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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5월 20일 토요일 오후 6시 30분.
나는 평촌신도시에 차를 세워놓고 강원도 행 승합차에 몸을 실었다. 기존에 선약돼 있었던
멤버들이 빠지는 바람에 내가 대신 가게 된 이상한 여행이었지만, 산과 꽃, 약초, 이런 주제
가 내 맘을 괜히 들뜨게 하면서 알찬 시간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여자가 한 명 있기에 내 아내도 동참하면 안 되겠느냐고 물었다. 나물을 좋아하는 아내를
두고 혼자 떠나는 게 안스러웠던 터였다. 동행인들이 모두 좋다고 하여 내가 사는 분당을
경유하여 아내도 동참하게 되었다.
출발한 지 세 시간만에 목적지인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에 도착했다. 밤길이 뻥 뚫려
서인지 무척 빨리 왔다고 생각했다.
동행인은, 안양시 보화당한의원 원장 내외, 안성시 서운중 채찬석 교감, 군포시 용호고
윤갑희 교감, 한의원에 약재를 납품하는 업체 사장, 그리고 우리 내외 해서 7명이었다.
차량과 운전을 책임진 사장은 한의원 원장과 오래된 거래선 관계였고, 채 교감을 중심으
로 원장은 후배, 윤 교감은 2년 선배, 나랑은 동료 문인이자 경기도 국어교육연구회의
같은 회원이었다. 그리고 강원도 집의 여주인은 사장의 여동생이었다.
주인 내외는 성격이 털털한 것 같았다. 모든 걸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대충대충 넘어갔다.
마굿간 같은 곳에 상을 차려놓고 삼겹살 파티를 준비해놓았을 때, 처음에는 약간 기가 찼
으나 몸을 구기고 앉아 인생과 자연을 이야기하면서 낭만의 시간 속으로 빠져들어가자
그렇게 정겨울 수가 없었다. 숯불에 고기를 익혀 더덕 술과 함께 찬으로 내놓은 산나물을
장에 찍어먹을 땐 천국에 와 있는 기분이었다. 소슬한 봄바람이 어둠을 물고 가볍게 우리들
속으로 파고 들었다.
밤이 깊어, 그곳에선 원장 사모님과 아내에게 자라고 하고 우리는 밖으로 나와 옆동네의
모텔로 갔다. 자리에 눕자 누군가가 틀어놓은 TV 뉴스에서 야구선수 이승엽의 10호 홈런
소식과 서울시장 유세를 지원하던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얼굴에 칼침을 맞았다는 뉴스가
아련히 귓전으로 파고들었다. 그러나 피곤에 지쳐서인지 아무 것에도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고 금세 잠결로 빠져들었다.
이튿날은 아침부터 부지런히 움직였다. 지난 밤에 우리 말고 남자 주인의 형과 친척들
7~8명이 방문하여 주변이 갑자기 혼잡스러워졌다. 그런 상황은 우리들 중에 누구도 상상
하지 못했던 듯했다. 사돈의 팔촌이 한데 어울린다는 게 쉽지 않을 듯 했으나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만남이어서인지 금방 친근감을 느끼며 가까워졌다.
강원도 인제에서 생산되는 쌀밥의 맛이 독특했다. 남자 주인은 이곳 물에서 지어야 제맛
이 나지 서울 가서 먹으면 맛이 떨어진다고 했다. 그 밥을 얼레지 국에 곁들여 먹는 것만
해도 별미인데, 거기다가 두릅, 엄나물 순, 노리대, 병풍나물, 곰취, 산나물, 미나리, 초고
추장을 얹은 돌나물, 그리고 머위, 씀바귀 같은 나물 반찬이 쫙 깔려 있어서 우리는 자연의
맛에 취해 섣불리 일어날 생각을 못 했다.
원장은 엽병을 나물로 해서 먹는 노리대(왜우산풀, 누리대)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졌다.
나물과 한방은 밀접한 관련이 있고 약초에 관한 두어 권의 저서도 낸 바 있는 실력자가
노리대를 여기 와서 처음 보았다며 연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남자 주인은 병풍나물을 가리켜 “나물의 여왕”이라 칭한다. 내가 어디서 얻어들은 게
있어서 나물의 여왕은 산두릅이 아니냐고 묻자 “아아, 산나물의 여왕인가 봅니다”
하면서 말을 돌려 포장한다. 원장은 병풍취는 나물이 큰데도 억세지 않고 1,000 고지의
늪지대에서 어렵지 않게 관찰할 수 있다고 토를 단다.
