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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일제는 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만은 남겼나?
김부식 (金富軾.1075-1151)이 쓴 ≪삼국사기三國史記≫는 철저하게 당唐나라의 입장에서 서술한 책으로 삼국사기 서술주체가 중국이고, 객체가 한국이다. 우리민족을 침략한 당나라 이세민을 “我唐太宗(우리 당태종)”이라고 칭하였다.
위징 등이 쓴 『수서(隋書)』에 이런 구절이 있다. “고구려(高句麗)가 교오불공(驕傲不恭)해서 제장토지(帝將討之)라.” 고구려가 교만하고, 오만하고, 공손하지 않아서 수양제가 장차 토벌을 하려고 했다는 내용을 삼국사기에는 고구려를 아(我)로 바꿔놓고는 "아(我)가 교오불공(驕傲不恭)해서, 제장帝將, 이걸 상장토지(上將討之)라. 우리나라의 역사를 쓰면서, 우리가 교만하고 오만해서 중국의 임금이 치려고 했다… 는 식으로 쓸 수가 있을까? 참으로 황당한 내용인 것이다.
또 하나 예를 들면, 신라 650년 진덕여왕 4년에 당나라 고종의 ‘영휘(永輝)’라는 연호를 처음 쓴 부분에 대해서도 주석을 달기를, “옛날에 법흥왕이 연호를 스스로 썼는데, 편방의 소국으로서 왜 연호를 쓰나? 당 태종이 꾸지람을 했는데도 연호를 고치지 않다가, 650년에 고종의 연호를 갖다 쓰니, 허물을 능히 잘 고쳤다고 할 수 있도다” 이런 식이다.
이것이 국보로 보존되고 있는, 가장 오래된 우리나라의 역사서에 나오는 구절들이라면 믿을 수 있겠는가. 사정이 이러하니 중국의 입장에서 쓰여진 사대주의 책이라고 비판받아도 피해갈 수는 없는 것이다. 이처럼 "김부식은 비아(非我)적인 입장에서 역사를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묘청, 정지상 등이 고토 회복을 위한 발판으로 벌인 서경천도 운동을 벌였을 때, 김부식을 대표로 하는 집권층 유학자들이 이것을 권력 장악을 위한 음모라고 몰아붙였다.
유교를 국교로 신봉하는 조선은 개국 초 공자의 춘추와 주자의 자치통감 강목만 사필(史筆)로 여기고, 한민족의 고유사서들은 이단이라 하여 모조리 압수 소각하였다. 그의 열렬한 모화(慕華)정신은 사대사관의 전통이 되어 오늘날 우리 역사의 올바른 인식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통해서 존화사대주의 사상을 정립한 것이다. 그가 지은 삼국사기는 그 이후의 모든 역사왜곡의 기본 원전이 되었다. 한국을 점령한 일본제국주의자들도 바로 이 책을 얼씨구나 하고 악용하여 소위 반도사관, 식민사관, 왜식사관을 날조해 낸 것이다. 우리는 지금도 그러한 사관에 따라 학교에서 역사공부를 하고 있다.
불교의 승려 일연 (一然, 1206~1289)은《삼국유사三國遺事》<고조선기古朝鮮記>에서 석유환국昔有桓國 옆에 써 붙인 주석에“위제석야謂帝釋也(불교의 제석을 이른다)”라고 임의로 설명을 붙여 환인천제桓仁天帝가 세운 나라인 환국桓國을 불교의 신, 환인桓因의 왕국과 동일시 하였다. 제석帝釋은 인드라Indra라는 인도 신령을 일컫는다. 제석환인帝釋桓因Sakra-Devanam Indra을 줄여서 제석帝釋 또는 환인桓因이라 부른다. 그런데 환국桓國을 세운 천제天帝가 곧 환인桓仁이다. 비록 ‘인仁’ 자의 한자 표현이 다른지만, 환인천제桓仁天帝를 불교의 신, 환인桓因으로 둔갑시켜 버렸다.
일본이 조선의 뿌리 역사를 제거하기 위해 만든 기관인 조선사편수회에서 조선사 왜곡에 누구보다 앞장선 인물이 바로 이마니시 류(금서룡)이다. <조선사> 편찬의 중심인물이기도 한, 이마니시 류는 1910년 11월에 조선총독부 산하에 ‘취조국’을 두고서, 1911년 12월말까지, 1년 2개월 동안 조선총독부 관보(官報)를 근거로 보면, ‘51종 20여 만 권 정도를 가져갔다’
일제는 강탈한 조선사 문헌을 총체적으로 연구한 끝에 조선의 시원 역사를 말살 할 결정적인 작품을 만들었다. 그가 쓴 <조선고사의 연구>에 의하면, 그것은 바로 [삼국유사]<고조선기古朝鮮記>의 석유환국昔有桓國 옆에 써 붙인 주석, “위제석야謂帝釋也”에 있었다.
