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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9. 묵상글 들 ( 연중 제6주간 토요일. - 세치 혀로.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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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9. 연중 제6주간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세치 혀로
믿음의 실천을 얘기하는 야고보서는 이제 혀를 잘 다스려야 함을 얘기합니다.
"혀는 쉴 사이 없이 움직이는 악한 것으로, 사람을 죽이는 독이 가득합니다."
우리말에도 말을 잘해야 함을 얘기하는 뜻으로
말 한마디에 원수도 되고 천량빚도 갚는다고도 하고,
혀를 굳이 '세치 혀'라고 하여 혀의 짧음을 얘기하며
그러나 그 세치 혀로 큰일을 내기도 하고, 이루기도 하니
세치 혓바닥을 잘 놀려야 한다고 얘기하고는 하지요.
그런가하면 중국말엔 口是禍之門 舌是斬身刀 閉口深藏舌 安身處處宇라는
말이 있는데, 입은 재앙이 들어오는 문이고 혀는 제 몸을 베는 칼이기에
입을 닫고 혀를 깊이 감추어 두면 가는 곳마다 몸이 편안하리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혀는 세치밖에 안 되지만 그 위력이 대단하여
우리는 세치 혀로 한 사람에게 치명상을 입히기도 하고
뒷담화로 한 사람을 매도하거나 매장하기도 하며
감언이설로 남을 속이거나 이간질로 공동체가 쪼개지게도 하고,
다된 밥에 코빠트리듯 기껏 잘해놓고 말 한마디에 일을 망치기도 합니다.
그래서 말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입단속을 잘해야 한다고 하는데
제 생각에 말 실수라는 것이 단순히 입이나 혀의 실수가 아니라
그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의식의 표출이고 그의 됨됨이에서
우러나오는 것이기에 고작 입과 혀를 단속한다고 될 문제가 아닙니다.
본래 단속이라는 말이, 새나가거나 흐트러지지 않도록 묶는다는 뜻인데
그러므로 혀를 묶을 것이 아니라 바른 생각이나 의식이 안에 차게 하고,
더 근본적으로는 올바른 정신을 차린 다음 흐트러지지 않게 해야겠지요.
그것은 안에 있는 것이 밖으로 나오기 때문이며
안에 있는 것은 아무리 단속해도 새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안을 무엇으로 채우고 존재를 어떻게 갖추느냐가 중요합니다.
안이 미움과 악과 독과 썩어빠진 정신으로 가득차 있는 사람은
무엇을 먹어도 남을 해치는 독을 뿜어내는 뱀처럼
독설과 저주와 감언이설과 온갖 쓰레기같은 말을 쏟아내겠지요.
그러나 안이 사랑과 선과 거룩한 정신으로 가득차 있는 사람은
무엇을 먹어도 남에게 이로운 젖을 주는 소처럼
위로의 말,
격려의 말,
치유의 말,
올바른 말,
칭찬의 말,
감사의 말,
축복의 말,
일치의 말로 한 개인과 공동체를 살릴 것이고,
하느님께는
찬미와 감사와 흠숭의 기도를 바쳐드릴 것입니다.
"우리는 이 혀로 주님이신 아버지를 찬미하기도 하고,
또 하느님과 비슷하게 창조된 사람들을 저주하기도 합니다.
같은 입에서 찬미와 저주가 나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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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9. 연중 제6주간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오늘 복음은 장차 있을 예수님의 영광된 모습을 미리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수난을 앞두고 예루살렘으로 떠나기 직전에 세 제자와 함께 산에 오르시어 기도하던 중에 변모를 이루셨습니다.
그런데 변모하신 예수님께서는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시는데, “구름이 일더니 그들을 덮었습니다.”(마르 9,7)
이 구름에 대해 암브로시우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구름은 빗물이 되어 우리를 적시거나 비바람을 쏟는 검은 구름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느님의 음성에서 비롯하는 믿음의 이슬로 사람의 마음을 적시는 빛나는 구름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변화를 이루시는 거룩한 영이 그들을 덮었습니다.
이토록 우리도 변화의 힘을 입었습니다.
이미 그 힘을 입었기에 우리는 변화될 것입니다.
마치 구름이 시나이 산을 덮고서 모세를 영광된 모습으로 변화시켰듯이 말입니다(탈출 24,15-16).
그렇게 구름이 그들을 덮었습니다.
그것은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마리아를 덮었을 때처럼 우리를 덮습니다.
주님의 천사가 마리아에게 말했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루카 1,35)
이토록 우리도 이미 하느님의 힘에 덮인 이들입니다.
이미 빛나는 믿음의 구름에 덮인 이들입니다.
아버지의 그 크신 자비의 구름에 덮인 이들입니다.
아버지께서는 단지 그 힘만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 더하여 더 큰 선물을 선사하십니다.
이제 그 영광된 모습으로 변화할 수 있는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그것을 뒤덮은 구름 속에서 울려오는 음성으로 가르쳐주십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르 9,7)
이는 단지 아들의 신원을 밝혀주신 것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변화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십니다.
곧 그분 앞에서 “그분의 말씀을 들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내가 있어야 할 곳은 그 분 앞에, 말씀 아래에 머무는 일입니다.
들려오는 말씀이 내 안에서 성취도록 말씀께 승복하는 일입니다.
말씀께서 나를 맘껏 쪼물딱거릴 수 있도록 말씀께 자신을 허용하는 일입니다.
그렇게 자신을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초막이 되어 드리는 일입니다.
그렇게 자신을 그야말로 말씀이 이루어져야 할 공간이요 장소로 내어드리는 일입니다.
그러면 사도 바오로가 말한 것처럼, ‘이 건물(초막)은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나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게 됩니다.’(에페 21-22 참조).
그것은 말씀의 힘을 수락하는 일이요, 변화의 힘이신 말씀께 자신을 건네 드리는 일입니다.
자신이 아니라 말씀을 주인 되시게 해 드리는 일이요, 주님을 주님 되시게 해 드리는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변모할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말처럼 “더욱더 영광스럽게 그분의 모습으로 바뀌어 갈 것입니다.”(2코린 3,18)
오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진정 변모되기를 바라는가?
그렇다면 내 아들의 말을 들어라!
진정 거룩해지기를 바라는가?
그렇다면 그의 말을 믿어라!
하느님 되기를 바라는가?
그렇다면 그의 말에 순명하라.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르 9,7)
주님!
말씀 아래에 머물게 하소서.
말씀께 제 자신을 건네 드리게 하소서.
맘껏 쪼물딱거릴 수 있도록 제 자신을 허용하게 하소서.
말씀이 제 안에서 성취되도록 저를 승복하게 하소서.
제 자신이 말씀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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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9. 연중 제6주간 토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약속된 미래를 희망하라」
살아가면서 과거에 연연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는 좋은 일이든 그렇지 않은 일이든 이미 지난일 입니다.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그를 교훈 삼아 오늘을 살아야지 거기에 매여 있으면 더 나은 미래를 만들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선물로 주어진 오늘을 살아갑니다. 물론 오늘의 어려움이 없었으면 하고 바라는 사람도 있지만 오늘의 기쁨을 즐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이 아무리 좋아도 좋은 이순간은 이미 지나가고 있습니다. 과거에 묻히고 맙니다. 그러므로 오늘을 견디고 즐기되 앞을 볼 줄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미래를 살아갑니다. 아직 오지 않은 신비의 세계에 대한 기대와 희망으로 삽니다. 그런 사람은 지금 힘들고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더 나은 미래를 기대하기 때문에 수고와 땀을 거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허황된 꿈으로 말미암아 희망이 절벽인 사람도 있습니다. 따라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연계성을 올바로 인식해야 하겠습니다. 오상의 비오신부님은 과거는 하느님의 자비에, 미래는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고 오늘을 사랑으로 살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에게 당신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마르9,5)하고 말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왜 초막을 만들고 싶어 하였을까요? 지금 순간이 너무도 좋았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는 체험하지 못하였던 황홀함을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모습을 보여준 것은 당신의 수난을 앞두고 당신의 진면목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앞으로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잘 견디라는 위로입니다. 사실 제자들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미래를 희망하며 사는 사람이요, 약속된 미래가 있었기에 목숨을 걸고 주님의 복음을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주님께 대한 좋은 기억을 가지고 ‘거기에 머물렀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좋은 순간이라고 거기에 안주해서도 안 되겠지만 성경이나 신심서적을 읽으면서 느꼈던 마음, 성체조배를 하거나 성체를 모시면서 지녔던 귀한 마음이 우리의 신앙생활을 하는데 힘이 되어야 합니다. 등산을 하면서 산에 대한 아름다움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정상에 오른 사람과 오르지 않은 사람이 분명 다릅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의 체험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기도 하면서 얻은 좋은 기억과 체험이 신앙생활에 활력소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러나 헛된 환상을 추구하지는 마십시오. 기도하는데 촛불이 변하였다든지 성모님 얼굴이 나타났다든지…..그래서 다음에 기도할 때는 그 이상한 현상이 또 나타나기를 기대하는 어리석음에 빠져 마음을 집중하지 못하고 분심에 빠져 기도 아닌 기도를 한다면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부활의 영광으로 이어집니다. 따라서 우리도 부활의 영광을 희망하는 만큼, 이 지상에서 이미 부활의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부활은 미래의 일이지만 오늘 여기서 미래를 살지 않으면 영광의 미래는 없습니다. 오늘 여기서 미래를 희망하고 살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를 위하는 특권, 곧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는 특권을 받았습니다”(필리1,29). 이제 영광의 특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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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9. 연중 제6주간 토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예수께서 거룩하게 변하시다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들으시고 십자가와 부활을 예고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시고 타볼 산에 오르시어 거룩하게 변하시는 모습을 의도적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당신의 얼굴과 옷도 새하얗게 빛나게 변하셨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모세와 엘리야까지 불러내셔서 대화하시는 모습까지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시공을 초월하여 존재하지만 단지 보이지 않을 뿐인 부활의 현실을 눈으로 볼 수 있게끔 보여주심으로써 베드로를 비롯한 세 제자에게 부활의 확신을 심어주시고자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말씀이신 예수님의 참모습이었고, 그분께는 이미 부활의 현실이 드리워져 있음을 깨닫게 하신 것이지요.
