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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點)과 선(線)
점(點)과 점(點) 사이의 최단 거리를 직선이라 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우리가 생활하는 작은 세계에서는 실용적으로 적용되지만, 우리의 시야를 확대해 우리의 행성인 지구나 태양계 그리고 우주에는 적용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천체나 우주는 곡선과 타원형의 세계입니다.
칼 세이건은 보이저 1호가 60억㎞ 떨어진 우주에서 찍은 우리 행성의 모습을 보고 “창백한 푸른 점”이라고 부르며 글을 썼습니다. 태양에서 지구의 거리는 1억5천㎞이며, 태양 빛이 지구에 도달하는 데는 8분이 소요됩니다.
그러나 지구라는 행성은 우리 은하계가 가지고 있는 10만 광년이라는 크기와 그 은하계가 가지고 있는 4,000억 개에 달하는 별 중의 하나이며, 또한 우주에는 그런 은하계가 1,700억 개가 존재한다고 합니다. 그런 우주는 여전히 팽창하고 있으며 별은 탄생과 소멸의 역동적인 활동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감각과 빈곤한 상상력으로는 짐작하기 어려운 광막한 공간입니다.
우리 행성은 우리의 자긍심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겨우 존재하는 모래 알갱이 정도의 크기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왜소함을 알았던 세이건은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부터 구해줄 도움이 외부에서 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생명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곳인 지구”를 생각하며 창백한 『푸른 점』을 쓰게 되었습니다.
이 겨우 존재하는 우리 행성의 나이는 46억 년입니다.
이 행성에서 생명의 기원은 세포핵도 없는 원시 생물인 남조류(藍藻類)에서 시작되었으며, 이 남조류의 화석은 오스트레일리아의 바닷가에 스트로마톨라이트라는 화석으로 퇴적층을 이루고 있으며 지구 초기의 생명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고생물학자는 오래된 지질학의 지층(地層)을 추적하며, 마치 유능한 수사관이나 고고학자들이 현장의 보잘것없는 단서가 되는 유물이나 퇴적층들을 수집하여 범죄 현장을 재구성하듯이 인과관계의 구슬(mable)을 복원합니다. 마치 아무 관계도 없는 점들을 하나의 인과관계의 선으로 재구성하는 것입니다.
지층(地層)을 지질학으로 재구성하는 인과관계 중 가장 중요한 동력이 중력(重力)입니다, 중력은 질량이 있는 모든 물체 사이에 존재하는 끌어당기는 힘을 말합니다. 아이작 뉴턴에 의하면 질량을 가진 물체는, 다른 물체를 두 물체의 질량에 비례하고 두 물체 사이의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힘으로 서로를 끌어당깁니다.
이 중력은, 아인슈타인에 의하면 빛도 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은 질량이 있는 모든 물체 사이에는 서로를 끌어당기는 이러한 힘이 작용한다는 법칙입니다.
우리의 일상에서는 이러한 중력의 법칙을 자명한 것으로 여겨, 의식하지는 않지만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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든 물체와 인간은 그런 영향 아래 살고 있으며, 생명의 생존전략도 이런 물리학의 법칙을 거스를 수 없습니다. 말하자면 생명 진화의 자연선택 개념도 이런 물리법칙의 하위 개념이며, 중력은 지구의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도록 하는 근본적인 힘입니다.
언젠가 지구의 역사에서 백악기(白堊期,공룡시대) 말기인 6,500만 년 전에 소행성 충돌로 인해 지구의 생명체가 절멸한 사건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소행성 충돌은 지구 역사의 초기에 빈번하게 일어났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미국 항공우주국인 나사(NASA)에서는 이 소행성의 움직임을 파악하기 위해 광활한 천체를 훑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인류의 삶에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나사(NASA)의 모토는 “우리 모두의 이익을 위한” 것으로 되어 있으며 인류의 이익을 위해 천체를 탐험하고, 지식을 발견하고 확장하고 있습니다.
