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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울대학교 우리문화탐사회 원문보기 글쓴이: 선운사
남명의 수제자였던 수우당 최영경(1529~1590)이 한강 정구(1543~1620)의 백매원을 방문했을 때 마침 매화가 만발하였다. 봄은 중춘이라 복숭아꽃이 만발한 시기였다.
수우당은 노복을 불러 도끼를 가져오게 하고 정원에 있는 매화나무를 베어 버리라고 명했다.
"매화를 귀하게 여기는 까닭은 백설이 가득한 깊은 골짜기에 처하여 절조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복숭아꽃과 더불어 봄을 다투니 너의 죄는 참벌하여야 마땅할 것이나 사람들의 만류로 그만두니
너는
이후로 마땅히 경계함을 알아야 할 것이다."라며 늦게 피어난 매화를 꾸짖은 일화가 있다고 한다.
고절(孤節)한 자태......
산청 남사마을에서 만난 원정매와 단속사지의 정당매,
그리고 산천재에서 만난 남명매를 보며 '고절(孤節)'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한 마을을 뒤덮을 만큼 무리지어 피어나 추운 겨울을 보낸 사람들을 들뜨게 만드는
그런 매화가 아니다
외롭게 혼자 꽃을 피우고 서서 자신을 지극히 사랑했던 옛 선비의 고결하고 올곧은 정신을
되새겨보게 하는 매화이다.
원정매 ;남사예담촌 (산청군 단성면 남사리) 하영국고택의 마당.
고려조 원정공 하즙이 심은 것으로 수령 670년.
원둥치는 고사하고 곁가지를 새로 틔워 꽃을 피움,
남사마을에 들어서서 처음 눈에 들어온 매화.
고택의 지붕위로 드러낸 모습이 멋스럽다.
골목골목 찾으러 다니다가 매화집이라는 문패를 붙인 집을 찾았다
고택의 마당에 단아하게 피어있는 원정매.
말라죽은 원둥치를 의지하여 피어있는 모습이 애잔하기도...
원정매의 그윽한 향내를 뒤로하고 남사마을의 고샅을 걸어보다.
전통고택의 담장과 어우러진 매화
남사마을의 담은 주민들이 강돌과 진흙으로 쌓아올린 담장으로 높이는 2미터 정도라 한다
남사마을에는 18-20세기 초에 지은 전통한옥 40 여채가 고풍스런 멋을 간직하고 있다.
최씨고가로 들어가는 고샅.
최씨고가 대문에 붙여놓은 글.
마당에서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사진을 찍고 있는 동안 집주인 듯한 사람이 손님을 배웅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최씨고가 앞마당
최씨고가에도 매화나무 한 그루가 멋스런 자태를....(최씨매)
고풍스런 담장과 홍매의 어우러짐.
골목을 걷는 마음은 그저 푸근하고 여유롭다.
정당매 ; 천년고찰 단속사의 옛 터(산청군 단성면 운리) 삼층석탑뒤.
수령 640년.
단속사는 창건연대가 확실치는 않으나 신라 경덕왕때 세워진 사찰로 추정한다
지금은 동, 서 양쪽에 두 기의 삼층석탑과 당간지주만 남아있다.
남명선생의 흔적을 여기서도 만나다.
선생과 절이름 단속(속세를 끊음)이 닮았다는 생각을 하며 ....
죽어버린 원등걸에 의지하여 가지를 내고 꽃을 피운 정당매.
왼쪽은 완전히 죽어버린 마른 가지였고 오른쪽 가지에서만 꽃이 피어있다.
그러나 수령 640 년의 위엄과 기품이 보는 사람을 압도한다.
말라죽은 밑둥을 의지하여 다시 꽃을 피운 매화의 끈질긴 생명력과 의지로움을 가슴에 새겨본다.
이야말로 우리의 고유한 토종매가 아니던가.
일제시대 매실장아찌를 좋아하던 일본인들이 매실을 얻기위해 심어 퍼지게 한 개량종 왜매와는 다르다
토종매화는 꽃의 크기가 작고 개체수도 가지에 성기게 달리는 반면, 왜매는 꽃이 크고 개체수도 가지에 많이 달린다고..
지난 주 다녀온 섬진강 매화마을의 모습이, 그리고 얼른 빠져나오고 싶었던 기억도 떠올랐다.
봐주는 사람 거의 없는 고즈넉한 곳에서 홀로 꽃을 피우고 서있는 매화.
그러나 정당매의 향기는 참으로 그윽하고 은은했다.
정당매 주위로 청매화가 제법 피어있어 정당매의 외로움을 덜어주고 있다.
아담한 2기의 삼층석탑이 옛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는 절터..
각각 보물 72호, 73호로 지정되어있다.
단속사지가 있는 마을의 이름이 운리(雲里)이다
'구름마을'.이라는 멋진이름의 마을에는 논에도 여기저기 매화나무가 많았다
이름하여 운리야매(雲里野梅)...뜰 안의 매화가 '선비'라면, 들판의 야매는 '민초'이다.
선비는 홀로 꼿꼿하지만, 민초는 서로 살을 비비며 살아간다
고상하게 크라고 가지를 친 적도, 더 높이 크라고 거름을 준 적도 없다.
지리산 웅석봉 줄기 아래서 비바람에 온몸을 맡긴 채 자라서인지 운리 야매는 강인하다..
남명매 ; 남명 조식선생이 만년에 머물렀던 산천재(산청군 시천면 사리)에 있다
수령 약 450 년으로 추정한다.
산청 3매중 마지막으로 남명매를 보기 위해 산천재를 찾았다.
72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평생 야인의 삶을 살았던 남명선생.
선생의 인격과 학문을 흠모하여 출사를 간곡히 권하는 왕의 부름도 번번히 거절했다.
남명매는 조식의 호 ‘남명’에서 이름을 딴 하얀 빛깔의 백매다
빼어난 자태덕에 ‘명품 매화’ 반열에 올랐다. 특히 매화 향이 유난히 짙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봄햇살 따사로운 산천재 앞뜰에는 그윽한 매화항만이 선생의 꼿꼿했던 기품을 되새기고 있다.
남명매는 남명선생이 61세에 천왕봉이 바라보이는 이 곳에 산천재를 짓고 뜰에다 심은 것이라 전한다
기품있는 모습은 선비의 기상을 잘 나타내고 있다 세상사람들이 남명매라 부른다.
그리고 '우연히 읊다'라는 시가 적혀있다.
도산매에서도 보듯이 퇴계(이황)선생의 매화사랑은 유명하다
옛 선비들의 유별난 매화사랑은 매화의 단아하고 기품있는 자태때문이기도 하지만 매화의 속성에 기인한 바 크다.
겨울이 채 다 가지도 않은 눈속에 꽃을 피워 추위를 이겨내는 매화의 지조와 고결함에 자신을 투영하고 닮아가려 한 것이리라.
길쪽으로는 담장이 없다.
선생은 따뜻한 봄날, 매화향 그윽한 산천재 뜰에 앉아 천왕봉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지금이야 도로가 나있지만 예전에는 앞쪽으로 흐르는 덕천강과 지리산을 마주하는 풍광이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옛 사람들의 풍류가 몹시 부럽고 그립다.
매화를 사랑하지만 조예가 깊지못한 내눈에도 참으로 고고하고 기품있는 자태가 아닌가.
산천재 바깥에도 멋스런 매화나무 한 그루가 서있다.
산천재 맞은 편에는 선생의 묘소와 재실이 있다.
산수유도 노랗게 활짝 피어 내마음을 즐겁게 한다.
선생의 동상앞에 서다
남명선생의 제사를 모시는 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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