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소련의 해체와 함께 독립한 카자흐스탄을 30년 가까이 통치해온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전 대통령이 1일 회고록 '나의 인생:의존에서 독립으로'(Моя жизнь:От зависимости к свободе)를 출간했다.
그는 이 책에서 "토카예프 현 대통령을 후계자로 정했을 때, 일부는 반감을 가졌으며, 카자흐스탄 독립을 가장 큰 위기로 빠뜨렸던 2022년 1월의 '유혈 시위'도 (그들에 의한) 권력투쟁의 일환으로 진행됐다"고 되돌아봤다. 또 "토카예프 대통령에게 집권 여당의 당수 자리까지 넘겼을 때, 그제서야 반대자들은 절체절명(絕體絕命)의 위협을 느꼈고, 2022년 1월 '무장 폭동'으로 이어진 것으로 생각한다"면서 그러나 "토카예프 대통령이 2024년 대선에서 승리할 경우, 2029년까지 집권이 가능하고, 반대자들에게는 기회가 사라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모스크바 국제관계대학(므기모) 출신으로 오랫동안 외교관 경력을 쌓아온 토카예프 대통령을 후계자로 지명한 나자르바예프 전 대통령의 결정은 당시 카자흐스탄 안팎에서 의외로 받아들여졌다. 토카예프 대통령은 '무장 유혈 시위'를 러시아 등 집단안보조약기구(CSTO)의 지원으로 진압한 뒤 본격적으로 '나자르바예프 시대'를 지우는 정치개혁을 진행하고 있다.
한국외대 국제지역대학원 러시아-CIS 학과가 매월 발간하는 '러시아CIS 토크' (Russia-CIS Talk)는 2023년 제 12호(2023년 12월 1일자, https://ruscis.hufs.ac.kr)에서 토카예프 대통령의 국정 개혁 문제를 다뤘다. 김시헌씨(박사과정 러시아·CIS 정치 전공)가 쓴 '토카예프 시대의 카자흐스탄, 정치 현대화는 가능한가?'이다. 소개한다/편집자
*본 칼럼은 저자 개인의 의견이며, 바이러시아의 공식 견해와는 무관함을 알려드립니다.
◇ 나자르바예프 시대를 허문 '시민 폭동'
2022년 1월, 독립 이후 처음으로 카자흐스탄에서 실질적인 권력 교체가 이뤄졌다. 견고했던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전 대통령(이하 나자르바예프)의 상왕 체제가 전국 규모의 반정부 시위를 계기로 무너지고, 비로소 카심 조마르트 토카예프 현 대통령(이하 토카예프)의 친정 체제가 출범한 것이다
'엘바시'(Elbasy 국부) 나자르바예프는 집권 30년간 제도적으로 국가의 정치 권력을 사유화하고, 국가 자산을 재국유화한 뒤 국영 기업들의 주요 보직에 친·인척을 앉히는 등 경제 분야까지 독점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스스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2019년 이후에도 후계자 토카예프를 내세워 실권을 행사하는 '수렴청정'식 상왕 체제로 이어갔다.
그러나 2022년 1월 물가 폭등으로 촉발된 대규모 유혈 반정부 시위는 마침내 나자르바예프 시대의 종언을 고했다. 시위대의 화살은 '상왕'인 나자르바예프를 향했고, 토카예프는 이를 차도살인(借刀殺人)의 기회로 삼았다. 토카예프는 시위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나자르바예프를 권좌에서 완전히 축출하고 자신에게 권력을 집중시킬 수 있는 정치 환경을 조성해 나갔다.
소요 사태 이후 실질 권력을 장악한 토카예프는 여러 차례 정치 개혁을 단행하며 새로운 카자흐스탄 건설을 약속하고 있다. 그렇다면 토카예프 시대 카자흐스탄에서의 정치 개혁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가?
2022년 1월 시위대가 나자르바예프 초대 대통령의 동상을 무너뜨리는 장면/텔레그램@belamova 영상 캡처
◇대통령 권한 축소
먼저, 대통령 권한 축소를 지적할 수 있다. 토카예프는 2022년 3월 무장 시위를 진압한 뒤 대국민 담화인 ‘새로운 카자흐스탄: 혁신과 현대화의 길'을 발표했다. 핵심은 카자흐스탄 정치의 현대화로 기존의 초(超)대통령제에서 강력한 의회 국가로의 전환, 인권 보호와 시민 사회 발전 등이다. 같은 해 6월에는 이 담화를 기반으로 헌법을 개정했다.
신헌법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대통령의 인사권 축소다. 우선 대통령이 임명할 수 있는 상원의원 수를 15명에서 10명으로 줄였다. 지방 정부 수장에 대한 대통령의 해임권도 삭제했고, 이들에 대한 임명 역시 지방의회의 동의를 얻도록 했다.
