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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줌마 다이어트 합니까 ? 얼굴에 살이 많이 빠졌는데" 라는 말을 듣고
내게 " 살이 많이 빠졌어 " 라고 묻는다 . 나는 전혀 그런 느낌이 없어
얼굴만 빤하게 쳐다보았다
" 당신은 나를 매일 보니 느끼지 못 하는 모양이다."라고한다
본인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내가 김해 명동리에 있는 부산본부 자재센터에 근무할 때 토요일이면
삼겹살 파티를 위해 카풀하는 윤태섭이 차에서 중간에 하차하여
엄마가 있는 동래 한양아파트에 간다
이 당시 동래역 주변에서 열리던 새벽시장은 경관을 해친다고 하여 2012년 6월부터 금지되었다
엄마가 오래된 동래 한양아파트에서 신축한 재송동 센텀 피오레로 이사를 했다 .
엄마와 마누라는 성품이 부드러운 사람이지만
어떠한 상황에서도 의연하며 당당했다.
두 분 다 자신에 대해서 강한 긍지를 갖고 외부의 압력에 쉽게 굴복하지 않았다.
엄마는 85세가 돠었을 때에도 은행 창구에서 숫자를 쓰고 서명을 직접했다
마누라는 늘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가 존경하고 아꼈다.
서로를 꿰뚫어보는 知人之鑑이 없었다면 이렇게 좋은 사이가 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엄마는 떠날 때를 알고 소지품을 정리하면서 기념될만한 물건은 전부 마누라에게 주었다.
엄마가 동아대학병원에서 "임종할 때 '북받치는 슾픔' 을 앙다물고 있는" 마누라의 얼굴을 유심히 보았다.
슴넷에 아무것도 모르는 자기를 따뜻하게 맞이해 준 때문일까.
여러차례 지인의 임종을 함께 했지만 그렇게 슬퍼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어째서 自來로 고부간은 개와 고양이처럼 앙숙이라 하였던가.
고향에 묘자리 조성공사를 의논하려
마누라와 함께 갔다
운전 중 우울한 기분인 모양이다.
" 안전 운전 하세요" 라고 분위기를
바꾸어 본다.
나의 뇌리에
" 어둑해지는 저녘무렵 남의 밭 배추 한 포기 잘못 뽑아 벌어진 소란과 난장판의 도가니"
" 유일한 생계수단인 재봉틀을 보따리에 싸서
전당포에 갔던 일"
"단체복이 잘못되어 반품되었던 일"
"코줄 달지마라" " 대동병원에서 임종하고 싶다 " 는 등 듣고 싶지 않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일
" 명륜국민학교 운동회 때 고구마를 삶아 가지고 온 기억" 등
엄마와 함께한 지난 세월의 風霜이 走馬燈 처럼 눈앞을 스쳐 간다
수민동은 동래구의 동남부에 있는 행정동이다.
법정동인 수안동과 낙민동의 앞뒤글자를 따서 수민동이라고 부른다.
1964 년 동래고등학교 대화재 시 동고의 역사와 전통에 밀려 학교를 옮기게하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그자리에 교사를 신축하게 할 수
밖에 없었다.
또 역사가 있는 지역이다보니 주변을 함부로 재개발 할 수가 없어 특이한 일이 생기는데
동해선 동래역, 1호선 동래역, 4호선 동래역, 4호선 낙민역의 경우가 그렇다.
시속 5km 걸음으로 낙민역과 동래역의 거리는 어느 방향이나 5~6분' 이므로 개찰구 통과 후 30분 내로 다른 역 개찰구 통과 시 환승이 적용된다.
동래역은 사실 지하철 1호선이 개통하기 전부터 동해남부선의 한 역이었다.
1호선 개통 당시에는 지금처럼 동해선이 복선전철화되면서, 같은 노선도 상에 표기가 될 것이라 생각은 못했던 모양이다.
공교롭게 1호선과 동해선 모두 교대역 다음 역이 동래역이다.
그러나 먼저 생긴 동해선 동래역에 비해 1호선 동래역이 접근성이 좋아 오히려 인지도는 더 높은 편이다.
그런데다가 이곳으로 지하철 4호선까지 들어오면서 이제는 동해선 동래역이 오히려 다른 역 이름을 사용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러나 역사적인 점을 감안해 동해선에서도 동래역을 포기하지 않은 것 같다.
