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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새벽이 지나고 중천에 뜬 태양이 이글거리는 해란주의 해변. 철썩! 은빛 모래 위를 쓰다듬 듯 파도가 스쳐가고 나면 어느새 물기는 아지랑이로 화하여 모락모락 피어오르곤 했다. 열기로 발갛게 익어있는 모래사장 곳곳에 수없는 철새들이 모여앉아 있는 모습은 해란주를 철새들의 고향이라 부르는 말을 가히 실감케 하고 있었다. 끼룩! 철새들이 모여있는 모래사장의 중앙에는 유독 수백 마리의 까마귀떼들만 시커멓게 앉아있는 자리가 있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까마귀떼 사이에서 기이한 금빛 광채가 햇살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금빛의 정체는 수백 마리의 까마귀떼 한 가운데 홀로 앉아 있는 한 마리 황금빛 까마귀였다. 기묘한 일이 아닌가? 온통 까맣기만 한 까마귀떼 사이에 황금빛 까마귀가 다 존재하고 있다니. 헌데 그때였다. "오늘로서 꼭 삼십 사 년하고도 일백 십 구 일이 지났군." 그곳에서 가슴뼈를 긁는 듯 사이로운 음성이 흘러 나왔다. 설마 황금빛 까마귀가 인간의 말을 뇌까리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아니었다. 황금빛 까마귀가 앉은 곳은 전신을 모조리 뜨거운 모래 속에 파묻은 채 머리만 내놓고 있는 어떤 사람의 정수리 위였고, 음성은 바로 그 사람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것이었다. "너, 곤오풍우, 네놈 덕분에 나는 내 인생 중 삼십 대에서 육십 대까지의 가장 황금같은 그 세월을 지옥의 나루터 같은 이곳 해란주에서 보냈다. 햇볕에 붉게 달구어진 모래를 잘근잘근 씹는 심정으로." 그의 음성은 마치 까마귀가 울고 있는 것 같았다. "황금의 의복을 입고 진주의 술잔을 마시며 용피(龍皮)와 요에 잠들었던 나였기에, 사무치는 이 한을 잊지 않기 위해서는 스스로 뼈를 깎고 살을 태워야만 했다. 해서 나는 삼십 사 년 일백 팔십 구 일을 하루도 빼놓지 않고 불타는 모래 속에 나를 묻어둔 채 이 모든 고통이 더욱 큰 통한과 분노로 억눌리고 맺혀질 것을 기다려 왔다." 이 사람도 곤오풍우에게 한을 가지고 있었는가? 그렇다. 이 사람의 용모는 분명히 말해주고 있었다. 도자기처럼 창백한 안색, 잠자리의 동공을 연상케 하는 맑고 차가운 잿빛의 두 눈, 헌데 그 두 눈 사이의 미간에는 곤오풍우를 상징하는 푸른 독수리의 문장이 참혹하게 찍혀져 있지 않은가. 그의 얼굴 어디에고 살아 숨쉬는 인간의 감정이라고는 없었다. 마치 사막의 태양 아래 수분을 빼앗긴 나무토막처럼 그 어떤 한의 응어리가 그에게서 모든 감정의 흔적을 앗아가버린 듯했다. 지금 잠자리의 동공과도 같은 그의 두 눈에서는 새파란 살기가 줄기줄기 폭사되고 있었다. "곤오풍우. 너는 저 푸른 바다 건너 중원 대곤륜산맥의 정상, 그 위풍당당한 십팔만사천백와마루의 깊숙한 곳에서 비단금침을 열고 일어나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산책을 즐기고 계시겠지. 그래, 곤오풍우 제발 기다려라. 장백의 얼과 계림의 혼을 받고 태어난 나 회리오조 무의탁은 결코 순순히 죽어가고 있지만은 않는다." 