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암스트롱(Lance Armstrong), 투르 드 프랑스 고별 무대에서 7연패 위업
외국의 어느 자전거 경매장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날 따라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저마다 좋은 자전거를 적당한 값에 사기위해 분주한 모습들이었다.
그런데 어른들이 주고객인 그 경매장 맨 앞자리에 한 소년이 앉아 있었고, 소년의 손에는 5달러짜리 지폐 한 장이 들려 있었다. 소년은 아침 일찍 나온 듯 초조한 얼굴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드디어 경매가 시작되었고, 소년은 볼 것도 없다는 듯 제일 먼저 손을 번쩍 들고 "5달러요!" 하고 외쳤다.
그러나 곧 옆에서 누군가 "20달러!" 하고 외쳤고, 그 20달러를 부른 사람에게 첫번째 자전거는 낙찰되었다.
두번째, 세번째, 네번째도 마찬가지였다.
5달러는 어림도 없이 15달러나 20달러, 어떤 것은 그 이상의 가격에 팔려나가는 것이었다.
보다못한 경매사가 "꼬마야, 자전거를 사고 싶거든 20달러나 30달러쯤 값을 부르거라."
"하지만 아저씨, 제가 가진 돈이라곤 전부 이것 뿐이에요."
"그 돈으론 절대로 자전거를 살 수 없단다. 가서 부모님께 돈을 더 달라고 하려무나."
"안돼요. 우리 아빤 실직당했고, 엄만 아파서 돈을 보태 주실 수가 없어요.
하나밖에 없는 동생한테 꼭 자전거를 사가겠다고 약속했단 말이에요."
소년은 아쉬운 듯 고개를 떨구었다.
경매는 계속되었고 소년은 자전거를 사지 못했다.
하지만 여전히 제일 먼저 5달러를 외쳤고, 어느새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씩 소년을 주목하게 되었다.
드디어 그 날의 마지막 자전거.
이 자전거는 그 날 나온 상품 중 가장 좋은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 경매를 고대했었다.
"자, 최종 경매에 들어갑니다. 이 제품을 사실 분은 값을 불러 주십시오."
경매가 시작되었다. 소년은 풀죽은 얼굴로 앉아 있었지만 역시 손을 들고 5달러를 외쳤다. 아주 힘없고 작은 목소리였다. 순간 경매가 모두 끝난 듯 경매장 안이 조용해졌다.
아무도 다른 값을 부르지 않는 것이었다.
"5달러요. 더 없습니까? 다섯을 셀 동안 아무도 없으면 이 자전거는 어린 신사의 것이 됩니다."
사람들은 모두 팔짱을 낀 채 경매사와 소년을 주목하고 있었다.
"5… 4… 3… 2… 1." "와~아!!"
마침내 소년에게 자전거가 낙찰되었다는 경매사의 말이 떨어졌고, 소년은 손에 쥔 꼬깃꼬깃한 5달러짜리 지폐 한 장을 경매사 앞에 내 놓았다. 순간 그 곳에 모인 사람들이 자리에서 모두 일어나 소년을 향해 일제히 박수를 치는 것이었다.
훗날 이 자전거를 받게 된 동생은 형의 마음을 알았었는지 비가 오나 눈이오나 매일 자전거를 탔다고 합니다. 이 동생이 바로 사이클을 타고 알프스산맥과 피레네산맥을 넘으면서 프랑스 도로를 일주하는 「투르 드 프랑스」대회에서 최초로 7연패를 달성한 사이클 선수 "랜스 암스트롱" 입니다.
지난 93년 세계선수권대회와 투르 드 프랑스 베르뎅구간에서 우승한 뒤 세계 사이클계에 처음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렸던 암스트롱은 1971년 미국 텍사스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사이클에 재능을 보이기 시작한 그는 약관의 나이에 93년 세계선수권대회 정상에 오르며 국제 무대에 화려하게 데뷔했고 같은 해 투르 드 프랑스에서 최연소 구간 우승기록(당시 21세)을 세우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창 재능을 꽃피워가던 96년에 암스트롱은 고환암 판정을 받으면서 선수 생활 최대의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암스트롱은 뇌와 폐까지 암이 전이되는 최악의 상태에서 한쪽 고환과 뇌 조직 일부를 도려내는 대수술을 받았고 독한 약물 때문에 머리카락이 빠지고 몸무게가 급격히 줄게되는 항암치료를 견뎌내야만 했다.
1년 반이 지나고 어느 정도 몸이 회복되자 암스트롱은 재기를 선언했고 의사들의 만류를 뿌리치며 훈련을 시작했다.
