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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김익두(金益斗) 목사의 생애와 부흥운동(1910~1940)
“한국의 베드로”, “이적과 치유의 안악산 호랑이”로 알려진 김익두 목사는 1910년대로부터 1930년대에 이르는 한국부흥운동의 산 증인이었습니다. 776회의 부흥집회를 인도하고 28,000회의 설교를 하며 인생의 3분의2를 하나님께 드린 김익두 목사는 1874년 11월3일, 황해도 안악군 대원면 평촌리에서 부친 “김응선”과 모친 “전익선” 사이에서 독자로 출생하였습니다. 부친 김응선은 기와집에 터전을 잡고 사는 중산층이었으며 지역에 사는 걸인들을 구제하고 평촌리의 노인들을 공경하여 주민들에게 신임과 존경을 받는 대원면 유지였습니다. 김익두는 6세때, 서당에서 한문을 배워 10세의 나이에 사서삼경을 통독하고 장래가 촉망되는 소년으로 성장하였습니다. 13세되던 해, 모친이 장질부사라는 전염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었을 때, 30리길(12km) 거리를 달려가 한의사를 모셔오는 지극한 효심에 감동하여 의사는 정성으로 치료하고 모친을 낫게 하였으며 치료비도 받지 않은 일이 있었습니다.
김익두는 6년간의 학업을 마치고 과거시험에 응시하였으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채 낙방이라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하였습니다. 총명한 두뇌와 천재성을 가진 김익두라는 명성에 어울리지 않는 예선탈락은 아버지에게도 충격이었습니다. 이 일로 몸져 누우신 후 다시는 일어나지 못한채 그대로 운명하셨습니다. “사람다운 사람이 되라”는 유언을 뒤로 한 채 부친을 잃은 김익두는 날마다 부친 산소에 가서 아버지를 부르며 눈물로 시간을 보냈지만 응답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인생무상에 빠진 김익두는 구월산 패엽사에 들어가 불교에 귀의하였습니다. 그러나 불교의 윤회사상에 환멸을 느끼고 더 큰 고민의 늪에 빠진 김익두는 다시 세상밖으로 나왔습니다.
부친이 별세하고 집안의 가장이 된 김익두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장사를 시작하였습니다. 김익두는 안악지방 토산물을 구매하여 평양에 가서 판매하고 평양에서 생활용품과 일용잡화를 재 구매하여 안악에서 판매하는 이중소득으로 가정생계를 원활하게 하였습니다. 하루는 길에 떨어진 돈주머니를 줍게 되었는데 주머니 안에는 큰 돈이 들어 있었습니다. 김익두는 며칠을 돌아다니며 주인을 찾아 그 돈주머니를 그대로 되돌려 주었습니다. 그 돈의 주인은 안악읍내 가장 큰 상점을 경영하는 상인이었고 김익두의 정직한 마음에 감동한 주인은 상점의 지배인으로 고용하였습니다. 김익두는 영업능력이 좋고 정직하여서 많은 손님들이 상점을 찾아와 수익은 날로날로 증가하였습니다. 특별히 김익두의 고객은 그의 정직함과 성실함에 매우 신뢰하였고, 자기집 귀중품을 맡기고 보관하는 전당포 역할까지 겸하게 되었습니다.
안악읍 최고 상점의 지배인으로서 좋은 직업을 가진 김익두에게 곳곳에서 혼사처가 들어왔고 18세의 나이에 16세의 “전익선”과 혼인을 하였습니다. 신혼생활에 하루하루가 즐거운 어느날, 친구가 찾아와 동네에 큰 공장이 입주하는데 이곳에 투자하면 큰 돈을 벌수 있다고 하여 연대보증을 요구하였습니다. 김익두는 친구의 부탁을 거절할수 없어서 보증서의 도장을 찍어 주었는데 그것은 친구의 사기행각이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조상 전래의 토지와 집이 몰수되고 김익두는 하루 아침에 걸인이 되어 버렸습니다. 친구에게 배신당하고 모든 것을 잃어버린 김익두는 세상을 한탄하며 술을 마시기 시작하였습니다. 술에 취한 김익두는 거리에서 사람들과 시비하고 폭력을 휘두르며 위협을 가하였습니다. 장날에는 부녀자들과 할머니들의 노점상을 갈아 엎거나 던지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날이 하루, 한주, 한달이 지나고 반년이 지나자 시장 상인들이 오늘은 김익두를 만나지 않게 해달라고 성황당에 비는 일이 있을 정도로 상황은 심각해졌습니다.
