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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
소재지 |
창건연대 |
배향 인물 |
① |
죽림서원 |
강경읍 황산리 |
1626 |
조광조, 이황, 이이, 성혼, 김장생, 송시열 |
② |
돈암서원 |
연산면 임리 |
1634 |
김장생, 김집, 송시열, 송준길 |
③ |
노강서원 |
광석면 오강리 |
1675 |
윤황, 윤문거, 윤선거, 윤증 |
④ |
금곡서원 |
연무읍 금곡리 |
1687 |
김수남, 성삼문, 조계명 |
⑤ |
충곡서원 |
부적면 충곡리 |
1692 |
계백, 박팽년, 성삼문, 이개, 유성원, 하위지, 유응부, 이현동, 박증, 김정망, 김익겸, 김홍익, 이민진, 김만중, 박종, 조병시, 김자빈, 이학순 |
⑥ |
휴정서원 |
부적면 신풍리 |
1700 |
송익필, 김공휘, 김호, 이항길, 김상연, 김진일, 김우택, 권수, 유무, 유문원 |
⑦ |
구산서원 |
연산면 오산리 |
1700 |
윤전, 윤원거, 윤순, 윤문거, |
⑧ |
노성향교 |
노성면 교촌리 |
1398창건 1700년경 이전 |
공자, 안자, 증자, 자사, 맹자, 설총, 최치원, 정이, 주희, 안유, 정몽주,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김인후, 이황, 이이, 성혼, 조헌, 김장생, 김집, 송시열, 송준길, 박세채 |
⑩ |
궐리사 |
노성면 교촌리 |
1716 |
공자, 주돈이, 정호, 정이, 장재, 주희 |
이들 경관들은 17세기 후반 노소 분당의 영향을 받은 논산지역 서인 세력의 노론-소론계의 분리를 반영하는 특징적인 것이다. 그 분포상황을 보면 이 지역을 가로지르는 연산천을 사이에 두고 북쪽은 소론계인 파평윤씨가 그리고 남쪽은 노론계인 광산김씨(은진송씨도 관련)가 우세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들 중에서 특히 돈암서원과 노강서원, 윤증고택과 노성향교, 궐리사의 경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서원, 사우나 문중고택 등은 연산과 노성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혈연과 학연, 그리고 정치적 행보를 달리하는 세력 간의 경쟁 관계를 특징적으로 보여주는 경관이기 때문이다.
먼저 연산천을 사이에 두고 자리하고 있는 돈암서원과 노강서원은 그 배향인물에서 잘 드러나듯‘연산-노론-광산김씨․은진송씨’와‘노성-소론-파평윤씨’로 구분되는 두 축의 중심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위치 또한 돈암서원은 연산 광산김씨의 중심인 고정리 근처 임리에 있고, 노강서원은 노성 파평윤씨의 중심인 병사리 남쪽 광석면 오강리에 있다. 임리의 돈암서원이 김장생 묘역이 있는 고정리에 이웃해 있는 것과는 달리 노강서원은 상대적으로 병사리에서 조금 떨어져 있다고도 볼 수 있는데, 이는 노성 파평윤씨의 입향, 정착과정과 관련된 것이 아닌가 한다. 즉, 노강서원이 있는 광석면 오강리는 파평윤씨가 처음 입향한 광석면 득윤리와 추후 자신들의 중심지로 삼은 병사리의 중간 지점에 해당하는 곳이다.
결국 연산의 광산김씨를 중심으로 하는 노론계와 노성 파평윤씨의 소론계는 이들 서원의 건립과 운영, 자파 인물의 배향, 후진 양성 등을 통해 중앙 정계와 지역사회에서의 주도권을 형성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후 광산김씨(연산현)와 파평윤씨(니산현) 간의 경쟁관계는 연니분쟁(蓮尼分爭)이라 일컬을 정도로 더욱 심화되는데, 계속되는 서원, 사우의 건립을 통한 자기 영역의 설정과 타 세력권으로의 잠식을 시도하였다.
18세기에 접어들어 노성의 파평윤씨가 노론이 장악하고 있던 연산의 오산리에 구산서원(1700)을 세워 윤씨 문중의 인물만을 배향하게 된 것도 그러한 과정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이에 맞서 송시열을 중심으로 하는 노론계에서는 노성면의 노성산 아래에 공자 영정을 모시는 궐리사(1716)를 세운다. 언뜻 보기에는 조선시대 문중 고택과 사우 건물의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노성향교 - 윤증고택 - 궐리사로 이어지는 건물의 배치가 흥미롭다. 그러나 내부적으로 들어가 보면 노성 파평윤씨의 또 하나의 상징적 중심인 윤증고택이 노론계 인물까지 배향한 노성향교와 노론계가 직접 건립한 궐리사에 의해 포위당하고 있는 형국이다.
본래 윤증고택은 소론의 상징 인물인 윤증을 위해 차남인 윤충교가 윤증 말년에 건립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윤증은 이곳에서 거주하지 않고 병사리에 있는 유봉영당에서 상주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런데 이러한 경관배치는 17세기 말 회니시비(懷尼是非)로 알려진 윤증과 송시열의 절연관계가 그대로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송시열은 윤증과 결별한 후 3년이 지나(1687) 궐리사 건립을 추진하게 되는데, 그 위치는 후대 그의 제자들이 노성산 아래 궐리촌에 세우는 것으로 보아 노성 일대가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결국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의 궐리사 건립은 노성 파평윤씨를 자극하는 촉매제가 되었을 것으로 보는데, 앞서 말했듯이 파평윤씨가 연산의 오산리에 구산서원을 세우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 반격이라도 하듯 권상하, 김창집 등 송시열의 제자들은 파평윤씨의 핵심 영역인 노성산 아래에 궐리사를 건립한다. 처음 궐리사가 세워졌던 궐리촌은 현 위치 서쪽에 있었다고 하는데, 1805년 현 위치로 이건한 것이다.
이렇듯 노성 파평윤씨의 상징적 중심인 병사리와 그 주변 지역에서 확인되는 다양한 유교경관들은 단순히 성씨집단의 내부결속이나 사회적 지위의 상징으로서만이 아닌, 지역 내 다른 세력과의 경쟁관계를 반영하는 구심체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 참고문헌 ◈
1. 이연숙 외,『논산 병사마을』, 충남대학교 마을연구단, 대원사, 2008년
Ⅱ. 노성의 파평 윤씨
1. 파평 윤씨의 노성(魯城) 입향과 정착
파평 윤씨의 시조인 윤신달(尹莘達)은 고려 개국공신의 한 사람이다. 고려의 문벌귀족인 파평 윤씨 가문을 대표하는 인물로서는 동북 9성을 축조한 윤관(尹瓘, 1040~1111)이 있다.
충남 논산의 노성에 기반을 마련한 파평 윤씨는 흔히 노종 5방파(魯宗 五房派)로 불려진다. 노종 5방파가 노성 지방에 자리 잡게 된 것은 윤돈(尹暾, 1519~1577) 때였다. 조선 시대에 윤씨 가문이 배출한 과거 급제자는 412명(남원, 함안 75인 포함)이다1). 충남 논산의 노종 5방파의 경우 조선 후기에 배출한 대과 급제자가 46명, 시호를 받은 인물도 10명이나 된다. 송시열이『회덕향안』서문(1672)에서,“내가 생각컨대 호서에는 예로부터 3대족이라 일컫는 바가 있었으니 연산의 김씨, 니산의 윤씨,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회덕의 송씨이다.”라고 언급한 것처럼 노성(니산)의 파평 윤씨는 호서 지방의 대표적인 사족으로 성장하였다.
윤돈은 윤선지(尹先智, 1501~1568)와 평산 신씨 사이의 3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형 윤희(尹曦)와 아우 윤욱(尹昱)은 경기도 파주에서 살았다. 윤돈만이 첨정(僉正) 류연(柳淵)의 차녀 문화 류씨(文化 柳氏)와 결혼해 처향(妻鄕)인 노성 근방의 니산현 득윤면 당후촌(尼山面 得尹面 塘後村)으로 이주하면서 노성지역과 처음 인연을 맺었다. 다른 형제들은 모두 서울에 근거를 두면서 벼슬길에 나아갔으나, 윤돈만이 처가 근처인 이곳으로 이거하였던 것이다. 득윤 당후촌으로 윤돈이 내려오는 시기는 결혼 직후인 1540~50년대 즈음으로 보인다. 당시의 사정을 자세히 전해주는 기록은 거의 없지만, 다행히도 장인인 류연으로부터 윤돈이 재산을 분배받은 문서(分財記=和會文書)가 전해지고 있다. 이 화회문서는 장인이었던 류연의 3년상을 마친 선조 7년(1573) 8월 12일에 자녀들이 모여서 재산을 나눈 문서이다(이 문서는 원래 3부가 만들어졌으나 2부는 없어지고 1부만이 한씨가에 보관되어 오던 것이 윤씨 가문으로 전해졌다고 추기되어 있다). 류연은 2녀 1남을 두었는데 장녀(한여헌의 처), 차녀(윤돈의 처), 3남 류서봉이었고 분재 당시에는 한여헌과 류서봉이 이미 고인이 되어 장녀와 윤돈, 그리고 류서봉의 처 이씨가 참여하였으며, 윤돈의 아들인 윤창세(尹昌世, 1543-1593)가 기록하였다. 이 문서의 내용을 보면 ① 봉사조(奉祀條)로 전답 8마지기와 노비 2구, ② 장녀 몫으로는 전답 207마지기와 노비 23구, ③ 차녀 몫으로는 174마지기와 노비 17구, ④ 3남 류서봉 몫으로는 179마지기와 노비(수 불명)가 나누어졌다. 이같이 처가로부터 많은 재산을 분배받은 이후, 류서봉의 처 이씨가 요청하여 윤창세의 막내아들인 윤희(尹熺)가 외손 봉사를 하게 되면서 봉사조까지도 이양 받았던 것이다.
윤돈의 아들 윤창세는 광석면 득윤리에서 현재의 노성면 병사리(丙舍里) 비봉산 자락으로 터전을 옮긴 인물이다2). 그가 처가의 전장(田庄)이 있는 병사리에 정착하고 부친인 윤돈의 묘소를 이곳에 정함으로써 병사리는 윤씨가의 명실상부한 터전이 되었다. 윤창세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독자였던 외숙부 류서봉이 후사없이 세상을 떠나자 홀로된 외숙모를 모셨고, 뒤에는 문화 류씨가의 봉제사(奉祭祀)를 자신의 다섯째 아들인 윤희가 담당하도록 하였다. 그런가 하면 처가인 청주 경씨(淸州 慶氏) 가문의 유산 일부도 상속받았다. 윤창세의 처는 청주 경씨로 부제학 경혼(慶渾)의 딸인데, 슬하에 5남 2녀를 두었다. 청주 경씨는 윤창세보다 31년을 더 살면서 7남매를 모두 결혼시키고, 노종 5방파가 성장하는 기반을 마련한 뒤 서울 자택에서 8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다만 당시 노종 5방파가 학문을 닦기 위해 생활한 서울 집은 어느 곳인지는 알 수가 없다).