암스트롱은 "예전에는 먹고 살기위해 사이클을 하곤 했지만 이제는 숨쉬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패달을 밟는다. 인생은 참 아이러니하다"고 말하며 더욱 성숙한 모습을 보여줬다.
피레네 산맥과 알프스의 준령을 수 차례 오르내리며 투르 드 프랑스 우승에 강한 집념을 불태워오던 암스트롱은 99년 마침내 꿈에 그리던 투르 드 프랑스 우승재킷(옐로 저지)을 입었다.
당시 암스트롱이 골인지점에서 기다리던 아내 크리스틴과 9개월된 아들 루크를 끌어안는 장면은 전세계 사이클팬들에게 뭉클한 감동을 안겨 주었다.
[2000년] 타이거 우즈, 브리티시 오픈 우승(최연소 그랜드슬램 달성)
타이거 우즈가 제129회 브리티시 오픈 그대 프로골프 역사상 다섯 번째 그랜드슬럼의 위업을 달성하여 ‘골프황제’에 등극했다. 우즈는 2000년 7월 24일 스코틀랜드 세인트 앤드루스 올드코스에서 끈난 대회 최종 4라운드에서 3언더파를 추가하며 합계 19언더파 269타로 생애 4번째 메이저 타이틀을 획득했다.
우즈는 마이터스(1997년)와 PGA 챔피언십(1999년) 그리고 US 오픈(2000년)에 이어 브리티시 오픈까지 4대 메이저타이틀을 만24세 7개월의 나이로 한 번씩 석권함으로써 잭 니콜로스(당시 26세 6개월)가 34년 동안 갖고 있던 최연소 그랜드슬램 기록을 2년 앞당겼다. US 오픈과 브리티시 오픈을 한 시즌에 모두 우승한 여섯 번째 선수가 됐으며 1990년 닉 팔도가 갖고 있던 올드코스 최저타 우승기록(18언더파 270타)도 1타 줄였다./조선
[1927년] 일본 소설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 자살
← 그는 정교하고 치밀한 단편소설로 역사소설의 원형을 만들었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1892~1927).
"단지 막연한 불안... 나는 근 2년동안 죽은 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해왔다". 일본 최고의 신인문학상으로 자리매김돼 있는 아쿠타가와상의 장본인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가 이같은 유서를 남기고 1927년 7월 24일 도쿄 다바타(田端) 자택에서 음독 자살했다. 향년 35세였다.
용띠 해, 용의 달, 용의 날(辰年辰月辰時)에 태어났다고 하여 류노스케(龍之介)라는 이름이 지어진 그는 생후 8개월경 모친이 정신이상 증세를 보임으로써 외삼촌댁에 양자로 가게 된다. 이후 생활은 윤택하지 못했으나 문예를 사랑하는 분위기의 가정에서 자란 아쿠타가와는 감수성 예민한 소년으로 자랐다. 그러나 어머니의 광기가 유전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은 평생 그를 괴롭혔고 결국 그를 자살로 몰고간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1910년 제1고등학교에 입학, 동경제국대학 영문과에 진학해 재학중 ‘코(鼻’`를 발표함으로써 나츠메소세키(夏目漱石)의 격찬을 받으며 화려하게 문단에 등단했다. 1916년 대학을 졸업하고 ‘라쇼몬(羅生門)’(1915)ㆍ ‘고구마죽(芋粥)’(1916)을 발표, 신진(新進)작가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했다.
초기의 그의 작품은 소재를 왕조의 설화에서 구하고 있는데 그후 에도(江戶)시대부터 메이지(明治)시대까지 작품 무대를 넓혀 인간에 대한 날카로운 비평과 섬세한 서정성을 갖춘 독자적인 소설세계를 만들어냈다. 그의 작품은 정교하고 치밀한 구성과 다채로운 문체로 금새 다이쇼(大正)문단에 확고한 지위를 구축해나갔다.