이렇게 방탕의 날을 보내던 어느날이었습니다. 김익두는 오늘도 장터에서 사람들에게 시비거리를 찾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서양 여선교사가 시장에서 전도하는 것을 바라보았습니다. 여선교사는 김익두에게도 전도지를 주며 예수를 믿으라고 말하였습니다. 전도지를 건네받은 김익두는 “뭐라고? 나보고 서양귀신을 믿으라고?” 하면서 전도지로 코를 풀어서 바닥에 던져 버렸습니다. 그러자 그 선교사는 “청년!! 전도지로 코를 풀면 코가 썩어요!!”하며 꾸중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김익두를 잘 알지 못했던 여선교사와 여선교사가 전해주는 복음을 알지 못했던 김익두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다시 한번 자세히 읽어 보라고 건네주는 선교사의 전도지를 구겨서 호주머니에 넣은채로 집으로 돌아온 김익두는 무심코 구겨진 전도지를 읽어 보았습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인생은 풀과 같고 그 영광이 꽃과 같으나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느니라.” 김익두는 “세세토록”이라는 네 글자에 심장이 떨리는 느낌을 받고 스스로도 충격을 받았습니다. 여선교사가 전해준 종이에 적혀 있는 말씀은 세세토록 있는 것이라고 했고 그 세세토록은 “영원하다”는 말이었습니다. 누가 무슨 말을 했기 때문에 그 말씀이 영원하다는 것일까? 이 말씀은 며칠동안 김익두의 머릿속을 흔들어 놓으며 잠을 설치도록 하였습니다.
며칠째 고민에 빠져 두문불출하고 있을 때, 친구이며 예수교를 신앙하는 “박태환”(후일금산교회 장로로 피택되었음)이 김익두를 찾아 왔습니다. 훌륭한 선교사가 오셔서 부흥사경회를 하는데 함께 교회에 가자는 권유를 하러 온 것이었습니다. 평소때의 김익두 라면 “교회는 무슨? 조상도 모르는 서양귀신에게 홀려서 잘하는 짓이다!”라고 해야 당연한 것인데 그날은 박태환의 권유를 못이긴 척 하고 받아 주었습니다.
1900년 3월, 금산교회에서 개최된 남자 부흥사경회에는 미국 장로교 선교사 “스왈렌”(소안론,Swallen,W.L.)이 강사로 초빙되어 “영생”이라는 주제로 설교를 하였습니다. 김익두는 서양사람이 한국말에 능숙한 것에 한번 놀라고, 서양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수없이 몰려든 한국사람들에 또 한번 놀라고, 방탕한 생활로 교회라면 치를 떨었던 자신이 교회당에 앉아 있는 현실에 다시 한번 놀랐습니다. 물론 주먹깡패 김익두를 바라보는 교인들과 사람들도 모두 놀라며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시골장터에서 술이나 마시고 있어야 할 사람이 부흥사경회에 앉아 있으니 혹시 무슨 행패라도 부려서 집회를 망치게 될까 염려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선입견이었고 기우였습니다.
자신의 인생에 실패하고 술이 아니면 하루도 살수 없었던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것을 바라본 김익두는 스왈론의 설교속에서 녹아 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우연한 기회에 받아들게 된 전도지 한 장과 박태환이라는 친구의 소개와 스왈론 선교사의 만남을 우연하게 여기기 않았습니다. 김익두는 스왈렌 선교사님 앞에 무릎을 꿇고 지난날을 통회하고 자복하며 회개하였습니다. 지난날의 무섭고 두려웠던 모든 죄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부끄러움도, 두려움도 없는 자복의 시간이 얼마나 흘러갔을까요? 김익두는 아직도 통회하며 얼굴과 온몸은 땀과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어깨를 짓눌러 왔던 인생의 죄짐들은 이제 가벼워 졌습니다. 집회를 인도하였던 스왈론 선교사님도 김익두의 변화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스왈론 선교사는 처음 만나는 김익두를 축복하였습니다. “하나님, 죄인이었던 김익두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앞으로 하나님의 귀한 종이 되어서 불의 사자로 일하게 하옵소서”라는 놀라운 기도를 하였습니다. 스왈론 선교사는 김익두에게 순한문 신약성경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부흥사경회를 통하여 새롭게 태어난 김익두는 이제 주먹깡패와 술주정군이 아니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김익두는 기도하기 시작하였고 성경을 읽었으며, 전도를 하였습니다. 오랜 술친구였던 김선봉을 전도한 김익두는 그와 함께 교회 안팎의 궃은 일과 힘든 일들을 척척 해내는 등 좋은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기생집에 가서 전도하기로 결심하고 김익두는 김선봉과 함께 술집을 찾았습니다. 평소에 알고 지내던 기생, 월선과 옥화를 전도한 김익두와 김선봉은 너무나 기쁜 나머지 이별주 한잔씩 하자고 무심코 술을 마시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술을 마시던 김익두가 감전사를 일으키며 충격을 받고 쓰러져 기절을 하는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김선봉이 깜짝 놀라 겨우 집까지 업고 돌아 왔으나 1주일 동안 혼수상태를 거듭하며 일어나지 못하였습니다. 그후 겨우 일어나게 된 김익두는 예수 믿은 후 다시 술을 마신 것을 회개하며 3일간 금식하고 통회하며 다시는 술을 먹지 않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닌지 1개월째, 김익두를 바라보는 교인들과 사람들은 의구심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김익두는 교인들 앞에서 공개 자복을 하고 하나님께 헌신을 선포하였습니다. 김익두는 장에 나가서 쓰레기를 줍고 거리를 청결하게 하며 예전과 달라진 자신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김익두의 변화에 교인들은 점차 신뢰를 보냈고 그는 친구인 김선봉과 함께 교회의 환경정리와 크고 작은 일들에 솔선수범하였습니다.