말씀이 하느님의 뜻을 담고 있다면, 말에는 사람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마음에 담겨 있던 것이 말이 되어 입 밖으로 나오기 마련입니다. 마음이 담겨 있지 않는 빈 말은 그저 허공을 울리는 소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빈 말을 아무리 많이 해보아야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또 창조된 피조물 세상의 질서를 침묵으로 움직이시는 이치와 대조적입니다.
일찍이 세례자 요한은 군중에게 자신을 소개하기를,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마르 1,3)라고 겸손하게 낮추었지만 사실 그는 말씀을 가리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36). 이처럼 예언자의 말은 말씀을 담거나 가리키는 기능을 수행합니다. 미사 중 영성체 의식에서 사제도 축성된 성체를 신자들에게 보여주며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
이와 마찬가지로, 미사의 강론은 사제의 말로 행하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가리키거나 담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 못한 말은 들은 즉시 사라지고 잊혀져 버립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가리키거나 담고 있으면, 말씀의 힘이 들은 이들로 하여금 영적인 기운을 주어 삶을 변화시키고 현실을 변화시켜 하느님의 질서를 완성시키고야 맙니다.
말씀을 담지 못하고 마음조차 담지 못한 말소리가 저지르는 죄악과 어지러움에 대하여 사도 야고보가 경고합니다. “우리는 모두 많은 실수를 저지릅니다. 누가 말을 하면서 실수를 저지르지 않으면, 그는 자기의 온 몸을 다스릴 수 있는 완전한 사람입니다”(야고 3,2). 이럴 정도로 말씀은 물론 마음도 담지 않은 말은 위험하고, 반면에 하느님의 말씀이나 적어도 마음을 담은 말을 하면 자신을 다스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세 제자 앞에 보여주신 거룩한 변모 상황은 그 자체가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나누신 이야기도 하느님의 말씀에 속합니다. 미사 중 말씀 전례의 상황을 상징합니다. 하지만 도무지 상황이 파악되지 않았던 베드로가 겁에 질려 엉겁결에 입 밖으로 내놓은 말은 빈 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르 9,7) 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 소리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물로 세례를 받으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들려왔던 바로 그 말씀입니다. 바야흐로 새 하늘이 열렸으므로 그분이 새 땅을 창조하고 계심을 상기시켜주는 그런 말씀이었습니다.
결국 거룩한 변모는 미리 보여주는 하느님 나라의 현실이었고, 이를 통해 그 당장에는 알아듣지 못했던 세 제자도 성령을 받은 나중에는 담대한 믿음을 지닌 사도들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을 체포하여 매를 때리고 겁박하는 대사제 앞에서 이렇게 당당하게 말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앞에 옳은 일인지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십시오”(사도 4,19).
그러므로 우리가 하는 말도 말씀을 반영하여 창조적이어야 합니다. 무언가 속된 것을 거룩하게 변화시켜서 새 창조에 이바지하는 기능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또한 우리의 말을 서로에게 전해주는 이른바 언론 기능 역시 창조적이어야 합니다. 그러자면 사실과 진실에 입각해야 하고 거짓을 전하거나 없는 것을 꾸며서 가짜 말을 전해 주어서는 안 됩니다. 미사의 강론에도 언론 기능이 있는데, 그것은 그날 미사의 독서와 복음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가려내어 현실에 맞도록 재구성해서 전달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고 말 같지 않은 소리를 하거나 말이 안 되는 이야기를 해서는 쓸데없는 분란과 갈등만 일으킬 따름입니다. 그러니 말로 이루어지는 우리의 삶이 거룩해지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이상, 말씀과 말과 소리에 관한 묵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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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9. 연중 제6주간 토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요즘 고등학교 다니는 남학생 중에는 이마에 여드름이 나면 학교가 아니라 피부 관리샵에 간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만큼 외모에 신경을 쓴다는 말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가 자신을 온전하게 볼 수 없습니다. 즉, 일부러 거울을 보지 않는 한 자기를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결국 외모에 신경 쓰는 것은 모두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일 뿐입니다. 자기를 위해 피부를 가꾸고, 멋진 옷을 입는다고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다시 말해 남을 위해서 하고 있을 뿐입니다.
군대에 있을 때, 또 신학교에서 기숙사 생활할 때 거의 외모에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남에게 보여 줄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훨씬 자유롭게 살 수 있었습니다.
이타적인 사랑은 필요합니다. 그런데 단순히 보여주기 위한 사랑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보여주기만을 위한 것은 사랑인 척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짜 이타적인 사랑은 다른 사람의 시선보다 주님의 시선에 집중합니다. 사랑의 실천 자체에 기쁨을 얻지, 남의 평가에 기쁨을 얻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과연 어떠하십니까?
예수님께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영광스러운 변모 장면을 보여주십니다. 이를 마르코 복음에서는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라고 전합니다. 태양과 빛의 찬란한 광채는 하느님의 현존을 반영하는 것으로,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하느님의 계시를 받고 얼굴이 너무나 빛나서 사람들이 쳐다볼 수가 없었다는 기사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복음의 예수님 모습은 옷조차도 새하얗게 빛났다고 표현하면서 더 영광스러운 하느님의 광채가 빛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가득한 곳, 그런데 여기에 이스라엘이 가장 존경하는 모세와 엘리야도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베드로가 여기에 지내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예수님 왜 이 땅에 오셨는지를 잊은 것입니다. 인간 구원을 위해 오신 주님의 사명을 잊고, 그냥 영광 안에만 머무르시길 바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였던 세상에 대한 사랑을 완전히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개입하십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르 9,7)
예수님의 사랑은 편한 곳에 머무는 사랑이 아닙니다. 또 보여주기만을 위한 화려한 사랑도 아닙니다. 진짜 사랑은 그들을 위해 기꺼이 십자가를 짊어질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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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옳기만을 바랄 게 아니라 어떻게 틀렸는지 따져봐야 한다. 우리는 늘 틀리기 때문이다(마크 맨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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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9. 연중 제6주간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영화는 우리에게 감동을 줍니다.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보는 것은 영화를 통해서 삶의 또 다른 모습을 보기 때문입니다. 영화에는 멋진 장면들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연인의 극적인 만남, 찬란히 떠오르는 태양, 거센 폭풍우를 헤쳐가나는 배, 비극적인 죽음, 안타까운 이별, 가슴이 벅차오르는 승리, 실패를 극복하고 얻는 성공, 친한 친구의 배신, 이웃을 위한 희생이 영상으로 전해집니다. 어릴 때 ‘혹성탈출’을 보았는데 바닷가에 잠긴 자유의 여신상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군대를 제대하고 보았던 ‘사랑과 영혼’도 기억납니다. 애틋한 사랑과 이별이 주인공의 눈빛에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명량’도 재미있었습니다. 마을을 모두 불태우고 죽으면 살리라며 배에 오르는 모습이 기억납니다. ‘7번방의 선물’도 진한 감동을 주었습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교도소로 간 장애인 아버지와 어린 딸의 이야기였습니다.
