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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기아자동차에 입사하여 서울 시흥동에서 3년쯤 하숙을 하며 총각으로 있었다.
지난번 한번 밝혀 드렸듯이 총각때 남동생 학비와 아버지의 병원비나 가족들 생계에 치중하며 살다 보니
막상 아내와 결혼은 결정하였지만 수중에 저축한 돈이 한푼도 없었다.
현실을 직시하니 난감하기 짝이 없었지만 흔히들 용감한놈이 저절러 놓고 본다고 했든가?
아무튼 은행에 다니는 친척 형님에게 부탁하여 적금대출 100만원을 내어서 회사 (소하리 공장) 후문 근처에 방한칸을 사글세로 빌렸다
드디어 1980년 10월3일 개천절날이 기억하기 좋다고 날을 잡아 아내와 결혼식을 올리고 제주도 신혼여행까지 잘 마치고 부산에서 경주로 택시를 타고 가던중 운전수가 졸았는지 트럭을 정면으로 들이받아 죽을 고비를 겨우 넘기고(그당시 택시는 폐차 직전 정도로 망가졌는데 천운으로 둘다 크게 다치진 않았슴) 서울에서
신혼살림을 차렸다.
그러나 신혼살림 방 치고는 콧구멍만한 부억을 들어서자마 쪽문을 열면 방만 딸랑 한개 있는 지금의 쪽방촌 같은 곳이어서 내가 생각해도 좀 심각할 정도로 허술했다.
그리고 신혼살림 들을 들이는데 사방이 담으로 가려져 있어 도대체 장농이 들어가질 않았다.
아무리 방향을 틀어가며 애를 써도 안되고 유일한 방법은 창문틀을 뜯고 들여야 한다는데 엄두가 나질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다른 짐들만 방에 들여 놓고 장농은 주인집 마루에 맡겨 놓았는데 며칠후 주인이 빨리 치우라고 독촉이 심하기에 회사 친구가 자취하는 집에 맡겨놓고 내가 총각때 갖고 있던 비닐장농을 대신 사용했다.
또 방이 한칸 뿐이라 이런저런 살림살이를 다 들여 놓으니 잠잘 면적만 겨우 남았다.
나중에 집들이를 할땐 회사직원들이 한방에 다 들어 갈 수가 없어 2회로 나누어서 손님을 치뤘다.
차림상도 큰게 없어 사과 괘짝을 몇개깔고 그위에 종이를 덮어 사용했다.
그리고 입주한지 얼마되지 않았는데 연탄보일러가 고장이 났기에 주인에게 고쳐 달라고 하였더니 들은채 만채 하며 "세입자가 고쳐 쓰라"고 했다.
집주인은 방이 10개나 될 정도로 빽빽하게 방을 만들어 순전히 집세 받아서 먹고 사는 사람이라서 그런지
인심이 고약하다 싶을 정도로 야박했다.
그말을 듣고 나니 기가 막히고 또 성질도 나서 당장 시내에 나가 전기장판을 하나 사서 깔고 전기계량기를 따로 달았다.
그러나 방안에 우풍이 얼마나 심한지 자고 나면 코 끝이 시렸다.
게다가 밤만 되면 천정에서 쥐들이 우루루 뛰어 다니는게 마치 쥐들이 축구 경기를 하는것 같아 잠자다가도 깨기 일수였고 아내는 무서워 못살겠다고 했다.
난 두가지 다 해결하는 묘안으로 연탄난로를 사서 방안에 들여놓고 연통은 직선으로 천정을 뚫어서 가스가 빠지게끔 하였다.
그랬더니 방도 훈훈하고 쥐들은 아예 자취를 감춰 버렸다.
그런데 그집에서 채 1년도 살지 않았는데 인심 고약한 주인아줌마는 "방세를 올려 주든지 아니면 방을 비워 달라"고 했다.
사유를 알고 보니 방세를 더 주겠다는 다른 사람이 나타났던 것이다.
