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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만족
창 33: 1-20
대부분의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을 원합니다. 그리고 많은 것을 가졌다고 자족해 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왜냐 하면 욕심은 채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욕심은 계속해서 입을 벌리고 삼키기를 바라며 입으로 들어오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족이란 채울 수 없는 그릇과 같은 것입니다. 전도서 기자는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재산이 더하면 먹는 자도 더하나니 그 소유주가 눈으로 보는 외에 무엇이 유익하랴”(전5:20,21)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또한 욕심은 밑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옛사람들은 가르쳐 왔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욕심은 채울 수 없다는 것에 대하여 한결 같이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아마도 이 이야기는 금보다도 형제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더 아름답고 가치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가르치기 위함일 것입니다. 두 형제가 길을 가던 중 금덩이 하나를 발견하였는데 그 형제들은 그 금덩이를 강물에 빠뜨려버렸습니다. 그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그 금덩이를 누가 더 많이 가질까 하는 것에 대하여 서로간 마음의 보이지 않은 싸움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서로들 욕심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금덩이 때문에 둘 사이의 형제우애에 금이 갈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스스로 자신들의 소유가 만족하다고 고백하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동생이 형을 위하여 많은 선물을 예비하였는데 형은 자신의 소유가 많으니 그 선물이 필요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형은 동생에게, 동생은 형이 선물을 받기를 강권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형은 동생이 주는 선물을 끝까지 사양하면서 “나에게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동생도 역시 그의 소유가 많으니 그에게 족하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이들은 무려 20여년만에 만났는데 서로들 자신들의 소유가 자신들에게 “족하다”고 말하면서 선물을 놓고 줄려고 하는 사람과 사양하는 사람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들의 고백을 통하여 오늘날, 그리고 일반적으로 볼 수 없는 상황을 접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들이 소유하고 있는 것은 무엇이며 그들이 족하다고 생각한 것들의 성격은 어떤 것인지 상고해 볼 필요를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우리가 족하게 여겨야 할 것은 무엇이며 또 무엇은 우리를 족하게 할 수 없는 것인지도 발견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1. “족하다”는 고백의 배경들(5-9)
야곱과 에서의 해후의 배경에는 많은 사건들이 얽혀져 있었습니다. 먼저 이들이 헤어지게 된 배경부터 살펴보면 이들 사이에는 심각한 문제들이 있었던 것을 알게 됩니다. 야곱과 그의 형 에서는 쌍둥이였는데 뱃속에서부터 다투는 사이였습니다(25:22). 리브가가 잉태하였을 때 그의 뱃속에서 아이들이 싸움을 하였습니다. 쌍둥이를 잉태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두 국민이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창25:23)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해산 기간이 이르렀을 때 이들 중 에서가 먼저 태어났는데 야곱은 에서의 발굼치를 잡고 태어났습니다(25:24-26). 그러므로 에서는 “붉다”는 뜻으로, 야곱은 “발꿈치를 잡았다”는 뜻으로 이름을 지었습니다. 형 에서보다는 동생 야곱은 먼저 태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을 쳤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후 형 에서의 시장한 틈을 이용하여 야곱은 팟죽 한 그릇으로 형 엥서로부터 장자의 명분을 팔게 하였습니다(25:29-34), 장자였던 에서는 그 명분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야곱이 이것을 이용하였습니다. 형이었던 에서는 사람이 우선 당장 시장한 가운데 있는데 장자의 명분이 무엇을 먹여주느냐 하는 생각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장자의 명분을 경홀하게 여겼습니다.
