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言] 실수와 후회
안골은빛수필문학회 수필창작반
박창호
수필반 첫 강의가 있는 날,
점심을 한 술 뜨고 있는데 아내의 핸드폰 벨이 울렸다.
“산기가 있어 병원으로
가요."
막내딸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삐 점심상을 물리고 간식과 물, 수업할 유인물을 주섬주섬 챙겨 아내와 함께 손녀를 데리고 집을 나섰다.
첫아들을 순산한 막내딸은 이번에
둘째를 가졌는데 딸이라니 1남 1녀로 잘 되었구나 싶었다. 요즘 세상에는 초음파를 통해 성별은 물론, 체중까지 알려준다. 점점 출산일이 가까워
오던 중 어느 날 병원에 갔더니 아이가 며칠 사이에 갑자기 거꾸로 돌아앉았다니 이 무슨 일인가? 분만 때까지 태아가 제 자리로 스스로 돌아눕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수술을 해야 한단다. 그런데 갈수록 아이의 체중이 늘기 때문에 아이가 스스로 돌아눕기란 쉽지 않다하여 은근히 걱정하는
눈치였다. 우리 부부도 순산을 고대하는 마음으로 많은 기도를 했었다.
부랴부랴 차를 몰고 익산으로
가는데 전북대학교쯤 지날 때 전화가 왔다. 더 이상 지체하면 산모와 아기 모두 위험하다며 조금 전에 수술실로
들어갔어요.
사위의 목소리였다. 그저
무탈해야지 하는 조바심으로 제법 속력을 내어 병원에 도착하니 사위와 사부인이 수술실 앞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제왕절개를 했는데 산모와
아이 모두 건강하다니 다행이었다.
참으로 힘든 시간이었을 것이다.
회복실로 들어갔다.
아들 낳고, 딸도 낳고, 순산
하고, 제왕 절개도 해보고, 거꾸리를 낳아본 여자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요.
딸아이의 말에 나도 그만 씽긋
웃고 말았다. 자주 어리광만 부리던 막내딸이 어느새 두 아이의 어머니가 되니 참으로 위대해 보였다. 40년 전 아내는 출산의 고통에 시달려 분만
후에는 깊은 잠에 빠져있었는데, 딸아이는 하반신 마취를 하고 배를 갈라 아이를 꺼내고 다시 묶었을 텐데 별로 아프지도 않은 모양이다. 마취가 덜
풀렸던지 아니면 온몸에 매단 주렁주렁한 줄 때문인지 몰라도 웃을 수밖에 없는 말을 산모가 하다니, 어쨌든 웃는 얼굴이 좋아
보였다.
아내와 손녀를 다시 실러 오겠다는
말을 남긴 뒤 병원을 나와 전주로 제법 속도를 내며 달려오는데 차 안에 간식이 눈에 띄었다. ‘나는 운전으로 먹고 싶어도 못 먹으니까 간식이라도
꺼내 주고 올 걸’하는 후회가 스쳤다. 달려오는 도중 저절로 안골노인복지관을 찾게 된 일들을 머리에 떠올랐다.
평소 노인복지관에는 가기 싫었다.
아직은 노인이나 어르신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건강을 핑계로 3년을 미루다 2017년 1월 중순 안골노인복지관 사무실에 들러 회원증을
신청했다. 사회교육 프로그램을 살펴보니 몇 해 전부터 있던 수필창작반이 올해도 있었다. 시조공부를 하고 싶은데 수필이라니 마음이 별로였다.
하지만 창작한다는 취지나 목적은 같을 것이기에 당일 수강신청을 해버렸다. 혹시나 싶어 전주에 있는 모든 복지관 전화번호를 적어 왔다.
안골복지관에 시조반이 없는 것은 직접 확인했으나 금암, 덕진, 꽃밭정이, 서원, 양지복지관, 전라북도 노인복지관, 도청, 전주시청, 익산시청의
관계부처까지 모두 전화로 확인해도 시조창작반은 없었다. 대한시조협회 전주지부와 익산지부는 아예 없어 아쉬움이 컸다. 군산지부만 있었으나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았고 거리가 너무 멀다는 생각이 들어 단념했다. 이제 서울에 있는 대한시조협회를 통해 다른 시인들의 시조를 많이 읽어보며 지금처럼
인터넷을 통한 독학으로 절차탁마하리라 마음먹었다.
설을 코앞에 둔 1월 24일
복지관을 찾아가 사진을 건네주면서 입회비를 내고 등록했다. 2월 13일 월요일 오후 3시 3층 학습실로 나오라는 이야기와 함께 컬러로 인쇄된
시간표를 받았다. 돌아오는 길에 첫 강의가 시작되는 날 최소한 15분 전에 가서 수업 분위기를 염탐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어찌 전주에는
시조창작반이 없을까 마음이 아팠지만 혹시 내가 못 찾았을지 모른다는 약간의 후회가 스쳤다.
집에서 걸어가면 10분 남짓한
거리에 복지관이 있어 다행히도 주차 걱정은 안 해도 되지만 오늘은 시간도 빠듯한데 복지관에 도착해보니 주차할 곳이 없어 낭패였다. 15분 일찍
오기는커녕 점심도 거의 굶은 채 오히려 1~2분정도 늦겠다 싶어 주변을 두 바퀴나 돌고서야 좀 먼 곳에 겨우 주차하고 뛰어 올라갔다. 3층
복도에서 빠끔히 열린 앞문 문틈으로 많은 회원이 모두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성큼성큼 뒷문으로 들어갔더니 뒤에 서계신 분(뒤늦게 알았지만
회장님)이 먼저 내 이름을 물으며 빈자리로 안내해 주었다. 긴장해서 땀이 촉촉이 젖어오고 늦었다는 죄스런 마음이 들었다. 책상에 신입회원
명패까지 만들어 올려놓은 빈자리로 안내 받았다. 축하한다는 작은 명패지만 가슴이 뭉클했다.