모래 위로 드러난 그의 얼굴이 향하고 있는 곳은 멀리 대곤륜산맥이 뻗어나 있는 서쪽 하늘, 바로 십팔만사천백와마루의 그 웅장한 경관이 자리해 있을 머나먼 서천이었다. "부디 육신 성히 살아있어만 다오. 허면 너는 보게 될 것이다. 나 장백의 살인자가 죽어 가면서 완성시킨 초유의 병장기를. 그리고 알 것이다. 네가 소국이라고 업신여겼던 계림인의 집념을." 한과 복수의 다짐이 뒤섞인 집념의 독백이었다. 헌데 이 사람이 바로 장백의 살인자 회리오조(灰狸烏祖) 무의탁(無義濁)이란 말인가? - 금오성주(金烏城主) 십국사예(十國死銳) 회리오조 무의탁! 이름하여 다국적살수(多國籍殺手)라고 불리는 청탁살인의 제 일인자였다. 항상 일국(一國)과 일국간의 전란과 관련된 청부만을 수탁한다 하여 전란(戰亂)의 살수라고도 불려지는 사상최강의 살수. 그가 살해하는 사람은 왕이나 대장군, 그리고 재상가의 인물들이었고, 또한 단 한 차례의 청부도 실패한 적이 없었기에 그는 더욱 특이하고 무서운 존재였다. 국적은 계림. 살인을 위해 돌아다닌 국가의 수효만도 이미 수십 개국이 넘어 다국적살수, 또는 십국사예라 칭해지며 멀리 동방의 혼, 장백산맥의 한 기슭에 금오성이라는 폐성을 지키며 수천 마리의 까마귀떼들과 함께 거주하여 까마귀성의 성주라 불리우는 살수세계의 신화적 괴객. 모래 위에 얹혀진 목각인형의 얼굴처럼 메마른 인상의 이 사람이 바로 그 장백의 살인자 회리오조 무의탁이었던 것이다. 이때 무의탁의 독백이 뚝 멎으며 그의 입에서는 엉뚱한 말이 튀어 나왔다. "목표는 너의 곁에서 우측으로 세 번째에 앉아 있는 까마귀다. 베어야 할 지점은 머리. 공격하라!" 순간 무의탁의 왼쪽에 있던 한 까마귀의 머리가 돌연 뚝 떨어지며 와삭 부서졌다. 동시에 수백 마리의 까마귀떼들이 비명을 지르며 일제히 허공으로 날아오르는 것이 아닌가. "바보같은 놈! 까마귀 한 마리를 죽이기 위해 수십 마리의 까마귀들을 놀라 달아나게 하다니 빈대를 잡기 위해 초가삼간을 날려 버리는 멍청한 놈!" 무의탁은 흡사 허공을 향해 외치기라도 하듯 싸늘한 음성을 터뜨리고 있었다. "너는 까마귀 한 마리를 죽일 때 두 가지 대과(大過)를 범했다. 첫째 순간적으로 살기를 품음으로써 까마귀들을 경각시켰다는 점! 둘째 너의 동작이 지독히도 느리고 거칠어 까마귀가 비명을 터뜨리는 것을 막지 못했다는 점!" ....... "미련한 놈! 너는 벌써 잊었느냐? 천하의 모든 생명체는 경계의 본능을 가지고 있다. 해서 독사도 땅군을 보면 피하고 맹호도 사냥군을 보면 피하기 마련인 것, 하물며 사람, 그것도 무인이요 초절정고수라 한다면 자신에게 살기를 품은 자에게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 ........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초절정의 고수들이 전혀 살기를 품지 않을 친구나 정인 등의 칼날에 죽어가는 것이다!" ....... "외워 봐라! 살수백율(殺手百律) 제일율(第一律)!"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살수는 절대로 자신이 목표한 인물에게 살기를 품지 않는다!" 무의탁의 곁에서 누군가가 그의 음성을 받는 것이 아닌가? 까마귀떼가 날아가 버린 그곳에는 검은 고양이를 품에 안은 자천릉이 언제부터인가 묵묵히 다가와 서 있었다. 그 처절했던 인육의 요리수업은 모두 끝마친 것일까? 지금 자천릉의 얼굴은 지독히도 무심하여 무표정한 조각상을 보는 것만 같았다. "그렇다. 어떤 자를 죽이고 싶다면 살수는 그 사람을 자신보다 더 사랑해야 한다. 