2. 노종 5방파의 가계와 인물
노종 5방파는 바로 윤창세의 아들들인 ① 윤수(尹燧, 설봉공파), ② 윤황(尹煌, 문정공파), ③ 윤전(尹烇, 충헌공파), ④ 윤흡(尹火翕, 서윤공파), ⑤ 윤희(尹熺, 전부공파)를 말한다. 이 5형제의 슬하에서는 손자가 21인, 증손자가 51인으로 크게 번창하였다. 그리고 윤창세의 두 딸 가운데 장녀는 박심(朴諶)에게, 차녀는 송시열의 백부인 송희조(宋熙祚)에게 출가하였다. 그리고 이들 노종 5방파의 연고지는 노성에만 한정되지는 않았다. 이들의 거주지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파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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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윤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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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성 병사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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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연산,석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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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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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창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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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황(노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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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문거(석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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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선거(금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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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증(노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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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전(연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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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최초 노성에 자리 잡은 윤돈은 광석면 득윤리에, 윤창세는 광석과 서울, 윤황은 노성 병사리에, 윤황의 동생인 윤전은 연산에 거주하였다. 윤황의 아들 윤문거와 윤선거는 각각 석성(부여)과 금산에, 윤선거의 아들인 윤증은 노성에 거주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호란과 청조의 압력으로 국가의 기강이 흔들리던 17세기 전기에 노종 5방파 인물들은 청과의 투쟁 과정에서 척화 운동을 전개하였다. 윤황은 척화 상소 때문에 유배생활을 하였고, 윤황의 아우 윤전은 강화도에서 청군과 대치하다가 순절하였다. 윤선거의 처 공주 이씨 역시 강화에서 순절하였다. 그런데 이들 소위 5방파 중에서도 윤황의 직계가 가장 번성하였는데 그의 슬하에 성장한 8형제(八擧. 윤훈거, 윤순거, 윤상거, 윤문거, 윤선거, 윤민거, 윤경거, 윤시거) 모두가 당대에 이름을 날리던 인물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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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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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莘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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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 |
尹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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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 |
尹先智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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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 |
尹暾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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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化 柳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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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昌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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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州 慶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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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命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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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燧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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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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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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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火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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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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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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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熙祚 | ||||||||
(설봉공파) |
(문정공파) |
(충헌공파) |
(서윤공파) |
(전부공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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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魯宗 五房派)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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八擧 |
- 윤훈거(尹勛擧) - 윤순거(尹舜擧) 出(尹燧) - 윤상거(尹商擧) - 윤문거(尹文擧) = 송시열(宋時烈) 女 - 윤선거(尹宣擧) - 윤증(尹拯) = 권시(權諰) 女 - 윤민거(尹民擧) - 윤경거(尹耕擧) - 윤시거(尹時擧) |
<종학당에서 바라본 파평 윤씨 문중묘역> ○ 윤황(尹煌, 1571-1639)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 때에는 척화를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1637년 김상헌, 정온 등이 척화파로 청에 잡혀갈 때, 마침 윤황이 병으로 누워 있었으므로, 아들 윤문거는 이러한 사실을 부친에게 알리지 않았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윤황은 아들을 크게 책망하고 척화를 주장한 자신도 청에 잡혀가야 한다고 왕에게 상소하였다. 윤황의 상소는 받아들여지지 않은 대신 상소문 중에 불손한 구절이 있다 하여 영동으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고향인 노성 병사리로 돌아왔다. 노성으로 돌아온 윤황은“나는 선조들의 묘소나 지키다가 죽겠다”라고 하고는 이후로 타인의 문안을 사절하고, 시국에 관한 일을 절대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 인조 17년(1639)에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행장은 송시열이 지였고, 묘지명은 김상헌이 지었으며, 묘표는 유계(兪啓)가 지었다. 숙종 36년(1710) 영의정에 증직되었고, 1711년에 문정공의 시호를 받았다. 윤황은 사후에 노성의 노강서원, 지방관으로 근무했던 영광의 용계서원, 귀양처인 영동의 초계서원, 전주의 반곡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윤황은 윤씨 가문의 핵심 인물답게 슬하에 8형제를 두었는데, 후손들이 매우 번창하여 14명의 대과 급제자를 배출하였고 윤문거, 윤선거, 윤증 등 호서 유림의 큰 줄기를 이룬 이들이 모두 이 가계에서 나왔다.
○ 윤순거(尹舜擧, 1596-1668)는 자는 노직(魯直)이고 호는 동토(童土)이다. 윤황과 당대의 학자로서 이름을 날린 성혼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뒤에 죽산부사를 지낸 큰 아버지 윤수(尹燧)에게 입양되었으며, 외삼촌인 성문준(成文濬)에게서 학문을, 강항(姜沆, 1567-1618)에게서 시를, 김장생(金長生)에게서 예를 배웠다.
윤씨 문중을 발흥시킨 인물로 노종 5방파의 정신적 전통과 인물 양성의 기틀을 다진 인물이다. 종학당(宗學堂)을 건립하고 서책과 기물을 마련하여 자제들을 가르치고, 병사 종중의 규약인 노종(魯宗) 종약(宗約)을 마련한 장본인이다. 이이의『증손여씨향약』과
<윤순거문집> 주자의『가례
인조 11년(1633) 생원․진사시에 합격하여 내시교관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아버지 윤황이 척화를 주장하다가 귀양가고, 작은 아버지 윤전이 강화도에서 순절하자 고향에 내려와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1645년 대군사부(大君師傅)가 되어 벼슬길에 오르고 의령 현감으로 재직할 때에는 이황(李滉)과 남효온(南孝溫)의 사우를 건립하기도 하였다. 현종 1년(1660)에는 영월 군수로 재직하면서 단종과 관련된 모든 기록을 수집하여『노릉지(魯陵誌)』를 편찬하였으며 사육신, 생육신의 사적을 정리하였다.
특히 아버지인 윤황이 영광군수로 재직할 당시 부친을 따라 영광에 거주하면서 영광의 사족인 수은 강항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스승인 강항을 위하여 용계사(龍溪祠)를 건립하고,「강감회요서(綱鑑會要序)」,「수은강공행장(睡隱姜公行狀)」을 저술하였다. 강항이 일본에 포로로 잡혀가 생활하면서 보고 들은 것들을 기록한『간양록(看羊錄)』을 편찬하는데 앞장서기도 하였다3). 연산의 구산서원, 영광의 용계서원, 금구의 구성서원에 제향되었으며, 철원의 심원사 취운당대사비에 글씨가 전한다.
○ 윤선거(尹宣擧, 1610-1669)는 송시열, 송준길 등과 더불어 충청 5현(忠淸 五賢)4)이라고 일컬어지는 인물로, 윤황의 다섯째 아들이다. 그의 장자가 바로 후일 이 가문의 상징적인 인물이자 소론의 영수로 추대된 윤증이다. 부친인 윤황이 영광군수로 재임하였을 때인 광해군 2년(1610) 영광군 관사에서 태어났으며 자는 길보(吉甫)이고, 호는 미촌(美村) 혹은 노서(魯西)라 하였다. 그의 호는 노성의 서쪽(魯西)인 광석면 중리 지미촌(芝美村)에 살았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인조 11년(1633) 생원․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인조 14년(1636) 청나라 사신이 오자 유생들을 인솔하여 청의 사신인 용골대를 죽이고 명에 대한 의리를 지키자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해 겨울 청 태종이 대군을 거느리고 침입하여 오자 강화도로 피신하였다. 강화도가 함락되자 작은 아버지 윤전이 권장순, 김익겸 등과 함께 순절하고 윤선거의 처 공주 이씨도 순절하였다. 이때 윤선거는 부친을 뵙고 숙부의 명에 따라 남한산성으로 갔다. 부친 윤황이 척화를 주장하고 영동으로 유배당하자 그는 부친을 따라 영동에 갔다. 부친이 방면된 이후에는 금산에 은거하면서 평생 동안 학문 연구에만 전념하였다.
<노강서원> 윤선거는 특히 성리학에 힘쓰며 호서 사림의 종장(宗匠)인 김집에게 사사받아 예론(禮論)에 정통하였고, 성리학 전반에 걸쳐 당대에 대가가 되었다. 후에 송시열과 뜻이 맞지 않아 노소 분파의 단초를 이루었다.『가례원류(家禮源流)
숙종 1년(1675) 노강서원에 제향되었다. 숙종 36년(1710)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1711년에는 문경(文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저서로는『노서유고(魯西遺稿)』,『계갑록(癸甲錄)』등이 있다.
Ⅲ. 명재 윤증과 소론 그리고 회니시비
1. 윤증의 생애
윤증(尹拯, 1629-1714)은 자가 자인(子仁), 호는 명재(明齋)이다. 윤선거의 아들로서 어려서는 유계에게 학문을 배웠고 19세 때에는 권시(權諰)의 사위가 되었다. 그 후 김집에게 사사하였으며 다시 송시열에게 주자학을 배워 학문의 깊이를 더하였다. 부친처럼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성리학에 전념하였으며 특히 예학에 밝았다.
여러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산촌에 묻혀 지냈다.
“거미가 만든 그물이/위 아래로 걸려 있네/잠자리를 위해 말하니/처마 밑으로 오지마라(蜘蛛結網罟 橫載下與上 爲語飛蜻蜓 愼勿詹前向)”6)
윤증의 문집『명재유고』1권에 실린「영주망(咏蛛網)」이다. 이는 그가 여덟 살 때 거미줄을 보고 지었다는 작품이다. 가장 초기 작품이었던 이 시에 그의 인생관 내지 처세 철학의 윤곽이 이미 나타난 것일까?『숙종실록』에 보이는“80년 동안을 하루같이 살얼음판을 걷듯 조심조심 살아갔다”고 하는 구절 역시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 최석정, 남구만, 이광좌 등 같은 소론계 선후배 인사들이 모두 정승의 지위까지 올라갔지만, 당수 격으로 있던 그는 끝내 한 번도 정계에는 들어가 본 일이 없었다. 관직에 대한 유혹이 없었던 것은 물론 아니었다. 행장에 따르면 36세에 학행으로 내시교관(內侍敎官, 내시들을 가르치기 위해 둔 종 9품 벼슬)에 제수된 것을 시작으로 81세에 우의정에 제수될 때까지, 그는 여러 번 부름을 받았다. 그러나 번번이 사양하고, 오직 독서와 저술 그리고 후생을 가르치는 일에만 힘을 쏟는다.
