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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에 이르는 길은 어디에 있는가
요한복음 14:4~6,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우리가 지난 주일에 요한복음 14장 도입부에서 예수님께서 잡히시는 날 밤 제자들과 유월절 만찬을 마치신 후에 제자들 중 하나가 예수님을 팔 것이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떠나실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자, 제자들이 몹시 상심하며 혼란스러워하였음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주시고자 천국 집에 있을 곳을 주님께서 예비하러 가신다는 복된 소망의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그러면서 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들은 제자들 중 도마는 주님의 말씀에 공감을 하지 못했습니다. 도마는 예수님께서 지금 어디로 가신다는 것인지 알지 못하고 또 예수님께서 가시는 그 길도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모르면서 아는 체하기 싫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반문하였습니다.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도마는 예수님께서 당시 지상의 다른 준비된 왕궁으로 멀리 떠나 가시는 것으로 추측했는지도 모릅니다. 도마도 전에 예수님께서 자신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신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을 두서너 번은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예수님께서 아버지 집으로 가서 제자들이 머물 거처를 준비하러 가신다는 말씀을 하늘에 있는 아버지 집인 천국에 가신다는 것으로 당연히 이해해야 마땅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 대부분은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관심이 마음에 늘 가득해 있었기 때문에, 영적인 나라 천국에 예수님께서 올라가신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처럼 오래 주님 곁에 교통하며 지내며 배움을 받을지라도 이렇게 더디게 깨닫는 경우도 많이 있음을 볼진대 우리에게 위안이 됩니다. 우리가 비록 깨닫는 것과 생각하는 것과 행하는 것에서 주님의 제자로서 성장하지 못할지라도 주님께서 열두 사도에게 그렇게 오래 참아주시고 기다려주시고 변함없이 사랑해주신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기다려주시며 자상하게 계속 가르쳐주시며 변치 않고 사랑해주신다는 점을 믿읍시다.
하지만 주님의 제자로 부름받은 우리들이 주님을 바르게 알고 주님의 뜻을 열심히 배우고 주님께서 신뢰할 만한 일꾼이 되고자 하는 거룩한 바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 모두 주님의 교훈들과 행함들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꾸준히 읽고 묵상하며 연구하기를 힘쓰고 또 기도하기를 계속 힘써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할 때에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 눈을 열어서 하나님을 알게 해주시고 총명과 지혜를 더해주시고 영적인 진보와 거룩한 성령의 열정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그리할 때에 성숙한 제자로서 주님과 밀접한 교제 속에 주의 일에 쓰임받는 일꾼이 될 것입니다.
도마가 이렇게 엉뚱한 질문을 하고 있지만 솔직하게 자기의 무지를 드러내며 주님의 가르침을 구하자 주님은 그 도마의 부족한 질문을 통하여 위대하고 영원한 진리의 가르침을 계시하십니다. 이것이 6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께서 도마의 질문을 받고 베푸신 이 말씀은 황금 글씨로 써놓고 우리가 즐겨 묵상해야 할 복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요한복음에 예수님의 7가지의 자기 선언 중 하나입니다. “나는 ~이다.”라는 예수님의 유명한 자기 표명의 구절들이 요한복음에 7가지를 나열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요한복음 6:35 말씀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고 말씀하십니다. 또 8장 12절 말씀에 보면,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고 하십니다. 요한복음 10:7 말씀과 이하를 보면 이르기를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내가 문이니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고 하십니다. 또 요한복음 10:11 말씀에 보면 예수께서 이르기를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1:25,26 말씀에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 올 자가 없느니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일곱 번째로 요한복음 15장 1절에서 예수님께서 이르시기를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요한복음 15:1,2)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일곱 번에 걸친 예수님이 친히 자기를 설명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 말씀에서 의도한 바와 동일한 의도와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유일하신 구원자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자들은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의 중보자이신 예수님을 믿으라는 담대한 선언이자 간절한 호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주님의 담대한 자기 선언의 말씀 중 하나인 오늘 본문 말씀, 요한복음 14장 6절 말씀을 한 단어씩 좀 자세히 살펴보면서 그 의미를 깨닫는 시간을 가집시다.