실제로 동해선 대합실에는 동래역 역명의 유래에 대한 안내도 볼 수 있다.
"역 이름 다르고 환승안내 없지만...
환승은 가능한 역"
지하철 4호선 낙민역의 경우 동해선 동래역 인근에도 동래역이 있는데, 거기서도 동래역이라고 하면 같은 노선에 동일한 역 이름이 두 개나 되므로 이름을 피한 것 같다.
낙민역은 동해선 동래역에서 한 블록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는데, 두 역은 30분 내로 환승할 수 있는 역이다.
그런 점을 감안해서인지 동해선 동래역의 출구에는 낙민역에 대한 안내가 있다. 반면 낙민역은 출구 안내에는 따로 동래역 표기가 없다.
대신 열차 내 안내방송에서 동해선 동래역으로 환승이 가능함을 안내하고 있다.
어쨌든 두 노선은 2차선 좁은 도로를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다. 이동거리도 5분이 채 되지 않아 환승역에 버금간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4호선과 동해선은 이곳 외에서는 만나는 곳이 없기에 부전역과 다르다. 만약 4호선이 기장까지 연장된다고 하면 그곳에서 두 노선이 만나겠지만 당장은 상호 간 환승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낙민역과 동래역은 환승에 있어서도 중요한 위치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승강장에는 상대역에 대한 별도 안내가 없다. 노선도 상에도 두 역은 단독역으로 표기된 만큼 어쩌면 당연한 모습이다
한편, 낙민역은 섬식 승강장(島式 乘降場)이고 동래역은 쌍섬식 승강장이어서 승강장만 놓고 보면 분위기가 상당히 유사하다.
도로와 나란히 이어지는 낙민역과 그 도로에서 살짝 벗어난 곳에 위치한 동래역은 서로 마주보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물론 기차역이었을 때 동래역은 낙민역 출구와 접한 도로의 끝에 위치하고 있어서 나무가 무성하지 않은 시기에는 낙민역의 역 폴 사인(pole sign)과 동래역 역사가 한 눈에 보인다.
그러나 새로 만들어진 전철동래역은 그 골목 끝에서 또 좌측으로 치우쳐 역이 만들어진 관계로 낙민역 역 폴 사인(pole sign)이 있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다.
현재 동래 기차역 역사는 공사가 진행 중이다.
철거하는가 싶어 우려했지만 플래카드를 보면
역사 보존을 위해 보수공사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존에 기차역으로써 활용되던 역사가 어떻게
바뀔지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일 것 같다.
수민동은 안락동, 칠산동 및 연제구 거제동 그리고 연산동과 이웃한다.
이 곳에는 수민동 행정복지센터, 낙민파출소,
동해선 동래역, 동부산대학, 낙민초등학교, 안민초등학교와 동래패총(東萊貝塚, 사적 192호) 동일고무벨트 공장 등 주택 과 빌라등으로 도로가
협소하고 복잡하다.
학원 특성상 특수아동들이라 애들을 데리고 올때 집앞까지 가야하니
이곳에 운전할 수 있는 사람은 베스타 드라이브가 아니면 안된다.
어느날 마누라가 사무실로 전화를 했다 .
내가 봉급쟁이 생활을 시작하고 처음이었다
" 나 지금 사무실 근처에 왔으니 좀 나오세요 "
지하 식당으로 데리고 가니
" 나 택시 운전하겠다 "라고 한다
택시 기사라는 직종이 의아했지만
언제 부터가 경제행위를 하고 싶어하는 미심쩍은 낌새가 보였다.
새벽 4시에 교대하여 오후 4시에 맞교대하고
ㅜ짝꿍도 신시가지에 거주해서 교대지는 해운대 체육공원이라고 한다
나는 " 모든 것 다 혼자 결정해 놓고 이야기하는 이유가 뭐냐 " 라고 웃으며 말했다.
" 이야기하고 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 라고 한다
내가 이래라 저래라 할 것이 아니다
" 소한의 추위는 꾸어다가도 한다."
라는 말도 있다.
추위를 뚫고 생업을 위해 일 나가는 사람은 아니지 않는가
못하게 할 이유가 없다.