<윤증의 묘.‘유명조선징사’라 써 있다> 내려오는 교지를 사양할 때는 다른 선비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사직 상소를 올리게 되
그렇다면 그가 소론의 영수 격 인물이면서도 직접 행공을 한 번도 하지 않았던 까닭은 무엇일까? 병자호란 때 윤증은 다른 사람보다도 쓰리고 아픈 체험을 한다. 청에 패배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리는 참상이 여기저기서 벌어지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강화도로 피난 갔던 사람들의 경우는 더욱 그러했다. 이를테면 김상용 같은 이는 화약에 불을 붙여 목숨을 끊었다. 김장생의 손자요, 김만중의 아버지인 김익겸도 이때 같이 죽었으며, 다른 사대부 가운데에도 물에 빠져 죽거나 목을 매어 죽는 등의 일이 무수히 있었다. 여인들의 순절은 그 숫자가 더욱 많았다. 이긍익의『연려실기술』을 보면 이때 이정구, 이소한, 이성구, 김류 등 양반 집 부인들 역시 모두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린 것으로 되어 있다. 또“물 속으로 뛰어들 때 썼던 여인네들의 수건이 물 위에 떠 있는데 그것이 마치 낙엽처럼 이리저리 밀려다니고 있었다”고 한 기록도 보이는데, 이만큼 여인들의 죽음이 많았다는 것이다.
윤증 또한 그의 부모 및 동기 등 일가와 함께 강화도로 피난을 갔다. 그런데 그의 작은 할아버지 윤전이 칼로 자결을 하였고8), 그의 어머니 이씨는 목매어 죽었건만 아버지 윤선거만은 죽지 않고 다시금 육지로 돌아왔다. 그것도 양반 체면에 노비의 옷으로 갈아입은 다음 간신히 강화도를 빠져나왔다 한다. 윤선거는 이 사건을 한 평생의 수치로 여겼다. 당시 윤선거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하는 것은 그의 사직 상소를 통해 미루어 짐작해 볼 수가 있다.“강화성이 함락되던 날, 동료 사우 모두 죽고 둘째 아버지 또한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아내는 눈앞에서 자결했고 자식은 길가에 버려두었습니다. 그런데 신은 죽지 못하고 … 구차스럽게 종놈 행세로 빠져 나와 버렸습니다. … 아무리 생각해도 죽지 못한 것이 참으로 한탄스럽기 이를 데 없습니다.”그때부터 그는 일절 바깥 출입을 끊어버리고 만다. 나라에서 내리는 벼슬도 물론 모두 사절하고 오직 학문 연구에만 몰두하게 되었다. 한편 당시 아홉 살이던 윤증은 자결한 어머니를 한 살 위인 누나와 함께 염을 한 뒤 대강 장사를 지내고, 나중에 이장을 하기 위해 큰 돌 여덟 개와 숯가루를 묻어 표적을 삼아 놓았다 한다. 그의 아버지가 관직에 나오지 않는 것을 보고 그 역시 스스로 물러나 오직 학문과 저술 그리고 후생을 지도하는 일만으로 한평생을 보내게 되었다.
2. 회니시비(懷尼是非)
원래 윤선거는 서인의 맹장이던 송시열 및 송준길과 함께 김집 문하에서 글을 배워, 이들 양송과는 당색과 학문 연원을 같이하는 동지로서 교분이 매우 두터웠다. 당시 유림에서 윤선거의 비중은, 서인의 맹주 격이던 송시열과 거의 같았다. 그런데 남인의 윤휴가 독창적인 경전 주해를 시도한 뒤로부터는 윤선거와 송시열 사이에 점차 틈이 벌어지고 심각한 상태까지 문제가 확대된다. 처음에는 비록 개인 대 개인 간의 사사로운 감정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이것은 그 뒤 학계 혹은 정계에 영향을 미쳐 조선시대 당쟁 가운에 하나의 획기적 사건으로 부각된다. 결국 송시열과 윤선거의 아들 윤증 사이의‘회니시비(懷尼是非)’가 벌어졌다.‘회’는 송시열이 살던 회덕(懷德, 지금의 대전시 대덕구 일대)이고‘니’는 윤증이 살던 니성(尼城, 지금의 충남 논산시 노성)을 가리킨다. 회니시비는 뒤에 가서 결국 노론과 소론이 갈라지는 데까지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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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니시비의 주역 송시열(左)과 윤증(右)> |
조선은 경서를 연구함에 있어서, 주자가 제시한 해석을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삼고 있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주자에 대해 감히 반기를 든 사람이 있었다. 그가 바로 윤휴다. 그런데 윤휴의 태도에 대해 가장 심각하게 배척을 한 이는 송시열이었다. 송시열은 그에 대해 사문난적(斯文亂賊)이니 휴적(鑴賊)이니 하는 말들을 거침없이 쓸 만큼 사태는 점점 험악하게 발전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윤선거가“천하의 진리는 누구든지 말할 권리가 있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윤휴에게 말을 못하게 한단 말이냐! 하물며 그의 식견과 언론은 엄연히 일가를 이룬 것이다. 세속 선비들의 고리타분한 지식이 어림이나 있는 줄 아는가?”라며 윤휴를 적극 지지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 윤선거의 명망과 세력 또한 컸다. 그래서 송시열의 화살은 윤선거에게까지 확대되어,“춘추필법에 난신적자는 먼저 그 도당부터 쳐버리는 것이 법이었소. 그런데 이제 윤공이 사문난적 윤휴란 놈을 이렇듯이 두둔하니, 윤휴보다도 먼저 윤공이 칼을 받아야겠소.”라고 말한다. 동시에“당장 절교해 버리시오! 장차 큰 화를 면치 못할 것이오.”라며 사뭇 위협적인 언사까지 쓴다. 그러나 윤선거가 생각하기에 윤휴는 그렇게 난신적자를 운운할 정도로 적대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다. 적대시는커녕 오히려,“경전의 뜻을 하필 주자만이 알란 법이 있는가?”라며 오히려 송시열에게 냉담한 태도를 보인 것이다.
이런 일이 있은 뒤 윤증의 나이 41세에 윤선거가 세상을 떠나게 된다. 이때 윤휴가 망인을 위해 제문과 함께 약간의 제수를 보내왔다 한다. 상갓집에서는 여러 가지로 논란이 있었지만, 결국 성의는 물리칠 수 없는 것이라 해서 이를 그냥 받아들였다. 그랬더니 송시열이 이것을 알고 대단히 불쾌한 감정을 가지게 되었다.“그 자가 기어코 절교까지는 한 것이 아니었던 게로구나 …!”하며 망인의 아들인 윤증과의 사제 관계도 점차 멀어져갔다.
그러다가 4년 후, 두 사람의 관계는 마침내 완전히 끊어져 버리고 만다. 윤증은 아버지 윤선거의 비문을 받기 위해 송시열을 찾아갔다. 왜냐하면 송시열은 자신의 스승이자 망부와는 친구 간이며 동시에 윤증의 장인인 권시와도 사돈 관계를 맺고 있었을 만큼 여러모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송시열은 문필과 인망이 당대 제일이었다. 비문을 짓는데 필요한 자료로써 윤증은 친구인 박세채가 지은 행장을 가지고 스승 송시열을 찾아간다. 그런데 이때 송시열이 지었다는 비문은 황당한 것이었다. 그것은 시종일관 야유 와 풍자만이 보일 뿐 비문으로서의 체통은 별로 없었다.“대체로 윤공의 학문 연원과 거취의 시종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다. 그러나 그 조예의 심천과 의리의 정조 여부에 관해서는 참으로 사람마다 알 수 없는 점이 있다. … 윤공의 깊은 경지는 도저히 들여다 볼 수가 없는 터이다. … 가만히 보건대, 다른 분들께서 이미 서술해 놓은 글들이 참으로 많고도 성대한 중, 박세채의 글이 특히 더욱 상세하다”그리고 나서 박세채가 쓴 행장을 그대로 옮겨 놓은 다음“아름답다 박세채여. 칭찬도 잘했구나. 나는 그대로 기록해서 쓸 뿐이다”라고 했다. 요컨대 송시열 자신은 윤선거의 학문이나 인격의 높낮이는 알 수가 없고, 오직 박세채가 지은 행장에 의지해서 대강 적어 본 것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즉 자신은 어디까지나‘창작이 아니라 남의 것을 그대로 기록했을 뿐(述而不作)’임을 거듭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관계가 더 갈라지게 된 계기는 이른바‘신유의서(辛酉擬書)’라고 하는 장서 때문이다.‘신유’라고 하는 것은 그가 53세 되던 해의 간지 곧 숙종 7년(1681)이고‘의서’란 곧‘보내려 하던 편지’, 즉 직접 보내지는 않고 보내려고 써두었던 편지를 가리킨다. 윤증은 이 편지에서 송시열의 인간됨을 가리켜‘왕패병용 의리쌍행(王覇竝用 義利雙行)’이라는 여덟 글자로 요약하고 있다. 즉‘왕도와 패도를 한꺼번에 쓰는 사람이고 의리와 이권을 아울러 행사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미 75세의 고령으로 존경을 받던 유학자인 송시열에 대해‘왕패병용 의리쌍행’이라고 비판한 것이다. 편지를 본 송시열은 자못 불쾌해 했다 한다. 송시열은 그 후 86세에 제주도로 귀양을 갈 때에도 스승 김장생의 묘를 찾아,‘윤증 이하 소론 놈들의 중상모략 때문에 이 지경이 되었습니다.’라는 뜻의 글을 올린 적도 있었다. 이만큼 이들은 신유의서 사건이 있은 뒤부터는 더욱 더 용납할 수 없는 원수가 되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3. 노소 분당
회니시비 이후, 송시열의 기세에 눌려 지내던 선비들이 윤증을 새로운 종주로 받들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송시열을 지지하던 이들을 노론, 윤증을 두둔하던 이들을 소론이라 부르게 된다. 노소 분당은 2차 예송에 승리해 집권한 남인들이 축출되고 서인들이 재집권한 경신환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숙종 6년(1680)인 경신년의 이 사건을 서인들은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라 불렀다. 재집권한 서인들은 남인들을 철저히 제거해 재기를 막으려 했다. 김석주는 심복인 어영대장 김익훈을 시켜 잔존 남인들을 제거할 계책을 꾸몄다. 이에 따라 숙종 8년(1682) 김환과 김중하가 남인 허새, 허영, 민암, 유명건 등이 복평군(인조의 손자이자 숙종의 당숙)을 임금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임술고변(壬戌告變)을 일으켰다. 이 사건은 조작의 혐의가 짙었으나 허새와 허영 등은 심한 고문 끝에 죽었고, 이덕주는 장사(杖死)했다. 그러나 남인 민암과 유명견 등은 무혐의가 입증되어 석방되고 사건의 일부가 무고로 판명나면서 오히려 김환은 귀양갔다.