다음 차례의 손님들이 식사를 마칠 때까지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랫집은 요 근래에 이사 갔다고 하는데, 집 분위기가 귀중중하여 이어서 살 세입자가
쉬 나타날 것 같지 않았다. 그 집 옆 개울가엔 황매화가 노란 꽃들을 수백 송이 매달고 화사
하게 피어있었다. 우리는 그 빈 집에서 가래나무 열매를 들고 나와 돌로 깨뜨려 먹었다.
가래는 외모나 알맹이가 호두 같았는데 입에 대보니 보존상태가 안 좋았던 듯 맛이 밍밍
했다. 그걸로 고혈압 환자들의 베개를 만들어 쓴대서 아버님께 갖다 드리면 좋겠다고 생각
했지만 도시생활에 젖어 살아오신 분이어서 그 효능을 의심하실 것 같아 관뒀다.
드디어, 20여 명 가까운 일행이 도시락을 준비하고 산행에 나섰다. 4륜구동 승합차로
30분가량을 이동했다. 해발 약 600 ~ 700미터 지점까지 올라간 것 같았다.
능선 정상에 이르자 “매봉산”이라는 팻말이 나타났다. 원장이 “너무 흔한 이름이야”
했고, 그 말에 우리는 이 산의 정식 명칭은 매봉산이 아닐 것이라고 믿었다. 야생화 전문가
의 말 한마디는 산 이름까지도 제압하는 힘이 있었다. 거기다 남자 주인의 의지도 작용했다.
“우리 집은 해발 352미터에 있습니다. 서울의 남산이 262미터라고 합니다” 또는
“우리 동네는 영동 영서지방, 호남 충청 어느 지역에도 끼지 않습니다. 엊그제 전국에 비
가 온다는 기상청 예보가 있었지만 이곳은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하면서 이 지역에 대해
“전설의 고향” 같은 신비로움을 주려는 주인의 의지를 읽고 있었던 터여서 우리는 가만히
입을 봉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매봉산이란 이름은 경남 밀양에 있고, 강원도에도 영월과 원주 두
군데에 있으며, 서울에도 갈현동 ~ 구파발 사이에 같은 이름의 산이 있고, 그밖에 매봉산
이란 이름이 붙은 상점 간판도 수없이 많았다.
이곳, 강원도 인제의 매봉산(每峰山)은 내설악의 서북쪽에 위치한 1,271미터의 산으로서
원통에서 진부령이 이르는 북천 도로의 좌측 산줄기에 있다. 설악산의 유명세에 밀렸다기
보다 서북쪽의 민통선 지역에 있어 접근하기가 용이치 않은 관계로 세상에 덜 알려지게
되었다.
이곳은 진부령과 미시령을 넘어온 눈구름이 겨우내 솜털 같은 눈을 뿌려대는 곳으로
겨울의 끝자락인 2 ~ 3월에 열리는 “황태 축제”가 유명하다. 연못이 100개나 있다는 백담사
가 5분 거리에 있다고 한다.
처음엔 외진 곳에서 사는 게 이상해 보였으나, 주변 여건을 차근차근 살펴보니 도시에서
사업이 잘 안 돼 6년 전에 귀농했다는 그들 부부가 1남 2녀와 함께 이런 명당 터에 자리 잡은
게 어쩌면 남들보다 앞서가는 선지자적인 판단이었을 거라고 생각되었다.
서울의 관악산 정상(629미터)쯤 되는 높이에 차를 세워놓고, 드디어 등산을 시작했다.
고랭지 감자 밭을 가로질러 산 기슭에 이르자 여자 주인이 곰취 찾아내는 법을 일러준다.
그녀는 성격이 활달하고 걸음걸이가 씩씩했다. 시골 사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은커녕
고개를 팍 쳐들고 활개치며 걷는 걸음걸이를 보면 온몸 위로 세상만사에 대한 자신감이
흘러 넘치는 듯 했다. 설명도 짧고 명료하게, 한번 들으면 머리에 쏙쏙 들어오게 잘 말
해 주었다.
곰취에 이어 참나물, 고추나물, 떡취 등에 대해 가르쳐주었다. 참나물은 미나리 같이
생긴데다 잎에 세 갈레로 나오고, 떡취라고 하는 수리취는 잎 뒷 부분이 하야며, 곰달비는
곰취의 사촌쯤 된다고 했다. 산에 오를 때는 지그재그로 걸어야 힘이 덜 든다며 시어머니
같은 잔소리도 곁들였다.