첫째로 예수님은 자신이 길이라고 선언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라는 이 표현에는 길을 잃어버리고 방황해온 모든 죄인들의 모습을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창세기 3장은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마귀의 꾐에 빠져서 하나님과 동행하던 길에서 미끄러지고 바른 길에서 벗어나 무화과나무 잎으로 몸을 가리고 동산 나무 사이로 숨어버렸던 것을 봅니다. 그 이후로 아담과 하와의 후손들인 모든 인류는 다 길을 잃어버린 양떼와 같습니다. 이사야 53장 6절 말씀에,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을 떠난 모든 인간은 이제 자기 자신의 길로 달려갔습니다. 그 길은 죄의 길이요 속이는 자 마귀에게 끌려가는 길이요 결국 지옥으로 이어지는 멸망 길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고자 하나 그 길을 알지 못하고 헛되이 헤매이곤 했습니다. 그러나 오랜 후에 마침내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모든 인간들이 찾는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을 제시해주셨습니다. 죄 짐을 벗고 의로운 자가 되어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감히 설 수 있고 진노하시는 공의로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길을 제시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죄 짐을 인간 스스로 벗을 수 없고 의롭게 될 수 없고 하나님과 감히 화목될 수 없음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친히 모든 사람들의 죄짐을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의 희생의 길을 홀로 걸어가시고 피 흘려 죽으심으로 공의의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 다 담당하시므로 막혔던 하늘 길을 활짝 여셨습니다. 그리하여 죄인들이 감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를 뵙고 그와 더불어 살 수 있는 화목의 길이 활짝 열렸습니다. 그 얼굴을 보면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에 이제 하나님을 직접 뵈며 살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이를 두고서 히브리서 10:19,20 말씀에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피 흘리시고 마지막 그의 죽음을 앞두고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외치시고 운명하시자 그 때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와 성소를 가로막고 있는 크고 질긴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쫙 찢어지면서 하나님의 영이 캄캄한 어둠 속에 거하시던 지성소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이전에는 일년에 일차 대속죄일에 아론의 후손 대제사장 외에는 감히 들어갈 수 없었던 지성소가 이제 활짝 열리고 예수님의 깨어진 몸과 그 피를 통하여 주님을 믿는 자라면 누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새롭고 산 길이 활짝 열린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이렇게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는 길, 천국으로 들어가는 길이 활짝 열린 것은 복음의 본질입니다. 그렇기에 성경에 보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구원받아 죄사함과 의롭다 함과 화목됨과 하나님의 자녀 됨과 천국 기업을 얻는 자 되어 하나님께 나아가게 되는 이 복음을 ‘길’ 혹은 길이라는 뜻을 가진 ‘도’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 13:10에 보면, 사도 바울이 마술사 바예수를 책망하면서 말하기를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라고 하였습니다. ‘주의 바른 길’은 구원을 얻는 진리의 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사도행전 16:17 말씀에서는 이렇게 사도 바울이 사용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치는 귀신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에게 큰 이익을 주는 자라 그가 바울과 우리를 따라와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
여기서도 하나님께 나아가는 구원의 복음을 ‘구원의 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의 피 흘려 죽으심으로 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는 길이 열려지고 천국 가는 길이 열려지게 되었음으로, 예수님은 여기서 “나는 길이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지상 사역 시에 천국으로 가는 길이 어디이고, 멸망으로 떨어지는 길이 어디인가를 알려주는 비유적 가르침들을 많이 베풀었습니다. 한 예로 마태복음 7:13,14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르기를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고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고 하고 있습니다. 좁은 문, 협착한 길, 곧 십자가의 길을 가는 예수의 길, 이것이 곧 생명에 이르는 길이요 구원의 길이요 천국에 이르는 길이기에, 예수님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과 멸망으로 인도되는 길을 대조적으로 가르치곤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는 길, 천국에 이르는 길에 대하여 가르치셨을 뿐 아니라, 나아가 친히 자기의 피를 흘려 그 길을 여셨고, 또한 예수님 자신이 친히 그 길이 되어주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길이요”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비유적으로 설명하자면, 어떤 어르신이 저에게 쌍용3동 사무소 가려는데 좀 알려준다고 합시다. 그래서 제가 설명하기를, “함께가는 교회를 끼고 돌아서 직진하여 30미터 가시다가 오른쪽으로 돌아서 24시 편의점이 있는 데까지 40미터 직진하시다가 왼쪽으로 돌아서 200미터를 곧바로 가시면 막힌 삼거리를 만나는데, 다시 오른쪽으로 돌아서 10미터를 가면 쌍용3동 사무소가 나옵니다. 5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입니다.”