모펫 선교사와 함께 한국 부흥의 주역이었던 스왈론 선교사와 김익두의 만남은 이렇게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통하여 이루어진 은혜의 역사였습니다. 김익두는 스왈론 선교사로부터 받아든 순한문신약성경을 1년간 100독을 하였습니다. 성경을 읽는 과정에서 김익두는 가슴을 칼로 찢는 것 같은 불세례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40일 금식기도에 도전한 김익두가 산에서 금식기도를 마치고 하산하던 중 하늘에서 큰 불덩어리가 가슴에 떨어져 견딜수 없는 놀라운 체험을 하였습니다. 그때 하늘에서 “김익두야! 김익두야!” 하며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불러 주신 것이 너무나 감사해 한없이 울고 찬송하며 밤을 맞도록 기도 하였습니다.
1900년 7월, 세례를 받기로 예정하여 부부가 각방을 쓰고 매일 목욕재개하며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하여 세례를 준비하였으나 선교사의 순례가 늦어져 1901년 7월에 세례를 받게 되었는데 그때에 어머니와 아내까지 함께 스왈렌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를 받은 김익두는 전도왕이었습니다. 불신자를 바라볼 때 김익두의 영혼은 견딜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한동안 시야에서 사라졌던 김익두가 안악장터에 다시 나타나자 장사꾼들은 모두 당황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김익두가 진정으로 예수를 믿고 있을까 의구심의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몽둥이와 쇠망치를 들었던 김익두의 손에는 성경과 전도지가 주어져 있었습니다.
“여러분 나는 김익두입니다. 안악장터에서 여러분을 괴롭히고 못살게 하였던 깡패 김익두입니다. 이제는 예수를 믿고 여러분앞에 용서를 빌고 회개하려고 나왔습니다. 그동안 저에게 당했던 여러분들께서 저를 한없이 때려 주시고 용서하여 주십시오!” 어떤 상인들은 예전의 앙심이 있었던지 보복적으로 때리고 발로 차며 욕설을 하기도 하였지만 진심어린 반성에 함께 울며 용서해 주시는 분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김익두의 진심과 용서에 감동을 받은 일부 상인들은 예수를 믿기로 결신하고 그와 함께 교회를 다니기로 작정하였습니다.
1901년, 28세의 변화된 김익두에 관한 소문이 전국으로 알려 지면서 “재령교회”에서 전도사로 청빙하겠다는 교섭이 들어왔습니다. 같은 시기 서울의 큰 약방에서도 150원이라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김익두에게 채용 의사를 밝혀 왔습니다. 재령교회의 사례가 30원이었으니 김익두에게는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김익두는 순간 기도하며 생각하였습니다. 서울의 약방도 종살이고, 교회의 전도사도 종살이인데 같은 종살이라면 사람의 종보다 하나님의 종이 옳은 것이라는 확신으로 재령교회에 부임하였습니다. 김익두가 재령교회에 부임하였을 때 그곳에는 남자 1명과 여자 10명의 교인이 있었습니다. 부임즉시, 김익두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여름성경학교를 개설하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여름성경학교에 등록한 어린이들이 김익두 전도사의 설교를 듣고 회개를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어린이들이 회개를 하자 그들의 부모들도 이어서 회개를 시작하였고 교회는 온통 자복함과 통회함으로 가득하였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임재하심을 통한 놀라운 역사였으며 재령교회에서 처음으로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재령교회는 부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힘을 잃은 성도들은 전도하기 시작했고, 어린이들은 친구들을 교회로 인도하였습니다. 김익두의 첫 번째 사역은 이렇게 대성공을 이루며 한국교회의 새로운 부흥을 예고하였습니다.