올라가는 중에, 일행은 나물 채취하는 팀과 사진 촬영 또는 야생화와 산나물 배우는 팀으
로 자연스럽게 나뉘어졌다. 후자에 속한 나는 돌미나리, 씀바귀, 대황, 당귀, 소리쟁이,
아스파라거스, 족두리풀, 방아잎(연명초) 등을 유심히 관찰했다.
아침에 반찬으로 밥상에 올라왔던 엄나무가 자주 나타났다. 엄나무는 가시가 많아 동네
에 사악한 귀신이 들어오는 것을 막아주는 신목(神木) 역할을 하기도 했다는데, 내 눈엔
구수한 맛을 내기 위해 삼계탕에 같이 넣어 끓여먹었던 게 더 익숙했다. 아침에 먹었던 것
은 끓는 물에 살짝 데친 어린 순이었다.
쥐오줌풀과 벌깨덩굴이 숲속의 주인인 양 유난히 많아 보였다.
원장은 쥐오줌풀을 최음제로 쓴다고 한다. 한약을 다루는 분이라 역시 관심은 자기 영역에
서만 노는가 보다. 최음제란 사랑의 화학작용이라 하여 성적 흥분을 야기시키는 약제로서
아스파라거스도 이에 해당한다. 그런 사랑의 힘을 산괴불주머니나 벌깨덩굴에게 주어 시
들어가는 꽃잎들을 화려하게 살려내었으면 했다.
사방은 피나물 천지였다. 줄기를 꺾으면 빨간 핏물 같은 게 나온다는 피나물, 살벌한
느낌의 이름과는 다르게 태양의 빛으로 물 든 듯한 샛노란 꽃잎이 보는 이의 눈을 부시게
만든다.
“이 모습도 두어 주 후가 되면 다 사라지고 없을 거예요. 이 땅의 주인이 새롭게 바뀝니다.
지금의 주인을 만나려면 내년 이맘 때 다시 이곳을 찾아와야 합니다” 하는 원장의 말 속엔
지금 이 순간에 피어있는 많은 꽃들과 열심히 대화를 나누라고 강요하는 듯 하다.
꿩의다리와 삼지구엽초는 모양이 비슷해서 착각을 일으키게 하고, 괭이눈은 얼핏 보면
고양이 눈을 닮았다.
지난 주의 강원도 정선 답사 때 보았던 붉은병꽃나무를 이곳에서도 여러 그루 볼 수 있
었다. 구슬붕이는 많지는 않았지만 몇 군데에서 조그맣게 피어나고 있음을 발견했다.
신기하게도 조팝나무는 많지 않았고, 수수꽃다리는 한 그루도 볼 수 없었다. 노루귀와
취나물은 엄청 많았다. ‘같은 강원도인데도 정선과 인제의 식물 분포군이 이렇게 다른가’
하며 나는 속으로 궁금하게 생각했다.
두 주인 내외는 산 타면서 “올려처라”와 “내려처라” 하는 독특한 언어를 사용했다.
“올라가라”와 “내려가라”의 명령어인데, 강렬한 억양으로 인해 생계와 직결되는 말이라
는 느낌을 받았다. 강원도에 정착하자마자 배운 사투리인 듯 톤이 매우 자연스러웠다.
점심 식사할 때, 원장은 남자 주인에게 남보, 여자 주인에게는 여보라고 호칭하여 우리를
웃겼다. 피부가 까무잡잡하게 그을른 데다 머리에 끈을 질끈 동여 맨 남자 주인 모습이 흡사
‘실버스타 스텔론’이 주연한 영화 속의 ‘람보’를 연상시켰고, 상대적으로 단단한 체구의
발바리 같은 그의 아내에게는 남보(男 - )의 상대어인 여보(女 - )가 어울려 보였다.
아니, 확실하게 그들은 남보 여보였다. 식사 시간이 되어도 남보가 오지 않자 누군가가
“먹다보면 오겠지” 하고 심드렁히 말했고, 그때 여보는 약간 근심 띤 표정을 지으며
“나랑 같이 앞으로 3~40년은 살아야 될 사람인데” 하며 무전기를 들고 산 정상으로 올라
갔다. 기어코 남보를 데리고 와서야 같이 식사했다.
그들을 보니, 산 살림하면서 두 내외가 같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머지 한 사람은 외로워
서 못 살 것 같았다. 남편이 산삼 캐러 자주 집을 비워서 여자는 이미 그런 경험을 오래 전
부터 터득하고 있었던 듯 했다.
흰 비닐 봉지에 담아온 밥을 즉석에서 캔 산나물로 장에 싸서 먹었다. 몇몇 사람이 나물을
물에 씻지 않고 먹어도 되느냐고 했지만 주인 내외는 이곳은 공기가 맑아서 괜찮다고 했다.
