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66번째 편지에서 Work의 반대말 혹은 대응어가 Re-creation이라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그 후 저는 주위 사람들이 어떻게 Re-creation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유심히 살피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모두 각자의 방식대로 Re-creation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친구들 중에는 Work에서 은퇴한 친구들이 많아 Re-creation 시간이 하루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직 은퇴하지 않았어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Re-creation 시간에 대한 고민이 필요합니다.
지난주 1992년 스페인 유학 시절 만났던 동갑내기 외교관을 만났습니다. 당시 같이 연수하는 처지라 친했으나, 그는 외교관 생활을 하느라 외국을 전전하여 그간 만나지 못하고 지내다 오랜만에 부부가 만난 것입니다.
중남미 대사를 두 군데 거친 A 대사는 머리만 허옇게 세었을 뿐 모습은 그대로입니다. 부인의 단아한 모습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같습니다. 서로 어찌 지내는지 묻고 사는 모습을 이야기하는라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A 대사는 2018년에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여유롭게 은퇴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의 일과는 아침을 집에서 먹고 집 가까이에 있는 국립중앙도서관으로 출근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루종일 도서관에서 지내며 자신이 읽고 싶은 책을 대출해 읽는다고 했습니다. 점심은 도서관 구내식당에서 같은 스케줄로 살고 있는 전직 동료 외교관들과 같이하고 오후에는 다시 독서 삼매경에 빠집니다.
그의 삶은 제가 고시원에서 고시 공부할 때의 삶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목표가 있고 없고의 차이만 있을 뿐 진지함은 같았습니다.
"주로 무슨 책을 읽나요?" 제 질문에 "철학책도 보고 문학책도 보고 과학책도 봅니다."라고 답합니다. 이때 A 대사 부인이 한마디 거듭니다. "코딩 공부도 해서 코딩도 직접 하시고 ChatGPT도 잘 다룹니다."
놀라웠습니다. A 대사는 시간을 때우러 도서관에 출근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진심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도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이라 A 대사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되었습니다.
"요즘은 무슨 책을 읽고계신가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읽고 있습니다." "그러면 나중에 책을 쓰거나 강의할 생각은 없으신가요?" "그저 공부가 좋아서 하고 있을 뿐 다른 계획은 없습니다."
우리들에게 공부는 늘 수단이었습니다. 학창 시절은 말할 것도 없고 직장에서도 일을 잘하고 지위가 올라가기 위해 공부했습니다. 사실 순수하게 공부 자체만을 위해 공부한 적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지난 7년간 김상근 교수님으로부터 배운 고전 공부도 <인격의 완성>이라는 인생의 큰 목적을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스티브 잡스가 독서를 극찬하였지만 그 독서도 수단이었습니다.
"인류가 현재까지 발견한 방법 가운데서만 찾는다면 당신은 결코 독서보다 더 좋은 방법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독서와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새로운 일을 도모하라." 스티브 잡스의 말입니다.
그런데 A 대사는 공부 자체를 목적으로 삼고 있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A 대사 부인이 그 상황을 적절히 표현하였습니다. "남편이 집에 돌아오면 오늘은 무슨 공부를 했냐고 묻습니다. 외부 강의는 안 해도 가족들한테는 알려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되묻지만 남편은 그저 미소만 짓습니다."
A 대사는 무척 행복해 보였습니다. 이런 Re-creation 삶도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지난주 오랜만에 B 이종사촌 매형을 만났습니다. 미국에 이민가서 사는 분이라 수년 만에 한국에 오셨습니다. 매형은 올해 77세이십니다. 오랜만에 한국에 오셨으니 좋은 곳에서 저녁 한번 대접한다는 생각으로 식사하며 평범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번에 한국에 오신 목적이 있으신가요?" "탁구 레슨을 받으러 왔어." 탁구 레슨이라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저는 예상하지 못한 답변에 깜짝 놀라 자초지종을 물었습니다.
"나는 미국에 이민가서 먹고 살기 위해 미국 해군 군악대에 입대를 하였지. 군인이 된 것이야. 군대 생활 중에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여 군 퇴임 후에는 음악 목사가 되어 목회 활동도 꽤 많이 하였지. 그런데 그것도 다 그만두고 모든 의무에서 벗어난 것이 70세였어.
나는 원래 무엇을 하든 남의 3배쯤 열심히 하는 타입이야. 남과 똑같이 하여서는 남을 이길 수 없잖아. 그런 경쟁의 삶을 마치고 한가하게 지낼 수 있는 나이가 되었는데 그냥 지내기는 너무 무료한 거야.
무엇인가 도전하고 싶었지. 그때 만난 것이 탁구야. 탁구 종류 중에서도 롱핌플 러버를 사용하는 탁구에 매료되어 7년간 열심히 하고 있지."
이종사촌 누나가 이때 끼어들었습니다. "말도 못 한다. 집에 대회에서 받아온 트로피가 수두룩해. 맨날 대회에 참석하느라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셔. 하루종일 탁구 연습만 하셔. 그게 그렇게 좋은지."
두 분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B 매형의 하루 일과는 탁구 그 자체였습니다. 아침을 먹고 탁구장에 가서 탁구 레슨과 연습을 하고 집에 와서 점심을 먹고 다시 탁구장에서 가서 레슨과 연습을 반복합니다.
이렇게 열심히 하니 70세에 시작한 탁구지만 주 대회에서 우승하고 미국 전국 대회에서 우승하기 위해 유튜브에서 만난 탁구 선생님을 찾아 한국에 오신 것입니다. 매형은 매일 그 선생님에게 레슨을 받고 계십니다.
대개 70세이면 무엇을 시작하기에 늦은 나이라고 생각하게 되고 특히 운동이라면 더더욱 그런데, B 매형은 70세에 시작하여 그저 소일거리로 탁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전력을 다해 미국을 제패하고 계신 것입니다.
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도 꽤 도전하며 사는 인생인데 매형에 비교하면 상대도 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살다 보니 매형이 하는 말씀은 힘이 있고 젊은 사람 못지않은 열정이 있었습니다.
Re-creation 시간을 보내는 방법은 참 다양한 것 같습니다. 지난주에 만난 두 분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Re-creation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모두 행복해 보였습니다. 공통점은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진심을 다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점점 Re-creation 시간이 늘어나는 나이입니다. 저도 저만의 목표를 세우고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제가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을 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 동안 Re-creation 시간을 여분의 남는 시간으로 생각해 Rest, 즉 휴식이라고 생각했지만 A 대사와 B 매형은 자신을 재-창조하는 진정한 Re-creation 시간을 만들어 나가고 있었습니다.
첫댓글 재창조하는 시간이라는 뜻깊은 말이 맘에 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