재령교회의 부흥은 신천교회로 이어졌습니다. 김익두는 그후 신천교회의 선교사와 동사전도사로 청빙을 받고 사역지를 이동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천교회는 교회만 있고 교인이 한명도 없었습니다. 아무도 없는 교회에서 전도사가 된 김익두는 6개월간 매일 철야기도를 하고 애원하는 중에 초라하고 남루한 옷을 입은 절름발이 장애인 여자 한명이 교회를 찾아왔습니다. 사람이 그리웠을까요? 장애인 거지 여자라도 한사람이 함께 있으니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김익두는 장애인 거지 여자를 보통의 정상적인 교인으로 자라게 하며 정성을 다하였습니다. 그리고 6개월후, 이번엔 남자 거지 한사람이 김익두를 찾아 왔습니다. 그도 돌려 보내지 않고 정성을 다하여 보살핌으로 보통의 일 잘하는 교인으로 성장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러한 변화한 김익두 전도사에 관한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신천교회를 찾아왔고 한주일에 10명, 어떤 주일에는 20명이 찾아와 교회에 등록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3년간의 노력 끝에 한사람의 교인도 없었던 신천교회는 300명의 교인으로 부흥을 하였습니다. 김익두는 매일 새벽기도회를 인도하였고, 하루에 세 번씩 가정예배를 드렸습니다. 기도하고 성경읽는 것을 숨쉬는 것처럼 하였고, 길에서는 사람들을 만나 전도하기를 습관처럼 하였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은 김익두 전도사를 평양신학교에 파송하여 목사가 되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하였습니다.
평양신학교는 장로교의 유일한 신학교로서 1901년에 설립되어 1907년, 길선주와 서경조 등 제 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고, 김익두 전도사는 김관근, 박정찬, 김종섭, 안승원, 우종서, 주공삼, 채정민 등 27명과 함께 1910년 제3회 졸업생이었습니다. 1910년 9월20일, 37세의 김익두는 평안북도 선천군 염수동교회에서 개최된 제4회 독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습니다. 김익두가 목회한 신천교회는 날로 성장하여 700명의 교세로 확장되었습니다. 한명도 없었던 신천교회는 이제 협소하다 못해 교인들이 밖에서 까지 예배를 드려야 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새로운 성전건축이 절실하게 요구되었습니다. 3일 금식기도를 마친 김익두 목사의 환상중에 노아의 방주모양을 한 대예배당이 눈앞에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계시로 받아들인 김익두 목사는 교인들에게 성전건축을 선포하고 건축헌금을 작정하였습니다. 한주만에 쏟아진 교인들의 작정헌금은 힘에 겨울 정도로 지나친 액수가 나왔습니다. 그러나 설계를 마친 교회당 건축비에는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었습니다. 김익두 목사는 기도하는 중에 선천지역 유지들에게 가서 교회 건축헌금을 요청하였습니다. 도저히 말이 않되는 김익두 목사의 제안에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을 돌렸을까요? 그렇게 인색하고 교회에 대하여 부정적이었던 유지들이 큰 기쁨으로 호응하며 김익두목사를 지지하고 나섰습니다. 이같은 불신자들의 헌금에 충격을 받은 성도들이 추가로 헌금을 하여 신천교회 대성전은 재정부담없이 여유롭게 완공될 수 있었으며, 그 때 건축헌금을 하였던 지역의 유지들도 모두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신천교회 성전헌당식을 끝낸 후, 김익두 목사는 신천 시내 길가에 앉아있는 앉은뱅이를 찾았습니다. 베드로의 이적을 기록한 성경을 믿는 김익두 목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어나라고 했지만 그는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마음속에 여전히 남아있는 불신감과 확신없는 믿음이 그를 일으키지 못했다고 생각한 김익두 목사는 하나님앞에 자복하고 회개하였으며 다시 1주일간 금식기도를 마친후 앉은뱅이를 찾았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 앉은뱅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정상적으로 걸어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이 향후 39년간 수십만명의 병자를 치유하는 신유의 은사를 일으킨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신유집회로 명성을 더 높여가던 어느 여름날, 김익두 목사가 부흥회를 인도하기 위해 산고개를 넘어 가던중 너무나 더워서 상의를 탈의하고 나무그늘에서 잠시동안 휴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술에 취한 남자가 올라와 “왜 당신이 여기에 먼저 올라와 있느냐”면서 시비를 걸고 폭행을 하였습니다. 이때 김익두 목사는 그 사람이 휘두르는 주먹을 피하지 않고 다 맞고 있었습니다. 얼마동안 폭력을 일삼던 사람이 폭력을 멈추자 김익두 목사가 “형님, 이제 다 때렸소?”라고 말을 건네었습니다. 그 사람은 “그래! 다 때렸다, 왜? 어쩔건데!” 하면서 다시 폭력을 휘두르려고 하였습니다. 그때, 김익두 목사가 정색을 하고 “내가 김익두라는 사람이오, 예수는 내가 믿고 복은 당신이 받았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얼굴이 반쪽이 되어 머리를 땅에 엎드리고 “형님! 제가 이제 어찌하면 되겠습니까?”하면서 어쩔줄 몰라 했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해! 나를 따라와!”하면서 그 사람을 자기가 인도하는 부흥회에 데리고 가서 참석케 하였고 그는 훗날 그 교회의 장로가 되었습니다.