중국에서 온 황사가 덮혀 있지 않았느냐고 되묻자 그러면 먹지 말라고 했다.
그들은 이곳 나물에 대한 신뢰가 대단했다. 먹음직스럽게 쌈을 싸서 한입 가득 넣었다.
여자 주인은 한잎씩 싸서 최고의 선물인 양 일행들 입에 하나씩 넣어주었다.
식사를 마치고, 그 주변에서 나물을 캐다가 우연히 그곳에 더덕이 많음을 알게 되자 사람
들은 더덕 캐는 일에 열중했다. 예전에 더덕 밭이었던 듯 한 군데에서만 일곱 뿌리가 나오
는 경우도 있었다. 윤 교감은 안양고 3학년 담임으로 재직 시 학급생 전원을 4년제 대학에
합격시켜 한국 기네스북에 오른 인물답게 한구석에서 조용히 나물에 집착하는 모습이 이
잔잔한 생활 속에서도 뭔가 큰 업적을 이룰 듯한 카리스마를 느끼게 했다. 더덕 캐는 게
난생 처음이라며 열정적으로 덤비는 채 교감의 모습도 천진난만해 보였다.
원장은 본업이 약초 연구여서 따로 놀았다. 나 역시 나물보다 식물 공부에 관심이 많았으
므로 원장은 독특한 식물이 나타나면 야생화 모임에 관여하는 나를 불러서 한수 지도해주
었다.
원장은 한계령풀을 가리키며 A급 군사기밀처럼 나지막히 말했다. 한계령풀은 우리나라의
특산풀로서 이곳에서만 군락을 이룬다고 귀띔했다.
회리바람꽃은 이름 속에 섞인 유음(流音)만큼이나 매끈하고 뭔가 빠르다는 속도를 느낄
정도로 특이했다. 원장이 없었다면 그 꽃의 존재를 모르고 지나쳤을 것이다.
아도니스로 알려진 홀아비바람꽃은 눈 속에서 피는 꽃인데 이 지역의 날씨가 추운지
지금이 한창인 채 꽃들이 만발해 있다고 한다. 앞서 보았던 홀아비꽃대의 궁상스러움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외모가 화려하여 이 홀아비라는 이름 속에는 무슨 사연이 숨어
있을 것 같았다.
제주도의 눈 속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복수초는 꽃은 지고 잎만 지천으로 깔려 있었다.
산속에서 여자 주인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렸다. “골짜기로 가지 말고
계속 옆으로 내려치세요.” “사방으로 퍼지세요. 퍼져야 취를 골고루 딸 수 있어요.”
“참나물을 잘 골라내야 해요.” “많은 양을 따지 않으려면 떡취는 건들지 마세요.
떡취는 떡을 해먹을 때만 필요한 거예요.” 그녀의 명령어는 크고 거침이 없었다.
나물 캐는 양이 많아 보였는지 원장 사모님은 “연한 것만 따고, 일부는 남겨 두세요.
그래야 다음에 또 그 자리에서 나물이 나오죠” 하고 조그맣게 말한다.
“정 못 따면 시장 가서 사 가세요. 천 원어치만 사도 두어 줌씩 줍니다.”
사람들이 나물에 정신이 홀려 있자 혼잣말인 양 이렇게 중얼거리기도 했다.
나도 그녀의 말에 많은 부분을 공감했다. 더덕은 최소한 심은 지 5년이 넘어야 먹을 만
하다는데 앞뒤 가리지 않고 무작정 따먹기만 한다면 이 땅의 식물은 씨가 마를 것이 뻔했다.
하산할 땐 길이 나 있지 않은 숲속을 헤쳐 비스듬히 내려갔다. 나는 계속해서 원장 옆에
붙어 다니면서 야생화에 관한 지식을 하나라도 더 익히려고 애썼다.
우산나물, 둥굴레, 가시오가피, 당개지취, 산당귀, 산현호색, 삿갓풀 등을 관찰했다. 올라
올 때부터 유심히 봐 뒀던 홀아비꽃대는 설명할 수는 없지만 1%의 뭔가가 부족한 듯 불쌍
해 보인다. 꽃이름만 보면 선인들이 지어낸 작명법(作名法)의 예술에 대해 나는 무작정이
고 감탄을 해댄다.
원장은 내게 당귀 잎을 따주며 씹어 먹으라고 한다. 보혈제로서 혈액 순환에 좋고 피로를
가시게 해 준다는 것이다. 한 입 덥썩 깨무니까 갑자기 협곡을 날아다닐 듯이 힘이 솟아나
는 것 같다.