목성(木星 Jupiter)이 우리 삶에 달 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지구 가까이 접근하는 소행성들을 지구 질량의 318배나 되는 목성이 빨아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번에 미국에 10일간 여행할 기회가 있어 아메리카 대륙의 광활함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되었습니다만, 여러 곳을 방문한 가운데 무엇보다도 요세미티 국립공원과 자이언 캐니언 그리고 그랜드 캐니언과 모뉴먼트 밸리가 저에게는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그것도 경비행기를 타고 상공에서 그 웅장한 자태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 웅장함 속에서 자연스럽게 ‘스켑틱(Skeptic)’의 창업자인 작가 마이클 셔머의 어록이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경이(驚異)였습니다.
“100인치의 망원경으로 먼 은하를 들여다보거나, 1억 년 된 화석이나 50만 년 된 석기를 손에 쥐거나, 그랜드 캐니언이라는 엄청난 공간과 시간의 균열 앞에서 서 있거나,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우주 탄생의 순간을 응시하는 과학자의 말을 듣고 있을 때보다 더 감동적인 순간이 있는가? 그것이 바로 깊고도 신성한 과학이다.”
언젠가 일본의 물리학자 마쓰이 다카후미가 쓴 『지구, 46억년의 고독』이라는 책을 읽으며 우리 행성의 고독을 공감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과학자도 아니면서 ‘지구 46억년의 고독’에 공감을 하게 된 것은, 한때 제가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들을 보고 선(禪)문답 같은 원초적인 고독을 느꼈던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나의 정체성을 생명의 기원이나 지구의 기원 그리고 외계 생명과 문명의 탐색 등에서 어떤 인과관계가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에서 인간 존재의 근원이 되는 것을 알고 싶은 지적 호기심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런데 별개일 것 같은 밤하늘의 별과 우리 지구라는 행성이 하나의 중력에 의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사뭇 안심했던 적이 있습니다. 거기 더하여 이러한 절대적인 고독인 지구라는 행성에 46억 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호모사피엔스가 나타남으로써 우리 자신과 타인을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천체와 우주를 탐색하는 지성을 가진 생명체가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러한 사실에서 겨우 존재하는 인간이 또한 위대한 존재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지성의 한계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영국의 수학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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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 철학자인 알프레드 화이트 헤드가 말합니다.
“철학은 경이(驚異)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철학적 숙고가 최선을 다해도 경이는 남는다.”
지구가 칼 세이건이 말한 것처럼 ‘창백한 푸른 점’이라면 인간 개개인의 개체 또한 하나의 점에 비유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점들은 개별적으로 그리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서로가 서로를 끌어당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중력이 그러하듯이 개인은 가족이라는 끈에 의해 끌어당기고 있을 뿐 아니라, 확대하면 친족집단과 친구들에게서도 인력(引力)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학교라는 교육시스템에 의해 스승과도 연결되어 있으며, 직장과 사회에서도 동료나 선배와도 연결될 수 있습니다, 또한 인간은 정치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정치적 가치와 국가라는 집단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물론 가치관과 이해관계가 다르면 척력(斥力)이 작용하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는 이념과 이해관계에 따라 많은 척력이 작용하여 사회적 갈등이 심대하기 때문에 사회적 비용이 생산적으로 전환되지 못하는 낭비가 많은 국가이기도 합니다.
제가 이 글의 주제를 점(點)과 선(線)으로 잡은 것은 일본의 추리작가 마스모도 세이조의 추리소설 『점과 선』이라는 작품을 오래전에 인상적으로 읽었던 기억에서 따온 것입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일본 국민은 세계 최고 수준의 독서 국가입니다.
자연히 추리소설 매니아들도 많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추리소설이라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아서 코난 도일을 떠올립니다. 우리가 잘 아는 셜록 홈즈 탐정과 그의 친구 왓슨이 좀처럼 풀기 어려운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주인공들입니다.
그가 남긴 명언 중에는 사건의 핵심을 관통하는 말은 수사의 교범이 되었습니다.
“불가능한 모든 것을 제거했을 때, 마지막에 남은 것이 아무리 이상한 것이라도, 진실일 가능성이 높다.” 또한 그의 작품 『잃어버린 세계』는 영화 “쥬라기 공원”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습니다.