라고 자세히 말해줍니다. 그런데 제 설명을 들으신 분이 “이 길은 처음 길이고 나에 설명해준 말을 들어도 어디가 어디인지 헷갈립니다. 도대체 어떻게 가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제가 그분 손을 잡고 “함께 가드리겠습니다.”라고 말씀 드리고 가는 데까지 동행해드리면 그제서야 그 어르신은 얼굴이 금방 화색이 돌아서 저를 따라 목적지까지 평안히 도착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그 어르신에게는 제가 길을 가는 방법을 가르쳐주기도 했지만 제 자신이 그분에게는 길 자체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저만 따라오면 되는 것이니 제가 곧 그분에게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하늘 아버지께 이르는 길, 천국에 가는 길에 대하여 말씀으로써 가르쳐주시고, 이적과 표적으로써 가르쳐주시고, 예수님 자신의 행실로써 천국 가는 자의 삶의 모습을 본보기로 보여주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가르쳐주어도 그 길을 알지 못하고 헷갈려하고 가지 못하고 주저앉고 곁길로 빠지곤 하니까, 예수님은 아예 모든 길 잃고 방황하는 이들을 위하여 친히 대신하여 피 흘리면서 그 길을 여셨으며, 친히 천국 길이 되어주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들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천국에 가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만 우리가 믿음으로 붙들면 우리는 아버지께 가는 길을 찾은 것이며 그가 우리의 모든 길을 인도하시고 지켜주시고 붙들어주시어 끝까지 가게 하시기에, 예수님 자신이 우리에게 그 길이 되어주시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곧 길이요”라고 담대하게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천국을 친히 건설해주시고 그 가는 길을 가르쳐주시고 친히 천국 가는 길이 되어 주신 구주 예수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립니다. 할렐루야.
둘째로, 예수님은 자신이 진리라고 선언하십니다.
6절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진리’라는 말씀, 혹은 ‘참되다’라는 말씀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이 진리라는 헬라어 단어는 ‘알레쎄이아’ 혹은 ‘알레씨노’는 ‘어느쪽으로 보아도 다 증명이 되었다’는 단어적 의미에서 출발하여 ‘명실상부하다, 안과 밖이 일치가 되다’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꾸며낸 이야기인 허구나 상상적인 존재나 가장이나 거짓으로 겉치레를 꾸민 것과는 정반대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이것이 진짜라고 말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단어에 담긴 또 다른 의미는 불완전하거나 결점이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부서지기 쉽고 불확실한 것과 정반대의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3장 4절에서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라고 말할 때에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지 못하시는 진실하신 분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상이나 거짓된 신과는 대조적으로 결함이 없고 확실하며 의존할 만하며 신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온전한 신이라는 의미에서 ‘하나님은 참되시다’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17:3 말씀에,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라고 하였을 때 하나님을 ‘유일하시고 참되신 하나님’이라고 표현한 것이 그러한 뜻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9 말씀에서도 동일한 의미로 이 단어가 사용된 바 있습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에 들어갔는지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
라고 하였을 때에, 하나님을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이라고 표현했을 때에 우상과 하나님의 차이를 대조적으로 잘 나타내 보인 것입니다. 우상은 참 되지 못하니 곧 불완전하고 겉으로는 신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신이 아닌 돌과 나무와 은금철에 불과하여 거짓 신에 불과하지만 예수님께서 증거하신 하나님,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믿는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유일하시며 참 되신 하나님이 맞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며 안과 밖이 일치가 되고 불완전함이 없는 완전하신 참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참 되신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분이신 예수님 역시 진리로 충만하신 분이었습니다. 이를 두고 요한복음 1:14, 17 말씀에서 이렇게 증거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그러므로 예수님은 영원하신 진리이신 하나님에게서부터 세상에 오신 독생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예수님은 진리로 충만하시고 또 그는 진리를 세상에 공급하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 자체이기 때문에 거짓말을 결코 할 수가 없습니다. 거짓말을 할 수 없으시기에, 때로 바리새인들이 그 말을 들으면 죽이려고 덤벼들 것을 알면서도 그는 그들에게 진리를 선포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이렇게 직설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요 8:43~45)
이처럼 주님께서 진리를 열렬하게 증거해도 거짓에 잡혀 있는 자, 마귀에게 속한 자는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반면에 주님을 따르는 성도들은 진리의 말씀을 알아듣고 진리를 따르며 살아갑니다. 요한복음 10:26,27 말씀에,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양이 아닌 자들과 주님의 양과의 차이는 주님의 진리 말씀을 듣는가 안 듣는가의 차이인 것입니다.
