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사진 한 장 -40회-
“우리, 한 잔 더 합시다.”
박 시인의 흐트러진 모습을 본 적이 없는 나는 그의 제의에 조금 긴장을 한다. 시간도 이제 꽤
되었고 나는 더 마시고 싶은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예, 우리 캔 맥주 하나씩만 더 합시다.”
그는 내 대답을 들을 생각도 않고 몸을 돌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편의점에서 캔 맥주 여섯 개
가 들어있는 작은 박스를 꺼내고 안주로 땅콩봉지 하나를 집어 든 후 계산을 하면서
“시인님! 참 담배 있어요?”
나는 그의 질문을 들으면서 몇 가피 남지 않은 담배 갑을 기억해낸다. 하지만 그는 내 대답이 있
기 전에 담배를 두 갑 산다. 그리고 한 갑을 내게 건네준다.
“여기서 조금 가면 공원이 있거든요. 우리 거기 가서 시원하게 바람 쐬면서 마시지요.”
그는 걸음을 재촉하면서 내게 말한다. 몇 분 걷지 않아서 우리는 도심의 작은 공원 간이의자에
걸터앉을 수 있었다.
그는 자리에 앉자 곧 캔 맥주를 꺼내 마개를 따서 내게 건네주고 다시 하나를 꺼내 마개를 딴다.
맥주의 거품이 숨이 막혀 죽을 뻔 했다는 듯 콸콸 솟구쳐 오른다. 나는 재빨리 입을 대고 후루룩
마신다. 거품이 목으로 넘어가더니 트림을 만들어 낸다.
“박 시인, 너무 늦지 않아. 집에 가야지”
“집이요?”
나는 내 질문이 조금은 서툴렀다는 생각을 한다. 그는 집에 가야 반겨줄 사람도 없이 그렇게 홀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이제 가서 쉬어야 하지 않아?”
나는 변명처럼 이렇게 말을 하면서도 괜한 말을 했다는 후회를 한다.
“시인님이 저 때문에 늦으셨지요?”
박 시인은 내게 미안한 감이 들었는지 손에 들었던 맥주를 곁에 내려놓으며 말한다.
“아니, 나는 괜찮아요. 그런데 박 시인이 나를 보자고 했던 이유를 말 안 한 것 같은데”
나는 박 시인이 왜 나를 보자고 했는지가 궁금했다. 작가의 작품에 대한 평이라면 굳이 이렇게 따
로 만날 필요는 없을 것이고, 작품의 소재 같은 것이라 할지라도 전화로 물으면 될 일이었기 때문이
다.
“저, 사실 시인님 소설을 읽고 난 후 정말 묻고 싶었던 것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며칠 시간이 지나
면서 꼭 물어야 할 내용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하지만 시인님을 뵙고 제 얘기를 하고 싶었습
니다. 괜찮으시다면 오늘 그 얘기를 들려 드리고 싶은데, 시간이…….”
나는 박 시인이 아직까지 누구에게도 하지 않은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아니 나에
게 해 주고 싶은 이야기가 내 소설을 읽으면서 기억나게 되었다는 것이 맞는 말일 것이다. 곧 박 시인
은 자신의 어떤 비밀스러운 이야기, 누구에게 함부로 꺼낼 수 없는 이야기를 내게만 하려는 것이다.
작가의 호기심이 발동되었다고 해야 하나, 나는 그의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괜찮아요. 하세요. 그러려고 맥주를 여섯 개 씩이나 사셨군.”
나는 맥주를 들어 한 모금 입 안 가득 붓는다. 그리고 단숨에 삼켜 버린다. 그의 이야기를 들을 자세
가 되었다는 신호를 주는 것이다.
“저를 아는 사람들은 왜 제가 결혼하지 않는지를 궁금해 하곤 하지요.”
“나도 그 부분은 궁금하기는 한데, 차마 박 시인께 묻기는 어려웠던 일이고”
“제가 오늘 다른 이야기 하나를 들려 드리려고 합니다. 조금 지루할지도 모르겠지만 시인님께 처음 들
려드리는 이야기라서, 조금 두서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담배를 꺼내어 불을 붙이더니 한 모금 깊숙하게 빨아 들였다가 한 숨과 함께 내 뿜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