첫날 첫 강의부터 지각했으니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난감하여 계속 가쁜 숨만 헐떡이고 온 몸에 열이 나서 지퍼를 내려 잠시 땀을 식힐 생각이었다. 제 정신이 아니었다.
그런데 책상 위에는 전화번호, 학습자료 유인물, 『행복은 제정신』이라는 수필집이 놓여 있었다. 참으로 정신없는 나를 두고 이런 제목을 붙이신
것은 아니겠지만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맨 앞 작은 책상에서 모두를 바라보고 중후한 차림으로 앉아 계시니 필시 유인물에서 본 김학 지도교수님인
듯싶었다. 느닷없이 날 호명하며 나와서 인사를 하라는 무게감 있는 말씀이었다. 졸지에 온몸이 불덩이 같아도 지퍼를 다시 올리고 앞으로 나가
이름과 주소만 간단하게 인사를 했더니 가족까지 좀 더 구체적인 인사를 하란다. 얼떨결에
자녀는 1남 2녀를 전부 결혼
시켰으며, 부모와 처부모가 돌아가셔서 애경사도 모두 마쳤고, 수필반이지만 시조를 공부하고 싶어 왔으며 시조집도 2권 만들어 보았습니다. 또 피부
알레르기로 항상 마스크를 쓰고 다니니 이해해 주시고, 문학 선배님들께서 잘 깨우쳐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인사를 마치고 자리에 들어와
생각해보니 애경사라는 말이나, 수필반에서 시조 공부를 한다는 말, 시조집 2권을 만들었다는 말까지 했으니,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격이 되어버렸다. 이말 저말 망발을 서슴없이 했으니 이 꼴이 무엇이란 말인가? 별 수 없이 다음 시간에는 시조집을 가지고 와서 나누어드리면서
회초리를 맞아야겠구나 싶었다.
먼저 몇 사람씩 칭찬의 시간을
가졌다. 수업이 시작되었다. 글쓰기는 풍부한 독서량, 감수성, 관찰력, 박학다식에 잡학다식해야 당신을 다듬어 키운다는 강의가 진행되었다. 김용택
시인의 「매화」 전문을 낭송하며 주변에서 글감을 찾으라고 했다.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노루발」, 「먹감나무」 등을 읽어가며 갖가지 설명을
덧붙여 주셨다. 각자의 느낌까지 발표하는 긴장된 첫 시간의 수업을 받았다.
요즈음에도 말로 망한 정치인들이
너무 많다. 항상 말을 조심해야 한다고 스스로 명심하고 곱씹어 왔다. 오늘도 긴장한 탓에 글공부를 일찍 터득하신 연륜 깊으신 문학선배님들 앞에서
할 말과 못할 말을 가리지 못했다. 아무리 바쁘고 긴장되어도 필요한 자리에서 필요한 말만 했어야 했다.
나는 최근에 피부 알레르기로
외식도 삼가는 터라 수업을 마치고 병원으로 곧장 가려 했다. 그런데 회장님께서 따뜻한 말씀으로 팔을 끄는 시늉을 하며 함께 가자고 했다.
어디에서나 저녁은 먹어야 되니까 가까운 음식점으로 가서 함께 식사하자는 것이었다. 권에 못 이겨 따라 갔다. 총회와 환영회를 겸해서 후한 식사에
정이 가득한 술을 대접 받았다. 식사를 마치고 음식점을 나와 다시 병원으로 향했다. 도중에 전화가 걸려와 차를 세우고 전화를 받아보니 아들이
병원에 가겠다며 오지 말라는 것이었다. 다시 집으로 돌아와 주차한 뒤 차 안을 보니 간식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나는 배불리 저녁을 먹었는데
간식이 차 속에 있다니 얼마나 배가 고플까 싶었다.
집으로 들어 왔다. 컴퓨터를 켜고
책상 앞에 앉아 모처럼 수필이라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언젠가 불쑥 말 한마디 잘못하고 자신의 가슴을 후려치면서 썼던 「후회」라는 시조가 문득
생각나 시조집을 펼쳤다. 다시 옮겨 적으며 오늘과 그 당시를 회상하고 한 번 더 말조심 입조심을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후회 (1)
뱃속에 넣어두고 마음에
담아둘걸
한마디 불쑥했다 계면쩍기
그지없어
가슴에 담고 삭혀야 후회할 일
없는데
머리에 담아두고 뼛속에
묻어둘걸
한 번쯤 불쑥했다 가슴이
아려오지
심중에 뜸만 들여야 후회할 일
적은데
하고픈 이야기를 다하면 아파
오고
탱자나 대추나무 마디에 가시
돋듯
말 속에 살 없어지니 남은 것은
후회뿐.
후회 (2)
아무런 생각 없이 하고픈 말 불쑥
하면
질 낮은 말투 되어 가슴에
비수되니
혀끝의 한마디라도 생각하고
말해야
한마디 좋은 말은 상대를
움직이고
말씀은 감동으로 세상을
품어가니
가리고 곱씹은 뒤에 새겨보고
뱉어야
흠된 말 예서제서 함부로 하지
말고
입 밖에 상처 된 덤부로 뱉지
말고
하찮은 말이더라도 반추하고
던져야.
은종삼 작가의 『행복은
제정신』이라는 칼럼집을 응시하며 깊은 숨을 몰아쉬었다. 제정신이 아니었던 나 자신을 이제야 제정신으로 돌려놓았다. 오늘도 잘못을 저질렀구나.
말言로 오는 후회를 하면서‧‧‧‧‧‧.
(2017. 2. 13.
안골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개강일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