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패기로 도전한 휴스턴 지점 시절… 내 分身이자 수호신"
[윤영두 아시아나항공 사장의 '손때 묻은 영어사전']
모두 선망하던 LA 지사 박차고 열악한 휴스턴 지점장
자원
형님이 선물한 영어사전에 의지, 의사소통 어려움 헤쳐나가
합리적인 미국인들 사고방식에 한국인 특유의 情문화 더해 영어와 영업 두
마리 토끼 잡아
인생에는 기회가 세 번 찾아온다고 한다.
가끔 나에게 기회는 언제 세 번 찾아왔는지 되짚어 본다.
한 번은 기회가 찾아온 순간이 확실하다.
금호실업 대리 시절이던 1981년.
모든 사람이 원하던 LA 미주 본부에 발령이 났다.
그해 가을에 커다란 이민 가방을 들고 LA 공항에 내리면서,
최고의 실적 달성에 일조하고 영어 실력을 올리자고 굳게 다짐했다.
하지만 LA 생활은 내 생각과는 너무도 달랐다.
일이며 개인 생활이며 모든 삶을 한국인들과 함께했다.
여기가 서울인지 LA인지 혼동되기까지 할 정도였다.
그렇게 약 6개월이 흘렀을까.
매너리즘에 빠져 하루하루를 보내던 중 정신이 번쩍 드는 소식을 들었다.
금호실업 휴스턴 지점장 자리가 공석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날로 휴스턴 지점 발령을 신청했다.
주위에서는 다들 의아한 반응이었다.
대리 직급이 지점장으로 가겠다고 지원한 경우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누구나 선망하는 LA 지사를 자원해서 떠나겠다는 경우도 없었기 때문이다.
회사에서는 당연히 퇴짜를 놓았으나, 하늘은 나의 편이었다.
LA보다 모든 것이 열악한 휴스턴 지점 발령을 지원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1982년 5월에 정식으로
금호실업 미주 법인 휴스턴 지점장이 되었다.
그날로 다시 이민 가방을 쌌다.
10번 국도를 타고 1주일 동안 혼자 운전을 해 휴스턴에 도착했다.
지금 생각하면 휴스턴은 나에게 기회의 땅이었다.
당시만 해도 휴스턴에는 재미 교포나 주재원 등 한국 사람이 많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해당 지사 직원 모두 미국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의사소통에서 어려움이 생기니 미국 직원들과의 관계나
거래처와의 업무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이때부터 내 손에는 항상 휴대용 영어사전이 들려
있었다.
LA로 발령을 받았을 때 친형님께서 선물로 주신 에센스 영어사전이다.
내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영어사전밖에 없었다.
한국이라는 나라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미국인들에게
영어사전을 뒤적이며 우리나라를 설명하고,
김치의 적당한 표현을 찾아 소개하는 등
언제부터인지 영어사전은 나의 일부가 되었다.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영어사전은 항상 내 옆에 있었고,
나는 'Mr. Dictionary'로 통했다.
영어사전과 함께한 초창기 휴스턴 시절은 학창
시절로 다시 돌아간 느낌이었다.
기억 속에서 잊혔던, 손때가 묻어 까맣던 영어사전이 휴스턴 생활의 가장 큰 지원군이 되었다.
지금은 대부분 전자사전이나 태블릿PC 등을 사용해 순식간에 단어에 대한 정보를 받지만,
아직도 가끔은 빽빽한 단어들 사이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찾아 체크하던 시절이 그립기도
하다.
그렇게 약 6개월이 지났을까?
어느 순간부터 귀와 입이 트이는 경험을 했다.
언어의 자유로움이 나에게 가져다준 것은 참으로 많았다.
미국인 부하 직원들의 말을 귀담아들을 수 있게 되었고,
그들의 생각과 어려움을 함께할 수 있게 되었다.
개인주의적인 미국인들에게 한국적인 애정을 가지고
부하 직원들의 집안 대소사까지 꼼꼼히 챙기기 시작했다.
그러한 노력 때문에 나와 미국인 직원들은 서로를 가족처럼 여기며 단합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미주 지역 영업 실적의 상승으로 이어졌다.
