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촌 일기-유랑아제의 원맨쇼, 보리밭
딱 63년의 세월이다.
내가 대구 수창국민학교를 다니다가, 울 엄마 고향인 경북 문경 점촌으로 이사를 와서, 점촌초등학교 4학년으로 전학한 1955년 그해부터 손꼽아 봤더니 그 세월이 그랬다.
내가 원래 태어났던 곳은 경북 예천이었다.
그 40여 년 전의 일본 강점기에, 전라도 화순인가 곡성인가 장흥인가에서 살던 우리 선조들이 그곳에서 먹고살기 힘들어지자, 온 식솔들과 함께 경북 상주 화서로 이주를 해 와서 화전을 일구고 살았고, 거기서도 먹고살기 힘들다고 느낀 우리 할아버지께서, 젊은 시절 그때로는 좀 더 크고 넓은 땅인 경북 예천으로 이주를 해서, 그곳에서 크게 성공을 해서 과자공장을 했었다.
내가 이 세상 빛을 보고 태어났던 1948년 그 즈음만 해도, 나는 예천의 부잣집 맏손자로 온 집안의 귀염둥이였었다.
얼마나 귀염둥이였는지, 우리 할머니가 살아생전에 내게 이런 말씀을 곧잘 해주셨다.
“하이고, 야이야! 그때 네가 두 살이고 세 살이고 했을 땐데. 찾아서 안보이만 두 아름드리 도라무깡 설탕통을 뒤지고는 했었다. 흰설탕 황설탕 흑설탕 그렇게 세 가지 설탕통이 있었는데, 너는 꼭 흑설탕 통만을 골라서 찾아들어가서는, 하루 종일 그 통 안에서 설탕만 파먹고는 했었다. 물론 똥오줌을 다 그 안에서 싸고는 했었지. 그렇다고 그 설탕을 버릴 수야 없지. 오줌은 벌써 녹아들었으니 어쩔 수 없고, 똥만 걷어내고 그냥 과자 만드는데 쓰고는 했었다. 근데 내 암만 생각해도 희한한 것이 이제 겨우 두세 살짜리 알라인 네가 우예 네 키보다 더 높은 그 통을 기어 올라갔을까 하는 거였단다.”
그렇듯 호사로운 어린 시절을 보냈던 나였다.
그러나 내 나이 세 살 때인 1950년에 발발한 6.25전쟁은 내 인생을 송두리째 흩뜨려놓고 말았다.
경산 하양 청도 등지로 피난을 가야했었고, 유엔군의 참전 덕분에 예천으로 되돌아가는 듯하다가, 1.4후퇴로 다시 피난을 해야 하는 바람에, 그 힘겨운 피난살이에 질색을 한 우리 할아버지께서 두 번 다시 온 재산이 쌓여있는 예천으로 돌아가기를 포기하고, 대구 칠성동 전매청 인근의 어느 허름한 붉은 벽돌 창고에서 작은 판잣집 한 채를 지어 그 단칸방에서 잠시 머물었다가 결국 신작로가 나기 시작한 대구 비산동으로 이사를 해서, 그때로는 그래도 괜찮은 양철지붕 새집을 지어 정착하게 됐었다.
내가 이명박 대통령 부인이 다녔다는 대구의 명문 수창국민학교에 입학한 것도 바로 그 피난살이 덕분이었다.
그래도 울 엄마에게는 그때 그 피난살이가 너무나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우여곡절의 말 못한 사연들을 겪고 또 겪어, 결국은 울 엄마의 고향으로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외삼촌 이모가 살고 있던 경북 문경 점촌 땅으로 찾아들게 된 것이다.
괴나리봇짐 같은 작은 보따리 하나 싸서 머리에 이고, 그때 초등학교 4학년인 나는 혼자 걸리고, 두 살 터울로 어린 남동생 둘은 이쪽 손 저쪽 손에 하나씩 잡고 걸리고, 그리고 산달이 다 되어 불룩한 뱃속에 아이 하나 담고 친정 찾아 먼 길을 떠났을 그때의 울 엄마 모습을 그려보면, 한 갑자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 애잔함에 그만 눈물이 홍수를 이루고 만다.
점촌땅으로 찾아들어 맨 먼저 자리 잡은 곳이 재골산 자락의 마당 널찍한 초가삼간이었다.
몇 발자국만 가면, 이제 막 전학을 한 점촌초등학교 4학년 같은 반인 학대네 집이었고 대문간에 누런 황소가 한 마리 있어 음메 음메 울어대던 송길이네 집이었다.
한 핸가 두 핸가만 그 집에서 살았다.
곧 이사를 가게 됐는데, 소위 ‘문경카도’라고 해서 우리 고향땅 점촌에서 서울로 가는 길목이었다.
팔수네 방앗간이 건너다보이는 작은 가게에서, 찐빵에 만두에 찹쌀떡에 나마가시 해서 빵집을 했었다.
그 빵집을 할 때에, 혹 앙꼬 태울까봐 노심초사하던 울 엄마 아버지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래도 거기서는 큰돈을 벌었다.