김익두 목사는 예전의 사람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김익두는 이제 주먹쟁이로 알려진 것이 아니라 “성경다독”으로 유명하였습니다. 그는 성경의 대부분을 암송하고 있을 정도로 많이 읽었습니다. 교인들에게도 성경다독을 권유하였고 김익두 목사의 영향을 받은 신천교회 교인들 또한 성경을 많이 읽기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그는 일설에 구약을 100독, 신약을 1,000독하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김익두 목사의 설교주제도 언제나 성경이었습니다. 성경은 김익두의 신앙생활의 기본원칙이었고 주제였으며 생활법률과 규범이었습니다.
1919년 12월25일, 대구 달성군 현풍읍내 현풍교회에서 김익두 목사는 부흥사경회를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박수진”이란 거지가 집회현장에 나타났는데 그는 10년전 사고로 아래턱이 떨어져 음식을 누워서만 먹던 자였습니다. 거지로서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던 사람이었지만 김익두 목사는 그 사람을 위해서 금식하면서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집회시간에 다시 그를 불러 기도를 하였는데 박수진의 아래턱이 올라가 붙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에 스스로도 놀라고 주위에서 바라보던 사람들도 다 놀라게 되었습니다. 아래턱이 나은 박수진은 그 길로 동네를 다니며 “할렐루야!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면서 춤을 추며 뛰어 다니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을 계기로 김익두 목사는 신유의 역사를 이어갔고, 곱사등이 소녀가 펴지고, 소경이 눈을 뜨는 역사가 계속되었습니다. 대구 경산읍교회에서는 수십명의 환자들이 집단으로 치유를 받았고, 대구교회 집회에서도 수백병의 병자들이 한꺼번에 치유를 받는 기적같은 일이 눈앞에서 목도되었습니다. 김해군 진영리교회에서는 23년된 혈루증 여인이 나음을 입었고, 평양교회에서는 11년된 벙어리 여인이 말문이 열리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동아일보는 이러한 김익두 목사의 능력을 대서 특필하고 그의 능력은 전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김익두 목사의 신유사역은 병자 자신의 회개와 기도와 함께 역사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대구집회에서 “김경애”라는 기생은 1년간 중풍으로 고생하다가 김익두 목사의 기도를 받고 완전히 치유되었습니다. 그러나 후에 다시 기생으로 돌아간 그녀는 중풍이 재발하였고 다시는 회복되지 못하였습니다. 안악군 동문면에 사는 “최석황”이라는 사람은 30년된 종기로 평생을 고생하며 살다가 김익두 목사의 기도를 받고 완전히 치료받았지만 후에 타락한 인생을 살면서 병이 재발함은 물론 그 병으로 죽음에 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1920년 10월20일, 2주간의 금식기도를 마친 김익두 목사는 제8회(1919) 마펫 선교사에 이어 서울 안동교회당에서 제9회 장로교 총회의 총회장에 취임하였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서울 승동교회 부흥회를 인도하였습니다. 도로와 교통이 편리하지 않던 시대, 1만명이 회집한 부흥회에는 교회당은 물론 수많은 사람들이 마당과 인도변까지 명석을 깔고 앉아 부흥회에 참석해야 했습니다. 당시 승동교회 집회에는 일본 동경에서 개최된 만국주일학교대회에 참석하고 귀국길에 올랐던 미국, 영국, 캐나다 선교지도자들도 김익두의 명성을 듣고 집회에 참석하였습니다. 김익두 목사의 신유집회를 반대하였던 “밀스” 선교사는 회심하였으며 “로스” 선교사 등 해외교계 지도자들은 매우 감탄하였습니다. 1920년, 19세의 나이로 승동집회에 참석한 “김재준”은 훗날 목사와 대 신학자가 되었고, 1920년 5월27일, 마산 문창교회에서 개최된 부경사경회에 지수광, 배익자, 이약신과 함께 참석한 “주기철” 목사는 “성신을 받으라”는 김익두 목사의 설교를 듣고 놀라운 성령의 감동을 받았습니다. 1922년 3월, 주기철 목사는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고 훗날 일사각오의 신앙으로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1922년, 동아일보(5월9일자신문)는 초기에 김익두 목사의 치유를 사람을 미혹시키는 행위라고 비난하며 기독교를 부정적으로 바라 보았습니다. 그러자 황해노회 “임택권” 목사는 노회 산하에 “이적증명회”를 조직하고 김익두가 이적을 행할 때 그 당사자들의 사진을 모두 찍어서 “이적증명서”라는 노회차원의 공식적인 책자를 발간하였습니다. 김익두 목사의 신유이적은 과학으로 증명할수 없는 한계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의심의 눈으로 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오랫동안 시달려왔던 질병이 있었고, 김익두 목사의 말씀과 기도와 환자의 회개로 온전히 치유되었다는 것은 분명 놀라운 기적이 아닐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김익두 목사는 이러한 치유가 자신의 능력이나 힘이라고 말하지 않았으며, 오직 성령의 임재하심과 역사하심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고, 더욱 중요한 것은 환자 자신의 회개와 믿음이라고 강조하였습니다.