모데미풀은 바람꽃 중의 하나이고, 강원도 산골에서만 볼 수 있다며 사진 찍어둘 것을 권
했다. 큰괭이풀을 닮은 사랑꽃(시중의 이름)은 그냥 캐 가면 죽기 때문에 여기서 씨를 받아
키울 자리에 가서 발아시켜야 된다고 강조한다. 고비는 고사리같지만 키가 큰 모습이 고사
리와는 별 게라고 말한다.
일행 중 일부는 여자 주인을 따라갔고, 우리는 올라갈 때처럼 남자 주인과 같이 움직였다.
옥잠화보다 잎이 넓은 박새에 대해 내가 궁금해 하자 남자 주인은 독초 성분이 있지만 담
걸렸을 때엔 뿌리를 수제비에 넣어 끓여 먹어 나았던 경험이 있다고 했다.
무전기가 멋있다고 하자 먹고 살려면 어쩔 수 없다며 이상한 말로 응수한다. 민통선을 넘
어 전방으로 산삼 캐러 나서면 20kg의 식량을 매고 그것이 다 없어질 때까지 두서너 사람
이 따로 떨어져 산속을 헤매는데, 함께 있어야 할 경우 휴전선의 군사작전지역이어서 크게
소리 지를 수는 없고 무전기가 없다면 활동할 수가 없다. 그리고는, 산 속을 누비는 일이야
말로 자신의 본업이라고 강조한다.
산속을 헤쳐나가다가 지친 몸을 기대면 고목들이 우두둑 소리를 내며 힘없이 부러진다.
의지할 데 없이 살아가는 강원도 산 사람들의 생애가 그런 모습일 것같아 문득 슬픈 감정
이 일어난다.
얼마나 힘들게 걸어왔는지 모른다. 계곡에 이르자 다른 방향으로 갈라졌던 팀과 만난다.
우리는 계곡에 함께 모여 휴식을 취한다.
“오빠” “형님” 하는 소리가 공중을 날아다닌다. 우리의 만남은 사돈지간과 남남지간으로
얽히고 설켰지만, 그 중심에는 오누이와 형제의 끈이 있었다. 그들은 시골과 도시에서 상
반된 삶을 살고 있었다. 도시의 형제가 시골 형제들에게 느끼는 감정은 어떨까. 산속에서
약초나 캐며 살아가는 형제들을 가까이에서 보며 가슴이 미어질 테지만, 오늘은 아무런
내색도 않고, 서로 단순한 세포를 지닌 산짐승마냥 산속을 맘껏 뛰어다니며 봄날의 따스
한 기운을 즐기고 있다.
목적지로 되돌아오자 주인 내외가 고로쇠 물에 솔의 엑기스를 탄 미네랄 음료를 내놓는
다. 한잔 들이키니 창자가 시원하게 뚫리는 것 같다.
25평짜리 흙집을 짓기 위해 잔뜩 쌓아놓은 통나무와 널따란 집터가 다음에 찾아올 우리
를 기다리고 있는 듯 했다. 주인장과 아쉬운 작별을 고하면서 나는 그 집터 쪽을 향해서도
인사를 했다. 쌍둥이처럼 생겼으면서도 이질적인 세포를 지닌 지느러미엉겅퀴와 지칭개
가 가까운 거리에서 꼬옥 부둥켜 안은 채 나에게 잘 가라고 손짓을 하는 듯 실바람에 하늘
거린다.
홍천에 이르러 저녁식사로 막국수를 먹고, 길 막히는 휴일의 양평길을 지루하게 뚫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번 여행은 인생과 자연을 의미있게 되돌아보게 해 준 뜻깊은 교육의 장이었다. 내 주변
의 식물박사들을 통해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낯선 사람들과 부딪치면서 알게 된 새로운
지식이 얼마나 유용한지, 그리고 학문도 피를 섞어야 보편적인 진리에 다가설 수 있다는
사실을 이번 여행을 통해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같은 꽃도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아야
진실의 실체로 접근하기가 용이하다. 이런 행운이 간혹 나에게 온다는 사실에 나는 누군가
에게 감사해하면서 지낸다.
요미우리 4번 타자 이승엽 선수와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의 피말리는 경쟁이 없어도 살아
갈 수 있는 곳이 자연의 세계이다. 자연은 욕심없는 인간과 더불어 유유자적하며 살아가
는 아름다운 삶의 터전이자 알몸으로 태어났다가 빈 손으로 돌아가는 마지막 우리들의
고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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