이삭이 죽기 전 이들을 축복할 때 야곱은 그가 장자인 것처럼 그의 아버지 이삭을 속이고 장자의 축복을 받았습니다(27장). 그러므로 에서는 장자의 축복을 받지 못하고 동생인 야곱에게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이 때부터 에서는 그가 받을 축복을 가로챈 그의 아우 야곱을 죽일 생각을 하였습니다(27:41). 마치 그의 아버지 이삭이 나이 많아 곡할 때가 되었으므로 에서는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눈치챈 야곱이 하란에 있는 그의 외삼촌집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거부가 되어 가나안을 향하여 돌아오고 있었던 야곱과 아비 이삭을 모시고 있었던 에서는 무려 20여년만에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마음은 안심을 할 수 없었습니다. 만약 형 에서가 아직도 자신에게 죽이려고 하는 마음을 품고 있다면 그는 당해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은 형 에서의 마음을 사기 위하여 그의 인간적인 지혜를 다 동원하였습니다. 야곱은 그의 형의 불 같은 성격을 피할 수 없음을 생각하고 그의 형의 마음을 풀고 난 다음에 대면하여 만난다면 형의 용서를 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예물을 준비하였습니다(32:13-20). 그의 소유도 그의 판단에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순서로 배열하였습니다(1,2). 만약 에서가 한 떼를 치면 다른 한 떼라도 피할 수 잇을 것으로 생각하고 그의 소유를 세 떼로 나누고 그는 마지막 떼와 함께 동행하였습니다.
에서는 군사 400인을 이끌고 야곱을 맞이하려 나왔습니다. 그 때 야곱이 에서는 보자 일곱번 몸을 굽혀 절을 하였습니다(3). 그리고 그의 가솔들이 차례로 나아와 에서에게 절을 하였습니다(6,7). 여종과 레아와 라헬의 순서로 인사를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모습들은 야곱이 에서의 마음을 사기 위한 야곱자신의 지혜로부터 나온 전략들이었습니다. 이들의 해후의 배경은 이와 같았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신앙이 없어도 만족해 하는 사람과 한편 신앙으로 말미암아 만족해 하는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만족해 하는 이유들은 무엇이겠습니까?
2. 신앙이 없어도 만족해 하는 사람(8-10)
에서가 길에서 만나도록 전략적으로 계획하여 예비한 야곱의 예물에 대하여 “나의 만난바 이 모든 떼는 무슨 까닭이냐”라고 물었습니다(8상, 참고. 32:13-19). 야곱은 내 주께 은혜를 입기 위함이라고 말했는데 에서는 한사코 받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에서는 “내 동생아 내게 있는 것이 족하니 네 소유는 네게 두라”(9)고 하면서 사양하였습니다. 그는 “나에게도 모든 것들이 충분하니 나는 만족하고 있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는 야곱에게 그의 장자의 축복을 빼앗겼지만 그러나 많은 물질을 소유하고 있다라는 말을 간접적으로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 형제들의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운 한 편의 그림과 같습니다. 그야말로 “형님 먼저, 아우 먼저”인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의 마음은 달랐습니다. 형 에서가 선물을 사양한 속 마음을 읽을 수 없었기 대문에 안절부절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고대사회에서 부족간의 평화와 우의를 체결하거나 확인하는 방법으로 상호간 선물을 교환하거나 약자가 강자에게 선물을 보냈습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양자간의 화해를 확인하였습니다. 그런데 형 에서가 야곱의 선물을 사양하자 야곱은 아직도 안심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한편 에서는 그의 소유가 많으니 “만족하다”라고 말했는데 “만족”이란 부요한 것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요보다 월등한 것입니다. 부요한 사람도 만족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에서는 그의 물질과 그의 권세로서 만족하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팥죽 한 그릇으로도 만족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물질만 있다면, 그것을 많이 쌓아둘 수 있다면 더구나 그는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혹 우리 가운데 이와 같은 것으로 만족하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어떻든 야곱은 그의 선물을 받아주기를 강권하였습니다(10). 야곱은 기회가 오면 필사적으로 그것을 얻기 위하여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그의 모친 리브가의 뱃속에서도, 출생할 때도, 장자의 명분을 살 때도, 장자의 축복을 받을 때도, 삼촌의 집에서도 여전히 그는 열정을 갖고 도전하는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라헬을 얻기 위하여 7년을 수일 처럼 여기고 라반의 양떼를 돌본다거나, 다시 라헬을 얻기 위하여 또 7년을 보낸다거나, 그리고 그의 집을 세우기 위하여 밤낮 없이 일하는 그의 모습은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은 그의 열정의 한 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야곱이 지금 형 에서와 화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물러설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에서가 선물을 받지 않을려고 하는 것에 대하여 야곱은 그의 형 에서가 아직도 감정을 풀지 않은 것으로 여길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선물을 받지 않은 것은 화해를 하지 않은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형 에서가 동생인 야곱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 확실하다면 선물을 예물을 받아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아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10하)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야곱은 그의 형 에서를 만나지 않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그의 형을 만나는 기쁨보다는 생명에 대한 위협을 더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의 이와 같은 말은 단순히 아부의 성격이 더 짙었습니다. 