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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국 (기원전 213년. 기원전 18 ~ 660년)
백제국은 단군조선 삼한의 78국 중의 한 나라가 졸본부여에서 남하한 북부여 왕 해부루의 서손 부 우태와 졸본 사람 연타발의 딸 모 소서노의 아들 비류와 온조, 그리고 오간, 마려 등 열 명의 신하와 따르는 많은 백성들과 함께 남하한 세력이 합하여, 패수와 대수 두 강을 건너 대륙 중서부 미추홀(섬서성, 황하 중류 유역, 위하평원, 염전원인)로 가 비류가 왕에 올라 나라를 건국하게 됩니다.
그러나 마려, 오간 등 4신하는 온조에게 간하여, 하남 북쪽에 대방과 한강이 있고, 동쪽은 높은 산을 의지하고, 남쪽은 비옥한 벌판이고, 서쪽은 큰 바다로 막힌 천험지리 지세인 하북 남쪽 하남 낙양 바로 동쪽 몽양시 지역인 위례성에 도읍하여, 기원전18년에 개국하고 초대 국호를 '십제'라 하고 국성을 부여씨라 하며, 시조 온조왕(기원전18~28년)이 즉위하였으며, 비류국은 이에 반하여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안히 살수 없어, 온조왕에 귀부하여 합치게 되면서 후에 국호를 백제로 고치게되며, 위례성은 뒤에 한성으로 불리고, 한성 도읍은 북성과 남성 2성체제를 둡니다.
일설은 하남성 위례성은 지금의 직산현이고, 산서성 안읍과 하현의 북쪽에 있는 곳이며, 여러 지리서를 조사해본 결과 백제시대 때의 하남성 서북쪽은 현재에 와서 성의 위치가 바뀌어 산서성 최 서남부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일설에 백제의 '제'를 산둥성의 제수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는 설로, 즉 남쪽으로 내려온 부여족은 부락이 점차 늘어나자 옛 산둥성 제수로부터 유래한 그 뿌리를 망각하지 않기 위해, 나라 이름을 백제라고 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의견인데, 그동안 백제의 발상지를 한반도의 하남 위례성으로만 인식했기 때문에 백제라는 나라 이름에 대한 명확한 유래를 찾을 길이 없었지만, 백제의 발상지가 지금의 산둥성 추현의 부산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백제 국명의 유래도 제수와 연관지어 찾아야 하며,
지금도 제수는 산둥성을 가로질러 흐르고, 현재 산둥성의 성 소재지 지난시는 제수의 남쪽에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고, 제수는 옛 사독, 즉 강, 하, 회, 제, 등 사대수 중의 하나로 허난성현 서쪽 왕옥산에서 발원해 동쪽으로 흘러 산둥성으로 들어가며, 그 하류는 동북쪽으로 흘러 황하와 함께 바다로 들어가, 제수 주위에 여러 동이부족 집단이 형성되어 국명을 백제라 했을 수도 있고, 또 기록에 100여명에 이르는 부여족이 제수를 건너 남쪽으로 내려와서 나라를 세웠다 해서 백제라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백제는 산둥성의 제수와 연관지어 보는 것이 자연스럽고 논리적이며, 또 백제는 고구려나 신라와 달리 건국시조 설화부터 논의가 엇갈리는데, 예컨대 제족의 고대문헌기록은 백제의 시조는 온조라고 기술하고 있는데 반하여, 주서 49권 백제전, 수서81권 백제전 등 중국 사서 가운데 일부는 백제의 건국시조를 구태라고 기록하고 있어,이 같은 차이는 백제의 초기역사기록에 문제가 있음을 말해줍니다.
고구려 사초 기록에 기원전17년 갑진, 정월, 순노는 비류가 미추홀(밀산)에서 다스리고, 관노와 계루는 온조가 우양에서 다스리고, 연노, 황룡, 행다, 비리는 상과 소황후가 다스리도록 하여 소후의 마음을 위안토록 하였다. 하고, 한남왕 온조가 입조하여 위나성(경박호동)으로 도읍을 옮기겠다 청하니 허락하였다. 하여, 처음에는 고구려 추모왕의 의향대로 나라가 시작되음을 알 수 있으며,
한남왕이란 국명이 한남산 한양부가 있는 한수지역으로 고구려의 남평양에 속하고, 나중 백제가 한양이라 불렀던 지역으로 보는데, 기록에 고전의 기록을 살펴보면 동명왕의 제삼자 온조가 전한 홍가 3년 계묘에 졸본부여로 부터 위례성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왕이라고 칭하였는데, 389년을 지났다. 하고, 13대 근초고왕때에 이르러 고구려의 남평양을 취하여 한성에 도읍하고, 105년이 지났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고구려와 백제가 모두 부유의 후예인 부여족의 한 갈래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 중 굳이 부여족의 정통성을 따진다면 백제에 있다고 말하고 싶은데, 그 이유는 고구려는 나중에 동부여를 병합함으로써 부여를 멸망시키는 결과를 가져온 데 반하여, 백제는 부여장, 부여륭, 부여풍 등 왕조의 성씨를 아예 부여로 쓰고 또 남쪽으로 천도한 이후에도 남부여라는 국명을 쓰면서 부여를 계승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위지 동이전 마한 조에 의하면, 고대 아시아 최대 해운국이던 마한은 종자가 뿌리내릴 좋은 땅이 있고, 그 주변에 호수가 있은 곳을 죄 골라서 호수와 그 주변에 소도가 있고, 주변의 옥토는 천군이란 군장이 다스리고 있고, 그 주변 농토에는 범법자들이 자유로이 와서 농사를 지어도, 마한의 왕권이 미치지 않는 그런 곳으로, 마한의 경우다른삼한과 같이 천군과 왕이라는 두 종류의 군장 즉 임금이 있는 경우가 되어, 정확히 주역의 일군이이민에 대응이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이군일민 체제가 고대 아시아에는 보편적이란 사실로, 신라는 갈문왕과 왕, 또 고구려와 백제는 대대로와 왕, 오월은 태재와 왕, 흉노는 골도후와 선우, 또 이런 이군일민 체제의 원형인 고조선은 단군과 상으로 소도를 관장하는 군장과 일반 영토를 관장하는 2개의 임금 제도가 일반적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때 백제는 왕성이 둘이였는데, 하나는 왕성이고 하나는 관경삼국을 운영하는 소도의 역할을 하는곳으로, 이곳의 주인으로 비류왕이 비류선제로 있었으며, 그 계보가 신기할 정도로 비류선제와 황후 벽라후와 사후 황후 만후로 이어지는 이 세 사람만큼 관경삼국 초기 시절에 권력에 대해서 완벽히 초탈한 입장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천독들에 대한 도덕적 충성심에 봉사한 사람들은 발견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들이 없는 비류왕은 딸만 셋인지라, 소도의 군왕으로써 세습적 우선권이 더 이상 진행되지 않고, 일반 천독들에게서 옹립되어 단군이 되게 하는 결정을 비류선제와 벽라후는 서로 하게 되자, 이 말을 들은 소서노 태후는 내아들 비류가 저런 행동을 하는 것은 따지고 보면, '내가 재가를 해서 일어난 인연의 얽힘에 대한 반항이라고 할 수 있다. 다 나의 잘못이다.' 고 말할 정도로 완강하였던 것이며,
온조가 어머니를 위로하여 말하기를 '어머니가 재혼한 것이 어찌 죄가 되겠습니까 형이 재혼을하지 않은 것은 또한 선중의 선으로 숭상하고 본받아야 할 일입니다. 형수를 사랑하는 마음을 덮는것은 오히려 이미 아님이 있는 까닭이니 나라의 근본을 바로 세우기 위해 형이 하고자 하는 대로 두는 게 좋겠다'. 하였다 합니다.