저의 삶에도 영화 같은 장면이 몇 번 있었습니다. 어릴 때 길을 잃어버렸고, 파출소에서 하루 밤을 지냈었습니다. 다음 날 아버님께서 저를 찾아 오셨습니다. 그때는 몰랐지만 잃어버린 아들을 찾아온 아버지가 고마웠습니다. 잃어버린 아들 때문에 마음 졸이셨을 어머니께 미안했습니다. 동네 아이들과 연탄재 던지는 놀이를 하다가 눈가에 연탄재를 맞고 병원에 갔던 일도 있습니다.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처음으로 병원에 갔던 기억입니다. 하위권에 머물던 성적이 칭찬과 격려로 상위권으로 올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선생님들도 인정해 주셨고,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졌던 때였습니다. 신학교에 지원을 했고, 합격자 명단에 있는 저의 이름을 보았을 때입니다. 요즘은 인터넷으로 확인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학교에 가서 벽에 붙어있는 명단을 확인해야 했습니다. 10년간의 신학교 생활을 마치고 사제서품을 받았을 때도 기억납니다. 본당에서 첫 미사를 하였고, 31년 시간이 지났습니다. 여러분의 삶에도 영화 같은 순간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하루 그 날과 장소를 떠올려 보면 어떨까요?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마치 영화와 같은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 그리고 요한을 데리고 산으로 오르셨습니다. 산의 이름은 타볼 산입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의 모습은 거룩하게 변모하셨습니다. 구약의 위대한 예언자인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습니다. 저도 성지순례를 가면 타볼 산엘 오르곤 합니다. 분지 위에 우뚝 솟은 산입니다. 그곳에 주님의 거룩한 변모를 기념하는 성당이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얼마나 좋았으면 그곳에 천막을 3개 만들고 지내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가 영광스러운 모습이라면 주님의 십자가는 고통의 순간들입니다. 세상의 죄를 대신해서 지고 가는 십자가입니다. 나의 허물과 잘못을 대신해서 지고 가는 십자가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조롱하였고, 침을 뱉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고 야유하였습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안타까워하셨습니다. 키레네 사람 시몬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지고 갔습니다. 베로니카는 예수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수건으로 닦아 드렸습니다. 지금 내 앞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다면 나는 어떤 모습일지 생각해 봅니다.
오늘 독서에서 야고보 사도는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말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사람을 죽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말은 천 냥 빚을 갚기도 하고, 우리의 말은 싸움을 부추기기도 합니다. 우리의 말은 용기와 위로를 주기고 하고, 우리의 말은 증오와 분노를 자아내기도 합니다. 오늘 하루, 나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주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거룩한 선포가 되면 좋겠습니다. “배가 아무리 크고 또 거센 바람에 떠밀려도, 키잡이의 의도에 따라 아주 작은 키로 조종됩니다. 우리는 이 혀로 주님이신 아버지를 찬미하기도 하고, 또 이 혀로 하느님과 비슷하게 창조된 사람들을 저주하기도 합니다. 같은 입에서 찬미와 저주가 나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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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9. 연중 제6주간 토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늘 새로운 삶의 시작
- 끝은 시작이다 -
어제로서 4박5일의 제주도 성지 순례 여정은 끝났고 오늘 2월19일부터는 또 새로운 삶의 시작입니다. 끝은 시작입니다. 어제 순례 여정 끝날의 기억이 생생합니다. 강정마을 평화센터를 떠나기 전 예정에 없던 그 유명한 민주투사로서 명망을 떨쳤던 문규현 신부의 형인 문정현 신부를 만났습니다.
1940년생 83세 백발의 머리에 하얀 긴 수염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우렁찬 목소리에 쾌활하고 순수한 청년처럼 느껴지는 모습이 참 인상적이라 즉시 함께 사진도 찍었습니다. 소문에 듣던 바와는 달리 강인하면서도 45각도로 인사할 만큼 부드럽고 겸손한 분이었습니다. 귀한 손님인 수도자들이 왔다고 참 반가워하였습니다.
이어 오전 순교복자 수도회 면형의 집에 잠시 들렸습니다. 뒤에 병풍처럼 한라산을 배경으로 한 수도원이었고 안내한 강홍림 사도 요한 형제는 여기가 제주도에서 최고의 명당이라 극찬했습니다. 인상적인 것은 약 250년 수령의 한국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나무로 추정되는 거대한 녹나무였습니다. 척박한 땅이나 바위틈에서도 잘 자라는 녹나무는 제주도민의 기질과 신앙을 닮았다 했습니다. 이어 성전에서 본 제주도 천연의 바위 제단이 신비로웠습니다.
눈덮인 설경을 배경으로 한 한라산을 드라이브 하며 한라산을 감상했습니다. 입춘을 지난 제주도에서 눈덮힌 잡목 우거진 한라산의 설경이 참 정답게 느껴졌습니다. 제주도 중심에서 사방으로 넓게 완만한 경사로 펼쳐진 거대하게 자리잡고 있는 한라산(해발1947m, 불암산508m)은 남한에서 제일 높은 산이라는 가이드의 설명이었습니다. 한라산을 감상으로 4박5일의 순례 여정을 끝내고 무사히 수도원에 귀원했고, 하느님께서 함께 해 주셨음에 감사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산위에서의 영광스러운 변모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 도상에서 최측근 제자들인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따로 데리고 산에 오르시어 특별 피정 지도를 하십니다. 당신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부활의 영광을 앞당겨 체험케 하심으로 사기를 붇돋워 주심을 의도했음이 분명합니다.
흡사 4박5일의 제주도 성지 순례 피정 분위기와 흡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리 제주도 순례 피정이 좋다해도 평생 머물수는 없고 내 삶의 제자리로 돌아와야 하듯 제자들 역시 예수님의 변모 신비 체험에 집착하지 않고 십자가의 길, 제자리로 돌아왔어야 했지만 베드로는 순간 착각하여 이에 집착했음이 분명합니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베드로의 간청에 앞서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를 나눴다는 장면에서 ‘아. 예수님은 시공을 초월하여 이분들과 영적친교를 나누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사실 베네딕도 16세 교황도 성 아우구스티누와 성 보나벤투라를 스승으로 모시고 영적 친교중에 산다는 내용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습니다. 잠시 뜻밖의 황홀한 신비체험에 흥분한 베드로에게 천상에서 들려 오는 하느님의 음성입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다시 십자가의 길, 제자리로 돌아가 주님 말씀에 순종하며 새롭게 살라는 말씀이겠습니다. 예수님은 물론 나머지 세 제자들은 분명 하느님의 특별 은총으로 산상에서 신비로운 부활의 영광을 앞당겨 체험함으로 용기백배했을 것입니다.
이런 피정을 통한 신비체험이,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 신비 은총이 우리를 알게 모르게 정화하고 성화합니다. 특히 수도원 입회후 40년만에 처음이었던 이번 수도형제들과 함께 한 제주도 성지 순례 여정 피정 은총은 알게 모르게 수도 공동체를 정화하고 성화했음을 믿습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이 우리의 모든 수행을 통한 주님의 정화은총, 성화은총이요, 이런 은총이 우리의 말도 글도 행동도 습관도 공동체도 정화하고 성화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야고보 사도의 말조심, 혀의 절도에 대한 열렬한 말씀이 깊은 울림을 줍니다.
“누가 말을 하면서 실수를 저지르지 않으면, 그는 자기의 온몸을 다스릴 수 있는 완전한 사람입니다. 말의 입에 재갈을 물려 복종하게 만들면, 그 온몸을 조종할 수 있습니다. 혀도 불입니다. 혀가 우리의 지체 가운데에 들어앉아 온몸을 더럽히고 인생행로를 불태우며, 그 자체도 지옥 불로 타오르고 있습니다. 사람의 혀는 아무도 길들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혀로 주님이신 아버지를 찬미하기도 하고, 또 이 혀로 하느님과 비슷하게 창조된 사람들을 저주하기도 합니다. 같은 입에서 찬미와 저주가 나오는 것입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이래서는 안됩니다.”
이래서 혀끝, 손끝을 조심하라는 말도 있습니다. 혀를 다스려 말 잘 하기는 얼마나 힘든지요! 이래서 아가톤 사막교부는 침묵을 배우기 위해 3년동안 입에 재갈을 물고 살았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마음이 좋아야 말도 글도 행동도 좋습니다. 혀의 말에 앞서 우선적인 것이 마음의 정화와 성화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말씀을 사랑하여 맛들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요! 주님 말씀을 사랑하여 맛들일수록 우리 마음과 말의 정화와 성화도 저절로 이뤄지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매일의 미사 신비 은총으로 우리의 마음을 정화하시고 성화하시어 우리 모두 깨끗하고 거룩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다음 화답송 시편 말씀이 적절하고 은혜롭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순수한 말씀, 흙도가니 속에서, 일곱 번이나 정제된 순은이어라. 주님, 당신이 저희를 지켜 주시고, 이세대로부터 영원히 보호하소서.”(시편12,7-8).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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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9. 연중 제6주간 토요일.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 제자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셔서 그들 앞에서 거룩하게 변모하십니다.
엘리야와 모세도 그분 곁에 나타납니다.
베드로는 이 놀라운 장면을 보고서 그들에게
초막을 지어 드리겠다고 제안합니다.
뜬금없는 말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사실 베드로의
이 제안은 이스라엘의 초막절 배경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보호 아래 광야에서 지냈던 천막생활을
기억하는 초막절은, 마지막 때가 오면 하느님과 함께 영원한
초막에서 살게 되리라는 종말론적인 기대도 반영하는 축제였습니다.