또한 야곱은 에서가 성난 얼굴로 자신을 맞이하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형은 달려와서 그를 안고 입을 맞추고 울었던 것입니다. 에서는 무척이나 동생을 그리워하고 있었던 것이 확실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이 형 에서의 반가워하는 모습을 볼 때 마치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우리는 조경철 박사님이 북한에 있는 동생을 만나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한 동안 서로 끌어안고 울기만 하였습니다. 다른 말이 필요없었던 것입니다. 아니 다른 말로서 표현할 길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얼마나 많은 할 말이 쌓였겠습니까? 그러나 그 많은 말을 하는 것보다 서로 우는 것이 더 많은 말을 나누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에서와 야곱도 안고 입을 맞추면서 서로 울었습니다. 그 20년 동안 쌓였던 수 많은 말을 이와 같은 방법으로 풀었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형 에서가 많은 사병들을 이끌었으며 가나안에서 그 입지를 확보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한편으로 위안이 되었습니다. 에서는 그에게 우산이 되어줄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본문의 핵심은 에서의 “족하니(I have enough)”라는 말 가운데 있습니다. 에서가 신앙이 없는데도 “족하다”고 한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그가 400인의 사병을 이끌고 야곱을 맞아하려 온 것은 일종의 과시욕구에서 나온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동생을 맞으러 나오는데 그와 같은 군사들을 이끌고 올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떻든지 에서는 400인의 사병을 둘 정도로 크게 성공하여 많은 물질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만족하다고 하지만 여전히 죄악의 편에 있었으며 영적으로 빈털터리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영적부요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영적으로는 가난한 사람이었으나 물질적인 것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족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영적만족을 알지 못하고 물질적인 부요만으로 만족을 채울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더구나 성도들 가운데 있는 이와 같은 현상은 대단히 우려할만한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들을 보실 때 그들은 “곤고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계3:17). 그들의 외면적인 물질적 부요가 그들의 영적부요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오히려 벌거벗은 빈털터리나 거지의 수준에 불과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만족하다고 말하고 있었으니 마치 에서의 형편과 같았으며 이것은 곧 현대의 교회상입니다.
3. 신앙으로 말미암아 만족해 하는 사람(11)
한편 야곱은 고백하기를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셨고 나의 소유도 족하니”라고 했습니다. 어떤 측면으로 볼 때 야곱의 고백도 에서의 고백과 별로 다를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야곱의 대답의 첫 머리에는 “하나님”이 있습니다. 야곱은 그의 모든 부요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야곱의 고백의 특성은 “하나님”이 그의 주인이 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은 그의 물질의 부요함으로 말미암아 만족해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으로 말미암아 만족해 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만족은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고후3:5)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참된 만족입니다. 이 만족은 자연환경의 변화와 더불어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신앙인들이 만족해하지 못하는 이유들은 무엇일까요? 신앙인들이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산다고 하면서도 세상을 얻기 위하여 손짓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된 만족이란 부요하신 하나님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소유하지 못하면서도 만족하거나 만족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헛된 것입니다. 한편 하나님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세상을 얻으려고 하는 잘못된 욕심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성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세상의 물질과 권세와 명예가 우리의 신앙을 위하여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의 목표가 세상적인 것에 그 초점이 맞춰져서는 안됩니다. 세상적인 것을 얻으므로 만족을 얻으려고 해서는 않된다는 것입니다. 물질도, 권세도, 명예도 뜬 구름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을 과도하게 잡으려고 하는 것 자체가 헛된 것입니다. 또한 물질적으로 가난한 것이 신앙의 부요를 막지 못하며 물질적으로 풍부한 것이 신앙적으로 부요한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23:1)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가장 열악한 상황 가운데 있었지만 여호와가 그의 목자가 되신 것으로 그는 만족을 얻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과 더불어 시편기자는 동일하게 하나님의 부요로 만족하였으며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계신 것으로 만족하였습니다(시65:4, 103:3-5, 104:28,29, 105:40, 107:9).