각설하고 이렇게 단숨에 두 나라를 건국 할 수 있었던 것은 기록에 나오는데, 상장군 연타발은 졸본사람이고, 갈사국 남북을 왕래하며 소금 장사로 큰 재물을 모아 부여국이 나라를 개국할 때 큰 도움을 주며, 그의 딸 소서노를 주몽이 후처로 삼고, 후에 무리를 이끌고 구려하로 옮겨와 고기잡이와 소금장사로 모은 이익을 고주몽 성제가 북 옥저를 토벌 할 적에 양곡 5천 석을 헌납하였고, 도읍을 눌현으로 옮길 때도 먼저 자원하여 헌납하며, 나라가 망한 유랑민들에게 일을 주어 살게하여 추모왕은 그 공으로 좌원 왕사로 책봉하였습니다.
소서노는 여장부로 대방 죽담성 주변에 2천리의 땅을 소유하였다라는 기록이 있을정도의 거부여서, 비류백제와 온조백제 두 나라를 동시절에 건국하게 만들 수 있었는데, 이러한 백제의 지배층은 본래부터 압록강 유역일대를 근거지로 해상활동을 장악하던 거부인 국제해상 상인세력들 입니다.
기록에 백제는 바로 후한 말기 때 부여왕 구태의 후손이다. 마한의 오십사 나라 가운데 백제는 그 하나였는데, 초기에 백가가 바다를 건넜던 까닭에 십제, 백제라고 불렀다. 하였고, 백제는 옛 래이인 마한 소속이었다. 진나라 말 구려가 요동과 낙랑을 취하였고, 백제 역시 요서와 진평현을 차지하였다. 고 나오는데, 참고로 래이는 산동북부지역에거주하던 은, 상나라를 세운 세력입니다.
시조 1세 온조왕(기원전18년~)이 개국하였다 하였으나, 이는 고구려의 개국을 부여로 보는 설이며, 고구려의 개국을 고리국으로부터 출발하는 고리국설이 기원전 232년 이므로, 그 기본 기원을 195년을 앞선 213년으로 시조를 부여왕 위구태 로 하는 통전의 기록으로 하고, 각론은 부여설인 기원전 18년으로 정리합니다.
그것은 기록에 백제는 그 선대가 대개 마한의 속국으로 고리국에서 나왔다고 하기 때문이고, 백제가 부여계라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마한의 속국이라는 점으로, 이문제는 나중에 부여계의 정통성 문제로 고구려와 알력이 생깁니다.
온조왕은 원년(기원전18년)에 동명왕묘를 세우고, 북의 말갈과 동의 낙랑 등 침입을 대비하여 병장기를 수선하고 양곡을 저축하며, 2년 을음을 우보로 삼아 군세를 강화하며, 수차례 말갈 침입을 막아 내었으며, 수시로 성책을 보수하고 성책을 세우고, 지방을 순시합니다.
또 주변국과의 우호를 유지하였으나, 사로국 사자 낙랑태수의 도발로 개국 초기부터 사로국과는 우호를 잃게 되었으나 마한과는 친선을 유지하며, 영토를 넓히고, 농사를 장려하며, 궁성과 대궐을 세우며, 한강 서쪽 한성의 백성을 나누어 살게 합니다.
20년(2년) 하북 북경에 원구단 천단을 설치하고, 동명천제와 천지에 대제를 지내고, 26년(8년) 기준왕 마한이 쇄하자 그의 국읍을 병합하고, 28년(10년) 마한의 남은 원산성, 금형성, 두성이 항복하므로서 마한이 멸망하게 되며, 이후 31년~37년 지진, 우박, 등 천재지변으로 흉년이 덮치고, 도망자나 아사자가 나오고 패수, 대수, 사이가 비게되자, 이를 순행하며 백성을 위무합니다.
수서의 기록에 처음 나라를 대방의 옛땅에 세웠다. 한요동 태수 공손도의 여자를 처로 하고, 점점 창성해지더니,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 처음 백개의 집(선단)이 바다를 건넜기에 이로 인하여 백제라 불렀다. 십여대를 지나면서 중국의 대신이었다. 하였는데, 대신이라함은 사해 밖의 제후가 늘 천자를 찾아뵈지 못할 때에, 제후를 대신하여 제의 도시 제도에 상주하는 높은 지위의 신하를 뜻합니다.
그런데, 대신중국 이라함은 중국의 천자가 사해 밖의 제후들을 순수하면서 늘 보살피지 못하기 때문에, 중국 천자를 대신해서 그 일을 맡는 것을 뜻하는데, 십여대의 중국천자가가 바뀌어도 이런 일을 백제가 해왔던 것이라고 적혀있는 것이며, 이것은 백제가 전통적인 한제족국의 제도인 낙양과 장안 바로 옆에 하남 위례성을 설립한 이유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5세 초고왕(소고. 166년) 때에 왕의 명칭이 고, 구, 로 바뀌며, 온조계 해씨 왕통이 바뀌며, 4세 개루왕 말년에 신라에서 모반을 꾀하다가 발각되어 백제로 도망해온 아찬 길선의 송환문제로 신라와 불화가 생기자, 이로 말미암아 초고왕의 즉위 후 신라와의 공방전이 되풀이되었으며, 205년 장춘 방면의 부여왕 위구태가 부여 무리를 이끌고 공손강이 설치한 대방군으로 이동하여 구태백제를 세웁니다.
6세 구수왕(214~234) 때 진나라에 사신을 파견했는데, 바다에서 모진 바람을 만나 되돌아왔다는 기록이 있는데, 백제의 근구수왕은 열도에서 백제의 첨로, 담로를 개척하기 위해서 열도에 장기간 동안 계셨던 분으로, 위 기록은 열도에서 대신중국하는 백제의 왕으로써 사신을 파견한 기록인 것으로 보입니다.
7세 구이왕(234년)이 대방백제왕에서 백제국의 제위에 오룹니다. 16세 침류왕(384~385년)은 백제에서 처음으로 불교를 공인한 왕으로, 384년 호승 마라난타가 동진에서 오면서 이로부터 불법이 시작되었으며, 다음해 한산에 사원을 세우고 10명의 승려를 두었으나, 기존 신앙인들이나 일부 지배층의 많은 반발을 가져와, 불교사원 개원 9개월 후 왕이 사망하며, 동생 진사왕이 왕위에 오르며, 12세 비류왕(304~344년)은 구수왕의 아들로 유학을 국가통치 상에서 지배이념으로 받아들였으며,
14세 근초고왕(346~375년) 때 박사 고흥이 백제 역사서 서기를 편찬하였으며, 16세 침류왕(384~385년) 원년에 동진의 마라난타가 불교를 전하여 불교가 퍼지게 되고, 침류왕이 죽자, 동생 진사는 조카 아신의 왕위를 찬탈하여, 17세 진사왕(385~392년)이 되고, 392년 10월 광개토왕의 공격을 받고 관미성이 함락되고, 고구려에 항복하며, 7년 뒤 그해 11월 기각숙리 등이 진사왕을 죽이고 18세 아신왕(392~405년)을 세우는데, 이는 아신이 숙부 진사왕을 쫓아내고 왕위에 올랐던것으로, 왕족 사이에서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일어난 갈등인데, 배후에는 왕비족으로서의 진씨 세력의 힘이 강하게 작용한 결과로, 진씨 세력은 군권을 장악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것입니다.
왕위 계승을 둘러싼 지배세력 사이의 갈등은 아신왕이 죽은뒤에도 발생하는데, 이 과정에서 태자 전지를 지지한 해씨 세력이 왕제 혈례를 지지한 진씨 세력을 누르고 19세 전지왕(405~420년)을 옹립하였으며, 해씨세력은 진씨를 대신하여 왕비를 배출하여, 실권세력은 진씨에서 해씨로 교체되었으며, 실권을 장악한 해씨 세력은 상좌평을 설치하여 군국정사를 맡게 하는 등 실권귀족 중심으로 정치운영을 해나갔는데, 실권귀족 중심의 정치운영은 20세 구이신왕(420~427)대와 21세 비유왕(427~455년)대에도 지속되어 왕권은 매우 미약하게 되었습니다.