이제 베드로가 왜 초막을 짓겠다고 하였는지 이해가 됩니다.
베드로는 자기 눈앞에서 펼쳐지는 눈부신 광경을 보고
지금이 바로 그 종말의 때임을 직감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과 영원히 함께 머무를
초막을 지어 드리겠다고 제안한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놓친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메시아가 필연적으로 겪어야 할 수난을
강조하셨는데(마르 8,31 참조), 종말의 때에
이르기는커녕 아직 수난의 때도 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눈앞의 놀라운 광경에 정신이 팔려 이를 잊었던 모양입니다.
이미 한 번 심하게 꾸지람을 들었음에도(마르 8,33 참조)
여전히 수난과 십자가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그의 머릿속에
깊이 새겨지지 않은 모습을 보며, 베드로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도 이 가르침을 멀리하고 싶은 유혹이
얼마나 강하게 자리 잡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십자가 없이 영광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높은 산에서 드러내신 영광은 수난의
여정 끝에 궁극적으로 맞이할 부활의 영광을 미리 보여 주는 것입니다.
곧 십자가의 승리를 암시하는 것이지요.
오늘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를 묵상하며, 그분께서 초대하신
십자가의 길이 결국 패배가 아닌 승리의 여정이라는
우리의 확신을 더욱 굳건히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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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9. 연중 제6주간 토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제자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시었다.
오늘 복음의 배경은 하느님이 모세에게 시나이산에서 나타나신 발현(탈출 24장)과 비슷하다. 엿새(탈출 24,16: 이레째 되는 날), 높은 산(탈출 24,15), 동반자 셋(탈출 24,1.9), 구름에서의 소리(탈출 24,16) 등은 예수께서 이미 초월자라는 것이다. 또한 묵시문학적인 것도 있다. 즉 모습이 변한다든지(다니 12,3; 1코린 15,42-56), 옷이 빛나고 희다든지, 즉 하느님(다니 7,9)과 천사들(마르 16,5; 사도 1,10)이 흰옷을 입고 있으며, 종말에 부활할 의인들도 빛나는 옷을 입으리라고 한다. 이것은 예수께서 종말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다. 유다교에서는 헤녹과 엘리야가 죽지 않고 승천하여 하늘에 산다고 보았다. 모세에 대해서도 같은 생각을 한 것 같다. 그러므로 여기 모세와 엘리야는 천상적인 존재로서 변모하신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변모는 십자가의 죽음의 여정을 시작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예시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영광은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야 비로소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명백히 깨달았다. 우리도 이 미래의 영광을 기대하고 지향해 가면서, 삶의 어두운 나날들에 의미를 부여하도록 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그 영광은 고통과 시련의 시기를 생략할 수는 없다. 베드로가 엉겁결에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5절) 하고 소리치는 것처럼 그 시기를 뛰어넘을 수는 없다. ‘영원한 초막’에 거처하여야 할 분들을 현세적인 초막에 머무르게 하려는 것은 베드로가 아직 그분의 십자가를 통한 영광은 보지 못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제 이 찬란한 변모의 의미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있다. 우선은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4절)와 구름 가운데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7절)는 소리다. 구약의 위대한 두 인물은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단계적으로 그리스도에게서 완성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즉 구약성경의 이 두 인물은 그리스도와 함께 마지막 때가 도래하는 그 순간에 실현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구름 속에서 들려오는 아버지의 말씀은 십자가를 향해 가시는 예수가 누구인지를 계시해주는 말씀이다. 즉 사도들에게 그 신비를 이해하고 구원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라는 권고이다. 갈바리오 위에서 예수께 일어날 사건은 바로 그분이 하느님한테서 나오셨다는 것에 대한 증명이다. 하느님의 마음을 닮은 사람만이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할 수 있다, 십자가 밑에 있던 백인대장이 고백한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15, 39)라는 오늘 아버지의 말씀의 반향일 것이다. 이러한 신앙고백을 우리도 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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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9. 연중 제6주간 토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마르 9, 2)
삶의 모든
시간은
변화의
시간이다.
이제 머지않아
메마른
겨울 가지에서
봄꽃이 가득
피어날 것이다.
믿는 것을
실천하는
변화의
시간이다.
변화는
수난을
동반한다.
수난을 통해
비로소
맞이하는
변화의 삶이다.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변화의 기쁨이다.
복음은
참된 변화를
보여준다.
먼저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변화이며
십자가를
지고 가는
변화이며
십자가를 통해
드러나는
사랑의 신비이다.
변화의
생명력은
실천에서 온다.
이 모든 것은
수난을 통하여
변화된다.
수난을
받아들이는 것이
거룩한 변모의
시작이다.
십자가가
변화이다.
사랑은
참된
실천이다.
변화의 여정에
너와 내가 있다.
십자가는
땅에서
시작하지만
하늘을 향한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람임을
가르쳐준다.
변화는
초막을 짓지
않는다.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로
나가는 여정이다.
광야의 여정을
거치고
십자가의 여정을
거치는 것이다.
예수님과 십자가
사람과 십자가를
깨닫는 것이
거룩한 변모의
울림이다.
하느님 사랑으로
십자가가 탄생한다.
십자가가 우리를
빛나게 한다.
십자가가
모든 은총의
핵심이다.
그 십자가를
당신 여정으로
보여주신다
십자가가
삶의 정중앙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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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9. 연중 제6주간 토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영원한 것을 찾아 내려가는 행복한 발걸음 ♣
“사람의 아들이 많은 고난과 멸시를 받으리라는 것은 무슨 까닭이겠느냐?”(마르 9,12)
예수님께서는 당신은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고백을 받으셨을 때 수난을 예고하셨습니다. 이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여정을 시작하시면서, 산 위에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에게 놀라운 변모를 보여 주시고, 예언자들과 당신의 영광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시며 수난을 되새겨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거룩한 변모를 통해 그분의 수난과 죽음이 그 자체로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영광으로 이어져간다는 확신을 제자들에게 심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이 변모사화는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지상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길을 철저히 걷도록 오늘도 우리를 격려하고 재촉합니다.
육신을 지니고 시간과 공간의 제약 속에 살아가는 우리는 전부를 보지 못하고 고통 앞에 절망하며 세상과 타협해버리기도 합니다. 총체적인 시각을 지니지 못하고 늘 불완전 속에 살아가 것이 모든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실존이겠지요. 그러나 하느님의 자녀요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간다면 그 폭을 넓혀가야 하고 멀리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거기에 영적 성숙과 행복으로 가는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삶을 단편적으로 보거나, 일정한 시간과 장소에 매이지 말고, 영원을 향한 긴 여정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눈앞의 일과 사람, 당장 벌어지는 사건들에 휘둘려 변덕을 부리지 말고, 그 안에 숨겨진 하느님의 뜻을 알아보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한시적인 안에서 영원을 볼 수 있어야 하고, 영원의 눈으로 눈에 보이는 것들을 보고 받아들여야겠지요.
당장 겪는 아픔과 삶의 고통이 극심한 때에도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잊어선 안 될 것입니다. 수난 없는 부활이 없고, 고통 없이 참 기쁨을 체험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삶을 영원을 향한 순례로 받아들인다면 한결 여유가 생기겠지요. 결국 눈에 보이는 것을 바라보되 결코 속지 않고, 그것이 전부라 착각하지 않으며, 세상 안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느라 하느님을 잊어버리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수난과 부활을 사는 우리는 육(肉)의 정신을 버리고, 복음과 영에 따라 천상의 것을 추구합니다. 거룩한 말과 착한 행실을 통하여 높이 오르는 사람이 변모하신 주님과 일치하는 행복한 사람이지요. 따라서 제자들처럼 주님의 빛나는 모습에 정신이 팔려 황홀한 산 위에만 머물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부활의 영광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산 아래, 바로 내가 살고 있는 삶 한복판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힘든 일을 겪거나 불편한 사람을 만날 때 거짓 초월이나 감성적 충만함을 주는 거짓 신비의 세계로 도망 가 자신을 합리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고통과 시련은 ‘겪어냄으로써’ 기쁨으로 바뀌어 되돌아오지요. 그러니 고통 없는 행복을 바라거나 세상이 주는 만족과 풍요에 안주하며 넋을 잃지 말고, 영원을 갈망하며 산 아래로 내려가야 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가르침을 새겨봅시다. "저 아래로 내려가서 고생하고, 섬기고, 멸시받다가 십자가에 못 박히십시오. 생명이신 분이 죽임을 당하기 위하여 내려오셨고, 빵이신 분이 배고픔을 느끼기 위해서 내려오셨으며, 생명이신 분이 긴 여정의 피로를 느끼고자 내려오셨고, 샘이신 분이 목마름을 느끼기 위해서 내려오시지 않았습니까? 그대 자신의 이익을 찾지 마십시오. 그대 사랑을 지니십시오. 그리고 진리를 선포하십시오. 그러면 마침내 평화가 깃든 영원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설교집 7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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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9. 연중 제6주간 토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제 특기는 상처받는 것입니다. 제 취미는 그 상처를 극복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마르코 복음 9장 2~3절)
타볼 산 위에서 제자들이 목격한 예수님의 변모 사건을 묵상하며, 오늘 우리에게도 그러한 변모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합니다. 그냥 변모가 아니라 예수님처럼 ‘거룩한 변모’입니다.