빌라도 총독 앞에서도 이렇게 주님께서 선포하신 바 있습니다.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세상에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 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요한복음 18:37~38)
그렇습니다. 빌라도 총독은 이 세상의 합리적 사고의 대표로 주님 앞에 서 있습니다. 그는 진리란 인간 자신의 이익과 성공을 위하여 유익한 것이라고 보는 실용주의자입니다.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서라면 양심을 얼마든지 굽히며 살 수 있는 자였습니다. 그런 빌라도에게 거짓이 없고 안과 밖이 일치가 되며 절대 영원하게 변하지 않는 영적 법칙과 도덕 법칙과 역사 법칙이 있고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참되신 하나님께서 세우신 복음이 있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그에게 자세히 설명해주신다 해도 그가 받아들이지 아니할 것은 뻔합니다. 그러므로 ‘진리가 무엇이냐’라고 질문을 하였지만 예수님은 다시 침묵으로 대응하신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은 오직 진리에 속한 자가 듣기 때문입니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는 주님의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그리스도인은 진리에 속한 자입니다. 진리에 속한 자는 진리 자체이신 예수님을 믿으며, 그의 모든 말씀을 의심없이 믿으며, 그 모든 말씀을 자기 삶의 기준으로 받아들여서 그 말씀대로 행하기를 늘 힘쓰는 자가 되는 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진리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은 답답하고 구속받는 부자유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도리어 진리의 제자들은 자유를 누리며 살아갑니다. 요한복음 8:31 이하에서 이렇게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1,32)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유일하고 완전하고 아무 불순물이 없는 충만한 진리이신 것을 그대로 믿는 자는 당연히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그대로 믿고 그 말씀을 사랑하며 그 말씀을 즐거이 지켜 행하게 됨으로써 주님의 참 제자가 될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의 참된 제자가 되면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그 속에서 풍성해질 것입니다. 그 결과 그는 진리에 구속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 가운데 자유롭게 될 것입니다. 그는 죄와 세상과 자기 자신의 타락한 육신의 본성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되어갈 것입니다. 주님을 더 깊이 알았던 사도 바울이 생과 사를 초월하고 성공과 실패를 초월하고 병과 약함을 초월하여 이 세상을 그토록 열정적이며 기뻐하며 만족하며 계속하여 인생 길, 사명의 길을 달음질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복음 안에서 온전히 지식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그를 자유케 한 것입니다.
반면에 세상 지식을 많이 알면 자유롭게 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더 복잡해지고 더 번뇌가 많고 더 근심이 많고 더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길을 잃어버립니다. 그러나 진리이신 주님 안에서 진리로 온전히 인도함을 받는 자는 단순해집니다. 자유롭습니다. 평안해집니다. 진리의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는 삶을 살아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이요 “진리에 속한 자는 내 말을 듣고 나를 따른다”는 주님의 말씀과 같은 주의 양입니까? 아니면 아직도 절대 진리이신 주님을 완전히 따르려니, 아직도 자기의 자아가 살아 있어서 내 생각, 내 방법, 내 고집이 더 많아서 갈등하며 주님을 따르고 있습니까? “내가 길이요 진리요”라는 말씀에서 나오는 길과 진리는 유일한 것이요 절대 권위를 주장하는 말입니다. 주님이 절대 진리이지 상대 진리가 아닙니다. 주님을 진리로 믿으면, 주님 외의 모든 나머지 것들은 아무리 그럴듯해도 그것은 섞인 것이요 궁극적으로는 가짜요 궁극적으로 다른 것을 믿고 따르면 속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절대 진리이신 주님만을 믿고 다른 모든 것들을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일이 없도록 합시다. 주님 외에는 다른 것들은 믿고 의지하면 손을 찔러 상하게 만드는 꺾인 갈대 지팡이일 뿐입니다. 우리 모두 영원히 변치 아니하는 진리이신 예수님을 굳게 믿고 그의 모든 말씀에 거하여 그의 제자가 되어 진정한 자유와 평안의 삶을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셋째로, 주님께서는 자신이 생명이라고 선언하십니다.