허면 그자는 마음을 놓는다. 그때 그를 죽이는 것이다." 무의탁의 시선이 자천릉이 품 안에 안고 있는 검은 고양이를 향했다. "좋다. 이번에는 네가 안고 있는 고양이를 죽여라. 목표는 목이다." "청아를?" 자천릉의 얼굴에 곤혹스런 표정이 떠올랐다. 모래 위에 얹힌 무의탁의 얼굴에 싸늘한 살기가 피어났다. "재창한다! 고양이를 죽여라. 목표는 목!" 자천릉은 품 속의 검은 고양이를 내려다 보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안돼. 청아를 죽일 수는 없어!" 헌데 그 순간이었다. 검은 고양이가 돌연 자천릉의 손목을 할퀴며 그대로 품을 뛰쳐나가는 것이 아닌가. 무의탁의 차가운 질책이 떨어졌다. "어리석은 놈! 그렇게 입술이 터져라고 이야기했건만." 자천릉의 눈에 당황의 빛이 스쳤다. "봐라! 너는 벌써 청아에게 당했다. 청아는 네가 내말을 듣고 순간적으로 살기를 품은 것을 읽었다. 해서 너를 할퀴고 뛰쳐나간 것이다." 자천릉은 고개를 떨구었다. "마찬가지다. 먼 훗날 네가 강호에 나가서 어떤 인물을 죽이려 할 때 이런 경우가 생겼다면 그 자는 틀림없이 먼저 너를 죽였을 것이다." 그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따라해라! 제 삼십칠율, 적을 죽일 때는 조금의 자비심도 두지 않고 반드시 죽인다!" 자천릉이 따라 외는 음성을 들으며 무의탁은 문득 눈빛을 차갑게 빛냈다. "릉아야. 너는 부디 명심해라. 장래 네가 죽여야 할 곤오풍우라는 자는 결코 한 번 이상의 기회를 주지 않는 완벽한 인물이다. 그 한 번의 기회는 네가 수십 년을 기다려서라도 만들어야 하며 그때는 반드시 죽여야 한다." 자천릉의 짙은 눈썹이 묘하게 찌푸러졌다. "곤오풍우, 도대체 그 사람이 누구이길래 팔일오 할아범하고 까마귀 할아범이 모두들 그렇게...?" "알 필요 없다. 훗날 강호에 나가 중원땅에 발을 들여놓는 즉시로 귀가 따갑도록 듣게 될 테니까." 무의탁은 자천릉의 말을 중간에서 잘라버리더니 일순 대갈을 터뜨렸다. "제 십사율! 따라해라. 살인은 머리가 아니라 본능이 시키는 명령이다!" 자천릉은 반사적으로 그의 말을 복창하였고 잇달아 무의탁의 입에서 살수가 지켜야 할 일백 단계의 계율들이 차례로 쏟아져 나왔다. "제 이십칠율, 아무리 완벽한 무예에도 허점은 있다. 허나 단 한 번에 허점을 찌르지 못하면 자신이 죽는다. 제 오십이율, 병장기를 아껴라. 병장기는 제 이의 생명이다. 제 칠십구율, 죽여야 할 자를 가장 빠르게 죽이는 길은 그 자의 습관을 익히는 것이다. 제 일백율, 살수의 목표는 싸움이 아니라 살인이다!" "살수의 목표는 싸움이 아니라 살인이다!" 무의탁의 사이한 음성은 정신없이 쏟아지고 있었고 자천릉은 무표정한 얼굴로 또박또박 복창하고 있었다. "그 자의 이름은?" 돌연 무의탁의 음성이 전혀 엉뚱한 물음으로 바뀌었다. "곤오풍우." 자천릉은 추호도 망설이지 않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자의 눈은?" "백미, 호안, 노하거나 웃음을 지을 때 항상 눈꼬리가 위로 찢어짐." "그자의 귀는?" "장이(長耳), 불상의 귀를 연상케 하는 인상적인 긴 귀." "그자의 특기는?" "병장기 제작, 자신이 싸울 병장기를 상대에 따라 스스로 만들어 만병제황이라 호칭됨." "그자의 취미는?" "입루원서(入樓願書)에는 독서라 쓰여 있으나 사실은 마작. 허나 그 자는 결코 자기사람이 아닌 사람과 패를 돌리는 일이 없음. 