변모, 변화, 성장과도 같은 부담스런 개념 앞에 우리는 너무나 쉽게, 그리고 빨리 포기합니다. 뿐만아니라 지극히 회의적이고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원판불변의 법칙’을 굳게 믿으며, 인간은 죽었다 깨어나지 않는 이상 안 바뀐다고 부르짖으며, 자신은 물론 이웃들의 변화, 교회와 세상의 변혁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합니다.
이런 우리 앞에 예수님의 생애는 참으로 큰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예수님께서는 평생토록 변모, 변화, 성장, 이동을 위한 노력을 그치지 않으셨습니다. 공생활 기간 내내 절대 한곳에 오래 머물지 않으시고, 떠나고 또 떠나셨습니다.
권능에서 무능으로. 강함에서 약함으로, 창조주에서 피조물로, 위대함에서 작음으로, 자립에서 종속으로, 이러한 하느님의 이동은 아들 예수님의 이 세상 육화강생을 통해서 결정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한계와 제약을 지닌 나약한 인간인지라, 쉽게 우리 자신에게 씌워진 굴레를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마치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열심히 움직이지만, 늘 제자리를 맴돌고 있습니다. 상처와 고통을 온몸에 지고 말입니다.
어느 영화 명대사가 오래도록 제 마음에 남아있습니다. “제 특기는 상처받는 것입니다. 제 취미는 그 상처를 극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지상에 두 발을 딛고 사는 이상 어쩔 수 없이 안고 가는 갖은 상처와 고통, 좌절과 실망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변화와 성장, 또 다른 한 걸음 내딛기를 결코 포기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거룩한 변모는 그 사건 자체를 뛰어넘어 마지막 부활을 향하여 나아감을 상징적으로 가리킵니다. 그때에는 하늘나라에서 정화된 신자들이 눈처럼 하얗게 될 것입니다. 그분은 당신의 옷인 교회를 육과 영의 모든 더러움에서 깨끗하게 해주시고 더 나아가 영원한 축복과 육과 영의 빛으로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존자 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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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9. 연중 제6주간 토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우리도 그리스도처럼 변모할 수 없을까?: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높은 산에 오르시어 당신의 모습이 변모하시는 내용입니다. 이 변모의 핵심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야기의 흐름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처음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이 누구라고 여기느냐고 묻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셔야 한다는 말씀을 하실 때 베드로는 그러면 안 된다고 해서 사탄이라고 혼쭐이 납니다.
그러시며 목숨을 구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복음 때문에 목숨을 버리는 사람은 다시 얻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리스도가 되는 데 필요한 것은 복음을 위한 십자가 죽음입니다.
그리고 이야기의 주제는 ‘하느님의 나라’로 바뀝니다. 예수님은 그곳에 있는 사람 중에 하느님의 나라를 볼 사람이 있을 것이라 하십니다. 그러며 오늘 변모 이야기가 이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변모는 하느님 나라가 되시기 위해 십자가의 죽음을 거쳐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되는 것이 인간의 모습에서 하느님의 모습으로 변모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느님 나라가 될 수 없고 변모할 수 없을까요? 당연히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는 이유는 바로 모세와 엘리야를 당신 제자들에게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베드로는 천막 셋을 짓겠다고 말하는데 이는 삼위일체의 구원 신비를 나타냅니다. 혼자 세상을 창조하시거나 혼자 구원하실 수 없습니다. 하느님 아버지는 마치 모세와 엘리야처럼 양손으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모세는 율법을 주었기에 진리인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엘리야는 하늘에서 불, 곧 은총을 불러 내리고 그 불에 휩싸여 하늘로 갔기에 성령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오늘 그리스도께서 마치 아버지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 은총과 진리를 제자들에게 쏟아 부어주시는 삼위일체 상징을 보는 것입니다. 내 안에 이 삼위일체 신비가 이루어질 때 내가 하느님의 나라가 되고 하느님의 모습으로 변화됩니다.
『기적은 당신 안에 있습니다』는 미국 존스 홉킨스 대학 재활학과 의사인 이승복 씨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여덟 살 때 부모님을 따라 미국에 이민을 와서 열한 살 때부터 배운 기계체조로 모국에 대한 그리움을 극복하고 있었습니다. 매우 놀라운 속도로 기량이 향상되어 올림픽 금메달을 바라볼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고난도 기술을 연습하다 턱이 먼저 바닥에 떨어져 척추 신경조직이 손상되어 사지 마비라는 죽음과도 같은 선언을 받습니다. 그는 9개월 동안 병원에서 겨우 손가락 구부리는 훈련만 받았습니다. 재활 훈련보다 더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인생의 꿈이 사라진 것이었습니다.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난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한 선교사가 “하느님은 각자의 사람에게 각자에게 맞는 계획을 세우고 계십니다”라고 하는 말을 듣습니다. 그는 “이 시련도 그 계획의 일부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이겨낼 수 없는 시련은 주시지 않습니다”라고 말해줍니다. 분명 그에게서 말뿐이 아닌 진심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는 ‘그렇다면, 지금 주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은?’이란 생각을 품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돕고 싶은 마음이 샘솟았습니다.
‘그래, 이 시련은 나와 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을 도우라고 주님께서 주신 메시지야. 나는 의사가 되어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돕겠어!’
부모님은 그런 몸으로 어떻게 의사가 되겠냐며 말렸지만, 그의 확신은 누구도 꺾을 수 없었습니다. 휠체어를 타고 몇 개만 움직일 수 있는 손가락으로 끊임없이 재활을 병행하며 그는 다트머스 의대를 수석으로 졸업합니다. 하버드 의대의 인턴과정도 수석으로 마치고 미국 최고의 존스홉킨스대 병원 재활의학과 수석 전문의가 됩니다.
그는 의사가 되어 겨우 눈만 깜빡일 수 있는 절망적인 아이에게 자신이 터득한 진리를 이렇게 나눕니다.
“너 내가 휠체어에 있는 것 보이지? 나는 체조 선수였어. 예전에 한국 대표로 세계에서 뛰었어. 올림픽을 위해 연습하다가 넘어져서 목이 부러졌어. 그렇다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못 하고 그러고 싶진 않았어. 나는 너 같은 사람들을 돕고 싶어. 그래서 내가 네 앞에 있는 거야. 너도 똑같이 할 수 있어. 하느님과 널 사랑해주는 가족과 많은 사람이 네 곁에 있고 세상에서 제일 좋은 의사 선생님들이 너를 돕고 있어. 계속 믿음을 가지고 열심히 해나가자. 알았지?”
오늘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당신 죽음으로 터득한 십자가 진리를 모세라는 상징으로 제자들에게 보여주는 것과 같습니다. 진리는 먼저 죽지 않았다면 나올 수 없는 진실입니다. 이승복 씨가 먼저 그 고통의 길을 가지 않았다면 그가 하는 힘내라는 말은 진리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도 먼저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셨기 때문에 당신이 말씀하시는 십자가의 길이 우리에게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또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한 번은 꽃게를 생으로 무쳐 먹었다가 식중독에 걸려 간 이식 수술을 받고, 왼쪽 다리까지 잘라내어 절망에 빠져있던 한 한국인 아주머니를 만납니다. 김치를 조금만 먹으면 속이 시원해질 것 같겠다는 그 아주머니의 말 한마디에 다음날 어머님께 부탁한 김치볶음밥을 도시락으로 싸 와서 아주머니에게 전달해 줍니다. 아주머니는 이렇게 말합니다.
“수술 이후로 ‘어떻게 하면 빨리 죽어버릴까?’ 그 생각만 했는데, 김치볶음밥을 먹고 나니, 이 맛있는 걸 두고 내가 왜 죽나 하는 생각이 드네. 이제 안 죽을래요. 닥터 리도 휠체어 타고 이렇게 멋지게 살고 있는데, 나도 그렇게 살아봐야지!”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며 환하게 웃었습니다. 몇 주 후 아주머니는 한쪽 다리에 의족을 하고 씩씩하게 퇴원했습니다. 퇴원하는 날 아주머니는 닥터 리를 찾아와서 어머니께 갖다 드리라며 찹쌀떡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닥터 리가 내어준 은총입니다. 은총은 죽어서 흘려주는 피와 같습니다. 그는 굳이 어머니를 괴롭히며 김치볶음밥을 얻어냅니다. 그리고 그것을 꼭 필요한 누군가에게 내어줍니다. 그 안에 담긴 것은 사랑입니다. 마치 엘리야가 하늘에서 불을 내려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해준 것과 같습니다. 사랑과 결합하지 않는다면 어떤 말이 진리라고 할지라도 아무 힘도 발휘하지 못합니다.
