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자점은 조선을 대표하는 간신이라 할 만한 인물입니다. 이완용 등장 이전까지는 독보적인 존재감을 과시하지요. 그의 행보 하나하나가 주옥같습니다.
김자점은 인조반정의 1등 공신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반정 당시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는 않았지요. 그럼에도 1등 공신에 책정된 이유는 광해군이 총애하던 김개시라는 상궁에게 상당량의 뇌물을 뿌렸기 때문입니다.
사실 인조반정은 실행 전에 역모 계획이 누설된 일이 있었는데, 이때 김자점의 뇌물을 받은 김개시는 광해군이 이런 사실을 무시하도록 바람을 넣었습니다. 김개시의 말이라면 철석같이 믿던 광해군은 당시의 역모 고변을 헛소문으로 일축했고 그 결과 인조반정은 성공할 수 있었지요.
여하튼 김자점은 반정의 공신인 만큼 출세가도를 달리게 됩니다. 세자빈 간택 문제 때 인조의 마음에 들지 않는 말을 해 귀양을 간 적도 있었으나 정묘호란 때 군사 적임자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다시 등용되지요.
병자호란 때의 활약이 여러가지 의미로 대단한데, 당시 김자점은 도원수로서 서북방의 방어 전체를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거느린 병력도 2만으로 모두 북방의 정예병이었지요. 그리고 청나라 군대는 압록강에서부터 한양까지 최단거리로 냅다 달려왔습니다. 그러니까 김자점이 관할하는 지역을 통과한 것이지요.
이때 김자점은 경이롭게도... 아무것도 안합니다. 정예병 2만과 함께 산성에 틀어박혀서 남하하는 청군을 강 건너 불구경 하듯 쳐다보기만 했지요. 사실 아예 안 싸운 건 아니고 조정에서 김자점에게 성에서 나와 싸울 것을 명령해 야전을 벌이기도 했는데, 전투 시작과 함께 탈탈 털립니다. 전투에서 한 번 패한 이후에는 진짜로 성에서 나오지 않지요.
덕분에 청군은 개전 1주일 만에 한양을 점령하고 도망갈 시간을 벌지 못한 인조는 원래 도피 예정지인 강화도가 아닌 남한산성으로 피신하게 됩니다. 참고로 임진왜란 때 일본군은 한양에 도착하기까지 29일이 걸렸습니다.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40일 가량을 버팁니다. 그 사이에 지방에 있던 수만의 근왕군이 인조를 구출하기 위해 한양으로 향하지요. 이때 근왕군을 이끄는 지휘관들은 정예병을 가지고 있던 김자점에게 함께 청군의 배후를 치자고 권유하는데, 이때도 김자점은 병력이 적다는 이유로 성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다시 강조하자면 당시 김자점은 군대를 총지휘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도원수였습니다. 이런 인물이 지휘권을 발휘하지 않고 방관하니 효율적인 전투가 가능할리 없습니다. 각지의 근왕군들은 하나로 뭉치지 못하고 따로따로 싸우다가 각개격파 당하지요. 얼마 지나지 않아 남한산성은 함락당하고 이후에는 잘 알다시피 삼전도의 굴욕입니다.
이처럼 병자호란 때 보여준 김자점의 모습이 심히 무능하니, 정확히는 군율을 위반하고 자기 몸 아끼는 데만 급급했으니 1등 공신이고 뭐고 간에 무사할 리가 없습니다. 사실 김자점이 소임을 다해 약간의 시간만 끌어줬어도 병자호란의 모양새는 상당히 달라질 수 있었지요.
때문에 조정의 대신들이 한목소리로 김자점 탄핵을 외칩니다. 결국 김자점은 위리안치(유배형 중 가장 강도 높은 형벌)에 처해지게 되지요. 그런데 이마저도 얼마 지나지 않아 아프다는 이유로 형이 완화되고 1년 뒤에는 공직에 복귀하게 됩니다.