" 알아서 하되 녹록치 않을거다 "
나는 자고 있는데 부시럭 거리며 돈주머니 챙겨 나가며 " 아침 밥 국만 뎁혀 먹고 나가세요 "
나는 사무실 가서 식당에서 해주는 맛있는 밥 먹을 테니 신경 안 써도 되니 제발 안전 운행하라고 오히려 부탁해야 했다
"신경 써 여도 예사로 써 이는 게 아니다."
퇴근 후 일찌감치 들어가
오늘 하루 운전 경험을 듣는다
" 오늘 재송동 승객 태우고 가다가 오르막길에서 차가 퍼져 랙카가 왔다 "
오늘 공항 가는 승객을 비행기 탑승 시간에 맞출서 없어
" 손님 ! 택시요금 드릴 테니 빠른 택시 타세요 " 라고 부탁했다
택시회사에서 왕초보에게 좋은 차를 배정해 줄리도 없고,
남의 돈 가지고 온 다는 게 쉽지 않다.
삼 개월 정도 버티더니 그만둔 모양이다.
나는 이제야 지옥 같은 생활에서 벗어 났다.
이 경험이 교육원 근무 시 학원생들을 데리고 오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과연 과녁에 꽂힌 화살의 개수는 쏜 화살의 개수보다 결코 많을 수 없다는 것은 삶에 있어서도
진실이구나.
현재의 도시 부산은 근대식 개항도시인 부산항을 중심으로 현재 남포동 일대에서 1876년부터
근대식발전이 시작되었다
조선시대 때 부산의 행정 중심지역은 항구지역이 아닌 좀 더 내륙 쪽에 위치한 동래부라는 곳이다.
동래부의 수장인 동래부사가 머무르던 동헌이
위치한 동래읍성
이 부산의 중심이었다.
현재 행정동인 수민동에는 동래부 동헌, 동래경찰서, 동래시장, 장관청 같은 중요 시설이 남아있고
아직 이곳은 대단지 주택 개발이나 큰 건물이
들어서지 않았고 옛 공장의 모습들이 일부 남아 있다.
위로는 동해선이 지나고 있어 협소한 골목길이 거미줄처럼 엮여 있다.
이 지역에는 여러명의 학원생이 있어 자주 왔다 갔다 해야 한다.
내가 항상 조수석에 앉아 위험에 대비하고 있어야 했다
이 지역에는 아주 작은 실개천이 흘러내리고 있는데, 이게 나름대로 동네의 분위기를 살려주는
역할을 한다. 맑고 깨끗하다고는 못하지만 악취가 날 정도의 오염된 물은 아니다.
주변을 꽃과 나무로 가꾸고 있는 데 개천을 정화하는데도 신경을 쓴다면 목가적인 동네로 살아나지 않을까 싶다.
이 일대에서 "동일 " 직원들의 출퇴근 을 보며
자란 50대 주민이 이야기 한다
"수안커피컴퍼니를 시작으로 동일벨트에서
이 일대의 예전 공장부지를 활용한 문화공간들을 만들어 줬으면 좋겠어요."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동래시장과 가까운 동래구 낙민동에 1797년 심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팽나무 보호수가 있다.
지면에서부터 두 개의 굵은 가지가 나란히 하늘로 뻗어 있어서 한 그루가 아니라 두 그루처럼
보이는 이 나무는 극적인 邂逅를 한 부부인 양
할말도 잊은 채 마주보고 있다
1797 팽나무 하우스는 크지는 않지만 아담하고 예쁜 건물이다. 동래 구민을 위한 공간이라는
글이 보이기는 하지만 이곳을 지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할 수가 있다
1층은 북 카페, 요리교실, 사랑방, 행사용으로 사용되고 있다
2층은 서재 및 문화예술 창작공간, 회의실로 사용하고 옥상은 팽나무 공원으로 이용되고 있다.
머리 위로 222년 된 팽나무 가지와 잎들이 하늘 가득히 채우고 있어서 분위기도 참 좋다
기와를 올린 나지막한 돌담 앞에는 대나무가 심어져 있는데
다른 곳에서는 보기 어려운 60년을 주기로 꽃이 피고, 열매를 맺은 후 말라 죽는 烏竹이 섞여있어서 운치를 더해 주고 있다.