임술고변의 일부가 김석주, 김익훈 등이 사주한 무고 사건으로 드러나자 젊은 서인들이 강하게 반발했다. 숙종과 서인 중진들은 젊은 서인 박태유와 오도일을 좌랑으로 좌천해 이를 억누르려 했으나 강력한 반발 때문에 실패하는 등 파문이 확산되었다. 그러자 숙종은 파문을 가라앉히기 위해 산림의 세 유현을 조정으로 불렀다. 송시열과 윤증, 박세채가 그들이었다. 당초 젊은 서인들은‘대로(大老)’라 불리던 송시열에게 큰 기대를 갖고 있었다. 강직한 송시열이 김익훈 등 무고자들을 법대로 처리할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송시열도 여주에서 조지겸으로부터 임술고변의 진상을 들었을 당시에는 김익훈을 처벌하는 데 동의했다. 그러나 서울로 올라와 김수항, 민정중, 김만기 등 서인 중진들의 설명을 듣고는 태도를 바꾸었다. 임술고변이 서인 정권의 보호 차원의 일이라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송시열은 김익훈의 처벌 여부를 묻는 숙종의 질문에“김익훈은 스승인 김장생의 손자인데 제가 잘못 인도해 이렇게 되었다”며 김익훈을 옹호했다. 이런 송시열에게 실망한 젊은 서인들은 그의 제자 윤증에게 기대를 걸었다.
송시열과 함께 숙종의 부름을 받은 윤증은 과천에 있는 나량좌의 집에 머물며 정국을 관망할 뿐 선뜻 출사하지 않았다. 그러자 조정에 먼저 나온 박세채가 찾아와 출사를 종용했다. 이때 윤증은 박세채에게 출사에 앞서 세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첫째 서인들은 남인들의 쌓인 원한을 풀어줄 것, 둘째 삼척(三戚, 김석주 ․ 김만기 ․ 민정중의 세 외척)의 세도를 막을 것, 셋째 당이 다른 자는 배척하고 순종하는 자만 등용하는 풍토를 바꿀 것이었다. 박세채는 윤증의 문제 제기가 모두 타당한 것임을 수긍했지만, 자신으로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고 인식하고 사직을 청해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송시열도 사직하고 말았다.
임술고변의 처리 과정은 서인들을 분당시켰다. 남인에 대한 화해를 주장하는 윤증의 소론과 이를 반대하는 송시열의 노론으로 나뉜 것이다. 소론의 중심인물은 윤증과 박세채를 비롯하여 조지겸 ․ 오도일 ․ 한태동 ․ 박태보 ․ 남구만 등이었고, 노론의 중심인물은 송시열을 비롯하여 김석주 ․ 민정중 ․ 김익훈 ․ 이이명 등이었다.
4. 윤증과 소론의 사상
윤증은 예학에 해박하였다.『명재선생의례문답』은 윤증 제자들이 예에 대해 질문하자 수시로 답한 것으로 이황, 이이, 정구, 서경덕, 성혼 등의 예에 대한 견해들을 기록하고 있다. 윤증은‘실심(實心)’을 강조했다. 윤증의 학풍은 절충주의적 성리학적 경향이 강했던 성혼으로부터 이어지는 가학적 전통에서도 연유한 측면이 많다. 그는 부친인 윤선거에 대한 평가에서도 송시열이‘허명(虛名)’을 중시한 반면 윤선거는‘실심(實心)’을 강조한다고 비교하기도 했다(時烈外也名也 宣擧內也實也 任大義也 則 時烈虛名也 宣擧實心也…『明齋年譜』). 송시열이 철저하게 주자의 노선을 따르는 주자학파였다면, 명재는 기호 유학을 계승하면서도 주자학과는 다른 노선을 걸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른 노선이라고 하면 이(理)보다 심(心)을 중시하는 경향으로 압축된다. 이름을 붙이자면 심학(心學)이다. 윤증 이후 소론의 학풍이 대체적으로 명분보다 실질과 실용을 중시하는 실학적 기풍을 띤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윤증의 심학은 양명학과도 연결된다. 조선 양명학의 대가인 하곡 정제두(霞谷 鄭齊斗, 1649~1736)가 바로 윤증의 지도를 받았다는 사실에서도 그 연결고리가 드러난다. 그러나 양명학에 대한 윤증의 입장은 외주내왕(外朱內王)적인 것이었으며, 이것은 주자성리학에 충실한 노론들이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양명학을 배척한 당시의 정치 현실에서의 자구책적인 경향이 짙었다. 윤증은 정제두에게 숙종 25년(1699)에 보낸 편지에서“예전의 사우(師友)들과 함께 보았던 양명학 서적들을 지금은 버렸는지 알 수 없소”라고 적고 있다. 이는 윤증이 사우들과 함께 양명학 서적들을 읽어 보았다는 증거다. 그리고 양명학 서적들은‘불온서적’으로 여겨져, 보고 나면 없애 버리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제두는 숙종 35년(1709) 안산을 떠나 강화도의 하곡(霞谷)으로 이주했다. 그는 여기에서 조선 양명학의 본산인 강화학파(江華學派)를 형성시킨다. 만약 그가 강화도가 아닌 서울에서 양명학을 연구했다면 그 또한 윤휴나 박세당 같은 운명에 처해졌을 것이다. 정제두가 강화로 이주하자 정쟁에서 패배했거나 당쟁의 화를 피해 이광명 ․ 신대우 등 소론계 인사들이 강화로 이주해 와서 하나의 학파를 형성하게 되었다. 정제두 이래 구한말의 이건창(李建昌) ․ 이건승(李建昇) ․ 김택영(金澤榮)을 비롯한 강화학파들이 독립운동에 대거 뛰어든 것도 실천을 중시하는 심학적 전통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박은식(朴殷植) ․ 정인보(鄭寅普)도 모두 심학의 세례를 받은 인물들임은 물론이다.
소론 학자들의 학문적 경향은 대체로 기본적인 성리학자로서의 소양을 갖춘 토대 위에서 실천성의 문제라든가 다양한 학문 조류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었다. 전반적으로 소론학자들은 노론의 일당 전제의 조짐이 보이는 정치 현실에서 주자성리학의 관념론과 명분론이 대세를 이루어가는 시점에서 비판적인 정치 세력을 형성하고 사상적으로도 새로운 대안을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그들의 정치적․사상적 입장은 당시의 정치 사회적 분위기가 주자 성리학 중심으로만 흘러가는 것에 대한 완충적인 역할을 함으로써 다양하고 탄력적인 사상이 공존하는 사회분위기를 형성하는 데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 18세기 이후 소론층 내부에서 다양한 학자군이 배출되어 양명학의 수용 등의 이면에는 이들의 사상적 흐름이 제공한 토대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18세기에 이익의『성호사설』과 이덕무의『청장관전서』등을 거쳐 19세기에 이르러 만개한 백과전서적 학풍이 풍미하는 것에서도 이들의 학문적 토대의 의미를 생각할 수 있다. 이덕무의 손자인 이규경이 쓴『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와『임하필기(林下筆記)』등은 19세기의 백과전서적 학문 경향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다양한 학문과 사상을 포용하려는 경향이 나타나 있다. 백과전서적인 경향은 남인 실학자나 청의 고증학풍을 적극 수용한 노론 학자들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지만 소론 학자들의 사상적 개방성 또한 이러한 학풍 형성에 일조를 했다고 여겨진다.
Ⅳ. 노종파 종약과 종학당
1. 노종파 종약(宗約)
노종파의 종약은 일반적인 족계(族契)의 형태로서 노종 5방파 성립과 짝하면서 마련된 규약이었다. 이러한 족계류 자료들은 조선조 예학의 보급과 확산, 사족 가문의 성장 과정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
<뒤에서 바라본 정수루> 고려 말의 주자학 수용 과정에서 주자가례가 도입되었지만 그 해석과 사회적 적용이 일반화된 시기는 훨씬 후대였다. 즉 조선 건국 이후 중앙 집권 및 부국강병책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조선 전기의 예제(禮制)는 사가(私家)보다는 왕가(王家)의 예, 효보다는 충이 중시되는 경향이었다. 이에 따라 이 시기에 사가의 의례규범을 정리한 주자가례보다 예기가 상대적으로 주목되었다. 그리고 16세기에 들어와 사림의 정치 사회적인 지위가 상승하고 지배층의 교화가 강조되던 시기까지도 주자가례의 일반화란 불가능했다. 왜냐하면 16세기 사림의 주된 관심사는 역시 4단 7정론으로 대표되는 심성론(心性論)이었고, 예론이나 예학은 상장례를 중심으로 각 가문의 생활규범적인 성격이 강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17세기가 되면 과거의 왕실 전례와는 다른 계통의 가례, 즉 4례(冠婚喪祭)로서 주자가례는 사족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이 시기 대표적인 성리학자들은 자신들의 가문의 동질성이나 이족(吏族)․서민들에 대한 문화적 차등성을 확보하기 위해 각 가문별로 관습적으로 축적된 가례를 종법과 제례서로 정리하는 경향이 생겨났다. 파평 윤씨 노종 5방파의 종약은 대표적인 사례이다.
노종 5방파의 가문 전통과 결속의 상징이 되는 종약은 인조 23년(1645)에 윤순거에 의하여 마련된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이러한 종약 이전에도 가훈과 유계(遺戒)를 통하여 전습되었고, 종약은 이를 토대로 윤순거가 형제들과 함께 재정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이 종약은‘윤창세-윤수-윤순거’의 가계에 대를 이어 내려온 가훈과 유훈의 종합이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노종 가문에 대대로 내려왔다는 가훈은“종법은 금석과 같이 소중히 지키고, 선조의 가르침은 부월같이 무섭게 알아야 한다. 이를 감히 지키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그 부월이 너의 범법을 용서치 않을 것이다(家法金石 先訓鈇鉞 敢有犯者 鈇鉞臨汝)”라는 것으로 언제부터 이러한 가훈이 만들어 전해졌는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다만 이 가문의 종약이 성립되는 과정에 토대가 된 윤황의 유훈과 유계, 가훈이 전하고 있다.