이시기 장수왕은 427년에 천도를 단행한 후 남진을 재개하고 백제와 신라에 압박하자, 이에 대항하기 위해 백제는 신라에 우호관계를 요청하여, 비유왕 7년 433년에 동맹이 맺어지고, 송의 역림, 식점, 요노, 등의 신무기를 도입하여 방비하였으나, 왕이 비명에 죽자, 22세 개루왕(455~475년)이 즉위하고, 후반에 귀족중심체제에서 왕권을 강화하고 왕실의 권위를 높이려 궁실을 장려하게 하고, 부왕의 능을 개수했으며, 북위에 사신을 보내 군사원조를 요청하는 등 일련의 조처를 취하였으나, 귀족들의 반발에 부닥쳤을 뿐만 아니라 대규모의 토목공사는 국가 재정을 탕진하게 하였고, 밖으로는 북위가 군사원조를 거부함으로써 제대로 실행되지 못하였는데,
고구려가 475년에 3만의 군대를 동원한 장수왕이 백제 공격을 단행하였고, 백제는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한 채 왕도는 함락되고, 개로왕은 사로잡혀 죽음을 당하여, 백제는 웅진천도라고 하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신라에 원병을 요청하러 간 문주는 원병 1만명을 얻어 돌아왔으나, 이미 개로왕은 전사하고 한성도 함락된 뒤여서 문주는 목협만치, 조미걸취, 의 보필을 받아 23세 문주왕(475~477년)즉위한 후 웅진으로 천도하고, 왜에서 귀국한 동생 곤지를 내신좌평으로 삼고, 장자 삼근을 태자로 책봉해 왕실의 안정을 꾀하면서 국가재건에 노력하였으나,
한성에서 남하해온 귀족들은 자체분열을 일으키고 있었고, 밖으로는 서해의 해상제해권이 고구려에 넘어감으로써 한제족국 접촉도 방해를 받게 되었는데, 이런 혼란을 틈타 병권을 장악한 병관좌평 해구는 문주왕을 살해하고, 어린 24세 삼근왕(477~479년)을 세워 전권을 휘두르다가 반란을 일으켰지만, 덕솔, 진로, 에 의해 평정되었고 삼근왕도 재위 3년 만에 죽었으며, 이에 진로는 왜에 있던 동성을 옹립하였습니다.
25세 동성왕(479~501년) 휘는 모대 혹은 마모로 문주왕의 아우 곤지의 아들이며. 신진세력들을 중앙귀족으로 등용하여, 한성에서 남하해온 귀족을 견제하고, 웅진 천도 초기의 정치적 불안을 종식시켰으며, 남제와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신라 소지왕과 혼인동맹을 맺어 고구려에 대항했는데, 이후 무령왕·성왕대의 정치적 안정과 문화 발전의 토대가 되었으나, 위사좌평 백가가 보낸 자객에 의해 시해되며, 이때의 한성과 웅진의 천문관측 일식기록이 대륙으로 나옵니다.
일설로 동성왕 23년 501년에 시해되었다는 기시는 사실이 아니며, 사실은 열도로 가서 사라진 것을 이리 기록한 것이고, 당시 501년 백제 기사 중 도성 근처에서 사냥하던 중 신하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나오는 때가 501년 12월 이고, 이는 일본서기에서는 그가 천황이 되기 전 일찌감치 무열태자가 되어 있다가, 501년 12월에 역적에게 이겨 정권을 잡은 무열천왕이 된것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우연의 일치라고도 볼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연도와 달까지 일치하니 더욱 심증이 굳어지는 일설이 됩니다.
동성왕 5년의 기록에 내법좌평 사약사가 남제에 조공을 바치러 가는데 서해에서 고구려 병사를 만나 가지못하고, 6년(484년) 2월에 왕은 남제의 고조 도성이 고구려 거련(장수왕)을 표기대장군으로 삼으니, 사신을 파견하여 글을 올려 속국이 되기를 청하니 이를 허락하였다. 하여, 도성이 남제라는 이름의 천자국을 세우면서 고구려 장수왕을 표기대장군으로 임명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동성왕은 그렇다면, 우리 대신중국하는 백제는 더이상 천자국을 북위로 삼지 않고, 남제로 내속하겠다. 하고, 사신을 보내서 표문을 올리니, 남제의 도성이 그러세요 하고 허락했다는 뜻인데, 이 기사가 중요한 것은 개로왕은 대신중국하는 백제의 입장에서 천자국의 힘을 빌어서 고구려와 대항하려고 했으나,
동성왕은 의리없는 북위를 천자국으로 삼아서 대신중국 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천자국을 견제할 수 있는 고구려의 힘을 활용하면서, 우리 스스로가 천자국을 바꾸면서, 계속 천자국의 대신중국하는 백제의 위상을 확보하는 것이 타당하다. 는 실로 놀라운 구도를 품고 있었는데, 남제를 세운 도성이 장수왕을 표기대장군으로 삼자, 옳거니 이제 바꿀 천자국이 나타났구만하고 내속의 뜻을 상표했다는 것입니다.
참고로 일설하면 당시 한제족국과 인접한 제족국들의 관계에서, 백제가 천자국 운운하며 기록된 사서들을 읽을 때는 현대의 국가들이 상호 인정한다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는 점으로, 강대국과 약소국의 논리로, 가령 이씨조선과 명나라의 관계처럼 사대존숭하는 관계가 아닌점을 참고 바랍니다.
남제서 백제전에는 건무 2년에 백제의 모대왕이 자기의 신하 사법명을 매라왕, 찬수류를 벽중왕, 해례곤을 불중후, 목간나를 면중후, 로 책봉한 뒤 형식상 남제에 국서를 보내 승인을 요청했다. 라는 기록이 실려 있어, 건무는 남제 명제의 연호로 서기 494년이며 신라 소지왕 16년, 고구려 문자왕 3년, 백제 동성왕 16년에 해당하며, 그러니까 이것은 백제의 동성왕 시대에 백제가 자체적으로 왕과 제후를 책봉했다는 이야기인데, 모대왕이 남제에 요청한 사법명 등의 왕후 관작칭호 앞에 붙여진 명칭이 대체로 북 중국의 동부해안 지대 지명인 것으로 미루어 본다면 백제의 왕과 제후는 단순히 명의상으로만 존재한 것이 아니라 실제 백제세력이 이 지역 해안지대까지 뻗쳐 있었음을 말해줍니다.
당시 대륙에서는 천자밑에 공·후·백·자·남이 있었고, 제후와 왕공을 분봉하는 것은 대제국의 천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는데, 고구려가 비록 강성했지만 왕과 제후를 책봉했다는 역사기록은 찾아볼 수 없으며, 신라는 삼국 통일을 이룩한 후에도 왕과 제후를 거느리지 못하였는데, 백제가 중건후왕이라하여 자체적으로 여러 제후와 왕을 책봉했다고 하는 것은 백제는 제후국이 아니라 대제국이었음을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지만, 이는 신라와 고구려는 제족의 유습과 전통대로 한제족국과의 통교를 하지 않는 반면, 백제는 통교한 것이라 보고 있습니다.
이때 백제의 강역은 서북으로는 광녕, 금주, 의주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해성, 개주, 동남쪽으로는 조선의 황해, 충청, 전라도 등을 포괄하고 있어, 강역은 동서가 좁고 남북으로 길었으며, 또 위나라 때 물길과 도모해 고구려 땅을 빼앗아 동북으로는 물길과도 이웃해 있었는데, 당나라 초기에는 또 신라의 60~70성을 취하여 그 강토가 더욱 넓어졌다. 고 흠정만주원류고에 나오는 당시 백제의 강역에 관한 기록이며, 이 기록에 따른다면 백제는 융성기에 반도뿐만 아니라 중국대륙의 서북과 동북쪽에 걸쳐 광활한 영토를 소유했고, 이런 기초위에서 왕과 제후를 거느리는 제국으로 발전했던 것입니다.