다음으로 여당이 절대다수 의석을 차지하는 데 유리하게 작용했던 하원 선거제도를 개편했다. 기존의 하원의원은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로만 선출됐는데, 이를 지역구 대표와 비례대표를 선출하는 '혼합형 선거제'로 변경했다. 지역구 선거는 소선거구 단순 다수제를 적용해서 국민이 후보자에게 직접 투표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비례대표제는 정당의 의석 배분 기준선을 7%에서 5%로 낮춰 과거보다 군소 정당들의 원내 진입 가능성을 높였다.
◇조기 대선과 총선 시행
같은 해 9월 토카예프는 또 ‘정의로운 국가, 국민 통합, 번영하는 사회'라는 제목의 담화도 발표했다. 핵심은 국가 자본주의를 탈피할 수 있는 구조적인 경제 개혁과 지속적인 정치 현대화 추진으로 요약된다.
이를 위해 토카예프는 재차 개헌과 조기 대선 및 총선을 실시했다. 같은 해 11월 시행된 조기 대선(7년 단임제)에서 토카예프는 압도적인 득표율(약 81%)로 재선에 성공했다. 그러나 2023년 3월 조기 총선에서는 여당의 지배력이 줄어든 반면, 야권의 경쟁력이 높아지는 결과를 보였다.
여당인 아마나트(Amanat)는 전체 의석의 약 54%를 차지했는데, 이는 나자르바예프 체제에서 절대다수 의석을 확보했던 집권 여당(제 6대에서 약 82%, 제 7대에서 약 71% 의석 차지)과는 다른 모습이다. 또 이전 총선에서는 겨우 3개의 정당이 의회에 진출했으나, 이번에는 6개의 정당을 비롯해 7명의 무소속 의원이 원내에 진입하는 등 과거와 다르게 정당 체제의 다원화가 이뤄졌다. 또 반정부 성향의 전국사회민주당(NSDP)이 처음으로 의석을 확보했고, 제 1야당은 악졸(Ak Zhol)에서 아우일(Auyl)로 바뀌었다.
나자르바예프 초대 대통령 자서전/사진출처:fnn.kz
토카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사진출처:대통령 사이트
◇국유 재산 재민영화
특권층의 경제력 독점을 억제하는 조치도 단행했다. 토카예프는 나자르바예프 친·인척들이 독차지한 국영기업(기관)의 주요 요직을 박탈하는 동시에 민영화를 추진하면서 국가가 독점한 경제 자산의 일부를 해체하고 있다. 일례로 나자르바예프의 조카가 보유한 카자흐텔레콤 지분을 몰수했고, 그의 사위들도 각각 상공회의소 회장직과 카즈트란스오일 회장직에서 물러나게 했다.
토카예프는 또 나자르바예프 체제에서 국가자본주의의 상징이었던 카자흐스탄 최대 국영 기업 '삼룩-카지나'의 비효율적이고 투명하지 못한 운용을 비판하면서, 석유가스공사인 '카즈무나이가즈'와 국영 철도회사인 '테미르 졸리', 국영 항공사 '에어 아스타나', 전력공급회사(KEGOC) 등 주요 국영기업의 민영화를 발표했다.
이 밖에 토카예프는 2022년 1월 소요 사태의 피해 복구를 위해 '살리칼리 우르팍 기금'을 조성해 기부 형식으로 여러 경제 엘리트의 자산을 양도받고 있다. 지속 가능한 경제 발전을 위한 조치로 공정한 경쟁과 분배를 강조하는 가운데 중소기업의 육성과 지원도 약속했다.
◇정치 현대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
지난 2019년 대통령직에 취임했던 토카예프는 '국민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정부'(Listening State)를 강조하며 카자흐스탄의 민주화 실현에 강한 의지를 피력한 바 있다. 실제로 그는 실권 장악 후 개헌을 통해 대통령 권력을 분산했고 선거제도 개편을 통해 반대 세력의 원내 진입을 수월하게 했다.
또 나자르바예프 체제에서 국유화했던 국영기업 일부도 재민영화해 국가의 경제 독점도 완화하고 있다. 이렇듯 카자흐스탄의 정치 현대화는 외형적으로, 그리고 점진적으로 진행되어 가고 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민주주의의 공고화가 안정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확언하기는 아직 이르다고 본다. 그 이유는 토카예프가 취한 일련의 정치 개혁 조치들이 정권의 안정을 위해 기존 권력 엘리트들과의 일시적 타협의 산물이거나 공고한 친위체제 구축을 위한 전략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향후 토카예프 체제의 국정 운영을 더욱 세밀하게 주목하고 관찰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