청교도의 가난한 설교자는 작은 물고기 한 마리와 고구마 하나를 놓고 하나님께 감사하기를 “주님 주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위하여 바다와 육지에서 일용할 양식을 구할 수 있게 하심을 감사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슬을 맞으면서 꿀을 빨아먹는 벌이 산에서 풀을 뜯어 먹는 소만큼이나 만족해 하겠습니까?
신앙(믿음)이 없이 만족해 하는 것은 그 자신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직 신앙으로 말미암아 만족해 하는 사람은 참된 만족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혹시 우리 가운데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으면서도 만족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성도들이 있습니까? 부요하신 하나님 안에 거하면서도, 하나님의 집에 있으면서도 만족을 누리지 못하는 성도들이 있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야곱이 평안히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다
창 33: 1-20
오늘 내용은 야곱이 평안히 가나안 땅으로 돌아온 이야기입니다.
야곱이 에서의 영접을 받다.
본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17절까지와 18-20절까지입니다. 1-17절까지는 야곱이 형 에서의 뜨거운 영접을 받은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18-20절은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가나안 땅 세겜에 평안히 이르러서 하나님 앞에 단을 쌓은 이야기입니다.
얍복나루에서 하나님과 씨름하여 승리한 후에 야곱은 이스라엘이란 새 이름을 얻었습니다. 옛사람 간사한 야곱이 변화하여 하나님 나라를 상속할 수 있는 신령한 이스라엘로 변화받은 사건입니다. 장차 하나님 나라의 언약의 복을 받을 자 답게 성별되었습니다.
이처럼 야곱이 이스라엘이란 새 이름을 얻었는데도 창세기의 저자인 모세는 계속해서 야곱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지 않고 야곱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이유는 아직도 야곱이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온전히 서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35장 가도록 까지 계속해서 이런 야곱의 모습이 전면에 드러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보면 야곱이 하나님을 통해 새 이름을 얻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눈을 들어서 보니까 형 에서가 400명을 거느리고 오고 있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장갑차를 앞세우고 오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가족들을 나누어 세웠습니다. 2-4절 말씀을 보면 "여종과 그 자식들은 앞에 두었습니다. 그리고 레아와 그 자식들은 그 다음에 두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사랑했던 아내 라헬과 그녀에게서 난 요셉은 제일 뒤에 두었습니다." 성경의 기록방식을 보면 조금 별볼일 없겠다. 에서가 혹시 공격에서 죽여도 상관없겠다 하는 아내와 자식들은 앞세우고 있습니다. 반면에 라헬과 요셉은 맨 뒤에 두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야곱이 땅에 일곱 번 허리를 굽히고 에서에게 나아갔습니다. 지금 죽느냐 사느냐 아슬아슬한 장면입니다.
그런데 에서가 달려와서 안고 입맞추고 피차간에 울었습니다. 감격의 눈문을 흘린 것입니다. 이산가족 상봉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에서가 여인과 자식들에 관해서 묻자 야곱이 차례 차례 인사를 시켰습니다. 상견례를 드디어 한 것입니다. 5-7절까지입니다. 그리고 에서가 야곱에게 오면서 보았던 짐승의 떼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야곱이 형 에서의 은혜를 얻고자 야곱이 보낸 선물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야곱이 선물을 받기를 강권하자 에서가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에서가 야곱의 길잡이가 되어서 길안내를 하겠다고 제의했습니다. 그러자 야곱은 자식들의 어리고 약한 것과 가축떼를 급히 몰면 죽을 것이라는 이유를 대고 제의를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에서가 먼저 떠났고 야곱은 숙곳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집을 짓고 짐승을 위한 우리간을 지었습니다.
야곱이 가나안 땅에 돌아옴.