26세 무령왕(501~523년) 휘는 사마로, 부친 동성왕이 시해되자 이어 즉위하고, 북방정책에 몰두하여 고구려·말갈 등의 침략을 무찌르고 대비책을 강화하며, 남조의 양과 관계를 강화 외교정책을 폈으며, 지배귀족들의 전횡을 막고자 좌평제를 폐지하고 22부사제로 행정체제를 바꾸었고, 오경박사를 설치하였고, 백성들의 진휼에 힘쓰는 한편 수리시설 정비·확충과 호적체계 정비로 안정적 국가 운영의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무령왕 2년 502년 신라 지증왕 3년, 고구려 문자왕 11년, 백제 수도가 본래는 요서에 있다가 무령왕 때 비로소 남쪽
반도로 천도해 왔는데, 이 주장의 근거는 기록에 진나라 때 요서, 진평 두 군을 차지하고 있던 백제가 남제 천감시대에 고구려와의 싸움에서 패하여 국력이 크게 약해지자, 그 후 반도 남서지역으로 옮겨가며, 기록에 백제는 부여의 별종인데…왕의 거처로 동, 서 두 성이 있다’고 했다. 했으며, 백제의 왕은 동, 서 두 성에서 사는데 하나는 거발성이고 다른 하나는 고마성이다라고 되어 있는데,
고마성의 고마는 곧 곰을 뜻하므로 웅진성의 우리말인 고마나루의 고마를 한자로 음사한 것이 아닐까 추측할 수 있지만 거발성은 어떤 성을 가리키는지 우리 학계에서는 아직까지 정설이 없는 실정인데, 흠정만주원류고는 거발성이 바로 요서의 진평성이라고 적시했습니다.
양나라 때 외국사절들의 용모를 그린 그림과 함께 그 나라에 관한 간단한 설명을 덧붙인 양직공도를 보면 백제국기를 인용하여 백제는 옛날의 내이이며 마한족이다라 했다. 했고, 내이는 우이와 함께 청주, 즉 오늘의 산둥성 일대에 거주하던 동이족의 하나다. 하며, 산둥성 내산 밑에 살아서 그들을 내이라 불렀는데 내산은 바로 오늘의 칭다오와 옌타이 일대입니다.
기록에 571년에 북제가 백제 위덕왕에게 사지절도독동청주자사의 직을 수여했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는 이 지역에 대한 백제의 지배를 승인한 것으로 간주되는데, 동청주는 오늘날 산둥성 자오저우완 일대에 해당되며, 역사학자 허광웨는 부유인이 본래는 산둥성에 있다가 차츰 이동하여 춘추시대에 요서에 도달하고, 전국시대에 다시 오늘의 지린성 부여지역에 도착했다고 주장하여, 원래 한반도 지역에 있던 백제가 중국의 요서에 진출하여 요서, 진평을 잠시 경략했다기보다, 대륙의 요서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백제 세력이 나중에 차츰 남하하여 한반도에서 정착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27세 성왕(523~554년) 사비성으로 천도, 국호를 남부여로 개칭하며, 중앙 관제와 지방의 통치조직을 정비하여 정치를 왕권 중심의 국가 운영체계로 확립하고, 양조와 교류하여 유학 모시박사, 강례박사를 초빙하고, 백제 문화의 질적 수준을 크게 향상시켰으며, 숙원 과제이던 한강 하류 6군을 신라, 가야와 연합하여 회복했으나, 신라 진흥왕에게 빼앗기게 되었으며, 이에 다시 신라와 싸우던 중 관산성 전투에서 신라 복병의 기습을 받아 전사합니다.
28세 위덕왕(554~598년)은 성왕이 전사하자 즉위하여, 귀족세력과의 합의를 통해 상흔을 수습하고, 체제정비에 전념했으며, 불교를 통해 왕권 22부사제를 강화하며, 백제본기를 편찬하는 등으로 내치기반이 안정되었으며, 신라, 고구려에는 적대 정책을 취하고, 북제·북주·수와는 활발한 외교를 펼쳐 국제적위상도 되찾았으며,
30세 법왕(599~600년) 은 600년 대규모 사찰 왕흥사를 지어 불교의 힘으로 국가 번영을 구가하였는데, 민가에서 기르는 사냥하는 매는 놓아보내고, 어로나 사냥의 도구는 거두어서 불태워버리는 등 살생을 금하는 영을 내리지만, 대 한제국 무역기지를 신라에게 빼앗겨 커다란 경제적 타격을 받았고, 안으로는 귀족의 내분으로 곤경에 빠집니다.
31세 무왕(600~641년)은 신라 선화공주와 서동설화의 주인공으로, 재위 초부터 동진정책에 주력하여 신라의 여러 지역을 함락시켰으며, 수, 당, 왜와 외교관계를 유지했으며, 수나라의 고구려 침입 때는 신라의 역습을 우려하여 직접 참여하지 않고, 사비궁 중수나 왕흥사·미륵사 창건 같은 대규모 역사가 시행될 정도로 왕권이 안정되고 강화된 시기였지만, 신라에 대한 압박은 신라와 당이 결합하는 원인을 제공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32세 의자왕(641~660년)은 무왕의 맏아들로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들과도 우애가 깊어 해동증자라 불렸으며, 대내적으로는 유교를 통해 집권력을 강화하고 대외적으로는 고구려와 연합해 신라를 고립시키고자 하여, 신라의 40여 성을 빼앗고 대야성을 함락시켜 신라를 위기에 빠뜨렸는데, 고구려 공략에 실패한 당이 신라와 나당연합군을 형성하여 백제를 공격하여, 황산벌 전투에서 계백이 5천의 결사대로 분전했으나 대패하고 항복하였는데, 후에 왕자, 대신, 장병, 백성들과 함께 당으로 끌려갔다가 며칠 뒤 사망하여 백제의 마지막 왕이 됩니다.
나당연합국에 패망한 의자왕 때 백제가 차지하고 있던 지역은, 의자왕시대의 지명으로, 항성, 덕안, 황산, 백마, 사비, 제성, 동명, 대산, 박성, 주류성, 등이 있는데 대륙 서화와 몽성의 남쪽에 항성, 덕안이 있고, 그 나머지는 북 쪽에 있다고 했다. 고 신구당서에 기록으로 나오며, 백제본기에는 그 지명이 항성·동성·잠산·독산·평원·침현·백마강·황산 ·대산·동명·덕안·주류성 제성, 은 다 대륙에 있었습니다.
또 당시의 상황을 보면 백제를 패망시킨 당나라 군대가 1차에는 13만이 침입했고 2차에는 40만 명이 침입했는데 당시 대륙의 백제인구는 76만호였으며, 반도의 인구는 명나라초기까지도 6만호가 아니되며, 백제가 있었던 당시 산동성 인구만도 77만호로, 백제 호수에 가깝다면 의자왕이 다스린 백제는 제나라와 노 나라가 있는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백제 멸망에 대해 660년 백제가 멸망하고 고구려는 668년, 신라는 935년에 멸망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역사상식이어서, 백제는 삼국 중 가장 먼저 패망한 나라로 인식되고 있는데, 기록에는 백제에는 5방이 있고 방은 10군을 관리한다. 라고 했고, 6방이 각각 10개군을 관리한다. 라고 하여, 두 기록에 따르면 백제의 군이 50개 내지 60개라는 이야기인데, 소정방이 백제를 공격해 빼앗은 것은 37군이고, 빼앗지 못한 군이 5분의 2나 됩니다.