윤황은 인조 15년(1637)에 자식들에게 두 종류의 훈계 글을 남겼다. 그 하나는 귀양길에 동작진에서 지은 것으로 선비 가문으로서의 자세와 절제 그리고 새로운 각오를 당부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혼수, 제수, 생활 용구, 장신구, 장례 등에서의 절제와 검약의 구체적인 방법까지 적고 있다. 다른 하나는 같은 해 윤황이 금산에 머물면서 자식들에게 내린 계제자서(戒諸子書)로 절제와 검약을 다시 강조하는 구체적인 유언으로 보인다. 한편 2년 뒤인 1639년 4월에는 가훈을 만드는데 죽기 직전의 글이었다. 이 가훈은 전문(前文)과 조목(條目)으로 되어 있는데 전문에서는 선비가문으로서 지켜야 할 절제의 법도를 강조하고 있고 이 가훈의 시행 방법도 지적한다. 특히 여기서 윤황은“우리나라 풍속에 묘 제사와 기제사를 자손들이 돌려 가며 제집에서 지내는 바(輪回奉祀), 이를 종가에서 전담하고 윤회하지 말라”라 하여 장자 봉사의 기준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가문에 전해진 유훈들을 기반으로 윤순거는 형제들과 더불어 인조 23년(1645) 9월에 종약을 완성하였다.
그런데 이같은 윤순거의 종약 완성은 종법 상으로도 필요한 시점이었다. 즉 입향조인 윤돈의 뒤를 이어‘윤창세-5방(윤수, 윤황, 윤전, 윤흡, 윤희)-8거-8거의 자손대’로 이어가면서 친진(親盡)의 시기가 도래할 것이고 그에 따라 종족 간에도 소원함이 있을 것을 예측한 선택이었던 것이다. 그 같은 사정을 1678년 윤홍거가 쓴『명명완의(命名完議)』를 통해 잘 알 수 있다. 즉,“우리 종중은 마땅히 그 명성을 대대로 이어서 지켜야 할 것이다. 돌아보건대 지금 우리 후손 중에는 단면(袒免)9)의 복제를 넘긴 친족이 많아 날이 갈수록 사이가 멀어지고, 또는 사방으로 흩어져 남남이나 다름없는 처지가 되어 가고 있으니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면서, 이에 따라 종약은 오행(五行)의 상생(相生)하는 차례에 따라 항렬 10자를 지은 목적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종약은 ① 서문(序文), ② 선묘세사(先墓濊事), ③ 돈종약(敦宗約), ④ 막제동유효학(藐諸童儒斅學), ⑤ 정규모(定規模), ⑥ 치전재(置錢財)로 구성되어 있다. 주로 인도(人道)를 강조한 내용으로 조상을 받들며 친족을 아끼고 우애있게 지내라는 것이다. 조상을 받들려면 제사에 반드시 참여해야 하고 묘소를 돌보며 사당과 제각을 보수하고 석물을 관찰하는 지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친족을 아끼는 것은 대소사를 상의하고 상부상조하며 종중이 한 동기같이 되어야 할 것이니, 이것을 윤순거는 종약에서‘인도지불가폐자(人道之不可廢者)’라 지적한다. 또한 종약을 지키야 하는 이유도“세상이 어지러워져서 속되고 마음을 감추고 사는 세상이 되어 인도를 가르치지 않게 되면 사람들이 각자 자신만을 알게 되고 재물에 제 욕심만을 부리고 제 일신만 편하게 하려 하거나 제 집만을 알게 되어서 친목과 존경의 도리를 생각하지 않게 된다. 그뿐 아니라 선조 대대로 사시던 고향을 한 번 떠나 종신토록 틈을 내어 선조 산소에 성묘하지 않거나 비록 두루 친족이 있다하나 여러 세대 서로 왕래하지 아니하게 되면 친족 간에도 서로 알아보지 못하게 되며, 혹은 산소를 분별치 못하게 된다”라고 하고 있다. 그러므로 종약에서 가장 우선하는 일로 ① 후손들이 함께 모여 제례에 공경을 다하며, ② 산소를 정성으로 치수하는 일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그러면서 마음으로부터 우애가 생기고 공경하는 마음과 친밀한 정이 두터워 진다고 보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노력을 게을리 하면 친진(親盡) 후에는 점차 멀어져 친족을 오래도록 보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백세에 이르러도 변함없이 조종(朝宗)을 빛낼 종약을 마련한다고 하였다.
노종파 종약은 봄가을로 개최되는 종회를 가장 엄정하게 치르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① 유사 가운데 종사를 잘 다루지 못하는 자 ② 종인 중 종약을 지키지 않는 자 ③ 아무 연고도 없이 종회에 불참하는 자 등 종약을 지키지 않은 자에게 벌칙을 가하는데, 종회에서의 결정에 따라 중죄자 태형(笞刑) 30, 경죄자 태형 15, 유자(幼子)는 종아리를 치게 되어 있다. 노종 5방파의 종약은 당대 다른 집안 종약과 비교할 때 매우 상세하한 것이 특징이어서, 이후 다른 성씨들이 모범을 삼을만큼 당대에 이미 높이 평가되었다고 한다. 노종 종약의 그 중요한 개요만을 정리하여 보면, 다음 표와 같다. (뒤에 1678년 윤홍거가 지은『명명완의』가 첨부됨) 이로써 장래 후손들의 생활 윤리 규범과 종회의 운영 구조, 교육의 제도 등이 확립되었던 것이다.
<노종 종약 개요> ① 선형(先瑩) 수호와 제례 : 묘소 청소, 사절(정월 초일, 한식, 단오, 추석), 제일(3월, 또는 10월), 제기, 제물, 서차, 진찬, 토지신 제사 의례 ② 묘전(墓田) : 각 묘마다 묘전의 엄정한 관리와 묘산(墓山)의 송백(松柏) 벌목 금지 ③ 종회의례(宗會儀禮) : 대개 행례시의 홀기이고, 마지막에 엄숙한 의례와 음복 후의 논의사로 지나간 행적, 종약 지키는 일, 혹은 덕행의 권장, 잘못 교정, 종중 길흉사와 경조사가 거론됨. ④ 명보(名譜) : 참여자 명단으로 자기가 쓰고 이름 밑에 수결 ⑤ 이헌(彛憲) : 상견 예절, 관리 출타자의 제의 참례 문제, 유사와 종인의 처벌 규약, 향약의 법을 규례로 시행, 벌의 경중에 다른 태형 ⑥ 종약의 규약 : 운영 목적, 사장(師長)의 선정, 서책의 마련, 운영 경비 ⑦ 의장(義庄)과 의전(義田) 관리 |
2. 종학당과 문중 교육
조선 시대 지방 교육 기관으로는 향교, 서원, 서당 등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서당은 초학자를 위한 초급교육시설로 마을 단위에 있는 것이다. 종학당은 노성면 병사리에 위치하고 있는 파평 윤씨가의 문중 서당이다. 종학당은 종중 자녀뿐만 아니라 문중의 내외척, 처가의 자녀들까지 교육과 합숙이 동시에 이루어진 문중 학당이었다10). 창립 연대는 숭정 원년의 상량문이 발견되어 1628년 경에 윤순거가 건립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1564년경 니산에 터를 잡은 노성 지역의 파평 윤씨 일가가 일약 조선의 명문가로 두각을 나타낸 것은 바로 이 종학당에서 이루어진 문중 교육에 힘입은 바가 컸다고 할 수 있다. 종학당에서 많은 인재가 배출되면서 김장생을 배출한 연산의 광산 김씨, 송시열을 배출한 회덕의 은진 송씨 그리고 노성의 파평 윤씨 세 집안이 솥단지의 세 다리처럼 정족적(鼎足的) 형국을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윤씨 문중교육의 기틀을 마려한 최고의 수훈자는 윤황의 둘째 아들인 윤순거였다. 노성의 윤씨들이 배출한 걸출한 인물은 윤증이지만, 윤씨 집안의 300년 장기발전 계획을 입안한 인물은 윤순거였다. 당시 윤순거는 4촌 윤원거와 동생 윤선거와 함께 종약 및 가훈을 제정하고 종학당을 건립하였다. 윤순거 자신이 초대 당장이 되어 책, 기물, 재산 등을 마련하는 등 초창기 학사 운영의 기반을 닦았다. 윤순거는 이와 함께 재실(병사)과 의창, 정수루 등의 창건에 전력하여 완공하였지만, 건립 당시 관직에 있었으므로 감역은 아우인 윤후거에게 전적으로 맡겨 완공하였다고 전한다11). 학교 설립은 윤순거가 하였지만 종학당의 학문적인 지도는 동생이었던 윤선거가 주로 담당하였다.
현재의 종학당의 전신은 물론 병사리에 있는 병사(재실)이다. 그러나 그 유서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종학당 바로 뒤편에 있는 정수암(淨水菴)과 정수루(淨水樓), 백록당(白鹿堂)이 먼저 건립되어 종학당의 건립의 단초를 마련한다. 이 건물들은 누각과 서재가 있어 선비들이 학문을 토론하며 시문도 짓던 장소였고,“먼 옛날부터 높은 범뱃산 중턱에 맑은 샘물이 솟아 이 맑은 물로 목을 축이고 몸을 정갈하게 하고자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졌으며, 또 그 누군가는 쉬어갈 수 있는 암자를 지어 정수암이라 하였다. 이곳에는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고 글을 좋아하는 이들은 조금 비껴난 곳을 다듬고 돋아서 날렵한 정자를 지어 시를 읊고 글을 외우니 그 낭낭한 소리가 아래 들녘에 울렸고 아래에서 쳐다보는 정자의 모습은 흡사 제비집 같다하여 모두들 연소정(燕巢亭)이라 하였다.”고 한다.
정수암은 원래 3채의 건물로 지어졌는데, 샘물에 가까운 서쪽에는 경내를 정갈하게 유지하기 위하여 승방을 지어 스님을 상주토록 하였고, 동쪽의 뒷 채는 서실로 지었으며, 앞에는 2층의 누마루를 크게 지어 올렸다. 여기에 윤순거는‘오가백록(吾家白鹿)’이라는 현액을 걸어 놓았다고 한다. 이 정수루에 앉아 앞을 바라보면 저수지 너머로 윤씨 집안 어른들의 묘소가 한눈에 들어온다. 아침에 학교에 오면 멀리 조상들의 묘를 향해 망배를 드리고 나서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고 한다.
윤순거는 병자호란 때 아버지인 윤황이 척화를 주장하다 귀양살이를 하고, 숙부되는 윤전이 왕자와 빈궁을 모시고 강화도로 피난갔다가 순국하는가 하면, 윤선거의 아내인 공주 이씨가 순절하는 등의 불행을 겪었다. 그리하여 윤순거는 세상을 허무하게 생각하고 벼슬을 사양, 향리에 은거하여 종학당에서 후학을 교육하는데 전력하였던 것이다.
윤순거가 죽은 후 2백여 년이 지난 뒤, 그의 5대손인 윤정규가 정수루 앞 백 보 쯤에 서당을 새로 축성하고 앞뒤로 층계를 쌓고 주위에 담장을 둘러서 수려한 서재를 창건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현재의 종학당이다. 이로써 정수암과 더불어 종학당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정수암과 종학당은 창건 이후 약 340여 년간 많은 인재를 배출한 학문의 요람이었다. 파평 윤씨 노종파 가문에서의 대과 급제자 46인의 대다수도 이곳의 출신이었다고 전해진다. 조선에서 파평 윤씨는 문과 급제가 412명을 배출하였다. 전국의 파평 윤씨 합격자 가운데 10%를 넘는 46명이 노종 5방파 사람들이다.
