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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독일 함부르크대학에서 열린 ‘승가에서 여성의 역할’ 학술세미나(7월 18일~20일)에서 운문사 명성 스님이 개막축하 연설을 하고 있다.
미국 남부 테네시주 멤피스에 위치한 미국 국립민권기념관에서는 매년 가을 전 세계의 인권 증진에 기여한 인물을 선정해 특별상을 준다. 2009년 이 기념관은 달라이 라마를 국제인권 부문 자유의 상 수상자로 결정했다. 그해 9월 23일 이 상을 받기 위해 멤피스에 도착한 달라이 라마는 시상식에 앞서 먼저 시내에 있는 로레인 모텔을 방문했다. 이 모텔은 1968년 4월 4일 미국 흑인 인권운동의 아버지인 마틴 루서 킹 목사가 흉탄에 맞아 숨진 곳이다. 스님이 이곳을 방문하던 날 모텔 3층 발코니의 킹 목사가 쓰러진 난간에는 흰 화환이 걸려 있었다. 마치 킹 목사를 대하듯, 스님은 기도자의 순수한 마음을 뜻하는 티베트 고유의 명주 수건인 흰 카타를 화환에 둘러주었다. 중국 지배하의 티베트자치구 및 고국을 잃고 해외를 떠도는 망명 티베트인들의 정신적인 수장인 달라이 라마와 미국에서 인종차별을 겪는 모든 소수자의 정신적인 대부인 킹 목사의 삶과 죽음을 초월한 조우의 순간이었다.
2009년은 달라이 라마가 망명길에 오른 지 반세기가 되는 해이다. 이날 달라이 라마는 국제인권상 수상을 기념해 〈평화와 화합을 이루는 길〉이라는 제목의 연설을 했다. 모든 인간에게 평등하게 주어진 고유한 권리를 찾는 길은 궁극적으로 내면의 힘에서 나오며 그 내면의 힘은 타인에 대한 믿음을 통해 전달된다고 했다. 상대방에 대한 두려움은 소통을 방해할 뿐이며 신의를 기반으로 한 진정한 교감이 없이는 평화도 인권도 성취하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그런데 바로 이 자리에서 달라이 라마는 특유의 장난기 어린 미소와 함께 뜻밖의 선언을 했다. “나는 나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부릅니다. 여러분은 여성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사람을 그렇게 부르지 않나요?” 이 짧은 한마디가 청중석을 강타했다.
달라이 라마의 고백은 곧바로 역사가 되었다. 이 파격적인 한 마디가 평화와 화합에 대한 길고 숭고한 법문보다 더 강렬한 파장을 일으켰다. 누리꾼들은 멤피스의 지역신문 기사를 퍼 날랐고, 이 말씀에 환호한 많은 이들이 여성에 대한 스님의 시각, 여성문제에 대한 스님의 관심에 촉각을 곤두세우게 되었다.
그로부터 하루의 가감도 없이 정확하게 6년이 지난 2015년 9월 23일, 이날 달라이 라마는 영국 BBC방송사와 인터뷰를 했다. 리포터가 물었다. “스님의 계승자, 즉 15대 달라이 라마가 여성이라면 기쁘시겠습니까?” “그럼요.” 스님의 답은 간결했다. 예전에 시사한 바 있는 여성 달라이 라마의 가능성을 확인해준 셈이었다. 그런데 이날 정작 시청자들이 자신의 귀를 의심케 한 것은 여성 달라이 라마의 탄생 가능성이 아니라 그에 대한 부연설명이었다. 여성이 달라이 라마가 된다면 그 여성은 아주 매력적인 모습을 지닌 사람이어야 할 것이라고 한 것이다. 달라이 라마로 태어날 여성의 용모에 대한 스님의 말씀은 또다시 대중매체를 타고 일파만파 퍼져나갔다.