이것은 백제가 완전히 멸망하지 않고 상당 부분 그대로 보존됐음을 뜻하며, 후당 시기에 백제에서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한 기록이 사서에 실려 있고, 원나라 때도 백제가 한제족국과 내왕한 사실이 사서에 등장하며, 원나라가 1,280 ~1,367년까지 존속했는걸 근거로 추정하면 백제는 935년에 멸망한 신라보다 최소한 수백년가량 더 존속하게 되는데, 이는 의자왕대가 끝나고 백제부흥운동의 일환의 시기로 볼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이때의 인물로 흑치상지(630~689년) 630년(무왕 31)에 태어나 660년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관직생활을 하였고, 660년부터 663년까지 백제부흥운동을 전개하였으며, 당에 항복하여 한동안 백제부흥운동을 진압하는 일에 종사하다가 후에 서역에서 토번과 돌궐세력을 물리치는데에 공을 세웠다고 하며, 689년 10월에 모함을 받아 처형당하였는데, 그때 그의 나이가 60세였다. 하고, 묘지에서 흑치씨가 백제의 왕성인 부여씨에서 갈라져 나왔음을 밝히고 있고, 아울러 흑치씨 가문이 대대로 달솔에 임용되었다고 합니다.
처음 온조왕은 백제의 강역을 구획하여 정했는데, 북쪽으로는 패하에 이르고, 남쪽은 웅천을 경계로 하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이고, 동쪽으로는 주양에 이르렀으며, 백제의 동쪽에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었다. 하여 곧 낙랑은 하북성 북평과 북경 지역에 있었다. 고 하여, 요서의 국가 영역은 초기부터 광대하였으며, 기록에 백제의 동쪽은 신라이며, 서남쪽은 큰 바다이고, 북쪽은 한강이며 수도를 위례성(거발성, 고마성)이라 하고, 그 외 5방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백제가 한족 사서에 나타나는 것은 고구려나 사로신라와는 달리 송나라(420~478)서, 남제서(420~502년), 위서(386~534년)에 백제라는 이름의 국체가 제대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적어도 5세기 중엽까지도 백제보다는 부여의 분국이나 부여로 인식했다는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는데, 사실상 6세기 백제 스스로 성왕 16년(538년)에 국호를 남부여로 바꾸고 맙니다.
일설에 국호를 십제, 백제, 백제, 위례국, 남부여, 응준, 라투, 등으로 변모하는데 이 국호들은 일관성이 없고 어떤 계통성을 찾기가 어려우며, 사서에 나타나는 부여왕 울구태가 시조라 하나 분명치 않고, 분명한 것은 이들 백제인들이 틈만나면, 자신들은 부여계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또 부여왕 울구태는 공손씨와 연합하여 만주지역에서 강대한 세력을 형성하여, 기록에 동명의 후손 가운데 구태 라는 사람이 있어 공손도의 사위가 되어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 고 말하여, 공손도의 세력이 위나라의 명장 사마의에 의해 궤멸되자 이들이 남하하여 간 곳이 이전 부여계가 정착했던 곳이라는 것입니다.
또 사로신라 27세 선덕여왕(632~647년)이 황룡사 9층탑에 극복해야할 나라들 9국을 각층별로 부여했는데, 여기서도 백제란 국호가 없어 5~6세기의 나제동맹에 기인한 것인지, 백제를 응유 라 쓴것인지 추측할 따름입니다.
다른 기록에 백제는 부여의 별종으로서 동북쪽에 신라가 있고, 서쪽은 지금의 절강성 소흥시 월주에 이르고, 남쪽으로 바다 건너 왜에 이르고, 북쪽은 고구려이고, 백제왕은 동서 양쪽 성에서 거처 하셨다. 하였으며, 또다른 기록에 백제의 수도는 하남 위례성이며, 위례성은 직산이라고 했으며, 이 "직산"이 산서성 서남부에 있다. 하였고, 처음 백제의 영토는 요서, 진평, 강남, 월주는 백제의 현에 속해 있었는데, 첫째 산음, 둘째 산월, 셋째 좌월, 까지 백제의 영토다. 라 하고 있습니다.
백제에 대한 일설은 고구려가 대수가에서 건국할 때, 고구려의 별종이 있어 소수가에서 나라를 세웠는데 이를 소수맥이라고 하여, 건국한 나라 이름이 소수맥으로 소수의 위치가 서안평현 북쪽에 있으면서 남쪽으로 흐른다고 하여,
이 소수는 서안평현을 관류하거나 아니면 그 인근을 남쪽으로 지나가고 있어, 대수가 비류수인 고구려 개국 지점이며, 또한 졸본천은 그 지류이거나 같은 강을 지칭하는 고구려의 별종 즉, 맥족이면서 동시에 고구려의 건국과 비슷한 시기에 나라를 세운 실체가 비류 백제라는 사실 드러난다라는 설니다.
참고로 태령산맥이 섬서성의 남부를 동서로 달리며, 남쪽 양자강 수계를 옛날 한수유역이라 했으며, 그 북쪽은 황하강 유역에 속합니다. 태령에서 섬서성 남단의 대파산지까지는 태파산지로 불리는데, 두 산지 사이에 한수 이강에 연하여 비옥한 한중, 안강의 양 분지가 있으며, 또 기록에 백제의 수도를 거발성 또한 사천성에 있는 고마성, 또한 관미성 또한 위례성 이라하고, 오방성은 관미성을 중심으로 동익성, 서익성, 남익성,북익성, 이 있었으며, 영토에 대한 기사 기록에 진(晉)나라 때 고구려가 이미 요동을 차지하고 백제는 요서와 진평 2군을 차지하고, 백제군을 설치하였는데, 지금의 유성과 북평 사이입니다.
또 고구려 제21대 무자제 가 502년 11월 백제의 월주를 공격하여 쟁취하고 서, 군, 현,으로 개명하면서 송강, 회계, 오, 월을 좌월, 산월을 천주라 하였는데, 503년 신라의 백성들이 천주에 옮겨와 살았다 하였고, 이해에 백제에서 조공을 받히지 않으니 장병을 파견하여 요서와 진평등을 공격하여 쟁취하고 백제의 군을 없에 버렸다. 라 하여 천주 지역이 당에서 신라로 가려면 '천주'를 거쳐야 한다는 말이 생기는, 오나라와 월나라 지역입니다.
백제 전성기에는 후대 명나라 초기때 기록에 백제 군사수가 100만에 달하였다는 기록을 미루어 국력을 가늠 할 수 있으며, 이는 백제가 사마왕의 지석에 모두 기록되어 있고, 당시 백제의 속국으로 있었던 삼국지의 위(220~265년), 촉(221~263년), 오(222~280년), 는 모두가 불과 60여년을 존속한 나라들로 백제에 비하면 소국들이라 볼 수 있으며,
당시 촉은 사천성 성도 지역에 도읍하고, 오는 강소성 단도현 지역에 도읍하여, 백제가 지배하던 전지역에서 백제의 속국으로 있었던 나라들이며, 위, 촉, 오, 세 나라는 백제의 심장부의 땅에서 60년 가까이 전란을 일삼은 나라여서, 이로 인해 백제는 그 당시 상당히 곤욕을 치렀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북쪽 말갈의 끈질긴 침략에 대비해 온 것은 강국의 기반을 다져가고 있었기 때문으로 여겨지며, 이 세나라가 망한 후 진(동진, 서진, 265~420년)과 남조 송,제, 양, 진, 후양,(420~589년) 그리고 북조 북위, 동위, 북제, 북주,(386~581년) 등도 제후국으로서 속국에 속해 있어 조공으로만 백제와 고구려에 소국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입장에서는 전성기 백제는 해상을 통해 대륙경제 전체를 지배하고, 그 부를 대륙보다 안정적인 일본에 축적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일본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대륙 주변의 수, 당 왕조나 사로국이 해상을 봉쇄시키는 등 압박을 가하자 로마 제국과도 같았던 백제도 이에 대응하게 되는 역사가 전개되는 상황으로 봅니다.
그래서 국가 부의 일방국가 집중 같은 그런 일은 한 나라 중앙정부의 힘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고, 진정으로 해상권력을 봉쇄하기 위해서는 백제를 멸망시키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고 봅니다. 당시 백제가 대륙을 지배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민간 상인 경제중심인 해상력이 남달라, 수, 당은 해상을 통해 해상왕국 백제와 싸움을 벌일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은, 백제와 싸움을 벌일 경우 북방의 강국 고구려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으므로, 수, 당은 먼저 고구려 공략에 나선 것이 고구려와의 수, 당 두나라의 국운을 걸고 싸운 이유입니다.