4절에서 주님은 선포하기를 “나는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생명이라는 말은 요한복음에서 자주 쓰인 말씀으로서 그것은 주로 영생이라는 말과 같은 말씀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유래된 생명을 가리킵니다. 반대로 유한한 지상적 생명, 덧없이 소멸되어가는 인간의 육신적 생명을 의미하는 말로 쓰인 예도 있습니다. 요한복음 12:24,25 말씀에 보면 이 두 가지 말이 대조적으로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에서 ‘생명’은 ‘푸쉬케’입니다. 이 ‘푸쉬케’ 생명은 지상적인 인간의 목숨, 생명을 가리킵니다. 이것을 사랑하는 자는 생명을 잃어버립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자기의 이러한 지상적 목숨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에 이르도록 보전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영생은 곧 오늘 본문 말씀에서 말하는 ‘생명’에서 쓰이는 ‘조에’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자기를 “나는 생명이다”라고 선언하였을 때 이 생명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생명으로서 영원한 생명을 가리킵니다. 단지 시간적으로만 영원히 존재하는 생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이 그러하듯이 늘 기쁨과 자유와 행복과 활력과 평화가 충만하되 파도가 밀려오고 또 밀려오듯이 이러한 생명적 기쁨과 충만한 행복과 활력이 늘 새로워지는 생명을 의미합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시고 그 가운데 생명을 주시는 모든 생명의 원천이십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 만물의 생명을 유지하게 해주시는 생명의 원천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더불어 천지를 창조하시고 유지하시는 일에 함께하시는 분이 바로 말씀으로 세상에 오신 우리 주님이십니다. 요한복음 1:4 말씀에,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고 하였습니다. 빛이 세상의 모든 생명 있는 존재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하듯이, 우리 주님께서 모든 생명의 원천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단지 육신의 생명만을 살리는 정도의 생명이 아니라 영혼과 삶 전체를 살리되 영원히 살리는 생명의 원천입니다.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두고 “나는 생명이요”라고 증거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삶의 고단함에 지쳐 있던 사마리아 성의 수가성 여인에게 찾아와서 예수님께서 우물가에서 그녀에게 이르시기를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3,14)
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때 자기를 믿는 자에게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주시겠다고 자신을 영원한 생명의 수여자로 소개하셨습니다. 그리고 벳새다 광야에서 떡과 물고기의 기적을 맛본 군중들이 다음날 다시 예수님께 몰려와서 먹을 것을 내심 얻으려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이 추구하는 바를 고쳐주시려고 이러한 말씀을 주신 바 있습니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그들이 이르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4,35)
사람들은 자꾸만 세상적인 떡, 과거 조상들이 광야에서 먹었던 만나와 같은 육신적인 필요를 채우는 떡과 고기에만 집착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떡을 먹더라도 죽고 만다고 경고합니다. 진정한 떡은 영생하도록 그 심령을 새롭게 하는 하늘의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이라는 것을 예수님은 말씀하시면서, 나에게 와서 나를 믿으라고 그들을 초대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깨닫지 못하고 다들 돌아서고 말았으니, 주님이 주시고자 하는 생명의 지극히 복됨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참 생명이신 주님을 몰라 가짜 생명에 매달리는 이들이 많습니다.
진정한 생명은 하나님에게만 있으며 그 생명은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죄인은 이 땅에서 육신은 아무리 화려하고 활발하게 살아가고 있을 수 있지만 그 영혼은 죄에게 속박되고 저주 아래 있고 사망으로 달려가며 영원한 지옥이 그를 기다린다는 두려움 속에 살아갑니다. 이런 경우 그의 참 생명은 사실 죽어 있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이 이렇게 풀의 꽃과 같은 생명으로서 잠시 푸르게 자라고 꽃이 피지만 저녁이면 풀은 시들고 꽃은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죄로 인하여 참 생명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죽어있는 모든 인간들에게 다시 참 생명이신 하나님과 접붙여서 다시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며 사는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그 길은 죽으시고 부활하신 우리 구주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가능한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한복음 11:25,26)
라고 크게 외치셨던 것입니다. 아담 이래로 모든 사람은 다 하나님으로부터 꺾어진 가지처럼 꺾여진 생명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원전부터 하나님과 함께하신 자존자이신 생명의 원천이십니다.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자기 몸을 깨뜨려서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쏟아주신 까닭은 그 피로 우리 죄를 씻고 그 생명의 물로서 우리를 다시 살리시되 영생에 이르도록 다시 살리기 위함입니다. 할렐루야. 그리하여 이제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구속의 승리를 이루신 주님은 그를 믿는 자들에게 생명의 성령을 보내주셨기에 예수님을 믿는 자는 이미 그 속에 죽음이 결코 빼앗지 못하는 영생을 이미 소유한 자가 됩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5:12 말씀에 이르기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라고 큰 소리로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제 주 예수를 믿는 우리들은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게 되고 하나님께 영원히 속한 자가 되어 죽음과 사망과 저주와 슬픔이 없는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서 우리를 위하여 생명을 내어주신 우리 주님과 더불어 영생을 누리며 살게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네 번째, 주님은 이 담대한 진리를 선포한 직후에 곧장 이어서 이 진리의 배타적인 유일성을 선포하셨습니다.
