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관계로는 싱어송라이터겸 개신교목사인 오빠 윤항기(尹恒基)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기로 윤복희의 남매는 윤항기1남 1녀로 오해하지만 실제로 윤복희가 SNS에서 남매로는 오빠 윤항기와 현재 개신교목사인 윤영기가 있고, 언니 윤수현이 있다고 밝혀 실제로는 2남 2녀로 밝혀졌다.
결혼과 이혼
1968년12월에 가수 유주용과 결혼했으나 어린 나이에 결혼한 탓이 있는지 성격과 경제 차이에서 많은 갈등이 있었다고 한다. 그 후로 유주용과 이혼한 후 유주용은 미국으로 이민하였다.
이혼 이 후, 가수 남진과의 스캔들이 터졌는데, 평범한 기사가 잘못 와전되어 윤복희와 남진의 연애 스캔들 기사가 나온 것이다.
결국 1976년가수 남진과 결혼하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악성 루머가 터지고 안 좋은 소문이 돌기 시작하자 끝내 1979년이혼하였다.
이 후로는 현재까지 독신 생활을 해오고 있다.
미니스커트 사건
윤복희는 우리나라에 미니 스커트를 제일 처음 알린 인물이기도 하다. 그런데 1990년대 중반 신세계백화점이 윤복희의 미니스커트를 소재로 CF를 제작했는데, 1960년대 중반 외국에서 서울로 돌아온 윤복희가 미니스커트 차림으로 비행기에서 내리며 계란 세례를 받는 장면을 페이크 다큐로 촬영한 것이다.
그런데 윤복희는 훗날 무릎팍도사에서 "그 일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밝혔는데, 사실 윤복희는 해외 활동 도중 오빠 윤항기와의 연락이 닿지 않아 걱정되는 마음에 1967년 1월 김포국제공항을 통해 일시 귀국하였는데, 사실 계란 세례는 후에 과장되게 한 것이고 오히려 추운 날씨로 미니스커트가 아닌 롱 코트에 트레이닝 바지 차림으로 귀국했다고 한다.
또한, 공항에 내린 직후 통행금지가 해제될 때까지 기다리다가 평범히 택시를 타고 서울로 왔다고 한다.
윤복희가 선보인 미니 스커트는 당시 여성들에게 많은 센세이션을 일으키는데, 이 미니 스커트의 영향으로 당시 시대상으로 여성들의 치마가 짧아지는 것을 금기시 하였는데, 미니 스커트가 금기를 넘어서자 정부에서는 급기야 치마를 일정 길이 이하로 못 줄이게 하고 줄자로 치마 길이 단속에 나서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2016년 박근혜 게이트 관련 트위터 사건
윤복희는 2016년 박근혜 대통령의 측근 비리 및 전무후무한 부정 부패 사건에 관련하여 본인의 sns 트위터 계정에 대한민국을 위해 기도합니다. 내 사랑하는 나라를 위해 기도합니다. 억울한 분들의 기도를 들으소서 빨갱이들이 날뛰는 사탄의 세력을 물리처주소서라는 글을 올렸다. 일부 대중들이 윤복희에게 기도의 대상이 누구인지와 빨갱이라는 단어 그리고 사탄이라는 단어의 해명을 요구하였지만 논란을 풀기엔 한참 부족한 해명만 되풀이 하였다.
대표곡
대표곡 '여러분'은 가수이자 작곡가이던 윤항기가 여동생 윤복희를 위해 작곡한 곡으로 알려져있으며 1979년 제3회 서울 국제가요제에서 대상을 수상한 노래이다. 2011년 '나는 가수다' 프로그램에서 임재범가수가 '여러분'을 열창한바있다. 한편 2014년 KBS2 ‘불후의 명곡 - 전설을 노래하다’ 에서 가수 에일리가 리메이크하여 부른 노래가 호평받은바있듯 윤복희의 '여러분'은 많은 리메이크로도 유명하다.
전라남도 목포 출생인 그의 현재 주요 거주지는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이다. 그는 "한국의 클리프 리처드"라 일컬어지는 등 1970년대 최고 전성기를 보냈다.
주요 노래로는 "가슴 아프게", "님과 함께", "너와 나", "미워도 다시 한 번", "둥지" 등과 장윤정과 함께 부른 "당신이 좋아" 등이 있다.
출생~학창시절
남진은 전라남도목포유달정에서 목포일보의 발행인이었던 아버지 김문옥과 어머니 장기순 사이에서 3남 4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남진은 아버지 덕분에 목포최고의 부잣집으로 불릴만큼 꽤 부유하게 자랐다. 아버지 김문옥은 목포를 주름잡는 거부이자 야당계의 거물이었다. 신익희, 조병옥등이 호남 지역에 가면 항상 그의 집에서 머물렀으며 김대중또한 인사차 들렀다고 한다. 하지만 형 김상진이 아버지를 이어 신문사 및 정계에 관련된 사업을 이어가자 남진은 아버지처럼 정계에 관심을 가지는 것보다 인기 있는 배우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이후 목포고를 졸업하고 상경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배우의 꿈을 가지고 있었던 남진은 아버지 몰래 한양대연극영화학과에 입학하였다.