1921년 경부터 건강이 쇠약해진데다 신경쇠약 등으로 고생하던 그가 죽기 전 2년간에 걸쳐 느꼈던 ‘막연한 불안’은 개인적인 감정일 뿐만 아니라 당시 지식인 모두가 공감했던 쇼와(昭和)시대에 대한 위기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을까... /조선
[1944년] 마이다네크 나치 수용소 해방
← 히믈러
1944년 7월 24일 소련군이 폴란드 루블린 시 외곽 남동부에 있던 독일 나치 집단학살수용소인 마이다네크 수용소를 해방시켰다. 마이다네크 수용소가 설치된 것은 1940년 11월로 처음에는 소련 전쟁포로들을 수용했다. 그러나 1942년 가을부터 히믈러에 의해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에서 수송된 유대인을 처리하기 위한 사형장으로 개조되었다. 처형도 처음에는 숲속에서 일제사격에 의한 총살이었으나 나중에는 홀로코스트라고 일컬어지는 대량학살을 위해 독성이 강한 시안화수소 가스를 발산하는 치클론-B를 사용해 가스실에서 모아놓고 죽였다. 마이다네크 수용소에서 죽은 총인원은 20만~150만 명으로 추정되며 소련군이 해방시켰을 때는 생존자가 겨우 몇 백 명에 불과했다./브리태니커
[1907년] 광무 신문지법 제정
← 1907년 5월 23일 대한매일신보 한글판 창간호. 1908년 개정된 광무 신문지법에 의해 이 신문 역시 단속대상에 포함되고 말았다.
한말 일제가 우리나라의 신문을 탄압-통제하기 위한 신문지법이 1907년 7월 24일 제정됐다. 이완용 내각이 법률 제1호로 공포한 일명 '광무 신문지법'은 1908년 4월 29일 일부가 개정되었고 1952년 4월 4일 법률 제237호 의해 폐지됐다. 모두 41조로 구성된 신문지법은 형식상 일본의 신문지법을 모방한 것이나 내용은 그보다 훨씬 가혹했다.
신문창간시 사전에 내부대신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점과 신문을 발행하기에 앞서 관할 관청에 2부를 납부케 해 사전검열을 제도화한 점이 그것이다.
이 법의 기본적인 성격은 내무대신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허가제와 보증금 제도, 납본을 강제한 사전검열제, 엄격한 처벌제도에 있다. 특히 내무대신에게 부여된 행정처분권과 보증금제도는 결국 재정난을 겪던 <황성신문>과 <제국신문>의 폐간으로 이어졌다. 또한 1908년 4월 20일 개정을 통해 미국과 러시아의 한국인교포들이 발행하는 신문과 베셀 명의의 ‘대한매일신보’도 단속대상에 포함시켰다. 결국 해외에서 들어오는 민족지의 유입을 막고, 국내에서 발행하는 ‘대한매일신보’를 탄압할 목적으로 제정했음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출판법과 함께 우리나라 언론을 탄압하는 주요무기로 악용돼 조선일보-동아일보를 비롯한 수많은 신문들이 삭제-압수 및 발매금지-배포금지-정간-폐간되고 언론인이 구속됐다./브리태니커
[1907년] 제3차 한일협약(정미7조약) 조인
일본이 한국을 강점하기 위한 단계적 수순으로 제3차 한일협약이 1907년 7월 24일 체결됐다. 정미7조약 혹은 한일신협약 이라고 한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로 우리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 설치로 내정을 일삼아 온 일본은 헤이그 밀사사건을 구실삼아 한층 강력한 침략행위를 강구했다.
우선 사건의 책임을 물어 고종을 퇴위시키는 한편 순종을 즉위시켰다. 즉위 4일 만인 이날 일본은 대한제국의 국권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는 협약 초안을 제시했고 이완용은 즉각 각의를 열어 일본측 원안을 그대로 채택, 순종의 재가를 얻은 후 이완용이 전권위원이 되어 이날 밤 이토 히로부미 통감의 사택에서 7개조항의 협약을 체결-조인했다. 이외에도 한국 군대해산, 사법권 위임, 일본인 차관 채용, 경찰권 위임 등을 골자로 한 협약 관련 비밀조치서가 작성되었다.
이 조약체결로 통감의 권한이 을사조약 때보다 강력해졌으며, 일본인 관리 등을 통해 한국의 내정에 관한 모든 국권이 일본에 넘겨졌다./조선
[1897년] 대서양을 단독 비행한 최초의 여성 비행사 에어하트(Amelia Earhart) 출생
1897. 7. 24 미국 캔자스 애치슨~1937. 7. 2(?) 태평양 중부 하울랜드 섬 근처에서 실종.
* 5월 20일 및 7월 2일자 참조
대서양을 단독 비행한 최초의 여성이다.