또한 우리 세대는 1970년대 TV 보급이 대중화되면서 선진 미국과 유럽의 주말의 명화를 접하게 되면서, 우리와 결이 다른 그들의 수준 높은 드라마가 우리 안방에까지 보급되었습니다. 지금의 한국의 K드라마가 세계에서 인정받는 것은 한국의 연출가나 감독들이 당시의 미국영화를 학습한 효과도 있을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 『형사 콜롬보』시리즈일 것입니다.
LA 경찰의 수사반장 격인 콜롬보가 다 구겨진 바바리코트를 입고 낡은 차를 몰고 다니며 용의자와 심리적인 대화를 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서민적인 정의를 보았으며, 우리에게 대단한 카타르시스를 주었습니다.
용의자들은 대부분 사회적 지위도 어느 정도 있는 사람들이라 지능적인 명백한 알리바이를 만들어 놓고 있습니다. 콜롬보는 보잘것없는 단서로 그 흩어져 있는 점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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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결하여 하나의 인과관계가 있는 선으로 만들어 용의자의 자백을 받아냅니다. 콜롬보를 연기한 피터 포크의 구겨진 바바리와 낡은 차는 하나의 트렌드가 되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추리극에서 하나의 밈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마쓰모도 세이조의 추리소설 『점(點)과 선(線)』은 한 쌍의 남녀가 해변에서 죽은 시체로 발견되면서 시작됩니다. 둘의 사인(死因)은 청산가리를 먹고 동반 자살한 흔한 불륜 커플로 결론이 나면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으로 정사를 택한 것으로 보고 사건은 그냥 끝나는 듯합니다.
그러나 도리카이 주타로라는 나이 많은 노년의 베테랑 형사는 남자의 주머니에서 나온 열차 식당칸에서 받은 1인용 식당 영수증을 보고 의문을 제기하며, 상부에서 끝난 사건을 혼자 은밀히 조사합니다. 그럼 왜 열차 식당의 영수증이 2인용이 아니고 1인용인가? 그게 이 소설의 유일한 단서입니다.
책 속의 삽화도 복잡한 철도 노선을 그려 놓았는데, 그것은 마치 하나의 점(기차)이 어떻게 기차 시간표와 연결되어 하나의 선을 그리며 목적지에 도착하는 인과관계를 암시하는 듯합니다.
누가 보더라도 연인의 동반자살처럼 보이는 이 사건에 노장 형사 도리카이가 한 가지 의혹을 품게 되면서 이야기는 흥미진진하게 전개됩니다. 커다란 도화지 위의 작은 점처럼 보잘것없는 단서를 추적해 그 점을 하나하나 연결해 나가면서 결국 사건의 전말이라는 길다란 선을 잇는 이 작품은 완벽에 가까운 알리바이를 무너뜨리는 형사의 집념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제가 이러한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인 ‘점(點)과 선(線)’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대형참사 사건인 ‘세월호 사건’과 ‘이태원 할로윈 참사 사건’에 하나의 암시를 주고 있다는 생각에서입니다.
세월호 참사와 이태원 할로윈 참사를 사고가 아닌 사건으로 부르는 것은 그 사건에 국가의 공기관의 역할이 없었던 인재(人災)에 가까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젊은 작가들의 공분을 불러일으킨 현장 탐사에 의하면, 그 사건은 컨트롤 타워가 없는 ‘눈먼 자들의 국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정권이 집권을 하던 우리 사회는 재난이 곳곳에서 일어날 수 있는 위험사회라는 것을 인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현대 정보화 사회는 어느 때보다도 촘촘한 그물망같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어느 한쪽이(기업이든 공기관이든) 기능하지 않으면 참사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또한 직무수행에 있어서 어느 한 곳이라도 사명감을 가지고 있다면 대형참사에 이르는 정도는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것이 하나도 작동이 안 되었다는 것입니다. 점과 점이 선으로 연결되지 못한 것이지요.