현지인들에게 마음으로 다가간 것이 결국 결실을 보았다고 생각한다.
합리적인 미국인들의 사고에 한국인 특유의 '정' 문화가 합쳐져 시너지를 낸 것이다.
영어 정복과 영업 실적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게 되었다.
비록 휴스턴에서는 1년 7개월만 근무했지만,
그곳에서의 경험은 다른 곳에서의 17년보다 더 많은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
조직장으로서의 경험, 소통 방법 등 많은 것을 배웠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소중한 것은 시행착오를 밑거름으로 삼는 방법이었다.
선물 받은 영어사전
하나로 여기까지 온 것 같다.
지금도 사장이 된 것에 가끔 놀란다.
신입 사원 때부터 사장을 목표로 야심 차게 준비한 것도 아니었다.
매 순간 위기가 닥쳤을 때 앞서 헤쳐나갔을 뿐이었다.
행운으로 점철된 직장 생활인 것 같다.
손에서 떠나지 않았던 영어사전은 내 직장 생활을
대변한다.
영어 단어를 찾을 때처럼 모르는 것을 계속해서 찾아보고, 적용하는 과정이었다.
목표 달성을 위해 끊임없이 물어보고, 추진하고, 실패 원인을 찾아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는 경영과 영어사전은 너무나 닮았다.
수많은 영어단어처럼 경영은 아직도 모르겠다.
휴스턴 생활처럼 계속해서 찾아보고 연구하고 적용해보는 것이 결국은 정답인 것 같다.
"현명한 부모되기"
햇볕이 따사로운 늦가을의 어느날,
아파트의 어린이 놀이터에 젊은엄마 둘이 각기 나이어린 남자아이를 데리고 나왔다.
두 엄마는 친한사이로 벤치에 앉아 얘기를 나누고 있었고
서너살 정도의 남자아이 둘은 모래밭에서 놀고 있었다.
그때 한놈이 모래를 집어 입에넣자 다른놈도 따라서 모래를 입에 넣었다.
벤치에 앉아있던 엄마중 한명이 그 광경을 보자
용수철처럼 뛰어 일어나 아이에게 달려갔고
손가락을 애 입에넣어 모래를 꺼내면서 아이등을 때리며 야단을 쳤다.
갑자기 돌변한 엄마의 태도와 야단 때문에 결국 꼬마는 울기시작했다.
그런데 한 엄마는 벤치에 그대로 앉은채 대단히 미묘한 웃음을 지었다.
두 엄마의 태도는 너무나 달랐기 때문에 그 차이는 누가봐도 알수있을 정도였다.
애를 야단치고 벤치로 돌아온 엄마는 다른 엄마에게 말했다.
‘아니, 애가 모래를 먹고있는데 그냥 보고만 있으면 어떻게 해요.’
다른 엄마가 침착하게 대답했다.
‘이제 곧 뱉을꺼에요.’
정말 그 꼬마는 얼굴을 찡그리고 모래를 뱉어내고 있었다.
‘아마 다시는 모래를 먹지않을 겁니다. 맛이 없다는 것을 알았을 테니까.’
모래를 먹다 용수철 엄마에게 날벼락을 맞은놈은 이름이 영수.
스스로 모래를 뱉어낸 놈은 종태다.
그로부터 25년도 더 지난 지금.
영수는 대학을 졸업했지만 취업이 안돼 자기방에 박혀있다.
‘백수’ 가 되어 엄마의 애간장을 태우고 있는 것이다.
종태는, 장사꾼이 되어 작지만 수익이 좋은 기계부품상을 하고 있다.
모래는 같이 입에 넣었지만 그 둘은 지금 전혀 딴 세상을 살고 있다.
영수는 유치원때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때까지
헬리콥터맘이 몰아세우는 골목에서 학원과 학원을 전전했고,
잠도 제대로 못자면서 입시를 위한 암기기계가 되어갔다.
유년기도, 소년기도 없이 오직 시험-점수에 쫓기면서 숨돌릴틈도 없이 살았다.
자기가 잘하고 좋아하는일은 하나도 할수 없었다.
어렵사리 대학에 입학하면서 이제 자기의 인생도 달라질 것이라고 희망했다.