6.25 전쟁 전의 예천에서 살 때에, 우리 할아버지께서 운영하시던 과자공장에서 빵 만들고 과자 만들고 사탕 만드는 기술을, 우리 아버지가 어깨너머로 보고 배운 덕으로 참 맛있는 빵을 만들어내셨기 때문이다.
그렇게 빵집만 했으면 그래도 잘 살았을 텐데, 울 아버지의 욕심은 딴 곳에 있었다.
남 보기 번듯한 사업을 하시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발통이 열 개라고 해서 소위 ‘십발이’라고 하는 트럭 한 대를 사서 광산과 산판을 다니는 운수사업을 했었고, 함창 은척인가 하는 곳에 탄광 하나를 덕대로 얻어 괴탄을 파냈었다.
결과는 쫄딱 망하고 말았다.
그래서 우리 아버지의 처가살이가 시작된 것이다.
바로 점촌에서 들판 건너 영순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임축제재소 건너편 목욕탕이, 바로 평해 황(黃)씨에 우리 외갓집이었다.
그 외갓집에 얹혀살면서, 우리 고향땅 명문인 문경중학교에 입학을 했고, 학창시절 3년 내내 그 집에서 살았다.
바로 그 집에서 살 때, 나와 특별히 정든 사람이 하나 있었다.
호서남 초등학교를 졸업해서 나보다 한 해 먼저 문경중학교에 진학한 재(在)자 용(龍)자 우리 막내외삼촌이었다.
머리가 얼마나 좋은지, 그 어린 시절에 바둑이 벌써 3급쯤의 실력으로 정석을 꿰뚫은 바둑 고수였었다.
지금 아마추어 3급쯤 되는 수준의 내가 바둑을 배운 것도, 바로 그때의 그 외삼촌 덕이었다.
그렇게 바둑을 배운 이후로, 단 한 번도 바둑에서의 사부인 외삼촌을 이겨본 적이 없다.
몇 수 위인 외삼촌을 향해 꼼수 뒀다고 식식대기도 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부끄럽기 짝이 없는 조카인 나의 만용이었다.
막내외삼촌은 공부도 참 잘했다.
딱 한 학년 차이로 위였는데, 꽤나 공부한다는 내 보기에도, 그 명석한 두뇌회전을 감히 따라갈 수가 없었다.
모든 과목에서 탁월한 성적이었고, 이 책 저 책 해서 책도 많이 읽어, 그 중학생 시절에도 이미 철학서적까지 읽은 것으로 내 기억하고 있다.
당시 젊은이들의 필독서였던 플루타르크영웅전도, 당시 인기몰이를 하던 만화책 ‘라이파이’도 그 외삼촌에게 얻어 읽었다.
공부만 잘 한 것이 아니다.
노래도 참 잘 불렀다.
하교하는 시간은 학년의 차이가 있어서 그러지 않았지만, 등교하는 시간은 학년 차이 없이 다 같아서, 늘 같이 등교를 했었는데, 그때 점촌역 철길을 건너 눈두렁 밭두렁 길을 따라 걸으며 노래를 부르고는 했었다.
그것도 ‘남몰래 흘리는 눈물’같은 오페라 아리아라든가, ‘켄터키 옛집’같은 미국민요 같은 품격 있는 노래들을 불렀다.
우리 가곡도 불렀는데, 그 중에 내 기억하는 노래가 바로 박화목 작사 윤용하 작곡의 ‘보리밭’이었다.
우리들 ‘햇비농원’을 찾아준 유랑아제 김종태 내 친구가 바로 그 가곡 ‘보리밭’을 연주하고 있었다.
은은하게 내 귀전에 얹히는 색소폰 그 선율과 함께, 나는 외삼촌과 함께 논두렁 밭두렁을 걷던 까마득한 그 옛날 추억의 세계로 빠져들고 있었다.
아니다.
또 하나 더 있다.
철길 옆 누런 보리밭에서 어깨동무로 아내와 함께 섰던, 40년 전 신혼시절 그 달콤한 순간의 추억이었다.
첫댓글 진작 까발씰것은-잘못 불렀던 노래도 한번 여럿웃기고 즐거움주는 차원에서 공개해 보면 어떨까!?
서울로 진출해서 그 정도라도 성공을 거두웠었다 자부해도 훌륭하고 특히 왕거이 건진게,.....ㅎ
이진애 여사!~^^어디서 이런 횡재 보물을 건지겠노-니쌍판에.....ㅎㅎㅎ놀리니 재밋넹!~
요래 다~까발씨믄 에지가히 구설에 등극 하시겠고나- 그래도 그 용기가 가상 하도다!
아침부터 시방 하사하신 문경소고기 뽂아 짭짭 다베나사이~하고 트럼하고
카톡보고 다시 컴에 걸터 앉으니...과관이네!~
조 사진 조시절 로 그보리밭으로...다시 돌아가고파!~
누런 그때 그보리밭을 연상하며 최선을 다해 노랠 부르면 되는데.....
하다가 파~! 하고 웃음을 터트리며 고만두며 지변명을 씨부리는걸 요기에 올려!~^^지릴하지말고,...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