이 인터뷰의 하이라이트는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참혹한 내전을 피해 유럽으로 밀려드는 무슬림 난민에 대한 유럽인들의 편견과 난민정책의 개선을 촉구하는 메시지였다. 이슬람이라는 특정 종교를 악마화해서는 안 되며 유럽인들에게 인류애를 바탕으로 포용심과 자비심을 베풀 것을 호소하는 것이 스님 답변의 핵심이었다. 이와 함께 여성은 선천적으로 남자에 비해 사랑과 자비를 베풀 수 있는 더 큰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하지만 이런 중요한 메시지는 모두 잊혔다. ‘여성은 얼굴이 아름답지 않으면 달라이 라마로서 쓸모가 없다’는 선정적인 한 줄만 트윗되고 리트윗되었다. 대중적 인기와 관심 덕분에 달라이 라마의 말씀은 잠언이나 예언으로 승격될 때가 많다. 반대로 말씀의 맥락이나 함의와 무관하게 억측의 대상이 되는 경우도 없지 않다. 성인의 무과실성을 증명해 보이려는 이들까지 가세하여.
위 두 사건의 표피에 드러난 달라이 라마의 입장은 서구의 페미니즘, 특히 급진적인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볼 때 분명 상반된 측면이 있다. 필자는 6년의 시차를 두고 벌어진 두 사건을 되짚어보며, 대중이 보인 반응의 옳고 그름을 떠나 궁극적으로 모든 이들이 궁금해하는 문제는 동일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우리 시대의 정신적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는 여성 및 여성문제에 대해 어떤 시각을 갖고 있는가? 그 답은 여러 법문과 대중강연에 이미 제시되어 있다. 여기서는 필자가 직접 보고 들은 경험을 바탕으로 좀 더 정리된 형태의 답을 찾아보고자 한다.
2007년 독일 함부르크대학은 달라이 라마의 요청에 따라 ‘승가에서 여성의 역할’이라는 주제로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했다. 구체적인 목적은 티베트불교로 출가한 여성수행자들의 비구니 구족계 수계와 관련된 제반 문제를 토의하는 것이었다. 전 세계 불교권을 망라한 비구 · 비구니 학승과 불교학자 150여 명이 참여해 이틀간 논문을 발표했고, 셋째 날 오후에는 각 불교전통을 대표하는 비구 율사 11명과 비구니 원로 11명이 단상에서 달라이 라마와 직접 토론을 하는 순서가 마련되어 있었다.
한국 비구니승단에서는 전례 없는 대규모의 대표단을 파견했다. 명성 스님은 전 세계 모든 비구니를 대표해 개회 축하연설을 했고, 입적하신 묘엄 스님은 세계불교사 최초의 비구니 율원인 금강율원을 설립하게 된 동기와 목적에 대해 강연하는 등 한국 참가자들은 모두 다섯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리고 마지막 날 명성 스님은 전국비구니회 회장으로서 달라이 라마와의 공개토론에 참여했다.
이 학술대회에서 발표된 티베트 관련 논문들을 모아놓은 《존엄과 규율(Dignity and Discipline)》이라는 책을 보면 달라이 라마가 ‘토론의 장’을 열면서 했던 연설문이 실려 있다.
고대 문화에서는 성의 차이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명이 발달하면서 여러 사회가 적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할 대책을 강구하는 가운데 육체적인 힘이 중요해졌고, 결과적으로 남성이 사회를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후대에 이르면 교육과 지성이 더 중심 역할을 하게 되는데 이 영역에 관한 한 남성과 여성은 동등한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오늘날 갈등을 해결하고 사회의 여러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사랑과 따뜻한 마음입니다. 이 두 자질은 교육과 지성이 파괴적인 목적에 악용되는 것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여성은 그들의 자궁에 태아를 품고 갓 태어난 아기를 돌보는 데 일차적인 역할을 해왔기 때문에 남성에 비해 좀 더 자연스럽게 자애롭고 따뜻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여성은 사회에서 좀 더 중심적인 역할을 해야 합니다. 물론, 애정과 공격성이란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똑같이 잠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가 촉발되는 기제에 있어서는 남성과 여성 간에 차이가 있어 보입니다.