정수루의 기둥에는 왕성한 기질의 젊은 학생들이 대과 급제 후, 또는 종학당에서 공부할 때 회포를 적어 놓은 낙서가 전해지고 있다. 그 낙서 중에는‘湖西第一樓’를 비롯하여,‘背山西水 第一堂’(산을 등지고 물을 앞에 하니 제일의 명당),‘登科後初上樓’(대과에 급제한 후 처음 루에 오르다),‘人傑在齋’(인걸이 이 공부방에 있도다),‘南風萬抱’(남풍을 한아름 안다. - 큰 뜻을 품는다는 뜻) 등이 있다. 그러나 현재는 붉은 색으로 덧칠하여 볼 수 없게 되었다. 종학당은 창설 이래 왕성한 기운으로 수많은 인재를 배출하는 터전이 되었으나 일제에 의하여 망국의 치욕을 당한 뒤에는 일시 폐당 상태로 2-3년 있다가 다시 개강하여 10여년 간 계속되었다고 한다.
1915년 화재로 백록당과 정수루 일부가 불에 타 재건하였다. 종학당은 1987년 충청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1997년 종학당과 백록당, 정수루를 하나로 합하여 유형문화재 제152호로 재지정되었다. 1999년에는 종학당, 그리고 2000년에는 정수루를 각각 복원하였고 이를 계기로 2001년 강당인 보인당(輔仁堂)과 함께 이 일원을 종학원(宗學園)으로 통칭하고 있다.
종학당에서 이루어졌던 교육체제를 노종파 종약과 관련하여 살펴보면,
1. 10세 이상의 어린 자제들을 모두 한곳에 모아 스승을 세우고 학문을 강의하여 훌륭한 인재로 양성한다. 2. 택사장(擇師長) : 종인(宗人) 중에 재주가 있고 학문에 깊은 사람을 스승으로 삼고, 자제 중에 글의 의미를 잘 터득한 자를 장(長)으로 택하여 자제를 가르치게 한다. 3. 서책(書冊) : 오경(五經)·사서(四書)·주자가례·소학(小學)·심경(心經)·근사록(近思錄) 등의 책을 비치한다. 4. 섬양(贍養) : 師에게 매월 쌀 9말을, 長에게는 쌀 7말을 지급한다. 수학자(受學者)는 매월 쌀 6말 과 소금·간장·채소를 나눠주고 학생의 의복과 급식은 의곡(義穀 : 종중 토지1)에서 수입되는 곡식) 에서 유사가 맡아 처리한다. 5. 과독(課讀) : 10세 이상은 하루마다 과제로 공부하게 하고 30세 이상은 한 달마다 과제를 주어 학문 하게 한다. 독서의 순서는 율곡 선생이 가르치시던 법에 따라 소학을 가르치고 차차 대학·논어·맹자 등으로 나가는 순서를 밟는다. 독서할 때는 본과목은 100번 암송하고 부독본(副讀本)은 30~40번 암송한다. 사서(史書)는 반복해서 날마다 사장(師長) 앞에서 암송한다. 책 한 권을 외우고 난 뒤 의 문점이 없게 된 다음에라야 다른 책으로 옮긴다. 시험은 월강(月講)이라고 하여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실시한다. 학생은 독서한 책을 들고 이른 아침에 사장을 뵙고 시험을 본다. 성적이 나쁘면 벌하고 좋으 면 칭찬한다. 강(講)이 끝나면 바른 행실, 중요한 일, 가정을 다스리는 일, 재화를 유리하게 운용하는 일(理財), 종회의 예법 등에 대해 토의하는 시간을 갖도록 되어 있다. 6. 재의(齋儀) : 매일 스승과 당장은 아침 일찍 기상하여 의관을 정제하고 자제들을 인솔하여 선조 산소 를 향하여 재배한다2). |
<종학당과 저수지 건너편의 문중재실> 매일 아침 산소를 바라보며 재배 후 공부에 임했다 여기서 네 번째 항목의 섬양(贍養)이라는 표현에서 섬(贍)자는‘넉넉하다, 풍부하다
◈ 참고 문헌 ◈
1. 이은순,『조선후기당쟁사연구』, 일조각, 1988
2. 윤정중,『파평 윤씨 노종 오종파의 유서와 전통』, 1999
3.『파평 윤씨 노성 종학당』, 공주대학교박물관, 2006
4. 충남대학교 마을연구단,『논산 병사마을』, 대원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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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태사, 태평의 시대를 열다 |
개태사, 태평의 시대를 열다
1. 개관
<개태사>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천호리 천호산에 위치하고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은 일리천 전투에서 크게 패해 달아나는 후백제군을 쫓아 황산군(지금의 연산)에 이르렀다. 이곳에 진을 치고 마침내 신검에게 항복을 받아내어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이것을 하늘의 도움이라 하여 황산을 천호산(天護山)이라 바꾸고,‘태평의 시대를 연다
개태사는 태조가 개경이 아닌 지방에 창건한 유일한 사찰로서 후백제의 옛 영토였던 이 지역의 후백제 유민들에게 고려의 승리를 알림과 동시에 후백제의 잔존세력을 통제하고 그 동태를 파악하기 위한 정치적, 군사적 목적의 사찰이기도 하였다.
이후 태조의 진전(眞殿)이 설치되어 기일마다 제사를 지냈으며, 태조의 옷 한 벌과 옥대 1요를 보관하는 등 고려시대에는 호국사찰로서의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전성기엔 천여 명의 승려가 상주하여 화엄법회를 갖는 등 승려 양성도량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조선 초기부터 퇴락하기 시작하여 조선후기 폐찰(廢刹)되어 절터마저 주민들의 집터와 전답으로 변해버린 것을 1934년에 김광영이 중건하여 도광사라 하였다. 그 뒤 다시 개태사라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2. 개태사 일대의 전략 지리적 성격
개태사 일대는 남북으로 계룡산과 대둔산의 줄기가 있다. 개태사 협곡은 바로 이 두 대산들이 만나 이루는 좁은 골짜기로 연산지역의 동쪽 끝 산자락이며 동북으로 통하는 유일한 통로이다. 즉 연산지역은 바로 신라와 백제의 접경이자 금산-옥천 일대에서 백제 중심부에 가장 접근하여 있는 황산벌로 진격하여 부여로 가는 통로였다.
1) 후백제군의 격퇴
황산벌 전투 이후 270여 년의 시차를 두고 같은 지역에서 다시 한 번 전투가 치러졌다. 고려 태조와 후백제 신검의 대치 국면도 개태사 부근이 지니고 있는 전략적 지형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고려군은 후백제를 치기 위해 87,000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남하하여 천안부(지금의 천안)에서 군대를 정비하고 일선군(지금의 경북 선산군)으로 향하여 일리천 전투를 벌였다. 왕건은 936년 9월 일리천 전투에서 패한 후백제군을 쫓아 황산군에 이르러 진을 치고 마침내 신검의 항복을 받았으며, 이를 계기로 개태사 창건의 역사가 시작된다.
홍산대첩비. 고려시대 최영장군의 홍산대첩을 기려서 만든 비석으로 1977년에 세웠다.
2) 홍산(鴻山) 전투
우왕 2년(1376)“7월 왜가 부여를 노략질하고 공주에 이르렀고, 또 석성을 노략질하고 연산현 개태사로 나오자 박인규가 맞서 싸우다 말에서 떨어져 죽임을 당하고 연산 개태사를 취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 최영이 늙은 몸으로 출정하기를 자원하자 왕이 노장이라고 중지시켰지만 결국 최영이 극구 주장하여 마침내 허락을 받고 홍산(지금의 부여군)에서 왜구를 맞아 크게 무찌르는 홍산대첩을 이루었다. 이후에도 계속되는 왜구의 출몰을 물리쳤다는 기록에서 개태사와 연산지역이 거론되는 것으로 보아 전략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3. 호국사찰, 개태사
개태사는 태조 왕건의 원찰(願刹: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거나 자신의 소원을 빌기위해 건립한 사찰)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개태사에는 태조의 어진을 안치한‘진전(眞殿)’이 건축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진전은 적어도 고려말까지는 유지되면서 왕조의 사직을 보호하는 특별한 종교적 권위를 함께 갖게 되었다. 홍건적의 난으로 위기에 처해 있던 공민왕때에 천도와 환도의 길흉을 이 태조의 진전에 묻고 있는 점이나, 고려 멸망 직전인 공양왕 3년(1391) 정부에서 이첨을 개태사에 보내 태조의 진전에 제사를 지내고 옷과 옥대를 바치고 있는 사실에서 이를 알 수 있다. 이처럼 개태사가 창건기록 이후 대체로 나라가 어지럽고 혼란스러울 때마다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호국의 사찰로서의 역할을 성실히 수행해 왔던 것이다.
현재 합천 해인사에 있는 팔만대장경은 고종 때 강화도에서 만든 것으로 당시 최우와 최항 부자는 사재를 들여 경판사업을 독려, 지원했고 이때 교감(校勘)을 담당했던 승려가 바로 개태사 승통(僧統) 수기(守其)였다. 그는 여러 대장경을 수집하여 교정 대조하여 오류를 정정,『고려국신조대장경교정별록(高麗國新雕大藏校正別錄)』30권을 편찬하고 이를 대장경에 포함하였다. 그는 뒤에 오교도승통(五敎都僧統)에 오르는데, 이를 통하여 고려시대 개태사의 불교사상사적 지위를 엿볼 수 있다.