당시 한국언론의 대표지였던 기독신문 259호는 김익두 목사의 신유집회를 “세계3대 불가사의“라고 보고 하였고, 동아일보 58호와 매일신보 4645호에도 대서특필 되는 등 김익두 목사가 가는 곳은 어디든지 북새통을 이루며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부산경남 20개지역, 대구경북 25개지역, 전남광주외 21개지역, 전북전주외 15개지역, 충남보령외 17개지역, 충북제천외 10개지역, 강원횡성외 22개지역, 경기수원외 20개지역, 황해재령외 24개지역, 평남평양외 17개지역, 평북연변외 22개지역, 함북나진외 16개지역, 함남원산외 22개지역, 제주도 전역 등 전국 258개지역에서 776회의 집회가 있었습니다. 28,000회의 설교와 1천5백만명이 참석하여 288만명이 결신하는 놀라운 일이 김익두의 집회에 있었습니다. 150개의 교회가 새롭게 설립되었고, 140개 교회는 넘쳐나는 성도들로 인하여 증축이 시급하였으며, 120여개의 유치원을 신설하였습니다. 김익두 목사가 치유한 완전 장애인이 1만여명에 달하였고, 김익두 목사를 통하여 주기철, 유원봉, 유해천, 유만식, 오윤호, 김정묵, 양석진, 김재준, 이성봉, 전재선 등 58명의 목사가 나왔습니다. 그가 인도한 집회에서 반지, 비녀 등 귀금속을 비롯하여 당시 헌금액수로 1억8천5백만원이 모금되는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1938년 9월9일, 제27회 장로교 “홍택기” 총회장은 평양서문밖교회에서 개최된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하였습니다. “신사참배는 우상숭배가 아니라 조선국민의 의무”라는 이유로 총회가 결의한 이 내용은 기독교 사상 가장 천박한 결정으로 알려져 있고 돌이킬 수 없는 수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평양 장대현교회 주기철 목사는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5차례의 구속과 7년간의 옥중 고난 가운데 1944년 4월21일, 순교자의 길을 갔습니다. 최봉석과 박관준 목사도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옥중에서 끝내 순교하였습니다.
1938년 당시, 당시, 김익두 목사는 서울 승동교회의 담임목사로 8년간 시무중이었습니다. 종로경찰서는 한국의 대표적인 부흥강사인 김익두 목사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협박하며 회유를 동반하였습니다. 그러나 김익두 목사는 자신이 읽었던 성경에서 신사참배가 하나님 앞에서 위배되는 것이라는 확신을 하였고, 종로경찰서는 김익두 목사를 강제 연행하여 체포, 구금하였습니다. 회유책에 실패한 일본경찰은 몽둥이와 극심한 고문으로 1개월동안 압박하였고 결국 빈사상태가 된 김익두 목사가 반응이 없자 가족들에게 데려가라고 통보하였습니다. 종로경찰서는 종교적 아무런 권한이 없는 가운데 일방적으로 김익두 목사를 파면하고, 승동교회에서의 설교를 금하였으며, 경성에서 추방령을 내렸습니다.
1938년 12월28일, 김익두 목사는 승동교회에서 파면당한채 황해도 은율군 장연면 직전리 피아골이라는 첩첩산중으로 정배(지정된 장소로의 유배)를 떠나야 했습니다. 오랜 고문으로 김익두 목사는 피폐해져 있었고 3개월이라는 회복기가 필요하였습니다. 1939년 3월, 김익두 목사는 사과나무 600주를 심고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언덕바위에 자리를 정하고 매일 나라와 민족과 교회를 위해 기도를 하였습니다. 한때 하나님께서는 신유의 부흥강사로 김익두를 크게 사용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잠시라도 교만을 하였을까요? 첩첩산중 사람 한명 만날 수 없는 곳으로 그를 보내어 다시금 자신을 돌아보게 하셨습니다. 그의 몸은 기도와 함께 조금씩 치유되었고 그의 영혼은 평강을 찾아 가기 시작하였습니다.