달라이 라마의 여성관은 인간의 생물학적 조건과 사회적 환경 그리고 역사 발전이라는 거대한 세 가지 요소의 상호작용을 바탕에 깔고 있다. 인간사회의 변화를 추적해 보면 몸보다는 정신력이 지배하는 구조로 진화해온 게 사실이다. 교육받은 여성들의 지적 활동이 결코 남성에게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것도 충분히 증명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다가 아니다. 스님 말씀의 포인트는 양날의 칼과 같은 지성이 잘못 쓰일 때 초래될 불행을 막기 위해서는 감성의 계발이 필수적으로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감성 중에서도 타인을 배려하고 친절하게 감쌀 수 있는 자비심이 가장 중요한 덕목이자 가치이다. 이 점은 보리심으로 귀결되는 달라이 라마의 수행관과 일치한다. 그런데 여성은 모성본능과 육아라는 사회적 역할로 인해 자비심을 발휘하는 데 있어서 남성보다 뛰어나다는 것이 달라이 라마가 밝힌 여성론의 요체이다.
한국인에겐 당연한 말씀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달라이 라마의 이런 견해를 모든 여성이 흔쾌히 수용하는 것은 아니다. 이 문제는 조금 후에 살펴보기로 하고 일단 함부르크에서의 학술대회로 돌아가 보자. 여성예찬론으로 시작된 공개토론에서 비구니 구족계의 도입이라는 티베트불교의 당면과제에 대해 달라이 라마는 어떤 입장을 취했을까? 지성과 감성의 두 측면 모두 여성의 손을 들어주었다면, 영성의 문제에서도 그럴 것인가? 다시 그날의 연설문을 옮긴다.
역사적으로 종교는 종종 남성의 중요성을 강조해왔습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최고의 서원인 비구와 비구니 서원은 동등하며 평등한 권리입니다. 사회관습 때문에 어떤 불교의식(儀式)에서는 비구가 앞에 서기도 하지만, 붓다는 기본적인 권리를 두 승단에 똑같이 주었습니다. 따라서 비구니계 수계식을 부활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논의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붓다는 분명히 비구니의 존재를 인정했습니다. 율장의 테두리 안에서 어떤 방식으로 여법하게 수계할 것인가가 문제일 따름입니다.
여성의 영성에 대한 달라이 라마의 입장은 명확하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두고 네 시간에 걸쳐 벌어진 공개토론에서는 어떤 결론이 도출되었을까? 티베트 교단은,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해,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불교에 비구니계를 도입하고 구족계 수계식을 거행한다는 혁명적인 선언을 했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었다.
단상 위의 비구 · 비구니 원로들은 한목소리로 비구니계의 즉각적인 도입을 간곡히 청원했다. 이를 경청한 달라이 라마의 최종 논평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우리는 티베트인이건 서양인이건 이미 사분율의 비구니계를 받은 이들을 모두 비구니로 인정하고 받아들입니다. 이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티베트 율장에 부합하는 구족계 수계방식을 찾는 일입니다. 붓다가 살아 있다면 지금 당장 물어보면 됩니다. 내가 붓다라면 내가 결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붓다가 아니지 않습니까? 어떤 사항은 내가 독재자처럼 처리할 수 있으나 율장에 관해서는 그럴 수 없습니다. (중략) 비구니 구족계 수계식은 비구 원로들의 동의가 요구되는 사항입니다. 그런데 원로 스님들 일부가 강한 거부 의사를 밝힌 바 있습니다. 전원합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 문제지요.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사분율 전통에 따라 구족계를 받은 티베트불교의 비구니들이 매년 함께 모여서 포살, 하안거, 자자의 세 가지 의식을 행할 수 있도록…… 중국어 사분율을 티베트어로 번역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항에 대해서는 좀 더 논의가 필요합니다.