이런 면에서 십자가의 길로 나아가시는 예수님의 변모는 곧 아버지의 모습을 닮아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당신과 성령으로 우리를 구하시는 것처럼 이제 당신이 아버지의 모습으로 모세와 엘리야를 통해 우리를 살리십니다.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나왔는데, 피는 예수님의 살과 함께 진리를 상징하고 물은 성령의 은총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모두가 죽어서 옆구리가 찔려야만 나오는 창조의 두 은총입니다. 우리는 은총에 은총을 입어야만 재창조됩니다.
우리가 주님의 기도에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라고 하는데,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빛나게 하는 일은 아버지의 일이 옳았음을 증명해내는 것입니다. 그 방법은 내가 아버지처럼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은총과 진리를 흘려보내 주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아버지의 명예가 회복됩니다. 그리고 나의 변모는 그런 삶을 살았을 때 주님께서 부활시켜 주실 때 완성됩니다. 그럼으로써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부활까지 이 모든 사실을 말하지 말라고 당부하신 것입니다.
오늘 하필 왜 세 명을 데리고 올라가셨을까요? 그들이 또한 아버지와 아드님과 성령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야고보는 사도 중 첫 순교자입니다. 아버지의 첫 피 흘림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은 복음을 쓴 사람입니다. 아버지의 피 흘림으로 오시는 진리를 상징합니다. 베드로는 하느님 나라 열쇠, 곧 죄를 용서하는 권한인 성령을 상징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이 세 명이 또한 삼위일체 신비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도 십자가의 신비로 은총과 진리를 내어주어 변모를 기다리는 신비를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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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9. 연중 제6주간 토요일. 이재을 사도요한 신부님.
연중 제 6 주간 토요일-묵상과 기도
야고보 사도는 혀를 조심하라. 혀를 다스려라.고 한다. 혀는 주님이신 아버지를 찬미하기도, 하느님의 창조인 사람들을 저주하기도 한다. 같은 입에서 찬미와 저주가 나온다. 혀가 몸을 더럽히고 인생 행로를 불태운다. 하였습니다.
마르코 복음에서 예수님은 세 제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십니다. 그곳에서 그분이 새하얗게 변화하고 빛났으며, 구름이 일어 그들을 덮고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타볼산의 예수님의 찬란함. 그리스도의 영광의 순간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장면을 당신의 죽음 후 부활 때까지 말하지 마라. 고 하였습니다.
회상과 성찰
지난 시간을 되돌아봅니다. 지난 시간 동안 걸어온 길. 자리, 만남을 회상합니다. 나의 모습을 깊이 바라봅니다.
-. 3분 동안. 지난 현장을 더 깊이 바라봅니다. 나와 이웃과의 만남, 대화, 일, 사건 등 그 경과와 결과를 구체적으로 바라봅니다.
-. 내 안에 살아계신 주님, 자비하신 그분의 현존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듣습니다.
-. 선과 진리, 사랑과 자비 기준으로 나의 허약함과 허물, 그릇됨과 악습 등을 바라 봅니다. 회개와 개선, 결심 등 복음적 실행을 묵상합니다.
-. 감사의 마음으로 다짐과 실천을 기도로 바칩니다.
말씀 묵상
나의 형제 여러분, 많은 사람이 교사가 되려고 하지는 마십시오. 여러분도 알다시피, 우리는 엄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많은 실수를 저지릅니다. 누가 말을 하면서 실수를 저지르지 않으면, 그는 자기의 온몸을 다스릴 수 있는 완전한 사람입니다.
말의 입에 재갈을 물려 복종하게 만들면, 그 온몸을 조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배를 보십시오. 배가 아무리 크고 또 거센 바람에 떠밀려도, 키잡이의 의도에 따라 아주 작은 키로 조종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혀도 작은 지체에 지나지 않지만 큰일을 한다고 자랑합니다. 아주 작은 불이 얼마나 큰 수풀을 태워 버리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혀도 불입니다. 또 불의의 세계입니다. 이러한 혀가 우리의 지체 가운데에 들어앉아 온몸을 더럽히고 인생행로를 불태우며, 그 자체도 지옥 불로 타오르고 있습니다.
온갖 들짐승과 날짐승과 길짐승과 바다 생물이 인류의 손에 길들여질 수 있으며 또 길들여져 왔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혀는 아무도 길들일 수 없습니다. 혀는 쉴 사이 없이 움직이는 악한 것으로, 사람을 죽이는 독이 가득합니다.
우리는 이 혀로 주님이신 아버지를 찬미하기도 하고, 또 이 혀로 하느님과 비슷하게 창조된 사람들을 저주하기도 합니다. 같은 입에서 찬미와 저주가 나오는 것입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이래서는 안 됩니다. 야고 3,1-10
그때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그때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제자들이 모두 겁에 질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에 구름이 일어 그들을 덮더니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그 순간 그들이 둘러보자 더 이상 아무도 보이지 않고 예수님만 그들 곁에 계셨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그들은 이 말씀을 지켰다. 그러나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저희끼리 서로 물어보았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율법 학자들은 어째서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과연 엘리야가 먼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는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많은 고난과 멸시를 받으리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이겠느냐?
사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엘리야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가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제멋대로 다루었다.” 마르 9,2-13
실천
우리의 일상에서 그리스도 예수님의 은혜를 경험합니다. 주님께 고마움과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일상의 상당 부분에서 그분의 열정과 뜨거움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감사와 고마움의 자리에 찬양하지만, 그 외의 시간에 건조하거나 의미를 놓치고 맙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주님과 함께 다니며 그분에 대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런 믿음에서도 그들은 주님의 찬란한 모습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그분의 말씀과 치유와 기적을 경험하면서도, 그것이 그들의 일상이었지만, 그분에 대한 찬양이 미흡했습니다. 그들은 타볼산의 예수님의 찬란한 변화 속에 그분의 영광을 경험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를 만났고, 그들은 겁에 질려 있었고 초막 셋을 짓자고 하였고 구름 속에서 "내가 사랑하는 아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하는 소리도 들었습니다. 이런 영광스런 모습을 경험하였습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인으로서 그 영광스런 모습을 종종 경험합니다. 그런 경험에서 그 감사와 찬탄을 드립니다. 그 찬탄과 감사가 잠시라 하더라도, 주님의 수난과 십자가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죽음 후 부활의 영광스러움과 연결됩니다. 주님의 영광과 찬탄의 길은 그분의 수난과 십자가와 그리고 부활의 역사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그 십자가의 수난을 수락하고, 동시에 부활의 영광, 그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마침 기도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을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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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9. 연중 제6주간 토요일. 김 로마노 형제님.
연중 제6주간 토요일 제1독서 (야고3,1-10)
"나의 형제 여러분, 많은 사람이 교사가 되려고 하지는 마십시오. 여러분도 알다시피, 우리는 엄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1)
야고보서 3장 1-12절은 올바른 신앙생활에 필수적인 혀의 올바른 사용에 대해 집중적으로 진술한다.
야고보는 1장 26절 "누가 스스로 신심이 깊다고 생각하면서도 제 혀에 제갈을 물리지 않아 자기 마음을 속이면, 그 사람의 신심은 헛된 것입니다." 에서 짧게 언급하였던 성도(聖徒)의 바른 언어생활에 대한 주제를, 이제 본 장에서 구체적으로 새롭게 전개시켜나간다.
먼저, 야고보는 언어생활에 관한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충고를 부정적인 측면에서 하는데, 우선적으로 <교회안의 교사>에게 적용시킨다.
'교사'로 번역된 '디다스칼로이'(didaskaloi)의 기본형은 '디다스칼로스'(didaskalos)인데, '가르치다'(마태4,25)란 뜻의 동사 '디다스코'(didasko)의 명사형으로, 글자 뜻대로 '가르치는 자'를 의미한다.
아마도, 당시에는 교사 직분을 많은 사람들이 선호했으며, 따라서 교사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가르치는 자로서 소양과 자질이 부족한 교사가 됨으로써, 교회 안에 잘못된 가르침이 많아지고, 가르치는 자가 모범이 되지 못하는 등 다양한 문제가 발생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야고보는 가르치는 직분을 가진 자들 및 그 직분을 탐내는 자들에게 주의 깊은 경고를 주고 있는 것이다.
가르치는 자(교사)는 하느님께서 교회 안에 세우신 이들 중에 사도들과 예언자들 다음, 세 번째 위치에 놓여진 사람들이다.(1코린12,28) 교회의 모든 직분, 예컨대 사도, 예언자, 복음 선포자, 목자, 교사들은 모든 성도들을 온전하게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주신 은사를 실천하는 통로이다.(에페4,11)
따라서 교회의 모든 직분이 다 그렇듯이, 가르치는 직분 역시 그 자리에 세워진 사람이 그 직분에 적절한 자격을 갖추었는지가 중요하지, 그 자리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더구나 교사(敎師)가 비록 바로 가르치더라도, 자신이 그 가르침대로 행(行)하지 않으면, 배우는 자보다 훨씬 더 큰 심판(審判)을 당하게 된다.
