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1965년 경제개발을 위한 자금을 얻어내기 위해 한일 조약이 체결됨으로 사실상 철폐되고 마는데 그때만 해도 한국은 어민들의 영세성 때문에 근해어로가 이루어지는 반면 원양어업이 발달 된 일본이 한국근해에 와서 조업을 하는 바람에 양국간에 마찰이 자주 일었다.
아는 분 이야기로 한국동해에서 낚시를 하다가 귀한 적돔(아까다이; snapper)이 물렸다고 생각한 후 저 멀리 일본 배에다 손짓을 하면 평생 붉은 도미를 한 마리도 잡아보지 못하는 그들은 돈을 준 후 륄을 감아 고기를 끌어 올리는 영광을 즐긴다고 경험자에게 들었다.
지구의 ⅔가 바다이고 그중에도 지구전체의 물중 97%를 바닷물이 차지하는데 바다가 미네랄 식품과 단백질 식품을 재공하며, 태양열을 흡수하여 지구의 온도를 조절하고 지상의 폐기물을 흡수하여 환경을 지키며 항로로 사용하니 모든 국가의 관심사인 미래의 영토가 되어 1982년에 수역을 처음 선포하게 된다.
영해는 연안으로부터 12해리가 되지만 1994년 신해양법이 통과되어 직선거리인 200해리(370km)의 EEZ(Exclusive Economic Zone; 배타적 경제 수역)가 발표되는데(사실상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400해리가 되는 곳이 없어 200해리는 중복됨)주권적 권리를 가지게 되며 이 지역은 외국의 선박이나 비행기는 지나갈 수 있지만 어로나 경제적 이용은 금지된단다.
1996년 5월 한일어업협정 때 일본은 ‘울릉도의 동쪽’ 기점을 주장했고 한국은 ‘독도의 동쪽’ 기점을 고집하다가 EEZ협상이 장기화 될 전망이니 우선 어로는 수역과 관계가 없다고 일본이 우겨 한국이 양보를 하여 울릉도를 기점으로 정하는 바람에 독도가 중간에 들어가는 한일공동관리수역에 포함시키게 된다.
우리 집에 있는 밀리타리 밸런스(Military Balance, 96/97)연감에 보면 일본의 해군함정은 29만 톤이고 한국은 4.9만 톤 이니 일본해군력이 약 6배나 더 강한 셈이다.
한국이 외환위기로 1997년 12월3일 IMF관리체제에 들어가자
“그릇 깨진데 발 다친다.”
는 격으로 일본정부는 이 시기를 악용하여 1998년 1월23일 한·일 어업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했다.
1999년 신한일 어업협정은 33해리를 인정하여 한국은 울릉도를 기점으로, 일본은 오키도를 기점으로 잡고 있으니 독도가 포함된 중간해역이 공동관리 하에 들어가 공해(公海)성격을 띠는 바람에 꽁치어장을 소련과 일본에게 잃었다는데 앞으로 있을 수산자원에 암운(暗雲)이 깃들 우려를 자아내기도 하며 일본은 경제를 생각하지만 한국은 어로에 신경을 더 쓰는 셈이다.
1998년 중국도 직선기선을 200해리 경제수역을 선포했다고 하는데 이렇게 되면 ‘한국은 양국의 경제수역에 꼼짝없이 갇히는 꼴이 된다.’는 말을 인용할 수가 있으니 어선들은 입어료를 내고 남의나라 경제 수역에서 고기를 잡아야 된다는 이야기가 된다.
해안선이 없는 볼리비아 몽골 오스트리아 등은 바다가 전연 없는데 한국은 국경의 74.6%를 차지 하지만 남의 수역을 통해서 태평양으로 나갈 수 있다는 말이 되며 지금은 동해에서 어업협상에 따라 입어료를 내고 조업할 수 있으나 일본은 앞으로 외국어선의 입어를 금지할 계획이라 한다.