그러나 대학을 졸업하고 3년, 수백통의 이력서를 쓰고
수십번의 면접을 봤지만 계속 낙방, 지금은 경쟁에서 진 낙오자가 되어
자괴감과 열등감에 사로잡힌 백수가 되었다.
해가 거듭할수록 대학을 막 졸업한 후배들에게 밀려 취업의기회는 더 멀어지고 있다.
이대로라면 자기의 인생은 없는 것이다.
직장이 없으니 용돈까지 엄마에게 타서 써야하고
애인도 사귈수 없고 결혼은 꿈도 꾸지 못한다.
초기 우울증 증세를 보이는 엄마의 시선은 날로 싸늘해져가고 있으며
스스로가 집안의 ‘짐’ 이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에 잠이 오지않을 정도다.
그렇다고 뾰죽한 수도 없다.
절망의 시간인 것이다.
종태엄마는 성격이 신중하고 아들을 관찰하는 안목이 있었다.
엄마는 아들이 영민한편이 아니란걸 알았고
대신 다른방면의 소질이 있다는 것을 주의깊게 살펴봤다.
생각대로 학교성적은 나빴다.
또 공부에 흥미를 가지지 않았고 재미도 없어했다.
단, 종태 스스로가 택해서 다닌 학원은 영어와 태권도 였다.
영어공부에 흥미를 보였으며 태권도는 정말 열심히 했다.
종태에게는 유년기와 소년기가 있었으며 활발하게 뛰놀며 자랐다.
부부는 아들의 진로를 위해 오래동안 의논했으며
종태는 ‘장사꾼’ 이 되는게 적성에 맞다는 결론을 내렸다.
고등학교를 졸업한후 친지가 경영하는 큰 규모의 기계부품상에 도제로 들어갔다.
종태의 천부와 기질은 곧 빛을 발했다.
종태는 정말 타고난 장사꾼이었다.
일도 잘했거니와 장사의 속성을 빨리 배워나갔다.
4년후, 세평이 채 안되는 가게에서 독립했으며 새벽부터 밤까지 전력투구하고 있다.
그들 부부는 아들의 가게가 눈에 보일정도로 성장하는 것을 느끼면서
자기들의 결정이 옳았음을 다시 확인하고 기뻐했다.
우리나라 학부모들의 자녀에 대한 교육열은 이미 세계가 인정하는 수준이다.
엄마들은 알바를 해서라도 부족한 학원비를 마련,
죽기아니면 까무라치기로 애들을 몰아대고 있다.
정말 자식의 성공과 행복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자식에게 ‘올인’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지금은 대졸백수 100만을 포함, 300만의 청년실업이 현실이다.
이 실업율은 개선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왜 이런일이 일어났을까.
열심은 있었지만 방법이 틀렸기 때문이다.
수요가 없는 과잉공급이 그래서 생긴것이고
이런 경제원칙은 인력시장 에서도 마찬가지다.
경제에서 예외는 절대로 없다.
때문에 이제는 반드시 방법을 바꿔야 한다.
같은 비용과 노력으로 가장 큰 효율을 끌어내는 지혜와 지식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현명한 부모가 되는게 먼저다.
말하자면 먼저 부모, 특히 엄마들이 바뀌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애들은 서로 다르다는 점이다.
일란성 쌍둥이도 가족들은 그 차이를 안다.
세상에 같은애는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을 필요가 있다.
이점을 모르기 때문에 남들이 하는대로 따라가게 되고
돈은 돈대로, 노력은 노력대로 쓰고도 결과가 없는 것이다.
애들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면,
제 자식을 제대로 볼수가 있다.
공부를 잘 하는것도, 잘 못하는것도 한 사람의 일부분일 뿐이다.
대신 잘 하는 다른부분이 반드시 있는법이다.
그게 천부-하늘이 주신 재간이며 재주다.
영수엄마는 아들의 천부를 몰랐기 때문에 죽을고생을 하고도 실패했다.
그러나 종태엄마는 아들이 공부는 잘 못해도 뛰어난
장사꾼이 될 소질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게 결정적인 성공의 열쇠였다.
영수는 백수로 끝날 공산이 크다.