야고보는 교사가 되는 것을 신중을 기하여 결정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며, 또 구원의 진리에 대한 풍부한 지식과 확신을 가졌을 뿐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가르치는 은사를 부여받아, 그 직분에 합당한 사람이 아니라면, 애초부터 교사가 되려 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우리는 엄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2)
교사로서의 가르침은 다른 사람에게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교사가 만약 그 책임을 충실히 실행하지 못했을 때는, 하느님의 더 큰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알다시피'로 번역된 '에이도테스'(eidotes)는 '오이다'(oida)의 완료 분사로서 이러한 교사의 막중한 책임을 성도들이 이미 알고 있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특히 '우리는 ~ 받을' 로 번역된 '렘프소메다'(lempsometha)는 '람바노'(lambano)의 일인칭 복수형으로서, 야고보 자신도 심판을 받게 될 교사의 범주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부인(否認)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많은 실수를 저지릅니다. 누가 말을 하면서 실수를 저지르지 않으면 그는 자기의 온몸을 다스릴 수 있는 완전한 사람입니다. 말의 입에 재갈을 물려 복종하게 만들면, 그 온몸을 조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배를 보십시오. 배가 아무리 크고 또 거센 바람에 떠밀려도, 키잡이의 의도에 따라 아주 작은 키로 조종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혀도 작은 지체에 지나지 않지만 큰일을 한다고 자랑합니다. 아주 작은 불이 얼마나 큰 수풀을 태워 버리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혀도 불입니다. 또 불의의 세계입니다. 이러한 혀가 우리의 지체 가운데에 들어앉아 온몸을 더럽히고 인생행로를 불태우며, 그 자체도 지옥 불로 타오르고 있습니다." (2-6)
말이란 의사 전달의 수단이다. 그러나 이 말이라는 것은 항상 실수가 뒤따를 수밖에 없다. 야고보는 만약 혀로 범죄 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가리켜 '완전한 사람'(텔레이오스 아네르 ; teleios aner)이라고 지칭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실수를'로 번역된 '프타이오멘'(ptaiomen)의 원형 '프타이오'(ptaio)는 '걸려서 비틀거리다', '걸려서 넘어지다'는 뜻으로, 본문에서는 '잘못하다', '죄를 짓다'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혀로 실수(범죄)를 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거니와, 여기서 '완전한 사람'이란 표현도, 절대로 완전하여 죄가 전혀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은 그가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성숙한 믿음의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야고보는 이같이 말의 실수를 하지 않는 완전한 사람은 자신의 온몸, 즉 모든 행동을 스스로 완벽하게 조절할 수 있다는 사실을, 당시 사람들이 잘 알고 있던 가축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계속해서 3-8절에서도, 이 비유와 의미가 동일한 일련의 비유를 들어, 혀의 큰 영향력과 그 혀가 잘못 사용될 때의 심각한 결과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말의 입에 재갈을 물려 복종하게 만들면, 그 온몸을 조종할 수 있습니다." (3)
'재갈을 물려'의 '재갈'로 번역된 '칼리누스'(chalinus)의 원형 '칼리노스'(chalinos) 는 말의 입에 가로 물리는 쇠토막을 가리키며, 이곳에 고삐를 맨다. 고삐를 매면, 말은 사람이 움직이고자 하는 방향을 따라 복종할 수 밖에 없다. 성질이 사나운 야생마라 할지라도 고삐를 사용해 다스릴 수 있다.
야고보가 이 비유를 말하는 이유는 혀의 기능 때문이다. 사람의 몸은 큰 데 비해, 혀는 그 크기가 매우 작다. 그럼에도 혀는 통제하기가 매우 힘든 것이 사실이다.
야고보의 비유는 말의 재갈처럼 혀를 통제하는 사람이 허물을 감출 수 있으며 성숙한 인격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말이 많은 데는 허물이 있기 마련 입술을 조심하는 이는 사려 깊은 사람이다."(잠언10,19)
"배가 아무리 크고 또 거센 바람에 떠밀려도, 키잡이의 의도에 따라 아주 작은 키로 조종됩니다." (4)
3절에서는 힘이 센 가축을 통제하는 재갈의 비유를 사용한 바 있는 야고보는 몸 전체를 조절하는 혀의 능력을 재강조하며, 두번째 비유로 배의 크기와 키의 크기를 비교하고 있다. 여기서 배는 바람에 밀려 움직이는 매우 큰 범선을 가리킨다.
배의 크기에 대해서 야고보는 '아무리 크고'란 뜻을 가진 지시사 '텔리카우토스'(telikautos)를 사용하여 표현하였고, 키의 크기는'아주 작은'이란 뜻을 가진 '엘라키스토스'(elachistos)를 사용하여 표현했다.
이 두번째 비유에서 앞의 비유보다 더 직접적으로 크기의 대조적인 모습을 묘사함으로써, 지극히 작은 것으로도 큰 것을 조절할 수 있다는 극적인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사공(키잡이)에 의해 키가 조종될 수 있다면, 배가 거센 바람(광풍)에 밀리지 않을 것이다. 배는 외부적인 광풍이 아닌 내부의 작은 키에 의해 진로가 결정된다.
야고보가 본문에서 '거센 바람에 떠밀려도'라는 외부 환경과 관련된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독자들에게 배의 키와 인간의 혀는 외부적인 환경을 거슬러 이기게 하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부각시키기 위해서이다.
"사람은 제 입이 맺는 열매 덕에 좋은 것으로 배부르고 인간은 제 손이 한 행실에 따라 되돌려 받는다." (잠언12,14)
'큰일을 한다고 자랑합니다'(5)는 '메갈라 아우케이'(megala auchei)의 번역인데, 이것은 '메갈라우케오'(megalacheo)와 같은 뜻으로, '과장하다', '호언장담하다', '언행에 있어서 거만하게 처신하다'란 뜻을 가지고 있다. 즉 오만불손한 말을 의미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간사한 모든 입술과 허황된 것을 말하는 혀를 잘라 버리시리라."(시편12,4)
"하늘을 향해 자기네 입을 열어 젖히고 그들의 혀는 땅을 휩쓸고 다니네." (시편73,9)
"아주 작은 불이 얼마나 큰 수풀을 태워 버리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혀도 불입니다. 또 불의의 세계입니다." (5-6)
야고보는 혀를 불의 이미지로 묘사하며 작은 것이 엄청난 파괴력을 지니고 있음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본문에서 특이한 것은 '아주 작은'(헬리콘 ; helikon)과 '얼마나 큰'(헬리켄 ; heliken)으로 번역된 단어가 원형으로 볼 때 동일한 단어라는 점이다.
야고보는 이 두 상반된 의미를 전달하는 단어로서 '헬리코스'(helikos)라는 한 단어를 사용한다.
수십만 헥타르의 광대한 숲이 작은 담배 꽁초 하나 혹은 작은 성냥불 하나로 다 타버리는 일이 있다. 처음에는 아주 작게 시작된 불이 바람을 타고 번지면서 삽시간에 산 전체를 다 삼켜 버리는 것이다.
야고보는 일상적 삶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예화를 가지고, 작은 혀의 엄청난 파괴력을 극적으로 제시한다. 불과 같이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혀를 잘못 사용하면, 누구라도 인생을 망칠 수 있다.
"혀에 죽음과 삶이 달려 있으니 혀를 사랑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는다." (잠언18,21)
혀는 '불'(퓌르 ; pyr)이란 은유법에 이어, 혀는 '불의의 세계'란 또 다른 은유법을 사용한다. 여기서 '세계'에 해당하는 '코스모스'(kosmos)는 거룩하신 하느님께서 계시는(마태23,22) '하늘'을 가리키는 '우라노스'(uranos)와 반대되는 의미를 지닌 표현으로서, 죄악으로 타락한 상태의 세상을 의미한다.
특히 이 단어와 더불어, 하느님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는 '다키아오스'(dikaios ; 요한17,25 ; 2티모 4,8 ; 묵시 16,5)에 부정 불변사 '아'(a)가 결합되어 의로움이 전혀 나타내는 '아디키아'(adikia)란 단어가 사용되어, '불의의 세계'는 곧 악의 세계', '사악한 세상'을 의미한다.
야고보는 지금 혀, 곧 말의 파괴성을 고발하기 위하여, 극단적인 표현을 사용하며 이 세상의 모든 악이 마치 악한 혀에서 비롯된 것임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혀는 타락한 세상 속에서 악한 특성을 드러내며, 실제 그런 혀는 결과적으로 우리 몸의 지체 전부를 더럽히고, 우리 삶의 바퀴를 태워 버린다.