승속을 막론하고 강당 여기저기서 한숨이 터져 나왔고 어떤 스님들은 무릎을 내리치며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정곡을 향해 힘차게 날아간다고 믿었던 화살이 멋지게 과녁을 비껴가는 현장을 목도한 느낌이었다. 논문 발표가 이어지던 처음 이틀 동안 비구 율사들과 비구니 원로들은 저녁 공양이 끝나자마자 다시 원탁에 둘러앉아 공개토론에서 불거질 율장상의 문제를 미리 짚어보고 토론하면서 각 불교전통 간의 입장 차를 조율하느라 쉴 틈이 없었다. 통역을 위해 재가자로서 유일하게 입장이 허락된 필자는 티베트 교단의 미래를 위해 애쓰는 원로들의 열정에 깊은 감동을 받았고 그들의 원력이 성취되리라 확신했다.
율사들이 토론에 토론을 거듭한 핵심사항은 비구 단독 수계와 비구 · 비구니 이부승 수계의 장단점이었다. 대부분의 원로는 후자를 선호했다. 이부승 수계는 붓다의 뜻이었고 앞으로 태어날 티베트 비구니승단의 자율성과 건강한 발전을 위해 더 나은 제도라는 데 이의가 없었다. 그러면 비구니 삼사칠증을 어느 전통에서 추대할 것인가? 현재 계맥이 전승되고 있는 동아시아의 비구니승단 외에는 대안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최근 비구니승단이 부활한 스리랑카도 거론되었으나 법랍이나 역사적 관점에서 남방불교는 현실적인 답이 아니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매우 민감한 장애물이 발생했다. 첫째, 티베트불교가 자체적으로 원로 비구니 12명을 배출할 때까지 이부승 수계식은 외국인 비구니들이 집전할 것이다. 둘째는 계목의 문제였다. 삼사칠증이 사분율 전통을 따른다면 앞으로 티베트불교에서는 비구계는 티베트 율장의 계목으로 비구니계는 사분율 계목으로 수계를 할 것인가? 열띤 논쟁이 뒤따랐다. 결론적으로 이것은 계율의 근본정신보다는 기술적인 문제라는 데 동의했다. 주변적인 사항 때문에 비구니계의 도입을 늦출 수는 없다는 데 뜻이 일치했고, 원로들은 이부승 구족계 수계를 지지하는 쪽으로 입장을 정리했다. 만약 사정이 여의치 않을 경우, 비구 단독 수계를 차선책으로 권하기로 하고 이틀간의 막후협상을 마무리 지었다.
이제 공개토론에 임할 일만 남았다고 생각하고 모두 흩어지려는 순간, 어느 비구니 스님이 가볍게 물었다. 그런데, 이 논의에 정작 티베트인 아니 대표자는 참여하지 못했으니, 마지막으로 그들의 의견을 청취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즉시 원로 아니 한 분이 회의실로 안내되었다. 율사를 대표하는 비구 스님이 이틀간의 회의 결과를 간략히 전달한 뒤 이부승 수계와 단독 수계 어느 쪽을 원하느냐고 물었다. 이 원로 아니는 기다렸다는 듯,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우리 티베트 아니들은 티베트 비구 스님들의 단독 수계를 원합니다.” 일순간 싸한 정적이 원탁을 감쌌다. 하지만 원로들은 놀라운 순발력으로 입장을 재정리했다.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아니들의 자율적인 선택을 지지한다는 쪽으로 선언문을 조정하기로 잠정 합의했다. 막후에서 벌어진 이런 노력을 감안할 때 마지막 날 달라이 라마가 비구니 구족계를 도입한다는 선언을 하리라 기대할 만했고 따라서 실망감이 컸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함부르크에서의 역사적인 모임이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달라이 라마는 종종 스스로를 가리켜 붓다의 제자로서 수행의 길을 가고 있는 평범한 비구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자신은 신비한 능력자도 아니고 앞날을 점치는 도인도 아니라고. 그럼에도 우리는 달라이 라마가 그 지위에 걸맞은 바다와 같이 넓고 큰 권위로써 기적을 일으켜주길 꿈꾼다. 함부르크에서의 경험은 종교적 이상과 현실로서의 종교 조직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한 계기가 되었다. 그 경험의 의미를 달라이 라마와 여성이라는 주제와 관련시켜 몇 가지로 압축해보겠다.