1960년대
평소 배우 지망생이던 남진은 약 2년을 한동훈음악학원에서 트레이닝을 받고 1965년에 '서울 플레이보이'를 발표하면서 팝 가수로 데뷔하였다. 데뷔 당시 여러 팝 장르의 노래들을 불렀지만 히트를 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어머니가 즐겨서 불렀던 그의 트로트 곡 〈울려고 내가 왔나〉가 처음으로 히트하자 일찌감치 트로트로 전향하였으며 1967년에 히트곡메이커였던 작곡가 박춘석의 〈가슴 아프게〉를 부르면서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남진의 직업은 가수였지만 1967년에 박상호감독의 영화 《가슴 아프게》에 주연으로 처음 출연하면서 부터 영화 배우로도 활동하게 되었다. 그 해에 장일호감독의 영화 《그리움은 가슴마다》에 주연으로 출연하였는데 국도극장에서 처음 개봉하여 약 10만 명의 관객을 동원시킨 흥행작으로 지방에서도 폭발적인 흥행기록을 올렸다. 데뷔와 동시에 인기를 얻었던 남진은 1968년 해병대 청룡부대(해병 2여단 2대대 5중대 2소대)에 입대하여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였다.
1970년대
1971년에 전역한 후 〈마음이 고와야지〉를 발표하였고 서울시민회관에서 리사이틀 공연을 시작으로 활동을 재개하였다. 복직 당시 정통 트로트로 많은 인기를 얻고 있던 나훈아와 가요계의 쌍벽을 이루게 되었다. 1972년에 〈님과 함께〉를 발표하며 엄청난 인기몰이를 하게 되었고 톱 가수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나훈아와 라이벌 구도를 이루게 되면서 1970년대의 대한민국 가요계를 주름잡았다. 남진과 나훈아는 서로 호남과 영남출신의 가수로서 지역 사이에서 경쟁을 벌였으며 박진감 넘치고 활발한 성격의 남진과 조용하고 서정적인 성격을 가진 나훈아의 차이로 대중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으며 1970년대의 가요계를 이끌었다. 당시 가수왕에는 줄곧 남진이 1등을 하여 가수왕상을 수상하고 나훈아는 2등을 한 것으로 기록되었고, 전성기를 맞이한 남진과 나훈아를 꺾을 가수가 없었다. 전성기를 누리고 있을 때도 남진은 또한 뛰어난 외모로 영화계에서도 알아주는 배우여서 주연으로 여러 번 캐스팅되었다. 한창 바쁠 시기에 유명한 여배우들과 호흡을 맞추면서 약 60여편의 영화에 출연하였다. 1976년에 윤복희와 결혼을 발표하면서 엄청난 화제가 되었다. 하지만 남진 부부는 가정폭행과 연루되어 결국 3년 7개월만인 1979년 3월 9일에 이혼하게 되었다. 남진과 나훈아는 결혼과 동시에 방송 출연이 줄어들고 조용필의 등장으로 점차 가요계의 주도권을 내주게 되었다.
1980년대
그리고 1980년에 신군부의 등장과 함께 남진은 정치적 탄압을 받았고 이 시점부터 남진은 가수 활동을 그만두고 재혼과 동시에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몇 년간 미국에서 지내다가 1982년에 귀국하여 〈빈잔〉을 발표하였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남진의 귀국과 함께 남진은 정통 트로트 곡 〈빈잔〉이 크게 히트하였다. 그렇지만 약 3년 간의 공백으로 가요계에는 수많은 가수가 등장하였고 결혼 후 신인시절처럼 그다지 인기를 많이 얻지는 못했다. 1985년에 그는 가수 복직이 큰 성과를 이루지 못하자 고향인 목포로 내려가 유흥업소를 운영하였다. 1989년 11월에 목포에서 유흥업소를 운영하던 남진은 조직 폭력배와 난투극 중에 중상을 입어 몇 차례의 대수술을 받았다. 이 사건으로 남진은 휴식기에 접어들었다.
1990년대~현재
1993년, 남진은 〈내 영혼의 히로인〉을 발표하면서 다시 대중들에게 인기를 얻게 되었다. 이 노래는 여성 팬들에게 많은 성원을 받게 되었다. 남진은 팬들의 성원에 힘입어 7년만에 앨범을 발표하여 1999년에는 〈둥지〉를, 2005년에는 〈저리 가〉를 발표하였고 2008년에는 〈나야 나〉를 발표하며 현재까지도 지속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 2008년 초대 대한가수협회회장으로 선출되어 약 3년 간 역임하였고 2009년에는 장윤정과 함께 〈당신이 좋아〉를 발표하여 대중의 이목을 집중시켰으며 2010년 데뷔 45주년 기념 음반을 발표하고 단독 콘서트를 개최하기도 했다.
남진이 데뷔할 당시에는 시대상으로 정부가 대한민국의 대중가요를 왜색가요라고 시비를 불러일으켰고 방송가요심의전문위원회가 발족되어 창조적이지 못하고 건전하지 못한 가요와 왜색가요는 방송의 규제를 받게 되면서 대한민국 대중가요의 암흑기가 도래하게 되었다. 하지만 1970년대에 남진과 나훈아의 등장으로 대중가요의 활성화를 불러 일으키면서 트로트말고도 다양한 장르가 대중가요에 등장하는 계기가 마련되어 대중음악이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