18절부터 보면 야곱은 밧단아람에서 평안히 가나안 땅에 세겜성에 이르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성 앞에 장막을 치고 그 땅을 세겜의 아비 하몰에게서 은 일백개를 주고 샀습니다. 여기서 값을 주고 샀다는 말은 그 땅에 야곱의 소유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야곱이 이처럼 은 일백개로 장막터를 산 것은 아브라함이 막벨라 굴을 산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가나안 땅을 상속할 상속자가 그 땅을 사서 상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 단을 쌓고 단의 이름을 엘엘로헤 이스라엘이라 불렀습니다. 그 이름의 뜻은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다."라는 뜻입니다. 야곱이 지금까지 야곱의 인생에 동행하시고 길을 인도하시고 보호하신 하나님, 야곱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 단을 쌓고 경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하나님의 장자와 동행하셔서 무사히 상속할 땅 가나안 땅에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여기 18-20절까지가 33장의 결론이 되는 말씀입니다.
본문이 주는 의미 - 하나님의 장자의 길을 지키시고 보호하심
그러면 오늘 본문이 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저자가 독자들에게 주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결론부터 먼저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장자를 어떤 역경과 어려움 중에서도 지키시고 보호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의 복을 하나님의 장자로 하여금 상속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하나님의 장자 야곱을 보호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장자는 에서가 아니라 야곱이었습니다. 이것이 이삭의 가정에 두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인내하면서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적인 계략과 꾀를 써서 에서로부터 빼앗다시피 장자의 복을 얻었습니다. 그 결과 형에서의 이룸을 사게 되었고 죽음의 위기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장자가 마땅히 얻어야 하는 가나안 땅 한 평도 상속하지 못하고 외갓집 밧단아람을 향해서 유리방황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장자 야곱이 유리하는 가운데 벧엘에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야곱이 어디를 가든지 함께 하시고 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벧엘에서 사다리 계시를 통해 언약을 확증하고 베푸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벧엘에서의 자신의 언약에 신실하셔서 형 에서의 미움 때문에 가나안 땅을 떠나고 있는 야곱을 보호하셨습니다. 그리고 밧단아람에서 라반의 속임수에서 야곱을 보호하셨습니다. 그리고 라반의 것을 취해서 야곱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밧단아람을 떠나 가나안 땅을 향해 가는 야곱을 추격해오는 라반의 분노에서 하나님의 장자 야곱을 보호하고 지키셨습니다. 그리고 형 에서의 미움에서도 보호하셨습니다.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란 새 이름으로 변화시키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인간적인 꾀를 버리지 못하는 야곱이었지만, 하나님은 야곱을 에서에게서 보호하셨습니다. 그래서 형 에서로 하여금 야곱을 온전히 용서하고 화해하게 했습니다. 서로 목을 어긋맛기고 입맞추고 울었다는 4절 말씀이 이 사실을 압축적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라반에게서 보호하셨고 에서에게서 하나님의 장자를 보호하고 그 길을 지키시고 인도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장자 야곱 이스라엘을 인생여정 가운데 보호하시고 인도하신 하나님께서는 야곱 이스라엘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과도 함께 하셨습니다. 애굽에서의 400년의 종살이 가운데도 함께 하시고 보호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중보자 모세를 세우셔서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젖과 꿀이 흐리는 가나안 땅을 상속하게 하실 것입니다. 지금 옛이스라엘 백성이 어디에 있습니까?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체결하고 있습니다. 애굽에서 인도하신 그 하나님께서 야곱을 지키시고 인도하시고 보호하셨듯이 이스라엘 백성과도 함께 하셔서 젖과 꿀이 흐리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광야의 어려운 여정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지만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신뢰하고 나아갈 때 이스라엘 백성도 그들의 조상 야곱처럼 무사히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것임을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창세기를 기록하고 있는 목적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결국 그들의 조상 야곱과 함께 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동행하심으로 무사히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7족속을 물리쳤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을 지파별로 기업으로 상속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에 참여했습니다. 성전 지성소에 거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함으로 풍성한 가나안 땅의 복을 누렸습니다. 하나님은 많은 중보자들과 왕들을 통해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셨습니다. 반복되는 피흘림과 물뿌림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성결케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셨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셨습니다. 이것이 구약이스라엘 백성의 복이요 생명이었습니다. 이스라엘만이 하나님의 장자 백성으로 복을 누렸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러나 구약 이스라엘 백성은 이런 하나님의 인도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죄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버림을 받고 말았습니다. 