포살, 하안거, 자자는 예비승려인 아니가 비구니로 ‘승격’되기 위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자질을 공고히 다져나가는 과정이다. 또한, 한국 비구니승가에서는 당연시되는 이 세 가지 의식을 티베트불교가 도입한다는 것은 티베트 율장만을 고수하려는 보수적인 견해에 대해 계율의 근본정신을 환기시킴으로써 사분율과의 접점을 찾으려는 노력으로 보인다. 비구니 계맥이 없는 남방불교의 일부 비구 원로들은, 자국에 비구니가 없으므로 비구니계를 주지 못하고, 비구니계를 주지 못하므로 비구니도 존재하지 않는 논리의 악순환을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고수하고 있다. 성격이 조금 다른 예이기는 하나, 우리 역시 조선시대에는 이부승 구족계 수계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1982년 우리는 그 전통을 되살렸다. 자운 대사의 혜안과 원력의 결과이다. 병아리가 껍질을 깨고 나오려고 애쓸 때 어미닭이 외부에서 한 번만 도와주면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달라이 라마가 다른 불교전통에서 비구니계를 받은 이들을 공인했다는 것은 티베트의 수많은 아니들과 보수적인 비구 원로를 대상으로 외부로부터의 변화를 예고하는 동시에 티베트 승단 내부로부터의 개혁을 촉구한 것이다.
티베트 승단의 최고 어른으로서 달라이 라마가 내린 결정은 승가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자 계율인 화합의 정신을 지킨 측면이 있다. 티베트의 정치적인 현실을 고려할 때 급진적인 개혁은 승단 내부의 분열을 초래할 수 있고 이는 더 큰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불교에 비구니계를 도입하고자 많은 노력을 해왔다. 1959년 티베트를 떠난 직후부터 여승의 교육수준을 향상시킬 필요성을 절감하고 승가교육의 개혁에 대한 강한 의지를 표명했다. 그 결과 오늘날 우리는 학승으로 활동하는 아니뿐만 아니라 불교철학 박사에 해당하는 게셰의 지위에 오른 아니도 만나게 된다. 뿐만 아니라 1987년부터 티베트불교계에서는 달라이 라마의 주도하에, 왜 붓다 재세 시에는 존재했던 비구니승단이 티베트에는 없는지, 왜 티베트에서는 비구니 구족계를 주지 않는지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 후속 조치로서 2005년에 달라이 라마는 이 문제를 티베트인들끼리만 논의할 것이 아니라 세계 불교계와 협력해 정식으로 다루어보자는 제의를 했다. 함부르크의 학술대회는 이런 노력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이다. 여승들의 교육 및 수행환경의 개선과 승단 내에서의 지위 향상에 대한 달라이 라마의 의지와 노력은 뚜렷한 일관성을 갖고 실행되어왔음을 알 수 있다.
혹자에게는 변화의 속도가 느려 보일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유념해야 할 사항이 있다. 지난 4월 미국 시애틀에서 열린 북미지역 아시아학회에서 명법 스님이 지적했듯, 각 불교권에서 여승의 지위는 일반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상관관계가 있다. 티베트 아니의 상황은 티베트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떼어놓고 논의할 수 없다. 어느 사회나 그렇듯, 티베트에도 시대를 뛰어넘는 출중한 여성이 있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티베트의 정신사와 예술사, 특히 의학사에는 가부장적인 사회관습으로 볼 때 믿기 어려울 정도의 경지에 이른 소위 예외적인 여성들이 있다. 11세기의 유명한 요기니 마칙 랍드론, 자신의 수행 역정을 자서전으로 남긴 17~18세기의 오르겐 최키와 20세기의 제췬 로첸, 티베트불교 닝마파의 창시에 기여한 7~8세기 수행자 예셰 쵸걀 등이 그들이다. 라토 조모 나모는 전근대기에 티베트 의술의 전파자로 활약했다. 나모를 위시해 많은 여성 의료인들이 구축해놓은 치료와 치유의 전통은 20세기의 여성 명의 칸도 얀가로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극히 일부의 여성을 제외한 대부분의 티베트 여성은 전통적인 남존여비 사상의 지배를 받았다. 붓다의 가르침은 여성들에게 삶과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근본적인 길을 제공했지만, 현실 종교로서의 불교 체제는 종래로부터 내려오던 여성비하적인 관습과 경향을 강화시키는 역할도 했다. 티베트어로 여성을 가리키는 표현인 ‘켸멘’은 ‘미천한 태생’이라는 뜻이다. 11세기 이래 누구나 사용하는 일상어인 이 단어는 악업으로 인해 여자로 태어난 슬픈 운명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또한 티베트 의학은 여성이 남성과 달리 32가지 질병의 저주를 타고났다고 본다. 여성은 신체적으로 열등하다는 관념을 떠받치는 의학 이론인 셈인데, 여기서 32라는 숫자는 붓다의 위대한 32상에 대한 부정적 대칭의 개념이다. 다시 말해 여성성불 불가론을 빗대어 지칭한 것이다. 심지어 여성이 유기견에 비유되기도 한다고 한다.
