의 관모연산을 말하고,
지리산을 두고서 '남선의 알프스'라고 했다.
이런 식의 표기법은 곧바로 조선에 널리 퍼진다.
조선시대때까지만 해도 금강산을 빗대어 다른 산들을 '소(小)금강'이라는 호칭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일제 이후,
이를테면 소요산을 '경기의 금강', 월출산 등을 두고서 호남의 금강' 하는 표현이 유행했다,
지금도 우리는 이런 표현을 좋아하는데,
확신을 하지는 못하겠지만^^, 연원을 따지자면 일제식 호명방식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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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산자(遊山者)나 묵객(墨客)들의 말마따나 죽장망혜(竹杖芒鞋)로 한 조각 등산약도를 지표삼아
지리련산(智異連山)의 ●岩峻峭한 준령 1백리길을 혼자서 횡단하여 지리산 최고봉인 천왕봉
서북쪽 발치에 있는 벽송사(碧松寺)라고 하는 조그마한 산사에 유숙을 청하였소.
1) 한조각 등산약도를 지표삼아 지리산 준령 1백리길을 혼자서 횡단하여....벽송사에..
경성에서 출발한 그의 지리산 천왕봉 등산 기점은 어디였을까?
남원역이었다. 지금 다음 지도로 보니 남원역에서 벽송사까지 46km이라 하니 거의 맞다.
1백리길이라고 했는데 어떻게 갔을까?
남원 산내면의 실상사까지는 승합자동차를 탔을 것이다. 24km에 비용이 편도 1원 40전이었다.
실상사에서는 짐꾼을 사서 배낭을 지우고 벽송사까지 갔을 수도 있다.
그떄 그가 참고한 '한조각 등산약도'는 어떤 것이었을까?
그리고 남원이라고 한다면 왜 마천(백무동)이 아니라 오지인 벽송사로 갔을까?
'권위있는' 조선총독부 철도국에서 1934년 9월 펴낸 조선여행 안내기(朝鮮旅行案内記)에 들어 있다.
이름도 같거니와 아마 시기적으로 이것일 가능성이 제일 높겠다.
지도를 유심히 보면 왜 마천이 아니라 벽송사로 갔을까가 이해된다.
그 이유는 당시만 해도 마천쪽에서 등산로가 제대로 완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백무동에서도 등산로가 있었다.)
그리고 실상사까지 도로가 포장되어 있음을 알 수 있겠다. (점차로 마천면소재지까지 포장된다)
참고로 '한조각 등산약도'라고 했는데,
그 필요성은 지리산 위가 아니라 남원에서 벽송사까지가 더 높았을 수도 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우리도 산입구까지 가는 교통편과 도로편을 파악하는게 사실상 더 어렵고,
당시 지리산에는 현지인 가이드를 대동했기 때문에, 지리산에 관해서는 그는 별걱정 안했을 것이다.
추가1: 만약에 화엄사로 해서 노고단에 간다고 했다면?
1936년 12월 구례구역이 생겨나기 전까지는 그래서 1935년 가토 일행은 곡성역에서 내려 차편을 이용해야 했다.
추가2: 1940년 이이야마 다츠오가 만든 지리산 지도(여기를)에는 마천까지 도로가 정비되었고,
백무동에서 장터목과 세석평전으로 오르는 등산로가 개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남원에서 어디에서 잤을까? 등등 벽송사까지에 관해 더 읽으시려면... 여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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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학돈은 장마에 갇혀 10여일을 벽송사에서 막사대기해야 했다.
드디어 7월 27일 날이 개면서 출발하는데, 그 차림새는 이러했다.
K형! 7월 27일 심술 사나운 지리한 장마비는 그쳤소.
천왕봉의 바로 산록(山麓)에 있는 벽송사에서 10여일을 묵으며, 우제일청하기를 얼마나 기다렸겠소....
.절 아래 촌락에 사람을 보내 등산안내인 한 사람과 인부 한 사람을 불러왔소.
도끼, 낫, 가마니 등 노영(露營) 준비에 필요한 기구와 세 사람의 3일간 먹을 식량을 등에 지고
오전 8시쯤 천왕봉 등산의 길을 떠났소.
일행은 등산안내인 한사람과 인부 한사람.
준비물은 도끼 낫 가마니 등 노영준비와 3일간 먹을 식량을 등에지고, 오전 8시에 출발했다.
이학돈의 옷차림새는 어떠했을까?
설마 조선의 한복을 입었으리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없을 것이다.
떨어져도 좋은 헤진 작업복? 아니다.
당시 등산은 골프처럼 아무나 할 수 있는게 아니라 골프복 입듯이 등산복을 입었다.
거의 아래와 같다.
저런 모자에 저런 바지에 저런 양복을 입고 올랐을 것이다.
음..여름이니..좀더 계절에 맞는 옷을 검색해서 추후 다시 올릴께요...~
전형적으로 이런 패션이었을 것이다.
비슷한 시기 일본 북알프스 등산 사진
지리산 가이드와 인부의 옷은 아무렇게나(!) 입던 것 입고, 이런식의 지게를 졌을 것이다.