관명으로는 관의 이름 중에 좌평을 다섯 명으로 일품은 좌솔이며, 16품이 있으며, 2품 은솔 이하는 양식, 목부, 등 5개 전문분야 내부 상시 근무인이 있고, 외관 8부가 있었으며, 군 주둔 도시부에 1만호를 두고, 5부 각 5백의 군사를 두어, 대국의 관직제도가 있었습니다.
참고로 백제의 정치제도는 고구려나 신라의 토착적인 성격과 달리, 한족식의 세련된 제도에 기반을 하는 주례를 바탕한 관제나 군제를 채택하고, 지역의 지역세력인 호족들을 흡수 통합에 있어서 적극 대처하지 못하고, 각 지역 세력의 수장층을 통해 성과 읍을 통제하는 간접지배방식에 만족하며, 후에 전국에 22개의 담로를 설치하여 왕족을 보내 다스리다가 538년 사비로 천도한 뒤 비로소 전국을 5방으로 나누어 방, 군, 성, 체제가 확립되게 됩니다. 그러므로 국제정치의 역학관계나 외교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 반면, 내정에는 다소 소홀했던 것으로 백제의 제왕들이 시해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봅니다.
이때 백제의 강역은 하남성에 도읍하고, 사천성, 호북성, 호남성, 안휘성, 상소성, 절강성, 강서성, 등 대륙남단 일대를 강역으로 갖고 있었던 시기로 위, 촉, 오, 가 280년에 멸망한 이후에도 동진,서진(265~420년), 남조의 송, 제, 양, 진, 후양,(420~589년), 북조의 북위, 동위, 북제, 북주,(386~581년) 등의 나라들도 백제의 제후국으로서 속국에 속해 있습니다.
참고로 상고 대륙사를 크게 양분하면 대륙 전체는 동이 제족이 석권하고 있다가 하우의 아들 계에 이르러 주류와 비주류로 갈리게 되었는데, 중원대륙은 조이족인 동이 주류계이며 동이 남방 지류 지나계란 진나라 말기에서 유방의 한나라에 이르러 구강이 도읍지로 정착하게 된 후, 그곳을 중심한 남방계 삼국인 촉, 오, 위, 그리고 진, 수, 당, 오대,송, 명, 이 인도지나계로 연결됨으로써 남방 지나계의 시조가 동이족인 하우의 아들 계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또 위나라가 진에 멸망해 흩어진 백성들은 무리지어 도둑이 되고, 일부 군신들은 호남 영주에 왜국을 세우는데, 이곳에서 1,000리에 호북 무한이나 강서 구강시에도 백제 속국 다파니국이 있었는데, 사로신라 4세 탈해왕은 이곳 다파니국 사람이므로 사실상 백제국 사람이 됩니다.
또 사로신라와 각축을 별렸던 산동, 하북, 강소, 안휘성, 지역에 나전칠기 무령, 덕안 동쪽의 흡에서, 비단은 서화, 항성 동북쪽의 저에서, 나침반은 진성 고평과 동명 사이의 자(철지)에서 생산되었으며, 이 때가 백제가 반도에서 대륙으로 진출한게 아니라, 꺼꾸로 대륙에서 반도로 일시적으로 진출한 것으로 보이며, 그 이유는 자칭왕이며 과부의 아들인 무강왕과 사마왕의 대칭된 왕계보가 있다는 것과, 똑같은 내용의 당평백제비가 부여에만 두 개가 있다는 것을 둘 수 있으며, 일시적으로 반도로 진출했거나, 부여가 백제 담로가 있었던 지역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물론 반도 거점 지역에는 늘 담로라는 백제의 지소가 있어 와서, 사실 백제는 처음부터 해상세력을 기반으로 성장한 나라로 압록강 유역을 근거지로 하다가, 차츰 대륙 동남부 쪽으로 국토가 넓어짐에 따라 이곳에 있던 가락국과 왜국들의 세력과도 병존, 경쟁, 협력,하던 관계망을 구축하고 있었으며, 또한 고구려의 남진이나 사로국의 팽창시마다 왜와 협력하여 대항하기도합니다.
참고로 백제의 신분은 크게 지배신분층, 평민층, 천인층으로 나누어 볼 수 있으며, 백제의 귀족 8대성은 사씨·연씨·협씨·해씨·진씨·국씨·목씨·백씨, 로 이들은 지방수령이나 담로를 역임하였을 것으로 보이며, 부여·사택·진모·목리·재증·고이·조미·흑치·사택, 등 두자 성을 쓰는 복성이 일반적으로 많아 보여, 일본인들의 성씨 경향과 같다고 보이며, 백제 인명 '마로'가 한때 일본에서 유행처럼 번졌다 합니다.
일설에 일본의 고대 역사가 백제 역사라고 하는 것은, 일본 스스로 그들의 땅이 백제의 분국이라고 여긴 탓인데, 백제가 강성할 때의 영향력은 반도 해양이나 대륙깊이 지금의 중국 요서, 진평, 광서지역 남령(베트남 국경), 일본까지 광대한 영토와 해상권을 가진 대국이었으며, 서해를 백제해라고 하였을 만큼 대 해양제국이었으나,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660년 패망하고 663년에 백제유민이 보낸 선단이 백강 전투에서 패하자, 일본은 자신들의 본국이 멸망한데 성묘를 못하게 됐다고 한탄하며 통곡했다 하였습니다. 그것은 백제가 자신들의 본국이었고 일본은 백제의 식민지배 하였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참고로 백강은 660년 당시 백제 신하 홍수가 평원, 백강, 탄현(침현)은 백제의 길목이라고 하였고, 나당연합군이 백강 침현을 지났다고 하여 계백이 5,000군으로 황산으로 가 신라군과 전투 하였는데, 주류성의 백제부흥군을 소탕하기 위하여 웅진에서 주류성으로 달릴때 백강어귀에서 왜군과 전투를 하였다고 하여, 여기서 평원, 웅진, 황산, 백강, 주류성, 침현, 은 백제 말기의 지명들이며, 같은 길목으로 보여집니다.
백제를 정벌한 신라장군 김유신의 선조가 소호금천씨라고 하였는데, 소호금천씨능이 곡부에 있고, 곡부 근처 지역에는 지금 지도에도 황산 백마하 주류자 침구가 남북으로 있으며, 침현과 같은 침구는 항성지역에 있습니다.
나당 교역지점인 항성을 지나 침구를 거치고 백강(백마하)입구를 지나서 황산에 이르고, 황산 동쪽에 대산(태산)이 있으니 그 사이에 웅진이 있었을 것과, 백강이라고 하는 것이 현재의 산동성 백마하의 북쪽에 백마관에서 발원하여 사수와 자양을 지나는 강이 사자수라면, 사자수 남쪽에 백마하가 있다고 보며, 또 백마하의 서쪽에는 5도독부증에 하나인 "동명"이 있음도 백마하가 백강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할수 있습니다.
369년 일본의 왕인 가야계 오진왕, 백제계 닌토쿠왕 등, 오늘날까지 대다수의 왕조는 삼국 출신으로 보이며, 또 유명한 백제향가인 일본의 만엽지, 만엽가는 웅략(유락쿠)천황 어제가로, 23세 문주왕(475년)의 아들인 곤지 왕자가 왜왕 무로 유라쿠천왕(웅락천왕)이 되고 부른 노래입니다.