하나님 대신에 이방신을 섬긴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파괴하고 하나님께 대항했던 불신앙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구약 이스라엘은 실패했지만 새로운 장자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장자는 야곱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장자요 우리의 맏형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장자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장자백성이 된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장자가 이스라엘 백성이었지만 신약시대는 바로 교회가, 우리 성도들이, 바로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장자입니다. 야곱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짐승의 피를 통한 언약체결을 통해 장자백성 삼았지만, 우리 새백성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흘리신 보혈의 피와 찢기신 몸을 통해 새언약을 체결하셔서 장자백성 삼으셨습니다. 우리의 머리는 장자 야곱 이스라엘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사람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장자요 머리십니다. 이것이 신약백성의 복이요 특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누가 하나님의 장자입니까?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장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로운 백성된 여러분이 하나님 나라의 장자요 백성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앞길을 볼 때 암울한 시대입니다. I. M. F.라 해서 세상에 떠들썩합니다. 실업자가 150만을 넘어 170만에 이르렀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뭐 6월 대란설이니 하면서 겁을 주고 있습니다. 초 중 고등학교 학생 중에 많은 학생들이 점심을 싸가지고 오지 못해서 결식하고 있다고 합니다. 고용조정이라, 정리해고라 해서 근로자들이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평생을 몸바쳐 섬겨왔던 직장에서 하루 아침에 쫓겨난 아버지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마음에 커다란 상처를 안고 있습니다. 더구나 사업을 하느라고 온 힘을 다해 애섰는데 하루 아침에 와그그르 무너지면서 자살하는 중소기업 사업주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들의 심정이 오죽하겠습니다. 이 때문에 사정에서도 가정불화가 많이 일고 있다고 언론에서는 보도하고 있습니다. 서울의 큰 교회들은 헌금을 그동안 많이 하던 분들이 사업이 도산하는 바람에 헌금이 줄고 교회재정에 큰 타격을 가져오고 있다고 합니다. 전세라 뭐라 해서 부동산 분쟁이 폭주하고 있다고 합니다. 참으로 역경과 환란의 시대입니다. 어느 누가 말했습니까? 사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말입니다. 그 말의 의미가 확연히 드러났던 것이 1998년의 4월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일은 서울의 큰 교회들은 교회에 출석하는 성적이 높아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동안 풍요 가운데 취해서 주말이면 나들이를 떠나던 교인들이 정신을 차렸는지 어쨌는지 예배당에 찾아오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신앙의 눈을 가지고 세상을 해석하고 역사를 해석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경제위기를 이 땅에 주신 이유가 분명이 있다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그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통해 이 나라가 많은 교회의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교회성장과 기독교의 획기적인 성장을 가져왔습니다. 세계교회가 한국교회를 부러워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부와 풍요한 물질을 감사하지 못하고 오히려 타락과 배교의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물론 축복설교의 영향 때문에 그동안 교회를 다니는 이유가 축복을 받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축복을 받았으니까 더 이상 예수를 믿고 교회를 나올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타락과 교회의 부패가 하늘을 찌른 것입니다.
우리는 위기와 문제만을 바라보아서는 안됩니다. 그 위기와 문제가 발생한 본질과 동기를 찾아내고 그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합니다. 실직이나 구직 같은 것고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사업의 도산이나 성공도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어떠한 외형적인 성공같은 것이 그처럼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교회 역시도 외형적인 성장이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은 자칫 거품일 수가 있습니다. 이런 외적인 거품 때문에 우리가 신앙의 본질을 잃어버려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이런 황무지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해야 합니다. 외적인 것들에 빼앗겼던 마음을 찾아내어 하나님께 돌려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다시 한번 회복할 때입니다. 신앙의 본질을 찾고 새생활을 시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 나라의 장자백성으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장자백성을 버리시는 법이 없습니다. 아무리 잔인한 4월이라할지라도, 아무리 혹독한 I. M. F. 한판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실업의 위기도, 도산의 위기도 우리를 흔들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보호를 믿는 장자백성들은 죽음의 위기 가운데서도 다시 서는 부활의 신앙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다시 한번 신앙의 본질을 회복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갑시다. 하나님께 엎드립시다. 그러면 하나님은 여러분을 도우시고 복된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