부인당 전설 후백제군을 정벌하려고 고려 태조 군사가 본읍에 머물렀을 때의 일이다. 고려 태조는 몸에 삼목(三木)을 지니고 머리에 큰 솥을 얹은 채 깊은 연못에 빠지는 꿈을 꾸고, 점을 잘 친다는 노구(老嫗)에게 해몽을 부탁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해몽을 한 즉 삼목(三木)을 지는 것은 “왕(王)”자(字)요, 큰 솥을 이는 것은 면류관이요, 깊은 연못에 들어감은 용왕을 본다는 것으로 대길하다는 것이었다. 수일 후 대승을 거둔 후 태조는 노구를 부인(夫人)으로 봉하고, 또 그 거주하는 곳 주위의 밭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이후 부인을 기리는 사당을 지어 제사를 지내주었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
4. 개태사 석불입상(石佛立像, 보물 제219호)
개태사 보호각에 봉안된 3존석불(三尊石佛)은 고려 태조 왕건때 조성된 화강암제 삼존석불이다. 중앙의 본존불은 아미타입상으로 전체적으로 무거운 느낌을 주나 제작 시기가 거의 확실하다. 고려의 후삼국통일의 의지가 담겨있으며, 고려 전기 지방 석불상으로는 수작에 속하여 불상의 가치가 높게 평가되고 있다. 좌협시보살과 우협시보살상은 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본존불보다 조각이 화려하고 섬세하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개태사에 몰려와 대웅전 문을 활짝 열었다. 그러나 그 순간 삼존석불에서 광채가 나면서 일본군이 눈을 뜨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쓰러져 죽었다. 이 보고를 들은 일본군의 장수는 직접 개태사에 와서 칼을 빼어들고 대세지보살의 목과 허리를 내리쳤다. 그리고 이어 관세음보살을 내리치려는 순간 이상한 불빛이 보이고 칼이 부러지더니 적장 역시 그 자리에서 쓰러져 죽었다. 그래서 관세음보살은 화를 면하게 되었다고 하며 그 뒤부터 개태사에 왜적들이 쳐들어오지 못했다고 한다. 위 전설이 가지는 의미는 삼불상이 외침을 정면으로 막고, 베임까지 당했지만 끝내 그것을 막아 물리쳐서 절을 수호하였다는 것이다. |
5. 개태사 철확(鐵鑊)
고려의 태조 왕건이 나라를 세우고 개국 사찰로 창건한 개태사 주방에서 사용한 것으로 전해지는 대형 철제 솥이다. 개태사가 폐찰(廢刹)되자 방치되어 있었다가, 1981년 현재의 자리인 개태사로 옮겨왔다. 형태는 테두리가 없는 벙거지를 제쳐놓은 듯한 모양이며 크기는 직경 3m, 높이 1m이고 두께는 3㎝내외이다. 23㎝ 높이의 테가 곧바로 서 있고 그 아래로 20㎝ 정도가 경사면을 이루다가 다시 급경사를 이루면서 둥근 바닥을 이루고 있다. 승려의 식사에 쓰이던 국을 끓이던 솥이라고 하는데 그 크기로 개태사의 규모를 짐작할 만하다.
개태사 철확 전설 (1) 심하게 가물 때 주민들이 철솥을 끌면 비가 온다. (2) 솥에 국을 끓여 다 푸고 나니 국 찌꺼기 속에 어린 중 하나가 빠져 죽어 있었다. (3) 궂은 날이나 비오는 날 개태마을 둠벙배미를 쟁기로 갈면 쟁기날이 솥뚜껑에 닿는 소리가 난다. 그러나 파보면 아무것도 없다. (4) 솥 만드는 이가 철솥을 깨어 가려고 하다가 벼락을 맞아 죽었다. (5) 솥을 놓고 봇도랑을 막으면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 (6) 일제강점기 때 철솥을 일본으로 가져가려고 부산항까지 실어다 놓았는데 무단히 부두 부근에 괴질이 돌고 밤이면 솥이 울어 가져가기를 단념하고 되돌려왔다. |
◈ 참고 문헌 ◈
1. 윤용혁,「개태사의 역사적 배경」,『개태사지』, 공주대학교박물관, 2002
2. 윤용혁,「936년 고려통일과 개태사」, 한국학보, 2004
3. 이해준,「연산 개태사의 지역문화사적 성격」, 역사민속학, 2008
4. 최성은,「개태사 석조삼존불입상 연구」, 미술사논단, 2003
5. 황인덕,「연산 개태사 전설 연구」, 한국민족문화,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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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갈림길, 황산벌 |
역사의 갈림길, 황산벌
연산 지역은 백제가 신라에 대비하여 최후 방어선을 구축하고 황산벌 전투를 치른 곳이다. 또한 개태사 창건의 유서가 되는 후백제와 고려의 전쟁도 바로 이곳에서 있었다. 황산벌 전투 패배 후 백제는 국운이 다하였고(660), 신라는 고구려를 무너뜨린 후 삼국을 통일하였다. 그로부터 270여년이 지난 후 같은 장소에서 후백제는 고려와 최후의 일전을 벌인다. 후백제는 사라졌고 태조 왕건은 통일의 위업을 이루었다. 백제와 신라, 후백제와 고려는 왜 황산벌에서 최후의 혈전을 벌였는가? 전략적 요충지라는 단순 지리적 요인과 역사적 조건이 결합하면서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 남겨진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1.‘연산(蓮山)’의 지리적 특성
현재 연산면은 충남 논산시 동부 지역에 자리 잡고 있다. 연산은 백제 시대에 황등야산군(黃等也山郡)으로 불리었다가 통일 신라 경덕왕 때 황산군으로 바뀌었고, 고려시대 와서 연산군으로 고쳐졌다. 고려 현종 때 공주 관할의 속군과 속현이 정리되어 덕은(덕근)군, 회덕군, 부여군, 연산군, 시진현 진잠현, 유성현, 석성현, 정산현, 니산현, 신풍현, 덕진현으로 편성했다. 조선시대에 오면 덕은과 시진이 합쳐져 은진현이 되고, 연산군도 현으로 강등되며, 니산현과 함께 모두가 공주목에 속하는 현으로 정리되었다. 조선시대 연산지역의 비중에 비하면 통일신라 고려 시대 연산지역은 훨씬 위상이 컸다고 할 수 있다. 1914년에 연산, 은진, 노성, 석성 4지역을 통합시켜 논산군이 되었다.
연산 지역은 서쪽으로는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지만, 북동쪽에는 남북으로 길게 늘어진 계룡산과 남동쪽에 뻗어 내린 대둔산으로 이어지는 가파른 산줄기가 버티고 서 있다. 그 고갯마루만 넘으면 금강을 지나 서해 바다까지 한달음에 나아갈 수 있다. 이 지세를 보면 황산벌이 동쪽으로부터 밀려오는 신라군에 맞서 싸워야 할 백제군의 마지막 저지선이 될 수밖에 없음을 알 수 있다. 남아있는 백제시대 산성도 이를 증명해준다. 황산성(연산면 관동리), 외성리 외성(부적면 외성리), 청동리 산성(연산면 청동리-양촌면 명암리), 곰티 산성(벌곡면 검천리-양촌면 산직리), 황령 산성(양촌면 신암리 벌곡면 한삼천리), 모촌리 산성(양촌면 모촌리), 산직리 산성(양촌면 산직리), 갈마 산성(가야곡면 병암리) 등의 산성들이 병풍처럼 이 지역을 에워싸고 있다.
2. 황산벌 전투와 백제의 최후
(1) 태종 무열왕 7년(660) 3월, 나당 연합군의 백제 공격 시작
(2) 6월, 당 소정방 수군과 육군 13만명을 이끌고 산둥반도 출발
(3) 6월 21일, 신라 태자 법민이 병선 100여척을 이끌고 덕물도(현 인천 덕적도)에 나가 당나라 군사를 맞이하고, 7월 10일에 두 나라 군사가 만나 백제 수도 사비성을 치기로 함.
(4) 김유신이 정예 군사 5만을 거느리고 출정함.
(5) 백제 의자왕은 대책을 강구하였으나 신하들의 의견이 분분함
-흥수는 나당 연합군이 대군이므로 평원광야(平原廣野)에서 싸우면 불리함을 지적하고, 양군이 합치지 못하도록 백강(白江)을 지켜 당나라 군사의 상륙을 막고, 신라군이 탄현(炭峴)을 넘어 평야 지대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할 것을 주장
-상영 등 대신들은 흥수가 나라를 원망한 나머지 망하게 하기 위해 내놓은 방책이라며 반대
(6) 당군은 백강에 상륙, 신라군은 탄현을 지나 황산 벌판으로 진격
(7) 백제 장군 계백은 급히 동원할 수 있는 결사대 5,000명을 조직하여 황산지야(黃山之野;黃山之原)에서 신라군과 결전하기로 작전을 세움. 험한 곳을 차지하여 진영을 세 군데 설치하고 기다림. 계백은 출전하기 전 집에 들러, 살아서 노예가 되는니보다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면서 아내와 자식을 모두 죽임.
(8) 7월 9일, 신라군이 황산벌에 도착. 신라군 5만과 백제군 5천이 네 번을 싸웠으나 신라군 전세 불리.
(9) 신라 장군 김흠순의 아들 반굴과 김품일의 아들 관창(당시 16세)은 홀로 적진으로 돌진하여 싸우다 죽음. 사기를 되찾은 신라군은 백제군을 물리침.
(10) 당 소정방은 기벌포(현재 서천)에서 백제군과 싸워 크게 이김.
(11) 7월 11일, 김유신 등이 당나라 군대 진영에 이르자, 소정방은 신라군이 약속한 날짜보다 늦었다고 트집 잡아 신라군의 작전 참모 격인 독군 김문영 목을 베려하자, 김유신 맞섬.
(12) 7월 12일부터 신라군과 당군은 백제 도성 사비성을 공격
(13) 7월 13일, 의자왕은 측근을 거느리고 사비성을 빠져나와 웅진성으로 피신하였으나, 태자 부여효 등과 함께 항복
-『삼국사기』기록 줄거리
백제는 선제공격이 무리였기 때문에 나당 연합군의 공격을 기다려 방어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당군은 서해안을 따라 해로로 진격하고, 신라군은 육로로 진격하여 백제의 수도 사비에서 합류해 공격을 가하는 작전이었다. 당군은 바다 건너 대병력을 투입하기 때문에 보급선을 유지하기가 곤란하므로 단기간에 결정적 타격을 줄 수 있는 지점인 사비 부근에 상륙을 결정하였다(3). 이에 신라는 보급 등의 지원을 해주는 역할을 담당하였으므로, (4)의 김유신이 이끈 신라군 5만은 전부 전투 부대라기보다 상당 부분 보급 부대와 이를 호위하는 전투 부대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신라가 (3)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하여 소정방이 신라군 장수를 처형하려 한 것은 (11)작전이 하루 늦어졌다는 것보다는 보급 문제 때문으로 파악할 수 있다.
백제도 나당 연합군의 전략에 대해 이미 파악하고 대책을 세우려했다. 달솔 상영은 신라군을 먼저 격파하여 당군에 대한 보급을 원천적으로 봉쇄하자고 주장했고, 성충과 흥수는 백강(금강 하구)과 탄현(위치에 대해 여러 논의가 있음. 대전 진잠, 금산 쑥고개, 운주 삼거리 등)을 지키자고 하였다. (5)이들의 의견이 달랐던 이유는 전략상의 타이밍 문제였다. 성충과 흥수는 평야에서 대적하면 승부를 알 수 없으니 탄현을 넘지 못하게 할 것을 강조하였다. 반면 다른 대신들은 당군과 신라군이 각각 백강과 탄현에 진입을 시도할 때 공격하자고 주장하였다. 이는 공격 측이 우회할 경우가 생길 수 있고, 백강은 해안선이 넓어 당시 병력 규모로는 어렵다고 판단하고 정확한 위치를 포착한 후 공격하자는 것이었다.