난 "이런 경우가 어디 있느냐?"고 항변했지만 주인은 막무가내 였다.
그 방을 얻느라 적금대출 낸 것도 다 못갚은 상태여서 난감하였다.
그런데 난데없이 옆집에 세든 아줌마가 "내가 돈 빌려 드릴테니 당장 이 더러운 집구석에서 이사 가세요!"라는게 아닌가? 아마 옆집에서도 못 봐줄 정도로 주인이 치사하고 얄미워 그아줌마가 나선것 같았다.
그 덕분에 근처의 방2칸 짜리 이층집에 세를들어 이사를 갈 수 있었다.
그때가 81년 9월경 이었다.
그동안 친구에게 맡겨 놓았던 장농도 찾아서 들여놓으니 제법 살림집 같아 보여 좋았고 부엌도 꽤 널찍하며 방도 2칸 이어서 좀 살만했다.
그리고 이사후 얼마되지 않아 아들이 태어날 날이 가까워지게 되었다.
아내는 초산이라 대전 친정으로 가서 출산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아들이 81년 10월13일 대전 을지병원에서 출생 하였는데 약 1달후 내가 아들을 안고 아내와 함께 서울로 되돌아 왔다.
그러나 막상 이사한 두번째 집도 살아보니 너무나 날림으로 지어 허술하기 짝이 없는 집이었다.
우선 1층 밑에도 반 지하방이 있어 실제는 2층반 구조인 데다가 철계단이 어찌나 가파른지 연탄가게 아저씨가 우리집에 배달하고 나면 몸살이 난다며 배달을 거부할 정도였다.
때는 겨울이라 하는 수 없이 아내가 밑에서 집게로 연탄을 2장씩 통에 넣으면 난 줄을 매달아 200장씩 들어 올렸는데 그렇게 한번씩 하고 나면 팔이 빠지는것만 같았다.
게다가 그집은 연탄가스 배출도 잘 안되어 가스배출기를 달아 놓았는데 그것도 툭하면 고장이 잦았다.
한번은 자다가 연탄가스 냄새가 심하여 잠을 깻는데(고교때도 그랬지만, 하여튼 난 냄새를 잘 맡은 운은 좋았다)배출기를 고치려고 창문을 타고 지붕위를 타고 가다가 경사가 심하여 그만 미끌어 지고 말았다.
가까스로 지탱하여 처마끝을 잡았지만 아마 떨어졌다면 다리가 부러졌을 것이다.
천정은 "열루현상"(열기가 한쪽으로 빠지면서 습기가 차는것) 때문에 하루에도 아기에게 몇십장씩 갈아줘야 하는 기저귀를 방안에 널어 놓으면 천정 전체가 축축하게 젖어 있다가 나중엔 곰팡이가 슬어 방안에 냄새가 진동을 했다.
그당시는 2차 오일쇼크 이후여서 경기가 급격히 위축되어 있는 상태라 상여금은 아예 없고 월급도 미루다가 나올때가 많았다.
따라서 살림살이도 아주 빡빡하였다.
세탁기 살 형편도 못되고 수중에 돈도 없고 하여 궁리끝에 봉급생활자에게 처음 나온 가계수표(먼저 개인이 수표를 발행해서 쓰고 다음달 지정일까지 통장에 입금하면 되는 수표)란 것을 은행에 가서 개설하여 겨우 탈수기능만 있는 "한일짤순이" 라는걸 한대 샀다.
그걸로 기저귀를 탈수 한 뒤 방안에 늘어 놓으니 천정에 습기도 차지 않고 오히려 방안의 연탄난로 덕분에 적당한 습도를 유지해 주어 해결되었다.
그리고 연탄아궁이 하나로 밥도 하고 반찬도 하려니 너무 바빠 석유곤로도 한대 사서 조리를 하니 한결 빠르고 좋았다.