그러나 종태는 규모가 큰 기계부품도매상이 될 것이다.
그게 종태가 좋아하고 잘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이 밑그림의 문제다.
거의 모든 부모-엄마들은 ‘자기의 기준’ 으로 애들을 키우고 있다.
아무리 애엄마라 해도 ‘당사자’ 는 될 수 없다.
끝까지 ‘당사자’ 는 자식인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계획과 실천은 엄마의 생각과 기준이 아니라 애가 기준이 돼야 옳다.
거의 대부분의 엄마들은 이 부분에서 벌써 실패하고 있다.
엄마의 생각과 기준은 애 에게는 전혀 맞지않는 억지가 될 수 있다.
때문에 학교도, 학원도 비능율적이 되고 성적은 성적대로 오르지 않는다.
애가 하기싫은 것을 억지로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식의 진로를 위한 밑그림-큰계획은 반드시 자식을 기준으로 그려야 한다.
잘 살펴보기만 해도 풀릴수 있는 근본문제다.
그게 누구든, 한가지 재주는 다 가지고 있다.
그걸 빨리 찾아내는게, 사실은 엄마들의 책무가 아니겠는가.
더 중요한 문제는,
지금의 엄마가 자식이 성장한 후의 일에 대해 계획을 세울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20에서 25년후의 사회는 지금과는 판이하게 달라질 것이다.
옥스퍼드 마틴스쿨에 재직중인 베네딕트 프레이 교수와
마이클 오스본 교수는 지난해 발표한 ‘고용의 미래’에서
자동화와 기술의 발전으로 20년 이내에 지금직종-직업의 47%가 사라질 것으로 전망했다.
이분들의 학문적이고 전문적인 전망이 아니더라도
그게 사실일것임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엄마들만 모를 뿐이다.
지금의 학습방법이 그런 미래를 위한 것이 될 수 있을까.
그래서 애가 잘 하고 좋아하는 일을 위해 더 투자하는 게 현명한 것이다.
천부가 성공 확율이 가장 높기 때문이다.
오늘을 기준으로 내일을 재단하는 것은 언제나 큰 위험을 동반한다.
이제 더 근본적인 문제를 생각해 보자.
부모들은 한결같이 자식이 성공하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
지금으로부터 20-25년후의 사회에서 성공은 어떤것이며 행복을 어떤것일까.
이 대목에서 부모의 ‘철학’ 이 요청된다.
소유는 만족이지 그 자체가 행복은 아니다.
행복은 오히려 ‘느낌’ 이다.
예나 지금이나 그리고 앞으로도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직업은,
자기가 좋아하고 잘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그게 진정한 성공이고 행복이다.
자기와 맞지않는 직장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훨씬 많다.
불행한 사람들이 그들이다.
진정 자식의 성공과 행복을 바란다면 역시 ‘천부’를 살필줄 알아야 하며
자식이 그 길로 나아갈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때문에 남들이 하는대로 따라가는 것은 가장 소모적인 어리석음이다.
원칙에 충실한 것,그게 성공의 탄탄한 길임을 잊으면 안된다.
호진이는 초등학교 6학년의 남자아이다.
호진이는 자기가 좋아하는 미술학원 이외에는 어떤 학원도 다니지않는다.
언제나 땀을 뻘뻘 흘리면서 뛰놀고 있다.
호진이의 누나는 고1에서 학교를 자퇴했다.
자기의 수준과 학교가 맞지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검정고시를 준비하고 있다.
호진이의 부모는 두 아이에 대해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한 것이다.
두 아이 모두 뛰어난 머리를 가지고 있으며 그 실력도 발군이다.
이미 오래전 부모들은 두 아이를 깊이관찰, 그런 방향으로 키웠기 때문이다.
부모, 특히 엄마의 판단은 한 아이의 일생을 좌우하게 된다.
같이 자랐어도 한 아이는 행복해 지고 다른 아이는 불행해 진다.
영수가 백수가 된 것도 종태가 뛰어난 장사꾼이 된 것도 엄마들의 결정이었다.
현명한 부모-엄마가 된다는 것은 사실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엄마가 현명해지지 않으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자식의 것이 된다.