부산 4호선 수안역 4번 출구로 나와
머리를 들고 보면 " 옥전서예 학원 "
이란 문구가 書藝 처럼 예쁘게 붙어있다 .
마누라도 서예를 한 것이 생각나 나도 해보자고 등록했다.
마누라가 쓰던 벼루로 먹을 갈아 한 일년 배웠다 .
지금 실력은 " 立春大吉 "
"建陽多慶" 을 쓰는정도이다
4호선 낙민역 1번 출구로 나오면 법정동인 칠산동이 있다.
삼국시대에는 신라의 거칠산군(居漆山郡)이었다가, 통일신라 때 동래군(東萊郡) 관할로 바뀌었다
1740년(영조 16) 동래부 읍내면이 되었다가, 1942년 부산부 동래출장소 칠산리가 되었다. 1946년 칠산리가 칠산동으로 바뀐 뒤, 1957년
복천동과 함께 동래구 복산동의 법정동이 되었다.
지금도 동래읍성 뒷산을 칠산으로 부르고 있는
것도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한다.
교육기관으로 칠산동에 동래고등학교가 있고,
복천동에 내성초등학교가 있다
문화유적으로는 동래읍성지
(부산광역시기념물 5)와 동장대(東將臺)가 있다.
그밖에 대한불교조계종 법륜사가 위치한다.
동래고등학교 정문은 4호선 낙민역 1번 출구로 나와 우측 길로 150여 미터 지나 있다. 박차정 열사 생가를 왼쪽에 두고 직진한다.
이 학교에도 교육생
이 있어 일주일에 두서너 번 간다.
정문을 들어서면 곽상훈 선생의 훙상이 내려다
보고 있는 FIFA규정에 따른 축구장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이 학교로 진학한 중학교 동기 ㅇㅇㅇ와 7반
김ㅇㅇ는 부암동 에서 함께 寄宿하며 공부했다.
ㅇㅇㅇ 친구는 서울대학에 진학했고
ㅇㅇ는 내 몪까지 챙겨 " 찬합 "에 점심을 가지고 오너라 별명이 " 식티 " 가 되었다.
나는 여기에서 진실만을 말한다
" 김ㅇㅇ는 '식충이' 가 아니다 "
그 당시에 그렇게 얼토당토아니한 소리에 감정을 낭비할 김ㅇㅇ는 아니였지만
내로 인하여 별로 좋은 별명은 아닌 별명을 가지게 되었으니 미안할 따름이다
이들과 疏遠하게 지낸 세월이 아쉽다
본관 정원에 白松 한 그루가 멋있는 자태로 폼나게 서 있는데
이 백송은
평교사 시절" 마산고 , 사대부고" 학생들에게
전설적인 인물로 알려진 " 목청수 자형"께서 교장으로 재직한 기념수다.
이 사람에게 처음 영혜를 소개했을 때 했던 말이 문뜩 떠오른다
" 영혜씨 ! 욱곤이와 사귀면 고생 많이 하게 될꺼요 " 였다.
아니 " 평생 고생 할 꺼요 " 이다.
이제 생각하니 장래를 내다보는
先見之明이 있는 사람이라
돗자리 깔고 앉아서면 누나 호강하며 평생을 지냈을 텐데.
검은 토끼(癸卯年)는 朔이 되어 떠나가고,
푸른 용(甲辰年)이 새로이 온다. 푸른색은 희망, 이상, 젊음을 상징한다
.
푸른용의 해는 새로운 목표를 향해 출발해야 하는 해이다
나는 어떤 목표를 세워야 실행할 수 있을까.
이제는 마무리가 지어야 하니까
살아오며 나로 인하여 허물어진 것들을 제자리에 돌여 놓고
먼 길 떠나는 나그네가 되자.
정약용은
손무자를 읽고(讀孫武子)’라는 시에
‘인생은 먼 길 떠나는 나그네 같다
(人生如遠客)’
‘초연히 내 갈 길을 혼자서 가면
(超然得孤邁)
차차 내가 생각한 대로 정해지겠지
(庶慰我所思)’라고 했다
우리 일흔 살 이상이니
큰 행운으로
보너스로 사는 인생이라 생각하고
감사하며 살아야 할 것 같다.
한 해의 끝과 새해의 시작에 행복 하시길
축원드리며
다시 먼 길을 떠나는 분들에게
큰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