부엌이란 곳이 지금처름 말끔한 싱크대가 놓여져 있는게 아니라 그저 세멘트로 만든 낮으막한 부뚜막 형태로 되어 있어 항상 허리를 구부려 조리를 해야 하므로 아내가 허리도 아프고 여러모로 불편하였다.
그래서 회사에서 포장용 나무박스를 얻어 와 간단한 조리대나 간이식탁 등을 만들어 사용하였더니 한결 편하게 부엌일을 할 수 있었다.
그런 작업을 하자니 톱으로 자르고 못으로 짜맞추고 또 페이퍼로 밀어서 표면을 다듬고 페인트칠도 해야 했는데 밑에서 주인이 시끄럽다고 고함을 질러댔다.
또한 벽면은 단열재를 전혀 사용치 않았기에 아주 추운날은 벽에서 바람이 술술 새어 나올 정도로 우풍이 심하였다.
그런고로 아이 목욕을 시킬땐 방안 공기가 너무 차거워 욕조에서 꺼내면 발발 떨며 울기에 벽면에다 스티로폴을 붙여 놓았더니 조금 나아졌다.
수도물은 지하에서 모터펌프로 퍼 올려 지하수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것도 툭하면 고장이다.
그럴경우 우리집이 기저귀 빨래나 목욕 등으로 당장 물이 없으면 제일 아쉬운집 이었으므로
"답답한 놈이 샘 판다"고 내가 한번 고쳐 주었더니 그다음 부터 주인은 고장이 났다 하면 수리공은 부를 생각도 않고 나만 퇴근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터펌프가 1층으로 올라가는 계단밑의 좁은 공간에 있어서 목을 구부리고 겨우 고개만 디밀어 고치자면 상당히 곤욕를 치루어야만 했다.
이듬해 봄이 되어 바깥에 빨래를 널려고 보니 이번엔 빨래대가 없었다.
하긴 그당시는 세입자들이 이사갈때 방안의 비닐장판도 걷어가고 심지어 형광등도 빼가지고 이사를 가던 시절이니 그런게 있을리 만무했다.
게다가 빨래대를 파는곳도 없으니 하청공장에 부탁하여 쇠파이프를 잘라 집에 가져와서 볼트로 조립을 한 후 페인트칠까지 하여 빨래대를 완성하였다.
지금은 이사갈때 멀쩡한 세간살이 마져도 오래써서 지루하다며 버리고 가는 물건이 넘쳐나니 세상이 변해도 참 많이 변했다!라는 생각이 이사할때 마다 들었다.
또 그당시는 경제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뒤숭숭 할때 였다.
결혼 전년도 그러니까 79년도 "10.26사건"도 있었고 이어서 12.12사태도 일어났고 80년도엔 광주사태까지 여러사건들이 있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컬러 텔레비젼이 나왔다.
그러나 T.V를 생산하는 대기업들 조차도 상여금을 줄 현금이 없어 직원들에게 제품으로 대신 주었다.
그런 연유로 지금 L/G전자의 전신인 금성사의 칼라 텔레비젼 한대를 그회사 직원이 상여금 대신으로 받은걸 싸게 구입하여 저녁마다 "제1공화국"이나 "조선왕조500년"같은 드라마를 컬러영상으로 아주 재미있게 보았다.
아침마다 출근할때 연탄재를 담아 놓은 광주리를 들고 나가 골목에 놓아두면 청소차가 올때쯤 아내가 나가 버리면서 여러모로 허름한 그집에서 불편한 것 투성이로 살았다.
그러나 난 그집에서 수시로 울어대는 아들을 흔들이 의자에 태워 흔들면서 칼라 테레비젼으로 드라마를 재미있게 보며 살던 그때가 가장 그립다.
맛으로 비유하자면 지금은 량(量)은 풍족하지만 무언가 "싱거운 맛" 같은데 비록 많이 부족했더라도 그때가 무언가 "진한 맛" 이었든것 같다.
사람의 삶에서 반드시 물질이나 환경이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는 필요, 충분 조건만은 아닌게 분명한가 보다.