이제는 정말 모두가 자녀의 행복한 미래를 위해 그 생각을 바꿀 때가 되었다.
무식보다는 반(半)지식이 더 위험하다.
2층 이상에서 무엇이 어떻게 진열돼 있는지 아는 사람은 적다
과학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최초로 전구를 발명한 ‘에디슨’을 아는 사람은 많지만,
비운의 과학자, 테슬라가 떠 오른다
에디슨의 그늘에 가려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그의 인생을 돌아보며
테슬라 탄생 150주년을 맞아 2006년을 ‘니콜라 테슬라의 해’로 정했고,
세르비아는 2006년 3월 베오그라드 국제공항이름을 ‘테슬라 공항’으로 바꿨다.
테슬라를 두고 미국, 크로아티아, 세르비아가
서로 자기 나라의 발명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젊은 시절 미국으로 이민 간 테슬라의 특이한 이력 때문이다.
현대 전기 문명의 근간이 되는 교류를 발명했으며,
시대를 앞선 과학적 통찰력과 독특한 삶 덕분에 많은 문학과 영화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웨스팅하우스사(社)에서 일하면서 만들어냈다.
교류는 전기가 흐르는 방향이 주기적으로 바뀌는 전기다.
현대 전기 문명을 일으킨 원천기술이다.
이 발명은 1895년 웨스팅하우스사가 나이아가라 폭포에
교류발전기를 사용한 수력발전소를 만들면서 빛을 보게 된다.
지금 보고 있는 컴퓨터, 인터넷은 등 수많은 전기문명이
테슬라의 교류 전기시스템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1891년에는 유명한 테슬라코일(Tesla Coil)을 제작했다
테슬라코일은 간단한 장치로 수십만 볼트의 전압을 만들어내는 장치다.
당시 60Hz에 불과했던 가정용 전기를
수천Hz의 고주파로 바꾸며 엄청난 고전압을 발생시킨 것이다.
순간이동 시킬 수 있다는 황당한 이론까지 나올 정도였다.
몇 년 전 개봉한 ‘프레스티지’(Prestige) 영화를 보면 마술사 로버트가 순간
이동마술을 펼치기 위해 테슬라를 찾아가 테슬라코일을 얻는 장면이 나온다.
테슬라코일의 유명세와 신비주의를 따르는 추종자 덕분에
테슬라는 ‘몽상가’ ‘미친 과학자’
‘마술가’ 등의 호칭도 갖고 있다.
또 테슬라는 한 발 앞선
발명가로 현대 과학기술의 발전 방향을 알려 줬다.
그가 완성하지는 못했지만 후대 과학자들이
테슬라의 이론으로 만들어낸 기기들은 무궁무진하다.
그는 테슬라코일을 이용한 실험 도중 라디오 신호를 같은 진동수로 공명시키면
이 원리는 현재 라디오나 TV 등에 응용돼 다양하게 쓰이고 있다
무선조종장치를 연구하던 테슬라는 현대 로봇의 가능성도 언급했다.
제 1차 세계대전 무렵 잠수함을 탐지하는 아이디어를 냈는데 2차 대전에서 레이더로 실용화됐다.
고주파기술 발전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면서 전기시스템을 획기적으로 향상 시켰다
그리고 전자현미경, 수력발전소, 형광등, 라디오, 무선조종보트,
그의 업적만큼 살았을 때
인정받지 못했다.
특히 라이벌이었던 에디슨 때문에 그의 업적은 많이 가려졌다.
1882년 테슬라가 에디슨 연구소에 들어가 발전기와 전동기를 연구할 때부터
전달하는 방법을 고안하면 거액을 안겨주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테슬라는 에디슨의 직류시스템의 문제를 지적하며 교류시스템을 만들었다.
테슬라는 에디슨에게 사표를 던진다.
직류방식을 고집한 에디슨은 테슬라의 교류에 대해 나쁜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해
노벨물리학상 공동 수상자로 선정됐다는 기사가 났지만
에디슨과 함께 상 받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기이한 삶처럼 그의 성격도 특이했다.
손수건은 하얀 비단으로 된 것만 썼다.
말년 그의 호텔방에는 비둘기 새장이 가득했다고 한다.