또한 한 달에 한 번 정도 백마성 내의 용안연(龍眼淵)에서 죽은 잉어를 낚시질하기도 함." 무의탁과 자천릉의 끊임없는 일문일답은 바로 단 한 사람의 살인대상을 위해 꾸며진 무서운 살인문답이었다. 헌데 이때 모래사장에서 시퍼런 칼날 두 개가 돌연 자천릉의 머리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튀어 나왔다. "훗!" 자천릉이 반사적으로 몸을 굽혀 칼날을 피하려는 찰나 잇달아 수십 개의 칼날이 솟구치며 자천릉이 피하려는 방위를 남김없이 차단해 버리는 것이 아닌가. "허리! 허리를 이용해라! 몸을 버들가지처럼 유연하게 움직여라!" 무의탁의 입에서 싸늘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다리는 인체의 중심, 다리를 움직이는 것은 곧 죽음을 각오하는 일임을 잊었느냐! 절대로 절대로 다리를 지면에서 떼지마라!" 쐐애애액! 이번에는 검은 빛 작살 하나가 모래 속에서 튀어나오며 칼날의 철창을 뚫고 자천릉의 신형을 꿰뚫어 왔다. 부욱! 검은 작살은 자천릉의 어깨를 뚫고 지나갔고 동시에 자천릉의 몸은 작살의 힘에 휩쓸려 칼날을 넘어뜨리며 모래바닥에 나뒹굴었다. "얼빠진 놈! 암습에는 시간과 장소가 따로 없다고 그렇게 가르쳤건만 벌서 까맣게 잊다니!" 한 소리 싸늘한 호통과 함께 모래 속에서 무의탁의 신형이 솟구치며 쓰러진 자천릉의 몸을 짓밟고 섰다. 피투성이의 자천릉을 짓밟은 채 장승인 듯 우뚝 선 회리오조 무의탁의 모습을 보라. 황야에 떠도는 한 마리 고요한 잿빛 늑대인가? 손발조차 보이지 않는 긴 장포를 걸친 그의 모습은 보통 사람보다 머리 두 개쯤은 더 커 왠지 허술한 느낌이 들게 했고 그 위로 묻어나는 무감정한 냉기는 흡사 거기에 사람 대신 야수의 목각인형이 서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또한 그의 어깨 위엔 예의 황금빛 까마귀가 장식처럼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는데, 지금 그 까마귀의 눈빛보다도 더욱 냉정해 보이는 무의탁의 두 눈은 자천릉을 비웃듯이 내려다 보고 있었다. "정신나간 녀석! 네가 살 수 있는 기회는 이미 지나갔다. 내가 습격자라면 벌써 너의 목을 조이고 있지 가슴만 밟고 있겠느냐!" 헌데 바로 그 때였다. 돌연 자천릉의 좌수가 눈부시게 퉁겨지며 무의탁의 왼쪽 다리를 갈고리처럼 쥐어뜯는 것이 아닌가. 무의탁의 얼굴이 흠칫하는 순간 자천릉의 신형은 번개처럼 무의탁의 발 밑을 벗어났다. 이때 자천릉의 신형이 쏘아져 가고 있는 곳에는 수풀 사이로 사람 하나가 간신히 들어갈 만한 구멍 하나가 시커멓게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래, 그래! 그것이다! 너보다 강한 자는 한 치의 여유를 갖는다. 그 여유는 곧 허점! 허점을 노려 일격을 가하는 것만이 하수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공격이다!" 무의탁은 희미한 미소를 떠올리며 자천릉이 쏘아져 들어간 동굴 속으로 화살처럼 쫓아들어갔다. 헌데 그 순간 동굴 속에서 검은 인영이 튀어나와 무의탁의 몸에 달라붙었다 싶은 순간 민첩한 검은 고양이처럼 다시 동굴 속으로 들어가 버리지 않는가. 주르르! 가슴팍에서 선혈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며 무의탁은 미소를 띈 채 다시 동굴 속으로 신형을 날렸다. "좋다. 