역시 삶이란 인생의 각 단계마다 자신의 내면을 만족시켜 주는 충족감이 있어야만 행복을 느낄 수 있는것 아닐까? 싶다.
그런 초라한 그집에서 나마 아들의 첫돌을 맞았다.
당시는 형편도 넉넉치 못하였므로 집에서 간단한 음식을 마련하고 같이 근무하는 직원들을 초대하여 돌잔치를 해 주었다.
직원들이 아들에게 금반지를 끼워 주었더니 아이는 마치 자랑이라도 하는듯 보행기를 타고 이러저리 굴러 다니며 신나게 잘 놀았다.
오늘날 이정도 나마 살 수 있었던것은 그저 아이들 이라도 큰 탈없이 잘 자라준 덕분이 아닌가? 생각되므로 조상님들께 거듭 감사 드린다.
81년도의 겨울을 지나고 나서 82년도에 접어들자 아침마다 회사에 출근을 하면서 "무언가 결단을 내려야 할것 같다"는 생각이 내내 맴돌았다.
한번 내리막을 친 경기가 다시 회복하려면 최소 5년은 걸린다고 하는데 아이까지 태어나 양육비도 만만찮은데 다니는 회사는 좀처름 회복할 기미가 보이질 않아 당시의 급여를 받아서 향후 살아가기에 만만치가 않음을 직감했다.
게다가 서울이란 곳을 처음 왔을때는 총각때 여서 잘 몰랐지만, 5년 정도 살아보니 서서히 어려움을 직감하게 되었다.
지금은 서울 주변으로 위성도시가 여럿 있어서 그런대로 수도권이란 곳에서 서민도 서울에 출퇴근이 가능하지만 당시에 전철 1호선만 개통된 서울이란 곳은 대도시가 그러하듯 구조적으로 부자들은 훨씬 더 많은 문화적인 혜택을 많이 누리면서 살기 좋은곳인 반면, 달동네의 서민들은 중,소도시 보다 더 힘들게 살아야 하는 문화적 경제적 구조로 되어 있었다.
서서히 서울을 벗어 나야겠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게다가 서울에서 살면 급격하게 형편이 나아지지 않는 한 이대로 가다가는 향후 또 태어날 아이를 포함해서 우리 가족을 상당히 고생 시킬것만 같았다.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난 결혼 전에도 항상 나의 자식들이 태어나면 "돈이 없어 고생을 시키지는 않게끔 할것"이란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난 어린시절 부터 나의 집안에서 돈 때문에 벌어지는 가정불화를 많이 보아왔기 때문에 나의 자식들에게 만은 "돈이 없어 벌어지는 불행한 광경"은 절대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사회적으로 훌륭한 대우를 받으신 아버지께서도 돈이 없다보니 말년에 비참하게 돌아가시는걸 보았지 않았는가?
내가 결혼한 그 이듬해 봄 손자를 보시기도 전에 고향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며칠이 지난 어느날 인근의 구멍가게 아줌마가 "아버지가 남기신 외상값이 있다"며 받으러 왔었다.
즉석에서 바로 갚아 주었지만 난 "아버지께서 얼마나 돈이 없으셨으면 가족 몰래 구멍가게에 까지 외상값을 남기 셨을까?" 하는 애석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82년도에 들어서도 회사는 계속 어려웠다.
상여금이 없는건 여전했고 월급도 한,두달씩 미루어서 나오기 일쑤였다.
난 더 이상 이 회사가 나에게 비젼이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그런 경제상황에서 막상 전직을 하려 해도 갈 수 있는 회사가 없었다.
몇군데 기웃거려 봤지만 모두 허사였는데 어느날 신문에 "삼성생명"에서 경력사원을 모집한다는 광고가 크게 실려 있었다.
사실 그때 난 공대출신이라 생명보험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고 있었고 또 그런 회사에서 무슨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수소문 끝에 그 회사의 인사부에 고교 동기가 근무하는걸 알고 자세히 물어 보았다.