"이러한 혀가 우리의 지체 가운데에 들어앉아 온몸을 더럽히는 인생행로를 불태우며, 그 자체도 지옥 불로 타오르고 있습니다." (6)
여기서 '더럽히고'에 해당하는 '스필루사'(spilusa)는 '오염시키다'란 뜻을 지닌 동사 '스필로오'(spilow)의 현재 분사로서, 혀를 통해 내뱉는 말이 전인격을 오염시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이 오염은 일시적이지 않고, '인생행로'를 망쳐 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인생행로'에 해당하는 '톤 트로콘 테스 게네세오스'(ton trochon tes geneseos)는 '인간 존재의 과정', '우리 생의 과정' 이란 의미로, 길흉화복이 교차하는 인생, 또는 흥망성쇠가 반복되는 변화무쌍한 인생 노정을 가리키는 관용적 표현이다.
이제, 인간의 전인격을 부패시켜 인생 전체를 태워버리는 혀의 해악성을 지옥(地獄) 아래에서 타오르는 불과 연관시켜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지옥불'로 번역된 '게엔네스'(geenes)의 원형 '게엔나'(geenna)는 본래 예루살렘 남쪽의 좁은 골짜기인 '힌놈의 골짜기'(게 힌놈)을 말한다. 이 골짜기는 흔히 지옥, 또는 악마가 거주하는 곳으로 비유되었다. 또한 그곳은 최후의 심판 후 악인이 들어가는 곳으로 비유되었다.(마르9,43)
여기서도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이 타오르는 지옥의 이미지로 쓰였으며, 특히 혀를 잘못 사용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심각한 영향을 끼치는 사악한 독의 근원이라는 의미를 암시하고 있다.
"온갖 들짐승과 날짐승과 길짐승과 바다 생물이 인류의 손에 길들여질 수 있으며 또 길들여져 왔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혀는 아무도 길들일 수 없습니다. 혀는 쉴 사이 없이 움직이는 악한 것으로, 사람을 죽이는 독이 가득합니다." (7-8)
인간은 창세 후에 하느님께로부터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의 기어 다니는 온갖 생물을 다스리도록'(창세1,28) 권한을 위임받은 존재이다.
그래서 야고보는 인간이 동물의 세계를 인간의 통치권 아래에 두고 지배해 오고 있지만, 정작 혀는 길들이지 못한다는 사실을 대조시켜, 후자의 안타까움을 강조하고 있다.
"혀는 쉴 사이 없이 움직이는 악한 것으로, 사람을 죽이는 독이 가득합니다." (8)
동물이나 새는 우리나 새장에 안전하게 가두어 둘 수 있지만, 혀를 활동하지 못하게 가둘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혀를 쉬지 아니하는 악이라고 하는 의미는, 혀가 언제나 쉬지 않고, 악을 내뱉는 불안정한 존재라는 것이다.(야고4,8)
'죽이는 독이 가득하다'는 것은 '죽음을 초래하는', '치명적인'이란 의미이다. 마치 강한 독을 가진 독사처럼 길들여지지 않는 혀는, 선한 말을 하기보다는 오히려 불의하고 더럽고 독기 가득한 말들만 뿜어내기를 더 좋아한다.
"거짓을 일삼는 자야 너는 파멸을 꾸미고 네 혀는 날카로운 칼과 같구나. 너는 선보다 악을 의로움울 말하기보다 속임수를 더 사랑하는구나 거짓을 꾸미는 혀야 너는 온갖 멸망의 언사를 사랑하는구나." (시편52,6)
"우리는 이 혀로 주님이신 아버지를 찬미하기도 하고 또 이 혀로 하느님과 비슷하게 창조된 사람들을 저주하기도 합니다. 같은 입에서 찬미와 저주가 나오는 것입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이래서는 안됩니다." (9)
야고보는 이제 한 입으로 '주님이신 아버지를 찬미하고', 동시에 그 입으로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을 저주' 하는 모순된 삶을 사는 자들을 책망조로 말하는 것이다.
야고보는 선과 악, 둘 다를 말할 수 있는 혀의 이중성과(마태12,34-37) 더불어 혀를 악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에 대한 모순성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을 찬양하는 것은 혀의 가장 아름다운 기능이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지으신 것은 창조주 하느님께 찬양을 부르게 하기 위함이다.
"이들은 내가 나를 위하여 빚어 만든 백성 이들이 나에 대한 찬양을 전하리라."(이사43,21)
그런데 하느님을 찬양하는 그 입으로 형제를 저주한다. 이것처럼 심각한 자가당착이며 모순도 없다. 하느님을 찬양한 입으로, 사람을 저주해서는 안 된다.(루카6,28 ;로마12,14) 왜냐하면,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사람을 저주하는 것은 그 사람을 창조한 하느님을 저주하는 것과도 같은 악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찬미하기도 하고 ~저주하기도 하니'에서 쓰인 '율로구멘'(eulogumen)과 '카타로메다'(katarometha)는 '율로게오'(eulogeo;찬양하다)와 '카타라오마이'(kataraomai;저주하다)의 현재 시제가 쓰임으로써, 교회 안에서 한 입으로 두 가지 말을 하는 일들이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음을 암시해주고 있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복음(마르9,2~13)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아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그때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2~4)
마르코 복음 9장 2절에서 13절까지는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마르9,2~8)과 그것과 관련하여 예수님과 제자들이 대화를 나눈 사건(마르9,9~13)에 대한 기록이다.
예수님의 변모 사건은 앞의 마르코 복음 8장 29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메시야 되심에 대한 베드로의 신앙 고백('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을 성부 하느님께서 확인해 주신 사건임과 동시에, 예수님의 구원 사업이 구약의 율법과 예언서의 말씀이 성취된 것임을 보여 주는 의미도 지닌다.
뿐만 아니라 마르코 복음 8장 31절에 나오는 첫번째 수난 예고에서 그리스도의 수난이 힘이 없어 받는 것이 아니라 인류 구원을 위한 수난이며, 단순히 수난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영광을 회복하실 것을 예표하는 의미도 지닌다.
예수님의 공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뜻을 갖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마르8,29)과 첫번째 수난 예고 (마르8,31) 이후에 있는 거룩한 변모 사건은 예수님 생애의 중대한 전환적 의미를 지니기에 공관 복음서 저자들은 이 사건을 다 기록하고 있다(마태17,1~8; 루카9,28~36).
마르코 복음 9장 3절에서 천주 성자 제2위 하느님이신 예수님께 내재하고 있던 충만한 신성 (콜로2,9)의 표출로 말미암아 주님의 옷은 광채로 빛나며 새하얗게 되었다.
여기에서 '빛났다'로 번역된 '스틸본타'(stilbonta; shining; dazzling)는 여러 차례 문지른 금속 따위가 번쩍이며 빛나는 것을 가리키는 동사 '스틸보'(stilbo)의 현재 분사형이다.
변모산에서 주님의 옷은 마치 금속이 번쩍거리는 것처럼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또한 '새하얗게'로 번역된 '류카'(leuka; white)의 원형 '류코스'(leukos) 역시 '빛나는', '찬란한'이라는 뜻의 형용사이다.
이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마태오 복음 5장 36절과 요한 복음 4장 35절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천상적 존재에서만 볼 수 있는 찬란하면서도 흰 색깔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이것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도 천상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러한 종류의 신비롭고 영광스러운 사건임을 강하게 암시한다.
마르코 복음의 기사에서는 마태오 복음(17,2;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과 루카 복음 (9,29;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의 기록에 있는 기사는 빠져 있지만, 정황으로 볼 때 주님의 얼굴도 찬란하게 빛이 났을 것이다.
그리고 마르코 복음 9장 4절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는데, 원문에는 마르코 복음 9장 3절과 4절이 등위 접속사 '카이'(kai; and)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여기서 '나타나'로 번역된 '오프테'(ophthe; there appeared)는 '보다'는 뜻을 지닌 원형 '호라오'(horao)의 직설법 부정 과거 수동태이다.
이렇게 신약 성경에서 부정과거 수동태로 쓰였을 경우에는 모두 부활하신 예수님이나 성령님, 또는 천상적 존재가 사람들 앞에 나타나 보인 것을 가리키고 있다.
여기서 구약의 두 인물이 등장하는데, 유다인들에게 '모세'와 매우 특별한 인물이다.
엘리야는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한 자로서(2열왕2,11) 유다인들이 다시 올 것을 대망했던 예언자이며(마르9,1), 모세는 비록 죽었지만(36,5) 유다인들은 하늘로 산 채로 올라갔다고 믿고 있던 인물이다.
이들은 율법과 예언자의 대표적인 인물이므로, 이들이 예수님께 나타나 그와 더불어 말씀하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율법과 예언서로 대표되는 구약 성경을 결코 부정하거나 없애지 않았다는 사실을 반증해 주며,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 율법과 예언자들이 예언했던 바로 그 메시야이며, 율법과 예언서의 약속의 말씀과 예언들을 성취하실 분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마태5,17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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