신라군은 경주에서 출발하여 보은 삼년산성-옥천-탄현-대전-두마를 거쳐 황산벌에 이르렀다. 이에 의자왕은 계백과 5천 병사를 투입하였다(7). 삼국시대에는 국경선에서 왕도에 이르는 간선도로 주변에 산성을 배치하여 외적의 진격을 저지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었지만, 백제는 신라군이 황산벌을 통과한 후 당군과 만나 사비도성으로 진격할 것을 예상했기 때문에 보급선 차단을 위해 황산벌까지 진출해서 싸워야 했던 것이다.
현재 개태사 동쪽에 천호산(天護山)이 있는데 이 산은 종래 황산을 왕건이 고쳐 부른 것이다. 삼국사기에서 설명하는 황산벌의 전투현장인‘황산지야(黃山之野)’(7)는 이 부근이다. 개태사 앞으로 천호산과 계룡산 사이에 형성된 구조곡(構造谷)이 있다. 구조곡 좌우로 험준한 산지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구조곡을 통해서 연산에서 대전으로 나갈 수 있다. 대전, 두마 거쳐 구조곡을 빠져나오는 신라군을 기다렸다가 현재 연산리, 관동리, 천동리, 고양리 일대에서 전투를 벌였다. 신라가 탄현을 넘었다는 소식에 백제는 나지막한 구릉을 끼고 삼영(三營)을 배치하고 최후의 결전을 벌였다. 백제의 마지막 보루라고 할 수 있는 정예 병사들이었고, 죽음을 각오한 백제의 결사대였기 때문에 네 번의 싸움에서 우세하였다(8). 그러나 결국은 5천과 5만이라는 중과부적 병력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패하였다. 이 전쟁의 과정에서 바로 그 유명한 화랑 반굴과 관창, 계백의 이야기가 얽혀 있기도 한 곳이다(9). 황산벌에서 신라군을 저지하는데 실패한 백제는 당군의 상륙을 저지하고자 했지만 이 역시 당군이 이미 진을 설치해 교두보를 확보한 상태여서 무너졌고, 결국 백제는 사비성이 함락되고 신라에 통합되었다(12),(13).
전(傳) 계백 묘와 충곡서원
논산시 북적면 신풍리 산 4번지에 위치한다. 1989년 충청남도 지정 기념물 제74호로 지정되었다. 구전되어 오던 계백의 묘소를 유래와 지명 전설을 토대로 정립하였다. 계백의 충성어린 의로운 죽음을 보고 백제 유민들이 장군의 시신을 거두어 은밀하게 가매장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장군 시체를 가매장한 데서 이곳 지명이 가장골이다. 묘소 뒤쪽 산 이름은 충장산, 충혼산, 충훈산, 수락산으로 불리워 계백의 죽음과 같은 맥락의 지명유래가 있다. 마을 지명은 충곡리이다.
백제의 유민들이 묘소 인근마을 주민을 중심으로 묘제를 지내오던 관행이 이어져 오다가 조선 숙종 6년(1680)에 충곡서원을 건립하고 계백장군 위패를 주향으로 모시고 향사를 지내왔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고종 5년(1868) 폐쇄되었다가 1933년 복원하였다.
3. 후백제의 최후
(1) 936년 6월 태자 무와 장군 희술을 시켜 보기 1만으로 천안부에 파견
(2) 9월 태조가 3군을 거느리고 천안부에 가서 병력을 합세하여 일선군(현재 경북 선산)으로 향함
(3) 9월 8일(갑오), 일리천을 사이에 두고 양군이 대결함.
고려군이 후백제군을 격파하고 추격하여 황산군에까지 이름
(4) 신검이 양검, 용검 및 문무 관료를 대동하고 항복함
(5) 포로를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신검에게는 벼슬을, 양검과 용검은 귀양을 보냄
(6) 견훤이 황산의 절에서 죽음
(7) 태조는 개경으로 귀환하여 백성의 축하를 받음
-『고려사』(태조19년) 기록 줄거리
황산벌이 있는 연산지역은 백제의 최후 저지선이었고 다시 후백제 멸망직전의 최후 격전지가 되었다. 고려군은 후백제를 치기 위해 87,000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내려와 천안에서 군대를 정비하고 일선군으로 향해 후백제군과 결전을 벌였다. 936년 9월의 출전은 고려가 마침내 통일전쟁에 종지부를 찍고자 했던 최후의 진격이었다. 일리천 전투에서 견훤은 고려군 선봉에서 후백제군을 쳤다. 견훤은 아들 신검에 의해 금산사에 유폐되었다가 탈출한 후 고려에 귀부하고, 자기가 세운 나라를 스스로 멸망시켰다. 패주한 후백제군은 전주 북쪽에 위치한 논산지역으로 후퇴했고 이를 고려군이 추격하여‘황산군에 이르렀는데 탄령(炭嶺)을 넘어 마성(馬城: 사료해석에 따라 황산군에 있는 것일 수도 있고, 황산군을 지나 탄령 너머에 위치할 수도 있다는 의견이 있음. 또한 마성을 개태사 인근 지역이라고도 봄)에 진을 쳤다’(『고려사』). 왕건이 신검을 쫓아 넘었던 탄령은 옥천 방면에서 넘어오는 대전의 동쪽이며, 이는 660년의 백제 탄현과 동일한 지점이다. 이들은 대전을 거쳐 황산벌에 이르렀다. 신검은 아우 양검, 용검과 문무 관료를 거느리고 황산에서 태조 왕건에게 무릎을 꿇었다. 신검은 왕위를 찬탈한 것이 본심이 아니고, 협박에 의한 것이었다고 말하여 태조 왕건에게 목숨을 구하였다. 견훤은 황산의 불사에서 망국의 한을 머금고 생을 마감하였다(7). 후백제는 무너지고 고려에 의해 후삼국은 통일되었다.
왕건은 황산벌 지역을 하늘이 도운 곳으로 여겨, 황산을 천호산(天護山)으로 바꾸었고, 이곳에 태평한 통일 시대(泰)를 연(開) 곳이라는 뜻의 개태사(開泰寺)를 세웠다.『동사강목』에서 견훤의‘황산불사’는“연산 동쪽 5리 지점”이라 한 점과 김정호의『대동지지』로 미루어 보아 견훤이 숨을 거둔 황산의 불사는 개태사로 추정된다. 왕건은 견훤이 죽은 절이 후백제 부흥의 중심지가 될 것을 염려해 이곳에 있던 절을 허물고 새로 개태사를 창건했다. 그 후 견훤 무덤이 후백제 잔존 세력의 또 다른 중심지가 되어 고려 왕권에 대한 저항과 도전이 만만치 않자 이들을 위무하기위해 광종은 은진현에 관촉사를 창건하고 거대한 미륵상을 건립하였다.
연산 땅에는 역사의 갈림길에서 스러진 계백과 백제민, 견훤과 후백제민들의 한(恨)이, 그리고 승리를 쟁취한 '주인공'의 흔적들이 남아있다.
전(傳) 견훤 묘
견훤 묘는 시도기념물 26호로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 산 18번지 정상에 위치한다. 견훤은 무덤을 금산사가 있는 모악산이 보이는 은진현에 쓰도록 유언했다. 견훤은 신검의 죄를 사해준 태조의 관대한 처분에 대해 분함을 못 이기고 지병인 등창이 터져 생을 마감했다고 전해진다. 이 산 전체를 마을에서는 견훤이 무덤, 또는 왕묘라고 부르고 있다. 봉분 앞에 1970년 견씨 문중에서 세운 비석이 서 있고 남쪽으로 전주 뒷산이 70리 떨어져 잘 보이고 있다.
4. 동학농민운동과 황산벌
연산 지역은 동학농민운동 당시에도 주요 접전지의 하나였다. 2차 봉기 당시, 충청도의 북접 10만 농민군이 손병희의 지휘 하에 기병해 논산에서 남접과 합세했다.
전봉준은 북상해 공주로 향했는데 일본군이 직접 전투에 나섰다는 소식에 상당수가 이탈해 숫자는 대폭 줄어들어 있었다. 북접의 김복명이 이끄는 동학농민군 선봉대가 목천에서 일본군 및 조선 정부군과 맞섰으나 김복명을 비롯해 수백 명이 전사하는 패배를 당했다. 기세를 올린 일본군은 논산에서 공주로 향하는 길목인 우금치에 진을 쳤다. 전봉준이 여러 차례 우금치를 공격했으나 우세한 화력을 가진 일본군을 당해낼 수 없었다. 전투가 끝났을 때 1만여명 중 남은 병력은 불과 500명이었다고『동학란기록』은 전하고 있다.
김개남의 초기 북상 길은 순조로웠다. 남원을 출발해 임실에 도착했을 때는 조정의 실세였던 민영준의 조카인 임실현감 민충식이 직접 환영하고 가담할 정도였다. 민충식은 상이암에 있는 김개남을 찾아가 동학에 입도하고 결의형제까지 맺은 사이였다. 김개남 부대는 정예 군사여서 전주와 삼례를 거쳐 금산까지 손쉽게 점령했다. 김개남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의 다음 목표는 청주였다. 전봉준은 충청감영이 있는 공주를 점령하고 충청 병영이 있는 청주를 점령하는 것으로 역할 분담이 이루어졌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1894년 12월 9일 김개남은 농민혁명군을 이끌고 청주성을 공격했으나 이미 방비 태세가 갖추어진 청주성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관군이 계속 증원되는 바람에 청주성을 포기한 김개남 부대는 진잠(대전)으로 퇴각했다가 12월 14일 연산에서 다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역시 꺾지 못하고 노성과 논산 쪽으로 퇴각했다.
논산에서 전봉준과 합류한 김개남은 이튿날 3천여 명의 병력으로 일본군 및 정부군과 맞서 싸웠으나 역시 패해 은진의 황화대로 후퇴했다가 다시 전주 쪽으로 퇴각했다. 이때 노성으로 회군하던 정부군은 은진 묵동(墨洞)에서 동학농민군의 화약 제조 공장을 수색해 기구들을 파쇄했다고 전한다.
◈ 참고문헌 ◈
1. 서정석,「백제 산성을 통해 본 황산벌 전투의 현장」,『역사교육』91, 2004
2. 윤용혁,「936년 고려의 통일전쟁과 개태사」,『한국학보』114, 2004
3. 이해준,「연산 개태사의 지역문화사적 성격」,『역사민속학』제26호, 2008
4. 이희진,「백제의 멸망과정에 나타난 군사상황의 재검토」,『사학연구』제64호,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