다시 한번 6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은 자기가 유일한 길이요 완전한 진리요 영원한 생명 자체라고 제자들에게 엄숙하고 당당하게 선포하신 후에 한 가지 제자들이 잊을세라 놓칠세라 이 말씀을 덧붙입니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즉 예수님 외에 다른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외에는 다른 진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외에 영생의 근원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길은 다 사망과 영벌로 이어지는 곁길이요 주님과 그의 가르침 외에 다른 가르침과 종교와 철학과 깨달음은 아무리 화려하고 합리적이고 멋있고 대단한 화술과 영성을 드러내보인다 해도 그것은 가짜요 속이는 것이요 사탄의 위장술이라는 것입니다. 잠시 병도 고칠 수 있고 잠시 기적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예수님 외에는 참 생명이 아니고 그것은 영원한 사망과 멸망으로 인도하는 악한 손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생수를 그 영혼에 부어주는 것이요 살아계시고 참되시고 영원하신 영광의 하나님께 인도하여 영생을 함께 누리게 하는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구원, 다른 복음이 없다는 것을 예수님 다음에 사도들도 여러 번 강조하였으니,
베드로 사도가 이르기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사도행전 4:13)
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도 증거하기를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디모데전서 2:5)
고 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3:10,11 말씀에서도 이르기를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고 하였습니다. 이 모든 말씀들은 한결같이 오늘 주님께서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는 말씀을 굳게 세워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만이 참 진리요 예수님만이 참 생명입니다. 그리고 예수님만이 천국으로 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는 길을 알려주실 뿐 아니라 우리를 끝까지 그 길을 가도록 도와주시고 이끌어 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참으로 천국 가는 길 자체가 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 외에는 결코 결코 우리는 그 험한 길을 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 자기를 십자가에 죽이고 주님이 주인 되어 주셔야 가는 그 길을 주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시어 끝내 끝까지 가게 해주실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다른 수많은 길에 한눈팔지 말고 믿음 안에서 오직 예수님만을 굳게 붙잡읍시다. 진리의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가르쳐주신 수많은 진리의 가르침들을 세상의 그 어떤 보석과 보물보다 더 소중히 여기고 읽고 묵상하며 순종하여 우리의 가장 귀한 기업의 상으로 바꾸어 간직합시다. 또한 예수님만이 참된 양식이요 참된 생수의 근원임을 기억하고 이 세상에서 병들고 약해지고 심령이 시들어지고 슬퍼지고 외로워질 때마다 잠시 있다가 시들어버리는 세상 생명을 의지하기보다는 주님의 생명을 더욱 갈급히 찾읍시다. 주님이 친히 약속하시기를,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주리지 아니하고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주님께 나와 기도합시다. 간절히 기도하면 생명의 성령께서 우리 안에 충만한 위로와 기쁨과 생명으로 충만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믿음으로 살다가 장차 주님 나라에 가게 될 때가 되면 주님이 친히 천사를 보내사 우리 길을 보호하며 인도하실 것이요 천국 문에서 주님께서 버선발로 달려나와 우리를 맞이해주실 것이요 천국에서도 주님의 가르침을 통하여 진리 가운데 성장하게 해주실 것이요 더욱 풍성한 하나님의 생명으로 우리 영혼을 기름지게 하실 것이요 부활의 그 날에 우리 죽은 몸까지도 다시 영광스럽게 살려내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을 주신 우리 구주 예수님을 더욱 사랑합시다. 그를 굳게 붙듭시다. 오직 주님만을 끝까지 믿고 따르는 진리에 속한 자들로 살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