티베트 사회와 문화를 지배해온 이런 뿌리 깊은 편견에 달라이 라마의 여성관을 투영해보면 선각자로서의 그의 혜안과 열린 면모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출 · 재가를 막론하고 티베트 여성들에게 불교는 종교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종교는 역사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달라이 라마의 여성론을 티베트 사회의 변화라는 관점에서 따져보면 그는 개혁 드라이브를 힘차게 거는 진보적인 리더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대로 서구의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달라이 라마의 여성론에 의구심을 갖는다. 이들은 여성의 신체조건을 근거로 한 남녀의 어떠한 차별도 반대하기 때문이다. 모성과 육아를 강조하는 전통적인 역할구조는 다양한 능력을 지닌 여성을 가사의 볼모로 잡아두기 쉽다. 이 경향은 대부분의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따라서 이들 페미니스트 그룹은 여성의 생물학적 특성과 자애심의 내재적인 연관성을 강조하는 스님의 여성 예찬이 불편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모성을 생물학적 여성성과는 별개로 티베트 종교문화의 상징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면 조금 다른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금강승을 표방하는 티베트불교에서 타라나 다키니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타라는 여성보살로서 해탈의 어머니로 불리기도 하고 자비와 공사상을 구현한 모든 붓다의 어머니로 정의되기도 한다. 이런 이유로 티베트인들에게 타라 신앙은 깊고 널리 퍼져있다. 다키니 역시 밀교에서 여성수행자의 모델이 되는 인물이다. 대장부의 이미지를 강조하는 선불교의 전통에 비해 티베트불교에서는 여성성이 훨씬 더 두드러질 수밖에 없다.
달라이 라마의 여성관은 티베트의 역사와 문화를 바탕으로 접근할 때에 좀 더 다층적인 이해가 가능하다. 스님은 열린 마음의 소유자이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언젠가 새로운 모습의 인간을 탄생시킬 가능성도 흔쾌히 받아들인다. 하지만 우리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다. 불교를 공부해 남을 비판하는 데 쓴다면 무슨 소용인가. 그래서 달라이 라마는 진정한 종교란 친절이라고 가르친다. 이타심이 결여된 현대사회에서 이타심을 일으키기 위해 우리는 이제 남녀평등의 시대를 지나 이미 ‘여성의 시대’로 진입했다고 진단한다. 이 얼마나 신나는 가르침인가.
달라이 라마야말로 진정한 모성의 화신이 아닌가 한다. 자신을 둘러싼 껍질을 깨고 나오기 위해 애쓰는 수많은 여성들을 위해 사랑과 자비의 부리로 함께 껍질을 깨주는 어미새 말이다. ■
이향순 / 미국 조지아대학교 비교문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졸업 후 미국 노스이스턴대학에서 영문학 석사, 펜실베이니아 주립대학에서 영문학 박사학위 취득. 저서로 《비구니와 한국 문학》이 있고, 《동아시아 비구니 연구》가 곧 출간될 예정이다. 《종교와 문학(Religion and Literature)》 《문학/영화 계간(Literature/Film Quarterly)》 등에 40여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현재 조지아대 아시아학센터 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