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보기도의 힘
(막 2:1-12)
수 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지라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서울에서 부산까지 갈 때 가장 빨리 가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예전에 영국의 어느 신문에서 이런 질문을 하고 가장 좋은 대답을 골랐다고 합니다. 물론 영국에서 한 질문이니까 서울, 부산은 아니었겠지요. 가장 좋은 대답은 ‘좋은 친구와 함께 가는 것’이라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친구와 수다를 떨며 여행을 하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라고 말합니다. 그만큼 좋은 친구는 우리 인생에서 좋은 활력소가 됩니다. 좋은 친구는 어떤 사람을 말하는 것일까요? 내 부탁을 잘 들어주면 좋은 친구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오히려 곤경에 빠뜨리는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사람들이 기도하는 것을 모두 들어주면 그곳이 지옥이다’라고 했습니다. 자신이 잘못된 길로 가는 줄도 모르고 구하기 때문에 구하는 것마다 다 이루어진다면 지옥 같은 삶을 살게 된다는 말입니다.
좋은 친구도 마찬가지로 내 부탁을 잘 들어주는 친구가 아니라 나를 바른 길로 이끌어주는 친구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고 해도 잘못을 지적하거나 옳은 길을 알려주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거부하고 반발하며 마음 상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듣고 싶은 말만 들으려 한다면 좋은 친구를 만나기 어렵습니다. 좋은 친구를 만나려면, 다른 사람 말을 귀담아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자기주장, 개성이 강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 시대인 것입니다. 자기주장만 하고, 자기 고집만 내세우기 때문에 대화도 안 되고 토론도 안 됩니다. 텔레비전에 ‘토론’프로그램이 있지만, 그것은 토론이 아니고 논쟁일 뿐입니다. 토론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서로 주장하는 것이라면, 논쟁은 상대방의 주장이 틀렸다고 지적하는 것입니다. 자기만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 논쟁입니다. 그래서 토론이라고 하지만 각자의 주장만 하고, 결론이 없이 끝나게 됩니다. 사회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토론을 통해 대화와 타협이 이루어져야 하지만, 논쟁으로 끝나고 사람들은 광장으로 나갈 뿐입니다. 이런 시대에서 좋은 친구를 사귀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좋은 친구가 없다면 우리 인생은 메말라버리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실 때 율법학자가 ‘내 이웃은 누구입니까?’라고 묻자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은 누구냐?’라고 되묻습니다. 이 말은 ‘누가 좋은 친구인가?’를 찾으려고 하지 말고 ‘나는 누구의 좋은 친구인가?’라고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 사람이 좋은 친구인가? 저 사람이 좋은 친구인가? 살피면서 찾을 것이 아니라, 내가 내 형제, 이웃에게 좋은 친구가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자기중심의 이기적인 생각이 아닌 이타적인 생각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물론 좋은 친구가 되어야 한다면 부담스러울 수 있습니다. 내가 도울 수 있는 것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지식을 많이 가르쳐줄 수도 없고, 가진 것이 많아서 넉넉하게 도와줄 수도 없고, 능력이 많아서 부탁하는 것을 들어줄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은 좋은 친구에 대한 사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이라는 동네에서 한 집에 들어가 말씀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2절에 보면 ‘도를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도’는 진리입니다. 진리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말씀입니다. 말씀에 굶주린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말씀에 굶주림은 진리를 갈급하는 마음일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동물과 다른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굶주림을 느끼지 못한다면 동물과 다름없는 삶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갈망하는 이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들려주십니다. 물론 사람은 말씀만으로는 살 수가 없습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사역과 치유와 기적의 사역을 통해 사람들을 일깨워주십니다.
이렇게 말씀을 가르치실 때 한 중풍 병자를 친구들이 들것에 실어 예수님 앞으로 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도저히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친구들은 지붕으로 올라가 지붕을 뜯고 병자를 실은 들것을 예수님 앞으로 내려보냅니다. 아마 예수님은 이 과정을 모두 보셨을 것입니다. 아무도 모르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5절에 보면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라고 하십니다. 중풍 병자의 믿음을 보신 것이 아니라, 그들, 곧 친구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친구들의 믿음으로 그들의 죄가 사함 받은 것이 아니라, 중풍 병자의 죄가 사함 받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뒤에 나오는 말씀은 서기관들과의 신학적 논쟁입니다. 신학적 논쟁에서 예수님의 권세가 확인됩니다. 이 부분도 하나의 설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병을 치유하는 내용만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다른 사람의 믿음으로 내가 죄 용서 받고, 구원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고백과는 다르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10)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자기 입으로 예수를 믿고 고백해야 구원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대신 믿어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열 처녀 비유에서도 기름은 나눠줄 수 없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친구들의 믿음을 보시고 병자에게 죄를 용서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병자는 믿음이 없는데 친구들의 믿음만 보시고 그에게 구원받았다고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병자도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중풍 병자로 자기 믿음을 표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가장 잘 아는 친구들이 나서서 그의 믿음을 증거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좋은 친구는 서로의 마음을 잘 아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친구를 위해서 모험을 할 줄도 아는 사람입니다. 예수님도 요한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 15:13-14)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는 것은 친구의 구원을 위해 자기를 희생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의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14-15)
예수님은 군림하는 권위가 아니라 희생하는 권위를 내세우십니다. 주님의 희생은 우리 모두를 살리는 힘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힘 있는 권위, 군림하는 권위가 보기 좋다고 생각합니다. 군림하는 권위는 생명을 가볍게 생각합니다. 군사독재 시절 우리나라는 인권이 유린당하고,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습니다. 공권력에 의해 한 사람이라도 죄 없는 사람이 희생된다면 그 권력은 불의한 권력입니다. 그러나 군사독재정권은 간첩 사건을 조작하고, 공안 사건을 조작하고, 젊은이들, 학자들, 어부들, 농민들을 희생시키고, 광주에서 대규모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들은 군림하는 권위, 불의한 권력을 칭송하고 있습니다. 자기는 희생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일까요? 불의한 권력을 지지하는 것은 자신도 불의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군림하는 권위가 아니라, 모든 생명을 살리기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권위를 가졌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주님을 본받으라고 하십니다. 그 모습을 오늘 말씀에 나오는 친구들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친구들의 모습에서 우리가 본받을 수 있는 것은 중보기도, 친구와 이웃을 위한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해 힘을 다하여 기도한다면 주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친구를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누가 좋은 친구인지 찾아서 그 친구만 잘 사귀면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중풍 병자와 같이 자신을 위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런 사람이 좋은 친구가 되어 그를 살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생명을 살리는 힘이 있는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귀신들린 아이를 치유하지 못하고 주님께 묻습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예수님은 대답하시기를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 9:28-29)고 하십니다.
지붕을 뜯고 친구를 달아내리는 행위도 기도인 것입니다. 신앙 행위,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께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자신을 위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예수님도 쉬지 않고 기도하십니다. 그리고 친구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도 제자들과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요 17장) 중보기도의 힘은 죄 사함의 능력이 있습니다. 죄 사함의 능력은 하나님밖에 할 수 없는 능력입니다. 다시 말해 중보의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있다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의 기도가 필요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고통 받는 이웃, 전쟁과 폭력에 신음하는 인류, 소망 없이 살아가는 영혼들을 위해 기도할 때 주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평화와 기쁨을 선물해 주실 것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기도를 쉬지 않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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