나의 전공과 너무 판이하게 다르므로 동기에게 "나의 전공으로도 채용이 될수 있느냐?"고 물으니 "보험업은 전공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했다.
게다가 솔깃한 점은 "전국 어디라도 원하는 곳으로 발령 받을 수 있다" 하고 상여금 600% 지급과 함께 년봉도 현재보다 더 많으며 또 금융회사라서 월급은 정확히 제날짜에 준다기에 솔깃했다.
난 전직의 결심을 굳히고 삼성생명 경력사원 모집에 응시하였다.
지금의 SAALT와 같은 필기시험 및 면접시험을 거쳐 다행히 합격 하였다.
서울도 벗어나고 월급도 제날짜에 착착 잘 나오는 회사에 입사 한다고 상상을 하니 너무나 기분이 뿌듯하였다.
1982년 11월 22일 만5년을 근무했던 기아자동차를 그만두고 삼성생명에 입사하였다.
삼성생명에 경력사원으로 입사하여 용인연수원에서 한달간 합숙교육을 받았다.
기아자동차 에서는 입사안내 교육 일주일 받은것 외에 교육 이라고 받아 본 적이 없었는데 삼성에서는 무척 많은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삼성에서 퇴직후에 지금 내가 작년까지 다닌 중소기업에 입사가 가능했던것도 삼성에서 컴퓨터 교육과 일본어 공부를 한 덕분이었는데 하여튼 삼성에서는 그 외에도 내가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많은 교육을 받았다.
아무튼 교육을 마치고 난 근무지를 대구로 옮기기를 희망하여 서울생활 5년을 청산하고 대구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이사가기 직전에 우리 가족은 서울에서의 생활이 마지막 이라며 아들을 데리고 용인에 있는 에버랜드로 구경을 갔다.
그날 전철로 수원으로 가서 다시 용인까지 가는 버스를 타고 도착하니 이미 오후가 되었는데 조금 돌아 다니다 보니 어느듯 폐장 시간이 가까워졌다.
그래서 급히 동물원으로 가 사진을 몇장 찍고 왔는데 그게 서울에서의 마지막 추억 이었다.
기아자동차에서 받은 퇴직금에 조금 보태어 대구의 송현동에 있는 옛 월성아파트(지금의 월촌역 근처)에 16평짜리 전세를 얻었다.
그런데 이사 날자를 잡고 보니 하필이면 크리스마스 날이었다.
요즈음은 집주인이 손도 대지 않아도 이사업체에서 다 알아서 해주는 포장이사가 성행하고 있지만 당시는 일일이 이삿짐 박스를 꾸리는 한편 화물차를 계약하고 인부도 구하여 이사를 해야 하는데 그땐 크리스마스가 무슨 명절이라도 되는지 화물차도 없고 인부도 구할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하루전에 고향에 내려가서 친지의 트럭을 빌려 내가 직접 몰고 가기로 하고(기아자동차 근무때 면허증은 따 놓았음)근처 슈퍼마켓 아저씨의 도움을 받아 아내하고 셋이서 겨우 겨우 이삿짐을 실었다.
특히 장농을 2층에서 내릴때는 무거워서 무척이나 애를 먹었는데 처음엔 "조심조심" 외치다가 너무 힘들어 나중엔 긁히든 말든 우당탕 내려서 대충 싣고 앞좌석에 아들과 아내를 태우고 경부 고속도로를 달려서 대구로 내려 가는데 눈발이 흩날리었지만 기분은 무척 홀가분하였다.
뭐랄까? 마치 난민들이 보트피플 처름 탈출하듯이 서울을 탈출 하는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눈발도 제법 흩날리기에 조심해서 천천히 달렸는데 구미에 당도하니 너무 늦은 시간이라 일단 선산 고향집으로 방향을 돌려 거기서 자고 다음날 아침 다시 대구로 갔다.