이 곤지왕 이전에는 열도부여의 왕 즉 왜왕은 백제의 왕이었다면, 이후에는 열도 백제계의 제왕은 왜왕 또는 천황으로서 나타납니다. 찬, 진, 제, 흥, 무, 등의 왜 5왕 가운데 찬·진·제·흥, 은 모두 백제왕이었으며, 이러한 곤지왕은 멸망에 가까운 백제를 중흥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열도백제를 고대국가의 반열에 오를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한 군주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백제 17세 아신왕(392~405년)때 학자 왕인, 하직기 및 오경박사를 일본에 보내 일본 문화를 개척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며, 한자를 간단한 가나 문자로 백제인이 만들어 준 것으로, 헤이안(평안)시대에 완성됐는데, 백제, 신라의 토에서 유래했으며, 특히 가다가나의 다, 야 는 백제의 토와 동일하며, 당시 뿐만아니라 26세 무령왕(501∼522년) 때 오경박사를 일본에 보낸 것을 보면, 그때 벌써 태학이 있어 귀족자제의 교육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백제관음도 백제인이 만들어 준 것이며, 대불주조의 기술지도자인 국중공 마려의 조부가 백제인이었으며, 기록에 백제가 경전과 음악을 일본에 준 사실과 백제왕이 하사한 칠지도에는 태화4년이라는 고이왕의 연호가 새겨져 있습니다.
일본 천지왕조는 백제의 병법, 산성을 쌓는 기술을 배웠다고 해서, 규슈지방의 조선 산성은 일본인이 신롱석, 신호석이라고 불러 신비한 산성으로 신앙할 정도이며, 당시 동방의 강국인 백제가 태화라는 연호를 사용하고, 당당한 제왕의 국가로서 후왕인 일본에게 오래 동안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며, 이렇게 백제와 일본왕조의 상고시대의 계속되는 결속력은 신라를 공동의 적으로 하는 유대를 숙명적으로 지닙니다.
백제의 음악에 대하여 기록에는 백제 음악은 당 나라 중종 시대에 악공들이 죽고 흩어졌는데, 개원 연간에 기왕범이 태상경이 되어서야 다시 백제 음악을 설치하도록 건의하였기 때문에 전해지지 않은 음곡이 많으며, 춤추는 두 명은 자색 큰 소매 치마 저고리와 장보관에 가죽신을 신었고, 악기로서 남아 있는 것은 쟁, 저, 도피필률, 공후인데, 악기류는 중국과 같은 것이 많았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다른 기록은 고·각·공후·쟁·간·저, 와 같은 악기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기록에 백제의 음악에는 고, 각, 공후, 쟁, 우, 지, 적 등의 악기가 있고, 투호, 위기, 저포, 악삭, 농주, 등의 놀이가 있다, 하였고, 일본 추고 20년, 612년 백제 무왕13년에 백제국의 악사 미마지, 이중방, 가다의 등 3명이 와서 말하기를, 오나라에서 악기와 악무를 배웠다.”라고 하였다. 하여, 이에 그들로 하여금 동부에서 음악을 가르치게 하였다. 하여, 이것이 일본에서 음악을 쓴 시초가 됩니다.
대륙의 지역특성은 사람에게 차를 음용하게 만들고, 백제 또한 차를 음용하며, 차를 생산하였던 것이 다경에 나오는데, 다경은 당나라 사람 육우가 쓴 저술로, 경전으로 불리고, 그 상권에 차(茶)의 상등품은 상당(上黨)에서 생산되고, 중등픔은 백제와 신라의 왕가에서 전매품으로 생산되고, 하등품은 고구리 왕가에서 전매품으로 에서 생산된다.
고 나오며, 특 백제의 수도가 있는 몽산에서 생산한 사천성의 몽정차가 백제의 차로 최상품으로 보여집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당시 반도에서는 대량 차생산이 불가한 토질인데, 비해 대륙의 내륙에서는 상당차와 같은 최상품의 차를 생산했으며, 백제나 신라는 해안쪽의 나라여서 중등품의 차를 생산했으며, 해안이 적은 고구려는 하등급 차가 생산된 것으로 보여 나름 차문화가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백제의 대표적인 대외교역품으로서 견직물로는 오색채견, 백금, 세포, 등이, 철소재로는 철정이, 무기, 무구류로는 각궁전, 명광개, 철갑조부, 등이, 칠제품으로는 황칠수, 등이 있으며, 이러한 것들은 전성기에 해외로 뻗어나가 해상무역으로 경제력을 키웠고, 특히 일본에 우수한 도기·조선·철기·한문 등의 백제문화를 전했으며, 백제는 일본인들을 문화적으로 계몽시켜 일본 발전에 커다란 도움을 주었으며, 또한 조선술과 항해술의 발달로 일찍이 서해와 남해를 건너 한제족국, 일본과 교역을 함으로써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전까지는 해상무역을 장악했으나, 660년 나당연합군에 멸망하여 통일 신라에 해상무역 또한 흡수되었습니다.
백제는 초기부터 농업이 발달했으나 곧이어 쇠로 농기구를 만드는 수공업도 발달했으며, 4세기 이후에는 해안을 중심으로 철을 기반으로 한 수공업이 발달해서 각종 어구를 쇠로 만들어 어업과 염전업이 함께 발달했는데, 수공업은 농기구를 중심으로 무기, 생활용품, 장식품 등 여러 부문으로 발전되었으며, 비단은 하남성 서화, 사로국과 교역지역 항성 동북쪽의 저에서 생산하며, 나전칠기는 무령, 덕안, 동쪽의 흡에서 생산하여 특산품으로 교역했는데, 나전칠기 생산지는 사로국과 서로 차지하려는 정쟁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수공업은 크게 관청 수공업과 민간 수공업으로 나누고, 관청 수공업은 궁내 내관 소속으로서, 최고 기술자들인 장공들을 마부, 도부, 목부,로 구분해서 배치했으며, 장공들은 왕족과 귀족을 위한 생활도구와 병기, 말, 수레, 배에 필요한 부속품들을 만들었고, 관청 수공업은 내관과 외관으로 나눠 운영하여, 외관에는 사군부·사도부·사공부·사구부가 있었는데, 사공부에서는 주로 궁궐·사찰·다리·조선·승용 수레와 달구지 제조 같은 큰 공사를 맡았습니다.
강이 많은 백제는 화물을 내륙이나 해안으로 운반하는데 수상교통을 이용했으며, 이러한 내륙 수상교통의 발달은 백제가 황해를 통해 대륙연안과 탐라국, 일본, 동남아와 활발하게 교역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고, 노와 키, 돛이 달린 해양선을 타고 황해와 남해를 건너 중국과 일본으로 건너갔는데, 당시 백제의 조선술은 한제국, 일본보다 훨씬 앞섰을 뿐만 아니라, 신라보다 훨씬 먼저 배를 타고 황해나 남해를 건너 대륙 해안과 일본동남아로 진출합니다.
일찍부터 발해안 내륙의 큰 강에서 익힌 수상교통기술을 바탕 삼아 1세기경에 백제의 상인들과 유민들은 발해연안을 따라, 상해 앞바다에 있는 주산군도로 진출해 대륙으로 드나들었고, 제12 비류왕(304∼343) 때는 본격적으로 노·키·돛이 달린 해양선을 타고 주산군도로 대거 들어가 살기 시작하자, 주산군도를 거점으로 정하고 백제와 반도 사이를 왕래하는 황해 교통로를 개척합니다.
기록에 372년부터 621년까지 여러 차례 해로로 사신을 보내어 조공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22세 개로왕 18년(472)에는 고구려의 침공을 막기 위해 원군을 청하러 북위로 사신을 보낼 때도 고구려가 막아 육로로 가지 못하고 대하를 건너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더불어 백제가 일찍부터 바닷길을 개척할 수 있었던 것은 항해술과 해양선을 만드는 조선기술이 아울러 발달했기 때문인데, 일본과의 해상교통도 일찍 개척한듯 하였는데, 백제의 박사였던 왕인은 일본 천황의 초빙으로 서기 285년 떼배를 만들어 도자기와 철공 기술자를 태우고 천자문 1권, 논어 10권을 가지고 건너가 천황 태자의 사부로 일본에 살면서 도자기 등 백제문화를 전달했습니다.