제1차 세계대전 때 캐나다에서 간호병으로 복무했고 전쟁이 끝난 뒤에는 보스턴 데니슨 하우스에서 사회사업에 종사했다. 1928년 6월 17~18일 비록 혼자 탔지만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대서양 횡단 비행에 성공함으로써 명성을 얻었다. 1931년 출판업자 조지 P.퍼트넘과 결혼했으나 결혼 전의 이름으로 계속 비행사 경력을 쌓아나갔다. 1928년 비행사로서의 명성을 확인받기 위해 1932년 5월 20~21일 대서양을 단독으로 비행했다. 곧이어 일련의 미국 횡단비행을 실시했고 상업 비행의 발전을 고무하는 운동에 참여했다. 또한 그녀는 이 새로운 분야에서 여성 참여의 길을 넓혀 남성 절대 우위를 종결시키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1891년] 독립운동가 임의탁(林義鐸) 출생
1891. 7. 24 평양 ~ 1973. 8. 13.
일명 동환(東煥)·창식(昌植). 1910년 한일합병이 되자, 1912년 일제 요인을 암살할 목적으로 경술국치결사대를 조직해 서울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경무부 니시카와[西川]를 사살한 뒤 상하이[上海]로 망명했다. 1914년 상하이 동제의학원(同濟醫學院)에 입학해 의학공부를 한 뒤 북만주로 건너가서 동지를 규합해 친일파 숙청에 주력했다. 그는 무력항쟁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식량문제의 해결이 중요하다고 판단해 1917년 백두산에 들어가 생식(生食)과 대용식품을 연구했다. 1918년 대용식품 원료로 알레이각(角)과 모컬리가 적합하다는 것을 발견했으나, 원료를 구입하지 못해 실패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의군부(義軍部)에 가입해 활동했다. 그러던 중 의군부 러시아령 총대(總代)로 소항령(蘇項領)에 파견되어 한인 교포와 한인 2세들을 망라해 원호회(原戶會)를 조직한 후 사무장 및 병무장으로 활약했으며, 러시아로부터 무기를 구입해 소치풍(小致風)에서 한인보위단(韓人保衛團)을 조직해 군사훈련을 시켰다. 그후 무단 강[牧丹江]으로 건너와 비밀공작을 전개하다가, 안중근(安重根)의 숙부 안태건(安泰健)·안태순(安泰淳) 등과 함께 하얼빈[哈爾賓]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3개월간 복역했다. 1922년 3월 13일 하얼빈에 있던 헌병대에 폭탄을 투척, 불발되자 다시 친일분자들을 암살할 목적으로 거류민회를 습격, 건물을 폭파했다. 1924년 국내로 잠입해 일제의 중요기관과 요인암살을 위해 폭탄을 운반하던 중 청량리역에서 일본경찰에 발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5년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의 친일파 숙청 비밀책임자로 활동하다가, 1929년 9월 국민부(國民府)에 가입해 이성근(李成根)·장지호(張志鎬)·박재훈(朴在勳) 등과 외무부 집행위원에 선출되어 활약했다. 1944년 한국독립당에 가입해 임시정부를 지원했으며, 그해 11월 28일 임시정부 서무국장에 임명되었다. 8·15해방을 맞아 해외 독립운동자와 그 가족 580여 명을 인솔하여 귀국했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받았다./브리태니커
[1803년] 프랑스의 작곡가 아당(Adolphe-Charles Adam) 출생
1803. 7. 24 파리 ~ 1856. 5. 3 파리.
그의 발레곡 〈지젤 Giselle〉(1841)은 극적 호소력으로 유명하다. 이 작품은 오늘날까지도 청중이나 무용수들에게 인기가 있다. 아당은 60여 편 이상의 오페라를 작곡했으며 그 가운데 〈Le Postillon de Longjumeau〉(1836)와 〈Giralda〉(1850)가 최고 걸작으로 꼽힌다. 그는 파리는 물론 런던·베를린·상트페테르부르크 공연을 위해서도 발레곡을 작곡했는데, 이 곡들을 통해 그는 음악보다 춤의 요소를 더 중시했다. 그의 작품들은 19세기 중엽에 성공을 거두었지만 오늘날에는 그 가운데 소수만이 연주되고 있다. 성탄계절에 많이 부르는 O Holy Night(오 거룩한 밤)도 그의 작품이다.
[1853년] 프랑스의 물리학자·천체물리학자 델랑드르(Deslandres, Henri-Alexandre) 출생
1853. 7. 24 프랑스 파리 ~ 1948. 1. 15 파리.
1894년 단색광으로 태양을 찍는 분광태양사진기를 발명했다. 이보다 1년 앞서 미국의 조지 헤일은 독자적으로 분광태양사진기를 발명했다.