다행히 크리스마스 명절(?)이 끝났기에 인부를 구할 수 있어서 하여 이삿짐을 정리해 놓고 나니 16평짜리 아파트가 그떈 마치 대궐처름 넓게 여겨졌다.
다른 이삿짐들은 무사히 다 싣고 왔었는데 맨 뒷칸에 실은 아들의 장난감통이 중간에서 떨어졌는지 보이질 않아 아들이 그걸 알고 우는걸 많이 사주겠다고 하여 겨우 달래었다.
서울에서 살때는 그집이 좁고 위험하여 아이를 항상 조심 시켰는데 아파트에서는 안심하고 풀어 놓으니 마음놓고 이방저방 막 뛰어다니며 좋아했다.
그렇게 해서 키운 그 아들놈이 지금은 수도권이 좋다며 수원에서 경찰로 근무하고 있다.
매년 크리스마스때면 특히 눈이 올때면 이사하던 그날이 생각난다.
요즈음 자식들에게 서울에서 이사한 그날의 무용담을 얘기 해 주면 상상이 가지 않는다고 한다.
왜냐하면 본인들이 이미 철이 들었을땐 쾌적한 아파트에서 각자의 방과 책상,침대,컴퓨터,게임기 등등을
갖추어 마음껏 누리고 살았고 이미 초등학생때 부터 가족이 놀러갈땐 항상 자가용을 타고 다녔고, 이사할때 마다 포장이사 센터에서 편하게 처리 해 주는걸 보며 자랐기 때문에 나와같은 지난날의 그런 고생은 상상이 가 지질 않을것이다.
따라서 요즈음 아이들....언젠가 아주 살기 힘든 상황이 오면 과연 어떻게 헤쳐갈지? 걱정이 된다.
그리고 나 자신의 삶도 물질적으론 그때보다 몇십배 나아졌겠지만 마음만은 그때 서울에서 살던
그시절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다시 되돌아가고 싶다.
그때의 삶에 대한 열정과 의지...그리고 가난한 행복이 그리울때가 많은건 왜 그럴까?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첫댓글 이글을 올려주시면서 정말 많은 생각을 하셨겠네요 우여곡절 끝에 넘 어렵게 살아오셨네요 따뜻한 크리스마스 보내시고
앞으로도 더 열심히 건강하게 가정을 위해서 고생 많이 하셔야 겠습니다.
넘 감동적으로 글을 읽고 나니 맘이 편치는 않네요..
저 또한 동기부여 많이 받고 갑니다..감사합니다.
잘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메리크리스마스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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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즉 알았으면 봉황님 집에 세들어 개기는 건데.ㅋㅋㅋ재미있는 세월들을 기대만하지 않고 같이 맹글어 가며 삽시다래.
너무 감동적인 삶을 살으셨네요..잉잉~~눈물날라구 해요
우리 시대엔 대부분 그랬다고 합니다.이젠 웃고 살만 합니다.핫하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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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싸해요. 메리크리스마스! 수원에 갈때마다 문안 인사 드릴께요
한참을 읽어내려가다가 느낀게있네요 이게인생이구나 젊은청춘을 한페이지로 표현할수있는게 인생입니다 정말별거아니구나 남은인생 멋지게 잘마무리하시기 바랍니다
감싸합니다 형님.남은인생 재밌게 살아가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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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싸해요.그시절을 잊지않고 살면 행복한 날들은 저절로 오겠지요
요한 님 의 걸어오신 지난 날 "감동" 입니다. 어려운 여건에도 굴하지 않으시고 비전 과 도전 정신 실행 하시는 행동력 판단력 . 누구나 할수있지만 누구도 함부로 과감 하며 현명한 결단 할수없지요/// 이번 글스마스에는 요한 님 의 글 이 "소인" 에게는 감동적인 입니당 시작이 엇그제 같은 데 벌써 금년 도 끝자락 이군요 온가족이 끝마무리 잘하시고 겁고 유익 하며 행복한 시간되세요
미흡한글을 잘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늘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