당시 사대부들이 이런 얌체 같은 인물을 곱게 바라볼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인조는 본인에게 삼전도의 굴욕을 안긴 김자점을 지속적으로 중용합니다. 병자호란 패배 이후 조정은 친청과 반청으로 나뉘어 한창 싸우고 있었는데, (청에 대한 복수심에 불탔다는 일반적 인식과 달리) 두 번의 패배로 더 이상의 전쟁에 부담감을 느낀 인조는 친청파의 손을 들어주고자 하지요. 김자점의 복직은 이런 인조의 계획 중 일부였습니다. 그는 당대의 대표적인 친청파 인사였거든요.
이후로 김자점은 지속적으로 인조에게 이쁨 받을 짓만 골라 하며 권력을 키웁니다. 예를 들면 인조의 장남 소현세자 사망 후 소현세자의 아들 대신 동생인 봉림대군(훗날 효종)을 세자로 세우는 것, 소현세자의 부인인 민회빈 강씨에게 사약을 내리는 것 등이지요. 두 문제 모두 대부분의 사대부들이 반대한 일이었으나 인조는 강력하게 밀어붙였고, 김자점은 임금의 충실한 지원자가 되어 주었습니다.
이런 행보를 반복하며 김자점은 꾸준히 점수를 땄고, 본인의 능력과는 무관하게 영의정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됩니다. 인조가 김자점을 얼마나 아꼈는지, 죽기 직전 효종에게 ‘김자점은 나와 같이 대하라.’라고 말할 정도였지요.
이렇게 권력의 정점에 선 김자점이나 그의 최후는 비참했습니다. 인조 시절 적을 만들면서까지 임금에게 빌붙은 김자점이기에 인조가 죽자마자 그의 권위는 끝도 없이 추락했지요. 인조가 죽은 지 6일 만에 대간들에 의해 탄핵당하고, 효종은 ‘김자점은 인조께서 승하하실 때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충성심이 부족할 따름이다.’는 이유를 대며 그를 광양으로 귀양 보내버립니다.
그간 부정부패로 모아놓은 재물이 상당했기에 유배지에서 얌전히 지냈으면 별 탈이 없었겠지만, 김자점은 여기서 무리수를 둡니다. 대표적인 친청파 인사였던 만큼 청나라의 힘을 이용해 효종을 몰아낼 계획을 세운 것이지요.
김자점은 인조의 능지문에 청나라의 연호가 아닌 명나라의 연호를 사용했다는 것, 효종이 북벌을 계획하고 있다는 것 등을 몰래 청나라에 알립니다. 이에 청나라는 군대를 전진 배치하고 조선에 외교적인 압박을 가하지요. 다행이 당시 김자점의 뒤를 이어 영의정이 된 이경석이 목숨을 걸고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로 돌려 조선은 청의 침공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에 청나라의 외교적 압박이 모두 김자점의 탓이란 것이 밝혀지고, 김자점과 그의 아들들은 역모죄로 처형당하게 됩니다.
야사에 따르면 이때 김자점의 시신은 갈기갈기 찢겨 조선팔도에 보내졌다고 합니다. 실록에는 이 안건이 너무 잔인해 기각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만큼 실제로 야사의 일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은 적으나, 최소한 당시 김자점에 대한 평판이 얼마나 나빴는가 정도는 확인할 수 있지요.
김자점은 그야말로 시작부터 끝까지 자기 몸 하나만 바라보고 산 인물입니다. 그리고 이런 인물이 권세를 누릴 수 있던 것은 반정으로 등극한 인조가 본인의 왕권 유지를 위해 자신의 코드에 철저히 부합하는 인물에게 권력을 쥐어줬기 때문이지요.
ps. 여담으로 이 김자점의 후손 중 한 명이 백범 김구입니다. 명문가였던 김자점의 집안은 완전히 몰락했고 김구가 태어날 때쯤에는 사실상 천민 집안이나 다를 바 없는 상태가 되었지요. 김구는 선조 하나 잘못 둔 덕에 황해도에서 천대받으며 자라야만 했습니다.
첫댓글 황교활... 어이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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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대조 쯤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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