이렇게 점이 선으로 연결되지 못한 것은 국가의 기능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책임은 어디에 있을까요? 모름지기 고위 책임자는 현장 감각을 중시해야 합니다. 어느 장군이 말했듯이 “나는 탁상 위의 공론을 믿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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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말은 많은 것을 시사해 줍니다.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지 못한 지휘관은 애먼한 부하들만 희생시킬 뿐입니다. 단적인 예가 우리 국민이 존경하는 성웅(聖雄) 이순신 장군일 것입니다. 그가 23전 23승을 거둔 것은 승리에 대한 확신 없이는 전투에 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많은 정치인들이 어려운 결심을 할 때는 ‘백의 종군하겠다’고 조자룡 헌 칼 쓰듯이 말을 합니다만, 그들이 얼마나 이순신의 정신을 알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뿐입니다.
2014년 4월 16일 304명을 구조하지 못한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9년이 흘렀지만 참사의 책임을 묻는 재판은 아직 끝나지 않고 있습니다.
참사의 원인과 책임에 대한
⓵ 선장과 청해진 해운의 민간기업에 대한 침몰 원인.
⓶ 해경 지휘부의 구조 실패.
⓷ 국군 기무사령부의 유가족 사찰 등의 2차 가해 등
3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선장과 청해진 해운 재판은 2016년 유죄로 끝났지만, 국가의 책임을 묻는 구조 실패와 2차 가해 재판은 계류 중입니다. 유죄가 선고된 해경은 김경일 당시 123정장이 유일합니다. 구조 실패의 책임을 물어 기소된 해경은 모두 12명이었지만, 사고 현장에 처음 도착한 김경일 정장만 징역 3년이 확정되었을 뿐 해양경찰청장 등 지휘부 11명은 무죄가 선고되었습니다.
법에는 준엄함이 필요합니다. 특히 노블리제 오블리제가 필요한 고위 공무원에게는 엄격해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마무리되니 공무원들의 사명감은 하위직에만 머물러 있게 됩니다.
이태원의 할로윈 축제는 159명의 젊은이들의 참사를 낳았습니다.
세월호 참사도 수학여행 중인 단원고 학생들이었지만, 이태원의 참사도 축제의 성질이 할로윈이라 젊은 남녀가 압도적으로 많았습니다.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들의 슬픔은 짐작컨대 형용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공감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은 서양인들의 축제에 우리 젊은이들이 무분별하게 행동한 것을 두고 냉소적으로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대형사건이 나면 언제나 정치적 이득을 따지는 무리들이 있으니까요. 그러나 우리 사회가 위험사회라는 걸 알면 그것은 언제나 터질 수 있는 뇌관 같은 것입니다. 마른 장작 같은 건조한 사회라는 인식이 필요합니다.
그 독법은 이렇습니다.
도시의 안전과 질서를 책임지는 행정집단은 여러 개의 점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행정안전부와 서울시청은 말할 것도 없고, 그지역의 구청이 맡고 있는 지역집회에 대한 세심한 예견, 그리고 지역 경찰서가 맡고 있는 군중에 대한 질서에는 경찰 서장에서부터 경찰청장까지, 그리고 이태원으로 몰려드는 교통혼잡을 파악할 수 있는 지하철 역장, 그러한 점들이 하나의 선으로 이어지지 않고 흩어져 있었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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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들은 궁색한 알리바이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셜록 홈즈나 형사 콜롬보 같으면 그 궁색한 알리바이를 다 깨트릴 수 있을 겁니다. 아니면 노장 형사 도리카이처럼 점과 점을 연결하는 선을 만들어 그 알리바이를 깨트릴 수 있을 겁니다.
그중의 단 하나의 점만이라도 사명감을 가졌다면 대형참사로 이어지지는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책임의 점들이 한 줄로 연결되며 하나의 악마의 선이 만들어졌습니다. 현장엔 아무도 없었고, 우리의 컨트롤 타워는 무의미한 선들을 긋고 있었습니다.
공권력은 권위가 없으니 이런저런 거짓 뉴스만 난무합니다.
조너선 스위프트가 말합니다.
“거짓이 지구 반 바퀴를 도는 동안, 진실은 이제야 신발을 신는다.”
2023년 12월 17일 사이버 총무 김 정 율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