그러나 북한은 앞으로 5년 동안 동해에서 중국과 공동어로(共同漁撈) 협정을 맺어 싹쓸이 오징어잡이를 하니 한국은 그동안10월까지 대략 9,450t이던 것이 4,605t로 줄었단다.
한국일보에 보면 수상연구소의 통계를 인용 인천꽃게는 2002년에 비해 13.7%에 불과하다는데 이는 북방한계선을 오르내리며 꽃게를 거둬들이는 중국 어선들의 싹쓸이 조업과 일부어민들이 어린 꽃게잡기 때문이란다.
독도도 지금은 천연기념물로 돼 설악산 국립공원의 핵심, 비무장지대, 향로봉, 고진동 계곡들과 같이 사람의 출입이 한시적으로 통제 된다고 한다.
땅이 부족한 일본은 그전에는 미국에 부동산을 많이 소유 한 적이 있지만 대게 부도를 내었고 얼마 전에도 그들 소유의 골프장 8개가 매물로 나왔다.
지금은 브라질 쪽으로 눈을 돌려 그곳의 땅을 매입하여 일본영토를 넓히고 있는 셈인데 그곳에 살다가 미국으로 귀화한 분의 이야기로는 땅이 너무 넓어서 땅주인은 비행기로 돌며 매매할 땅의 경계선이 여기쯤 될 것 이라고 말할 정도란다.
공군기가 높이 뜨면 동해와 인천이 한꺼번에 내려다보인다는 좁은 국토에서 그나마 대양을 소유하지 못한 서러움도 큰데 양쪽의 두 나라 사이에 끼어 있으니 3면이 바다라고 이름은 좋지만 수산자원은 적을 수밖에 없다.
일본의 교과서 왜곡 사건에 항의를 하면 그들은
“당신들의 단군신화부터 뜯어고친 후 권리를 주장하라!”
했다니 그 말이 일고(一考)의 가치가 있는지에 대해서 재고(再考)를 해 볼만하다.
고조선(古朝鮮)이라 한 것은 이씨조선과 구별을 하기 위함이고 고구려(高句麗)는 고구려(高九藜,하늘나라의 九天에서 내려온 무리)에서 변천된 것 이라는 설도 있는데 구천[九天, 창천(蒼天; 동쪽),변천(變天; 동북쪽),현천(玄天; 북쪽)….등)]은 팔방에 중간인 균천(鈞天)을 더한 것이고 남쪽을 염천(炎天)이라 하여 여름에 ‘오유월 염천’ 이라고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이다.
‘9’ 라는 수는 많음을 뜻하는데
구절양장(九折羊腸:길이 매우 꼬불꼬불하고 험함),
구천(九泉:땅속 밑바닥:저승),
구곡간장(九曲肝腸:굽이굽이 서린 창자,깊은 마음속이나 시름이 쌓인 마음속에 비유),
구우일모(九牛一毛)등으로 표현한다.
내가배운 역사 교과서의 첫장에 환인의 아들 환웅천황과 쑥과 마늘을 먹고 백일동안 햇빛을 보지 않은 웅녀(곰)사이에서 단군왕검(王이라 칭할 수가 없어서 王儉이됨. 儉, 검소할검)이 태백산(지금의 妙香山=향기 나는 산)의 단목하(檀木下; 박달나무 아래)에서 도읍을 평양성으로 정하고 개국을 했다고 하여 우리민족은 단군의 자손 이라 하니 이것은 어디까지나 설화(說話)로 신비스럽게 미화하여 통치를 쉽게 하기 위한 것 같다.
역사책에는 우랄알타이 산맥의 몽고족(Mongolian)으로서 해가 뜨는 동쪽으로 대이동을 하여 한반도에 퍼져서 살았다고 하니 후자가 정설인 것 같다.
일본이 미개국인 시절에는 나라이름도 해가 가장 먼저 뜨는 신선한 아침의 나라라는 이미지를 굳혀 조선(朝鮮:morning calm)이라고 이름 지은 것 같다.