에콜 폴리테크니크를 졸업한(1874) 뒤 7년간 군복무를 하고 에콜 폴리테크니크와 소르본의 실험실에서 일했다. 1886~91년에는 분자에서 나오는 복사 스펙트럼에 대해 연구했으며, 이 복사에 대한 법칙을 공식화했다. 1889년 파리 천문대에 들어간 뒤 천체물리학으로 관심을 돌려, 처음에는 분자 스펙트럼을, 그뒤에는 행성, 태양 및 다른 별의 스펙트럼을 연구했다. 뫼동 천문대에서 연구를 계속해 1908년 이 천문대 대장이 된 그는 1926년 파리 천문대와 뫼동 천문대를 합병했으며, 1929년 정년퇴임할 때까지 대장으로 있었다. 과학 아카데미, 왕립천문학회, 영국의 왕립학회, 미국국립과학 아카데미 등 여러 과학학회의 회원으로 선출되었다./브리태니커
[1959년] 닉슨-흐루시초프, 부엌논쟁
냉전 시절 미국과 소련은 만날 때 마다 체제선전으로 설전을 벌였다. 미국 부통령 닉슨은 무역박람회에 참석하기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닉슨은 박람회가 열리고 있던 소콜니키 공원에서 흐루시초프와 마주쳤다. 박람회장에는 토스터, 식기세척기 등 최신 가전제품이 전시돼 있었다.
거기서 나온 설전이 바로 '부엌논쟁'이었다. 기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흐루시초프는 닉슨에게 "미국 노동자들이 모두 이런 사치품들을 살 수는 없을 것"이라고 공격했다. 닉슨은 즉각 "우리 철강 노동자들이 지금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파업중인걸 아시지요. 그런 노동자들도 누구나 이 정도는 살 수 있지요"라고 치받았다. 이어 "그 사람들 시간당 3달러를 받는데,한달에 100달러 정도씩 25~30년만 불입하면 이런 가전제품이 완비된 집을 얼마든 삽니다"라고 공격했다. 흐루시초프의 반격차례였다. "별로 놀랍지 않네요. 곧 완공될 소련의 주택에는 그런 것들이 완비될 것입니다. 앞으로 소련에서 태어나기만 하면 누구나 그런 집에서 살 수 있습니다." 국가 지도자들간의 언쟁이 유치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당시는 냉전이었고, 미국에서 닉슨의 인기는 높았다.
[1948년] 초대 대통령 이승만, 부통령 이시영 취임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취임식이 1948년 7월 24일 중앙청 광장에서 거행됐다. 5월 10일 남한 지역만의 총선거 실시, 5월 31일 초대 국회 개원, 7월 17일 대한민국 헌법 및 정부조직법 공포에 이어 7월 20일 신익희의 사회로 열린 초대 국회 제33차 본회의에서 무기명투표로 대통령 선거를 실시했다.
개표결과 108표로 이승만 박사가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됐으며 김구 13표, 안재홍 2표, 서재필이 1표를 얻었다. 부통령에는 이시영이 선출됨에 따라 이날 국회 주최로 정-부통령 취임식이 열리게 됐다. 7월 27일 국회에 출석한 이승만 대통령은 국무총리에 이윤영을 지명했으나 인준이 부결됐고 2차 지명을 받은 이범석이 8월 1일 인준을 받았다.
[1923년] 연합국-터키간에 로잔강화조약 조인 (그리스-터키전쟁 종결)
제1차 세계대전 때는 독일 편으로 참전하였다. 패전을 틈타 그리스군이 본토에 침입해오자 1919년 케말 파샤(아타튀르크)가 ‘아나톨리아·루메리아 권리옹호단’을 조직하였으며, 1920년 정부가 연합국과 굴욕적인 세브르 조약(영토를 연합국에 할양하는 등 터키의 사실상 해체를 결정하였다)을 맺자 앙카라에서 터키 대(大)국민의회를 소집하고 국민군을 조직하여 1922년 9월 그리스군을 완전히 격퇴하였으며, 11월에는 술탄제(制)를 폐지하였다.
1923년 7월 연합국과 체결된 로잔 조약 결과 세브르 조약의 주요부분이 폐기되어 터키는 소아시아 본토와 동부 트라키아의 확보, 다르다넬스·보스포루스 양 해협의 국제관리 참가 등이 인정되었다. 같은 해 10월 앙카라를 수도로 하는 공화국 선언이 있었고 케말 파샤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며, 권리옹호단은 공화인민당으로 개조되었다.