아주 좋다! 습격자를 격퇴하는 최선의 방법은 그렇게 먼저 습격자를 공격하는 것이다!" 검은 인영은 바로 자천릉이었던 것이다. 휘익! 몸을 제대로 움직이기조차 힘들만큼 비좁은 동굴에 내려선 무의탁은 캄캄한 어둠 속을 재빠르게 훑어보았다. "숨어라! 숨을 죽이고 어둠이라는 이 환경과 동굴의 지형지물을 활용해 최대한 너 자신을 은폐해라!" 냉갈을 터뜨리던 무의탁은 돌연 어느 한 쪽을 향해 새파란 칼날을 쏘아냈다. "바보같은 놈! 체취가 날아왔다. 동굴 천정에 붙어있는 박쥐도 냄새를 숨길 줄은 알거늘 체취조차 지우지 못하다니!" 그 순간 어둠 속에서 자천릉의 신형이 칼날을 피해 튀어나오고 무의탁의 신형은 번개같이 그 뒤를 쫓았다. "강호의 싸움이 항상 들판에서 벌어지는 것은 아니다. 집 안의 실내, 혹은 좁은 공간에서의 싸움도 비일비재하다. 그런 곳에서의 싸움도 병장기를 사용할 수 있다면 너에게 그만큼 유리한 것이다." 두 사람의 신형은 어둠 속에서 귀불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이 동굴 속에서 검이나 창, 칼 등을 사용할 수는 없다. 암기! 암기를 써라!" 자천릉의 몸이 다시 반대편으로 퉁겨지면서 그의 짧은 외침이 터졌다. "장백청성수리표(長白靑星袖裏 )!" 슛! 어둠 속에서 푸른 별떨기가 비산하듯 수리검들이 무의탁에게 퍼부어졌다. "바보같은 놈! 보호색을 잊었느냐? 어둠 속에서 푸른 빛이 나는 장백청성수리표를 쓰다니!" 무의탁의 신형이 비틀 좌우로 흔들리며 양손을 부챗살처럼 펼쳐 수리검들을 잡아챘다. "나뭇잎 속에 숨어 있는 청개구리도 적에게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푸른 빛을 띤다. 하물며 무인이 어둠 속에서 빛이 나는 암기를 쓰는 것은 적에게 자신의 위치를 알려주는 자살행위인 것이다." 무의탁의 칼날같은 음성에 자천릉의 신형이 움찔하였다. 무의탁의 음성이 재차 급박하게 터져나왔다. "전방에 적이 있다! 목표는 가슴! 정확히 양단하라!" 돌연 동굴 안이 대낮처럼 밝아지며 정체 모를 검은 그림자 하나가 자천릉의 코 앞까지 화살처럼 쏘아들어 오고 있었다. '응? 잠자리 할아범의 말대로다! 이 자는 한 번도 해란주 안에서 본 적이 없는 인물, 죽여야 한다!' 자천릉의 뇌리로 섬전같은 판단이 스쳐갔다 싶은 순간 홍앵십이난도 중 하나가 무지개를 그리며 검은 그림자의 가슴을 베어갔다. 헌데 검은 그림자가 흐느적거리는 것 같더니 가볍게 자천릉의 칼을 피해 버리는 것이 아닌가? 얼음이 깨지듯 무의탁의 음성이 카랑하게 터져 나왔다. "이제 아예 백치가 됐구나! 습격자들이 살기띤 너의 눈과 칼을 보았는데 목을 늘어뜨리고 있을 줄 알았느냐? 어서 살기를 지우고 살인백서(殺人白書) 칠구사사조(七九四四條)를 펼쳐라!" "치잇! 알고 있단 말야!" 자천릉의 신형이 용수철 튀듯이 지면을 박참과 동시에 무지개빛 예기가 빠르게 직선을 그으며 검은 그림자의 허리춤을 베어갔다. 그순간 돌연 검은 그림자가 허리를 쭉 펴며 노갈을 터뜨리는 것이 아닌가. "멍청한 녀석! 목표는 분명 가슴이라 했거늘 어찌 허리를 베고 있느냐?" "쳇, 릉아가 베려고 하는데 흑의괴영이 잠자리 할아범으로 바뀌었잖아!" 그렇다. 허리를 움켜쥔 채 우뚝 선 검은 그림자는 무의탁의 모습으로 돌변하여 있었다. 검은 그림자는 무의탁이 위장을 한 모습이었단 말인가? "못난 놈! 결정적인 순간에 칼끝의 힘을 빼다니, 암습자가 나를 가장하고 있었다면 너는 지금 또 한 번 죽었다!" 