몽고족(에스키모 포함)의 특징은 손가락이 짧은 것, 얼굴이 둥근 것, 코가 낮은 것 등은 모두 혹한에서 동상 방지를 위함이라는 설이 있다.
석기시대를 구석기(打製石器, 50만년 전)시대와 신석기시대(磨製石器; Neolitic age, BC 6000, SW Asia)시대로 구분 하지만 선사시대(先史時代, 청동기시대 포함)라 부르는데 부산 동삼동의 사슴무늬 토기나 서울 암사동의 빗살무늬토기(기원전 3000년)를 본다면 단군조선이전에 이미 한반도에는 농경과 목축을 하는 씨족사회가 있었던 것이 증명되고 최근 상주에서 도로공사 중에 발견한 사료의 석기는 어쩌면 20만 년 전에 사용한 흔적이 있다고 TV에서 본적이 있다.
내가 오늘 발견한것은 동검들은 거푸집에다가 쇳물을 녹여서 부으면 양날칼이 되는데 이 출토가 되는곳은 강원도의 산악지방이 아니고 서부지방의 농경지가 발달해서 사람들이 많이사는 곳이된다.
토기를 사용하면 무거워 옮기지를 못하니 유목이 아니고 농경시대로 보는 것이 정설일 것이다.
한국 국립중앙 박물관에서 본 머리빗 모양의 빗살무늬토기들은 대게 밑이 좁고 위가 넓은 원뿔을 거꾸로 세워 놓은 것 같아서 곡식을 담으려면 모래위에 세워야 될 것 같은데 만드는 과정에서 나무로 만든 연모로 톡톡 친 것 같은 무늬의 연속인데 내 생각에 원뿔모양의 나무를 만들고 그 주위를 진흙으로 바른 후 무늬를 새길 겸 톡톡 친 후 그늘에서 말린 다음 나무를 빼내면 토기가 되는 것은 아닐까?
지금은 회전판위에 갠 진흙을 올려놓고 손만 대면 대칭모양의 진원의 도기가 만들어 지지만 빗살무늬토기들은 모두 겉면이 약간 울퉁불퉁하니 손으로 발라서 만든 후 화력이 약한 장작불에 올려놓고 구운 것 같다(견고성이 없는 것으로 추정 할 때....).
한(漢)의 사마천이 감옥에서 저술한 사마천사기(司馬遷史記, BC. 80년)의 조선열전에 그냥 ‘조선’이라고 기술한 것은 고조선, 기자조선(箕子東來說), 위만조선(손자대에 망함), 한사군 등을 어느 조선인지도 불분명하며 국립 중앙박물관 소장의 남한에서 발견된 5개의 출토된 비파형 청동검도 어떤 이는 아마도 이민을 온 자들이 가지고 왔을 수도 있다고 이견을 내어놓아 여러 사학자들 간에 여러 가지 새로운 분분한 해석과 견해를 내놓는단다.
고조선이 생길 때가 기원전(BC) 2,333년이라고 볼 때에 건국의 연도가 중국에서 선정을 베푼 요(堯)임금 때에 해당되며 어떤 고증(考證)을 거쳤는지는 모르지만 훨씬 이후에 생긴 신라를 BC 57년, (백제,BC 18년)으로 추정하여 볼 때 김부식의 삼국사기(正史)와 중(僧)일연의 삼국유사(野史)에 의하여 조선의 건국연대를 재조명 해본다면 대게 나라의 수명이 몇 백 년에 그치지만 고조선이 한 왕조로서 존속했던 기간은 2천년 이상이 되어 신라의 건국 후부터 현재에 이르는 2060년의 기간보다 더 길기 때문에 매우 낮게 인식이 될 수밖에 없다.
갑골문이 출토되지 않았으며 역사고증의 하나인 1287년 고려 충렬왕 때 이승휴가 쓴 7언시와 5언시의 제왕운기(帝王韻紀)에서도 어떤 이들은 중국을 의식하여 조금 미화하지 않았나하는 의구심을 자아낸단다.
**시간적으로 차이가 나는 글입니다**