[1866년] 제너럴 셔먼호 사건
← 제너럴 셔먼호의 모습
프랑스 신부 9명과 수천명의 가톨릭 신자를 죽음으로 몰고간 병인박해(1866년) 후 프랑스 함대가 보복할지 모른다는 소문으로 조정에는 긴장감이 돌았고 민심 역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이 때 정체불명의 이양선 한 척이 대동강 어귀에 나타났다. 중국 톈진을 출발한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였다. 무역선이라지만 대포가 2문이나 장착돼 있었고 24명의 선원도 중무장한 80t급의 증기선이었다. 접근불가를 거듭 경고했지만 셔먼호는 막무가내로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에까지 진입했다. 사태를 관망하던 평양군민이 격분한 것은 이들의 접근을 막으려는 조선 관리 3명을 셔먼호가 감금하면서였다. 흥분한 평양군민들은 소총과 활을 쏘아댔고, 셔먼호 역시 포격으로 맞섰다.
탄약이 떨어져 하류로 후퇴한 셔먼호가 줄어든 대동강의 수위로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되자 평안 관찰사 박규수는 기발한 생각을 한다. 땔감 운반선 3∼4척을 연결한 뒤 인화물질을 가득싣고 불을 붙여 셔먼호 쪽으로 떠내려 보낸 것이다. 셔먼호는 불타버렸고 선원 역시 전멸됐다. 7월24일이었다. 대원군은 이사건에 고무돼 빗장을 더욱 걸어잠궜으나 5년뒤 신미양요를 겪어야했다./조선
[1856년] 프랑스 수학자 피카르(Picard, Charles-Emile) 출생
1856. 7. 24 프랑스 파리~1941. 12. 11 파리.
해석학·대수기하학·역학 연구에 큰 진보를 가져왔다. 1878년 파리대학교에서 강의했고 이듬해에 툴루즈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1881~98년에는 툴루즈대학교와 파리에 있는 고등사범학교에서 여러 직위를 가졌으며 1898년에는 파리대학교 교수로 임명되었다.
1917년 그는 파리의 과학 아카데미에서 수리과학의 영구 간사로 선출되었다. 피카르는 2차형식 푸크스 함수(Fuchsian function)와 아벨 함수, 불연속 및 연속 변환군의 결합이론을 연구했고 초(超)푸크스 함수와 초아벨 함수를 발견했다. 그의 연구는 대수다양체(후에 피카르 다양체라고 함)를 낳았으며 이는 대수기하학에서 기본적인 역할을 한다. 1879년 그는 복소변수함수의 정함수는 1가지 경우를 제외하고 모든 유한값을 갖는다는 정리를 증명했는데 이 정리에 그의 이름이 붙여졌다. 그의 정리는 복소함수이론의 여러 중요한 연구의 출발점이 되었다. 피카르는 미분방정식의 해가 존재함을 증명하는 새로운 방법인 연차근사(successive approximation)법을 소개했다. 이 방법은 상미분방정식에서 코시-리프시츠 방법을 대체했다. 또한 그는 선형미분방정식을 창안했으며 후에 그의 제자 E. 베시오가 이 이론을 확장했는데 이는 대수방정식의 갈루아 이론과 유사하다.
노르웨이의 N. H. 아벨과 독일의 B. 리만에 자극받아 피카르가 만든 대수곡면에 관련된 적분과 그와 연관된 위상문제의 연구는 대수기하의 중요한 부분으로 발전되었고 위상수학과 함수론에 다양하게 적용되었다. 그의 연구는 G. 시마르와 함께 출판한 논문 〈2개의 독립변수와 대수함수론 Théorie des fonctions algébriques de deux variables indépendantes〉(2권, 1897, 1906)에 상술되어 있다. 조화진동에 대한 그의 연구는 독일의 H. 슈바르츠와 프랑스의 H. 푸앵카레의 연구와 함께 적분방정식론의 시초가 되었다.
[1862년] 미국 제8대 대통령 밴뷰런(Van Buren, Martin, 1782.12.5~1862) 사망
← 밴 뷰런, 1845~50년에 제작된 은판사진
뉴욕주(州) 킨더후크에서 출생했다. 변호사를 개업한 후, 1812∼1820년 뉴욕주 상원의원, 뉴욕주 검찰총장, 1821∼1828년 연방 상원의원을 지냈으며, 1829년 뉴욕 주지사로 선출되었으나 곧 사퇴하였다. 1829∼1831년 A.잭슨 정부에서 국무장관을 지낸 다음 1833∼1837년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1836년 민주당후보로 대통령에 당선, 잭슨의 정책을 계승하였다.