평생 독신으로 살며 발명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던 테슬라는
1943년 뉴욕의 한 호텔에서 쓸쓸히 숨을 거뒀다.
그러나 세상은 시대를 앞서갔던 테슬라를 잊지 않았다.
1961년 국제순수 및 응용물리학 연맹(IUPAP)의 표준단위 및
그 정의에 관한 위원회는 자기장의 세기를 나타내는 단위를
테슬라의 이름을 딴 T(Tesla)를 쓰기로 했다.
전기를 이용한 수많은 발명품을 만들었던 테슬라의 이름에 걸맞는 단위라 하겠다.
그때 저쪽에서 아들이 달려왔습니다.
"엄마 거기서 뭐하세요?"
"얘야, 괜찮아, 기회가 또 있을 거야."
어머니는 아들을 위로했습니다.
"엄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나 붙었어요."
알고 보니 어머니는 문리대 게시판 앞에 서 있었습니다.
뇌의 변연계는 흥분하고 심장은 빨리 그리고 높게 뜁니다.
엔도르핀이 분비되고 쾌감이 증가합니다.
'내가 왜 이러지?' 하는 식으로 자기 분석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괜찮아. 내가 누군데. 더 어려울 때도 잘해 온 난데
이까짓 걸 가지고 뭘···.'
이렇게 긍정적인 언어를 자신의
마음에 심습니다.
그러면 뇌와 호르몬의 변화가 찾아오면서 마음이
밝아집니다.
특별히 건강한 사람들은 이렇게 마음의 균형을 유지하고 사는
분들입니다.
그가 상상했던 성적은 적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괜찮은 신인 투수 하나가 나타났다며
주변에서 엄지 손가락을 추켜올려 줬을 때도
상대적으로 싱싱한 어깨와 명품
구질로 소문난 만큼
선발 투수 라인업에서 밥값은 할 줄
알았다.
출발은 썩 괜찮았다.
하지만 그 다음은 악몽의
연속이었다.
1승을 사이에 둔 아홉 번의
패배.
냉혹한 생존의 세계에서 기댈 곳이라곤
아버지 같은 감독뿐이었지만
그마저도 아무 말이 없었다.
등판일이면 어깨를 짓누르는
부담감 때문에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감독의 방문을 두드린 것도
그때였다.
제발 2군으로 보내 달라고 눈물로 사정했다.
스무 살도 되지 않은 어린
선수가 홀로 감당하기엔
프로의 세계가 지나치게 엄혹하다는 걸
알고 있던
감독의 입에서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안 돼!"
1991년 8월 14일 광주 무등 경기장.
감독의 입에서 다블헤더 2차전 선발 투수로 호명된 약관의 투수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상대 투수
때문이었다.
지난 두 시즌 동안 MVP에 올랐고 투수가 할
수 있는
모든 기록을 갈아치운 '국보'
선동열이 몸을 풀고 있었다.
최고
시속 158km의 직구와 활처럼 휘어지는 슬라이더를 뿌려대는
'무등산 폭격기' 앞에서 평정심을 유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여름의 땡볕조차 생기를 잃은
듯 보였다.
하지만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자신의 능력을 믿고 마운드에
올라 지금껏 주눅 들었던 구질을
마음껏 뿌리는 게 최선처럼
보였다.
승부는 예상 외로
팽팽했다.
첫 균열이 온 건 4회
초였다.
타석에 들어선 선두 타자 김기태가
선동열의 바깥쪽 직구를 담장
너머로 날려 버린 것이다.
더그아웃에서 경기를 지켜보던 어린
투수의 어깨 위에
누군가 손을 얹고 이렇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어깨에 힘을 빼고 너만의
공을 던져."
10개의 삼진을 뽑아낸
완봉승이었다.
당시 나이 19세였던 투수는
김원형.
그를 기어이 마운드에 올렸던 감독은 김인식이다.
"선수는 어느 순간 결정적 계기를 만나면 완전히 다른 선수가 될 수
있다.
선동열을 이긴다는 자신감을 어디서 경험할 수 있겠나. 오로지
마운드뿐이다.
그리고 거기엔 결국 혼자뿐이다." 훗날 김인식 감독의
술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