지게에 매트리스용 가마니와 솥과 쌀과 낫과 도끼 등을 올렸다.
이학돈은 사진과 유사한 양복을 입고 사진과 같은 당시 멋장이 둥근테 모자를 썼다.
뉴욕과 파리의 패션이 한달 늦어도 두달안에 식민지 조선까지 왔다고 했다. 등산 및 여행의 패션은 일본인이고 조선인이고 거의 똑같았다. 하여 만약에 여자라면 지리산 등산패션은 어떠했을까?
영화 '산의 사랑하는 당신'(山のあなた 徳市の恋)은 1930년대 일본을 놀랍도록 정확하게 재현했다고 평가받는 작품이다. 30년대 조선의 산에 오를만한 계층의 여자들도 이와 똑같다.
해방 이듬해였던가 한국은행에 다니는 여자가 북한산 백운대 쇠사슬을 잡고 오르다가 바람에 치마가 올라가자 그걸 잡으려다 추락사한 비극이 있다. 그때 그녀가 입었던 치마도 아마 앞쪽의 두 여자와 비슷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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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산행이야기는 생략하고 당시 등산문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장면 하나.
‘경대연습림(京大演習林)’이라고 쓰인 표목을 지나 곱게 핀 꽃 밑을 밟으며 헤치며 경사가 더욱 급한 비탈을 올라가니 중봉에 다달았소. ‘中峰’이라고 쓰인 표목에 “사자암 동쪽으로 일리(獅子岩東一里)”, “벽부암 동남쪽 삼십정(碧浮岩東南三十丁)”이라는 등 여러 가지 각 명승지 고적을 소개하였소.
1) '교토대 연습림' 이라고 적혀 있는 표목을 지나....
하봉과 중봉 사이에 중요한 근대 지리산의 '표지'가 등장한다.
산청 함양쪽에는 교토대 연습림이 있었고, 피아골 노고단쪽은 도쿄대 연습림이 있었다.
이 공간은 압록강변에서 우람한 원시림을 마구 채벌하는 거와는 목적이 달랐다.
해방 후 각각 연세대와 서울대로 넘어갔고, 그런까닭에 피아골 '직전'에 서울대 휴양소가 있었다.
2) ‘中峰’이라고 쓰인 표목에 “사자암 동쪽으로 일리(獅子岩東一里)”, “벽부암 동남쪽 삼십정(碧浮岩東南三十丁)”이라는 등 여러 가지 각 명승지 고적을 소개하였소.
이 산행기에서 제일 주목할 부분 중 하나로,.
지리산에 언제 표지판이 세워졌을지도 한번 생각해 볼 문제이다.
다음 시리즈에서 이야기를 이어갈 예정이다.
이 모양은 대체로 이렇다. 아래 2장은1960년대 전후 일본의 산들에 있는 푯대와 푯말들이다.
적당한 나무 기둥을 박고, 나무 판대기를 가로지른다음 페인트로 글을 썼다.
1936년 당시 중봉에 있던 것도 이런 방식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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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천왕봉 정상에도 없을 수가 없다. 정상에 푯대와 푯말이 세워져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생긴 게 세개 모두 또는 한두개 있었을 것이다.
일제하 금강산 비로봉이나 194,50년대 일본이 세운 독도 푯대의
그러니까 1930년대 천왕봉에는 이런게 있었다는 것.
해방 후 지리산 표지석의 역사1은...--> 여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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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교룡산성에 가면 '김개남 동학농민군 주둔지'라는 이런 푯말이
이게 다른 반증이 없다면 일본 방식의 푯대라 하거니와 하시라도 교체해야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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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에 꼭 일본식 표목이 있었을까?
그건 아닐 것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1920년대부터 노고단부근에는 선교사 휴양촌이 건설된다.
건물동만 50여동이 될 정도로 엄청난 규모이고, 유럽과 미국 출신일 그들도 등산을 좋아했을 터.
아마도 가이드를 대동하고 정상인 천왕봉에 갔을 것이다.
그들의 표지판도 일본의 표지판과 함께 선후를 다툴 것이다.
모양은 어떠했을까?
이 역시 찾으면 곧바로 있을 터지만,
(O, My Darling Clementine (1943))
이게 맞는 건지 모르겠지만, 대체로 이렇게 생겼을 수도 있겠다.
사견은?
아마도 일본인들이 남조선 최고봉인 천왕봉을 그냥 안두고
먼저 푯대를 세웠을 거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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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사진 1930년대 일본 북알프스
그리고 천왕봉 정상에는 이렇게 돌탑(케른)이 있었다..
정상에서 그는 사진을 찍었을 텐데, 사진 찍는 앵글도 유행이 있다.
일제 때 사진엽서
당시에는 얼굴을 찍은 증명사진도 좋아했지만, 저렇게 먼 산을 보는 뒷모습을 찍는 것도 좋아했다.
지금 우리는 이런 사진 거의 안찍는 것 같은데..
이학돈 역시 사진기가 있었다면 이렇게 포즈르 취해서 한장 찍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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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1930년대 지리산 등산의 한 방식을 재현해 보려 해보았습니다.
앞으로 시리즈로 하나하나 차근차근 살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