[삼국유사]<고조선기古朝鮮記>의 ‘‘석유환국昔有桓國’을 석유환인昔有桓因’으로 뜯어고친 것이다. 이로써 ‘옛적에 환국桓國이 있었다’는 인류 창세사의 건국 이야기를 ‘옛적에 환인桓因이 있었다’는 한낱 신화의 인물사로 바꾸어 버렸다. 국國을 인因으로, 글자 하나를 변조함으로써 한민족 상고사의 첫 번째 나라인 환국桓國을 통째로 지워버린 것이다.
이마니시 류는 석유환국昔有桓國의 국國 자를 因자로 바꿈으로써 환국桓國에서 뻗어나간 배달국과 고조선의 건국자도 허구의 인물로 부정되어 버렸다. 한민족의 7천 년 상고사가 송두리째 뿌리 뽑혀 버린 것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위제석야謂帝釋也(불교의 제석을 이른다)”라는 잘못된 주석에 의존하여 환국桓國을 신화의 역사로 부정한 것에 대해 이마니시 류는 ‘자신은 일연(一然,1206-1289)의 기록을 따랐을 뿐’이라고 변명하였다. 일연을 내세워 자신의 한민족 시원 역사 부정에 대한 알리바이를 세운 그는, 1926년에 ‘석유환인昔有桓因’이라 새겨진 [삼국유사三國遺事]<경도제대 영인본>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들과 한목소리를 내는 이땅의 식민사학자들
일본인들은 1922년 12월 달에 ‘조선사편수회’ 즉, ‘조선사편찬위원회’를 만들어서 1938년까지 본문만 35권이 되는『조선사(朝鮮史)』를 일본인들이 만든다.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한 대표적인 인물 이병도는 今西龍(이마니시류)의 수서관보로 들어가서, 우리 민족의 역사를 왜곡하는 데 일등 공로자가 된다.
이병도의 화려한 약력
1925년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찬위원을 지냈고, 34년 진단학회(震 檀學會) 창립에 참여, 광복 후 서울대학교 교수가 되었고, 52년 서울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54년 서울대학교 대학원장, 학술원 회원이 되었다. 이듬해 국사편찬위원, 56년 진단학회 이 사장, 60년 교육부장관 역임 등. 역사 날조에 앞장섰던 사람이 서울대학교 교수를 거쳐 교육부장관까지 했으니 우리 역사가 해방 후에도 바로잡힐 리가 없다. 그리고 그 밑에서 역사를 배운 후학들은 도대체 어떤 역사를 배웠겠는가? 또 강단 주류학파로 일컬어지는 그들이 지금도 사학계를 주도하고 있다. 과거 친일파들을 청산하지 못한 우리는 이 식민사관의 ‘왜독倭毒’에서 아직도 전혀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 1922년 조선 총독이 조선인을 반일본인으로 만들기 위한 교육 시책
“먼저, 조선사람들이 자신의 일, 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만듦으로써, 민족혼, 민족문화를 상실하게 하고, 그들의 조상과 선인들의 무위, 무능, 악행 등을 들춰내어, 그것을 과장하여 조선인 후손들에게 가르침으로써 조선의 청소년들이 그 부조(父祖;아버지와 조상)들을 경시하고 멸시하는 감정을 일으키게 하여, 그것을 하나의 기풍으로 만들고, 그 결과 조선의 청소년들이 자국의 모든 인물과 사적(史蹟)에 관하여 부정적인 지식을 얻어, 반드시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될 것이니, 그 때에 일본 사적, 일본 인물, 일본 문화를 소개하면, 그 동화의 효과가 지대할 것이다. 이것이 제국 일본이 조선인을 반일본인으로 만드는 요결인 것이다.”
역사를 알아야 하는 궁극적인 이유
역사를 모르면 인간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없다. 역사를 모르면 왜 내가 인간으로 태어났으며, 무엇을 위해 살아야 되는가‘를 알 수 없다. 인생의 희망찬 미래를 열기 위한 진리의 눈을 뜰 수가 없다. 인생사를 대국적으로 볼 수 있는 안목을 여는 지름길이 바로 역사를 아는 데에 달려 있다.
역사란 다름 아닌 인간이 자연환경에 적응하며 지혜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이룩한 문명 진화의 총체이다. 역사를 모르면 미래가 없다. 오늘의 우리는 과거 역사가 만든 작품이기 때문이다. 과거를 모르면 현재를 진단할 수도 없고, 미래를 준비할 수도 없다., 지구촌의 정세를 훤히 꿰뚫어보는 국제정치의 대가라 해도, 인류의 원형 문화와 시원 역사를 모르고서는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문명, 인류의 미래 문명을 알 수도 준비할 수도 없는 것이다.
역사를 가르치지 않는 것은 자식을 낳아 놓고서 성(姓)을 가르쳐 주지 않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지금 한국인은 제 나라 역사도 모르는 정신적 미아로 살고 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진정한 한국인으로 살려면, 한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제대로 알아야 된다.
그 중에서도 한민족의 창세역사와 원형문화를 알아야 한다. 지금 우리는 뿌리 역사는 왜곡되어 잃어버리고 꼬리 역사만 배우고 있다. 우리의 뿌리 역사와 한(韓) 문화의 원형을 확실하게 파악하는 일은 오늘을 살고 있는 한국인 모두에게 무엇보다 소중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