1837년의 공황대책(恐慌對策), 대영국외교(對英國外交), 전국정당(全國政黨)으로서의 민주당 조직의 확립과 유지, 텍사스 즉시병합(卽時倂合) 반대 등에 진력하였으나, 인기를 잃은 채 1840년 대통령선거에서 공화당의 W.해리슨에게 패배하였다. 이후 민주당의 장로로서 정계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으나, 1860년 대통령선거에서는 공화당의 A.링컨을 지지하였다.
저서로 《자서전 The Autobiography of Martin Van Buren》(1920)이 있다.
[1828년] 러시아의 사상가, 문학자 체르니셰프스키(Chernyshevsky, Nikolai G., 1828~1889.10.29) 출생
사라토프 출생.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페테르부르크대학 문학부를 졸업하였다. 1855∼1862년에 지 《동시대인》을 편집하였으며, 잡다한 계급출신인 혁명적 민주주의자들의 영수로서, 문예비평 ·철학 ·경제 ·정치의 넓은 분야에서 논진을 폈으며, L.A.포이어바흐의 영향을 받아 유물론적 미학을 주장하였다. 1862년 투옥되었다가 1864~1883년까지 시베리아로 유배되었다. 석방되던 해에 고향에서 죽었다.
그는 1850년대부터 1888년까지 완전히 철학적 유물론에 머물렀다. 러시아에서는 높이 평가되고 연구도 활발하다. 저서가 많으며, 투옥 중에 쓴 유명한 소설 《무엇을 할 것인가 Chto delat’?》(1863)는 혁명적인 청년들을 고무시켜왔다. 평론으로는 《현실에 대한 예술의 미학적 관계 Esteticheskie otnosheniya iskusstva k deistvitel’ nost’》(1855)와 《러시아문학의 고골리시대 개관 Ocherki gogolevskogo perioda russkoi literatury》(1855∼1856) 등이 있다.
[1860년] 체코의 아르누보 삽화가, 화가 뮈샤(무하, Mucha, Alphonse) 출생
뮈샤(무하) [Mucha, Alphonse (Maria), 1860.7.24~1939.7.14]
체코 화가·장식화가. 모라비아 출생. 프라하의 미술학교 입시에 실패한 뒤 빈으로 나가 무대미술 공방(工房)에서 일하였고, 그 뒤 뮌헨에서 수업하다가 1888년 파리로 가서 아카데미쥘리앵에서 공부하였다. 94년 여배우 사라 베르나르의 포스터를 그린 것이 크게 히트하여 명성을 떨쳤다. 사라와 계약한 6년 동안에 그린 포스터, 꽃과 여자의 화려한 무하양식은 아르누보의 대명사가 되었다. 1904년 이후 몇 차례 미국으로 가서 그림도 그리고 교편도 잡았다. 10년에는 조국으로 되돌아가, 18년간이라는 긴 세월을 보내면서 그린 대작 《슬라브서사시(敍事詩)》를 완성하였다. 국장(國章)·우표·지폐도 디자인하였다.
[1857년] 덴마크의 사실주의 작가 폰토피단(Pontoppidan, Henrik) 출생 - 1917년 노벨문학상 수상
1857. 7. 24 ~ 1943. 8. 21
1857년 7월 24일 프레데리시아에서 출생하였다. 유틀란트의 목사의 아들로 출생하여 처음에는 공학(工學)을 공부했으나 전공을 바꾸어 문학활동을 시작하였다. 그의 장편소설과 단편소설 36편은 덴마크의 신고전주의(新古典主義)를 대표하는 것으로 그 무대도 다양하다. 등장인물도 가난한 농민을 비롯하여 도회지의 인텔리 또는 유력한 정치가에 이르기까지 매우 광범위하다. 그리고 허위나 권력의 남용에 대해서 항상 비판적이었다.