당시 왕인박사가 타고 대해를 건너갔던 떼배인 티우는 고증에 의하면 직경 30cm의 삼나무 11개를 엮어 만든 길이 약 7m에 너비 약 4m, 높이 1.5m에 역시 나무로 엮은 평상을 위에 설치하고, 너비 3m에 높이가 3.3m인 황포돛 1개를 달아 노를 저어 가는 뗏목배로, 왕인박사는 이 배를 타고 대해를 건너 전남 영암 대불항 근처에서 완도, 보길도, 고흥 앞바다를 지나 대마도 남단을 거쳐 일본 큐슈 연안으로 들어가 후쿠오카 남쪽 가라쓰 항에 상륙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로부터 1,716년이 지난 2,001년 봄, 고대 항해 연구팀은 왕인 박사의 떼배를 재현시켜 백제시대에 건너갔던 해로를 따라 7일만에 일본에 도착하는데 성공했는데, 이런 사실을 종합해 볼 때 백제는 당시 3국 중 제일 먼저 일본과 대륙 해로교통을 개척했고, 돛을 사용한 해양선 제작기술과 조류나 바람을 이용하는 항해술이 매우 발달한 나라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엔닌 일기에는 ‘백제의 해민들은 지리지식으로 방향과 거리를 계산해 항해하는 지리항법, 밤에는 별을 보고 방향을 잡는 관측성항해법, 흐린 날 지남부침이라는 나침반을 이용하는 항해법으로 바다를 건넜다’고 기록되어 있어, 이런 항해술에 익숙한 항해기술자를 암해자라 불렀는데, 백제 사기에서는 암해자에 대한 기록이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으나 같은 시대 신라의 배에 암해자가 많았던 것을 보면 해상진출이 신라보다 빠른 백제에도 이런 전문항해사가 많았고 국가가 적극 양성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일설이지만, 명나라 사기 동서양고 중 범례조를 보면, 나침반을 선박항해용으로 사용한 것은 백제의 해민들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백제인들은 나침반을 이용하는 침경항복이라는 새로운 항해술을 개발해 이용했으며, 이것이 바로, 방향을 잡는 곤신침과 거리를 계산하는 갱, 수심을 재는 탁이라는 항법이라고 나옵니다.
백제의 해민들은 노와 키 그리고 돛 달린 바닷길 전용 해양선을 1세기 중엽부터 만들어 탔던 듯하며, 백제의 해양선은 한족의 배와 달랐는데, 우선 노와 키가 다른데, 한족의 배는 노를 당기는 반동으로 물을 밀어 가기 때문에 큰 힘이 필요해 배 양쪽에 많은 노공이 필요하고, 한족의 노는 도 또는 즙이라 하여 사람의 힘이 많이 필요한 비능률적인 도선이었는 반면, 백제의 노는 끝을 스크루형으로 회전시켜 물을 저어 가는 능률적이고 과학적인 노선이어서 사람의 힘이 크게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배의 방향을 잡는 키 역시 달랐는데, 백제의 것은 배의 뒤꽁무니에 고정시켜 좌우로 회전하는 전용키였지만, 한족의 키는 노인 도를 사용하거나 배 한쪽의 도들을 쉬게 하여 방향을 틀었습니다. 이처럼 백제의 배는 바다를 건너기에 알맞은 순수 해양선이지만 타국의 배는 주로 양자강 같은 대륙 내 여러 큰 강에서 사용하는 도강선이라, 속도가 느리고 무거워 바다용으로는 적합하지 않아 백제의 해양선을 따라 잡지 못했습니다.
백제의 해양선이 타국의 도선보다 훌륭했음을 입증하는 기록이 나오는데, 오 나라 손 권이 왕위에 오르기 직전인 서기 219년 조조에 쫓긴 유비는 제갈량이 세운 천하를 셋으로 나누어 갖는다는 천하삼분정책에 따라 촉 나라로 들어가 왕이 되었고, 이때 관운장은 촉 나라 입구인 장강(양자강) 연안에 군사를 배치하고 봉수를 세워 수비를 철저히 했지만 오 나라 손 권의 부하 장수였던 여몽이 병사를 숨긴 배를 ‘백의'로 하여금 노를 젓게 하여 촉 나라 양자강변 수비진으로 재빨리 접근, 척후병들을 제거하고 방심하던 관운장을 생포했다. 는 것으로,
여기서 백의는 백제인을, 노를 젓게 한다는 뜻의 요노는 백제의 배를 젓게 했다는 것을 말하는데, 이 대목에서 여몽이 백제의 해양선을 이용한 이유가 한족의 배보다 빨랐기 때문임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해양선은 스크루형뿐만 아니라 방향을 잡는 키까지 사용했는데, 그 증거는 기록에 나온 전쟁 기록, 북송 때(982)에 저술된 태평어람 중 주부 편 즙조, 유희가 쓴 석명 중 석선, 6세기경에 쓰인 고야 왕의 옥편 등에 나타나 있으며, 특히 삼국지의 전쟁기록을 보면 스크루형 노를 젓는 기술에서 백제인이 한족인보다 뛰어났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백제는 초기부터 바다로 진출한 만큼 이에 따른 조선기술도 아울러 발전했는데, 동성왕 20년(498) 탐라국을 정복하기 위해 원정군을 출정시키려하자 탐라국왕이 이를 미리 알고 겁이나 굴복했다는 것으로, 바다 가운데 있는 탐라국을 정복하려 했다면 백제는 이미 큰 군선을 건조할 수 있는 조선기술을 갖고 있었을 것이며, 일본 고대 문헌인 효덕기에는 백제의 조선공들이 만든 크고 튼튼한 배를 특별히 ‘백제 배’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있으며, 백제 배에 돛이 달리기 시작한 것은 7세기 초로 추정됩니다.
7세기 중반에 와서는 해양선뿐만 아니라 강에서 사용하는 도강선에도 닻 만큼 돛이 일반화된 듯하며, 기록을 보면 의자왕 20년(660) 6월에 부여의 왕흥사 승려들이 마치 배의 돛과 같은 것이 금강의 물을 따라 절 문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는 기록이 있어 돛을 묘사한 기록인 셈입니다.
명나라 때 기록에 대륙 해안에 살던 백제유민이 만든 배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명 태조 주원장은 해금정치를 펼쳐 중국해안에 퍼져 살던 백제유민들을 학살하거나 추방했는데, 명나라 군사들은 이에 반발한 백제유민들을 강에서 사용하는 도형강선을 군선으로 삼아 격퇴하려 했지만, 백제인들의 노형 해양선을 이기지 못했다는 내용이 그것입니다.
이후 명나라는 백제인들의 노형 해양선을 빼앗아 군선으로 개조해 사용했고, 이런 백제인의 배들을 17가지 모양으로 구분했다고 기록하고 있엇습니다. 즉 바다가 얕은 장강(양자강) 이북의 황해용으로는 배 밑이 평평한 평저선을, 바다가 깊은 장강 이남의 동·남지나해 용으로는 배 밑이 칼날처럼 생긴 첨저선을 썼는데, 백제의 평저나 첨저선 모두 스크루형 바다용 노와 키, 돛을 사용했습니다.
백제의 노형 해양선은 크기는 일본의 승려 엔닌을 당에서 일본으로 귀국시킨 신라 김진이 만든 배는 47인승, 당나라 대신 감진화상이 당의 명주에서 백제 조선기술자의 도움을 받아 건조한 배는 35인승이라는 기록들이 있는데, 이런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평균 40인이 탈 수 있는 크기로서 길이는 18m 전후(삼대실록, 879)인 것으로 추정되며, 큰 파도를 헤치며 달릴 수 있는 배라는, 성능에 관한 얘기도 속 일본 후기(839)에 기록되어 있어, 결국 엔닌 등 사신들을 당나라에 파견할 때 사용했던 일본의 견당선도 백제선의 모방품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단락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