1941년, 일본경찰의 함구령에도 불구하고 김익두 목사는 신의주 제일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였습니다. 집회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일본경찰들이 강제로 신의주 신사당으로 끌고 갔는데 그중에는 교인 몇사람도 함께 연행되었습니다. 신의주 신사당앞에서 일본형사들은 김익두의 머리를 휘어잡고 강제로 고개를 숙이게 하며 “최경례”라고 고함을 질렀습니다. 김익두 목사는 처절한 반항으로 끝내 고개를 숙이지 않으며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그러나 종로경찰서로 복귀한 일본경찰들은 김익두 목사가 신사에 참배를 하였다는 거짓 보고를 하였습니다. 일본경찰의 보고서를 들고 장로회 총회를 찾아간 종로경찰서장은 친일파 목사들을 불러 놓고 김익두 목사가 신의주 신사당에서 참배를 하였다고 거짓 증언하고 이러한 유언비어를 급속하게 유포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1945년 8월, 조국은 해방되었고 평양신학교 대강당에서 장로교 총회차원의 대각성회개와 부흥집회를 개최하였습니다. 김익두 목사는 전직 총회장이며 부흥강사 자격으로 부흥집회의 개회설교를 맡았습니다. 이때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광복으로 출옥한 “채정민” 목사가 강단으로 올라가 김익두 목사를 제지하며 신사참배를 한 자가 이곳에 서 있을 수 없다고 강변하는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김익두 목사는 채정민 목사의 고문과 고통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도 1개월간 모진 고문을 이겨야 했고, 지금은 억울한 누명까지 쓰고 있으니 모든 것이 참담한 심경이었을 것입니다. 조국광복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장로교는 친일행적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김익두 목사는 내가 잘하였고 나는 여기 서 있을 자격이 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 앞에서 모든 교회 지도자들이 회개해야 할 때라는 진실이 있음을 말했을 뿐이었습니다.
1945년 9월, 김익두 목사는 다시 목회를 시작하였습니다. 이제 그에게는 예전과 같은 신유의 은사나 능력같은 역사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그 말씀은 목사인 자신을 통하여 전파되어야 할 소중한 명령이었습니다. 김익두 목사는 직전리 교회의 담임으로 새롭게 부임을 하였습니다. 그후 재령 해창교회로 이동하였고, 다시 신천서부교회로 이동하여 목회를 계속하였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나타났습니다. 이번에는 일본제국이 아니라 공산주의였습니다. 민족의 해방이후 정치적으로 남북은 38도선을 경계로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북한지역은 국민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가운데 무신론의 종주국인 소련이 진주하였고 군사정권이 수립되고 있었습니다. 만주지역 독립운동을 하던 김성주를 김일성 장군으로 둔갑시켜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북한에는 40만명의 기독교인이 있었고 공산주의자들에게 이들은 모두 경계대상이었습니다. 유물론과 무신론을 주장하는 김일성 정권은 기독교를 모두 궤멸시켜야만 했습니다. 감언이설과 공갈협박의 양날개로 기독교를 급박하였지만 신앙의 힘을 위협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김일성은 기독교는 기독교로서 대항한다는 전략을 세우고 외조부이며 목사 출신인 “강량욱”을 내세워 “기독교도연맹”을 조직하였습니다. 이 조직에 곽희정, 신영철, 나시산, 이웅, 심익현, 김치근, 황기황 등이 가담하고 조직적인 기독교 탄압에 착수하였습니다.