1880년과 1890년대의 정치투쟁 시대를 그린 《약속된 땅 Det Forjœttede Land》(3권, 1891∼1895), 신구(新舊)시대의 갈등을 그린 《행복한 페르 Lykke-Per》(2권, 1898∼1904) 등이 유명하다. 1917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naver
[1802년] <삼총사 Les Trois Mousquetaires>로 유명한 19세기 프랑스의 작가 뒤마(Alexandre Dumas) 출생
1802년 7월 24일 태어남 / 1870년 12월 5일 죽음
"그러니 내 사랑하는 자녀들이여, 행복하게 살라. 그리고 결코 잊지 말라, 신이 인간에게 미래를 열어 보여 주시는 그 날까지, 인간의 모든 지혜는 기다림과 희망이라는 단 두 마디 말로 요약된다는 것을." - 알렉상드르 뒤마
뒤마는 19세기 프랑스의 인기 작가이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정식 교육도 받지 못했지만, 방대한 독서를 통해 교양을 쌓았다. 일찍이 연극계에 투신해 1820년대말부터 1830년대초까지 큰 인기를 끌었으나, 그에게 본격적인 성공을 가져다 준 것은 역사소설이었다. 언론검열제가 폐지되고 신문들이 앞다투어 연재소설을 싣기 시작하자, 그는 오노레 드 발자크, 외젠 쉬 등과 함께 가장 인기 있는 연재작가가 되었다. 73명의 조수를 두고 약 250편에 달하는 소설들을 써냈는데, 그의 작품들은 지나치게 장황하고 멜로드라마적이며 역사적 사실을 왜곡했다는 이유로 비판받기도 했다. 그러나 <삼총사 Les Trois mousquetaires>(1844)·<몽테 크리스토 백작 Le Comte de Monte Cristo>(1844~45)·<10년 후 Dix Ans plus tard ou le Vicomte de Bragelonne>(1848~50) 등은 오늘날까지도 전세계적으로 애독되는 작품들이다. 22세 때 사생아로 낳은 아들 소(小)뒤마(Dumas Fils)와 구별하기 위해 흔히 대(大)뒤마(Dumas Père)라고 불린다./브리태니커
[1783년] 남아메리카 독립운동 지도자 볼리바르(Bolivar, Simon) 출생
← 볼리바르, C. G. Childs가 제작한 동판화(부분)
1783. 7. 24 ~ 1830. 12. 17
해방자(el Liberator) 또는 국부로 숭앙되고 있다. 카라카스의 부유한 에스파냐 가계(家系)에서 태어나 유럽에서 교육을 받고 베네수엘라로 돌아와 독립운동에 참가하였다. 1811년 독립이 실패한 후 4차례에 걸친 망명에도 굴하지 않고 군사행동을 계속 지휘하여 1819년 뉴그라나다(New Granada:콜롬비아)를, 1821년 베네수엘라를, 그리고 1822년 키토(Quito:에콰도르)를 에스파냐로부터 해방시키고, 3국을 합한 대콜롬비아공화국을 수립하여 그의 이상을 실현하였다.
1823년 페루의 독립운동가 산 마르틴의 요청을 받고 페루로 건너가 1824년 페루에 남아 있던 에스파냐군을 격파하여 그의 지배하에 두었다. 또 페루 북부(볼리비아)에 남아 있는 에스파냐군의 잔당을 그의 부하 수크레에게 소탕시키게 하여, 1825년 볼리비아공화국을 수립하였다.
1826년 에스파냐계 신생공화국의 유대를 목표로 한 파나마회의를 개최하였으나, 각국 간의 대립과 이해관계가 얽혀 1830년 해체되었다. 이렇게 하여 그가 의도한 대콜롬비아공화국이 해체되자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얼마 안 가서 실의와 곤궁 속에서 생애를 마쳤다. 그러나 1826년 그가 소집한 파나마회의는 ‘범아메리카주의’의 기초가 되었다. /naver
그 밖에
2005년 토튼햄 핫스퍼스, 피스컵 우승
2005년 동해 총기탈취사건 검문하던 김덕형 수경 음주차량에 치어 사망
2005년 김인경 US여자주니어골프 우승
1993년 러시아, 구(舊)루불 지폐 사용금지 발표
1988년 김용강 WBC 플라이급 세계챔피언 획득
1981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잠정 휴전성명 발표
1977년 지탄역서 열차충돌 160여명 사상
1974년 영국의 물리학자 채드윅 사망. 중성자 발견으로 1935년 노벨물리학상 수상
1974년 포르투갈, 헌법 제1조를 폐기해 해외영토의 독립을 승인
1974년 경향신문, MBC에 흡수통합
1951년 미국의 발명가 알버트 반스 사망
1951년 정부, 탄핵재판소 구성
1945년 부민관에서 폭탄 폭발사건 발생. 대한애국청년당, 부민관에 투탄의거
1934년 작가 이상 조선중앙일보에 '오감도' 연재 시작
1929년 부전조약(不戰條約) 발효
1927년 일본 소설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 자살
1915년 이스트랜드 증기선 시카고강서 전복 812명 사망
1908년 청년터키당 혁명 (익년 황제 폐지)
1901년 한발로 전국에 방곡령 발포
1886년 일본 소설가 다니자키 준이치로 출생
1841년 노르웨이 의학자 헨리크 한센 출생
1837년 영국 런던서 전신메시지
1689년 송시열, 서거
612년 을지문덕 살수대첩(고구려 구양왕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