자천릉의 표정이 흠칫 굳었다. "나는 너에게 가슴을 베라고 지시했지만 너는 허리를 베었다. 이는 네가 도살장에서 소의 급소만을 정확히 때려 죽이는 일개 도부보다도 못하다는 것을 뜻한다!" 그의 질책은 냉혹하였다. "살인 그 자체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살인은 그 누구라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 살 먹은 아기에서 부녀자, 그리고 노인까지! 허나 이 살인에서 중요한 것은 자신이 목표한 지점을 얼마나 정확히 맞추었나 하는 것이다. 목을 목표로 했을 때 상대방이 미간을 맞고 죽었다면 그 살인은 살수의 것이라 할 수 없다!" 피가 배어나오는 허리를 쥔 채 살인강의를 진행하는 무의탁. 헌데 이때 자천릉의 뇌리에는 의혹이 빠르게 스쳐가고 있었다. '아니야! 분명 검은 그림자는 있었어! 그 자의 호흡수는 생전 처음 맡아보는 체취였어!' 자천릉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알 수 없는 일이다. 잠자리할아범으로 돌변하는 바람에 힘을 누그러 뜨리기는 했지만, 나는 분명 정확히 가슴을 베었는데.' 분명 검은 그림자는 나타났고 자천릉은 가슴을 베었다. 헌데 기이하지 않은가? 흑영은 사라지고 대신 칼을 허리에 맞은 채 나타난 것은 무의탁이었으니. 이때 무의탁이 서 있는 등 뒤로 차가운 바닷바람이 불어 들었다. 그와 함께 잔잔하게 밀려드는 것은 바다 특유의 짠내음과 은은한 파도의 뇌성이었다. '벌써 동굴 끝까지 왔구나!' 자천릉은 미간을 찌푸리며 무의탁이 서 있는 뒷편에 시선을 던졌다. 어느새 동굴은 곧장 깎아지른 천인단애로 이어지고 있었다. 헌데 그 아득한 벼랑 아래 무지개 빛을 발하는 새떼들이 노니는 기이한 둔턱이 보이지 않는가. 새똥이 쌓이기라도 한 것일까? 새들이 노니는 자리에는 우유빛에 가까운 신비한 흰빛 물결이 늪을 이루고 다시 그 위에 흰빛의 동산을 쌓고 있었다. 자천릉이 놀람에 젖어 있을 때였다. "가라! 벌이다!" 무의탁이 돌연 무자비한 일 장을 자천릉에게 퍼부었다. 너무도 급작스런 일이었기에 자천릉은 미처 방어나 동작을 갖출 겨를도 없이 벽면에 부딪치며 벼랑으로 떨어져 내렸다. 쿵! 새들이 어지러이 날아 오르며 자천릉은 흰빛의 언덕에 처박혔다. 거의 동시에 무의탁의 신형도 까마귀가 시체를 잡아채는 듯한 형상으로 벼랑 아래로 날아내려 흰빛의 언덕 언저리에 내려서고 있었다. 헌데 그의 두 발이 지면에 닿는 순간,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무의탁의 어깨에서 가슴을 피로 물들인 한 난장이가 굴러나오는 것이 아닌가. "형님! 릉아는 정확히 소제의 가슴을 베었습니다!" "알고 있다. 네 상처는 어떠냐?" 무의탁의 질문이 떨어지는 찰나, 툭! 하면서 무의탁의 나머지 동체도 다시 두 명의 난장이로 분리되는 것이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살수세계의 신화적 인물로 현존하는 모든 죽음의 이름에 우선한다는 잿빛 지옥의 아들인 무의탁이 바로 세 사람의 난장이의 합일체였을 줄이야. |
첫댓글 즐독하였습니다
잘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s난장이
즐감
감사^*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즐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