당시 북한지역에는 장로교 산하 5도연합노회가 이미 조직되어 있었고 이들은 모두 정상적인 공교회들을 지도하고 있었습니다. 김진수 회장 목사를 비롯하여 김화식, 강문구, 이유택, 김길수, 허천기, 이기혁 목사위원 등 신앙에 헌신적인 분들이 생명을 각오하고 공산주의에 저항하였습니다. 1946년 11월3일, 주일 1차 대의원선거를 주일에 개최하였으나 기독교가 전면 반대하여 불참하고 선거 자체가 실패하자 공산주의자들은 5도연합노회 임원들을 모두 체포하고 구금하여 교회의 지도체계를 사실상 와해 시켰습니다. 이 기간을 틈타 기독교도연맹은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총회장에 김익두 목사를 추대하였습니다. 그러나 김익두 목사는 이러한 조직 자체를 알지 못하였으며 총회장을 수락한 사실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강량욱이 신천으로 김익두 목사를 찾아와 만난 사실이 있고, 강량욱으로부터 명의만 빌려 달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거절의사를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평양에 돌아온 강량욱은 김익두 목사가 총회장직을 승낙하였다고 거짓 선전을 하였습니다. 이를 계기로 강량욱과 기독교도연맹 임원들은 김익두 목사의 이름을 이용해 산하 목사들과 교인들에게 기독교도연맹가입을 강요하였으며, 가입을 거부하는 목사와 교인들을 검거하거나 추방하는 등 불법을 자행하였습니다. 중요하고 정확한 내용을 모르는 목사와 교인들은 김익두 목사가 변절하였다고 생각하였으며 이를 맹 비난하였습니다. 김익두 목사의 장남 김용식은 서울에서 김익두 목사의 월남을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김익두 목사는 신천서부교회 500명 성도들의 생명과 신앙을 버려두고 갈 수 없음을 고백하며 76세의 노인이 이제 얼마나 더 살까 하면서 이들과 마지막까지 함께 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1949년 5월1일, 노동절은 북한에서 가장 성대하게 여기는 명절이었습니다. 노동절 행사에 김일성 장군은 특별하게 김익두 목사를 초청하였습니다. 김익두 목사는 큰 성경을 가지고 입장하였고 그의 차례가 되었을 때, 김익두 목사는 “들으라, 부한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고하라,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의 옷은 좀먹었으며, 너희의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것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의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너희 밭을 추수한 품군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지르며 추수하는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여호와의 귀에 들렸느니라, 너희가 옳은 사람을 정죄하였도다, 또 죽였도다, 그는 너희에게 대항치 아니 하였느니라”(야고보서5:1~6) 그러나 북한은 또다시 김익두 목사의 설교를 조작하고 김일성 장군을 찬양하였다고 거짓 선전을 하였습니다. 1949년 10월, 정치보위부에서 김익두 목사를 찾아와 다른 교회에서는 모두 스탈린 수상 사진과 김일성 장군의 사진을 게시하였으니 김익두 목사의 교회에도 게시를 강요하였습니다. 김익두 목사는 “내 목을 칼로 자르라. 교회 강단에 예수님의 사진도 걸지 않는데 누구의 사진을 건다는 것인가?” 하며 강력하게 저항하는 바람에 실패하고 돌아간 일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당시 현장에 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월남한 후 서울 천호동 광성교회 장로로 봉직한 한태선 집사의 증언으로 증명되었습니다.
1950년 10월, 6.25전쟁이후 UN의 참전으로 조기에 끝날 것 같았던 전쟁이 장기화하고 김익두 목사가 거주하는 신천지구까지 UN군이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누군가 10월13일 국군이 입성할 것이라는 소문이 전달되었고 이 소식을 들은 김익두 목사는 감격한 나머지 10월14일 새벽종을 울리며 새벽기도회 시간에 육군 입성을 광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돌아가고 20명의 사람들이 남아 교회에서 기도하고 있을때였습니다. 당시 패퇴하던 북한군 병사가 김익두 목사의 광고를 들은 후 교회안으로 습격해 김익두 목사 등 6명이 사망하였고 나머지는 총경상을 입었으나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습니다. 10월19일, 육군이 평양을 탈환하고 11월29일, 김익두 목사의 장례는 향년 76세로 마감하였습니다.
안악산 호랑이, 주먹깡패왕 김익두가 예수를 믿고 목회자가 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하였습니다. 천성이 나쁜 사람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친구를 잘못 만나 한 번 삐둘어지기 시작한 인생으로 김익두는 젊은날을 술과 계집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장터에서 우연하게 만난 여선교사의 전도지 한 장은 김익두의 인생을 180도 바꾸어 놓았습니다. 김익두는 성경의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을 내려 놓았을때는 기도의 사람이었고, 기도를 멈추었을땐 전도의 사람이었습니다. 1만명이 넘는 사람들의 고질적인 질병을 치유하고, 2백만명이 넘는 불신자들이 복음을 믿는 사람들이 되게 한 훌륭한 한국의 베드로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수많은 오해와 누명의 옷을 입어야 했고, 그것으로부터 평생토록 자유롭지 못하였습니다.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했다면 월남하여 남한땅에서 얼마든지 자유롭게 살수 있었지만 신천 서부교회의 500명 어린양들을 버릴 수 없어서 죽음을 선택한 참된 목자였으며 이로서 억울함과 누명을 증명하였습니다. 김익두 목사, 그가 깡패로 살았던 시간은 불과 몇 년이 되지 않았습니다. 반면 그가 목사로 살았던 시간은 50년에 이르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김익두 하면 목사를 먼저 떠 올리는 것이 아니라 주먹왕을 먼저 생각합니다. 진실보다 거짓을 더 신뢰하고 변화의 삶보다 그 이전의 삶을 더 오래도록 기억하는 사람들에 의해 김익두는 그렇게 변절자이고 주먹왕이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김익두 목사를 통하여 1920년대 한국은 부흥의 절정기를 맞이하였고 수많은 고통의 사람들을 온전케 하였다는 사실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